스토리텔링의 비밀 - 아리스토텔레스와 영화
마이클 티어노 지음, 김윤철 옮김 / 아우라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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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로 위의 은행잎이 지나가는 자동차 바퀴에 맞춰 팔랑팔랑 춤을 춘다. 매월 말 고지서를 들고 나타나는 우체부처럼 겸허를 알려주는 계절이 우리를 찾아왔다. 이때 쯤 되면 돌돌 말아 봉인해 놓은 '선한 마음' 이란 것이 살짝 일어난다. 십자가 위에서 회개한 죄수들의 마음도 이와 같았을 것이다. 끝이 좋으면 '천국이 그대들의 것' 이므로.

그래서 나도 한껏 큰 마음을 냈다. 그 동안 고마운 분들에게 영화에 대한 나의 엄청난 비밀을 슬며시 알려주려고 한다. 영화가 100배쯤 재미있어지는 비밀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 책 <스토리텔링의 비밀>이기도 하다.먼저 고사리 손으로 승리의 V자를 만들어 보라.

그렇다. 바로 그렇게. 비밀은 두 가지다. (기호 2번이 아니라)

첫 번째 비밀은 이미 말했다.언제 말했냐구? 분명히 이 글에서 이미 말했다. 당신이 부주의해서 흘린 과자를 수퍼주인에게 다시 달라고 요구하지 말라. 첫 번째 비밀은 대문에 써있다. 즉 내가-우리가-영화관이나 TV앞에 앉아 있을 때 아리스토텔레스가 옆에 있었다는 것이다. 아카데미아에 수강 등록한 것도 아닌데 그게 그렇다. <스토리텔링의 비밀>의 저자 마이클 티아노의 첫번째 비밀도 그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두 번 째 비밀이 궁금해 질 것이다. 청룡영화상의 김혜수처럼 야한 드레스를 입고 살짝 뜸을 들여줘야 제격이다. 개봉박두!! 

모든 비밀은 그것이 비밀이라는 언어의 집 안으로 들어갈 때 이미 비밀이 아니다.

<스토리텔링의 비밀>의 두 번째 비밀은  '이미 비밀이 아닌 것을 비밀이라고 말함으로써 비밀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이들에게 그 비밀이 무언지 알고 싶게 만들고 마지막에 가서 그 비밀은 사실 누구나가 알고 있는 비밀이 아닌 비밀'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한 문장에 '비밀을 9번을 썻다. 이 문장의 기획의도는 좋은 문장이 아니라,'비밀'을 몇 번 써서 한 문장을 만들수 있나 연습이었다.가독성 최악이지만 해보면 재미있다.)

난독증때문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분을 위해 정리한다. <스토리텔링의 비밀>에서 말하는 '비밀'은 이미 '비밀'이 아니라는 말이다.즉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체험하고 있는 것들,즉 일반화 시키지 못했을 뿐-우리의 몸과 정서와 감정들이 움직이는 방식들에 대해-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정리하자면 그리스 시대부터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영화나 TV를 보아왔다. 그리고 그 때나 지금이나 어떤 원형적인 장치들로 부터 유사한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

진부하단 말인가? . 아니다. 이건 오히려 새롭다는 말이다. 이건 마치 한국인이 한국어 문법책을 볼 때 느껴지는 신선함과 비슷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자동적인 반응으로 나오는 것을 문법책은 일반화된 규칙으로 설명한다.우리에게는 '그냥 조상때 부터 그래서 그런다' 가 제일 쉬운데 말이다. 이 책도 결국 그런 것이다.

"나는 당신들의 정서가 무엇을 원하는지,그리고 무엇에 반응하는지 알고 있다. 지난 여름부터.."

마이클 티어노의 <스토리텔링의 비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원칙들을 가지고 잘 만들어진 '헐리우드'영화의 시나리오를 분석하는 글이다. 또는 반대로 잘 만들어진 시나리오를 쓰겠다는 이들을 위한 책이기도하다.하지만 굳이 시나리오를 쓰겠다는 욕심이 없어도 상당히 우리 몸에 붙어 있는 -스토리라인과 관련된-미디어적인 수용습관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가져 보려는 이에게는 좋은 안내서이다. 즉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즐거움이 어떤 구조 속에서 만들어진 것인지를 알아볼 수 있다는 말이다. 작가가 되려는 이들 보다는 오히려 미디어 수용자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 오히려 이 책은 미디어 교육 교재로 이용하는 것은 어떨까 생각한다.

 우리는 왜 <베토벤 바이러스>에 열광하는가? 우리는 왜 뉴스를 보기전에 소녀시대의 윤아가 나오는 <너는 내 운명>을 빠짐없이 보는가? 우리는 왜 헐리우드의 영화를 보고 나면 산뜻한데, 이름도 어려운 동유럽이나 아랍감독이 만든 영화를 보면 화장실에 두고 온 휴지가 생각이 나는가? <스토리텔링의 비밀>은 우리가 늘상 접하는 드라마나 영화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빠뜨리는지, 그리고 관객들에게 어떤 효과를 주는지를 말하는 책이다. 그리고 사실 이것은 수 천년전 제우스의 자손 중에 하나인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저작권료도 소멸된 고전에 기대어서 밥상 하나 차리는 것이다.

마이클 티아노가 말하는 좋은 스토리를 쓰는 요령은-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관객들이 쏙 빠져들게 만드는 스토리이다- 몇 줄로 정리된다. 특히 저자는 풀롯의 중요성에 대해 누차 강조한다. 즉 구조의 중요성이다. 이건 비단 시나라오 뿐 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글쓰기에서도 강조되어야하는 점이다.(반성 해야겠다. 막쓰는 경향이 있어서리...) 자...저자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얻은 금과옥조들이다.

행동으로 부터 시작해라.(액션 아이디어라고 한다.)/ 이야기의 무게 중심을 만들기 위해 비극적 행위를 사용하라./ 모든 극적 행동을 개연적이면서도 필연적인 인과관계로 연결하라./ 이야기가 실제있었던 것 처럼 느껴지게 하라. /운명의 반전과 발견의 순간을 구축하는 방식을 찾아라./ 가슴 아픈 도덕적 갈등을 심어라./ 시나리오 안에 당신의 도덕적 세계를 펼치고 선과 악을 중재하는 인물을 창조하라.그리고 당신의 주인공이 세상의 절대선을 대변하게 하라.

잘만들어진 헐리우드 영화의 스토리는 대개 이런 규칙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마이클 티아노는 이러한 주제들을 설명하기 위해 <록키>,<아메리칸 뷰티>,<글라디에이터>,<대부>,<블레어위치>,<엔젤하트>,<타이타닉> 들의 영화를 예로 든다. (나는 <엔젤하트>를 무척 좋아했다.미키루크는 그 때가 전성기였는데..로버트 드니로가 사탄으로 나온다.)

<시학> 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으로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낸다.(6장) 연민이란 누군가 부당하게 불행해지는 것을 볼 때 생기며, 공포는 우리도 그런 불행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을 느낄 때 생기기 때문이다.(13장)

티아노는 영화 <타이타닉>의 마지막 장면을 최고의 카타르시스장면으로 든다. 사랑하는 연인을 살리기 위해 디카프리오는 운명의 극적 반전 속에 자신을 맡긴다. 차가운 바닷물에서 꽁꽁 얼어죽는길을 선택한거다.육체적,정신적 고통이 극대화된다. 관객들은 스크린에 홀딱 빠져들고 그들이 마지막 대사를 힘겹게 한마디씩 뱉을때 마다 객석은 훌쩍이는 거다. 하지만 한 가지 카타르시스가 더 있다. 나이든 윈슬렛이 죽으며 디카프리오를 그리워하는 장면이다. 만약 윈슬렛이 그렇지 않고 혼자 온갖 남성편력을 과시하며 성이 다른 수많은 아이들의 축복 속에서 수 십억 달러의 유언장의 내용을 읽다가 죽었으면 어땟을까?  상식이 있는 인간이라면 절대 그렇게 만들지 못할 것이다. 관객들은 윈슬렛이 곱게 늙고 그 거대한 사랑을 간직하며 다시 디카프리오를 천국에서 만나주길 바란다. 영화꾼들은 그걸 그대로 보여준다.

사실 이 지점은 영화 미학의 심각한 주제와 관련이 있다. 마이클 티아노는 당연히 헐리우드의 주류적인 스토리 구조를 최고로 치고 있다.(물론 이것이 보편적이고 가장 널리 확립된 구조이다.)하지만 많은 예술가들은 이미 오래전 부터 다른 길을 걷는다. "왜 영화가 관객들을 빠뜨려야 하지?" "왜 카타르시스라는 이름으로 관객들의 취향에 복종해야 하지?" " 감정의 배출을 하고 극장을 나가면 그것으로 영화의 목적은 끝인가?" ....결국 질문은 "그렇다면 영화란 무엇이지?" 에 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마이클 티아노가 그런 질문까지 하지는 않는다. 그는 헐리우드 작가이다. 비록 헐리우드 밥을 먹고 있지만 그런 질문들에 대해 모를리는 없다.단지 존재의 양식에 충실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헐리우드 오리엔티드된 방식으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칙들의 반근거가 될 만한 영화는 수두록하다. 저자 역시 이 책을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탁해서 쓰면서도 머릿 속에 반대 논리로 제시할 만한 영화가 툭툭 끼어들었다고 말한다. 헐리우드 영화 역시 단순히 아리스토텔레스나 존 포드의 재탕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시작으로서의 원칙'에 대해 집중한 것이다. 몇 몇 천재들을 빼놓고는 뛰기 위해서 걷는 방법부터 배워야하기 때문에.

누구나 이야기꾼이 될 수는 없다. 또 헐리우드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가 될 수도 없다. 대신 우리는 <스토리텔링의 비밀>을 보면서 우리가 매일 매일 보는 드라마나 영화의 스토리 라인에 대해 한 번 더 분석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우리가 어떤 영화를 보고 감상문을 쓴다거나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때 그 스토리라인이 담고 있는 함의들과 그 작용점들에 대해 조금은 더 알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주말에 본 영화들을 티아노가 제시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공정라인에 따라 배열해 보자. 물론 그런 배열은 훈련을 위한 한 과정일 뿐이다. 결국 우리는 그 조각들을 다시 모아서 총체적인 완성품으로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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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8-11-29 17:59   좋아요 0 | URL
내년 1월에 이 책에 대해서 강의를 할 예정인데, 유익하게 참조하겠습니다.^^

드팀전 2008-11-29 23:28   좋아요 0 | URL
^^ 저도 가서 듣고 싶군요. 최근 영화나 한국영화들을 예로 들면서 하면 학생들에게 더 효과적일 것 같습니다.
 
글렌 굴드, 나는 결코 괴짜가 아니다 예술 거장 시리즈 1
브뤼노 몽생종 지음, 임동현 엮음 / 모노폴리(monopoly)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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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글렌 굴드의 새 음반이 출시되었다. 죽은이의 개인 창고에서 발견된 새로운 음원이었을까? 아니다. 그것은 '재탕'이었다. 새 음반은 55년 글렌 굴드의 첫 레코딩 <골드베르크 변주곡>를 리메이크 한 것이다. 통상적인 구분을 위해서 '젠프 음반' 이라고 한다.  '젠프'는 리메이크에 사용된 컴퓨터 시스템의이름이다. 이 음반은 55년 모노로 녹음된 음원을 컴퓨터로 데이팅화한 것이다. 굴드의 타건, 패달링, 음량 정도를 그대로 수치화하여 '야마하' 피아노로 다시 녹음한 것이다. (55년 녹음은 애칭이 '치클링'이었던 스테인웨이 피아노 아니었나 싶은데...'치클링'은 굴드 생전에 사망 신고가 내려졌고, 이후 굴드가 찾은 것이 '야마하' 피아노로 알고 있다. 정확히 잘 모르겠다) '음악 재현의 수량화'라는 측면에서는 거의 혁신적 방식이다. 이 작업은 모노를 스트레오로 듣는다는 꿈을 이룬 것 이외에 다양한 미학적 질문을 던진다.

"과연 그것은 글렌 굴드의 음악인가?" 에는 전문가들과 음악팬들 사이에 이견이 많다. 미학관 전체를 반영해서 답해야 하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질문 "글렌 굴드 라면 자신의 과거 녹음이 이렇게 복제되어 재생산되는 것에 동의했을 것인가?" 에는 비교적 쉽게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결코 괴짜가 아니다>에 나오는 굴드의 인터뷰를 보자.

"기대한 만큼의 결과를 얻을 수만 있다면, 2백군데를 연결해서 하나의 곡을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그것이 부적합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계적인 수단으로 만들어진 연주를 속임수라고 이야기하는 사고방식에는 짜증이 납니다. 환상이나 조작을 최대한 이용해서 이상적인 연주를 만들어냈다면, 그 일을 멋지게 해낸 사람에게 경의를 표해야 할 것입니다."

실황 공연을 싫어한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기벽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음악 미학과 관련된 부분을 제외하고 부차적인 부분에서는 언론들의 입방아가 만든 스캔들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 책 초반부에는 굴드가 그의 괴이한 행동들에 대한 오해를 해명하는 글들이 있다. 예를 들어 '한 여름에도 코트를 입고 다닌다.' '썩어빠진 의자를 신주단지처럼 모신다.' 등등..이런 가십들을 제외하고도 글렌 굴드가 좀 특별한 사람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는 어린 시절 부터 30대에 라이브 무대에서 은퇴하겠다고 말했고, 실제로 32살에 공연장 밖으로 몸을 빼냈다. 사실 비범한 30대피아니스트라면 국제적 인지도를 높여 나가며 세계를 무대를 누비는 것이 통상적이다. 그런데 그런 나이에 은퇴를 선언한 것이다.이것은 '무대 공포증' 때문이 아니다. 여기에는 음악 예술에 대한 글렌 굴드의 '미학'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대개 클래식 연주가들은 '실황 연주'를 '레코딩'보다 '진정성' 있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음악이라는 시간적 예술이 갖는 '1회적 재현'에 대해 아우라를 부여하는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 음악가들은 '실황/스튜디오'를 병행하면서 부와 명성을 쌓는다. 간혹 나타나는 극단적인 '레코팅 혐오가'-예를 들어 세르지우 첼리비다케 같은-역시 '레코드형 인간' 글렌 굴드 만큼이나 희귀하다.

굴드가 음악을 대하는 방식은 다분히 북구의 수도승 같다. 그는 음악팬들을 위해서도, 무대 앞의 관객을 위해서도 음악을 하지 않는다. 그에게 음악은  그를 통해 져핸되어야 하는 신의 형상과도 같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면의 고요'가 필요하다. 청중의 피드백이라던가, 흥분과 광기 같은 것은 '음악의 음악' 을 만들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음악과 만나는 것이지, 사람들 앞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청중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고, 나는 실제로는 나 자신을 위해서 연주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지요...."

그리고 기술의 발전(예를 들자면 '매체 저장기술'이나 '매스 미디어'의 도입같은) 불러온 예술사회학적 변화에 대한 그의 신념을 말한다.

" 음악이란 개인적 형태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음악이 집단요법으로서, 또 그것과는 다른 어떤 공동체험으로 이용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음악을 듣는 사람들을-그리고 연주자까지도- 명상 상태로 이끌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주위에 앉은 2999명의 사람과 함께 이런 상샅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글렌 굴드는 결코 피아니스트로만 머물 수 없는 인간이었다. 대개의 위대한 연주자들은 '악기의 사제'가 된다. 면벽수도하는 심성이 있지 않으면 거장이 되기 힘들다고도 한다.(물론 간혹 날라리 천재들도 나온다.) 글렌 굴드 역시 이런 수도회 소속이다. 하지만 그는 매일 매일 예배하고 묵상하는 전형적인 수도승이 아니다. 예를 들어 그는 레코딩 전에 48시간 동안 피아노를 손에 대지도 않는다고 한다. 또 피아노에 멀어지면 멀어질 수록 더 좋은 음악을 하게 된다고까지 말한다. 그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의 주인공 윌리엄처럼 이것 저것 들쑤시고 다녀야하는 수도승이다. 글렌 굴드가 라디오 다큐멘터리나 글쓰기,작곡등에 더 깊은 관심을 갖은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그렇지만 그가 가장 잘한 것은 '피아니스트'였다.)  글렌 굴드 역시 피아노에 자기를 가두어 놓기에는 몸이 근질 근질 거렸을 게다. 간혹 TV에 나와서 웃음을 주시는 임동창 선생처럼 말이다. 임동창은 자신이 뭐하는 사람인가 물으면 "그냥 임동창이오"라고 답한다고 한다. (요즘은 빡빡머리 그보다 그의 아내가 더 유명해진 듯 하다)

글렌 굴드는 피아니스트이면서 피아노적인 음악을 싫어했다. 여기서 피아니노적인 음악이란 것은 -그는 낭만주의 음악을 주로 말하는데-'화성적'인 음악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굴드 스스로 이에 대칭적인 의미로 '대위법적 음악가'라고 칭했으니 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자면 그가  피아노를 위한 작곡가다로 할만한 '쇼팽, 슈만, 리스트" 를 싫어했던 것은 논리적 귀결상 당연해 보인다. 그는 이들 음악에 별다른 매력을 못느끼고 설령 녹음을 하더라도 통념을 벗어나는 해석을 보여주었다.(그의 쇼팽은 들어 본 적도 없다.) 물론 후기 낭만주의시대에 브루크너나 말러 같은 이들이 폴리포니에 대한 가능성을 확장한다. 하지만 그 시대는 '오케스트라의 시대'였다. 그 위대한 작곡가들은 피아노를 위한 곡에 그다지 애정을 쏟지 않았다. 결국 글렌 굴드에게 피아노라는 악기는 그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면서도 자신이 넘어서야 하는 도구였다.  그는 평생에 걸쳐서 피아노와의 '거리 두기'를 통해서 음악을 성취해 나아갔다. '피아노 음악' 을 포기하는 댓가로 '음악'을 선택한 것이다. 물론 그도 좋아하는 작곡가들이 있다. '바흐-베토벤-리하르트 슈트라우스-쇤베르크' 등이다. 그에게 쇤베르크는 현대판 바흐였을 따름이고 20세기의 베토벤같은 경계인이었다. 현대음악에 대한 그의 견해는 읽어 둘 만하다.( 단 내가 쇤베르크나 베베른에서 머뭇거리고 있기 때문에 책 후반부에 나오는 글렌 굴드의 현대음악에 대한  이야기는 내가 제대로 이해했나 의심은 간다.)

글렌 굴드는 '경계선'에 서 있는 인간이었으며 그런 사람들을 좋아했다.

"나는 항상 '세기말적'인 사람에게, 한 시대의 마지막에 있으면서 그 작품 속에서 언뜻 대립된 두가지 경향을 화해시키는데 성공한 사람에게 생생한 애정을 품어 왔습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테크닉적으로 가장 큰 애정을 품는 사람은 바흐지만 정신적으로는 올랜드 기번스' 라고 말한다. (글렌 굴드의 기번스/버드 음반은 아주 좋다.) 이는 자신의 '자아 이상'을 말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역시 세기말 속에 살았던 음악가였다. 또한 하나의 이름에 머물지 못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시대와의 소통'을 위해 '시대와의 단절' 을 자청하는 형용모순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사람이다.  

그는 '지성'과 '순수'라는 양발 엔진을 부착하고 차가운 겨울 하늘 나는 조종사와도 같았다. 아무도 선뜻 가보지 않았던 그 코발트 빛 고독 속에서 그는 신의 얼굴을 보고 있었을까?  

글렌 굴드, 그는 피아니스트가 아니다.

그는 살아서 음악가였으며 이제는 전설이 되어간다. 

첨언)) <나는 결코 괴짜가 아니다>는 2부로 구성된 인터뷰집이다. 앞의 인터뷰는 실제 인터뷰 모음이고 2부는 가상 인터뷰 형식으로 편집된 실제 인터뷰이다. 여기에 나오는 내용들은 글렌 굴드의 전기나 그를 다루는 글에서 몇 번 언급된 것들이다. 전기작가들도 결국 그의 인터뷰를 통해서 그를 구성한 셈이었을테니까. 번역자는 음악전공자이다. 그러므로 글렌 굴드가 말하는 음악 이야기와 미학적인 부분에 대한 선이해는 어느 정도 믿어도 좋을 것 같다. 문제는 그의 국어이다. 좋은 번역은 기본적으로 외국어에 대한 이해와 충분한 국어능력이 필요하다. 하나만 갖추면 TRAS..라는 단어의 양방향적인 어원이 무색해지지 않는가? 원본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고, 인터뷰 특성상 회화체로 중언부언 했을 가능성도 있다. 말이란게 원래 그렇지 않은가? 잠깐씩 첨삭도 하고 다른 단어들을 끼워넣기도 하고... 하지만 번역하지 않은 단어들도 있고( 예를 들어 굴드의 '퍼스펙티브'..한 단어로 규정하기 어려운 '퍼스펙티브'라면 최대근사치의 단어를 찾아야 한다.) 또 국문법에 어색한 문장들도 간혹 읽기를 불편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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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11-14 14:21   좋아요 0 | URL
굴드에 관한 오스왈트(Ostwald)의 평전을 읽으며 그에 대한 편견을 바로 잡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간 너무 명성이 부풀려진 연주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요. 지금은 처음의 선입견을 많이 없애고 많은 피아니스트 가운데 독특한 존재로 그를 바라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와 그의 연주를 좀 더 균형 있게 바라보기 위해 이 책도 한 번 읽어봐야겠군요.(여전히 그가 남긴 말들 가운데 몇몇은 전혀 수긍할 수 없지만요.)

드팀전 2008-11-14 18:00   좋아요 0 | URL
그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이 않을겝니다.굴드리언들을 빼놓고는요. 말씀 하신 대로 '독특한'피아니스트였지요. 그 독특함이 튀기위함이 아닌 음악과 사회와의 관계 내지는 미학에 대한 깊은 자기 사유에서 나왔고 또한 보편성을 얻을 수 있었다는데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굴드적인 미학관이 여전히 소수적인 가치로 평가받는 것은 여전하지요.
 
대한민국 원주민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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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 붉은 빛이 담장을 넘는 계절이다.

출근길에 재개발 지역을 지난다. 20여분 밖에 걸리지 않는 길이다. 그런데 두 곳의 재개발 지구를 지나쳐야 한다. 대한민국은 늘 '공사중'이다. 첫 번째 재개발 지구에는 외톨이 거인들이 사는 마을처럼 옛 집들이 군데 군데 아직 남아있다. 내가 능소화 붉은빛을 쐬는 곳이다. 내년쯤이면 담장너머 세상 구경을 나온 아이같은 꽃들을 만나지 못할 게다. 가슴 한 켠에 아릿함을 가지고 바닥으로 뚝뚝 붉은 물을 떨어뜨린 녀석들을 바라본다.

두 번째 재개발 지역에 이른다. 이미 폐허다. 변두리 식당의 후식으로 나온 사과에 꼽혀 있는 이쑤시게처럼 전봇대가 한 두 서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아래는 온통 크고 작은 녹색 정원이다. 텃밭이다. 거기에는 대나무로 만든 작은 전봇대들이 수없이 꼽혀있다. 고추대 이거나 가지대들이다. 재개발이 정치적 문제로- 이 사건은 유명해서 한동안 TV 뉴스를 장식하기도 했다- 차일피일 되자 그곳에 텃밭이 생긴 것이다. 원주민들의 작은 평원이다.

젊은 작가 최규석의 <대한민국 원주민>은 '흙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나 밭'을 가꾸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최규석은 잊혀져가는 그들을 '대한민국 원주민' 이라고 한다. 그의 만화에는 미국으로 이민간 어떤 할머니가 도심의 공원에서 쑥뜯는 장면이 나온다. '땅' 한 평이 목숨과도 같았던 그들에게 '놀릴 땅'은 바늘 한 땀만큼도 없다. 논과 밭의 일을 슈퍼마켓과 마트의 일로 바꾼 우리들에게 그들의 정서는 '원주민'의 그것이라고 할 만하다. 그리고 우리는 알고 있다. 일반화된 '슬픈 원주민'의 역사에 대해서 말이다.

최규석은 나보다 한 세대 어리지만 그는 내가 겪어보지 못했던 것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로 유사하게 벌어지는 일들이기때문이다. 내가 세대론에 대해 사회학적으로 동의하면서도 꼭 그렇지만도 못한 것이 이 때문이다.( 학자들은 연구 한계상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이해한다.) 

 소위 386세대와 만나보니 우리 누나들과 비교가 되더라. 그분들 데모할 바로 그 즈음 공장에서 일하던 누나들 생각을 했다. 역사책을 보면 중세 다음 근대, 그 다음 현대 이렇게 마디마디 넘어가지만 현실은 다른거다. 서로 다른 시대가 비율만 오르내릴 뿐 겹쳐 움직이는 거다. (김혜리와의 인터뷰 중에서)

유식하게 말해서 최규석은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말하고 있는 거다. 책으로 읽고 감동한게 아니라 자신의 살과 가슴으로 아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시골 친구의 그림 속에 '순수'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최규석같은 친구들은 그래서 진솔할 수 있는 거고 오래갈 수 있다. 머리에 새긴 지성은 자기의 이기심에 쉽게 변절할 수 있지만 가슴에 새긴 기억들은 가끔 강력한 ABS 브레이크가 된다.

 추락, 그거 별거 아니다. 한 발 더 내딛는가, 아닌가의 차이다. 그 길로 나아가면 관성의 법칙을 따라 갈 수 밖에 없다. 대신 그 앞에서 ABS의 위력을 한 번 발휘하면 또 다른 길로 이어진다.  

 나는 고향이 아닌 사람들이 모인 '새마을'에서 자라났다. 70년대 말, 당시 전국에는 내가 자란 마을과 같은 '신흥촌'이 부지기수였다. 모두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몰려든 사람들이다. 하지만 도시의 중심가로 가지는 못했다. 서울의 위성도시, 그 중에서도 시내 가장 외곽 변두리. 내가 자라났던 곳이 그런 곳이다. 아무래도 그 정서가 여전히 내 '변두리' 근성을 만들고 있는 듯 싶다. 우리마을 근처에 '동일방직'과 '동양나일론'이 있었고 내 친구들의 집은 '쪽방'이었다. 

 내가 어린 시절 우리 동네에 '천막극장' 이 들어왔다.대학 다닐때 친구들이 전부 신기한 듯 생각했다. 최규석의 친구들이 그의 이야기에 그랬듯이... '천막극장'은 그 '변두리성'의 상징이었다. 나는 여태까지 '촌'의 상징으로 그 기호를 이용했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시내에는 영화관이 있으니 '천막'이 필요없다. 그리고 최규석의 고향 처럼 '완전 깡촌'은 수요가 많지 않으니 '천막'이 갈 필요도 없었다. 결국 나의 '촌'은 '변두리'였지 진짜 '촌'은 아니었던 셈이다. 나는 최규석의 <대한민국원주민>을 읽으며 과거 내가 무용담처럼 말하던 '천막극장'의 사회경제적 위치를 다시금 생각해봤다. 물론 '촌스런 영웅담'이 희석된다고 '천막극장'의 즐거운 풍경이 내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때문에...

 최규석이 부럽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한 것은 그가 <대한민국 원주민>에서 자기 가족을 중심으로한 구술사를 쓰고 있기때문이다. 언젠가 나도 내 가족을 중심으로 이런 작업을 한 번 해보고 싶었다.그런데 젊은 그가 예쁜 그림과 따뜻한 정서로 먼저 작업을 한 것이다. 차일피일 미룬 것이 부끄럽기도 하다. 물론 가족사를 그린 다는 것이 한계가 있긴 하다. 왜냐하면 객관성을 담보하기가 좀처럼 곤란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원주민>에도 보면 아버지에 대한 양가적 감정, 어머니에 대한 순진무구한 숭고, 누이들의 희생에 대한 감사, 형에 대한 거리감 같은 것들이 동시에 묻어난다. 그런데 어차피 학문을 할 것도 아닌데 그런 객관성이 뭐가 그리 중요하겠는가? 모든 다큐멘터리스트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객관성'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상에 대한 진정한 '애정'이다. 그런데 최규석은 '만화'라는 장르가 가진 유연성과 '다큐'가 가진 사실성을 미숫가루처럼 잘 섞어낸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가족만화'를 보면서 건강한 '관음증'의 즐거움을 느끼면서도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하고 또 잠깐 잠깐 생각에 잠기기도 하는 것이다. 그가 과거로 부터 현재를 동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미 FTA에 대한 생각부터 한국전쟁,가부장제 등에 대해 그는 몇 컷의 만화프레임 안에 그 생각을 열어놓고 있다.

나는 이런 그의 더듬이의 제일 민감한 위치에 '촌의 감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달리 말하면 '순수'의 마음이다. 하지만 촌사람들이 모두 순수하다거나 도시 사람들이 모두 되바라졌다고 생각치는 않는다. 그가 어린시절에 보고 느끼고 들을 수 있었던 거대한 자연의 내러티브가 그에게 준 능력이다. 이건 내 경험적인 편견이기도 하다. 실제 '시골 출신'은 뭔가 달라도 다르다. 그가 그런 능력을 소중히 여긴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이 친구 한 번 만나보고 싶어진다.

<대한민국 원주민>은 내게 전부는 아니어도 내 유년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도 해주었다. 담벼락에 앉아 매일 해바라기하던 독침 할머니의 상여길, 늘 신경을 써주었던 아버지를 자주 찾아 왔던 산업체 여고 누나들, 나락 쌓아 놓은데서 놀다가 주인에게 매맞고 울며 돌아가던 길, 뒷 집 바보 국이 엄마가 아들을 위해 했던 굿판을 훔쳐보던 두려움, 매 맞다가 우리 집으로 피신했던 옆 집 아줌마와 성난 아저씨를 훈계하던 아버지의 목소리, 개구리를 잡아 아궁이에 구워 먹던 기억들...

아..더 나이가 드시기 전에

 내 가족들을 위한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겠다.     

P.S) 나는 이 책을 이희재의 <간판스타>와 함께 사서 읽었다. 이희재의 독특한 스타일도 마음에 들고 최규석의 교과서적 스타일도 예쁘다. 두 작가의 스타일은 다르지만 둘 다 '리얼리즘'에 바탕을 둔다. 형식과 작화, 주제에 대한 접근방식이 각 각 특색이 있다. 또한 20여년의 세대 간극이 있어서 그 '보편성과 특수성'을 따라 읽는 재미가 꽤나 흥미로왔다. 이희재의 <간판스타> 리뷰는 쓰지 않기로 했다. 누가 읽겠는가 ..시대에 덜떨어진 이런 고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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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8-07-19 10:51   좋아요 0 | URL
이주의 마이리뷰~~ 축하합니다.
대한민국 원주민을 읽고 최규석에게 반했는데...이렇게 멋지게 풀어낸 리뷰를 읽으니 한발 더 다가선 느낌입니다.^^

이매지 2008-07-19 14:38   좋아요 0 | URL
이주의 마이리뷰 축하드려요 :)
마당에 온갖 고추니 상추니 옥수수니 잔뜩 심어놓은 저희 집도 대한민국 원주민이군요 ㅎ
이 책에 대한 찬사가 유독 자주 들리는 듯.
한 번 읽어봐야겠어요~

웽스북스 2008-07-19 23:18   좋아요 0 | URL
드팀전님, 제가 이 리뷰를 읽고 혼자 몰래 감동받고 주위 사람들 읽어보라고 하고 막 그랬었는데, 이주의 마이리뷰로 뽑히셨네요- 아흑! (실은 좀 부러워요, 이런 리뷰를 쓰신다는 거 ㅜㅜ) 축하드립니다!!

-혼자 드팀전님을 어려워하는 웬디드림 ;;
 
설국열차 2.3 - 2권 선발대, 3권 횡단
장 마르크 로셰트 외 지음, 김예숙 옮김 / 현실문화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설국열차2.3>은 화풍에 변화가 온다. 조금 더 온화해지며 커트 사이의 생략도 전편에 비해서는 조금 낫다. 그 차이란 아주 미세한 것다. 외국 뮤직비디오나 영화예고편을 보면 얼핏 보기에 컷트편집처럼 보이지만 자세히보면 한두 프레임의 디졸브 편집이다. 이런 효과는 미묘하지만 보는 이의 피곤함을 덜해준다. 마치 목탄이나 수채화로 그린 것 처럼 만화화풍이 부드러워졌다. 실제로 <설국열차2.3>은 컬러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만나는 것은 흑백화면이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가격상승문제도 인한 판매율을 고려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짐작해본다.

<설국열차1>과 <설국열차2.3>은 다른 주인공들의 이야기로 부터 시작된다. 세상에는 다른 종류의 설국열차가 하나 더 있었던 것이다. 이 열차 역시 무한운동을 한다. 주인공은 제2설국열차의 선발대원이다. 이들은 마치 유겐트처럼 어린 시절부터 저온하에서도 생존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은 특수한 사람들이다. 주인공이 하는 일이란 것은 열차가 한 번씩 정지훈련이란 이름으로 멈추어설 때 열차 밖의 설원으로 나가서 탐색-말이 좋아 탐색이지 멸망한 문명에서 권력자들의 창고를 채워주기 위해 뭔가 건져오는 것이다-하는 것이다. 이 주인공은 회의주의자이며 반항적이다.

<설국열차 2.3>의 제2 설국열차 역시 철저한 계급 사회이다. 열차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자들로 구성된 로마의 원로원같은 정치체제가 존재한다. 정치가, 종교지도자, 레이더관측사 등등이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이들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열차 내에서 베푸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이다. 고전적인 마르크스 문화주의의 테제들이 은유적으로 등장한다.

제2 설국열차는 기본적으로 '공포'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열차의 비밀을 아는 소수 권력층을 제외하고 열차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그것이 일등 칸이든 마지막 칸이든 마찬가지다- 모두 그 '공포칩'을 몸 속에 내장하고 있다. 그들의 공포는 '제1 설국 열차와 충돌하는 종말'이다. 이미 세상은 종말의 레퀴엠을 끝냈지만 살아남은 자들은 코다를 끝없이 반복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 코다 역시 죽음의 피날레가 있다는 사실은 기차안에 '공포의 정치'를 작동시키는 필요조건이된다.

우리는 흔히들 '자본주의가 공포를 식량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제 2설국열차는 현재 자본주의의 작동방식에 대한  만화적 은유가 가득하다.(그러니까 현문연에서 출판했겠지). 입구가 막힌 세계에서는 '음모론'과 '유언비어'가 기승을 부린다. 열차 내에서도 '열차'가 사실은 '비행선'이라는 주장을 하며 전복을 꿈꾸는 세력이 있다. 이들은 일종의 공상적인 급진주의자들이며 결국 테러라는 형태로 열차의 운명에 변경을 불러일으키고 만다. 또 1편에 이어서 기계의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후에 반혁명에 동원되기도 하고 기회주의적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사람들은 열차 내에서 가상현실 여행을 떠나고 꼭두각시에 불과한 미디어를 통해 세상을 받아들인다. 작가들은 실제 방송진행자를 얼굴부문만 있는 꼭두각시 인형으로 그리고 있다.

주인공은 영웅적인 행동을 통해 결국 권력상층부만 알고 있는 열차의 비밀을 알게된다. 하지만 그 역시 그 비밀을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한다. 실재를 만난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그리고 급진주의자들의 폭탄 테러와 함께 열차는 마지막 칸을 분리시킨다. 제 1 열차에 대한 공격과 제 2열차의 마지막 칸을 분리하는 사건은 한가지로 읽힐 수 있다. 그것은 결국 인류의 숨기고 싶은 비밀에 대해 은근히 풀어놓는 것 처럼 보인다. 르네 지라르가 말하던 그 '태초의 폭력과 희생양의 제의'가 인류의 종말을 앞에 두고 다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 모두는 '카인의 후예'이다. 거기에 더 중요하게도 모든 폭력의 동시대인과 그 후예들이 그러하듯 '카인의 후예'임을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는 자손들일 뿐이다.

혁명과 반혁명을 거쳐 설국열차는 대서양을 건넌다. 대서양 건너편에서 전파를 타고 음악이 잡히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아름다운 장송곡이라는 포레의 레퀴엠을 들으며 열차는 바다를 건넌다. 그 끝에 과연 새로운 삶의 씨앗이 있을까?

이미 20여년 전에 나온 책이기때문에 그 결말이 그렇게 충격적이거나 새롭다고 할 수는 없다. 왠지 이런 류의 성찰적인 SF 소설이나 영화에서 한번쯤 봤음직한 결말이다. 그 결말 이후에 설국열차는 이제 어떡게 될 까? 진실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이 '무' 였음을 확인한 다음에는 무엇이 남는 것일까?  열차의 운명은 그렇게 끝이 났을까? 아니면 새로운 환상의 추동을 통해 다른 진실을 찾으러 떠났을까?

 책장을 덮으며 쓴 입맛을 맛보고 <설국열차>에서 내린다.무서운 속도로 달리는 열차의 속도감과 끊없는 설원,그리고 그 속도에 편입하지 못하면 죽음과 맞딱뜨려야 하는 세상을 생각해본다.<설국열차>의 묵시록적 은유는 조금 단순화되어 있으며 또한 상투적이기도 하다. 또한 하층 계급의 주체적인 자발성에 대해 거의 한번도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것은 오류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또한 생존의 기본적 에너지조차 부여받지 못한 곳에서 그런 자발성도 사라질 수 있다는 의미로 읽히기도 한다. 이미 오랜 시간전에 씌여진 책이지만 <설국열차>가 폭주하는 자본주의와 그에 탑승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던지는 질문들은 시대를 거쳐서 여전히 유효하리라고 본다.

열차 시간표에서 다음 열차를 손으로 짚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이제 우리는 봉준호 감독이 영상으로 그려낼 <설국열차>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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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열차 1 - 탈주자
장 마르크 로셰트 외 지음, 김예숙 옮김 / 현실문화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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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책의 무게에 눌려서 머리를 식히려고 이미 유명한 <설국열차>를 봤다. 그런데 접시물에도 코가 빠져 죽는다더니 네모 칸에 그려진 블랙 앤 화이트에 심장이 뻑뻑하다. 도살장의 공기처럼 주변 공기가 답답하다. 이럴 때는 밝고 명랑한 슬립 스틱이나 보는게 정신 건강에 좋으련만 항구적 우울증을 도발하는 이런 디스토피아로 빨려들고 말다니...(문제는 지금 글을 쓰고 있는 키보드 옆에 코맥 맥커시의 또다른 디스토피아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책을 받고 생각보다 판형이 크다는 것에 놀랐다. 내가 고정관념으로 가지고 있는 만화책의 크기를 상회했다. 예찬이가 보는 동화책들과 비교해도 큰 편에 속한다.(내가 좋아하는 예찬이 동화책 중 1등은 <프레드릭>이다.)

원래 아이 재우고 책장에서 책을 꺼내면 곧 존다. 언젠가는 1시간을 앉아서 졸다가 다음날 목이 아파서 혼났다. 그런데 <설국열차>를 보는 날은 달랐다. 영하 90도 찬바람이 불어나와서 새벽 1시까지 졸 수가 없었다. 가끔은 소름이 돋았다.( 만약 실제 영하 90도 였으면 동상처럼 얼어붙었겠지...) 첫 번째 소름이 돋았던 것은 '설국열차'라는 존재다. 무한하게 순환하는 영속성은 정말 사람 돌게 만드는 공포다. 끝이 없다는 것이 무섭지 않은가? 나는 끝이 없다는 것만큼 무서운게 없다. <은하철도 999>에서 철이가 기계인간이 되기를 포기했던 것은 무엇때문일까? '죽음'을 모르는 그 기계인간의 존재론적 슬픔을 보았기 때문이다. '철이'는 언젠가 끝날 수 밖에 없기에 더 소중한 '생'의 아름다움을 선택한다. 이 빌어먹을 '설국열차'는 무한궤도를 돈다. 철학용어로 하면 '자기운동'인 거다. 즉 눈으로 덮인 디스토피아를  자기운동하는 것이다. 헤겔적이지 않은가? 그런데 모든 생물을 팥빙수로 만들어버린 세상에서 '설국열차'의 자기운동은 그 자체로는 '변증법'도 통하지 않는 폐쇄된 운동이다. 그저 무한히 도는 '무' 다.

 '설국열차' 1편에서 내가 첫 번재 공감한 사람은 시작부분에 등장해서 곧 사라진 노인네다. 열차 끝칸에 '개인'을 위한 공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서로의 입김이 불편할만한 공간에서 사람들이 모여 산다. 음식도 부족하여 결국은 '죽은 자'로 단백질을 공급받는다. '아우슈비츠 열차'가 지옥행 열차였다면 무한궤도를 도는 '설국열차'의 끝 칸은 지옥 그 자체다.  

 '혼자있는 시간' 즉 '개인' 이 존재의 필수조건이라고 늘 강조하는 나로서는 당연하다. 내가 그 입장이었도 1시간동안 주어진 '홀로있음' 다음에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자살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예찬이를 돌봐야 하는 의무감만 아니라면 말이다.

'설국열차'는 인류의 마지막 '노아의 방주'이다. 그런데 '노아의 방주'와 다른 것이 있다. 노아의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이루어졌다. '설국'의 세계는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다. 세계의 멸망을 도래시킨 '기후무기'라는 것은 영화 <투모로우>식으로 비유하자면 환경의 습격이다. 노아의 방주는 인류의 유일한 생존자와 다른 모든 종들이 종자은행처럼 보존되어 있는 하나의 작은 생태계다. 그러나 '설국'에 그런 것은 없다. 이 곳은 대신 하나라고 설득하지만 결코 하나인적이 없는'인간' 종들만이 연필심처럼 그득하다. 노아의 세계에서는 자연의 축소판으로 그것들이 순환적 공생을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설국'의 세계는 확연하게 '계급'에 따라 구획지어진다. 모든 칸은 통제되어 있고 이것을 유지하는 것은 '폭력'이다. 이 확연한 구분에도 분명 내부적 모순의 폭발이 있었다. 그러나 '경찰력'을 동원할 수 있는 앞 칸의 권력층과 기득권층은 이들의 폭동을 무자비하게 제압한다. 이 만화 속에서는 그날을 '야생의 밤'이라고 한다. 대략 마르크스의 세계구조와 유사하지 않은가...    

열차 끝 칸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상태에 이르렀지만 열차 앞 칸은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뿐이지 여전히 와인에 취해 향락을 즐긴다. 하류층과 상류층의 차이는 결정적인 위기에 대한 자원의 차이이다. 하류층은 위기에서 그냥 나락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상류층은 약간의 타격은 받을지라도 존재 자체를 지옥으로 떨어뜨리지 않을 수 있다. '설국열차' 안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 그 중에 일부는 휴머니즘차원에서 마지막 칸을 돕고자 한다. 또 어떤 그룹은 급진적인 테러를 꿈꾼다.기득권 세력들은 종료의 이름으로 기계를 신격화하여 자신들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며 현재의 영속성만을 기원한다. 마르크스식의 종교가 가진 체제 순응적이며 이데올로기적 의미가 '설국열차'에서 채현된다.

물론 드라마를 이어가지 위해서 '뒤틀림'이 필요하다. 1편은 설국열차의 자기운동(이것은 설국열차를 움직이는 '올가'를 말한다) 이 그 자체의 문제보다는 기계적 노후로 인해 속도가 떨어지는 일이 발생한다. 언젠가 열차가 서게되면 모두 영하90도 아래서 얼어죽을 상황이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

아주 합리적이고,간단하며,이성적이고,현실적인 방법이 있다. 어쩌다 합승해서 그냥 끌고 갈 수 밖에 없었던 마지막 칸을 분리시키는 것이다. 열차의 무게를 줄이면 당분간은 기계적 부담을 상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국열차는 애초에 권력층과 귀족층들만 태우기 위해 준비되었다. 이 설정 자체는 충분히 자본주의적이지 못하다. 이것은 내게 '설국열차'가 끊없이 운행하는 자본주의의 자기운동과도 유사하다는 생각을 들게 하면도 자본주의 비판으로 보지 못하는 이유다. 착취할 대상이 없어진 자본주의란 존재하지 않는다. 형용모순이다. 

책에서는 구체적으로 그 과정을 둘러싼 논쟁이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런 일들이 부지기수로 벌어진다. 그래서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것이다. 실제로 그런 권력층의 결정에 대해 1등칸은 말할 것도 없지만 2등칸의 대중들은 어떻게 '동의'를 할까? 그들은 궁극적으로 '동의'를 할 것이다. 이성과 합리와 상황의 이름으로 말이다.

'설국열차' 1부에서 주인공은 결국 '설국열차'의 비밀을 알고 절규한다. 끝에 가서 '설국열차'의 궁극적 비밀이 드러난다면 작가들은 주인공을 호송하는 과정 중간 중간에 '설국열차'와 생존조건의 물적토대에 대해 말한다. SF적 상상력이라서 재미있기도 하지만 너무 설명이 부족한 감이 있다.만화는 주인공이 끝 칸의 운명을 거부하여 이제는 모두로 부터 고립된 영원한 고독 속에서 진실과 대면하면서 문을 닫는다. 그리고 열차는 하얀 고독의 터널을 계속해서 달린다. 끝없는 '무'를 향한 그 길 말이다.

'설국열차'의 그림체가 조금 낯설고 호흡이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왜 그럴까? 기본적으로 컷트수가 다르기 때문인 듯 하다.  우리들이 쉽게 보는 일본만화나 한국만화에 비해 생략이 과감하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이 정도 내용을 일본만화로 만들었다면 1000컷이 들어간다면 이 만화는 500컷이다. 다른 컷트 수 때문에 간혹 점프컷을 보는 낯선 느낌을 줄 때도 있지만 그것은 작가와 그의 문화가 미학적으로 선택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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