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년의 양식에 관하여 - 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문학과 예술 에드워드 사이드 선집 6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장호연 옮김 / 마티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비빔밥, 자장면, 팥빙수의 공통점은?  

그렇다. 비벼먹는 음식이다. 나는 이 음식들을 먹을 때 몇 번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같은 소리를 듣는다. " 왜 비빔밥을 그렇게 대충 비벼? " " 왜 팥빙수를 거의 안 비비고 드세요? "  나는 통상적으로 잘 비벼먹어야 한다고 알려진것들을 잘 비벼먹지 않는다. 성격이 별나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내 나름대로하는 답은 여러번 섞기 귀찮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진짜 정답이 아니다.  진짜 잘 섞지 않는 내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다분히 아도르노적이다. 비빕밥이나 팥빙수를 잘 섞으면 그 맛은 비교적 균질적이다. 그것은 변증법적인 합의의 총체성이며- 위대한 비관주의자의 말을 빌자면- '동일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매번 숟가락을 통해 입으로 들어가는 맛이 비슷하다.  나는 그게 좀 재미가 없다. 대충 섞으면 어떤 부분은 고추장이 많고 어떤 부분은 밥이 많다.  어떨때는 좀 짜고 어떨 때는 좀 싱겁다. 한 그릇의 비빕밥 안에 다양한 맛을 느끼게 된다. 이게 '동일성 부정'의 철학이다. 팥빙수는 더 하다. 잘 안 섞고 숟가락 가는데로 퍼 먹으면 어떨 때는 얼음맛이, 어떨 때는 과일 맛이 더 많이 난다. 이게 아도르노 미학이 폭로한 대량문화의 획일성을 피하고 사이드가 말하는 주체의 개인적 즐거움을 즐기는 방식이다. (웃자고 한 소리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에 전체적으로 아도르노의 그림자가 짙게 배어있다.말년의 양식'이라는 말도 아도르노의 표현에서 빌어온 것이다. 그는 말년을 '파국'의 개념으로 말했다. 책에 여러번 인용되며 또 대미를 장식하는 글이 이것이다. 

"객관은 파열된 풍경이고, 주관은 그 속에서 활활 타올라 홀로 생명을 부여받는 빛이다. 그는 이들의 조화로운 종합을 끌어내지 않는다. 분열의 원동력으로서 그는 이들을 시간 속에 풀어헤쳐 둔다. 아마도 영원히 이들을 그 상태로 보존해 두기 위함이다. 예술의 역사에서 말년의 작품은 파국이다"   

(와우...! )

대게 도덕책 좀 읽었다는 사람들이 바라는 말년은 일종의 '구루' 또는 '현자'이다. 세상사의 이치를 깨닫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어디에도 얾매이지 않는 초연한 사람이다. 대게는 공기마저 답답한 병실에서 생을 마감하지만 말이다. 하여간 도덕적 환상의 지지물로서 그런 '현명한 늙은이'에 대한 이미지가 존재한다. 그런데 이 책에 등장하는 말년성은 이를 거부한다. 죽어가면서까지 쓸쓸한 독을 뿜는다. 그리스 서사극의 주인공들처럼 비장하지 않은가. 하여간 그들은 맹독성 동물이다. 또한 세속적이면서 초인적이다. 

사이드는 질문한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더 현명해지고, 예술가들이 경력의 말년에 이르러 얻게 되는 독특한 특징의 인식과 형식이 과연 존재할까? " 

 대게의 흐리멍텅한 대답은 '그렇게 되도록 수양해야지요' 라는 것이다. 알란파슨스 프로젝트의 'old & wise' 가 되고 싶은 것이다. (물론 가장 큰 적은 치매이다.)  현실의 나이브함 속에 자리한- 지젝식으로 말하자면- '대상a' 로서의 말년성은 분리수거된다.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에서 사이드가 말하는 '말년'은 결코 연대기적 의미도 아니다. 예술가의 어떤 작품은 -예를 들자면 모차르트의 <코지판 투테>,브리튼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연대기적으로 말기에 위치해 있지 않으면서도 이미 '말년성'을 보인다. 희곡가 장 주네,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 같은 이들은 삶의 어느 시기에서-생물학적으로 보자면 젊은- 이미 '말년'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이드는 이탈리아의 도시인 베네치아에서도 '말년의 파국성'이 느껴진다고 분석한다. 그렇다면 이제 눈먼 장님이라도 사이드의 '말년성'이 결코 생물학적 연대기의 끝을 뜻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이드는 이제 그가 이 책 전체에서 입증할 질문이자 답을 던진다.  

"하지만 예술적 말년성이 조화와 해결의 징표가 아니라 비타협,난국,풀리지 않는 모순을 드러낸다면 어떨까?" 

사이드의 '말년성'은 바로 이것이다.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화해불가능성'이며, 여기에 있지만 여기에 있지 않는 '초월성'이다.'찟겨나가고','옆에 내던져지고 포기되는' 속에서 즉 '예술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고 현실에 저항하면서 발생한다.' (여기서 현실은 미학적 현실이다.) 역자의 서문에는 사이드의 말년성을 몇 가지로 정리한다. '망명과 주관/ 비극적 & 유희적인 면/ 화해하지 않음/시대착오성' 이다. 아도르노는 망명의 형식을 '파국'이라고 설명한다. 그에게 말년성은 용인되고 정상적인 것을 넘어 살아남는 개념이다. 또한 말년성은 누구든 실제로는 넘어설 수 없다는 생각을 담고 있기도하다. <신음악철학>에서 아도르노는 베토벤 말년 작품의 혁신성을 '부정성,화해불가능성'으로 이해하여 쇤베르크까지 그 연장선 속에서 위치시킨다. 그리고 이는 아도르노 본인에게도 해당된다. 사이드는 베토벤이나 바흐처럼 아도르노 역시 말년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등장시킨다. 즉 개념의 틀을 제공해준 선생이 다시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그는 아도르노를 평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아도르노를 읽으면서 우리는 그가 스스로를 더 작은 부분들로 해체하는 격노한 기계 같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아도르노는 이들로부터(20세기의 형식들) 초연하게 거리를 두면서도 한편으로는 공모관계에 있었던,비시의적이게도 19세기 후반 낭만주의 이념에 사로잡혀 이들에게 실망하거나 각성한 인물이었다."  

내가 이 책 전반에 아도르노의 향기가 배어있다고 한 부분은 기본적으로 이 책에서 말하는 '말년성'이 일종의 '통합불가능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말년성을 끌어내며 자주 등장하는 '부정', '부조화','비총체성' 등은 아도르노에게 핵심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에서 깜짝 발견한 그리스의 시인 콘스탄티노스 카바피가 '오딧세이아'를 인용한 싯구절도 호르크하이머와의 작업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카바피의 '이타카'라는 시는 비록 부분 인용이었지만 두꺼운 오딧세이아를 10행 정도로 요약한 놀랄만한 것이다.) 아도르노의 '총제성'에 대한 부정은 유명하다. 헤겔의 긍정의 변증법을 부정하는 책이 바로 <부정 변증법>이다. 쉽게 말하자면 헤겔의 '정반합'(헤겔은 이렇게 말한적이 없지만)의 '합'은 결국 '동일성'의 체계로 다시 화합시키는 것이다. 아도르노는 이런 개념화에 발생하는 폭력적인 면을 발견해내고 개면화되지 않는 '비동일성'의 측면을 부각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아도르노를 '포스트모던의 시초'라고 보기도 한다. 대중산업으로서의 문화에 그가 부정적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런 '동일화'의 원리에 바탕을 두고 사회를 균질화시키는 역할을 해대고 있기때문이다. 아도르노의 문제는 옮바른 지적에도 불구하고 대중문화의 자발성이란 측면을 간과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엘리트주의 -실제로 아도르노는 출신면에서 엘리트라 할 만하다-라는 욕을 먹기도 한다. (사이드는 아도르노를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아도르노식 '관리사회'에서 훨씬 더 자유롭다.) 

사이드와 아도르노가 평가를 달리하는 인물 중에 하나가 R 슈트라우스이다. 글렌 굴드는 R슈트라우스에 대해 매력적인 평가를 했다.( 글렌 굴드의 R 슈트라우스 피아노소나타 느린 악장은 재발견이라고 할 만큼 아름답다.) R 슈트라우스에 대한 평가는 사실 '크게 판을 벌인 사업가처럼' 이라는 아도르노적인 평가가 일반적이다. 사이드는 R 슈트라우스가 '현실에서 퇴각', 즉 복고주의라는 방식을 통해서 당시 화성혁신으로 대표되는 '총체성의 바그너'에 저항하는 특징을 읽어낸다. 바그너의 오페라가 담고 있는 세계관은 분열적이기는 하지만 헤겔식의 역사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사이드는 이를 '과거의 과거성'이라고 말한다. 이는 바흐와 굴드와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등장하는 '인벤션'(창안)의 개념과도 연결이 가능하다. 이 둘의 관계에 대해 사이드는 아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바흐와 굴드 모두가 시대착오적이며 이는 다른 말로 하면 시대를 앞서간 사람들이다. '가장 앞서간 통주저음의 대가이자 구시대적인 다성음악가' 로서의 바흐는 재발견되어야하는 주체성의 자율적 공간을 스스로에게 할당해 놓았다. 그리고 이런 '인벤션'(창안)의 가치를 제대로 읽어내고 해석의 자율적 공간 안에 다시 위치시켜놓은 것이 바로 글렌 굴드이다. 사이드는 여기서 글렌 굴드에게 '지적 비르투오소'라는 왕관을 씌워준다. 이 말은 브루주아 문화의 결과로 태어난 존재적 한계와 그에 대한 반작용적 존재로서의 자리이다. 굴드에게는 그저 뛰어난 실력의 연주자로서의 만족이 아니라 연주와 미학적 행위가 '작곡가'에 이어지는 단계로까지 발전한다. 사이드가 높이 평가하는 부분은 그가 새로운 기술의 발견을 통해 미학적 지평을 확산했다는 것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작업을 '지적 비평 전통'하에 놓는 것이다. 이는 일반적인 연주자가 아니라 '언어를 사용하여 담론을 만들어내는 지식인들의 영역'에 그를 위치시키는 것이다. 짧으면서도 명쾌한해설이다. 물론 이런 굴드 역시 시대착오적이며 긴장감을 해소시키지 않는 말년성의 특징을 내포한 존재로 이해된다. 

이 책에는 이외에도 모차르트의 <코피 판 투테>에 대한 '반도덕적 해석'의 흥겨움을 보여준다. 재미와 즐거움이 또한 하나의 저항 양식이 될 수 있음을 상징하는 대목이다.  모차르트의 '농담'과 베토벤의 '근엄'을 대비하여 '가변적 주체'와 '고정된 정체성'의 예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베토벤의 '계몽성' (베토벤은 열혈 계몽주의자였다. 박홍규의 <베토벤평전>은 지나칠 정도로 정치적인 베토벤에 시선을 꼽는다.) 은  모차르트의 후기 오페라들에서 불편해질 수 밖에 없다. 사이드는 '코지판 투테'의 내러티브와 별 비중없지만 극의 모티브가 된 돈 알폰소에 집중한다. 그를 동시대에 살았던 사드에 비유하기도 한다.(사이드는 푸코를 인용하지만 <계몽의 변증법>에도 사드가 등장한다.) 모차르트는 이 오페라에서 이동과 불안정,방탕함과 조작의 상징들을 동원했다. 그리고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부주의하고 무의미해보이는 이야기'들을 결합해내었다고 사이드는 말한다. 그리고 하울러 그 불편함이 주는 불길한 비전에 주목할 것을 유의하라고 말한다.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는 사실 예술의 역사 속에서 '말년성' 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또한 이 유고집을 내게된 저자 사이드의 말년성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아도르노가 개념의 틀을 제공하고 주인공으로 등장했듯이 사이드는 이 책의 서술자이면서 빙의된 형태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러기 위해서 등장한 또 하나의 '분열적 인간'이 바로 '장 주네'이다. 그는 '계속적으로 투쟁 중인 다른 정체성과의 동일시를 통해 황홀경을 느끼려는' 인생이 말년적인 인간이다. 이 사람의 과거 행각과 사이드가 직접 만난 이미지는 처음부터 모종의 긴장감을 형성한다. 사이드는 장 주네의 팔레스타인과의 관계를 그의 말년 작품을 통해서 읽어낸다.그러면서 <오리엔탈리즘>의 저자이자 팔레스타인으로서 서방세계의 정치관과 자신의 철학을 은연중에 빗대어 설명한다. 가장 사적인 글이면서 지적인 유명인사들의 티테이블 엿듣는 재미를 건네준다. 행동하는 지성으로 온갖 총애를 받는 사르트르에게 '비겁한 자'라는 평가를 내리는 대목은 '말년성'의 특징인 '배반'의 쾌감을 준다. 또한 선비같은 아도르노와 시골장돌뱅이의 이미지가 남아있는 주제를 비교하는 대목도 흥겹다. 장 주네를 표현하는 이런 차이를 표현하면서도 '말년성'의 의미를 이해하게 도와준다. 

주네에게 악마든 신이든 절대자는 인간의 정체성이나 인격화된 신으로는 인식될 수 없고, 오직 모든 것이 말해지고 행해진 뒤에도 가라앉지 않는 것, 포섭되거나 길들여지지 않는 것으로만 인식된다. 그와 같은 힘은 어쨌든 거기에 몸담은 사람들을 통해 표현되고 배려되어야 하는데 그럴 경우 자체적으로 노출되거나 인격화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 주네의 최종적이면서 가장 완고한 역설이다.  

이 외에 내가 처음 들어보는 작가인 람페두사,3대 비극작가인 에우리피데스 (그의 <바카소스의 여인들>이 분석대상이 되는데 이 텍스트는 테리 이글턴의 <성스러운 테러>의 도입부에 '디오니스소적 폭력/아폴로의 과잉폭력'이라는 대립구도 속에도 등장한다.) 그리고 토마스 만, 브리튼, 비스콘티가 '말년성'의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 또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마지막 세사람이 모두 '베네치아'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소설 <베네치아의 죽음>과 관련되어있다. 비스콘티의 영화때문에 이제는 말러도 넣어야 되지 않을까 싶다.) 사이드는 이들을 엮어낸 '베네치아'라는 도시마저 '말년성의 형식'으로 분석한다.(내가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은 곳 중에 하나다.) 사이드는 베네치아가 '영광과 부패,창조성과 타락의 역사' 를 아무렇지 않게 결합하고 있는 도시라고 말한다. 따지고 보면 그렇지 않은 도시가 또 어디있겠나 싶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두번째 대목이다. 이 도시가 항상 '외부자'에 의해 씌여지며 그렇기에 이미 '어떤 이미지를 바탕으로 하고,이것이 다시 텍스트에 의해 강화된다'는 점이다.즉 베네치아는 항상 이미 보고 이미 읽은 것일 뿐만 아니라 이미 씌어진 것이다. 우리는 주관과 객관이 혼재하고, 동양과 서양이 섞이며, 존재와 비존재가 혼합되어 버린 도시의 그림을 얻게된다. 비코가 말하는 '인게니움' (인벤션과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인 듯 하다.) 인간의 역사를 인간의 마음이 작용한 산물로 파악하는 능력.즉 풍부한 상상력의 도화지를 펼쳐주는 창안적 발산의 공간으로서, '말년성'과 혼연일체되어 있는 베네치아를 만나게 된다.   

나는 문득 어느 벽 앞에 당도했다. 벽에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여기서 너의 미래가 시작된다>  

                                                                             -옥타비오 빠스 '불면의 기록'중에서'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인가? 죽음이 또다른 미래의 시작이라는 건가? 아니다. 사이드는 살아서도 그 벽을 만날 수 있다고 말했다.그 말년성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길을 갈수 있다고 했다.그것이 그의 사후에 나온 이 책이다.  

자..이제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의 리뷰를 끝내자. 식습관과 관련된 가벼운 이야기로 말이다. 앞서 말했듯이...나는 앞으로도 비빕밥,자장면, 팥빙수를 잘 섞어 먹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내 나이 30을 넘던 어느날, 나도 모르게 알게 된 내 습관이다.   

후기) ... 이 책을 내가 분명히 좋아할 거라고 보내준 친구에게 감사한다. 음...좋았다. 나 역시 이 책을 상당히 좋아할 친구에게 보냈다. ...그리고 이 책은 거짓말 안보태고 정말 한달음에 읽을만큼 재미있다. 물론 한가지 개념을 가지고 주구장창 끌어가는 것이 답답할 수도 있고 반면에 일관적이다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만약 앞의 생각이라면 '바리에이션'은 원래 싫어하는 사람이겠거니 한다.(당근 바흐의 비수면용 수면음악도, 모차르트의 '반짝 반짝 작은별'도,.베토벤의 애인 이름같지만 그렇지 않은 디아벨리로 모두 싫어할 것 같다.) 이 책은 조금은 이런 서양 예술에 관심이 있어야지 볼 수 있다.  'R 슈트라우스가 새해되면 신년 음악회 매번 하는 그 사람이지' 하면 좀 곤란하다. 최소한 옛날에 MBC 9시 뉴스 타이틀 음악이지 정도로 구분은 되어야...아 몰라.정말. 스탠리 큐브릭의 유인원 뼈다귀 던지는 그 장면...그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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