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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효과 - 무명 화가에서 문화 아이콘으로
나탈리 에니크 지음, 이세진 옮김 / 아트북스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겨울 바람은 차가왔다.귀없는 남자의 그림을 보기 위해 귀 달린 남녀노소는 양 손으로 귀를 가려야만 했다.친절한 매표소 직원의 말을 되뇌이며 시계를 줄 곧 봐야 했다.
"지금 티켓팅하시면 1시간 이상 기다려야 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미술관 입구에 다가가는 느린 움직임이라도 없었다면 언덕 위의 1시간은 고문이었을 것이다.고흐를 만나는 길은 고행의 길이었다.사행천의 물줄기처럼 S자로 이어진 도상에서 이런 키치적인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고흐를 죽인 사람은 누구인가?-그리고 왜 사람들은 고흐에 열광하는가?"
전시회장은 거의 시장이었다.한 걸음 물러서서 볼 수 밖에 없었다.다행이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온 키 작은 아이들이 많아서 뒷줄의 불이익은 그다지 없었다.나는 고흐의 몇 몇 작품 앞에서 오랜 시간을 머물렀다.그 중에는 고흐의 자화상도 있었다.잠시 동안 그와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나누었다.(이게 나름 뭐 좀 달라 보인다고 했는데..퍽이나 키치적인 발상이다.이 책에서는 작품을 의인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도대체 당신을 외면한 다수의 사람과 지금 당신에게 열광하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 사이에서 당신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불쌍한 고흐씨"
나탈리 에니히의 <반 고흐 효과>를 읽고 나는 내가 상당히 키치적인 방식으로-마치 나는 조금 더 세련된 듯 했지만 결국엔 별반 다를 것 없는-고흐 전시회를 보고 왔음을 뒤늦게 알아차렸다.또한 긴 줄 위에서 서있으며 했던 질문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답을 얻을 수 있었다.내가 했던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질문,'고흐의 사회적 살해'에 대해서는 유명한 고흐 평론에서 아르토가 이미 던졌던 문제였을 뿐이다.또한 이미 한 세기 이상 고흐의 죽음을 둘러싼 공론으로 포장된 것이었다.고흐 전시회가 내게 준 것은 사실 고흐의 그림 보다 그런 '질문'이었고 이 책을 만날 수 있게 해준 행운이었다.만약 내가 이 책을 보지 않았더라면 나는 내 질문들에 대해 며칠 끙끙거리다 잊었을 것이다.
"샤갈전의 열기와 고흐전의 광분을 '고전 작품의 위대함',또는 '문화 불모지의 한계,대중들의 패거리 정신' 이런 이항적이고 편리한 구분 말고 설명할 길은 없을까?" 하면서 말이다.
나탈리 에니히의 <반고흐 효과>는 고흐의 작품을 미학적으로 설명한다거나 고흐의 미술사적 위치를 알려주는 책이 아니다.이것은 아주 잘 씌여진 예술 사회학책이다.미시적이고 분석적이며 또한 논리적이다
이 책이 '고흐 현상'에 대해 던지는 애초의 질문은 길 위에서 했던 내가 했던 질문과 유사하다.저자는 고흐의 작품과 고흐라는 인간이 두가지 차원에서 어떻게 신화의 이름을 얻는지를 하나씩 설명해 나간다.몇 가지 고흐를 둘러싼 상식적인 생각들을 에니히는 '신화의 모티프'라는 개념을 들어 이야기한다.가장 대표적인 것이 '몰이해의 모티프'이다.
누구나 고흐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모티프가 바로 그것이다.그는 동시대에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다.그의 작품은 물론이고 인간 고흐 역시 동시대의 완전한 소외물이었다.즉 '몰이해'되었다는 것.고흐를 위한 최고의 레퀴엠이라고 할 만한 돈 맥클린의 <빈센트>에도 그런 말이 나온다."나는 이제 당신이 무엇을 말하려는 지 알 것 같아요...사람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지요.어떻게 듣는지도 몰랐지요.하지만 이제는 귀를 기울일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이 곡을 참 좋아하다.하지만 이 곡이야말로 고흐에 대해 축성된 가장 전형적인 신화의 복음성가이다.
작품이라는 측면에서 고흐에 대한 몰이해는 정상적이고 상식적이다.물론 그가 동시대에 궁핍했고 그의 작품은 문짝으로 쓰일정도로 천대받았지만 그것은 고흐에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니었다.고흐는 독학으로 그림을 그렸고 그 기간은 불과 10년이다.그 때나 지금이나 젊은 작가에게 당대 대중이 시선을 두는 일은 극히 드물다.만약 고흐가 60-70살까지 살았다면 고흐의 작품은 당대 인정을 받았을 수도 있다.물론 대신 지금처럼 순례객을 몰고 다니는 예술의 성인 반열에 오르지는 못했겠지만 말이다.또한 지금처럼 한 작품이 천문학적 액수에 팔리지도 않았을 것이다.최근에 경매에 오른 작품이 800억원이라나.....
고흐 당대와 사후 오래지나지 않아 평단에서는 고흐 작품에 관심을 갖은 전문가층들이 있었다.물론 그들에게는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고흐의 독창성이 그들을 매료시켰는데 그것은 전통을 거부하는 모더니스트 비평가와 반아카데미 작가의 밀월 같은 것이다.(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떠올려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들라쿠르와와 쿠르베의 '사실주의'부터 시작된 전통/현대성의 흐름에서 고흐는 '앙뎅팡당'계열로 포함된다.)
'몰이해'의 모티브와 연동되면서도 중요한 개념이 '죄의식의 모티프'이다.저작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보자.
"예술의 공공선에 이바지하기 위해 독보적인 한 인간이 치른 대가는 공동체의 입장에서 보면 빚에 해당한다.그 빚은 작품의 위대함은 물론 극단적인 희생의 성격 때문에 더욱 과중하게 여겨진다".이것은 시간을 거쳐서 대속되어야 하는 인류의 죄의식 같은 것이다.돈 맥클린의 <빈센트>의 주를 이루고 있는 정서.그리고 반 고흐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가련함 같은 것들이 대속을 위한 토대가 된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이 죄의식의 형태는 논리적으로 집단적일 수 없지만 사실상 통상적 생각이라는 집단성을 띠게 된다.이 통상적 생각 혹은 상식이 특별히 고착된 지점에 반 고흐를 놓을 수 있으리라"
물론 이런 대속에는 증여라는 과정이 필수적이다.고흐의 증여와 인류의 대속 사이에는 시간차이가 발생한다.그리고 이 대속은 만족될 수 없다.
또한 작가는 인간 고흐를 구성하는 과정에 '종교적 모티프'의 이용을 지적한다.그는 고흐 사후 전기작가와 평론가들이 13세기 성인전의 모티프와 유사한 방식으로 고흐의 삶을 목적론적으로 맞추어나가기 시작한다고 말한다.스스로 생각하는 고흐의 이미지상과 이런 단어들 사이의 유사성을 따져본다면 저자의 지적에 수긍할 수 밖에 없다. "도덕적 순결함.비범한 인물,소명의식,고립,반순응성,금욕,실제적 삶의 부적응,자기희생,순교" ...그리스도적인 성인과 고흐의 이미지는 원숭이와 인간의 유전자만큼이나 유사하다.
"소명과 금욕의 성화자라는 모티프와 극단적인 죽음의 순교자라는 모티프에 반고흐의 전설적인 생애에 투사된 그리스도의 모습이 덧붙여진다."
이것은 예술적 탁월성이 종교적 형태의 위대함으로 폭넓게 유도되는 방식을 보여준다.또한 고흐 효과라는 범주가 예술의 영역에서 윤리와 종교의 영역으로 전도되는 과정을 예시하고 있기도 하다.저자는 반 고흐가 현대 예술사에서 위대한 순교자의 존재를 최초로 보여준다라고 말한다.고흐의 사례는 이제 소급적으로 예술가들에게 적용된다.그래서 '고흐 이전과 고흐 이후'라는 말도 가능한 것이다.예를 들어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드라마에서 흔히 써먹는- 예술가의 이미지.가난하고 힘들지만 맑은 영혼과 자기 완결성의 소명을 띤 이런 예술가들이 실제 사회 영역에서 자기 자리를 얻을 수 터전이 마련된다.
이 책은 예술 사회학 책 답게 여러가지 영역을 넘나든다.예를 들어 고흐의 광기와 작품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심리학과 미학사이를 오고 간다.고흐의 광기를 바라보는 시선,작품과의 연관성들이 시간을 거치면서 어떻게 구성되어 지는 지를 흥미롭게 설명한다.아마 최근의 분위기는 정신의학적으로는 고흐가 완전히 미친 것은 아니다..왔다 갔다 했다...정도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왜 그렇게 받아들여져야 하는 지를 이 책은 또 설명한다.고흐가 완전 미쳐버린다면 고흐의 그림은 그저 미치광이의 그림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그렇게 되면 그림의 후광은 없다.결국 고흐의 신화는 정신적 질환에도 불구하고 정신질환을 극복하여 인류 정신의 완성이라는 영광어린 스토리로 마감되어야만 한다.저자는 이 과정을 이렇게 말한다.
"광기가설로 그를 공통의 인류 밖으로 추방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희생 가설로 그를 영웅시하며 인류공동체 안에 다시 편입시켰던 것이다...거의 독보성은 정상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는 탈인간화였다.그러나 그의 광기는 예술을 위해 치른 대가였으므로 재인간화가 가능했다."
이 책은 이 외에도 반 고흐를 둘러싸고 사후 지금까지 발생했던 현상들을 종합한다.그리고 '일탈,혁신,화해,순례'라는 큰 도구를 가지고 그가 어떻게 전설적인 반 고흐가 되는지를 그려내고 있다.하지만 이 책이 고흐를 작품을 깍아내리거나 그의 독창성을 폄하하는 것을 목적으로 씌여 지진 않았다.저자는 고흐의 예술적 독창성과 그에 대한 대중들의 열광을 무턱대고 매도하지는 않는다.프랑스같은 곳에서는 고흐의 마을로 찾아가는 순례여행도 있다고 하니 사실 '군중성'이라고 더 매도할 수도 잇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반 고흐 효과>를 읽고 나서 오히려 고흐가 더 사랑스럽다.또한 '고흐를 죽인 사람과 길게 늘어선 대중 사이의 괴리감' 역시 많이 해소되었다.고흐에 대한 맹목적 애정이나 대중에 대한 맹목적 부정은 그런 괴리감을 더욱 키울뿐이다.또한 대중의 잘못이 아닌 것을 대중에게 전가하는 것 역시 같은 우를 범할 수도 있다.
<반 고흐 효과>는 좋은 책이다.분석의 흐름 역시 훌륭하며 논리적이다.문장이 이해가지 않는 어려운 대목들이 중간 중간 많기는 하다.원문자체가 그다지 쉽지 않았다고 하니 번역자만을 욕할 수는 없을 것이다.중간 중간 글을 놓칠 수 밖에 없는 문장들은 2% 아쉬움으로 남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