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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안에서 살살 녹는 케이크, 부드러운 스테이크, 감칠맛 나는 소스가 얹어진 샐러드, 향기가 입안 가득 머물고 있는 포도주, 부처님이 음식냄새에 담을 넘었다는 불도장, 샥스핀 등등 달콤하면서도 부드럽고 향기를 음미하면서 즐기는 식사는 먹는 즐거움 그 이상이다.
우리가 행복을 느끼는 것 중에 하나가 식사다. 즐거운 식사는 스트레스를 없애주기도 한다. 스트레스를 날려 보내는 방법이 요즘은 난무하지만 가장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방법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건강에 대한 정보가 넘쳐흘러 모든 병의 원인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끔 한다. 음식도 그냥 먹으면 안 되고 건강을 위해 어떤 음식을 골라서 먹어야 된다고 한다. 아무리 먹고 싶지 않아도 건강에 좋다고 하면 먹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이 더 스트레스를 줄 때가 있다. 건강에 좋은 음식을 섭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먹을 때의 기분은 즐거움을 넘어 일상의 피로도 회복시켜준다.
웰빙을 지향하는 시대에 건강을 위한 식단이 넘쳐나고 있지만 그래도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는 것처럼 사람의 기분을 업그레이드 해주는 것도 없다.
그렇지만 기분 좋은 식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먹는 것은 인간의 기본 욕구이지만 그것처럼 가난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도 없다.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지만 가난은 행복한 삶을 위태롭고 고통스럽게 한다.
가난하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일이 너무나 많지만 맛있는 식사를 하지 못하고 단순히 생존만을 위해 식사를 한다면 그것처럼 사람을 슬프게 만드는 것도 없다. 불행한 삶을 절실히 느끼게 해주는 것이 식사이기 때문이리라.
가난한 자의 슬픔
빈세트 반 고흐의 <감자를 먹는 사람들>
가난한 자는 하루를 보내기도 버거운 날들 속에 가족이 생기고 그 가족들 때문에 할 일은 넘쳐나 몸은 곤고하다. 아침이 오면 가난이 사라져 주기만을 기도하기에도 바쁘다. 그래서 가난은 불어오는 바람도 빛나는 햇살도 느낄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내일은 언제나 무섭게 다가올 뿐이다. 그들의 하루는 생존을 위한 시간만 존재한다. 노동이 신성하다고 하지만 가난한 자에게는 노동은 끝도 없는 고통만 선사할 뿐이다.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감자를 먹는 사람들> 이 작품은 노동의 신성한 가치를 표현한 작품이다. 그는 목사였을 때부터 가난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품성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고흐는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면서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삶을 그리게 된다.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이 작품에 대해서 ‘등불 아래 감자를 먹는 사람들이, 땅을 경작할 때 쓰는 바로 그 손으로 식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달하려고 애썼다. 그림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노동으로 거칠어진 그들의 손과, 그렇기 때문에 밥을 먹을 만한 자격이 있다는 사실이다’라고 했다.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등불 아래 커피와 감자를 나누어 먹고 있는 다섯 명의 가족의 모습에서 비장함마저느껴진다. 고흐는 화면 중간 중간 노란색으로 붓 터치를 거칠게 넣음으로써 빛의 효과를 주고 있으며 이 작품에서 그는 의도적으로 화면을 어둡게 처리했다.
빈센트 반 고흐는 노동자의 삶을 사랑했다. 이 작품은 그가 처음으로 시도한 대규모 구성 작품으로서 다섯 명의 시선이 다른 것은 그동안 작업한 것을 한 화면으로 옮겨 그렸기 때문이다.
식사, 또 다른 즐거움
에두아르 마네의 < 풀밭 위의 점심 식사 >
일상적으로 도심에서 하는 식사도 즐겁지만 때로는 황금빛 햇살 아래 휴식을 취하기 위해 피크닉을 떠나 색다른 먹을거리를 찾아 먹는다면 더 큰 즐거움은 없다.
식도락가들은 맛있는 한 끼 식사를 위해 먼 곳까지 원정도 불사한다. 그들은 일을 하기 위해,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맛있는 것을 향한 욕구가 강해 귀중한 시간을 소비한다. 맛있는 식사는 그만큼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삶에서 포기할 수 없는 즐거움 중에 하나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다. 그래서 어디를 가나 먹는 즐거움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피크닉의 더한 즐거움은 가족이 아닌 사람들과 함께 했을 때 묘한 해방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먹는 즐거움의 두 배의 짜릿함을 선사한다. 사과도 몰래 먹는 사과가 맛있는 것처럼.
에두아르 마네(1832~1883)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피크닉을 즐기고 있는 남자와 여자의 모습이지만 벌거벗은 여성 때문에 에로티즘이 강하게 부각되고 있는 작품이다. 살롱 전에 출품했다가 낙선한 작품으로 낙선작 전시회에 공개되었다. 하지만 작품이 주는 충격 때문에 다른 어떤 작품보다 유명해졌다. 이 작품으로 인해 마네는 첫 번째 스캔들에 휩싸이게 된다.
이 작품이 당시 비평가는 물론 대중에 비난을 받았던 가장 큰 이유는 남자들이 당시 유행하는 옷차림을 한 부르주아로서 벌거벗은 여인과 대낮에 즐기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비도덕적인 현실의 세계를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외설 시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었다.
이 작품에서 화면 정면에 앉아 있는 벌거벗은 여인이 빅토리아 뫼랑이다. 그녀는 관람객을 향해 뻔뻔할 정도로 당당하게 앉아있고 화면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들과 뒤로 보이는 여자의 시선은 관람객을 외면하고 있다.
그 당시 신이 만들어 낸 최고의 걸작인 여성의 누드는 이상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는데 이 작품은 현실 그대로를 반영했기에 충격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더군다나 위대한 자연 앞에서 외설스런 포즈로 앉아 있는 모델의 벌거벗은 모습은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창녀의 이미지였기에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비평가들과 대중은 에로티즘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신화 속에 숨겨진 의미로서만 보았었다. 실제 삶 속에 있는 창녀의 이미지가 강하게 부각된 작품을 전시장에서 본 것에 당혹감을 느꼈던 것이다.
마네에게 여인은 환상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있는 여인이었다. 이 작품에서 벌거벗은 여인에 가려져 있지만 정물화가로서 마네는 빵과 바구니 그리고 자연을 뛰어나게 묘사했다.
화가 박희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