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최근 <주간동아> 기사중 정중헌 서울예대 교수의 한국인의 유별난 ‘인상파 편식’ 이라는 기사를 접했다. 모네의 대표적인 작품 <수련>이 국내에서 전시되고 '오르세 미술관 특별전', ‘반 고흐에서 피카소까지’전 등 많은 미술 유파중 유독 인상파 화가들에 대한 관객과 미술시장의 편애에 대한 글이었다. 기호도 좋지만 미술시장에 큰흐름으로 봐서나 다양한 미술 쟝르에 대한 소개를 통해 미술관람객들의 눈을 높이기 위해서는 현대미술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쟝르나 유럽을 중심으로한 서양미술만이 아니라 아시아 아프리카 미술 등에 대한 전시가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러구 보니 학교 다니며 미술시간에 미술사조에 대해 배운 것중 기억에 남아 있는 건 마네, 모네로 시작된 인상파 이야기, 고흐 고갱 세잔으로 대표되는 후기 인상파 정도다. 거기에 입체파 피카소, 초현실주의, 폴록의 추상화 정도가 그나마 조금은 기억이 난다.

이런 형편이니 나이 먹고 조금은 다양한 문화적 경험을 하고 싶어 미술 전시를 찾으려들면 이해도 안되는 추상미술이나 현대미술보다는 낯익은 작가와 작품이 많은 인상파가 주를 이루는 전시를 찾기 마련이고 예산 등의 문제로 국립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전시를 주관하지 못해 기획사들이 전시를 유치하다 보니 블록버스터 기획전에 대중에서 손쉽게 먹히는 인상파로 대표되는 서양미술 중심의 전시회만 열리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학교 미술 교육에서부터 그리기를 중심으로 한 실기뿐 아니라 미술 이론 수업도 폭넓은 내용으로 진행되었으면 좋겠고 국립미술관 등 공공기관들이 앞장 서서 다양하고 풍성한 전시회들을 열어서 주머니 가벼운 서민들도 부담없이 눈을 호강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http://www.donga.com/docs/magazine/weekly/2007/05/02/200705020500082/200705020500082_1.html

기사 내용 링크 걸었습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모1 2007-05-17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익숙한 것을 찾는것이 당연하지 않나..싶기도 하고 교과서에서 보던 그림 실제로 보고 싶어서가 아닐까..싶네요.현대미술관인가에서 우리나라 화가의 노랑저고리인가 본적 있는데...교과서에서만 보다가 실물로 보니 어찌나 반갑던지....후후...근데 추상화는 보고 있어도 뭔지 모르기 때문에 감상이 안되더군요.~~

모1 2007-05-17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식함을 드러내고 솔직히 말해서 그게 왜 예술인지 잘 모르겠어요. 미술평론가같은 사람들은 예술이라는데 내 눈엔 그저 물감뿌리고 선그어논 것 밖에 모르겠다..싶더라구요. 후후..같은 그림을 보고도 미술하는사람들은 생동감이 넘치고등등으로 이야기하던데 그 온갖 표현단어나 미사여구가 부러울뿐이에요. 그런 느낌을 잘 못받아서 쓸말이 없더라구요. 후후..

네꼬 2007-05-17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행에 성공할 것들만 "보여주는" 쪽, 선택적으로 "보여주는" 힘을 갖고 있는 쪽 때문에 보는 우리가 스스로 균형 잡기가 참 어려워지는 것 같아요. 화려한 전시는 아니더라도 동네에서 놀고 있는 복지관, 문화관들만 잘 활용해도 전시 문화가 훨씬 풍요로워질 텐데요. -_- (라고 말하면서 오르세 미술관전 꼭 가야 하는데, 입맛을 다시는 이중인격 고양이.ㅠ_ㅠ)

antitheme 2007-05-17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1님 / 우리가 그림을 이해하고 다양한 미술작품을 경험해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겠지요. 저도 추상작품만 아니라 구상작품을 봐도 잘 몰라요.
섬사이님 / 미술가로 가지 진로를 잡는 경우가 아니라면 미술을 즐기고 감상하는 교육을 더 많이 받을 기회가 생긴다면 좋겠죠.
네꼬님 / 맞습니다. 굳이 거장의 작품들이 아니더라도 생활 속에서 미술작품을 접할 수 있다면 좋겠죠. 오르세 미술관전 저도 보러 가고 싶어 안달이 났습니다. ^^
 



마그리트의 그림은 현대문화의 ‘젖줄’이다. 그의 초월적 상상력은 현대미학의 최대 화두다. 시 소설 음악 영화 무용 등 예술 전(全) 분야에 마그리트만큼 지대한 영향을 미친 예술가도 드물다.

세계적으로 최고의 인기를 끈 영화 ‘매트릭스’에서 스미스 요원이 숱하게 복제되는 장면은 마그리트의 대표작 ‘겨울비’(신세계백화점 가림막에도 쓰였다)를 패러디했다고 한다. 또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의 장면 중에는 마그리트의 초현실적 상상력을 첨단기술을 통해 실현한 대목이 많다.

현대 록음악의 창조자인 비틀즈의 멤버 폴 메카트니는 마그리트의 작품 속 ‘사과’를 응용해 ‘애플레코드’사를 설립했고, 롤링스톤즈도 마그리트의 작품을 응용해 레코드판을 디자인했다.

아니, 멀리 갈 것도 없다. 낮과 밤이 공존하는 마그리트의 저 유명한 그림 ‘빛의 제국’<사진>은 국내서 최근에만도 3명의 소설가(김영하 김연수 정이현)가 소설로 녹아낸바 있다. 특히 밤과 낮이 한 화면에 공존하는 기이한 분위기의 역작 ‘빛의 제국’은 문학을 하는 작가들을 가장 매료시키는, 특별한 작품이다.

작가 김연수는 그의 단편소설 ‘르네 마그리트, 빛의 제국. 1954년’과 관련 이렇게 말했다. “처음 그 그림을 봤을 때 나는 화가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데 자꾸 보니 그림 속 지상의 시간은 분명 밤인데 하늘의 시간은 낮이었다.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두 영역(낮과 밤)이 모인 것이다.

이를 알아차리는 순간, 세계가 재편하는 광경을 목도할 수 있었다.” 이후 작가는 술술 소설을 써내려갔다. 김영하도 신작소설 ‘빛의 제국’에서 밤이면서도 낮인 마그리트의 초현실적 빛을 차용했고, 문화평론가 진중권은 자신의 베스트셀러 ‘미학 오딧세이’에서 마그리트의 작품과 철학을 자주 인용했다.

심지어 2003, 2004년 연세대 논술고사에서도 마그리트의 작품이 출제돼 암기력에만 의존했던 적지않은 수험생들에게 한방 먹인(?)바 있다.

이영란 기자(yrlee@heraldm.com)

- `헤럴드 생생뉴스` Copyrights ⓒ 헤럴드경제 & heraldbiz.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입안에서 살살 녹는 케이크, 부드러운 스테이크, 감칠맛 나는 소스가 얹어진 샐러드, 향기가 입안 가득 머물고 있는 포도주, 부처님이 음식냄새에 담을 넘었다는 불도장, 샥스핀 등등 달콤하면서도 부드럽고 향기를 음미하면서 즐기는 식사는 먹는 즐거움 그 이상이다.

우리가 행복을 느끼는 것 중에 하나가 식사다. 즐거운 식사는 스트레스를 없애주기도 한다. 스트레스를 날려 보내는 방법이 요즘은 난무하지만 가장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방법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건강에 대한 정보가 넘쳐흘러 모든 병의 원인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끔 한다. 음식도 그냥 먹으면 안 되고 건강을 위해 어떤 음식을 골라서 먹어야 된다고 한다. 아무리 먹고 싶지 않아도 건강에 좋다고 하면 먹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이 더 스트레스를 줄 때가 있다. 건강에 좋은 음식을 섭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먹을 때의 기분은 즐거움을 넘어 일상의 피로도 회복시켜준다.

웰빙을 지향하는 시대에 건강을 위한 식단이 넘쳐나고 있지만 그래도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는 것처럼 사람의 기분을 업그레이드 해주는 것도 없다.

그렇지만 기분 좋은 식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먹는 것은 인간의 기본 욕구이지만 그것처럼 가난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도 없다.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지만 가난은 행복한 삶을 위태롭고 고통스럽게 한다.

가난하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일이 너무나 많지만 맛있는 식사를 하지 못하고 단순히 생존만을 위해 식사를 한다면 그것처럼 사람을 슬프게 만드는 것도 없다. 불행한 삶을 절실히 느끼게 해주는 것이 식사이기 때문이리라.

가난한 자의 슬픔
빈세트 반 고흐의 <감자를 먹는 사람들>

가난한 자는 하루를 보내기도 버거운 날들 속에 가족이 생기고 그 가족들 때문에 할 일은 넘쳐나 몸은 곤고하다. 아침이 오면 가난이 사라져 주기만을 기도하기에도 바쁘다. 그래서 가난은 불어오는 바람도 빛나는 햇살도 느낄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내일은 언제나 무섭게 다가올 뿐이다. 그들의 하루는 생존을 위한 시간만 존재한다. 노동이 신성하다고 하지만 가난한 자에게는 노동은 끝도 없는 고통만 선사할 뿐이다.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감자를 먹는 사람들> 이 작품은 노동의 신성한 가치를 표현한 작품이다. 그는 목사였을 때부터 가난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품성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고흐는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면서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삶을 그리게 된다.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이 작품에 대해서 ‘등불 아래 감자를 먹는 사람들이, 땅을 경작할 때 쓰는 바로 그 손으로 식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달하려고 애썼다. 그림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노동으로 거칠어진 그들의 손과, 그렇기 때문에 밥을 먹을 만한 자격이 있다는 사실이다’라고 했다.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등불 아래 커피와 감자를 나누어 먹고 있는 다섯 명의 가족의 모습에서 비장함마저느껴진다. 고흐는 화면 중간 중간 노란색으로 붓 터치를 거칠게 넣음으로써 빛의 효과를 주고 있으며 이 작품에서 그는 의도적으로 화면을 어둡게 처리했다.

빈센트 반 고흐는 노동자의 삶을 사랑했다. 이 작품은 그가 처음으로 시도한 대규모 구성 작품으로서 다섯 명의 시선이 다른 것은 그동안 작업한 것을 한 화면으로 옮겨 그렸기 때문이다.

식사, 또 다른 즐거움
에두아르 마네의 < 풀밭 위의 점심 식사 >

일상적으로 도심에서 하는 식사도 즐겁지만 때로는 황금빛 햇살 아래 휴식을 취하기 위해 피크닉을 떠나 색다른 먹을거리를 찾아 먹는다면 더 큰 즐거움은 없다.

식도락가들은 맛있는 한 끼 식사를 위해 먼 곳까지 원정도 불사한다. 그들은 일을 하기 위해,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맛있는 것을 향한 욕구가 강해 귀중한 시간을 소비한다. 맛있는 식사는 그만큼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삶에서 포기할 수 없는 즐거움 중에 하나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다. 그래서 어디를 가나 먹는 즐거움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피크닉의 더한 즐거움은 가족이 아닌 사람들과 함께 했을 때 묘한 해방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먹는 즐거움의 두 배의 짜릿함을 선사한다. 사과도 몰래 먹는 사과가 맛있는 것처럼.

에두아르 마네(1832~1883)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피크닉을 즐기고 있는 남자와 여자의 모습이지만 벌거벗은 여성 때문에 에로티즘이 강하게 부각되고 있는 작품이다. 살롱 전에 출품했다가 낙선한 작품으로 낙선작 전시회에 공개되었다. 하지만 작품이 주는 충격 때문에 다른 어떤 작품보다 유명해졌다. 이 작품으로 인해 마네는 첫 번째 스캔들에 휩싸이게 된다.

이 작품이 당시 비평가는 물론 대중에 비난을 받았던 가장 큰 이유는 남자들이 당시 유행하는 옷차림을 한 부르주아로서 벌거벗은 여인과 대낮에 즐기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비도덕적인 현실의 세계를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외설 시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었다.

이 작품에서 화면 정면에 앉아 있는 벌거벗은 여인이 빅토리아 뫼랑이다. 그녀는 관람객을 향해 뻔뻔할 정도로 당당하게 앉아있고 화면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들과 뒤로 보이는 여자의 시선은 관람객을 외면하고 있다.

그 당시 신이 만들어 낸 최고의 걸작인 여성의 누드는 이상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묘사되었는데 이 작품은 현실 그대로를 반영했기에 충격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더군다나 위대한 자연 앞에서 외설스런 포즈로 앉아 있는 모델의 벌거벗은 모습은 돈을 받고 몸을 파는 창녀의 이미지였기에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비평가들과 대중은 에로티즘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신화 속에 숨겨진 의미로서만 보았었다. 실제 삶 속에 있는 창녀의 이미지가 강하게 부각된 작품을 전시장에서 본 것에 당혹감을 느꼈던 것이다.

마네에게 여인은 환상의 세계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있는 여인이었다. 이 작품에서 벌거벗은 여인에 가려져 있지만 정물화가로서 마네는 빵과 바구니 그리고 자연을 뛰어나게 묘사했다.

화가 박희숙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박완서 산문집 <두부>를 읽다보니 드레스덴 미술관을 방문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 나도 가본 곳인데."

김윤식교수와의 에피소드 중 끌로드 로랭(Claude Lorrain)의 「아시스와 갈라테아」라는 작품이 나온다.

"잠시만 내가 가지고 있는 도록에 있을건데..."



드레스덴 미술관에서 장만한 전시 도록... 독일어판과 영어판 두가지가 있었는데 독일어판은 읽어볼 엄두도 안나고 영어판을 선택했는데 역시 그림만 볼뿐이다.



로랭의 작품이 있긴한데 다른 작품이다. 이럴줄 알았으면 좀더 미술관 갔을 때 좀더 자세히 볼 걸 그랬었다. 드레스덴 미술관은 사진 촬영이 가능했었으니 찾아보면 그림을 찍은 게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아쉬워 그작품을 찾았다.

로랭은 원시인이 살아가는 생활인 목가적인 풍경을 그린 대가이다. 잔잔한 파도, 석양빛에 물든 바닷가에 사는 순박하고 멋진 인간의 모습을 그린 것이 바로 "아시스와 갈레테아"이다. 지평선에는 꾸불꾸불한 산맥의 옆모습이 파르스름하게 보인다. 바닷가의 바위에는 저녁 어둠이 스며들었으나, 먼곳에는 아직 햇빛이 충만하여 전체적으로 가볍고 장엄하고 또 화려함이 조화되어 있다.

<두부>에서 인용된 김윤식교수의 그림 해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코노믹리뷰 2006-07-14 10:39] 

얼굴도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집안도 좋고, 능력도 탁월한 데다 남자친구까지 노블레스인 여자는 여자들 사이에서 부러움의 대상이자 질시의 대상으로 꼽힌다. 어느 것 하나 갖추기 힘든데 다 갖추고 있으니 자조석인 어조로 하나님은 참으로 불공평하다를 뛰어 넘어 재수 없는 여자라고도 칭한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여자들은 그런 것들을 원한다. 특히 미모는 가장 갖고 싶은 조건이다. 백설공주·신데렐라·콩쥐 등 동화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미모 하나만 가지고 성공한 경우가 많아 여자들은 미모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미모 하나면 부와 명성, 덤으로 잘생긴 왕자님을 가지게 된다는 스토리의 수많은 소설과 영화·만화의 주인공을 어린 시절부터 보고 자랐기 때문에 여자들의 잠재 의식 속에 항상 미모에 대한 동경이 있어서다.

그래서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니?’ ‘바로 거울의 주인이십니다’하는 말은 여자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아하는 말이다.

그렇지만 여자들은 미모가 뛰어난 여자들을 보면 흉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만 남자들은 미모가 뛰어난 여자들을 보면 소유욕이 발동한다. 특히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일수록 미모의 여성을 더욱 더 소유하고 싶어 하고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를 원한다. 남자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소유하고자 하지만 때로는 미모의 여성이 거부할 때도 있다. 미모가 뛰어난 여자들에게 그것은 축복인 동시에 재앙으로 다가온다. 질투에 눈이 먼 남자는 소유하지 못하면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너무 예뻐 영혼을 얻은 조각상
에드워드 번 존스의 <피그말리온과 조각상-영혼을 얻다>

남자들은 미모의 여성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면서도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아름다운 여성과 함께 있었으면 한다. 그래서 미모가 뛰어난 여자들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항상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 특히 조각처럼 아름다운 여자는 잘못을 해도 금방 용서가 되고 못생긴 여자의 잘못은 큰 죄악이 된다.

피그말리온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키프러스 섬에 사는 조각가다. 그는 섬에 사는 여인들의 타락한 모습을 보고 여자를 싫어하게 된다. 피그말리온은 어떤 여자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고 자신의 재능을 이용해 상아로 여인을 조각하게 된다. 피그말리온은 조각상에게 갈라테아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이 완벽한 여인 조각상과 사랑에 빠진다. 곁에 있는 연인을 대하듯 그는 온갖 정성을 다해 갈라테아를 돌보지만 만족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여인의 향기를 느끼고 싶었던 피그말리온은 갈라테아를 살아있는 여인으로 만들어달라고 신께 간절히 기도하게 된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피그말리온의 기도에 감명을 받아 그의 소원을 들어 갈라테아에게 생명을 불어넣는다.

에드워드 번 존스(1833~1898)의 <피그말리온과 조각상-영혼을 얻다>라는 작품은 피그말리온이 신의 도움으로 생명을 얻은 갈라테아와 현실 속의 만남을 표현한 것이다. 번 존스는 피그말리온과 조각상을 4개의 시리즈로 제작한다. 이 작품은 그 중 4번째 작품이다.

피그말리온의 재능을 동경한 그는 이 작품 시리즈에 특별한 애정을 쏟아부었다. 번 존스는 4번째 작품 <영혼을 얻다>의 모델로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여인인 짐바코를 모델로 했다. 그러나 유부남이었던 번 존스는 결코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할 수는 없었다.


너무 예뻐 법정에 선 여자
장 레옹 제롬의 <배심원들 앞의 프리네>

‘세상에 이런 남자 꼭 있다’의 대표적인 인물이 자신의 능력은 생각하지 않고 미모의 여성만 보면 자기 것인 양 행사하려고 하는 남자다. 그런 남자들은 자신의 능력으로 소유하지 못할 때에는 꼭 음모를 꾸며 미모의 여성을 곤경에 빠뜨리곤 한다. 못 먹는 감 찔러 본다는 심보다.

장 레옹 제롬(1824~1904)의 <배심원들 앞의 프리네>라는 작품 속의 프리네는 기원전 4세기께 아테네 시대의 ‘헤타이리’라는 창부보다 조금 나은 직업의 여성이다. 아테네 시대의 여자들은 결혼을 하면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없었고 안주인의 역할을 해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녀들이 헤타이리였는데 첫 번째 조건은 뛰어난 미모와 탁월한 몸매가 뒷받침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들은 술자리에서 지켜야 할 예법과 교양 그리고 남자 손님들을 위해 성 테크닉도 뛰어나야 했다고 한다.

프리네는 그 당시 아테네 남자들의 동경 대상일 뿐만 아니라 프락시텔레스의 조각상 <크니도스의 아프로디테>의 모델이 될 정도로 미모가 뛰어났었다. 하지만 그녀는 돈과 권력을 가진 남자라고 해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절대로 사랑에 빠지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였고 그 성격은 결국 화를 부르고 만다.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겼지만 결코 그녀를 소유할 수 없었던 에우티아스는 프리네에게 신성모독죄라는 누명을 씌우게 된다. 신성모독죄는 사형에 해당되는 죄이기 때문에 에우티아스는 소유할 수 없지만 자신이 죽일 수 없는 프리네를 남의 힘을 빌려 죽음에 처하게 하는 것으로 복수와 더불어 자신의 애욕을 끊어버리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프리네의 정부였던 히페레이데스는 변호를 맡아 배심원들에게 ‘신에게 자신의 모습을 빌려 줄 정도로 아름다운 그녀를 죽일 수 있겠는가?’하면서 배심원들에게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보여주게 된다. 배심원들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보고 ‘신의 의지로 만들어 낸 완벽한 몸매이기 때문에 인간이 만든 법으로 그녀를 벌할 수 없다’고 판결을 내려 프리네는 목숨을 건지게 된다.

장 레옹 제롬는 이 극적인 장면을 <배심원들 앞의 프리네>로 묘사했다. 이 작품에서 히페레이데스에게 옷을 벗긴 채 서 있는 프리네는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고 있다. 화면 왼쪽 끝에는 고발자 에우티아스가 있는데 그의 얼굴을 프리네의 옷으로 히페레이데스는 가려버린다. 그에게 프리네의 몸매를 볼 가치를 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붉은 옷을 입은 배심원들은 그녀를 보기 위해 목을 빼들고 있는데 그것은 관찰자이면서도 동시에 그녀의 무죄를 증명하는 증인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원래 이 이야기에서 프리네는 가슴만 보여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제롬은 이 이야기에서 프리네의 얼굴을 가리면서 몸매가 더 드러나도록 확대시켜 표현했다.

화가 박희숙
동덕여대 미술학부를 졸업하고 성신여대 조형대학원을 졸업한 후 7회의 개인전을 연 화가다. 2004년에는 《그림은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를 출간하면서 작가로도 명성을 쌓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