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고통스러울 때
필립 얀시 지음, 피현희 옮김 / 두란노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이 세상 곳곳에 나타나 있는 고통에 대한 막연한 의문에 대한 답을 얻고자 이 책을 읽어봅니다.


1. 하나님이 왜 고통을 만드셨는지 의아 할 때


고통이 없는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 나병 환자들이 있는 곳이였다. 나병 환자들은 육체적인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고통을 모르기 때문에 억지로 손을 움직이다가 손가락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무리하게 발을 움직이다가 발가락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건강한 일반 사람의 경우는 고통이 손가락과 발가락을 잃어버리기 전에 손과 발의 위험을 감지하여 알려준다.

우리 몸에 고통이라는 시스템이 없다면 삶은 끊임없이 생명의 위험 가운데 있게 되고 운동이나 스포츠는 상당히 위험한 행동이 된다.


고통은 하나님의 실수가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안전장치이다.



2. 하나님의 능력이 의심스러울 때


하나님은 왜 전능한 능력으로 최악으로 보이는 고통들을 종결시키시지 않는가?

하나님은 전능하시지만 사랑이 없으신 것인가? 아니면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능력이 없으신 것인가?


고통은 지나간 후에 그것을 다시 보아야 어렴풋이 그 의미를 알 수 있을 정도이다.

고통이 주어진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없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로마서 8장 18절 말씀)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로마서 8장 22절 말씀)



3. 하나님이 불공평하게 느껴질 때


어느 누구의 잘못이나 징벌이 아닌 고통이 삶에 나타난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도 하나님의 계획도 아니다.

우리가 이야기 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종류의 고통의 삶에 나타난다.


고속 도로를 빗속에서 달리다가 교각으로 미끄러진 경우

희귀한 질병으로 젊은 나이에 남은 삶의 날을 세며 죽음을 기다리는 경우

학교의 수많은 아이들 중에 하필 왜 내 아들이 불의의 사고로 죽어야 하는 상황


이런 비극이 삶에 찾아올 때 "왜 나인가?" "왜 나입니까?" 하는 질문을 본능적으로 하게 된다.

이런 질문은 하나님에게 어느 정도 책임이 있고 고통의 원인을 제공하셨음을 가정하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이 특정한 차를 선택해서 교각으로 벗어나게 하지 않으셨고 수많은 사람중에 몇사람을 골라서 희귀한 질병을 선택하지 않으셨고 수많은 아리들 중에 특정한 아이를 골라 불의의 사고로 내몰지 않으셨다.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죄에 대한 징벌이 아니다.



4. 하나님의 돌보심이 의심스러울 때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대하는 마음과 반응을 통해서 하나님의 돌보심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생애의 많은 부분을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보내셨다. 슬픔과 고통가운데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셨다.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은 고통에 대해 긍휼로 대하셨을 뿐 아니라 직접 고통을 친히 담당하셨다는 것이다.

이 세상과 고통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자연법에 자신을 복종하기로 선택하셨다.


'긍휼'이라는 말은 '함께 고통 당하다'는 라틴어에서 나왔다.

예수님은 가장 깊은 의미에서 긍휼을 보여주셨고 그분은 몸으로 그 고통을 짊어지셨고 우리와 함께 우리를 위해 고통을 받으셨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사야 53장 3~4절 말씀)


http://blog.naver.com/agapeuni/220727592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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