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어김없이 연례행사 하나를 치뤘다. 작년과 달라진 것은 하루 짜리가 닷새 짜리로 바뀌었다는 것. 대학원생으로 학교에 소속된 것과 직장인으로 동사무소에 소속된 것은 천지 차이였다. 이런 빌어먹을. 작년에 하루 다녀온 것만으로도 역겨웠던 그 짓을 올해는 닷새나 해야하다니. 그렇다. 예비군 훈련이다. 이미 이 공간에서는 여러 차례 말해 더 이상 새롭지도 않은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선언까지 해두고 감옥행 이후의 사태를 감당할 용기가 없어, 처음으로 내 존재를 배반하고 입대한 군 생활.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예비군'이라는 이름으로 일년에 한 차례씩 불려다니며 군복을 입고 총을 들어야 했다. 일년 중 가장 견디기 힘든 시간.

  작년까지 대학원생으로 학교에 적을 두어 예비군 훈련을 하루만 간략하게 받았던데 비해, 이번엔 5일이나 가야했다. 제도가 어떻게 되는건지 도통 난 잘 모르겠는데, 쯩이 나오면 일단 가야한다. 원래는 강원도 어디 산골짜기에 2박 3일로 가게 되었는데, 연기를 신청했더니 5일 짜리 출퇴근으로 바뀌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군복을 입고 집을 나선다. 어깨엔 큰 가방 하나가 들려있다. 가서 바꿔 신을 군화와 훈련 후 갈아입을 내 옷가지다. 마음같아선 집을 나설 때도 사복을 입고 훈련소에 도착 후 갈아입고 싶은데, 아침 시간이 그리 넉넉치가 않다. 가서 갈아입을 곳도 딱히 없다. 훈련이 끝난 뒤에도 땅바닥에 군복과 군화를 패대기치고는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옷을 갈아입는다. 그렇게라도 해야 내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번엔 작년에 경험했던 그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작년 6월인가 7월쯤에 입소했던 그 곳에서는 대대장이라는 녀석이 여성 비하적인 발언을 수없이 쏟아내면서 마음을 불편케했다. 손들고 일어나서 "지금 뭐하시는거니?"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번에도 역시나 대대장 정신교육이니 뭐니 하면서 강당에 불러내 앉히고는 이런저런 말을 쏟아냈는데, 구멍이 어쩌니, 러시아, 필리핀이 어쩌니 하는 여성비하적 발언은 나오지 않았지만, 정치적 발언이 쏟아져 마음이 불편했다. 건국 60주년으로 시작해 촛불집회에서 좌익반동세력들이 활개를 치며 체제 전복을 시도하고 있다는 식의 발언을 사전에 준비된 동영상, 파워포인트 자료와 함께 내보내는데 한참 잘 자고 있다가 그 소리에 정신이 화들짝 깨더라. 얜 뭐니?

  아마도 그곳에 모인 수백명의 예비군들이 자신의 발언에 동의를 하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그 따위 막발언을 하는 것 같은데 - 동의할거란 생각 없이도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 , 일어서서 반론을 제기하고 싶은 마음을 또 눌렀다. 아예 확 토론장을 만들어버릴까 하다가 그래 국방부가 불온서적 읽기운동을 벌이고, 전두환, 박정희를 찬양하는데, 너라고 예외겠냐는 생각이 들어 그냥 포기했다. 그야말로 말 그대로 '대대장 정신교육'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세뇌교육'이라고 해야겠다. 군에 있던 현역시절에도 이런 식의 정신교육이 일주일에 한 차례씩 있었다. 군에 있는 기간을 2년 2개월이라고 치면, 최소한 이런 정신교육을 100회 이상 받은 셈인데, 계속 아무 생각 없이 듣다보면 정말 그런가보다 싶다가, 나중엔 적극적인 지지자가 된다.

  국가는, 군대는 이렇게 2년 2개월 동안 - 지금은 조금씩 줄어 1년 10개월이라고 한다 - 100회 이상의 세뇌교육으로도 모자라, 사회에 진출한 20대 중후반에서 30대 초중반의 직장인, 학생들을 불러내 주기적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강요'하고 있다. 평소에 사회문제에 관심이 있거나 해서 책을 들여다보거나 별도로 고민해보지 않은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에겐 북한이나 국가, 국방과 관련된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아무 생각 없이 들으면 그냥 바로 머리에 주입된다. 예비군 훈련에서 의자에 앉아 편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하지만, 정신을 무방비 상태로 놓는 가장 치명적인 시간이기도 하다. 차라리 잠을 권한다.

  국방부는, 군대는, 국가는 아직도 80년대식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직 적은 북한이요, 북한의 전투력이 어쩌니 저쩌니 하면서, 군의 모범으로서 이스라엘의 예를 들면서, 고로 우리가 군사력을 키워 북한의 침공에 대비해야 한다는 식의 결론을 맺는다. 국제 사회 돌아가는 꼴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라는 가정을 세우고서 자꾸만 주입하려 드는데, 전쟁이 그렇게 쉽게 일어나지도 않을 뿐더러, 일어나도 그 상대는 북한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이 되기가 더 쉽다. 이데올로기, 이념 전쟁이 아니라 (우석훈이 말했듯) 자원 전쟁이 되기가 더 쉽다. 이렇게 시대를 못 따라오는 논리를 펼치니 2008년에 불온서적 발표나 하고 앉아있지.

  쟤들은 아직도 80년대에 살고 있고, 80년대가 그리운게다. 어떻게든 다시 군부독재시절로 돌아가고픈게다. 이런 애들이 나라 지킨답시고 세금 받아먹고 있으니 어찌 답답하지 않으리. 과거에 광주 시민들 학살하고, 제주 시민들 학살하던 녀석들이, 박정희, 전두환 밑에서 깔짝대며 놀아나던 녀석들이 지금 군대의 상급 지휘관 노릇을 하고 있으니 이해도 된다만, 한편으론 아니 어떻게 이런 녀석들이 아직까지 살아남아 윗대가리 노릇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앞이 깜깜하다. 내가 군에 있던 시절에 소대장 하나는 대놓고 전두환, 박정희 찬양 발언을 해대면서 독재시절을 그리워했다. 이런 애들이 군에 수두룩 빽빽 하다고 생각하면...

p.s. 예비군 첫해부터 계속해온 '사격 거부'는 올해도 이어졌다. 총을 들지 않으면 감옥행이지만 사격을 하지 않는다고 감옥에 처넣지는 않는다. 용기없는 자의 최소한의 몸부림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marr 2008-10-03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님 직장예비군에 소속되지 못하셨군요.
지금 생각해보면 제 주변에는 아프님과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예비군 훈련을 즐기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1)모처럼의 체력단련, 2)일상에서의 사상투쟁, 3)미래의 도시 게릴라 투쟁을 대비한 실전훈련.... 뭐 생각에 따라 ..쩝. 아, 그리고 예비군 끝나면 민방위 훈련 또 있습니다.

마늘빵 2008-10-03 20:02   좋아요 0 | URL
직장예비군은 또 뭔가요? -_- 전 도통 예비군 제도에 대해선 모르겠습니다. 걍 나오니깐 갔는데. 직장 소속으로 하면 뭐가 또 다른가요? 직장엔 예비군 훈련을 받을 사람이 저 밖에 없을 것 같은데. 다들 나이가 있으셔서. 다른 한 분이 또 해당될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고.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42
홍기빈 지음 / 책세상 / 2001년 8월
구판절판


희소성이라는 상황은 "욕망은 무한하고 달성하고픈 목적은 끝이 없는데 수단이 부족할 때"를 말하는 것이었다. 욕망이 무한하지도 않고 달성하고픈 목적이 많지도 않은 사람들, 자우림의 노래 가사처럼 "하고픈 일도 없고 되고픈 것도 없는" 그런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에서도 희소성 공리는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일까. 배를 곯으면서 낮잠을 즐기는 이들의 사회가 하나의 극단이라면 인간의 운명은 희소성과의 투쟁이라고 선언한 뒤 불철주야 경제 행위에 매진하다가 일 중독증이나 과로사에 봉착하고 마는 근대적 인간형도 또 하나의 극단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경제는 희소성에서의 선택이라는 정의의 보편 타당성은 심대하게 타격을 입게 된다.-26쪽

희소성이란 경제나 재화와 관련이 있다기보다는 주로 권력과 관련이 있다. ‘무한한 욕망’과 더불어 희소성을 낳는 또 하나의 축인 ‘한정된 수단’이라는 것도 의심스럽다. 경제학에서 가르치는 재화는, 햇빛이나 엄마의 사랑처럼 공짜로 얻을 수 있어 비용 문제가 생기지 않는 자유재는 극히 드물고 대부분 비용을 치러야 하는 희소재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본질적으로 확연하게 갈라지는 것이 아니다. 몇십 년 전까지 우리 사회에서 전화는 상당히 희소한 사치품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심지어 초등학생들까지 전화를 개인 생필품으로 사용하고 있다. 자유재까지는 아니지만 구입을 위해 치르는 비용 또한 상당히 줄어들었다. 반대로 어떤 일들이 만약 자유재였던 지하수나 공기를 독점하는 기술을 개발한다면 우리는 꼼짝없이 가게에서 물이나 공기를 사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재화 자체에서 희소성이란, 주로 어떤 것을 희소한 것으로 만들 것인가에 대해 그 사회가 집단적으로 내리는 결정에 따라 생겨나는 것이지 그 수단의 본질 자체에서 비롯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28쪽

획득의 기술이 가정생활에 종속되는 하위 기술이라면 물자를 조달하는 행위는 어디까지나 가족 성원들의 행복한 삶이라는 목적에 부합하는 한도 내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만약 마취사가 안전하고 성공적인 수술이라는 상위의 목적을 망각한 채 제 흥에 겨워 "마취술의 한계에 도전한다"면서 극단을 달리면 그야말로 큰일날 것이다. 마찬가지로 획득의 기술도 가정의 행복이라는 상위의 목적을 무시한 채 "돈벌이의 한계에 도전한다"고 굴어서는 안 된다. 혹시라도 두 기술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더 많은 부의 획득"을 목적으로 가정생활을 관리한다면, 가정의 행복은 사라지고 가정인지 공장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가족 모두가 혹사당하게 될 것이다. 요컨대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경제 행위에서의 목적 합리성이 독립되어 따로 노는 것을 피하고 철저하게 가치 합리성의 차원에 복무하도록 묶어두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95쪽

"인생은 포이에시스가 아니라 프락시스이다."(아리스토텔레스)-112쪽

자연적인 생활과는 동떨어진 돈벌이를 목적으로 하는 획득의 기술이 독자적으로 생겨나는 과정은 이미 보았다. 만약 행복한 삶의 내용을 구성하면서 자기 스스로를 목적으로 삼던 수많은 종류의 프락시스들이 돈벌이를 목적으로 하는 획득의 기술의 하위 기술이 돼버린다면 이윤이라는 결과를 낳기 위한 포이에시스로 전락해버릴 것이다. 또 기존의 포이에시스에 해당하는 활동들도 일단 이윤을 목적으로 획득의 기술의 하위 기술로 전락하게 되면 원래 목적했던 결과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게 된다. -113쪽

"국가란 본질적으로 개개인의 도덕적 내면이나 일상생활의 영역에 참견하는 도덕적, 윤리적 존재가 아니라, 그들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임의적으로 생겨난 연합에 불과하다."(존 로크)-129쪽

오로지 가장 강하고 효율적인 자들만이 살아남고 대다수의 무능한 자들은 굶어죽거나 지배당하도록 자유방임이 보장되어야 하며, 어떤 이유에서든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는 것은 그러한 자연의 순리를 어기는 짓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사회적 다윈주의)은 공공 교육에 반대하고 아동의 노동금지 법안이나 근로 환경 개선 법안 등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138쪽

그(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시 통용되던 경제학 이론(편의상 고전파라고 부를 수 있다)에 따르면, 사람들은 그저 자기가 갖고 싶은 물건에 대한 욕망, 즉 소비에 대한 욕망만을 가질 뿐이며 화폐는 단지 원하는 물건을 얻기 위한 교환의 매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화폐 자체에 대한 욕망이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돈이 생기면 무조건 써버리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결국 지금 소비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미래를 위해 남겨두는 희생일뿐인 저축을 장려하려면 어떤 보답이 따라야 한다. 그 보답으로 주어지는 것이 이자이며, 이자율은 궁극적으로는 실물 생산에서의 생산성과 이윤율에 의해서 결정된다. -158쪽

케인스는 기본적으로 권력욕이나 성욕과 같이 독립적인 욕망의 한 종류로서 ‘돈에 대한 욕망’이 존재한다는 관점에서 출발하고 있다. 즉 사람들은 원하는 물건을 얻기 위한 동기로만 돈을 갖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돈 그 자체를 소유하는 것을 즐긴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전파와 달리 저축이라는 행위는 순수한 희생이기는커녕 그 자체로서 즐거운 놀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케인스가 자본주의의 역동을 결정짓는 핵심적인 심리 현상이라고 보았던 유동성 선호 현상이다. 따라서 이자라는 것의 의미도 돈을 모아놓는 것에 맛을 들인 수전노들로 하여금 돈을 풀어 투자로 이끌기 위해 지급되는 유동성에 대한 일종의 웃돈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자율은 화폐 시장에서 독립적으로 결정될 뿐 아니라 고전파와는 반대로 오히려 이것이 자본의 한계 효율과의 비교를 통해 실물 생산의 투자에 영향을 주게 된다. 따라서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국가가 해야 할 일은 이자율을 적당히 낮춰가면서 화폐 보유자들의 유동성 선호를 조절하여 장기적으로는 이 금리생활자들을 ‘안락사’시켜버리는 일이다. -158-159쪽

여기서부터 각주

27) 여기서 교역trade와 시장market은 구별해야 한다. 인간 또는 인간 집단 간 물품의 이동을 전부 교역이라고 한다면, 교역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없을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성격의 교역이 항상 구매자와 판매자 간의 흥정에 의해 자유롭게 가격이 결정되는 시장 형태를 띠는 것은 아니다. 고려와 원나라의 교역처럼 조공 형태를 띨 수도 있고, 또 산간 오지의 미개인들처럼 원정 형태를 띨 수도 있다. 또 요즘 우리가 결혼할 때 겪게 되는 혼수, 예단과 같은 선물의 형태를 띨 수도 있다. 그런데 일부 현대 경제학자들은 교역과 시장을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역사적, 인류학적 지식의 결여에서 온 것이다. 19세기 영국의 웨이틀리 주교는 인간 사이의 모든 물물 이동을 시장 교환과 동일시하고, 그것을 연구하는 학문으로서의 경제학을 아예 교환학이라 부르자고 제안하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동서고금의 모든 인간 사회에는 (교역이 아니라) 시장이 존재해왔다"는 혼동이 나타나게 된다. 이런 용어상의 혼동만 피한다면 시장 없이도 사회의 발전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또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171쪽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렇게 약탈을 자연적인 생계 활동으로 보는 것은 현대인에게는 어처구니없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의 논리는 이렇다. 인간이 먹이를 얻기 위해 동물들과 싸우는 수렵의 기술은 자연적이다. 그렇다면 "수렵은 단지 동물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자연에 의해 타인들에게 지배당하도록 되어 있음에도 그 자연의 뜻을 거부하는 자들에 대해서도 사용할 수 있다. 이런 전쟁은 자연적으로 정당하기 때문이다." (중략)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윤을 남기는 상업을 비자연적인 것이며 일종의 도둑질이라고 비난했다. 같은 도둑질도 용감하게 창칼을 휘두르며 하면 자연적인 것이지만 치사하고 쩨쩨하게 판매자, 구매자를 등치는 식으로 하면 비자연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상업은 그야말로 "강도질만도 못한 도둑질"이 되는 셈이다. -180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장바구니담기


그러나 해가 저물어도 그 빛은 키 큰 나무 우듬지에 걸려 있듯, 꿈은 끝나도 마음은 오랫동안 그 주위를 서성거릴 수밖에 없는 법이다. -32-33쪽

"기억이 존재하는 한,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73쪽

정민과 잠을 자고 난 뒤로 나를 둘러싼 세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알고 봤더니 이 세상은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서로 몸을 비벼대며 한 인간에게는 어느 정도의 온기가 필요한지 깨닫게 된 것뿐이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 다음부터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마녀의 오랜 저주에서 풀려난 것처럼 저마다 자신만의 입으로 내게 말을 건넸다. 길거리에 버려진 귤껍질이 방금까지 그 귤을 먹으면서 엄마에게 혼난 마음을 달랜 아이의 하루를 얘기했고, 공중전화부스에 펼쳐진 전화번호부는 길을 가다가 느닷없이 혹시 오래 전에 서울로 떠난 여인의 이름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전화번호부를 펼쳐본 주부의 사연을 들려줬다. -88-89쪽

이야기를 다 들은 후 나의 결론은 그에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모든 게 달라졌으리라는 것이었다. 사랑은 입술이고 라디오고 거대한 책이므로. 사랑을 통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내게 말을 건네므로. 그리고 이 세상 모든 것들이 그 입술을 빌려 하는 말은, 바로 지금 여기가 내가 살아가야 할 세계라는 것이므로. 그리하여 우리는 이 세계의 모든 것들과 아름답게, 이토록 아름답게 연결되므로.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으니 사랑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다는 것을, 오직 존재하는 것은 서로 닿는 입술의, 그 손길의, 살갗의, 그 몸의 움직임뿐이라는 것을 그도 알았더라면. -94쪽

"반석 위에 집을 지어라. 그 반석이란 네가 스스로 말살시킨 고유의 천성이며, 자식에 대한 사랑이고, 아내의 사랑에 대한 꿈이며, 네가 열여섯 살 때 가졌던 인생에 대한 꿈이다. 너의 환상들을 약간의 진실과 바꾸어라. 너의 정치인과 외교관들을 짐을 꾸려 떠나보내라. 이웃은 잊어버리고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여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인데, 올바르게 생각하고 주의를 부드럽게 환기시키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인생은 자기 자신이 지배하는 것이다. 너의 인생을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맡기지 말라. 무엇보다도 네가 선출한 지도자에게는 맡기지 말라. 자기 자신이 되어라."-123쪽

한국을 떠나오던 날, 공항에서 정민을 껴안은 채 오랫동안 서 있었던 것을 나는 잊지 않고 있었다. 정민은 토요일 저녁이면 외로울 것이라고 내게 말했다. 나도 토요일 저녁이면 외로울 것이라고 말했다. 정민은 히말라야에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나도 히말라야에는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정민은 겨울이 오면 나와 결혼하겠다고 말했다. 나도 겨울이 오면 정민과 결혼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정민은 모두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나는 모두 진짜라고 말했다. 안고 있던 팔을 떼고 바라보니 정민의 두 눈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정민은 내 뺨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170-171쪽

"음악은 본질적으로 역설이지. 침묵을 이겨내기 위해 태어났지만, 결국 또다른 침묵으로 끝날 뿐이니까. 삶이 그런 것처럼."-227쪽

"자유란 관념이 아니라 욕망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습니다. 인간의 욕망보다 강한 권력은 이 세상에 없는 모양입니다."-236쪽

"폭력에 관한 한 제비뽑기를 하는 사회인 거죠."-329쪽

"우리는 지나간 뒤에야 삶에서 일어난 일들이 무슨 의미인지 분명하게 알게 되며, 그 의미를 알게 된 뒤에는 돌이키는 게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378쪽


댓글(6)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웽스북스 2008-10-03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94쪽 저말. ㅎㅎ 정말 외우고 싶을 정도로 좋아해요.

마늘빵 2008-10-03 00:36   좋아요 0 | URL
저 마지막으로 소설을 읽은게 1년반에서 2년은 된거 같은데, 다시 소설을 읽고픈 욕구가 막 솟구쳐요. 이 책으로 인해서. :) 김연수 처음 접했는데 다른 책도 읽고파지네요.

웽스북스 2008-10-03 01:00   좋아요 0 | URL
어머 정말 1년반에서 2년이요? 어휴
저는 소설책 안읽고 인문학책만 계속 읽으면 막 마음이 닭가슴살처럼 퍽퍽해지는 기분이어서 ㅋㅋㅋ (아, 제가 닭가슴살은 좀 좋아합니다만 ㅋㅋ) 김연수의 친한 친구인 김중혁 책도 읽어보세요 ㅎㅎㅎ

마늘빵 2008-10-03 09:02   좋아요 0 | URL
^^ 소설을 안 읽은지 꽤나 오래되었죠. 아무래도 저는 한 주제에 꽂히거나 한 분야에 꽂히면 계속 그거만 파는지라. 소설에 빠지면 또 소설만 읽게 될지도. -_-

하늘바람 2008-10-03 0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넘 읽고프네요

마늘빵 2008-10-03 09:05   좋아요 0 | URL
^^ 오랫만에 집어든 소설이었는데 좋았습니다.
 
매매춘과 페미니즘, 새로운 담론을 위하여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61
이성숙 지음 / 책세상 / 2002년 4월
구판절판


상업적인 섹스는 인간의 감성적인 욕구와 물질적인 욕구를 동시에 충족시킨다는 인식의 변화가 요구된다. 이는 곧 남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건전하고 바람직한 매매춘" 형태가 될 것이며, 나아가 강요된 여성의 삶의 한 형태인 매춘 여성의 삶의 질 또한 향상될 것이다. -22쪽

도덕적, 종교적 페미니즘은 매매춘에 대한 남성 위주의 도덕과 윤리 중심주의 견해에 머물고 있다. 윤리 중심주의의 페미니즘의 영향으로 매춘 여성들은 구석으로 내몰린다. 도덕적 페미니즘 정책이 매춘 여성이라는 '인간'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도덕과 윤리를 위한 정책이 된 것은 페미니스트 지식인들이 '사려 깊은 척하거나 점잖은 척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31쪽

만약 두 성인남녀가 성적 행위를 위해 경제적 거래에 합의하고, 그들의 행위가 사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진다면 그것을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라고 하거나 부도덕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따라서 부도덕하다는 이유로 잘못되었다는 주장은 다시 한 번 의심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35쪽

자본주의는 여성들로 하여금 성적인 서비스를 파는 매춘 여성이 되도록 강요하는가 하면, 생존을 위해 노동력을 파는 임금 노동자가 되도록 몰아넣기도 한다. 매춘 여성과 임금 노동자 둘 다 비인격적인 사회 제도의 희생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들 각각의 활동에 관해 도덕성을 부여하는 합리적인 가설이 존재할 수 없다. 사회주의는 매춘 여성들을 자본주의에서의 착취가 집약적으로 드러난 실체로 파악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매춘 여성의 상황을 또는 임금 노동자의 비천함을 극명하게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노동자는 계급에 의해 착취당하지만 매춘 여성은 성과 계급에 의해 이중으로 착취당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매춘 여성은 임금 노동자보다 더 심각한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희생자인 것이다. -57쪽

남성 고객이 매춘 여성을 성적 만족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매춘 여성들 역시 남성 고객을 그녀의 경제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매매춘에 관련된 여성과 남성은 서로를 목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85쪽

물론 페미니스트 정치 이론가들은 결혼 제도를 반대하고 있지만, 매매춘 제도에 대한 비난만큼 강도가 높지는 않다. 다만 결혼 제도를 개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어느 사회에서도 여성은 여성이기 때문에 늘 강요된 직업과 삶을 살고 있다. 정치 이론가들은 규정된 아내 역할과 성 서비스의 제공자가 될 가능성을 최소한 줄일 수 있는 고용 기회의 확대와 평등 임금을 위한 사회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 여성도 아내(부엌데기 남편)를 가질 수 있는 진정한 남녀 평등 사회가 실현된다면, 매춘을 직업으로 선택하는 여성의 수는 줄어들고 아마 매춘 남성의 수가 증가할 것이다. -94쪽

다소 비약하는 측면도 있지만, 섹스는 어떤 특정한 방법으로 획득할 수 없다면 구매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영양분이다. 사먹는 음식이 그렇게 항상 나쁜 것은 아니지 않은가? -96쪽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전 지구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받고 성적인 서비스를 판매하는 것이 나쁘다고만 규정할 수 있는가?-104쪽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위해 음식물을 판매하는 것은 건전한 일로 인식되어왔으나 감성적인 느낌을 판매하는 것은 더러운 것으로 인식되어왔다. 이러한 차이는 문화적, 종교적, 성적 금기의 사회적 영향력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나체는 공격이며, 성기는 방어적이고, 여성의 생리는 더러운 것으로 인식되어온 것은, 인간의 성을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것이라고 규정하고 싶어하는 신경 과민증 환자들의 인식에서 비롯된 금기에 다름 아니다. 우리가 이러한 금기에서 자유로워진다면, 간호사가 신체 장애자들의 목욕을 도와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매춘 여성을 남성의 자위 행위 또는 수음을 도와주는 도우미쯤으로 여길 것이다. 간호원의 역할은 환자들의 보건을 만족시켜주는 것이며, 매춘 여성의 역할은 손님들의 감성적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이다. -105-106쪽

매매춘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강제의 형태가 아니라 본인의 의사에 따른 자유로운 선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매춘 여성 역시 매춘을 하나의 승인된 직업으로 간주해야 하고, 매춘이라는 직업을 자율적으로 선택한 성인 여성이어야 한다. 달리 말해 건전한 매매춘이란 강제적이지 않고 자발적인 매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건전한 매매춘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그것을 합법화해야 한다. 매춘 여성이 법률 위반죄로 고발되는 것이 아니라 성적인 불행을 감소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하는,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역할을 수행하는 건전한 시민으로서 권리를 제공받아야 한다. -132쪽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rch 2008-10-01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점이 당혹스러운가요?

마늘빵 2008-10-01 21:44   좋아요 0 | URL
흐음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운데, 나름 페미니즘 운동의 새로운 방식을 제안하는 듯 하면서도, 그 연결고리들이나 논리를 보면, 어떤 부분에서는 성매매는 정당하고, 여성들이 남성의 성을 구매할 수 있는 것도 더 쉬워져야한다는 식으로 흘러요. 책을 읽어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니깐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성도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해서 신체를 도구로 이용해 사고 팔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나아가니깐 결국은 유럽이나 미국식 성매매 방식으로 가자는건지. 아예 합법화시켜서.

2008-10-02 2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02 2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04 2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05 09: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05 1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05 19: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02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02 1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 읽어주는 여자
레몽 장 지음, 김화영 옮김 / 세계사 / 2008년 7월
품절


(전략) 나는 그에게 계속 눈을 뜨고 있으라고, 가능한 한 오랫동안 눈을 뜨고 있으라고 요구한다. 그것은 마치 해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처럼 너무 어렵다고 그가 말한다. 그래도 나는 우긴다. 내가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듯이 그가 나를 보고 있었으면 좋겠다. 그는 나를 바라본다. 그 눈길이 다정한 눈길인지 고통스러운 눈길인지 잘 모르겠다. 나는 그와 조용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독서의 장점은 그가 생각하듯이, 사랑의 장점과 그렇게 무관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그에게 설득시키려고 애쓴다. 그는 어쩌면 그게 맞는 얘기일진 모르나 지금 당장은 그가 나를 사랑하고 있을 뿐이라고 대답한다. 그는 그걸 알고 있고 확신하고 있따. 나는 내 얼굴 윤곽이 가물가물해지지 않도록, 목소리가 지리멸렬해지지 않도록 애를 쓰고, 바라보는 눈길과 입 밖에 내는 말을 또록또록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엉덩이에 두 손을 대고 있다. 그는 사랑의 저 절망적인 힘으로 나를 압박한다. (후략)-183-184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8-10-02 0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저는 의자 그림이 그려진 옛날 판형을 갖고 있는데, 표지가 새롭게 바뀌었군요.

마늘빵 2008-10-02 18:48   좋아요 0 | URL
옷 옛날건 모르는데... ^^ 판권을 보니 98년에 초판 나오고 2008년에 새로 나왔더라고요. 요고 재밌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