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42
홍기빈 지음 / 책세상 / 2001년 8월
구판절판


희소성이라는 상황은 "욕망은 무한하고 달성하고픈 목적은 끝이 없는데 수단이 부족할 때"를 말하는 것이었다. 욕망이 무한하지도 않고 달성하고픈 목적이 많지도 않은 사람들, 자우림의 노래 가사처럼 "하고픈 일도 없고 되고픈 것도 없는" 그런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에서도 희소성 공리는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일까. 배를 곯으면서 낮잠을 즐기는 이들의 사회가 하나의 극단이라면 인간의 운명은 희소성과의 투쟁이라고 선언한 뒤 불철주야 경제 행위에 매진하다가 일 중독증이나 과로사에 봉착하고 마는 근대적 인간형도 또 하나의 극단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경제는 희소성에서의 선택이라는 정의의 보편 타당성은 심대하게 타격을 입게 된다.-26쪽

희소성이란 경제나 재화와 관련이 있다기보다는 주로 권력과 관련이 있다. ‘무한한 욕망’과 더불어 희소성을 낳는 또 하나의 축인 ‘한정된 수단’이라는 것도 의심스럽다. 경제학에서 가르치는 재화는, 햇빛이나 엄마의 사랑처럼 공짜로 얻을 수 있어 비용 문제가 생기지 않는 자유재는 극히 드물고 대부분 비용을 치러야 하는 희소재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본질적으로 확연하게 갈라지는 것이 아니다. 몇십 년 전까지 우리 사회에서 전화는 상당히 희소한 사치품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심지어 초등학생들까지 전화를 개인 생필품으로 사용하고 있다. 자유재까지는 아니지만 구입을 위해 치르는 비용 또한 상당히 줄어들었다. 반대로 어떤 일들이 만약 자유재였던 지하수나 공기를 독점하는 기술을 개발한다면 우리는 꼼짝없이 가게에서 물이나 공기를 사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재화 자체에서 희소성이란, 주로 어떤 것을 희소한 것으로 만들 것인가에 대해 그 사회가 집단적으로 내리는 결정에 따라 생겨나는 것이지 그 수단의 본질 자체에서 비롯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28쪽

획득의 기술이 가정생활에 종속되는 하위 기술이라면 물자를 조달하는 행위는 어디까지나 가족 성원들의 행복한 삶이라는 목적에 부합하는 한도 내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만약 마취사가 안전하고 성공적인 수술이라는 상위의 목적을 망각한 채 제 흥에 겨워 "마취술의 한계에 도전한다"면서 극단을 달리면 그야말로 큰일날 것이다. 마찬가지로 획득의 기술도 가정의 행복이라는 상위의 목적을 무시한 채 "돈벌이의 한계에 도전한다"고 굴어서는 안 된다. 혹시라도 두 기술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더 많은 부의 획득"을 목적으로 가정생활을 관리한다면, 가정의 행복은 사라지고 가정인지 공장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가족 모두가 혹사당하게 될 것이다. 요컨대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경제 행위에서의 목적 합리성이 독립되어 따로 노는 것을 피하고 철저하게 가치 합리성의 차원에 복무하도록 묶어두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95쪽

"인생은 포이에시스가 아니라 프락시스이다."(아리스토텔레스)-112쪽

자연적인 생활과는 동떨어진 돈벌이를 목적으로 하는 획득의 기술이 독자적으로 생겨나는 과정은 이미 보았다. 만약 행복한 삶의 내용을 구성하면서 자기 스스로를 목적으로 삼던 수많은 종류의 프락시스들이 돈벌이를 목적으로 하는 획득의 기술의 하위 기술이 돼버린다면 이윤이라는 결과를 낳기 위한 포이에시스로 전락해버릴 것이다. 또 기존의 포이에시스에 해당하는 활동들도 일단 이윤을 목적으로 획득의 기술의 하위 기술로 전락하게 되면 원래 목적했던 결과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게 된다. -113쪽

"국가란 본질적으로 개개인의 도덕적 내면이나 일상생활의 영역에 참견하는 도덕적, 윤리적 존재가 아니라, 그들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임의적으로 생겨난 연합에 불과하다."(존 로크)-129쪽

오로지 가장 강하고 효율적인 자들만이 살아남고 대다수의 무능한 자들은 굶어죽거나 지배당하도록 자유방임이 보장되어야 하며, 어떤 이유에서든 국가가 시장에 개입하는 것은 그러한 자연의 순리를 어기는 짓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사회적 다윈주의)은 공공 교육에 반대하고 아동의 노동금지 법안이나 근로 환경 개선 법안 등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138쪽

그(아리스토텔레스)는 당시 통용되던 경제학 이론(편의상 고전파라고 부를 수 있다)에 따르면, 사람들은 그저 자기가 갖고 싶은 물건에 대한 욕망, 즉 소비에 대한 욕망만을 가질 뿐이며 화폐는 단지 원하는 물건을 얻기 위한 교환의 매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화폐 자체에 대한 욕망이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돈이 생기면 무조건 써버리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결국 지금 소비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미래를 위해 남겨두는 희생일뿐인 저축을 장려하려면 어떤 보답이 따라야 한다. 그 보답으로 주어지는 것이 이자이며, 이자율은 궁극적으로는 실물 생산에서의 생산성과 이윤율에 의해서 결정된다. -158쪽

케인스는 기본적으로 권력욕이나 성욕과 같이 독립적인 욕망의 한 종류로서 ‘돈에 대한 욕망’이 존재한다는 관점에서 출발하고 있다. 즉 사람들은 원하는 물건을 얻기 위한 동기로만 돈을 갖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돈 그 자체를 소유하는 것을 즐긴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전파와 달리 저축이라는 행위는 순수한 희생이기는커녕 그 자체로서 즐거운 놀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케인스가 자본주의의 역동을 결정짓는 핵심적인 심리 현상이라고 보았던 유동성 선호 현상이다. 따라서 이자라는 것의 의미도 돈을 모아놓는 것에 맛을 들인 수전노들로 하여금 돈을 풀어 투자로 이끌기 위해 지급되는 유동성에 대한 일종의 웃돈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자율은 화폐 시장에서 독립적으로 결정될 뿐 아니라 고전파와는 반대로 오히려 이것이 자본의 한계 효율과의 비교를 통해 실물 생산의 투자에 영향을 주게 된다. 따라서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국가가 해야 할 일은 이자율을 적당히 낮춰가면서 화폐 보유자들의 유동성 선호를 조절하여 장기적으로는 이 금리생활자들을 ‘안락사’시켜버리는 일이다. -158-159쪽

여기서부터 각주

27) 여기서 교역trade와 시장market은 구별해야 한다. 인간 또는 인간 집단 간 물품의 이동을 전부 교역이라고 한다면, 교역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없을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성격의 교역이 항상 구매자와 판매자 간의 흥정에 의해 자유롭게 가격이 결정되는 시장 형태를 띠는 것은 아니다. 고려와 원나라의 교역처럼 조공 형태를 띨 수도 있고, 또 산간 오지의 미개인들처럼 원정 형태를 띨 수도 있다. 또 요즘 우리가 결혼할 때 겪게 되는 혼수, 예단과 같은 선물의 형태를 띨 수도 있다. 그런데 일부 현대 경제학자들은 교역과 시장을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역사적, 인류학적 지식의 결여에서 온 것이다. 19세기 영국의 웨이틀리 주교는 인간 사이의 모든 물물 이동을 시장 교환과 동일시하고, 그것을 연구하는 학문으로서의 경제학을 아예 교환학이라 부르자고 제안하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동서고금의 모든 인간 사회에는 (교역이 아니라) 시장이 존재해왔다"는 혼동이 나타나게 된다. 이런 용어상의 혼동만 피한다면 시장 없이도 사회의 발전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또 실제로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171쪽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렇게 약탈을 자연적인 생계 활동으로 보는 것은 현대인에게는 어처구니없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의 논리는 이렇다. 인간이 먹이를 얻기 위해 동물들과 싸우는 수렵의 기술은 자연적이다. 그렇다면 "수렵은 단지 동물들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자연에 의해 타인들에게 지배당하도록 되어 있음에도 그 자연의 뜻을 거부하는 자들에 대해서도 사용할 수 있다. 이런 전쟁은 자연적으로 정당하기 때문이다." (중략)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윤을 남기는 상업을 비자연적인 것이며 일종의 도둑질이라고 비난했다. 같은 도둑질도 용감하게 창칼을 휘두르며 하면 자연적인 것이지만 치사하고 쩨쩨하게 판매자, 구매자를 등치는 식으로 하면 비자연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상업은 그야말로 "강도질만도 못한 도둑질"이 되는 셈이다. -1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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