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어김없이 연례행사 하나를 치뤘다. 작년과 달라진 것은 하루 짜리가 닷새 짜리로 바뀌었다는 것. 대학원생으로 학교에 소속된 것과 직장인으로 동사무소에 소속된 것은 천지 차이였다. 이런 빌어먹을. 작년에 하루 다녀온 것만으로도 역겨웠던 그 짓을 올해는 닷새나 해야하다니. 그렇다. 예비군 훈련이다. 이미 이 공간에서는 여러 차례 말해 더 이상 새롭지도 않은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선언까지 해두고 감옥행 이후의 사태를 감당할 용기가 없어, 처음으로 내 존재를 배반하고 입대한 군 생활.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예비군'이라는 이름으로 일년에 한 차례씩 불려다니며 군복을 입고 총을 들어야 했다. 일년 중 가장 견디기 힘든 시간.
작년까지 대학원생으로 학교에 적을 두어 예비군 훈련을 하루만 간략하게 받았던데 비해, 이번엔 5일이나 가야했다. 제도가 어떻게 되는건지 도통 난 잘 모르겠는데, 쯩이 나오면 일단 가야한다. 원래는 강원도 어디 산골짜기에 2박 3일로 가게 되었는데, 연기를 신청했더니 5일 짜리 출퇴근으로 바뀌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군복을 입고 집을 나선다. 어깨엔 큰 가방 하나가 들려있다. 가서 바꿔 신을 군화와 훈련 후 갈아입을 내 옷가지다. 마음같아선 집을 나설 때도 사복을 입고 훈련소에 도착 후 갈아입고 싶은데, 아침 시간이 그리 넉넉치가 않다. 가서 갈아입을 곳도 딱히 없다. 훈련이 끝난 뒤에도 땅바닥에 군복과 군화를 패대기치고는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옷을 갈아입는다. 그렇게라도 해야 내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번엔 작년에 경험했던 그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작년 6월인가 7월쯤에 입소했던 그 곳에서는 대대장이라는 녀석이 여성 비하적인 발언을 수없이 쏟아내면서 마음을 불편케했다. 손들고 일어나서 "지금 뭐하시는거니?" 말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번에도 역시나 대대장 정신교육이니 뭐니 하면서 강당에 불러내 앉히고는 이런저런 말을 쏟아냈는데, 구멍이 어쩌니, 러시아, 필리핀이 어쩌니 하는 여성비하적 발언은 나오지 않았지만, 정치적 발언이 쏟아져 마음이 불편했다. 건국 60주년으로 시작해 촛불집회에서 좌익반동세력들이 활개를 치며 체제 전복을 시도하고 있다는 식의 발언을 사전에 준비된 동영상, 파워포인트 자료와 함께 내보내는데 한참 잘 자고 있다가 그 소리에 정신이 화들짝 깨더라. 얜 뭐니?
아마도 그곳에 모인 수백명의 예비군들이 자신의 발언에 동의를 하고 있다는 전제를 깔고 그 따위 막발언을 하는 것 같은데 - 동의할거란 생각 없이도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 , 일어서서 반론을 제기하고 싶은 마음을 또 눌렀다. 아예 확 토론장을 만들어버릴까 하다가 그래 국방부가 불온서적 읽기운동을 벌이고, 전두환, 박정희를 찬양하는데, 너라고 예외겠냐는 생각이 들어 그냥 포기했다. 그야말로 말 그대로 '대대장 정신교육'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세뇌교육'이라고 해야겠다. 군에 있던 현역시절에도 이런 식의 정신교육이 일주일에 한 차례씩 있었다. 군에 있는 기간을 2년 2개월이라고 치면, 최소한 이런 정신교육을 100회 이상 받은 셈인데, 계속 아무 생각 없이 듣다보면 정말 그런가보다 싶다가, 나중엔 적극적인 지지자가 된다.
국가는, 군대는 이렇게 2년 2개월 동안 - 지금은 조금씩 줄어 1년 10개월이라고 한다 - 100회 이상의 세뇌교육으로도 모자라, 사회에 진출한 20대 중후반에서 30대 초중반의 직장인, 학생들을 불러내 주기적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강요'하고 있다. 평소에 사회문제에 관심이 있거나 해서 책을 들여다보거나 별도로 고민해보지 않은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에겐 북한이나 국가, 국방과 관련된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아무 생각 없이 들으면 그냥 바로 머리에 주입된다. 예비군 훈련에서 의자에 앉아 편히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하지만, 정신을 무방비 상태로 놓는 가장 치명적인 시간이기도 하다. 차라리 잠을 권한다.
국방부는, 군대는, 국가는 아직도 80년대식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직 적은 북한이요, 북한의 전투력이 어쩌니 저쩌니 하면서, 군의 모범으로서 이스라엘의 예를 들면서, 고로 우리가 군사력을 키워 북한의 침공에 대비해야 한다는 식의 결론을 맺는다. 국제 사회 돌아가는 꼴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라는 가정을 세우고서 자꾸만 주입하려 드는데, 전쟁이 그렇게 쉽게 일어나지도 않을 뿐더러, 일어나도 그 상대는 북한이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이 되기가 더 쉽다. 이데올로기, 이념 전쟁이 아니라 (우석훈이 말했듯) 자원 전쟁이 되기가 더 쉽다. 이렇게 시대를 못 따라오는 논리를 펼치니 2008년에 불온서적 발표나 하고 앉아있지.
쟤들은 아직도 80년대에 살고 있고, 80년대가 그리운게다. 어떻게든 다시 군부독재시절로 돌아가고픈게다. 이런 애들이 나라 지킨답시고 세금 받아먹고 있으니 어찌 답답하지 않으리. 과거에 광주 시민들 학살하고, 제주 시민들 학살하던 녀석들이, 박정희, 전두환 밑에서 깔짝대며 놀아나던 녀석들이 지금 군대의 상급 지휘관 노릇을 하고 있으니 이해도 된다만, 한편으론 아니 어떻게 이런 녀석들이 아직까지 살아남아 윗대가리 노릇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앞이 깜깜하다. 내가 군에 있던 시절에 소대장 하나는 대놓고 전두환, 박정희 찬양 발언을 해대면서 독재시절을 그리워했다. 이런 애들이 군에 수두룩 빽빽 하다고 생각하면...
p.s. 예비군 첫해부터 계속해온 '사격 거부'는 올해도 이어졌다. 총을 들지 않으면 감옥행이지만 사격을 하지 않는다고 감옥에 처넣지는 않는다. 용기없는 자의 최소한의 몸부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