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사상가들 -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공자. 예수
카를 야스퍼스 지음, 권영경 옮김 / 책과함께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칼 야스퍼스가 이런 책을 썼는줄은 몰랐다. 야스퍼스라면 보통 실존주의 철학자로 분류되는 이인데 3년간 대학에서 철학을 했지만 야스퍼스에 관해서는 서양철학사 개론서 만큼의 지식도 가지고 있지 않다. 실존주의로 분류되는 이들 중에서 니체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대학 강단 철학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듯 하다. 야스퍼스는 특출나게 주목받는 저서를 낸 것도 거의 없다. 기껏해야 제목만 알고 있는 <이성과 실존>이나 <철학적 신앙> 정도 뿐.

  <위대한 사상가들>은 야스퍼스의 철학을 모르고서도 충분히 읽을 수 있는, 또 야스퍼스 뿐 아니라 철학일반에 대해서도 아예 모르더라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일종의 입문서 역할을 한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이 책은 철학서가 아니다. 그래서 제목이 '위대한 철학자들'이 아니라 '위대한 사상가들'이다. 원래 책은 '디 그로센 필로소펜' (독일어를 자판으로 어떻게 쳐야할지 모르겠다) 으로 '위대한 철학자들'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으나, 본 책에서는 번역서에서 다루고 있는 이들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철학자로 분류되는 이들을 다루고 있기에 제목이 그러했던 것이고, 번역서는 그 중 단 네 명만을 뽑아놔 따로 책을 만들었기에 '철학자들'보다는 '사상가들' 어울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역자가 야스퍼스의 '위대한 철학자들'로부터 뽑아낸 네 명의 '사상가들'은, 소크라테스, 불타, 공자, 예수 이렇게 네 명이다. 하지만 선택은 역자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야스퍼스는 이미 그의 저서에서 이 네 사람에 대해서 따로 언급하고 있다. 야스퍼스의 원저에는 이 네 사람을 다른 철학자들과 달리 철학의 기본모델로 제시하고 있었다. 그는 네 명을 모델로 제시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고찰한 네 명의 위인 외에도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조로아스터, 이사야, 예레미아, 마호메드, 노자, 피타고라스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만큼 역사적으로 깊이 있고 지속적인 영향을 준 인물은 없다. 유일하게 마호메드만은 역사적 영향력에서 네 명의 위인과 어느 정도 견줄 만하지만 인간적인 깊이에서는 이들을 따라갈 수 없다." (칼 야스퍼스)

  어떤 철학이나 사상으로서 후대에 영향을 끼친 인물로서 선정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포함하여 인간적인 면모까지도 살펴봤던 것이다.

  이 책은 하나의 잘 만들어진 네 명의 사상가에 대한 레포트이다. 그만큼 매우 쉽고, 간결하고, 정리가 깔끔하게 되어있다. 이 책을 보면서 야스퍼스니 실존주의니 떠올릴 필요도 없고, 자연스럽게 떠오르지도 않는다. 또 한편으로 대단한 내용을 담고 있지도 않고 있다. 되려 야스퍼스를 떠올리며 그가 썼으니 뭔가가 있을거야 라고 기대하는 것은 절대금물. 혹시라도 그런 기대를 품고 이 책을 들췄다간 실망할 것이다. 정말 아무 내용도 없으니.

  야스퍼스는 네 명의 위인들의 생애와 철학사상을 실제 그들이 한 말과 예를 통해서 사실감있게 보여주고 있다. 절대로 소크라테스와 불타, 공자, 예수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이가 봐도 쉽게 느껴지는 책이다. 야스퍼스의 주관은 배제된 체 단순히 이들을 소개하고 이들이 왜 철학자들의 모델이 되어야 하는지를 객관적으로 보여주고 있기에 더 쉽다.

 

**
중학교 도덕 교과서에 보면 인물탐구 라고 하여 네번에 걸쳐서 각각 두명씩 위대한 인물에 대해서 알아보는 단원이 있는데, 이 책은 학생들이 인물 탐구를 위해 따로 가볍게 읽어볼만한 책이라고 소개하고 싶다. 야스퍼스에게서 뭔가를 기대하고 읽는 철학 관심자들은 기대를 거두고 중고등학교 학생용이라고 생각하고 읽으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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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경고

  이번달에는 별로 영화를 보지 못했다. 보고픈 괜찮은 작품들은 꽤 있었지만 한번 외출에 쓰이는 비용과 현재 해야만 하는 일의 압박, 또 여러가지 신경써야하는 것들 등 정신적 여유의 부족에 기인한다. 오랫만의 가족들의 나들이. 아침에 운동을 다녀오고 밥을 먹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영화볼까, 그러신다. 당연히 영화 좋아하는 나는 귀가 솔깃, 분명 어제 해야할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빨리 보고 갔다와서 하면 되지, 라는 마음으로 승락. 택한 영화는 뮌헨이었다. <홀리데이>를 볼까 했는데 롯데씨네마에서도 이 영화는 저녁 몇 타임 밖에 상영하지 않았다. CGV랑 갈등을 일으키더니 이번엔 롯데씨네마? 보고픈 영화가 극장을 점거하고 있는 자본의 힘에 따라 간판을 올렸다 내렸다 늘였다 줄였다 하는 것이 영 못마땅하다.

  1972년 9월 5일.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 그날, 전 세계는 침묵했다. 그러나 2006년 지금 전 세계는 흥분한다. 왜 그때 세계가 침묵을 했는지는 모른다. 나는. 하지만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곳에서 벌어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작고 큰 충돌들, 아랍권 국가 사이에서의 수많은 다툼은 더이상 특별할게 없는지라 뉴스감이 될 수 없다. 자동차가 처음 생겼을 때 교통사고로 사람이 죽으면 그것은 뉴스감이 되었겠지만, 자동차가 사람숫자에 버금갈(?) 지금에 와서 교통사고로 사람이 죽는 것은 동네에서 보던 익숙한 고양이가 어느날 길거리에 죽어있던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불행히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충돌은 언제나 있어왔고, 지금도, 앞으로도 변하지는 않을 듯 하며, 여기에 관심 갖는 이도 소수일 뿐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작품이라고, 에릭 바나가 나온다고 해서 섣불리 이 영화를 봤다간 실망감과 짜증과 지루함이 엄습하리라. 이 영화는 절대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문제에 관심이 없는 이가 재미삼아 볼 건 못된다. 테러영화라고, 액션이라고 해서 헐리우드 특유의 화려한 총격장면이나 전쟁씬이 등장하진 않는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다. 밋밋하고 지루하게 진행되는 이 영화가 두시간 반에 육박하는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는 건 재미를 기대한 관객들에겐 고역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별 하나가 수두룩하다. 아무리 유명한 감독과 배우가 영화를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관객들에겐 '따분'과 '지루' 가 현실을 지배한다.  

  나름 잘 알지는 못하지만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문제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고, 또 심지어는 스타벅스 10% 할인되는 신용카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타벅스의 회장이 유대인이며(그건 죄가 아니다), 두 나라간의 전쟁에 이스라엘측 무기구입비를 대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지 않는 나다. 촘스키의 수많은 미국비판과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문제에 대한 책들에도 관심(만) 있어 하는 나로서는 이 영화를 꼭 보고 싶었다.



* 아브너에겐 사랑스런 아내가 있다. 막 태어난 아기가 있다. 그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 국가의 평화를 위해 테러단의 대장이 되지만, 그것은 평화로 가는 길이 아니었다.



* 아브너의 이스라엘 테러단. 왼쪽에서부터 차량 도주 전문 스티브, 대장 아브너, 뒤처리 전문 칼, 폭탄제조가 로버트, 문서위조 전문 한스. 저들 중 살아남을 자는 과연 몇이나 될까.

  72년 뮌헨 올릭픽 선수촌에서 테러가 발생, 이스라엘 선수단 9명이 사살되었다. 팔레스타인 '검은 9월단'은 이곳에 침입, 선수단 9명을 인질로 잡았으나 협상이 결렬되자 모두 살해했다. 이후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는 이후의 사태를 다룬다. 물론 여기까지만 사실이고, 뒤의 이야기는 허구다. 11명의 검은 9월단이 모두 생존한 것으로 보고, 이스라엘은 이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복수를 가한다. 아브너(에릭바나)는 이 테러단(?)의 대장이다. 그리고 그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은, 장난감 제조자에서 폭발물 전문가로 변신한 로버트, 차량도주전문가 스티브, 뒤처리 전문가 칼, 문서위조 전문가 한스로 구성된다. 총 5명의 소규모 테러단은 11명 중 6명에게 복수를 가하는데 성공한다.

  팔레스타인의 테러와 이스라엘의 보복, 그리고... 테러는 끝이 없다. 살육은 살육을 부른다. 피는 피를 부른다. 검은 9월단을 하나하나 찾아 복수에 성공하기만 하던 아브너에게도 두려움은 찾아온다. 나의 사랑스런 아내와 태어난 딸이 위험하다는 생각, 내가 도청을 당하고, 테러의 대상이 되었다는 생각. 그래서 그는 침대를 들추고 찢고, 전화를 분해하고, 텔레비젼 뒤를 뜯는다. 자기 조직이 테러에 성공했던 방법들로 똑같이 당할까봐.

  테러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테러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도 다를 바는 없어 보인다. 내가 누군가를 테러하면 나 또한 언젠가 누군가로부터 테러당할 수 있다. 운이 좋아 살아남는다 해도 나는 죽는 그 순간까지 누군가 나를 죽일 거라는 두려움에 떨며, 내가 죽인 그 많은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살아가야한다. 죽음과 다를 바가 무엇이랴.

  복수는 정의로운가?

  이스라엘 아브너의 테러단은 정의실현을 위해 복수를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복수는 정의로울 수 있는가. 정의의 문제는 몫의 문제이다. 남보다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데서 비롯된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역시 마찬가지다. 서로가 성지를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 내가 상대에게 불의를 입었을 때, 나는 상대에게 불의를 돌려줘야하는가? 만일 돌려준다면 그것은 복수가 될 것이요, 돌려주지 않는다면 불의는 나에게서 그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법정에서 사형이라는 불의를 당했지만, 이에 불복하거나 친구들의 권유에 따라 탈옥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것은 불의를 행하는 것이라 하여. 나는 아테네로부터 불의를 당했지만, 내가 불의를 당했다고 상대에게 불의를 되돌려주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나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불의를 행하는 자가 되어버리므로.

  복수가 정의 실현의 한 방법임은 틀림없다.  복수라는 말 ekdikesis는 ek + dikesis 의 합성어이다. ek는 영어 from을, dikesis는 justice를 의미한다. 복수는 정의로부터 왔다. 그러므로 복수는 정의 실현의 한 방법이다. 하지만 정의실현의 많은 방법 중 하필 복수를 택하게 된다면, 나는 상대에게 당한 불의를 갚기 위해 불의를 행하는 자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것은 불의를 행한 상대와 내가 다를 바 없다는 의미이고, 내가 상대를 같은 인격체로서 대하지 않는 순간 나 역시 그가 된다.

  그들은 안다. 내가 당한 만큼 상대에게 똑같이 갚으려 한다면, 그와 나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금도 테러를 한다. 복수를 한다. 왜냐면 내가 당한 것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못해서. 결국 돌아오는 것은 더 큰 테러일 뿐인데도. 이 영화는 끊임없는 복수의 참상을 잘 보여준다. 내가 테러의 영웅이 되었다고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아브너는 뒤늦게 깨닫는다. 절망감과 죄책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히면서. 두 나라 간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선, 테러를 중단해야한다. 상대와 같이 불의를 행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영화는 그걸 보여준다.

 * 스필버그는 유대인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의 검은 9월단을 테러하는 것을 영화 줄거리로 삼고 있다. 영화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팔레스타인이 시작했고, 이스라엘인들은 그에 대한 복수를 하는 것 뿐이라고. 그러면서 아브너를 비롯한 5명의 테러단과 이스라엘에 면죄부를 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진실이 아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이 영화를 있는 그대로만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잘생긴 에릭바나의 테러단에게 동정심을 가져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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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6-02-19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생각보다 별루었었죠. 스필버그의 지나친 휴머니즘 강조가 넘 역력해서.
가족애 부분도 그렇고. 아무리 중립적이려고 해도 이스라엘인에 대한 배려가
눈에 띄어서 더욱 그러했구요. 쩝.

마늘빵 2006-02-19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생각보다 별로였어요. 그냥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어떤지를 알려주는 정도였죠. 전 이걸 재료로 삼아 테러와 복수, 정의에 관한 문제를 생각해본거구요. 원래 그럴 의도로 영화를 봤지만, 그렇지 않은, 재미를 찾기 위해 이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은 크게 실망했을거에요. 저도 실망했어요. 지루했고.

balmas 2006-02-22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스포일러 경고 때문에 페이퍼 본문은 안읽고 댓글만 읽는 나의 센스~~ ㅋㅋ

마늘빵 2006-02-22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발마스님 영화 보세요. 생각할 거리는 좀 있습니다. 박진감이나 흥미, 재미를 기대할 순 없지만.

balmas 2006-02-22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럴까요? 사실은 한번 보려고 했던 영화예요. :-)
 
위대한 사상가들 -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공자. 예수
카를 야스퍼스 지음, 권영경 옮김 / 책과함께 / 2005년 8월
품절


소크라테스에게 교육이란 많이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 대화를 통해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소크라테스 부분)-13쪽

지식은 물건처럼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스스로 깨달음으로써 얻을 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지식을 얻는다는 의미는 예전에 알고 있던 사실을 다시 회상하는 것과 같다. 모르면서도 지식을 추구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궤변론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나는 아는 것만을 추구할 따름이다. 만약 내가 안다면 더 이상 추구할 필요가 없으며, 모른다면 추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철학적 사고방식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추구하는 것으로, 무의식중에 예전에 알고 있던 기억을 현재의 밝은 의식으로 끌어내어 확인하는 과정이다.
(소크라테스 부분)-18쪽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을 자신은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죽음은 가장 큰 행복일지도 모르는데, 사람들은 가장 큰 불행으로 알고 두려워한다. 더욱이 꿈도 꾸지 못하는 깊은 수면처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무의 상태가 죽음이라면, 영원한 시간도 아름다운 하룻밤의 꿈에 불과하다. 혹은 죽음이란 영혼이 한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즉, 그곳은 죽은 사람들이 모두 모여있고, 정의로운 재판관이 진리를 말하고, 억울하게 재판을 받고 사형을 당한 모든선한 사람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좋은 사람들과 지혜에 관해 토론을 하고, 무한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러므로 죽음과 마찬가지로 불행이란 것도 선한 사람들에게는 살아 있을 때나 죽었을 때나 일어날 수 없다."(소크라테스) -30쪽

이러한 상태(항상 깨어있는 상태)에 놓일 때 우리는 비로소 명상에 들어가 무의식의 심연까지 몰입할 수 있다. 의식은 육체를 뚫고 들어가 마지막 심연까지 무의식을 맑게 정화시킨다. 이처럼 무의식의 심연까지 정화시키는 것이 바로 에토스의 원칙이며, 명상과 철학적 사변의 원칙이다.
...중략...
"파멸의 소지가 될 수 있는 것은 모두 버려라. 늘 깨어있는 상태에서 행동하고 경험하라." (석가모니 부분)-67쪽

"진정한 기적은 중생을 올바른 신념과 내면의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자, 스스로 명상의 세계에 몰입해 깨달음을 얻고 해탈할 수 있는 자에게만 일어난다. 모든 개인의 마음은 바람이 불고 물이 흐르듯이 변화무쌍하기 때문이다." (석가모니)-68쪽

모든 자아는 명상의 단계에 속하므로 각 단계에 해당하는 가치가 있지만 그 자체의 존재는 아니다. 진정한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감각적인 존재에서는 육체가 자아다. 명상의 첫 단계에서 이 자아는 무로 사라지고 형체가 없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자아가 나타난다. 이 영적인 자아도 더 높은 단계로 넘어가면 사라진다. 명상에서는 자아 자체를 부정한다기보다 오히려 그 상대적 효과로 다양한 단계가 더욱 분명해진다. 열반과 동일한 최고의 경지에 이르기 전까지는 진정한 자아를 얻을 수 없다. (석가모니 부분)-74쪽

생성은 순간적인 존재의 고리다.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비존재로 연결된 일시적인 존재일 뿐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며 동일하게 남아 있는 것도 없고 어디에도 확실히 완성된 것은 없다. 자아는 덧없는 과거의 환상으로 자아를 그 자체로 인정하며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석가모니 부분)-75쪽

이 세상에서 진리의 길을 찾는 유일한 방법은 이 세상이 사라지는 것 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길을 가는데 필요한 지식을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이런 지식을 겸손하게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석가모니 부분)-81쪽

"아름다운 흰 연꽃이 더러운 흙에 오염되지 않듯이, 세상이 나를 더럽힐 수 없다."
(석가모니)-94쪽

"배움이 없는 생각은 권태롭고 위험하며, 생각이 없는 배움은 소용이 없다."(공자)
"나는 새로운 진리를 창조하는 사람이 아니라, 전통을 전하는 사람이며, 옛것을 존중하고 따르는 사람이다."(공자)-107쪽

"현재를 사는 사람이 과거의 방법으로 되돌아가고자 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이며, 불행을 초래할 뿐이다."(공자) -108쪽

진리가 옛것을 통해 분명히 드러난다면, 진리를 얻기 위해 우리는 과거를 먼저 연구해야 한다. 과거를 연구함으로써 진리와 허위를 구별할 수 있다. 이런 구분은 단순한 지식 습득이 아니라 옛것을 우리 것으로 만들려는 진정한 배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진리란 외우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배움을 외적으로 실현시켜나가는 것이다.(공자부분)-109쪽

배움을 사랑하는 사람은 매일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잊지 않는다.

배움이 없으면 정직은 저속함이 되고, 용기는 불복종이 되며, 강인함은 괴벽이 되고, 자비심은 어리석음이 되고, 지혜는 산만함이 되고, 진실은 오히려 방해가 된다.
(공자부분)-110쪽

군자가 곧 성인은 아니다. 성인은 원래 타고나는 것이지만, 군자는 자기 훈련을 통해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진리를 소유하는 것은 하늘의 길이며,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길이다. 진리를 소유한 사람은 아무런 고통 없이 정의를 수행할 수 있고 아무런 노력 없이 성공할 수 있다." (공자)-119쪽

"너희에게 말하니, 악한자에게 대적하지 마라. 누구든지 네 오른쪽 뺨을 때리거든 왼쪽도 돌려주며, 또한 네 옷을 빼앗으려 하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벗어주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빌리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마라." (예수)-163쪽

"지금까지 우리가 고찰한 네 명의 위인 외에도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조로아스터, 이사야, 예레미아, 마호메드, 노자, 피타고라스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만큼 역사적으로 깊이 있고 지속적인 영향을 준 인물은 없다. 유일하게 마호메드만은 역사적 영향력에서 네 명의 위인과 어느 정도 견줄 만하지만 인간적인 깊이에서는 이들을 따라갈 수 없다." (칼 야스퍼스)-232-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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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2-19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져가서 참고할랍니다

마늘빵 2006-02-19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네 ^^
 

 

 우리 가족은 그다지 화목한 가정이 아니다. 활화산이었던 적은 아주 가끔 한 두번이었지만, 언제나 휴화산이었다. 지금도 우리 가족은 휴화산이다. 아버지는 현재 우리집에 거주하고 계시지 않다. 일종의 별거인데, 합의된 별거도 아니고, 이혼은 더더욱 아니고, 두분이 크게 다투거나 한 것도 아니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로 좋아하지 않으신다. 싫어하신다. 내가 볼 때 두분이 화해할 수 있는 길은 없다. 너무나 다르다 두분은.

  이분법적이긴 하지만, 아버지를 이상주의자로 볼 수 있다면, 어머니는 현실주의자다. 아버지는 현실적인 것들에 별로 관심이 없으시다. 그리고 세상이 변해가는 과정을 몸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시는 분이다. 한 예로 오랫만에 어제 만나 함께 버스를 타고 동생 학교에 가는데, 내릴 때 버스단말기에 카드를 찍었더니,

"그거 찍어야되니?"
"어 그럼! 찍어야지. 안찍으면 나중에 돈 더 나와."

아 이런. 버스카드 바뀐지가 언젠데 카드만 들고 다니시면서 탈 때만 찍고 내릴 때 안찍으신단 말이냐. 이제부터는 찍고 다니시겠지. 그렇담 환승하는 법에 대해서도 모르고 계신거 아닌가? 흠. 하나의 작은 예를 들었지만 아버지는 이렇다. 이러한 세상의 작은 변화들에 무관심하고, 그냥 나중에 알게 되면 알게 되는거고 아니면 말고. 좋게 말하면 세속의 이치를 떠나있다고 볼 수 있지만 나쁘게 말하면 무감각하신거다.

반면 어머니는 세상의 작은 변화들을 모두 체험하시고 때로는 내가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기도 한다. 나도 현실에 좀 무감각한 편이다. 안그러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유전인가? 그래서 어머니를 통해 몰랐던 것에 대해 알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동생은 어머니를 닮았다. 얘는 별거 다 안다. 영화 싸게 보는 법 등 돈과 관련해서 싸게 뭔가를 할 수 있는, 아니면 같은 값에 혜택을 더 많이 누릴 수 있는 그런 정보들에 민감하다. 얼마전 내가 우리은행에 가서 신용카드를 만든 것도, 얘기 거기서 체크카드를 만들어 CGV 영화관 1500원 할인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성향이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만나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고, 수십년을 사셨다. 초창기 신혼 때 몇년을 제외하고는 계속 이런 상태로 사셨다. 두분 다 많이 늙으셨고 타협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내가 봐도 타협 불가능이다. 그러니 서로를 인정하고 그냥 싫은 채로 살아가는 것이다. 아버지는 월세비와 전화세만을 매달 갖다주러 한달에 한번 오시고, 어머니는 가정경제를 이끌어가셔야한다. 그런데 어머니도 늙으셨는지라 이제 어디 불러주는데도 없다. 얼마전까지는 슈퍼마켓 매장에서 카운터를 보셨지만 그곳 사정도 안좋아 그만두신지 꽤 됐다. 얼마 받지도 못하면서 고생만 하시는데 지금 우리집은 이제 먹고 살 돈이 없다. 동생은 아직 직장을 잡지 못했고, 나도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지라, 생활비를 댄다는 것은 힘들다. 무슨 밑천이 있어서 조그만 포장마차라도 할 수 있는 여력이 있다면 그거라도 할텐데 그런 정도의 여력도 없다. 하긴 어머니도 넉넉치 않은 우리집이지만 밖에 나갔을 때 우리가 못사는 집인 티를 내지 않으려고 잘 먹이고 잘 입히고 했던 터라 그런 일을 하기는 쉽지 않으실 것이다. 밖으로는 남부럽지 않게 보이고 싶어하셨으니까.

가끔 특별한 일이 있어  가족이 다 모이는 자리가 있으면, 난 부담스럽다. 불편하다. 나랑 어머니랑 동생 혹은 나랑 아버지 이렇게 있는 게 더 편하다. 아버지-어머니-나-동생 혹은 아버지-어머니-나, 아버지-나-동생 이런 자리는 매우 불편하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집안경제에 신경을 안쓴다고 싫어하고, 물론 이전에 성격때문에 싫어하시긴 했지만, 동생도 아버지의 그런 점 때문에 싫어하고, 나는 중간이다. 동생 졸업식이 있다는 이야기를 어머니가 나보고 아버지한테 전화하라 했다. 아니 내가 왜. 난 이런 거 싫다. 우리 가족은 나를 통해서 대화가 된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동생이 아버지에게 직접 전화거는 상황이란 쉽지 않다. 난 거절했다. 그럼 동생 졸업식이니까 걔보고 전화하라고. 자꾸 날 통해서 대화를 하려고 하면 관계회복은 힘들다. 그래서 거절했다. 그랬더니 결국 어머니가 아버지한테 동생 졸업식있다고 전화했다.

또, 우리 가족이 함께 어딜 걸어가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모양새인데, 네명이 함께 걸어가면, '함께'는 없다. 따로 또 같이 걸어간다. 상황 1. 아버지 혼자 저 멀찌감치 걸어가신다. 그리고 내가 걸어가고, 뒤에 어머니와 동생이 뒤따라 온다. 상황 2. 어머니와 동생이 먼저 걷는다. 내가 걷는다. 그리고 아버지가 따라온다. 항상 이렇다. 그것은 우리 가족의 대화가 이루어지는 과정과도 같다. 나는 항상 중간이다. 아니면 외롭게 있을 아버지를 위해 아버지 옆에 따라 간다.

졸업식이라고 불러놓고는 왜 따로따로 걷냐고 어머니한테 뭐라 했다. 화가 나서 그런건 아니고, 그러지 말라고. 불렀으면 같이 다녀야지 왜 다 따로따로 다니냐고. 어제 세븐스프링스에서도 그랬다. 접시를 들고 음식을 먹으러 가는데 어머니와 동생이 먼저 가고, 나도 따라가고, 아버지는 기다렸다 우리가 자리에 온 뒤에 일어나셨다.

난 우리 가족이 함께 모이는 자리가 불편하다. 이런 모습이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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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18 15: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6-02-18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인님 / 감사함니다.

2006-02-19 0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6-02-19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인님 / 네. 댓글 감사합니다.

2006-02-19 17: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제 9시경에 신촌에 갈 일이 있었다. 버스를 타고 신촌 현대 백화점 앞에서 내려 골목길을 들어서는데 아 머냐. 시끌벅적 시끌벅적 노래를 부른다. 단체로 수십명. 근 100명은 되어보였다. 그 많은 어린넘들이 모여가지고 하는 짓이라고는, 단체로 둥글게 둥글게 원을 만들고 손짓 발짓으로 뭔 춤을 추며 알아 들을 수 없는 이상한 노래들을 불러댄다. 그리고는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살리고! 아 정말이지 이런 짓은 제발! 니들 집에 가서 해라. 아 왜 시끄럽게 길거리에서 그러고 있는거야.

  못마땅한 눈으로 힐끔 쳐다보며 지나갔지만 - 개들은 노래하느라 날 당연히 보지 못하지만 - 또 다른 골목에 커다란 깃발 두개를 들고 또 한 무리가 노래를 한다. 아 정말 짜증.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들을 또 불러제끼며 아주 신이 났다. 처음 100명의 무리는 어디애들인지 모르겠고, 나중 무리는 연대애들이었다. 깃발에 연세대라고 써있었으니깐. 제발이지 이런 짓 좀 하지마라.

  나 대학 때도 신입생이 되어 들어갔더니 술자리에서 이런 짓들을 하는거다. 자주통일 어쩌고 하면서 깃발을 높이들고 뭐라뭐라 소리친다. 뭐하는거니. 난 도대체가 이런 일련의 행위들 영 못마땅하다. 이건 내가 군대를 혐오하는 수준에 맞먹는 '못마땅함'이다. 전혀 의미를 알 수 없는 구호들, 그리고 그 구호들에 굳이 의미를 갖다붙인다고 해도 그들이 길거리에서 시끌벅적 떠들며 고성방가 하는 짓과 아무리 생각해도 상관관계를 맺을 수 없고 - 나 내가 돌인가 연관관계를 찾지 못하는게 - 자기들끼리의 그 작태, 이게 다 나중에 파벌을 조성하는 거다. 내가 너무 많이 치고 올라갔나? 의도확대의 오류를 범했나. 그렇지 않다고 본다.

  난 대학 신입생 때도 이 따위의 행동들에 동참하지 않았고, 철학과로 전과를 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왕따 일 수 밖에 없는건 학생회를 주축으로 한 일련의 이 따위의 행동들에 동참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그 따위의 행동이 내겐 너무나 혐오스러운걸 어쩌랴. 특히나 이게 더 심한 학교들이 있다. 연세대와 고려대(약칭으로 연대, 고대 라는 단어를 쓰지만 이것도 웃기는 거다. 그럼 연 이나 고 자로 시작하는 다른 대학들은 뭐가 되냐. 존재감이 없는거 아니냐. 그래서 나도 습관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대학명칭은 있는 그대로 사용하려고 의식하는 중이다)가 가장 심하다. 내가 본 바로는. 서울지역대학 같은 학번 모임에 나갔을 때도 그들은 얼굴도 모르는 넘들이 자기들끼리 모여서는 또 한바탕 노래를 하며 춤춘다. 제발 그러지 좀 마라 라고 가서 뜯어 말릴 순 없다. 싫으면 내가 그 모임 안나가면 되니깐.

  이런 행위들은 모두 갓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과 선배들이 모여 우리는 같은 배를 탔다 라는 일종의 단결심을 위한 것이겠고, 또 그것이 전혀 이해가 안되는 바는 아니지만, 왜 단합을 위해 그 따위의 행동을 해야하느냔 말이다. 다른 걸 하면 안되나. 아니 또 좋아 해라. 그럼 니들 학교가서 보이지 않는데서 해라. 왜 길바닥에서 길막고서 깃발 흔들며 꿱꿱 노래부르고 춤추며 동네방네 다 여기 좀 쳐다보소 해야하느냔 말이다. 우리 연세대 생은 이렇게 단결심이 좋아요, 우리 고려대 생은 이렇게 단결심이 좋아요, 우리 기계공학과는 이렇게 단결심이 좋아요, 자랑하는거야 뭐야.

  내가 이 글에서 연세대와 고려대를 주로 언급했지만 - 어제 봤던 그 광경은 일부 연세대 학생들이었고 - 모든 대학생들이 다 마찬가지다. 연세대와 고려대에 대한 특별한 증오심이나 미움따위는 없다. 다만 그들이 더 심한건 사실이라는 것 뿐. 그리고 나 또한 그 대학 중 한 곳에 현재 적을 두고 있으니, 너 우리가 부러워서 그러지 따위의 시시껄렁한 딴지는 통하지 않는다.

  아니 도대체 왜 그러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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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2-16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도 철학과셨군요. 어쩐지 페이퍼가 심도있어서

마늘빵 2006-02-16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네 경제학 쪽에서 철학으로 옮겼습니다.

가넷 2006-02-16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런 것도 하나요?=_=;;;

비로그인 2006-02-16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히 찔리는군요. 술 마시고 춤 춘 적은 없지만;; 도로 점거(?)는 여러번 해봤었는지라... 학생회 하면서 신입생들 환영회 한다고 기 들고 학교서부터 신촌 독수리빌딩 쪽으로 이동했던 것도 일종의 도로 점거... 맞죠? (학교 앞엔 사회대 10개의 과가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장소를 제공하는 곳이 없는지라..) 아닌가... 으흠.. 아, 아주 얌전히 걸어서 이동했습니다. --;;

생각해보니, 전 학생회였기 때문에 과에서 왕따였던 거 같군요. 사회복지학과는 성향상 기독교적 색채가 짙고, 심지어 구조조정으로 과가 폐쇄되어도 재학생은 물론이거니와 졸업생 하나 나서서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을 정도로 학교에 대해 철저히 복종(?)하지요. 전 1학년 때부터 총학생회에 있었고, 게다가 복수전공도 사회학이었는지라, 제가 하는 이야기들을 과 동기들은 거의 과격함(!)으로 받아들였고, 과 전체적으로는 똘똘 잘 뭉쳤지만 단대 전체 행사가 있거나 그러면 얼떨결에 제가 과 대표가 되어버리는 묘한 현상을 자주 겪었지요. FM? 암튼 남녀공학의 대학들에서 자기 소개할 때 앞에 길게 구호 붙이고 학번에 자기 이름 목소리 터져라 외치는 거.. 확실히 여대다보니 할 일은 없었지만, 사회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색다르게(?) 한 번 해보자며 후배들은 안 시키고 재학생들 몇몇이 한 번 해봤었지요. 다들, 목만 아프다는 결론을 얻었던;;;;

아.. 쓰다보니 님의 글과 상관없는 내용까지 어마어마하게 길어졌군요. 놀고 즐기는 거야 물론 좋지만, 그게 남에게 피해가 되면 안 되는데.. 특히 두 학교간의 대회(1년에 한 번 하는 거 있죠. 연고전인지 고연전인지..)시엔 정말 심각해지죠. 본인이 졸업한 학교의 학생들도 종종 기차놀이하러 참여하곤 하다 못해 우리 학교에도 그런 게 있어야 발전한다는 묘한 목소리를 내는 이도 있고, 심지어 올해 총학생회 선거에 출마했던 모 선본은 서강대와 함께 연고전 혹은 고연전에 버금가는 축제를 만들겠다며 학벌주의를 조장하려다가 당선에 실패하고 말았던-_-;;

마늘빵 2006-02-16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로님 / 네. 3월 되면 더 심해질거에요.
여대생님 / 아 제가 뭐라하는건 뭐 얌전하게 조용히 행렬지어 지나가는걸 뭐라는게 아니고, 꽥꽥 고래고래 소리지르며 노래하고 춤추고 하며 주변을 어지럽히고 소란피우는 행위를 말하는거에요. 님한텐 해당사항 없어요. ^^ 그냥 학교가서 운동장에서 하든 잔디밭에서 하든 할 것이 말이에요. 꼭 밖에 나와서 그래요.
행복나침반님 / 그쵸. 3월 되면 더 심해질거 같아요. 그쪽에 또 나름 자부심있는 대학들이 좀 많아요? 저도 차라리 학교 강당에서 오티하며 바위처럼 노래부르고 거기서 술먹고 끝내는걸 권장해요. 아 저도 해병대 아찌들 더 싫어요. 항상 어느 집단이든 전부가 그런건 아니지만 유독 눈에 띄게 행동하는 이들이 있죠. 신촌에서 논 그들도 그렇고, 나 해병대 나왔어! 군인이야! 그래서 뭐 어쩌라는건지 아주 대놓고 과시(?)하는 이들이 있어요. 저도 해병대 벩이에요.

비로그인 2006-02-21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시끄럽게해서 다른이에게 피해를 준 적은 없는지 반성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