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글자의 철학 - 혼합의 시대를 즐기는 인간의 조건
김용석 지음 / 푸른숲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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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석. 내가 정말 좋아하는 우리나라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요 몇년 사이에 관심을 갖게 된 대표적인 철학자로 김용석과 탁석산을 들 수 있는데, 탁석산 선생님의 경우에는 <한국의 정체성>과 <한국의 주체성>이라는 미니 문고판 책으로 단번에 스타 철학자로 우뚝 선 반면, 김용석씨(선생님이란 칭호는 나에게 오프라인을 통해 가르침을 준 분이기에 사용했고, '씨'는 오로지 책을 통해서만 안 분이기에 구별해 사용했다)의 경우에는 스폰지에 물이 스며들듯 서서히 다가왔다. 그리고 실제로 대중들에게 알려져있기로도 대중에게 다가서는 탁석산 선생님의 접근 방식과 김용석 씨의 접근 방식은 엄연히 다르다. 두 분 모두 강단철학이 아닌 대중적인 철학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탁석산 선생님의 경우에는 무게있는 주제를 가볍게 다루는 반면, 김용석 씨의 경우에는 가벼운 주제를 깊이있게 다루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철학자 김용석을 내가 처음 접한 것은, 지금은 절판된 <서양과 동양이 만나 127일간 이메일을 주고 받다>라는 책을 통해서다. 이 책에서 그는 서양철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이승환 교수는 중국철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만나 대화를 나누고 이 대화가 대담집의 형식을 빌어 나온 것이었다. 일방적인 강의보다 대담 형식의 책은 같은 주제를 통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두 사람의 시각을 엿볼 수 있어 더 폭넓은 사고를 장려한다. 이 책을 통해 김용석씨의 사유가 마음에 와 닿았고, 이후 그의 저서를 곁눈질 하고 있었으나 <일상의 발견> 이외에는 아직 접하지 못했다.

  그리고 세번째 그와 만난 것이 바로 이 책, <두 글자의 철학>이다. 책이 소개되면 그 책의 내용과 불문하고 바로 구입해버리는 작가가 나에게는 몇 있다. 김용석씨가 그렇고, 앞서 언급한 탁석산 선생님이 그렇고, 스위스의 젊은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이 그렇다. 그래서 알랭 드 보통의 저서가 최근 번역되자마자 바로 '질러버렸다'.

  <두 글자의 철학>은 두 글자로 이루어진 단어들을 주제로 삼아 저자의 생각을 풀어내는 철학에세이이다. 저자는 크게 1부 인간의 조건, 2부 감정의 발견, 3부 관계의 현실의 세 부분으로 나누고, 각각의 범주안에 두 글자로 된 작은 제목들을 품고 있다. 생명, 자유, 유혹, 고통, 희망, 행운, 안전, 낭만, 향수, 시기, 질투, 모욕, 복수, 후회, 행복, 순수, 관계, 이해, 비판, 존경, 책임, 용기, 겸허, 체념 등 많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여러가지 주제를 다룬다고 하여 결코 글이 가벼운 것은 아니다. 주제 하나를 다루더라도 그가 오랜 세월에 걸쳐 평상시에 가지고 있던 깊이있는 사유를 바탕으로 쓰여졌고, 우리가 뻔히 다 아는 주제이고 여기서 더 무엇이 나올까 싶은 주제들이지만 내가 바라보는 것 이상으로 그는 자신이 경험한 것, 자신이 생각한 것 등을 바탕으로 폭넓고 깊이있는 시각을 전달해준다. 그래서 그의 글이 좋다. 아주 일상적이고 사소한 소재를 다루지만 거기에서 쉽게 발견할 수 없는 부분을 물어 들어가 사색의 향연을 펼쳐준다. 그리고 나는 그 안에서 흠뻑 젖은채 즐긴다.

  책에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명언이 나오지만, 그는 명언에 의존하지 않는다. 명언은 단지 그의 글을 보조해줄 뿐이고, 정말 알짜배기는 그만의 순수한 사유이다. '용기'와 '소신' 에서 보여준 그의 이런 사유들은 나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인간이 자기 생각을 만들어갈 때 중요한 것은 결론 이상으로 과정이다. 더구나 어떠한 입장에 대해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지속적인 반성과 성찰을 전제로 하지 않을 경우 오히려 위험하다. 진짜 소신을 중요시하는 현명한 사람은 자신이 생각해오던 것과 믿어오던 것을 수정할 줄 안다. 소신을 내세우고 지키며 굽히지 않는 것 이상으로 소신을 관리할 줄 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실에 대한 성실한 관찰, 치밀한 사고, 다른 사람과의 지속적인 대화, 포용적인 세계관 등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실수와 오류를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소신은 강자앞에서 지키는 것이지 약자 앞에서 내세우며 밀고 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소신이 그야말로 옳다고 확신하더라도 약자의 소신에 문을 열줄 알아야 한다. 진정으로 소신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소신에 귀 기울이고 그것이 부각되도록 하며, 그것이 지켜지도록 배려한다. 이것이 소신있는 사람의 겸허함이다."

"모든 일에 총명하게 대처하고 매사에 정의롭게 행동하며, 용기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보통 사람의 에너지 한계를 넘어서는 힘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편안한' 상태의 자기를 유지하기 힘들다. 이때 필요한 것이 겸허의 자세이다. 즉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쓰던 에너지를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데로 돌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에너지 사용을 적절히 제어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겸허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이때의 겸허는 자신의 능력을 가장하는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무리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능력대로 삶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겸허는 일반적 정의에 따르면 다른 사람 앞에서 뻐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인 관계의 덕목이지만, 각 개인의 차원에서는 결국 자기 조절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자아 찾기의 덕목인 것이다."

  이로써 나는 책을 통해 그와 세번째 만남을 경험했고, 그에 대한 기대감은 더욱 커졌다. 아직 읽지 못한 그의 책을 조만간 탐독하겠노라 다시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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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10-31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에 대한 관심도 그렇지만...지은이에 대한 관심까지 만드는 리뷰네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마늘빵 2005-10-31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책에 대한 이야기보다 지은이 이야기를 더 많이 한거 같아요. 쓰고보니. ^^ 좋은 책입니다. 읽기도 쉽고.

Common 2006-02-12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아프락사스님 리뷰 보고 이 책 샀었는데,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
 
두 글자의 철학 - 혼합의 시대를 즐기는 인간의 조건
김용석 지음 / 푸른숲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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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의식과 실천의 괴리는 우리의 삶을 부식하는 바이러스다. 실천없는 윤리 의식은 삶을 비극적으로 만들고, 윤리 의식 없는 행동은 삶을 희극적으로 만든다."-15쪽

"우리는 생명의 정의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할 뿐이다." (에밀리 디킨슨)-23쪽

"어떤 사람의 죽음도 나의 손실이다. 나는 인간사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 묻지 말라. 종은 당신을 위해 울린다."(존 던)-45쪽

"생명체는 스스로 살려고 애쓰는 성질을 갖고 있다. 그것은 살아있는 한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고 초월하려는 내적인 경향을 갖는데, 언급했듯이 한스 요나스는 이것을 자유라고 파악한다. 즉 생명을 움직이는 동인과 원리가 자유라는 것이다. 가장 원시적인 수준의 아메바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가 지닌 존재양태이자 생명의 원리가 자유라는 것이다."-49쪽

"모든 사람은 죽으면서 뭔가를 잃는다. 다만 노예와 자유인은 잃는 것이 다를 뿐이다. 자유인은 죽음으로써 삶의 쾌락을 잃지만, 노예는 죽음과 함께 삶의 고통을 잃는다."(영화 <스팔타커스>의 대사)-52쪽

"그대는 자유로운가. 그렇다면 그대는 행복한 것이다. 그대는 행복한가. 그렇다 해도 나는 그대가 자유로운지 아닌지 모르겠다."
자유로우면 행복은 따라온다. 하지만 행복하다고 해서 반드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자유를 지향해서 행복을 얻을 수 있다. 논리적으로도 그럴 수 밖에 없다. 자유의 일차적 정의는 분명하지만, 행복의 일차적 정의는 뭐라고 말하기 힘들기 때문이다.-57쪽

"유혹의 본질은 상호 욕망의 실현에 있다. 유혹한다는 것은 상대의 욕망을 건드리는 것이다. 동시에 유혹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 과정은 곧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호 향유'의 유혹 행위가 성립하는 것이다." -67쪽

"모든 사람에게는 그에 맞는 유혹자가 있다. 행복이란 바로 그를 만나는 것이다."(키에르케고르)

인간관계가 점점 더 계산적으로 되어가는 시대에, 유혹이 정복하고 차지하는 기술과 전략이 아니라, 생명의 기운을 유지하고 즐겁게 살기 위한 근본 조건이자 삶의 지혜라는 인식이 우선적으로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게 보는 것이 유혹의 원초적 의미를 되살리는 길일 것이다. 그렇다면 유혹한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인간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 되고, 유혹 당하기는 단순하게 수동적 행위가 아니라 '유혹을 받아주는' 지혜를 발휘하며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행위가 된다. 결국 유혹은 즐거운 인간관계 맺기의 한 방식이 되는 것이다.-68쪽

"삶의 고통들이 번갈아 찾아오기 때문에 인생이 그래도 참고 살 만한 것"인지도 모른다. (프리드리히 헵벨)-75쪽

"고통받는 자는 구원을 갈구한다. 언젠가 고통에서 벗어나리라는 것을 희망한다. 고통은 역설적으로 희망의 동기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이 없을 수 없는 세상에서도 삶은 지속되는지 모른다. 고통을 없앨 수는 없지만 고통을 줄이며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지도 모른다." -76쪽

"고통은 인간 본성에 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 없이 괴로워하지는 않는다. 아니 적어도 그런 희망이 있기 때문에 괴로워한다."(카사노바)-76쪽

"모욕하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상대를 사회에서 배제시켜 모멸감의 정도를 상승시키고 결국 모욕을 완성하는 것이다. 당한 사람이 심하게 모욕감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이 '배제의 효과' 때문이다. 또한 배제된다는 것은 결국 모욕에 반박할 기회조차 순식간에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욕을 가한 사람은 '사회'안에 있고, 모욕을 당한 사람은 그 밖에 있기 때문이다."-155쪽

"면박은 둘이 마주 대면해서나 다른 사람들이 있는 데서 마음에 준비도 안되어 있는 상대를 불현듯 꾸짖거나, 심한 말로 상대의 말을 막아버리는 일종의 기습 공격의 성격을 띤다. 면박 받은 상대는 금방 무안해져서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순간적으로 공격을 받아 위축되지만 속으로는 받은 상처 때문에 분을 삭이지 못한다."-158쪽

"웃음은 무엇보다도 교정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모욕감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웃음은 그 웃음의 대상에게 고통스러운 느낌을 불러일으켜야한다."(베르그송)

"바로 이런 이유로 사회는 사회 구성원 각자에게 교정을 하라는 위협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창피함에 대한 예측이 떠나지 않도록 한다. 웃음의 기능이란 틀림없이 이와 같은 것이다. 그 대상이 되는 사람에게 언제나 약간의 모욕이 되는 웃음은 실제로 일종의 사회적인 골탕 먹이기인 것이다." (베르그송)-160쪽

"용서는 우리가 세상의 모든 존재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한다. 우리를 힘들게 하고 상처를 준 사람들, 우리가 '적'이라고 부르는 모든 사람을 포함해, 용서는 그들과 다시 하나가 될 수 있게 해준다."(달라이 라마)-172쪽

"복수심은 인간에게 기꺼이 주어진 것이라서, 사람들은 복수의 기회를 갖기 위해 모욕당하기를 바라기조차 한다. 그것은 철천지원수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그와 평소에 무관한 사람이거나, 심술이 가득 밴 농을 주고 받을 때는 심지어 절친한 친구에게조차 그런 묘한 감정을 갖는 것이다."(레오파르디)-173쪽

"그(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사랑하는 남녀는 그 순간 자신들의 의지로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지만 사실은 자연의 의지 또는 '세계의 의지'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남녀의 사랑이라는 현상도 세계의 의지가 표상된 것일 뿐이다."-221쪽

"인간이 자기 생각을 만들어갈 때 중요한 것은 결론 이상으로 과정이다. 더구나 어떠한 입장에 대해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지속적인 반성과 성찰을 전제로 하지 않을 경우 오히려 위험하다. 진짜 소신을 중요시하는 현명한 사람은 자신이 생각해오던 것과 믿어오던 것을 수정할 줄 안다. 소신을 내세우고 지키며 굽히지 않는 것 이상으로 소신을 관리할 줄 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실에 대한 성실한 관찰, 치밀한 사고, 다른 사람과의 지속적인 대화, 포용적인 세계관 등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실수와 오류를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소신은 강자앞에서 지키는 것이지 약자 앞에서 내세우며 밀고 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소신이 그야말로 옳다고 확신하더라도 약자의 소신에 문을 열줄 알아야 한다. 진정으로 소신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소신에 귀 기울이고 그것이 부각되도록 하며, 그것이 지켜지도록 배려한다. 이것이 소신있는 사람의 겸허함이다." -264쪽

"모든 일에 총명하게 대처하고 매사에 정의롭게 행동하며, 용기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보통 사람의 에너지 한계를 넘어서는 힘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편안한' 상태의 자기를 유지하기 힘들다. 이때 필요한 것이 겸허의 자세이다. 즉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쓰던 에너지를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데로 돌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에너지 사용을 적절히 제어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겸허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이때의 겸허는 자신의 능력을 가장하는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무리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능력대로 삶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겸허는 일반적 정의에 따르면 다른 사람 앞에서 뻐기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인 관계의 덕목이지만, 각 개인의 차원에서는 결국 자기 조절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자아 찾기의 덕목인 것이다."-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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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스 2005-10-27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마늘빵 2005-10-28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금방 아시네요? 221쪽의 문구 말씀하시는거죠?

코마개 2005-10-28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재미있나요? 저자를 좋아하는데 넘 어려우면 지겨워서 못볼테니 난이도가어느정도인지..

마늘빵 2005-10-28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에요. ^^ 그냥 철학에세이라고 보시면 될듯. 저도 김용석씨 좋아해요. 일상에 밀착한 철학을 하시는 분이라는 생각.

이리스 2005-10-28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술집도 있어요. ^^;; 그 주인도 참.. ㅎㅎ

마늘빵 2005-10-28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래요? 별로 장사 안될거 같은데 술집 이름 치고는 참... ㅋ 어디에 있나요? 막걸리집??

이리스 2005-10-28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대입구역 부근에 있어요. 흐흐.. 지금도 만일 있다면요.
막걸리집이던가? 여하튼 복합적인 술집이었던듯.
 
어둠의 저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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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까미 하루끼. 대단히 유명한 작가이고, 나도 그의 유명세에 힘입어 몇몇 작품을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 도대체 어떤 작가길래 사람들이 그렇게 열광을 하는거야?! 라는 궁금증으로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읽은 작품이 <상실의 시대> 와 <해변의 카프카>. 두 작품 모두 괜찮은 느낌을 주었고, 하루끼는 뭐 대단하게 끌리는 작가는 아니지만 참 글을 재미나게 쓴다는 생각을 품게 만들었다. 2년여의 시간이 흐르고, 그가 데뷔 25주년 기념 작품을 내놓았단다. 굳이 사서 읽고픈 마음은 없었고, 아는 넘이 <어둠의 저편>을 읽고 있길래 빌려보았다.


<상실의 시대>와 <해변의 카프카>에 대한 괜찮은 느낌으로 당연히 이번 작품에도 기대를 하게 되었지만 결과는 커다란 실망감을 안겨주었을 뿐. 전작에서 볼 수 있는 긴박감이나 독자를 빨아들이는 힘은 찾아볼 수 없고, 지루한 스토리 진행과 쉽게 이해되지 않는 상황 전개가 지속된다.


 "독자는 작가의 손에서 떠난 작품에 대해 지나친 기대를 해서는 안되는가?" 하는 문제제기를 해본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세상에 내놓는 순간 이미 그의 것이 아니게 된다 라는 한 철학자의 해석학적 입장도 있듯 이미 작가의 손을 떠난 텍스트는 그 텍스트를 읽고 있는 각각의 독자들의 시각에서 다시 태어난다. 각각의 독자들은 각자 자신이 받은 다양한 감명을 토대로 작품을 쓴 작가를 사랑하게 되고, 그의 또다른 작품이 세상에 내던져질 때 전작에 대한 기대를 품고 망설임없이 돈을 투자한다. 하루끼의 유명세는 분명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고, 그의 수많은 독자들은 전작에서 그가 뿜어낸 향기를 다시 찾아오게 된다. 나 역시 그 수많은 독자 중의 한명이었고, 내가 읽은 그의 작품에서 나는분명 다른 이들과 또다른 감명을 받았겠지만, 어쨌든 공통된 사실은 "내가 감명받았다" 는 것. 하지만 작가는 나를 배신했다. 엄밀히 그것을 '배신'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배신이었다.

 

 댄스를 하던 가수가 장르를 바꿔 록을 할 수도 있는 거고, 정통락을 추구하던 록밴드가 하이브리드 핌프락을 추구할 수도 있는 것이다. 취향은 바뀔 수 있고, 같은 것을 추구하더라도 표현방식이 늘상 같은 수는 없다. 젊어서의 하루끼는 이미 지금의 늙은 하루끼가 아니요, 그의 초기작들에서 보여지는 그런 냄새들이 지금에 와서 드러나지 않는다 하여 그를 탓할 수는 없을터. 되려 변화하지 않는 작가가 더 이상할 터이다. 변화는 늘상 일어날 수 있고, 변화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하루끼의 <어둠의 저편>이 기존작들과 차이를 보인다고 해서 우리가 그를 비난할 것은 못되지만 나는 '개인적인' 실망감을 가졌음을 표하고 싶을 뿐이다. 나 뿐 아니라 그의 기존의 많은 팬들이 그런 배신감을 적잖히 느끼고 있고, 그것은 그들 독자에게 각각의 배신감을 안겨준 것이지만, 그는 이번 작품으로 또다른 새로운 독자와 조우할지도 모르는 사실.

 

  하지만 난 또 그의 새로운 작품이 나오면 전과 같은 기대를 품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실망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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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 반양장
피천득 지음 / 샘터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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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키츠는 "아름다운 것은 영원한 기쁨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 자체가 스러져 없어지는 것을 어찌하리오. 아무리 아무리 아름다운 여성도 청춘의 정기를 잃으면 시들어 버리는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여 나는 사십이 넘은 여인의 아름다운 얼굴을 드물게 본다. '원숙하다' 또는 '곱게 늙어 간다' 라는 말은 안타까운 체념이다. 슬픈 여자다. 여성의 미를 한결같이 유지하는 약방문은 없는가보다. 다만 착하게 살아온 과거, 진실한 마음씨, 소박한 생활 그리고 아직도 가지고 있는 희망, 그런 것들이 미의 퇴화를 상당히 막아 낼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의 미>중)-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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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반한 나머지 그의 또다른 작품 <붉은돼지>를 빌렸다. 그리고는 또 몇몇 반에 들어가 틀어줬다. 모험영화도 아니고 <센과 치히로...>보다 스토리 전개가 다소 느려서 그때만큼의 초롱초롱 눈 빤짝~ 하는 반응을 얻지는 못했지만 역시 아이들은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는 것은 사실로서 증명되었다.

  예전에 대학시절 과사무실에서 조교 선배가 노트북에 씨디를 넣고 뭔가를 보며 막 웃고 있었는데 그게 이거였다. <붉은돼지>. 아니 뭐가 그렇게 재밌담. 사실 나는 아무리 웃긴 장면을 본다고 해도 그다지 웃지 않는다. 그냥 속으로 웃는 편. 살짝 미소가 감돌면 그건 웃긴거다. 나는 티비나 영화를 보면서 우하하하하 하고 웃는 스타일이 아니다. 어쩜 나의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는데에 익숙치 않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평소 나의 생활에 있어서 다른 면모를 보면 그렇지도 않은듯.

  "낭만을 꿈꾸는 로맨티스트"

  '붉은돼지' 를 '빨간돼지'라고 했더니 아이들이 뭐라한다. 흥 붉거나 빨갛거나 그게 그거지 뭐. 장면 속에서 돼지를 실제 빨갛지 않다. 하지만 그의 비행기는 빨갛다. 그리고 또 반공주의자들의 표현방식을 빌리자면 그의 머리 속도 빨갛다.



* 비록 돼지이지만 번드르 하게 차려입으니 폼 좀 난다. 꽤나 두텁고 낮게 깔린 목소리로 분위기를 휘어잡는다.

 배경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1920년대. 전쟁에서 전우들을 모두 잃고 전쟁의 참혹함을 두 눈으로 본 비행사 포르코는 스스로 마법을 걸어 돼지가 되어버린다. 그리고는 이탈리아의 무인도에 홀로 살며 오래된 낡은 비행기를 몰며 하늘의 해적, 공적을 소탕하며 벌어먹고 산다. 하지만 그는 절대로 살상은 하지 않는다. 해적들을 소탕함에 있어서도 비행기를 격추시켜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날지 못할 정도로만 망가뜨려 안전하게 떨어뜨린다. 절대로 성능좋은 철갑탄을 사용하지 않는다. 자신은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며. 그 누구보다 인간적인 돼지 포르코.



* 포르코에게 당한 맘마유도단 을 비롯한 공적들. 무인도에서 기다리며 그가 나타나자 댐벼들고 있다. 귀엽다. 녀석들.



* 포르코와 커티스의 재대결. 비행기로 대결이 끝나지 않자 물 속에서 수중전을 벌인다. 주먹다짐. 마지막 한 타로 포르코가 간신히 승리를 거둔다.

  그에게 당한 공적들이 한둘일리 없다. 그들이 뭉쳐 미국인 비행사 커티스를 고용한다. 뛰어난 비행술을 바탕으로 고장난 비행기를 몰고 정비소로 향하는 돼지를 격추하여 떨어뜨린다. 그러나 후에 포르코와의 재 대결에서 주먹다짐으로 그에게 진다. 이쁜 여자를 보면 사죽을 못쓰고 솔직히 고백하며 차이기도 한다. 본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다. 미국 할리우드에서 영화배우로 성공하고, 대통령에 되겠노라 당당히 밝히는 그.

  애니메이션이지만 굉장히 심각한 배경과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 세계대전 이후의 참상, 전쟁의 잔혹함을 겪은 비행사의 이야기. 해적소탕으로 벌어먹고 살지만 절대 죽이지는 않는 그 누구보다 인간적인 돼지. "파시스트가 되느니 돼지가 되는게 낫다" 고 말하는 돼지. 그래서 그는 스스로 마법을 걸어 돼지가 되었던 것일까. 나중에 피오의 뽀뽀 때문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마법이 풀린다. 그러나 얼굴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도 아닌데 왜 뽀뽀로 마법이 풀리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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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ka 2005-10-19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마법이 풀렸던가요? ^^;;;;;

애들에게 좋은 또 하나의 애니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

비로그인 2005-10-19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 영화가 아직 들어오지 못할때 불법으로 처음 보았죠.
그때의 감동이란... 잊을수 없죠.
정말 재미있고, 코끝이 찡한 애니매이션이였죠.
다시 보고싶군요.

물만두 2005-10-19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만 놓고 못봤어요 ㅜ.ㅜ

마늘빵 2005-10-19 2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카님 / 마지막에 커티스가 그러잖아요. 어어! 얼굴 좀 보여줘~ 하고요. 그게 변했다는 말인거 같은데요. ^^
따개비님 / 아핫. 불법으로 보셨군요. ㅋㅋ 전 불법 구할줄을 몰라서... 애니메이션 같지 않았어요. 이건.
만두님 / ^^ 디비디요? 학교도 디비디가 되면 저도 사놓고 틀어줄텐데 안되서 비됴가게서 빌려서 보여줍니다. 아직 못본 반이 있어서 쩝 오늘 또 빌렸어요.

릴케 현상 2005-10-20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인터넷으로 봤었죠^^ 넘 낭만적이야~

마늘빵 2005-10-20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책님 / ㅋㅋ 불법다운을 하셨군요. 왜 난 그런걸 모를까...

릴케 현상 2005-10-20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쉬잇~

마늘빵 2005-10-20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숨은아이 2005-10-20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건 돈주고 봐줘야 함다~ (사실 지브리 만화 중에 이 작품이 가장 마초 냄새가 강해서 저는 세 번 보고서야 이 작품을 좋아하게 됐어요. 마지막에 포르코의 인간 얼굴이 살짝 드러날 때, "연애소설을 읽는 노인"의 한 구절이 떠올랐지요. "때때로 인간들의 야만성을 잊게 해줄 정도의 아름다운 말로 사랑을 이야기하는..." 때로 아름다운 인간을 보면, 인간이 되는 것도 괜찮은 일로 여겨진다고 포르코가 말했던가...)

마늘빵 2005-10-20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은아이님 / 대단히 감명깊게 보셨나봐요. 그 대사 저도 기억납니다. ^^ "때로 아름다운 인간을 보면, 인간이 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단 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