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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후에 오는 것들 - 공지영 ㅣ 사랑 후에 오는 것들
공지영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단숨이 읽어내려갔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까지 결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조용한 내 방이 아닌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강남의 어느 한 구석텅이, 그곳에서 홀로 나만의 영역을 만들어놓고 몰입하고 있었다. 홍이와 준고의 사랑에. 수 많은 연인들이 내 곁을 스쳐지나가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홍이와 준고의 사랑을, 홍이와 민준의 사랑을 모른다. 오직 나만이 그 길거리에서 그들과 공감을 형성하고 있을 뿐이었다. 책을 읽으며 조용히 미소만 짓는 나의 모습이, 눈시울 뜨거워지며 그러고 있는 모습이, 어색하고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츠지 히토나리와 공지영씨의 합작품. 츠지 히토나리는 이전에 에쿠니 가오리와 함께 <냉정과 열정 사이>라는 합작품을 내놓은 적이 있다. 이와 같은 소설형식은 아마도 <냉정과 열정 사이> 가 처음이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그는 이번에 공지영씨와 함께 또다른 합작품을 만들어냈다. <사랑 후에 오는 것들>이라는.
소설 속 남녀 주인공이 되어 한 사람은 남자의 시각에서, 한 사람은 여자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두 사람의 사랑과 고민과 마음 속 이야기들은, 두 권 중 한 권만으로는 느낄 수 없는 무언가를 독자에게 전해준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사랑을 나누지만 서로의 머리와 가슴 속에서는 다른 사랑이 펼쳐지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모습들, 속 이야기들을, 이와 같은 소설형식 속에서는 좀더 밀착하여 느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츠지 히토나리의 책을 먼저 읽고 공지영의 것을 접한 건 잘한 일이다. 개인적으로 츠지 히토나리의 그것보다는 공지영의 그것이 더 마음에 와닿고 내 가슴을, 내 눈을 적혀주었다. 역시나 이야기가 눈물 와락 쏟아내는 그런 연애소설은 아니지만, 마음 속 잔잔한 파동을 불러오며 천천히 날 뜨겁게 만들었다. 나는 츠지 히토나리의 것에서보다 공지영의 것에서 그런 감정의 변화를 더 많이 느꼈다. 츠지 히토나리가 오직 준고와 홍이의 사랑을 중심으로 하여 풀어나가려고 한 반면, 공지영은 홍이의 주변 인물들의 사랑이야기에서 홍이가 느끼는 것들을 주변에 풀어놓으려고 했다. 엄마와 아빠의 사랑, 또 친한 친구 지희의 갑자기 걸려온 전화, 그녀로부터 받은 편지, 오래토록 날 기다려온 민준이에게 느끼는 감정, 이런 것들을 공지영은 천천히 그리고 살며시 풀어놓았다. 그리고 그것들은 서서히 하나가 되어 나를 홍이의 가슴 속에 들어가게 했다. 비록 남자지만 그 순간만큼은 홍이가 되었다. 그리고 때로는 민준이 되었다.
전화를 끊으려는데 수화기 저쪽에서 민준이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홍...... 나 보고 싶지 않니?"
나 보고 싶었어? 얼마만큼? 언제? 라고 나도 물었던 적이 있다. 아마 내가 준고와 사랑에 빠졌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왜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나 자주 사랑하느냐고 묻는 것인지, 왜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그렇게나 자주 보고 싶었느냐고 묻는지...... 나는 민준을 두고 그가 나를 사랑할까, 라든가 그가 나를 보고 싶어할까, 라든가 하는 궁금증을 가져 본 일이 있었다. 그렇다면 민준은 친구인 나를 두고 사랑에 빠져 것인지, 나는 당황스러워졌고 그래서 그저 응, 이라고 말해버렸다.
"보고 싶으냐는 물음이 아니라 보고 싶지 않으냐는 물음에 응이라고 대답한 건 대체 무슨 뜻이니?"
민준은 하하, 웃었다. (p72-73)
사랑의 저울에서 좀더 무거운 쪽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은, 항상 내가 상대방에게 가지고 있는 사랑의 무게와 상대방이 나에게 가지고 있는 사랑의 무게가 적어도 같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는 묻는다. 나 보고 싶지 않니, 얼마만큼, 언제, 나 사랑해? 라고. 지난 기억을 떠올려보아도 그렇다. 사랑의 저울에서 평형을 찾기는 어렵다. 항상 어느 한쪽이 더 내려가 있다. 단, 어느 한쪽이 완전히 아래로, 다른 한쪽이 완전히 위로 올라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것은 반드시 사랑의 종말을 예고하므로. 나도 그랬다. 사랑해 라고 말하면, 상대방도 내게 사랑해 라고 대답해주기를 원했다. 내가 원하는 대답이 돌아왔을 때 난 만족감을 느끼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을 때 난 홀로됨을 느낀다. 그것은 여자건 남자건 마찬가지일터. 사랑은 서로간의 소통을 필요로 한다.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일방통행이 될 때 사랑은 이별을 낳는다.
"엄마가 말이야. 아빠를 사랑하기는 하는데 좋아하지는 않는대...... 그건 어떻게 다른 걸까 내내 생각해 봤어. 사랑하면 말이야. 그 사람이 고통스럽기를 바라게 돼. 다른 걸로는 말고 나 때문에. 나 때문에 고통스럽기를, 내가 고통스러운 것보다 조금 만 더 고통스럽기를..... . 오래전부터 말하려고 했는데, 나는 너를...... ."(P95)
나는 오랫동안 좋아함과 사랑함의 의미가 어떻게 다를까 라는 생각을 해왔다. 사랑의 아픔도 겪어봤고, 누군가에게 아픔을 주기도 하면서, 그때마다 좋아함과 사랑함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엄마와 아빠의 사랑을 통해 홍이가 느낀 바, 그것은 내게 어느 정도의 대답을 안겨준다.
사랑하기는 하는데 좋아하지는 않는다. 또 좋아하기는 하는데 사랑하지는 않는다. 엄마는 아빠를 사랑하지만 좋아하지 않는다 하였고, 나는 민준이를 좋아하지만 사랑하지는 않는다 하였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더 고통스럽기를 바라는 것이다, 라는 홍이의 말. 인정해야할 듯 하다. 내가 상대를 사랑하는 것보다 상대가 날 더 사랑해주기를 원하고, 그럼으로써 내가 그녀의 눈에서 사라졌을 때, 그녀로부터 멀리 있을 때, 그녀에게 전화를 하지 않을 때, 그녀가 겪어야 하는 고통을 바.란.다. 나는. 그것이 사랑이다. 내가 고통스러운 것보다 상대가 조금 만 더 고통스럽기를 바란다는 것은, 내가 상대를 사랑하는 것보다 상대가 나를 사랑하는 '사랑의 무게'가 더 크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그러나 그럼 좋아함과 사랑함의 차이는 그것이 전부? 홍이의 말은 내게 어느 정도의 대답은 안겨주었지만 시원스럽게 만족스런 대답을 주지는 못했다. 그것이 전부라기엔 너무나 의심스럽다. 허전하다. 여전히 내가 계속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 중 하나로 남을 터.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니?"
낮은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미안해."
내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미안하다고?"
민준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랑한다고 십오 년 동안이나 널 바라보기만 하면서 기다린 사람한테, 결혼을 약속하자는 사람한테 미안하다고 말하는 여자가 세상에 너 말고 또 있을까?"
민준의 목소리가 그렇게 격앙된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언제나처럼 나는 또 그에게 야단을 맞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는 늘 어른스러웠고 그래서 나는 늘 철부지 같았다.
"...... 민준아."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흘러내린 눈물이 어둠 속에서 반짝 하고 빛났다. (p222)
내내 홍이에게 착한 남자로, 다정한 남자로 남아있던 민준은, 마침내 프로포즈에 대한 홍이의 거절에 지금껏 참아왔던 분노를 쏟아낸다. 사랑한다, 결혼하자는 말에 미안해 라고 대답하는 그녀 앞에서 더이상 나는 착한 남자로 있을 필요를 못느낀다. 하지만 민준이 홍이를 포기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다만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나의 가슴을 너무나 아프게 하는, 홍이가 미울 뿐이다. 하지만 홍이도 슬프다. 가슴아프다. 날 너무나 사랑해주는 민준에게 사랑을 줄 수 없어서...
헤어짐이 슬픈건 헤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만남의 가치를 깨닫기 때문일 것이다. 잃어버리는 것이 아쉬운 이유는 존재했던 모든 것들이 그 빈자리 속에서 비로소 빛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보다 더 슬픈 건 사랑을 줄 수 없다는 것을 너무 늦게야 알게 되기 때문에.(p109)
지금 울고 있느냐?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고통과 불안이 사랑이라고 믿는다면 아프리카로 떠나라.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널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