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스포일러 경고
"유하 감독, 주연 조인성." 이것만으로 충분히 먹고 들어가는 영화다.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라는 영화의 실패로 차기작까지 한참을 허송세월해야했던 유하 감독은 이후 <결혼은 미친짓이다> <말죽거리 잔혹사>로 대박 스타 감독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비열한 거리>까지 보고 나오며 유하 감독만의 냄새가 느껴졌다. <바람부는...>은 못봤고, <결혼은 미친 짓이다>와 <말죽거리 잔혹사> 그리고 <비열한 거리> 세 영화에서는 유하 감독만의 색채감과 스토리 진행 방식이 보였다. 뭐랄까 그의 영화는 진한 초코릿이 녹아 끈적끈적해져 입에 넣어 짝 달라붙는 느낌이다. 먹을 수 있게 적당히 딱딱한 초콜릿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녹아 마셔버릴 수 있는 액체도 아닌 녹다 만 달짝지근한 초콜릿. 그를 스타반열에 올려준 세 영화는 모두 실제로 끈적끈적했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타액으로 끈적했고, <말죽거리 잔혹사>는 피로 끈적했고, <비열한 거리>는 피와 땀과 때로는 진흙으로 더더욱 끈적거렸다. 총알 맞고 쏟아내는게 아니라 맞고 맞고 맞아서 터지고 새나오는 피다. 이런 실제적인 끈적함뿐 아니라 그의 영화는 그 자체가 끈적거린다.
조폭에 대한 영화. 정말 제대로 쓴 조폭 영화. 영화 속 민호가 쓰고 싶었던, 민호를 띄워줬던 그런 조폭 영화다. 성공하고 잘 살고 싶은 것은 인간의 욕망이렷다. 그리고 이를 부정할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성공에 간한 관념과 잘 산다는 것에 대한 시각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누구나 성공하고 잘 살고 싶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개념을 '돈'과 연관짓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누구나 잘 살고 싶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도 그렇다.


* 너무 멋있는거 아녀 이녀석. 어떻게 망가지면서도 저렇게 멋있을 수가 있어. 부럽잖아.

*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그녀를 보자 내 가슴은 쿵쾅쿵쾅. 그녀 앞에선 난 더이상 조폭이 아닙니다. 좋아한다, 사랑한다, 고백하지 못하고 수줍게 다가가던 그가 결국 너무나 답답해서 속이 터져버릴 것 같아서 대뜸 차에서 내려 기습키스를.
영화는 성공하고 잘 살고픈, 가진 것이라곤 몸뚱아리 밖에 없는 한 녀석에 관한 이야기다. 조폭 세계에 발들여놓고 이제 어느덧 중간보스 정도되었건만 사는 것이 쉽지 않구나. 변변찮은 아파트 좁은 공간에 사내 열 정도 거느리고 있는 병두는 최소한의 생활이라도 누리고자 하나 이건 맨날 라면이다. 고기 좀 먹게 해주세요, 돈 좀 주세요, 정말 힘듭니다, 보스에게 가서 말해보아도 먹히지 않는다. 시키는 다 했는데도 돈을 안준다. 결국 그는 괜찮은 물주 만나 상철을 배반한다. 푹푹 쑤시고 담그고 죽어가는 그의 눈빛을 바라보며 처음 사람을 죽였다. 기분 더럽다. 괴롭다. 갑자기 나타난 친구 민호. 영화를 하겠단다. 그래 도와주마. 친구 아이가. 조폭에 대한 영화를 찍겠다고. 오냐 좋다. 마음껏 보고 물어봐라. 하지만 말해선 안되는 거였다. 그래선 안되는 거였다. 아무리 친구라고 하지만 할 말이 따로 있는 거였다. 실수는 결국 죽음을 불러온다.
친구 민호는 겉은 서글서글하고 친절할지 모르지만 성공에 대한 욕망을 품고 있는 녀석이다. "두고 봐라. 내 죽이는거 하나 갖고 온다" 그래 민호는 그걸 병두에게서 가져왔다. 그리고 병두는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또, 자신이 믿었던 종수에게 결국 당하고 만다. 믿었는데. 식구가 뭐이가. 같이 함께 밥을 먹는 사이 아니가. 하지만 그 식구가 나를 배반할 줄이야. 순수하게 사람을 믿었던, 자신을 다 내보였던 병두는 결국 이 비열한 거리를 떠난다. "내 편 맞지? 우린 친구지?" 세상에 니 편은 없다.
유하 감독은 <비열한 거리>를 통해 자신이 80년대에 겪었던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탐구를 영화로 내보였다 했다. 폭력 탐구 시리즈 첫편이 <말죽거리 잔혹사>였다면, 이 영화가 학교에서 벌어지는 교사의 학생에 대한, 학생의 학생에 대한 폭력을 보여줬다면, 두번째 작품인 <비열한 거리>를 통해서는 조폭 세계의 폭력을, 그리고 좀더 근원적으로는 인간의 폭력성을 보여주려 했다. 폭력이라는 것은 물리적으로 가해지는 주먹의 폭력만을 가리키진 않는다. <말죽거리 잔혹사>와 <비열한 거리>를 통해 때리고 부수고 맞고 담그는 수많은 잔인한 장면들이 연출되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것은 그저 폭력에 대한 수박 겉핥기에 불과하다. 폭력이란 인간의 내면성에서 표출 되는 것인 만큼 주먹만을 봐서는 안된다. 믿었던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배신은 또다른 폭력이다. 병두는 그런점에서 겉은 조폭이지만 내면만은 순수한 사람이었다. 그 순수함을 가지고 사랑을 하려 했다. 그리고 믿음을 줬다. 그리고 사랑을 얻었다. 치고 박는 액션 영화를 좋아하진 않지만 <비열한 거리>만큼은 감독의 의도대로 인간의 내면적인 폭력성을 제대로 보여줬다 생각한다.
* 이 영화에는 조인성과 유하 감독 이외에도 다른 탁월한 배우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민호 역할로 나왔던 '남궁민'. 어쩜 그리도 순수하고 따뜻한 인상을 가지고 그토록 차갑고 날카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지 제대로 보여줬다. 유하 감독은 그의 눈에서 냉혹함을 봤다고 한다. 병두가 사랑하는 여인 현주로 나왔던 '이보영'. 티비 사극을 통해서 다소곳하면서 똑 부러지는 역할을 맡았던 그녀가 순수한 병두의 첫사랑으로 다가왔다. 아 어쩜 그리도 이쁜지. 그리고 진구. 병두의 오른팔 종수역으로 나왔던 배우다. 그의 연기에서 난 원빈을 보았다. 원빈 만큼의 뛰어난 외모는 아니지만, 원빈 만큼의 카리스마와 구수함을 지닌 배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