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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자유의 역사
존 B. 베리 지음, 박홍규 옮김 / 바오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정말 최고 중의 최고의 책이다. 바로 이것이 내가 원하던 책이다. 자기 자신을 아나키스트라고 자처하는 영남대 법학과 박홍규 교수의 수많은 번역서 중의 하나이다. 사상의 자유의 역사. '~의'가 두번이나 들어가 제목을 말할 때 어색하긴 하지만 그 정도 어색함 쯤은 이 책의 내용을 살펴본다면 위대함에 대한 찬양을 바뀐다.
이 책이 처음 나온 것은 1914년.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전의 일이다. 100전에 영국에서 나온 이 책은 이후 1952년에 제 2판이 나왔다고 하지만, 역자인 박홍규 교수는 초판을 번역 대본으로 삼고 자신의 역주와 해설을 붙였다. 번역은 하나의 학문으로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이 책의 매끄러운 번역과 역자의 적절한 역주와 해설이 이 책을 더욱 빛나게 했다고 자부한다.
박홍규 교수는 양심의 문제, 자유의 문제, 사상의 문제에 대해 매우 관심이 많다. 나 역시 그러한 문제에 1차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이전에 조국 교수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위하여>라는 책도, 김두식 교수의 <헌법의 풍경>도, 김상봉 교수의 <도덕 교육의 파시즘>이란 책도 그런 맥락에서 가장 우선해서 읽어야 할 도서 목록이었고, 읽은 후 이들을 최고의 도서로 뽑았다. 작년에 읽은 <도덕교육의 파시즘> 에 이어 이 책은 아직 채 두달도 지나지 않은 올해의 '최고의 책'으로 감히 미리 올려놓는다.
오늘날 우리는 학문, 종교, 출판의 자유를 당연히 여기고 있고, 또한 '사상의 자유' 역시 당연하다 생각하지만 작금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적어도 이 땅에서 만큼은. 언론, 출판, 종교, 집회의 자유에 사상의 자유는 포함되지 않는다. 아니 지금이 무슨 과거 박정희 독재 정권 시절도 아니고,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가 들어서기까지 도대체 몇년이 흘렀는데 아직도? 그래 아직도 그렇다. 우리나라엔 사상의 자유를 언급하고 있는 법조문이 없다한다. 사상의 자유란 곧 '정신의 자유'다. 박홍규 교수는 역자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험난한 과정을 거친 뒤에 사상의 자유라는 '원칙'이 일단 한 사회 속에서 받아들여지면, 그 원칙은 일반적인 편의의 영역을 지나 우리가 정의라고 부르는 보다 수준 높은, 사회적 효용을 갖는 편의의 영역으로 접어들게 된다. 즉 그 원칙은 모든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하나의 권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상의 자유가 보편적인 가치로서 시민의 기본권이 되는 가장 핵심적인 근거라고 할 수 있다." (p6)(역자 머리말 中)
그는 사상의 자유가 시민의 기본권이 되는 근거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 언급한다. 유럽과 미국사회의 험난한 역사 속에서 쟁취한 사상의 자유는 사회속으로 들어왔고,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하나의 권리이며 기본권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아.니.다. 이 책은 매우 오래된 고전이지만 100년전의 그것은 100년후의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사상의 자유의 역사는 지금 이 땅에서, 바로 이 시기에 이루어져야 한다.
저자 존 B. 베리는 크게 8장으로 나누고, 1장부터 '사상의 자유와 그 반대세력' '자유로운 이성 - 그리스와 로마' '구속된 이성 - 중세' '해방의 전망 -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종교적 관용' '합리주의의 성장 - 17세기와 18세기' '합리주의의 진보 - 19세기' '사상의 자유에 대한 정당화'. 이렇게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시대순으로 사상의 자유를 다루고 있다.
사상의 자유는 종교의 자유를 배제한 채 논의할 수는 없다. 사상의 자유가 종교의 자유는 아니지만, 종교의 자유는 사상의 자유에 속한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살펴봤을 때 - 그것은 전적으로 서양사이지만 - 사상의 자유라는 것은 종교의 자유였다. 기독교의 탄생과 기독교를 둘러싼 관용과 불관용, 세력다툼, 이런 것들이 종교의 자유를 구성했고, 그것은 곧 사상의 자유였다.
저자는 1장 서론에서 사상의 자유는 자연적인 권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뭐라고?! 아니 어떻게 사상의 자유가 자연적인 권리가 아니라는 거야. 이 책은 내가 기대했던 바대로 서술하고 있지 않았다. 아니 왜. 도대체 왜 사상의 자유가 자연적 권리가 아니라는 거야. 베리는 말한다. 인간에게 자연적인 권리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권리' 와 '자녀를 낳을 권리'라고. 사상의 자유는 여기서 제외된다. 왜?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면서.
"만일 우리가 의견의 표현을 이(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권리, 자녀를 낳을 권리)와 동일한 종류의 권리라고 인정할 경우, 이를 근거로 의견의 표현에 대한 무간섭을 요구한다거나 그에 대한 사회의 규제가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인정은 지나치게 폭이 넓다. 왜냐하면 다른 두 권리의 제한은 모든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지만, 의견의 자유에 대한 제한은 혁명적이거나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의견을 표현하고자 하는 비교적 소수에게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사실 자연적인 권리라는 개념에 근거해서는 타당한 논의가 성립될 수 없다. 그러한 개념은 사회와 그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옹호할 수 없는 이론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p23)
사회를, 국가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반사회적 행동과 마찬가지로 유해한 의견을 유포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도 자신들에게 주어진 의무라고 말한다. 국가를 유지하고 지켜야 할 이유가 충분하므로. 어떤 의견이 도덕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다수를 위협한다면 그것을 막아야 하는 것은 그들의 의무이다. 좋아. 동의. 그럼 사상의 자유는 억압되어도 좋은 것인가? 아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과정을 통해서 살펴보고 있다.
루터는 사상의 자유에 불관용을 주장하며 "참된 교리를 강제하고 이단을 근절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고, 다른 문제와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문제에서도 군주에게 철저히 복종하는 것이 신민의 의무이며, 국가의 목적은 신앙의 수호에 있다"(p95)고 한다. 또 사상의 자유에 대해 관용을 주장하는 다른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개인의 종교적인 신념은 정부의 권위가 효력을 미칠 수 없는 영역이다. 권위에 대한 굴종은 위선적인 신앙고백을 초래할 뿐이다. 모든 신념은 허용되어야 하며, 세속 정부는 정교와 이단을 막론하고 공익을 위해 통치해야 한다. 신이 다양한 형태의 숭배를 원한다는 것은 그 스스로 명시하는 바이다. 신에게 다다를 수 있는 길은 다양하다." (테미스티우스)(p68)
"다른 그 어떤 자유보다도 양심에 따라 자유로이 알고 말하고 토론할 수 있는 자유를 내게 달라." (밀턴)(P120)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누군가의 행동의 자유에 대한 간섭을 정당화하는 유일한 목적은 자기 방위"이며 압제는 오로지 타인에게 해를 입히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경우에만 정당화된다. (밀)(p259)
고대 그리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비록 악법에 의한 죽음을 택했지만, 중세에 벌어질 사상의 자유에 대한 억압에 비해 그리스 사회는 매우 관용적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죽기 이전까지 국가에 반하는 그런 말씀과 행동을 하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그리스 사회의 관용을 말해준다. 만일, 그리스가 불관용적인 사회였다면 소크라테스는 즉각 처형되었을 것이다. 오래도록 그가 젊은이들을 가르치도록 놔두고, 나중에 붙잡아서도 바로 죽이지 않고, 법정에서 변론의 기회를 준 것 또한 그리스의 관용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후대의 역사가들을 비롯하여 우리들은, 소크라테스의 편에 선 나머지 그를 죽인 그리스 사회를 매우 악한 존재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중세엔 이성이 구속되었다. 기독교의 마녀사냥과 종교재판은 관용은커녕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을 찾아 볼 수 없는 사례들을 만들었고, 모두가 기독교에 미쳐있었다. 종교는 이성과 교집합을 이룰 수 없다. 종교는 마음에서 오는 것이며, 그것은 이성을 넘어선 그 무엇,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있는 것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이성의 한계치를 시험해보려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광신적 종교는 이성을 감옥에 처넣었고, 사람들은 모두 종교에 미쳤다. 하지만 기독교의 불관용은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끝난 지금 이 시대에도 계속 되고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나, 서양 유럽사회에서나 마찬가지다. 선거시즌이 되면 기독교는 더욱 세력을 과시한다. 어느 한 세계적인 규모의 교회의 목사는 보수정당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선거유세를 돕고 연설장에서 빨갱이 운운하기도 한다. 목사 혼자만 그러면 그냥 알아서 놀으려니 하겠건만 그 목사가 담당하고 있는 교회의 신도들은 성서의 가르침과 목사의 가르침을 혼동하며 그를 추종한다. 서구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최근 벌어진 덴마크 신문사의 마호메트 만평 파문은 독일, 영국, 프랑스로 이어졌고, 결국 유혈 폭력 사태를 낳았다. 미국의 부시는 하느님 운운하며 이라크를 친다. 이성은 아직 감옥에 있다.
중세 이후의 인문주의라 불리우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지나가고, 합리주의가 등장하며 루소, 볼테르 등의 계몽주의자들은 이성을 창고에서 꺼내왔다. 종교의 거센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이성이 종교를 대체했다. 볼테르는 <광신주의자의 무덤>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다.
"사형 집행자들에 의해 지탱되며 화형의 나무 다발에 둘러싸인 불합리하고도 잔인한 교의이자 그로부터 권력과 부를 얻는 무리에 의해서만 유일하게 승인받을 수 있는 교의, 그리고 오로지 세계의 작은 일부분에서만 받아들여지는 특수한 교의를, 사람들은 무지몽매하게도 단순하고 보편적인 종교보다 더 선호한다." (p176)
사상의 자유를 어떻게 정당화 할 것인가. 합리주의의 시대에 볼테르와 루소를 비롯한 계몽주의자들이 이성을 끄집어냈고 사상의 자유를 이루기 위한 초석을 마련했다. 이후에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로이 의견을 낼 권리에 대해 "매번 논쟁을 해봐도 전혀 논박되지 않기 때문에 그 의견을 참이라고 가정하는 것과, 논박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그 의견을 참이라고 가정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우리의 의견을 반박하고 반증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야말로 행동을 위해 우리의 의견을 참이라고 가정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조건이다. 그 외의 다른 어떤 조건 위에서도 인간적 능력을 지닌 존재로서는 옳음에 대한 합리적인 확신을 가질 수 없다." (p263) 라고 말하며 의견의 자유, 사상의 자유에 대해 정당화를 시도했다.
이 책은 이렇게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시대순으로 올라오며 중세와 근대에 이르기까지 사상의 자유가 어떻게 억압되었고 또 신장되었는지에 대해 역사적 사례를 들어 설명해주고 있다. 결국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사상의 자유'이다. 그는 사상의 자유를 부여해야만 한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기나긴 역사를 서술하며 지금까지 살펴봐왔던 것이다. 사상의 자유는 인간이 아이를 낳고, 내 생명을 지킬 만큼의 자연적인 권리는 아니다. 아이를 낳고, 생명을 지키는 권리는 동물들에게도 있다. 하지만 동물과 다른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가 있는데,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려야 할 권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상의 자유'이다. 내 생각, 내 의견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는 권리, 그것이 바로 사상의 자유이다. 그리고 사상의 자유는 관용이기도 하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소수의 사람들과 양심적 병역거부는 국가의 보존을 위해 절대로 안된다라고 주장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대립할 수 있는 것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사상의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된다고 주장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허용하자고 주장하는 소수의 사람들의 의견에 온갖 욕설과 비난과 인격모독 등의 테러를 하는 행위는 '불관용'적인 사회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불관용적인 사회이다. 이것은 의견을 자유롭게 낼 수 있는 권리가 실현되는 사회와는 거리가 멀다. 의견을 자유롭게 낸다는 것, 나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한다는 것은, 나의 생각과 의견을 '존중받을 권리'와 연계되어 있다. 단순히 말을 할 수 있다고 해서 사상의 자유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중세에도 사상의 자유는 주어졌다. 하느님은 없다, 고 '말'하고 화형당하면 되니까. 그래서 사상의 자유는 존중과 관용을 포함해야 한다.
국가 보안법과 양심적 병역거부와 같이 종교와 정치가 뒤섞인 민감한 문제에 있어서 소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말 할 권리를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볼테르는 말했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의 말 할 권리를 위해서는 함께 싸우겠다"라고. 비록 의견은 다르지만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귀기울일 줄 아는 자세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역자 박홍규는 친절하게도 '해설' 을 덧붙이며 우리나라의 억압된 사상의 자유의 현실을 꼬집어 주고 있다. 교육에서, 헌법에서, 국가보안법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에서 그는 이성이 감옥에 갇혀있는 우울한 현실을 보여준다. 우리가 근 100년된 <사상의 자유의 역사>라는 책을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번역하고 읽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서양에서의 사상의 자유가 어떤 과정을 거쳐왔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지금,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의 문제를 살펴보기 위함이다. 이 땅에 사상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