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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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아도 좋은 친구는 그리 많지 않다. 일단 억지로 얘기하기를 그만두면, 몸이 오랜 세월에 길든 서로의 리듬을 마음대로 새겨준다. 그러면 대화는 느긋하고 매끄럽다. - <검정호랑나비> 中 -51쪽

지금은 초췌하게 눈 밑에 기미까지 끼어 있지만, 언젠가는 새로운 사랑을 하고 다이어트다 뭐다 시끄러워 지리라. 내가 전에 여기 왔었다는 것을 잊게 한 똑같은 힘이 그녀를 또 웃게 한다.
멈추지 않는 시간은 아쉬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름다운 순간을 하염없이 품기 위해 흘러간다. - <검정호랑나비> 中 -52쪽

나는 그의 몸매도, 할 때의 표정도, 비디오를 보며 연구한 듯 집요한 섹스 스타일도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욕망은 삽입도 아니고 다른 무엇도 아니고 오로지 보는 것이 전부였고, 나를 즐겁게 해주려는 생각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너무 집요해 나도 모르게 몇 번이나 절정에 올랐지만, 그것은 그냥 보통 섹스에서의 평범한 기분 좋음이 아니라 어딘가 뒤틀린 환희였다. 그러나 뭐라 표현하면 좋을까.
그 유난히 가는 팔도, 울룩불룩 튀어나온 등뼈도, 부숭부숭한 털도, 안경을 벗으니까 유난히 긴 속눈썹도, 햇볕에 까맣게 탄 피부도 싫다고 외면할수록 좋았다. 아무말이 없는 것도 나를 매혹시켰다.
그것은 어린 시절 바다에 놀러 가서, 파도치는 해변에서 뒹굴 때의 감각과 비슷했다. 물을 머금은 부드러운 모래가 몸 아래서 흔들리는 느낌, 그 감촉이 황홀하도록 기분 좋아서, 수영복 속으로 모래가 찔끔찔끔 들어와 나중에 성가시다는 것을 알면서도, 에이 뭐, 하고 물가에 누워 있었던 때의 그 기분. 몸을 담글 때까지는 혐오스럽지만, 한번 그 부드러운 모래의 힘에 사로잡히면 거기에 있고 싶어진다.
- <미라> 中-81-82쪽

아마도 전쟁이란 것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그리고 또 무엇을 '미워하자'고 정하고는, 자기 안에 잠들어 있는 증오란 증오를 전부 끌어내 거기에 쏟아 붓고 탓하는, 그런 중독 비슷한 이상한 상태에서 일어나는지도 모르겠다......
- <밝은 저녁> 中 -94쪽

그 냉정함을 듬직하다 여겼었다. 하지만 사실은 벌써부터 알고 있었다. 그는 그저 무관심하고,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과 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마음이 이어지지 않는 사람일 뿐이다. - <아빠의 맛> 中 -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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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6-02-16 0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과학서적인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마늘빵 2006-02-16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그렇죠? ^^ 저도 첨에 제목만 보고 그런줄 알았어요.
 
사상의 자유의 역사
존 B. 베리 지음, 박홍규 옮김 / 바오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사상의 자유의 역사>를 읽기 위한 메모 몇 가지

사상의 자유라는 것이 과거 서양사회에서 종교의 자유와 일치한다고 봐도 좋을 만큼 종교, 그 중에서도 기독교는 사상의 자유를 논함에 있어 뗄 수 없는 부분이다. 이 책을 읽는 와중에 비기독교 신자인 나로선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으므로 꽤나 낯설었다. 기독교와 관련해서 또 철학과 관련해서 몇 가지 단어들의 의미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어렴풋이는 알고 있지만 도대체가 그 차이점이 정확히 뭔지, 그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몇몇 단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이 책을 읽는데 있어 많음 도움이 될 것이다.

 

하나. 변신론(辯神論)

영어로는 Theodicy  독일어로는 Theodizee

어원 : 신을 뜻하는 그리스어 Theos 와 정의를 뜻하는 그리스어 Dike

의미 : 악이라는 현상에 관련해 신을 변호하려는 입장

변신론은 세계 속에 창궐하는 악에 대한 책임을 신에게 전가할 수 없음을 보여 주려고 한다. 이 말은 <신의 선함, 인간의 자유, 세계의 기원에 관한 변신론>(1710)이라는 라이프니츠의 책 제목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둘. 무신론(無神論)

영어로는 Atheisme 독일어로는 Atheismus

어원 : 신을 뜻하는 그리스어 Theos 에 부정을 뜻하는 접두어 a가 붙음

의미 : 신의 존재나 신이 세계의 형성에 어떤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입장
           신에 대한 거부로부터 세계에 참여하기 시작하는 것

  이론적 관점에서 볼 때, 무신론은 우주와 인간의 시원, 진화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의 결과로서 등장한다. 무신론은 불가지론과 구분된다. 불가지론은 신의 존재에 대한 언급을 거부하는 입장이다.

  실천적 유물론은 일종의 윤리학이며, 도덕적, 정치적 참여에 연관된다. 니체의 주장처럼 "신은 죽었다"는 것을 긍정하는 것은 기독교의 가치를 거부함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무신론은 마르크스에서처럼 종교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사르트르에서처럼 인간의 절대적 사유에 대한 긍정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이상은 <철학사전>, 엘리자베스 클레망 외, 이정우 역, 동녘  참조)

 

셋. 이신론(理神論)

  이상주의적 입장에ㅓ 종교를 생각하거나 자연종교의 입장에서 역사적 종교를 설명하고자 하는 입장을 말한다. 신이 세계의 창조자라고 인정하긴 하지만 세계를 지배하는 인격적 존재라고는 보지 않는다. 또 일단 창조된 세계는 신의 지배를 떠나 정해진 자기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보면서, 기적이나 예언과 같은 불가사의한 요소는 배척한다.

(본 책 P 91 역주 참조)

 

넷. 설계논증

  설계논증이란, 세계는 목적에 적합하게끔 수단이 끝없이 조절된다는 명백한 설계의 흔적을 나타내 보이는데, 이는 강력한 지성의 의식적인 계획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밖에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흄은 단순한 지성적 존재는 그러한 결과를 설명하기에 충분한 원인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들어 이러한 추론을 논박한다. 왜냐하면 설계논증에 따를 경우 물질세계의 체계는 그 원인으로서 그에 대응하는 관념들의 체계를 필요로 하는데, 그러나 그러한 정신적인 체계 역시 물질세계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설명을 필요로 하며, 따라서 우리는 결국 원인의 무한소급에 빠져들게 되고 말기 때문이다.

(본 책 P184 본문 참조)

 

다섯. 불가지론(不可知論)

  불가지론이라는 말은 특히 종교에 관한 태도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다. 그러나 이 말이 더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는 급진적 회의주의와 동의어이다. (<철학사전> 참조)

  불가지론자들은 인간의 이성이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신학은 그 한계 밖에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과학이 취급하는 세계는 그 한계 안에 있다. 과학은 전적으로 현상만을 다룰 뿐, 현상의 배후에 놓여 있을지도 모를 궁극적인 실재의 본성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할 것이 없다. 이 궁극적인 실재에 대해서는 네 가지 태도가 있을 수 있다.

  첫째. 궁극적인 실재가 존재할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알 수 있다고 확신하는 형이상학자와 신학자의 태도.

  둘째. 궁극적인 실재의 존재를 부정하기는 하지만 그러한 부정이 오로지 형이상학적 논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역시 형이상학자일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태도.

  셋째, 궁극적인 실재가 존재한다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그것에 대해 뭔가 알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 사람들.

  넷째. 궁극적인 실재의 존재 여부를 알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 이들이 엄밀한 의미에서 불가지론자.

  * 셋째도 넓은 의미에서 불가지론자로 분류된다. 불가지론자와 무신론자의 차이는, 무신론자가 인격신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반면 불가지론자는 그 존재 자체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 책 P23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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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자유의 역사
존 B. 베리 지음, 박홍규 옮김 / 바오 / 2005년 9월
평점 :
절판


 

 정말 최고 중의 최고의 책이다. 바로 이것이 내가 원하던 책이다. 자기 자신을 아나키스트라고 자처하는 영남대 법학과 박홍규 교수의 수많은 번역서 중의 하나이다. 사상의 자유의 역사. '~의'가 두번이나 들어가 제목을 말할 때 어색하긴 하지만 그 정도 어색함 쯤은 이 책의 내용을 살펴본다면 위대함에 대한 찬양을 바뀐다.

  이 책이 처음 나온 것은 1914년.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전의 일이다. 100전에 영국에서 나온 이 책은 이후 1952년에 제 2판이 나왔다고 하지만, 역자인 박홍규 교수는 초판을 번역 대본으로 삼고 자신의 역주와 해설을 붙였다. 번역은 하나의 학문으로서 다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이 책의 매끄러운 번역과 역자의 적절한 역주와 해설이 이 책을 더욱 빛나게 했다고 자부한다.

  박홍규 교수는 양심의 문제, 자유의 문제, 사상의 문제에 대해 매우 관심이 많다. 나 역시 그러한 문제에 1차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이전에 조국 교수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위하여>라는 책도, 김두식 교수의 <헌법의 풍경>도, 김상봉 교수의 <도덕 교육의 파시즘>이란 책도 그런 맥락에서 가장 우선해서 읽어야 할 도서 목록이었고, 읽은 후 이들을 최고의 도서로 뽑았다. 작년에 읽은 <도덕교육의 파시즘> 에 이어 이 책은 아직 채 두달도 지나지 않은 올해의 '최고의 책'으로 감히 미리 올려놓는다.

  오늘날 우리는 학문, 종교, 출판의 자유를 당연히 여기고 있고, 또한 '사상의 자유' 역시 당연하다 생각하지만 작금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적어도 이 땅에서 만큼은. 언론, 출판, 종교, 집회의 자유에 사상의 자유는 포함되지 않는다. 아니 지금이 무슨 과거 박정희 독재 정권 시절도 아니고,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가 들어서기까지 도대체 몇년이 흘렀는데 아직도? 그래 아직도 그렇다. 우리나라엔 사상의 자유를 언급하고 있는 법조문이 없다한다. 사상의 자유란 곧 '정신의 자유'다. 박홍규 교수는 역자 머리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험난한 과정을 거친 뒤에 사상의 자유라는 '원칙'이 일단 한 사회 속에서 받아들여지면, 그 원칙은 일반적인 편의의 영역을 지나 우리가 정의라고 부르는 보다 수준 높은, 사회적 효용을 갖는 편의의 영역으로 접어들게 된다. 즉 그 원칙은 모든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하나의 권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상의 자유가 보편적인 가치로서 시민의 기본권이 되는 가장 핵심적인 근거라고 할 수 있다." (p6)(역자 머리말 中)

  그는 사상의 자유가 시민의 기본권이 되는 근거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 언급한다. 유럽과 미국사회의 험난한 역사 속에서 쟁취한 사상의 자유는 사회속으로 들어왔고,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하나의 권리이며 기본권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아.니.다. 이 책은 매우 오래된 고전이지만 100년전의 그것은 100년후의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사상의 자유의 역사는 지금 이 땅에서, 바로 이 시기에 이루어져야 한다.

  저자 존 B. 베리는 크게 8장으로 나누고, 1장부터 '사상의 자유와 그 반대세력' '자유로운 이성 - 그리스와 로마' '구속된 이성 - 중세' '해방의 전망 -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종교적 관용' '합리주의의 성장 - 17세기와 18세기' '합리주의의 진보 - 19세기' '사상의 자유에 대한 정당화'. 이렇게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시대순으로 사상의 자유를 다루고 있다.

  사상의 자유는 종교의 자유를 배제한 채 논의할 수는 없다. 사상의 자유가 종교의 자유는 아니지만, 종교의 자유는 사상의 자유에 속한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살펴봤을 때 - 그것은 전적으로 서양사이지만 - 사상의 자유라는 것은 종교의 자유였다. 기독교의 탄생과 기독교를 둘러싼 관용과 불관용, 세력다툼, 이런 것들이 종교의 자유를 구성했고, 그것은 곧 사상의 자유였다.

  저자는 1장 서론에서 사상의 자유는 자연적인 권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뭐라고?! 아니 어떻게 사상의 자유가 자연적인 권리가 아니라는 거야. 이 책은 내가 기대했던 바대로 서술하고 있지 않았다. 아니 왜. 도대체 왜 사상의 자유가 자연적 권리가 아니라는 거야. 베리는 말한다. 인간에게 자연적인 권리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권리' 와 '자녀를 낳을 권리'라고. 사상의 자유는 여기서 제외된다. 왜?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면서.

  "만일 우리가 의견의 표현을 이(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권리, 자녀를 낳을 권리)와 동일한 종류의 권리라고 인정할 경우, 이를 근거로 의견의 표현에 대한 무간섭을 요구한다거나 그에 대한 사회의 규제가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인정은 지나치게 폭이 넓다. 왜냐하면 다른 두 권리의 제한은 모든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지만, 의견의 자유에 대한 제한은 혁명적이거나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의견을 표현하고자 하는 비교적 소수에게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사실 자연적인 권리라는 개념에 근거해서는 타당한 논의가 성립될 수 없다. 그러한 개념은 사회와 그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옹호할 수 없는 이론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p23)

  사회를, 국가를 움직이는 사람들은 반사회적 행동과 마찬가지로 유해한 의견을 유포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도 자신들에게 주어진 의무라고 말한다. 국가를 유지하고 지켜야 할 이유가 충분하므로. 어떤 의견이 도덕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다수를 위협한다면 그것을 막아야 하는 것은 그들의 의무이다. 좋아. 동의. 그럼 사상의 자유는 억압되어도 좋은 것인가? 아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과정을 통해서 살펴보고 있다.

  루터는 사상의 자유에 불관용을 주장하며 "참된 교리를 강제하고 이단을 근절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고, 다른 문제와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문제에서도 군주에게 철저히 복종하는 것이 신민의 의무이며, 국가의 목적은 신앙의 수호에 있다"(p95)고 한다. 또 사상의 자유에 대해 관용을 주장하는 다른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개인의 종교적인 신념은 정부의 권위가 효력을 미칠 수 없는 영역이다. 권위에 대한 굴종은 위선적인 신앙고백을 초래할 뿐이다. 모든 신념은 허용되어야 하며, 세속 정부는 정교와 이단을 막론하고 공익을 위해 통치해야 한다. 신이 다양한 형태의 숭배를 원한다는 것은 그 스스로 명시하는 바이다. 신에게 다다를 수 있는 길은 다양하다." (테미스티우스)(p68)

 "다른 그 어떤 자유보다도 양심에 따라 자유로이 알고 말하고 토론할 수 있는 자유를 내게 달라." (밀턴)(P120)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누군가의 행동의 자유에 대한 간섭을 정당화하는 유일한 목적은 자기 방위"이며 압제는 오로지 타인에게 해를 입히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경우에만 정당화된다. (밀)(p259)

   고대 그리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비록 악법에 의한 죽음을 택했지만, 중세에 벌어질 사상의 자유에 대한 억압에 비해 그리스 사회는 매우 관용적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죽기 이전까지 국가에 반하는 그런 말씀과 행동을 하고 다닐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그리스 사회의 관용을 말해준다. 만일, 그리스가 불관용적인 사회였다면 소크라테스는 즉각 처형되었을 것이다. 오래도록 그가 젊은이들을 가르치도록 놔두고, 나중에 붙잡아서도 바로 죽이지 않고, 법정에서 변론의 기회를 준 것 또한 그리스의 관용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후대의 역사가들을 비롯하여 우리들은, 소크라테스의 편에 선 나머지 그를 죽인 그리스 사회를 매우 악한 존재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중세엔 이성이 구속되었다. 기독교의 마녀사냥과 종교재판은 관용은커녕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을  찾아 볼 수 없는 사례들을 만들었고, 모두가 기독교에 미쳐있었다. 종교는 이성과 교집합을 이룰 수 없다. 종교는 마음에서 오는 것이며, 그것은 이성을 넘어선 그 무엇,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있는 것이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이성의 한계치를 시험해보려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광신적 종교는 이성을 감옥에 처넣었고, 사람들은 모두 종교에 미쳤다. 하지만 기독교의 불관용은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끝난 지금 이 시대에도 계속 되고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나, 서양 유럽사회에서나 마찬가지다. 선거시즌이 되면 기독교는 더욱 세력을 과시한다. 어느 한 세계적인 규모의 교회의 목사는 보수정당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선거유세를 돕고 연설장에서 빨갱이 운운하기도 한다. 목사 혼자만 그러면 그냥 알아서 놀으려니 하겠건만 그 목사가 담당하고 있는 교회의 신도들은 성서의 가르침과 목사의 가르침을 혼동하며 그를 추종한다. 서구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최근 벌어진 덴마크 신문사의 마호메트 만평 파문은 독일, 영국, 프랑스로 이어졌고, 결국 유혈 폭력 사태를 낳았다. 미국의 부시는 하느님 운운하며 이라크를 친다. 이성은 아직 감옥에 있다.

   중세 이후의 인문주의라 불리우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지나가고, 합리주의가 등장하며 루소, 볼테르 등의 계몽주의자들은 이성을 창고에서 꺼내왔다. 종교의 거센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이성이 종교를 대체했다. 볼테르는 <광신주의자의 무덤>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했다.

  "사형 집행자들에 의해 지탱되며 화형의 나무 다발에 둘러싸인 불합리하고도 잔인한 교의이자 그로부터 권력과 부를 얻는 무리에 의해서만 유일하게 승인받을 수 있는 교의, 그리고 오로지 세계의 작은 일부분에서만 받아들여지는 특수한 교의를, 사람들은 무지몽매하게도 단순하고 보편적인 종교보다 더 선호한다." (p176)
 
  사상의 자유를 어떻게 정당화 할 것인가. 합리주의의 시대에 볼테르와 루소를 비롯한 계몽주의자들이 이성을 끄집어냈고 사상의 자유를 이루기 위한 초석을 마련했다. 이후에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로이 의견을 낼 권리에 대해 "매번 논쟁을 해봐도 전혀 논박되지 않기 때문에 그 의견을 참이라고 가정하는 것과, 논박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그 의견을 참이라고 가정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우리의 의견을 반박하고 반증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야말로 행동을 위해 우리의 의견을 참이라고 가정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조건이다. 그 외의 다른 어떤 조건 위에서도 인간적 능력을 지닌 존재로서는 옳음에 대한 합리적인 확신을 가질 수 없다." (p263) 라고 말하며 의견의 자유, 사상의 자유에 대해 정당화를 시도했다.

  이 책은 이렇게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시대순으로 올라오며 중세와 근대에 이르기까지 사상의 자유가 어떻게 억압되었고 또 신장되었는지에 대해 역사적 사례를 들어 설명해주고 있다. 결국 저자가 주장하는 것은 '사상의 자유'이다. 그는 사상의 자유를 부여해야만 한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기나긴 역사를 서술하며 지금까지 살펴봐왔던 것이다. 사상의 자유는 인간이 아이를 낳고, 내 생명을 지킬 만큼의 자연적인 권리는 아니다. 아이를 낳고, 생명을 지키는 권리는 동물들에게도 있다. 하지만 동물과 다른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가 있는데,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려야 할 권리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상의 자유'이다. 내 생각, 내 의견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는 권리, 그것이 바로 사상의 자유이다. 그리고 사상의 자유는 관용이기도 하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소수의 사람들과 양심적 병역거부는 국가의 보존을 위해 절대로 안된다라고 주장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대립할 수 있는 것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사상의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된다고 주장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허용하자고 주장하는 소수의 사람들의 의견에 온갖 욕설과 비난과 인격모독 등의 테러를 하는 행위는 '불관용'적인 사회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불관용적인 사회이다. 이것은 의견을 자유롭게 낼 수 있는 권리가 실현되는 사회와는 거리가 멀다. 의견을 자유롭게 낸다는 것, 나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한다는 것은, 나의 생각과 의견을 '존중받을 권리'와 연계되어 있다. 단순히 말을 할 수 있다고 해서 사상의 자유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중세에도 사상의 자유는 주어졌다. 하느님은 없다, 고 '말'하고 화형당하면 되니까. 그래서 사상의 자유는 존중과 관용을 포함해야 한다. 

  국가 보안법과 양심적 병역거부와 같이 종교와 정치가 뒤섞인 민감한 문제에 있어서 소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말 할 권리를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볼테르는 말했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의 말 할 권리를 위해서는 함께 싸우겠다"라고. 비록 의견은 다르지만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귀기울일 줄 아는 자세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역자 박홍규는 친절하게도 '해설' 을 덧붙이며 우리나라의 억압된 사상의 자유의 현실을 꼬집어 주고 있다. 교육에서, 헌법에서, 국가보안법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에서 그는 이성이 감옥에 갇혀있는 우울한 현실을 보여준다. 우리가 근 100년된  <사상의 자유의 역사>라는 책을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번역하고 읽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서양에서의 사상의 자유가 어떤 과정을 거쳐왔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지금,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의 문제를 살펴보기 위함이다. 이 땅에 사상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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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eetmagic 2006-02-15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몹씨 땡기는데요 ?

마늘빵 2006-02-15 0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력추천입니다. <도덕교육의 파시즘> 역시. 이 책은 기독교와 연관해서, <도덕교육의 파시즘>은 우리나라의 반공교육과 연관해서 보면 참 좋아요. 둘다 사상의 자유를 억압한 경우를 살펴보고 있죠.

코마개 2006-02-15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이 나오기 전에 있던 양병우 교수의 번역본도 있는데요, 가격이390원 입니다. 박영사에서 나온...알만하죠? 번역이 어떨지. 박홍규 교수 번역본도 있는데 아직 못 읽고 있습니다. 이 기회에 탄력 받아서 읽어야지

마늘빵 2006-02-15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박홍규 교수도 머리말에 이야기했어요. 우리나라에서 50년대엔가 번역했다고. 그런데 그 번역본이 핵심내용을 잘못 이해하고 번역한게 많아서 다시 했다고요. 그걸 가지고 계시는군요. 박홍규 교수도 대학 학부 때 그 책을 읽고 감명받았다고 했어요.

타지마할 2006-04-14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리뷰를 읽고 주문했어요. 물론 Thanks to도 했지여.

마늘빵 2006-04-14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감사합니다. ^^
 
사상의 자유의 역사
존 B. 베리 지음, 박홍규 옮김 / 바오 / 2005년 9월
절판


험난한 과정을 거친 뒤에 사상의 자유라는 '원칙'이 일단 한 사회 속에서 받아들여지면, 그 원칙은 일반적인 편의의 영역을 지나 우리가 정의라고 부르는 보다 수준 높은, 사회적 효용을 갖는 편의의 영역으로 접어들게 된다. 즉 그 원칙은 모든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하나의 권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상의 자유가 보편적인 가치로서 시민의 기본권이 되는 가장 핵심적인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역자 머리말 中)-6쪽

만일 우리가 의견의 표현을 이(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권리, 자녀를 낳을 권리)와 동일한 종류의 권리라고 인정할 경우, 이를 근거로 의견의 표현에 대한 무간섭을 요구한다거나 그에 대한 사회의 규제가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인정은 지나치게 폭이 넓다. 왜냐하면 다른 두 권리의 제한은 모든 사람의 행동에 영햐을 미치지만, 의견의 자유에 대한 제한은 혁명적이거나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의견을 표현하고자 하는 비교적 소수에게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사실 자연적인 권리라는 개념에 근거해서는 타당한 논의가 성립될 수 없다. 그러한 개념은 사회와 그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옹호할 수 없는 이론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제1장)-23쪽

받아들일 수 있는 권위와 받아들일 수 없는 권위는 너무나 분명해서 굳이 그 차이를 구별해야 할 필요조차 없는 것처럼 보일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 점을 명료히 하는 것은 중요하다. 연장자로부터 산에는 곰이 있다는 것과 또한 마찬가지로 악한 영혼이 있다는 것을 배운 원시인이 곰을 목격함으로써 곧 첫번째 이야기를 확인했다고 하자. 그러나 그가 악한 영혼을 만나게 되지 못한다면 천재가 아닌 이상 그는 두 가지 이야기의 차이를 깨닫지 못한다. 도리어 그는 자기 부족사람들이 곰에 대해 옳은 말을 했음으로 악한 영혼에 대해서도 옳게 말했음이 틀림없다고 추론할 것이다. 원시인도 추론을 할 수 있다면 말이다. 권위에 근거하여 콘스탄티노플이라는 도시가 있고 혜성은 신의 분노를 나타내는 흉조라고 믿은 중세 사람은, 그 두가지 경우의 증거가 성질을 달리한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제1장)-26쪽

테미스티우스는 발렌스 황제에게 보낸 청원서에서, 황제가 자신의 의견과 일치하지 않는 기독교들에게 내린 칙령을 폐지하도록 강력이 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권용의 이론을 설명했다.
"개인의 종교적인 신념은 정부의 권위가 효력을 미칠 수 없는 영역이다. 권위에 대한 굴종은 위선적인 신앙고백을 초래할 뿐이다. 모든 신념은 허용되어야 하며, 세속 정부는 정교와 이단을 막론하고 공익을 위해 통치해야 한다. 신이 다양한 형태의 숭배를 원한다는 것은 그 스스로 명시하는 바이다. 신에게 다다를 수 있는 길은 다양하다."
(제 3장) -68쪽

참된 교리를 강제하고 이단을 근절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고, 다른 문제와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문제에서도 군주에게 철저히 복종하는 것이 신민의 의무이며, 국가의 목적은 신앙의 수호에 있다는 것이다.(루터의 불관용을 설명하며)(제4장)-95쪽

"다른 그 어떤 자유보다도 양심에 따라 자유로이 알고 말하고 토론할 수 있는 자유를 내게 달라." (밀턴) (제5장)-120쪽

"내가 보기에 가장 제한되지 않은 종교의 자유는 신성한 권리이므로, 그것을 관용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내게는 일종의 폭정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관용하는 권력은 또한 관용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라보)

"관용이란 불관용의 반대가 아니라 그것의 모조품이다. 그 둘 모두 독재이다. 하나는 양심의 자유를 억누를 권리가 있다고 자처하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부여할 권리가 있다고 자처한다." (토머스 페인 <인간의 권리> 中)

(제5장)-133쪽

만일 신앙을 갖고자 할 경우 이성은 치명적인 장애가 된다는 주제를 담고 있다. 신앙과 이성의 배양은 상반된 결과를 낳는다. 철학자는 현세의 지혜에서 너무나 진보했기 때문에 신의 감화를 받을 자격이 없다.
(1741년 헨리 도드웰 주니어가 옥스퍼드의 한 젊은 유지에게 보내는 편지
<논증에 근거하지 않는 기독교>)(제 6장) -170쪽

만일 기독교가 진리일 가능성이 만에 하나라도 있다면 기독교도가 되는 것이 이익인데, 왜냐하면 만일 기독교가 거짓으로 판명되더라도 그것을 믿었다는 사실이 해가 되지는 않으며, 만일 진리로 판명될 경우에는 막대한 이득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버틀러) (제6장) -174쪽

종교를 아무런 고찰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은 멍에를 씌워도 가만히 있는 소와 같다는 진술을 시작으로 성서의 난점과 기독교의 기원, 그리고 교회사의 경로를 고찰해나가면서,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독교를 두려워할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사형 집행자들에 의해 지탱되며 화형의 나무 다발에 둘러싸인 불합리하고도 잔인한 교의이자 그로부터 권력과 부를 얻는 무리에 의해서만 유일하게 승인받을 수 있는 교의, 그리고 오로지 세계의 작은 일부분에서만 받아들여지는 특수한 교의를, 사람들은 무지몽매하게도 단순하고 보편적인 종교보다 더 선호한다."
(볼테르 <광신주의자의 무덤> 中) (제6장)-176쪽

불가지론자들은 인간의 이성이 한계를 지니고 있으며 신학은 그 한계 밖에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과학이 취급하는 세계는 그 한계 안에 있다. 과학은 전적으로 현상만을 다룰 뿐, 현상의 배후에 놓여 있을지도 모를 궁극적인 실재의 본성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할 것이 없다. (제 7장) -238쪽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누군가의 행동의 자유에 대한 간섭을 정당화하는 유일한 목적은 자기 방위"이며 압제는 오로지 타인에게 해를 입히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경우에만 정당화된다. (존 스튜어트 밀) (제8장)-259쪽

정당하다라는 말은 그 탁월한 사회적 효용이 이미 경험을 통해 입증되었으며, 당장의 편의에 대한 고려를 완전히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중요하게 여겨지는 그런 부류의 규칙이나 원칙에 붙여지는 것이다. 즉 사회적 효용이 유일한 기준이다. 그러므로 사상의 자유가 다른 모든 고려들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탁월한 사회적 효용을 지니는 원칙임을 입증하지 못하는 한, 정부가 부당하게 사상을 억압하고 있다는 식의 항의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소크라테스는 참된 직관을 통해 자유가 사회적으로 가치있다는 노선을 취했다. (제8장)-261쪽

"매번 논쟁을 해봐도 전혀 논박되지 않기 때문에 그 의견을 참이라고 가정하는 것과, 논박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그 의견을 참이라고 가정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우리의 의견을 반박하고 반증할 수 있는 완전한 자유야말로 행동을 위해 우리의 의견을 참이라고 가정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조건이다. 그 외의 다른 어떤 조건 위에서도 인간적 능력을 지닌 존재로서는 옳음에 대한 합리적인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존 스튜어트 밀)

만약 오류가 침입하지 못하도록 수호되고 있는 기존의 견해가 참이라 하더라도, 토론을 억압하는 것은 여전히 일반적인 효용에 반한다. 기존의 견해가 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참이라는 합리적인 확실성은 그것이 충분히 검토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는 사실에 의해 비로소 확보될 수 있다.
(제 8장)-263-264쪽

순전히 인간의 능력 범위 내에서 확보될 수 있는 정신적, 도덕적 진보의 최고 조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상과 토론의 완전한 자유이다.
(제 8장)-265쪽

어떤 사안이 예외, 즉 당국의 간섭이 당연시되는 사안으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규범에 저촉되는 경우이어야만 한다.
... 중략 ...
만약 내가 현 사회를 규탄하고 아나키즘 이론을 옹호하는 책을 썼는데, 그 책을 읽은 어떤 사람이 곧바로 위법행위를 저질렀다고 해보자. 그럴 경우 내 책이 그 사람을 아나키스트로 만들었고 그로 하여금 범죄를 저지르게 했다는 점이 명백하게 입증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내 책 안에 그가 저지른 바로 그 범죄에 대한 직접적인 선동이 포함되어 있지 않는 한 나를 처벌하거나 내 책을 탄압하는 것은 위법이라는 것이다.
(제 8장)-266-267쪽

(신성모독처벌법에 대해서 언급하며) "만일 그 법이 진정으로 공정하며 오직 신자들의 감정을 상하게 했다는 이유로 신성모독행위를 처벌한 것이라면, 비신자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설교 역시 마땅히 처벌되어야 한다. 더없이 진지하고 열성적인 종교 형태들은,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 지극히 모욕적이다."
(제임스 스티븐 경)(제8장) -269쪽

"자신이 어느 항구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항해사에게는 아무리 순풍이 불어도 소용이 없다."(세네카) 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국가보안법이 폐지되어야 한다는 당위와 사회적 효용을 자신의 머리로 확고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한 그 법의 폐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누군가 폐지를 주장하거나 그 반대로 폐지 불가를 주장한다고 해서 어느 쪽을 무조건 추종한다면 그 당사자에게 사상의 자유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해설, 박홍규) -277쪽

이 책은 나에게 사상의 자유에 대한 문제만이 아니라 책 속에서 직접 언급하고 있는 기독교를 둘러싼 사상의 흐름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갖게 해주었다. 즉 유럽에서는 19세기에 이미 기복적이고, 광신적이며 근본주의에 집착하는 신앙 풍토가 극복되었는데 왜 한국의 기독교는 여전히 그와 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중략...
실제로 한국의 종교는 오랫동안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 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근본주의는 신앙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당연한 듯 보이지만 그 자체로는 폭력적인 성향을 띠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종교 근본주의만이 아니라 모든 근본주의에 내재된 속성이기도 하다. 근본주의는 자신과는 다른 사람의 주의나 주장, 믿음에 대한 배타성을 전제로 성립하기 때문이다.
(해설, 박홍규) -285-286쪽

한국사회에서 국가보안법의 존속을 주장하는 사람의 주장은 한결같다. 이 법이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옹호할 뿐만 아니라 체제 수호를 위한 훌륭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법으로 인해 설사 억울한 희생자가 발생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체제 수호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불가피한 일이며, 그 해악이 입법 취지의 정당성을 훼손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국가보안법이 기본적으로 '올바르다는 가절'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지만 이 주장이 가진 결정적인 결함은, 이 법이 원래 의도하는 바인 '국가의 안위'를 실현한다는 가설에 근거를 둠으로써 애당초부터 박해의 원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는 데 있다.
(해설, 박홍규) -292쪽

양심의 자유는 '훌륭한 마음'의 자유가 아니고, 있는 그대로 '마음'의 자유이다. 군대에 스스로 간다고 해서 '훌륭한 마음'이 아니고 그냥 '마음'일 뿐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기독교도로서 병역을 거부하는 마음은 그 자체로 인정받고 존중받아야 한다.
(해설, 박홍규)-2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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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마개 2006-02-14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홍규 만세!!!

마늘빵 2006-02-14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강쥐님
 

 

* 스포일러 경고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영화 제목을 잘못 알고 있었다. 타임 투 러브로. 그리고 그 다음엔 타임 투 리브인데 그 '리브'가 'live'인 줄 알았다. 영어제목을 먼저 보지 않고 한글 제목만 얼핏 봤기 때문에 일어난 오해. 그러니 난 이 영화가 처음에 멜로인줄 알았고, 그 다음엔 죽음에 관한 영화인줄 알긴 했지만 leave 를 live 로 착각했다. 결과적으로 사랑이야기도 맞고, 죽음이야기도 맞다. 

  77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우리나라의 영화를 포함하여 최근의 영화들은 지나치게 러닝타임이 길어지는 경우가 많다. 꼭 필요한 장면이라면 모르지만 더 줄일 수 있을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하나의 유행처럼 러닝타임이 기본 두 시간을 훌쩍 넘긴다. <타임 투 리브>는 최근의 추세를 거스른다. 77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은 영화를 접하지 않은 이들에겐 아니 무슨 애니메이션이야, 라는 질문이 나올 법도 하다. (그런 질문을 한 사람은 아직 없다. 왜냐면 제목이 애니메이션 같지가 않잖아) 

  우리나라의 박찬욱 감독이 복수 3부작을 냈다면, 프랑소와 오종 감독은 죽음 3부작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이미 2000년 <사랑의 추억>을 통해 죽음 1부를 내놓았고, 이번에 개봉한 <타임 투 리브>는 그의 죽음 2부작이라 한다. 감독의 이름도 처음 들었고, 그가 죽음 시리즈를 다루고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이미 본 영화 <타임 투 리브>가 죽음 3부작에 들어간단 사실도 처음 알았다. 미쳐 보지 못한, 개봉했었는지 안했었는지 모르지만, 1부작을 찾아 보고 싶다. 

  제목에 관한 오해를 앞서 밝혔듯 이 영화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모른 채 본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러나 꽤나 인상적이었고, 가슴에 스며들었으며, 영화가 끝난 뒤에도 잠시 더 머물며 영화가 남긴 여운을 즐겼다. 나 뿐 아니라 거기에 앉아있던 다수의 관객들이 그러했다. 물론 극장 측에서 불을 환히 켜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 그의 죽음을 유일하게 말했던 할머니. 그녀는 로맹에게 말했다. "오늘 밤 너랑 같이 죽고 싶다."

 

* 로맹. 마지막으로 나의 가족들, 그리고 사람들의 즐거워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젊고 능력있는 사진작가 로맹은 어느날 갑자기 쓰러진 뒤 의사로부터 말기암 판정을 받았다. 평균적으로 남아있는 수명은 3개월. 젊고 잘 나가는 그가, 아직도 살 날이 한참 남을 것이라 당연하게 여겼던 그가, 사형선고를 받았으니 그 심정이 어땠을까. 지금 그에게 소중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떻게 살 것인가, 앞으로 3개월 동안 내가 무엇을 하며 보낼 것인가, 무엇을 하며 생을 마감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 열심히 일하던 회사도 휴직하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주변 사람들을 하나 둘 찾아가 마지막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항상 그를 걱정해주시는 어머니, 아버지를 만나고, 아웅다웅 만나기만 하면 다투던 여동생과 그녀의 어린 아이들을 몰래 카메라에 담는다. 여동생과는 전화를 통해 화해를 하고. 사랑한단 말을 전한다.  그가 유일하게 자신의 암선고를 밝힌 이는 할머니. 할머니는 나와 같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분이다. 그녀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건 사실이다. "오늘 밤 너랑 같이 죽고 싶다." 라던 할머니의 말은 죽음선고로 괴로워하는 로맹에겐 참 고맙다.




* 고속도로 식당 웨이트리스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로맹. 로맹은 그녀를 통해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어느날 고속도로에서 식사를 하던 중 웨이트리스로부터 긴급 제안을 받는다. 남편이 아이를 못낳으니 남편 대신 씨를 제공해달라는. 정자은행을 통해 수정관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방법도 있건만 그녀는 왜 그런 방법을 택했을까. 전혀 모르는 낯선 젊은이에게. 하지만 이런 의문을 제기할 여유는 없다. 얼마 남지 않은 생을 마감하기 전에 나의 흔적을 남길 수 있는 방법이다. 그는 처음에 거절했지만 다시 찾아와 세 사람은 섹스를 한다(그는 동성애자다). 로맹, 웨이트리스, 그의 남편. 쓰리섬 섹스를 통해 절정에 도달하고 두 사람은 침대에 누워있고, 로맹은 담배를 한 대 문다.

   시간은 흘러 3개월의 끝무렵. 암으로 인한 고통은 멋진 그의 모습을 빼짝 마른 병든 몰골로 만들어놨다. 삼각팬티를 입고 바다에 들어가 마지막 삶의 숨결을 느낀다. 파도치는 물결이 그의 피부를 자극한다. 찰싹찰싹. 이것이 살아있다는 느낌이다. 차갑게 속삭이는 바닷물. 모래사장에서 즐거워하는 아이들의 사진을 카메라에 담고 눕는다.

  살아있다는 건은 어떤 것일까, 죽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엄마 뱃속에서 세상을 향해 나오는 순간 처음 숨을 들이마시는 것 그것이 살아있다는 것일까. 우리가 숨을 쉬고 음식을 먹으며 생을 연명해나가는 것. 그것이 살아있다는 것일까. 삶이란 무엇일까. 살아있다는 것은 삶과 어떻게 다를까. 영화는 매우 짧지만 많은 생각을 불러 일으킨다. 살아있음, 죽음, 삶, 관계, 사랑 등. 그에게 남은 3개월은 그가 살아온 기간에 비하면, 또 그가 앞으로 살 날에 비하면 매우 짧지만 그는 3개월 동안 '살아있었다'. 죽음 선고를 받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홀로 남은 인생을 산다는 것은 매우 고독할 것만 같다. 왜 그랬을까. 그를 아는 많은 이들이 그로 인해 고통스러워하지 않도록 숨겼던 것일까. 아니면 남은 인생을 혼자서 즐기고 싶었던 것일까. 그가 죽은 다음 제 3자를 통해 그의 죽음을 접해야 하는 가족들은 어떤 심정일까. 그는 때로 침대에 누워 아파하기도 하고, 홀로있음에 슬퍼하기도 하며 운다. 매우 조용하고 차분하게 죽음을 준비하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 담담한 나머지 강렬하게 다가온다. 

  영화는 눈물을 자아내진 않는다. 하지만 가슴 먹먹하게 만든다. 차라리 죽음 앞에 엉엉 울어버렸으면 좋겠건만 그는 절대 소리내어 크게 울지 않는다. 나의 죽음을 모든 이에게 알리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삶의 끝을 준비할 뿐이다. 죽음 앞에 담담할 이는 아무도 없다. 담담한 듯 보이지만 그것은 더 큰 슬픔을 안고 있다. 가슴 속에 홀로 담아가야할 많은 추억들. 만일 내가 3개월 뒤에 죽는다면 나는 무엇을 할까. 스물 여덟의 창창한 나이에 나는 죽음을 생각진 않는다. 하지만 나에게도 죽음은 닥칠 수 있다. 내가 과음을 하지 않는다고, 담배를 피지 않는다고 해서 암이 나를 피해가는 것은 아니다. 암이 아니더라도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것들은 수없이 많다. 다만 사람의 평균수명을 나의 수명으로 착각하고 있을 뿐.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의 죽음을. 내가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을.  

  언젠가 난니 모레티 감독의 <아들의 방>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이 영화 또한 죽음을 다루고 있다. 아들의 죽음을. 아버지는 자신의 죽음이 아닌 아들의 죽음을 맞이한다. 아들의 싸늘한 시신이 들어있는 관을 손수 닫고 어루만진다.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의 가족의 삶을 일상 속에서 그려낸 영화였다. 죽음을 다루는 감독의 시선과 죽음의 주체와 과정은 다르지만, 두 영화 모두 인생의 종착역인 죽음에 대해 차분하게 그려냈다. <타임 투 리브>는 아름다운 이별의 모습, 아름다운 죽음의 모습을 그려냈다. 당신은 어떻게 죽음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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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리 2006-02-12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리뷰 읽다보니 눈물이 나네요.. 아~ 주책.. 눈물 땜에 안보여 사라집니다... 죄송!

마늘빵 2006-02-12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프리님. 아. 영화 본 저도 눈물까진 흘리지 않았는데 리뷰보고 눈물 보이시면 어떡해요. 영화 좋습니다. 기회되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