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사건
엘리에트 아베카시스 지음, 이세진 옮김 / 예담 / 2006년 9월
절판


니콜라는 내 배에 올려진 아기를 보았다. 그제야 겨우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눈에 천사의 얼굴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아기는 내가 기대하던 장밋빛 뺨에 미소를 띤 얼굴이기는커녕, 이게 왠 원숭이 새끼인가 싶었다. 털 많고, 지저분하며, 태지와 분비물을 뚝뚝 흘리고, 온몸이 붉은색과 보라색으로 얼룩덜룩하며, 예쁜 구석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72쪽

떠날 때의 우리는 젊고 자유롭고 분방했는데 돌아올 때는 가족이 되었다. 우리는 결코 예전 같을 수 없으리라. 딸을 낳기 전까지의 나는 스스로를 조금씩 만들어 나가는 사람이었다. 이제 끝이다. 딸을 낳고 나는 늙어버렸따. 나는 과거였다. 나는 더 이상 그날그날을 누리며 살지 못했다. 나는 나 아닌 다른 이를 책임져야 했다. 다시는 걱정을 모르고 살 수 없으리라. 다시는 혼자 일 수 없으리라. 다시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닐 수 없으리라. 저녁에 외출을 하면 나를 기다릴 딸 생각에 안절부절 못하리라. 그리고 나중에는 외출할 딸을 기다리느라 안절부절 못하리라. 아이를 낳고 난 후로는 내 정신으로 사는게 아니었다. 난 항상 그 애에게 매여 있으리라. 나는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는 나를 낳았다. 다름 아닌 내 딸이 나를 출산했다. 아둔하고, 매사에 의식적이며, 환멸에 찌든 나, 또 다른 나를. 생명을 낳고 난 뒤에 삶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 있을까? 나는 더 이상 개인적인 야심이 없었다. 그럴 시간도 없었다. 내 인생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움푹 파인 구멍, 텅 빈 공허, 무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어머니였다. -83쪽

그보다도, 이 애는 누구인가?
레아. 이기주의와 무관심으로 똘똘 뭉친 괴물, 오로지 제 개인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나를 써먹는 아이, 타인에 대한 관심은 눈곱만치도 없이 오직 자신의 생존에만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존재, 그저 먹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이 전혀 없는 식충이. 아기는 오로지 먹기 위해 살았다. 아기는 식사를 끝내자마자 어느새 소화시켜 버리고는 다시 배를 채워야만 했다. 아기에게는 먹는 것 말고는 뭐든 의미가 없었다. 그렇지만 권력은 예외일지도. 아기는 권력을 좋아했다. 아기가 권력을 휘두르는 순간에는 만사 제치고 달려가야지, 안그러면 분노를 터뜨렸다. 아기는 화가 나기 시작하면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리고 히스테리, 조울증, 정신분열증 등 광기의 온갖 징후를 여실히 드러냈다. -94쪽

사랑에 빠진 연인은 정념을 불태우면서 바로 그러한 무한을 꿈꾼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의 첫 단계, 가장 초보적이고 제멋대로이며 자기애를 벗어나지 못한 단계다. 진정한 사랑은 세월이 흐르면서 구축되어간다. 우리가 언제나 같은 판타지를 꿈꾼듯 반복적으로 동일한 모습을 취하는게 아니란 말이다. 사랑은 꺼지지 않는다. 사랑은 발전한다. 사랑은 패러다임을 바꾼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사랑을 제대로 평가하지도 못하면서 사랑 따위는 없다느니 하는 신소리를 하는 것이다.
처음에 사랑은 열정으로 활활 타오른다. 그때의 사랑은 마치 아기가 그렇듯이 정신분열증과 조울증의 징후를 농후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시간이 가면서 아기가 자라듯 사랑도 자란다. 사랑은 성숙해지고, 단단해지고, 사려 깊어지며, 자리를 잡는다. 사랑은 그렇게 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걸 모른다. 우리는 그저 떠들 뿐이다. 사랑은 끝났어, 라고. -145쪽

"있잖아, 니콜라. 난 사랑은 눈 같은 거라는 생각이 들어. 내렸다가 금방 녹아서 없어지는 눈."
"아냐...... 그렇지 않아, 바르바라. 사랑은 없어지는 게 아니야. 세월이 흐르는 것 뿐이지......" -169쪽

소크라테스, 칸트, 사르트르 같은 철학자들은 아기를 낳지 않았기 때문에 오류를 범할 수 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따. 그들은 모두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인생을, 타자성을, 사랑을, 증오를, 광기를, 현실의 상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나 자주, 인간의 첫째가는 감정이 동정심이 되고 마는지를 그들은 몰랐따. 루소만큼은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레아가 울면서 보챌 때, 그 애가 내게서 멀어져 가고, 내가 그 애에게서 멀어져 갈 때 나는 레아에게 동정심을 품었다. 동정심은 아름답다. 아니, 동정심이 인류의 첫번째 단계는 아니다. 본능적이기는 해도 그것은 가장 숭고한 감정이다. 발걸음을 멈추고, 바라보고, 타인이 느끼는 것을 함께 느끼는 감정이다. 타인의 기대를, 희망을, 고통을 느끼는 감정이다. 어떤 성스러운 이끌림에 따라 우리는 타인에게 몸을 숙이고 손길을 건네며 자신의 품으로 맞아들인다. 그것은 본래적이면서 심오하다. 그게 바로 인간적인 것이다. 어머니의 젖과 가슴, 그것이 바로 그러한 관대함이다. 동정심, 그것은 곧 피붙이에 대한 극진한 마음이다. -226-227쪽

미래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서로 사랑할 수도 없고, 사랑을 포기한 채 살 수도 없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딱 그랬다. 질문들을 던져도 결코 해답을 찾지 못한다. 가능한 일인지 어떤지도 알지 못한 채 궁지에서 벗어나보겠다고 불가능에 도전하고 또 도전한다. 행복을 추구하면서 행복을 포기해 버리고, 불행의 밑바닥에서 허우적대다가 정말 바닥까지 떨어지고 나서야 다시 솟아올라 처음 순간의 비약에 대한 감각을 되찾는다.
아이를 갖고 그 아이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희생한다. 자기 인생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데도 배턴을 넘겨주기 위해 스스로 희생한다. 그래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업이 따르는 것이다. 이 모든 방정식을 풀거나 풀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아이를 낳고, 번성하며,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고, 부모에게 꽉 매여 살고, 좀 자유로워지는가 싶으면 이제 자식들에게 더 꽉 매여 살아간다. 행복, 그래 행복이다. 하지만 한 순간이다...... 그게 인생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생에서 기대할 수 있는 전부다...... -237-2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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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9-18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보셨군요. 남자가 보는 '행복한 사건'은 어떨지 여성과는 좀 다른 눈일 것 같아요. 리뷰도 기대해도 되죠?

마늘빵 2006-09-18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정말 좋았어요. 리뷰를 얼른 쓰고픈데 시간이... ㅠ-ㅠ
지금 밀려있는 리뷰만 영화 한 이십편에 책은 네 권.

비로그인 2006-09-18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 일간지에서 이 책을 추천한 이후에 저도 참 궁금했습니다. 밑줄긋기를 슬쩍 훔쳐보니, 읽어도 후회스럽지 않을 것 같군요.^^

2006-09-20 2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