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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한 권의 책이었다
소피 카사뉴-브루케 지음, 최애리 옮김 / 마티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그 자체로서 하나의 작품이고 세상이 된 책이다. '세상은 한 권의 책이었다'라는 제목을 단 출판사는 정말 탁월한 선택을 했다. 어쩜 이렇게 이 책을 압축적으로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제목은 이 책의 모든 내용을 담아내고 있는 동시에 책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이 책 그 자체를 표현하기도 한다. 이 책 안과 밖에 모든 세상이 담겨있다.
"신이 세상을 창조했듯이 사람은 한 권의 책을 만들었다"
"그의 빛 깊은 곳에서 나는 보았노라. 우주에 흩어진 모든 것이 사랑에 의해 한 권의 책으로 엮어진 것을"
이 책에 딱딱하게 곧이곧대로 부제를 붙이자면 '책의 역사'가 가장 적절한 선택일 것이다. 제 1장의 책 만들기 에서부터 시작해서, 책값과 책수집가들, 책도둑을 살피고, 3장에서 책을 읽는 독자들의 변천사를 다룬다. 4장에서는 책에 그림을 그린 채식사들의 작업과 그 예술의 결정체들을 보여주며 마무리 한다.
지금 우리는 이렇게 손쉽게 책을 구경하고, 약간의 돈만 지불하면 쉽게 책을 구입할 수 있지만, 그때 그시절에는 책이 매우 귀했다. 그것은 하나의 예술작품이고, 돈 많은 부자들만이 소유할 수 있는 고가의 보물이었다. 종이가 아닌 양피지와 파피루스로 만들어진 책들은, 성서의 경우 한 권을 만들기 위해 양 200마리를 죽여야 한다고도 했다. 아 이런 불쌍한 양들. 양만 죽느냐. 아니다. 소가죽도 쓰인단다. 또 책장을 만들기 위해 양과 소를 죽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책에 쓸 필기구가 필요했다. 펜이 흔치 않았던 그 시절에, 가장 고급스럽게 사용되었던 것이, 거위의 깃털이라고 했지. 거위의 깃털 중에서도 네번째 깃털이 가장 부드럽게 쓰여졌나보다. 그러니 종이에 필기구에 벌써 동물들의 희생과 거금의 돈이 따른다. 여기에 오늘날처럼 글자만 쓰여져있는 책이 아닌, 책에 삽화를 넣고, 그림을 그리고, 꾸미는 작업을 하는데에 또 대단한 노력이 들어간다. 그런 작업을 하는 이들을 채식사라 불렀는데, 이 책 안에 소개된 그들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입이 떡 벌어진다. 정말. 책에 들어간 삽화정도로 치부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박물관에 걸려있어야 할 유명 화가들의 작품과도 같다. 그러니 책이 비싸고, 귀할 수 밖에 없다. 아무나 책을 소유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자신만이 소유하는 책이 그만큼의 값어치를 하길 바랬고, 하나뿐인 책을 위해 온갖 정성과 노력을 기울였다.
중세에는 주로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에 의해 책이 만들어졌으나, 이후 도서관과 학교로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필경사라는 직업과, 채식사라는 직업이 따로 생겨났다. 책이 있음에도 공부를 하지 않는 지금의 우리들은 너무나 행복한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엄청나게 비싼 책값과 그 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책들을 구입하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을고. 책이 귀했기에 또 책을 훔치는 이들도 있었는데, 마치 오늘날 고가의 노트북이나 피엠피를 훔치는 도둑들에 비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하여 13세기의 한 성서에는 이런 경고문구까지 적혀있었다.
"이 책은 파리 생빅토르의 소유이다. 이 책을 훔치거나 이 경고문을 숨기거나 지우는 자는 천벌을 받을지어다. 아멘. 이 장서는 프랑스 왕비이며 성왕 루이의 모후였던 블랑슈가 파리 생빅토르 교회에 기증한 것이다."
"이 책을 훔치는 자는 교수형을 당할지어다"
아니 어떻게 교회에서 이런 문구를 사용할 수가 있는가. 사람들의 행복을 기도해야 할 교회에서, 사랑과 자비의 정신을 실천해야 할 교회에서 어찌 이런 문구가 사용될 수 있단 말인가. 하기야 오늘날의 일부 교파에서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불행을 눈감는 이들이 어디 한둘이랴. 책을 훔치면 천벌을 받고, 교수형을 당할 것이라니. 아 정말 무섭다. 책 하나 훔쳤다가 지옥가게 생겼다. 얼마나 책이 귀했고, 책 도둑이 극성을 부렸으면 저런 문구가 붙여있었을까 싶다.
고대와 중세를 거슬러 올라오는 책의 역사는, 한마디로 문명의 역사이고, 세상의 역사이다. 책 안에는 모든 세상이 담겨있다. 그 안에 세상을 창조한 하느님이 있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있고, 왕과 왕비가 있고, 음악이 있고, 건축이 있다. 책은 지식을 전파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그치지 않고, 그림과 음악과 건축 등등의 예술,문화 작품들을 포함하고 있다. 책 안에는 모든 역사와 세상이 담겨있었다.
"어떤 이들은 신을 발견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 그러나 더 큰 책이 있으니 창조된 세계 자체가 그것이다. 사방 위아래를 둘러보고 눈 여겨 보라. 그대가 발견하고자 하는 신은 먹물로 글씨를 쓰는 대신 지으신 만물을 그대 눈 앞에 두신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스콜라 철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은 원죄 이후 불완전한 존재가 되어 세상이라는 책을 제대로 읽지 못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신이 인간에게 그 뜻을 계시한 책 곧 성서를 주셨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이 모든 세상은 신의 손가락으로 씌어진 한 권의 책과도 같다. ... 그러나 까막눈이는 책을 펼치고 글자를 들여다보아도 읽지 못하듯이, 어리석은 자연의 인간은 성령에 속한 것을 알지 못한다..."(위그 드 빅토르)
책을 좋아하는 이들은 이 책 한권을 소장함으로써 뿌듯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중세의 그 귀했던 책들 못지 않게 이 책은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종이 위에 책의 역사를 서술하고, 선명하고 눈에 부신 아름다운 그림들을 담아낸 하나의 예술작품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한 권의 책이었고, 이 한 권은 세상을 담고 있다. 책 수집가들은, 애서가들은, 결코 이 책을 지나칠 수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