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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우리말로 철학하기 ㅣ 살림지식총서 24
이기상 지음 / 살림 / 2003년 8월
평점 :
이 땅에서 철학이 어떤 역할을 해야하는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철학의 자기성찰적인 책들은 꾸준히 나왔다. 많은 철학자들이, 인문학자들이 이에 대해 고민하고, 자기의 밥그릇 문제 때문이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철학이 없는 사람들, 철학이 없는 국가의 현재 상태에 대해 고민하고 나름대로 그 해결책을 내놓으려 시도하고 있다. 한국외대 철학과 교수 이기상의 <이땅에서 우리말로 철학하기> 역시 이와 같은 고민에서 비롯되어 나온 하나의 작은 결실이다. 그는 "우리가 몸으로 부대끼며 사는 삶의 세계에 바탕한 우리의 고유한 철학이론을 세워보고자 시도해본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유한한 인간의 '철학하기'는 구체적인 생활세계와 그 언어인 일상 언어를 떠나서 행해질 수 없다.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말로 철학여 우리의 역사와 문화, 현재의 삶의 세계에서 무늬와 결로 아로새겨져 있는 삶의 문법을 우리의 철학으로 체계화 시켜서 제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 책에서 그 첫걸음을 내딛어 본다." 라고 책을 쓴 이유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지은이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철학, 대다수의 철학자들이, 철학을 공부한다는 이들이 하고 있는 철학이라는 것은, 서양의 것이고, 우리만의, 이땅에서 필요한 철학이 부재중이라고 진단한다. 세계화 시대를 맞이하여 외국의 이런저런 석학들을 모셔와 이야기를 듣고, 우리의 문제를 그들에게 진단내려달라 한다. 1996년에 리처드 로티와 위르겐 하버마스가 내한했을 때, 한국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내려달라는 우리 학자들의 요구에 그들은 당사자인 한국의 학자들이 더 잘 알 것이라고 말했다. 정답이다. 우리의 문제를 이제 한 번 내한한 그들에게 물어보는 것은 정말 멍청한 짓이었다. 우리의 문제는 지금 이 땅에 발붙여 살고 있는 우리가 더 잘 알고 있으며, 그에 대한 진단과 처방 역시 우리 스스로가 내려야 한다. 나의 문제를 내 고민 없이 타인에게 맡겨버린다는 것은 정말 바보같은 짓이다.
저저는 이와 같은 한국 철학의 문제를 지적하고서 우리 생활 세계에 바탕한 철학이론 세우기를 시도한다. '사이이론'이라고나 할까. 자연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문명과 사람 사이가 극도로 파괴되는 혼돈의 시대 속에서 사이의 철학을 강조한다.
"다만 남의 말이나 자기가 들은 것에만 의지하는 사람은 더불어 학문을 말할 것이 못된다. 하물며 평생토록 마음의 작용과 자연의 현상에 생각이 미치지 못한 사람이랴." (연암 박지원 <열하일기> 中)
이땅은 외국철학이론의 전쟁터가 되었으며, 우리의 생활에 바탕한 철학이론을 세워야 한다는 지은이는 열하일기의 한 대목을 통해 이를 강조하고 있다.
세계화 시대에 흔들리지 않는 우리만의 토대가 있어야 하며, 이를 우리 스스로 중심을 잡고 굳건하게 서있을 수 있기 위해서 우리만의 터전이 필요하다(공간성, 영토성), 중심을 잡기 위해 이 땅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 공동체 의식이 형성되어야 한다(정체성, 동질성), 우리의 생활 세계와 문화, 역사에 대해 주인이 되어야 한다(주체성), 또 잊지말아야 할 것이 세계상황이다(세계성, 보편성) 라고 하며 몇 가지를 이야기한다.
이어 그는 서양과 동양의 문화적 차이를 지적하며 서양은 있는 것(존재)에 대한 놀라움으로 철학을 시작했고, 우리는 없는 것에 대한 경외심에서 철학을 시작했다고 하며, 철학의 시작이 다르다고 말한다. 우리는 지금 서양철학의 이성중심, 인간중심적 사고관에서 벗어나 감성과 자연중심적 사고를 해야한다. 이성중심적 세계관은 히로시마의 원폭, 아우슈비츠의 유대인 대량학살이라는 끔찍한 결과로 이어졌고, 우리는 이성중심의 하나의 세계가 아닌 문화, 종교, 언어의 고유성과 특수성을 인정하는 다양성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이란 결국 '사이'의 존재이며, 첫째, 빔-사이(공간). 노동이 도구, 기술, 예술, 생산, 거주라는 방식으로 이어지며 인간은 사이에 있음으로써 빔-사이를 채워나가며 사이를 나름대로 인간적인 과정으로 만들어 나간다. 공간이라는 빔-사이를 없애는 것은 기술로 이루어지는데, 교통과 통신이 그것이다, 라고 이야기한다. 둘째로, 인간, 즉 사람 사이에 있음을 이야기하며, 이에 해당하는 전형적인 행위는 '말'이며, 말의 실천에서 관습, 윤리, 도덕, 사회, 국가가 생겨난다, 사람 사이의 간격을 없애는 것이 평등이며 인권이다. 사람 사아에 있음이 무너지게 되면 도덕,윤리가 무너지게 된다고 말한다. 셋째는, 때 사이에 있음, 즉 시간이다. 이는 역사, 학문, 지평이 생겨나는 공간이며, 인간은 시간적인 존재로 과거를 돌아봄으로써 과거의 전통을 세우고, 현재가 과거에 의해 새롭게 의미를 부여받도록 하며, 더 나아가 미래에 대한 시각을 마련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넷째, 천지간, 하늘과 땅 사이를 말한다. 기도, 감사, 초월, 성스러움, 신, 종교 등으로 이야기되는 차원이며, 인간은 우주적 인 사이에 있음을 책임져야 할 뿐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의 사이에서도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그는 때- 사이에 있음(주체성), 빔-사이에 있음(공간성,영토성), 사람-사이에 있음(역사성), 하늘과 땅-사이에 있음(보편성)을 논한다.
또한 그는 이땅에서 철학하기 위한 조건으로 우리말을 이야기한다. 언어는 세계를 보는 시각이며, 영어공용화나 한자병용과 같은 논의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지은이는 철학함을 이끌고 있는 언어에 대한 다음과 같은 열 가지 명제를 소개한다.
첫째, 언어는 세계를 보는 눈이다. 둘째, 언어는 민족을 묶는 끈이다. 셋째, 언어는 사고방식을 형성해주는 틀이다. 넷째, 언어는 의식의 밑바탕을 이루는 무의식이다. 다섯째, 언어는 정서의 공감대이다. 여섯째, 언어는 자주와 자율의 바탕이다. 일곱째, 언어는 자유와 평등의 조건이다. 여덟째, 언어는 학문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전제이다. 아홉째, 언어는 사람 사이의 다리이다. 열번째,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우선 그의 한국 철학의 현 세태에 대한 진단과 처방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이땅에서 학문하기 위한, 이땅에서 철학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고민이 묻어나는 짧은 글이었다. 이땅의 철학이 중심을 잃고 이성중심적인 서구적 세계관을 바탕으로한 서양철학의 전쟁터가 되었다는 그의 말에 동의한다. 하지만, 이를 대체하기 위해, 우리말로 철학하기 위해 그가 제시하고 있는 그만의 처방엔 언뜻 동의하기 힘들다. 아니 동의는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동감은 하기 힘들다. 그의 처방은 적절해보이면서도 어딘가 허전하다. 그것은 그가 제시하고 있는 우리철학이라는 것이 이땅에 발붙여 사는 우리의 구체적인 생활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추상적이고 뜬 구름 잡는 이야기만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차라리 그럴 바에야 이미 들어온 서양의 문화, 서양의 철학도 결국 우리의 것이다라는 탁석산의 진단이 더 적절하고 현실성 있어 보인다. 탁석산은 <한국의 주체성>과 <한국의 정체성>에서 우리 것이란 과거에 우리 선조들이 누렸던, 선조들이 말하고 글로 남겨왔던 그것과는 다르다고 말하며, 외국의 것이라도 일단 우리에게 접수된 이상 그리고 우리식으로 변질된 이상 그것은 더이상 외국의 것이 아니고 우리의 것이라고 했다. 헐리우드 액션영화를 본 딴 영화 <쉬리>를 서양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의 고민과 시도는 좋았으나 너무나 구체적이지 못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독일에서 하이데거를 전공한, 서양의 철학을 한 철학자가 서양철학의 지배를 받고 있는 우리네 현실을 지적한다는 점이 참 아이러니하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그의 한국철학에 대한 고민에 꼬투리를 잡을 수는 없을 터. 그는 이를 의식한 탓인지 책의 중간에 이런 말을 하기도 한다.
"처음부터 일본어의 영향 아래 놓여 있는 우리말 번역어를 전혀 모르면서 독일에서 독일어로 독일식으로 사유하며 철학 공부를 시작한 나에게는 한국에서 철학 공부를 시작한 다른 사람에게 없는 장점이 하나 있음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논의가 되고 있는 철학적 사태를 일본어적인 안경을 끼고 보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우리말의 언어적인 상황에로 옮겨 놓고 우리의 일상세계적 맥락에서 이해해 보려고 시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그것이었다. "
우리네 철학에 대한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철학과에 개설된 '한국철학'이라는 수업에서는, 지눌과 불교, 권수정혜결사문, 성학십도, 동몽선습, 격몽요결, 사소절, 우주문답, 서유견문, 동경대전과 같은 우리네 선조들의 서적을 읽으며 한국철학을 논하지만, 그것이 한국철학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단지 편의상 철학의 과목을 나누고 이름붙이기 위해 '한국철학'으로 분류했다면 동의하겠지만 말이다. 많은 철학자들이 이땅에서 철학하는 문제를 고민하고 책을 내기도 하지만 아직까지 그들의 책을 읽고 이것이 정답이다 라고 무릎을 칠만한 적절한 진단과 처방을 보진 못했다. 기존의 학자들의 주장과 철학자 이기상의 주장이 별반 다를 것이 없는데 비해, 철학자 탁석산의 주장은 그나마 신선하기라도 했다.
이 책과 더불어 조동일의 <이땅에서 학문하기>, 최종욱의 <이땅에서 철학하는 자의 변명>, 탁석산의 <한국의 주체성> <한국의 정체성> 을 읽는다면, 더 많은 고민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