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히 금방 떠오르는 대형 사건들만 나열해도 우리나라의 성수대교 붕괴 사건, 삼풍 백화점 붕괴 사건, 청소년 수련회 화재 사건, 대구 지하철 폭발 사건, 미국의 9.11 테러 사건, 인도네시아 쓰나미 사태, 유럽 어느 나라에선가 열차 탈선 사고 등이 떠오른다. 이런 대형 사건들은 꾸준히 일어났었고, 그것이 자연의 힘에 의해서 일어났건, 사람의 실수로 인해 일어났건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살아난 사람들은 있었으며, 그들은 때로는 운으로, 때로는 운+본인의 끈질긴 생명에 대한 의지로 위기를 모면했다.
* 영화 속의 열차 탈선 사고. 한 명 빼고 다 죽었다.
<언브레이커블>은 그런 영화다. 영화 속에서 열차 탈선 사고, 비행기 폭파 사고 등등의 대형사고들이 일어났고 거의 대부분이 다 죽었지만, 단 한명만이 생존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는 털 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가끔 신문에서 보면 아파트 13층에서 떨어졌는데 멀쩡했더라 하는 기사들을 볼 수 있다. 행운인지 운명인지 모르지만 어찌되었건 데이비드 던, 그는 살아남았다. 한때 잘 나가는 풋볼 선수였으나 자동차 사고 이후 이를 그만두고 같이 사고를 당했던 여자와 결혼을 해서 경기장 경비원으로 살아가고 있다.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신체장애의 어떤 흑인이 내게 메모를 남기고, 그의 말도 안되는 가설을 들으며 황당해하지만 이내 그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나는 이제 영웅이다. 나는 죽지 않는다. 난 범죄를 미리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두 아이를 살리고 살인범을 잡았다. 하지만 마지막 반전이 남았으니.
마치 이 영화의 설정은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황당무계한 영화들 - 가령 <배트맨> <슈퍼맨> <스파이더맨> 등등 - 과 그 맥을 같이 한다. 단지 예를 든 영화들을 보며 우리는 그것이 불가능의 영역에 있다는 것을 알지만 <언브레이커블>에서는 그것이 현실임을 이야기한다. 나같이 맨날 넘어지고 깨지고 부러지는 녀석이 있다면 그 대칭점에는 넘어져도 맞아도 사고나도 다치지 않는 누군가가 존재할 것이다라는 가설. 듣고보니 고개를 끄덕일 만도 하다. 엘리야는 가상의 그를 찾기로 하고 결국 그는 나타났다. 그는 배트맨도 슈퍼맨도 <매트릭스>의 네오도, 세일러문도 아니지만 정말 무적인 것만 같았다. 아니야 나는 어릴적 수영장에 빠져 죽을 뻔한 적이 있다고. 그래? 그건 영웅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단점일 뿐이야. 그래. 끄덕끄덕.
영화는 반전을 통해 가상세계에서 현실로 돌아올 수 밖에 없음을 알려주지만, 참으로 재미있는 설정이 아닐 수 없었다. 선이 있다면 악이 있고, 찬 것이 있으면 더운 것이 있고, 하얀 것이 있으면 검은 것이 있다. 맨날 아픈 놈이 있으면 결코 아프지 않을 놈이 있다. 여기엔 반대개념과 모순개념이 범벅되어있지만 영화가 설정하고자 하는 가설은 대립개념이니 굳이 반대와 모순을 구분할 필요성은 느끼지 못한다. 가상에서 현실로 돌아왔지만 아직 영화를 보고 있는 나는 가상세계에 머물며 생각을 확장하고 있다.
* 서로 마주 보고 앉은 데이비드 던과 엘리야. 강자와 약자? 영웅과 악당? 완벽한 자와 결점투성이인 자?
통계학에는 정규분포곡선이라는 것이 있고, 이는 평균치에 가까울수록 빈도가 높고 양극단으로 갈수록 빈도가 낮아지는 모양의 곡선을 의미한다. 우생학이라고 하여 정규분포곡선의 아랫부분을 인위적으로 잘라내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실패했다. 아래쪽 곡선을 아무리 잘라내도 나머지 곡선에서 다시금 꼬리가 다시 형성되기 때문이었다. 생물학적으로 또 사회적으로 아래 곡선에 위치하는 사람들은 일종의 돌연변이 혹은 변종으로 간주되지만 이들이 없이는 이상적인 사회가 될 수 없다. 가장 이상적인 사회는 모든 사람이 행복하고 잘 사는 사회라는데 이견이 없을테지만 그때의 행복이라는 것은 사회적, 생물학적으로 온전한 중간층 이상의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정규분포곡선의 아랫쪽에 위치하는 이들 또한 그들이 가지고 있는 단점을 극복하고 행복할 수 있으며 때로는 중간곡선, 상위곡선에 있는 이들보다 더 행복한 경우들도 많다. 우리는 이들을 잘못된 개체로 취급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어쩌면 인간종의 진화에 있어, 생존에 있어 기여할 수도 있다.
과거 공룡이 어떤 이유로 멸종되고 말았지만 조그만 벌레녀석들은 살아남았다. 그 녀석들은 인간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다. 인간 역시 신체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이후의 인간 존재에 있어 발전과 생존에 기여할 수도 있다. 어느 학자에 의하면 역사를 돌아봤을 때 지나친 엘리트주의를 앞세우며 인위적인 도태를 시도하였던 집단은, 다양성을 인정했던 집단에 비해 융성하지 못했다고 한다. 지나친 엘리트주의와 무결점주의는 결국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더 낮은 단계의 사회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완벽, 이상 사회라는 것은 모든 것이 정말 완벽하고 결점이 없는 사회가 아니라 모든 다양성을 수용하고 받아들일 줄 아는 사회다. 그것은 자연의 이치이고 섭리이다. 영화 속에서 엘리야는 자신이 지닌 신체적 단점을 비극이라 느끼며 살아왔지만 결국 그러한 생각은 비뚤어진 결과를 낳고 말았다. 지금의 내 처지가 남들보다 못하다고 해서 비관할 필요 없다.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은 자연의 섭리에 따른 것이며, 왜 하필 나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우연이라고 말 할 수 밖에 없겠지만, 비극을 극복한 뒤에 올 행복은 저 위에 있는 이들보다 더 갚지다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