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P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북스토리 / 1999년 11월
구판절판


하나가 울면, 하나가 위로하고, 하나가 마음 약한 소리를 토해내면, 하나가 기운을 북돋우고, 하나가 어리광을 피우면, 하나가 부드럽게 껴안아 주고, 하나가 화를 내면, 하나가 잘못을 고치곤 했다. -16쪽

묘한 기분이다.
사랑을 하고, 헤어지고, 사별도 하고, 그렇게 나이를 먹어 가노라면, 눈 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서로 엇비슷하게 여겨진다. 좋고 나쁘고 하는 우열을 가릴 수가 없다. 다만 나쁜 기억이 늘어나는게 겁날 뿐이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지 않으면 좋으련만, 여름이 끝나지 않으면 좋으련만, 그런 생각만 한다. 마음이 약해진다. -109 쪽

"타인의 문장을 마치 자신의 생각인 양 더듬어 가는 셈이잖아. 하루에 몇 시간이나, 자기 자신이 집필하듯이. 그러면 어느 틈엔가 타인의 사고 회로에 동조하게 되거든. 참 묘한 일이지. 위화감이 없는 데까지 파고들어 가기도 하고. 어디까지나 진짜 자기의 생각인지 알 수 없게 되기도 하고, 평소 생활에까지 타인의 사고가 뒤섞여 들어오고. 영향력이 강한 사람의 책을 번역하다보면, 그냥 독서를 하는 것보다 몇 배나 영향을 받게 돼." -142쪽

해질녘이었다. 저마다의 집에 파랑이 밀려들어와 전등을 켜게 하는 시각. 요즘은 알코올 중독자처럼, 의식이 분명해졌나 싶으면 언제나 해질녘이었다. 저녁 어둠 속으로 떠오르는 거리의 불빛, 언덕길의 주택가, 맥주를 한잔 마시고 비로소 '아아, 오늘 하루, 지금까지의 인생에 참가했네' 라고 문득 깨닫듯 아아, 오늘도 벌써 해가 지는 구나, 하고 생각한다. -17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꽃미남과 여전사 1 - 21세기 남과 여
이명옥 지음 / 노마드북스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남성은 여성화되어가고, 여성은 남성화 되어가는 시대적 조류에 맞게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주제를 가지고 저절한 동기와 적절한 태도로', 여성화된 남성인 꽃미남과 남성화된 여성은 여전사를 다룬 책이다. 전형적인 미술전문서적도 아니고, 그렇다고 현 세태를 딱 꼬집어 평가를 내리고자 하는 칼럼같은 책도 아닌, 그림을 소재로 하여 나름의 해석과 생각을 담아 서술한 딱 그 중간에 위치한 책이란 생각이다.

  최근 분야를 막론하고 이와 같은 작업을 하는 이들이 꽤 많아졌다. 전문철학서적은 딱딱하고 읽기 어렵고 팔리지도 않으니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고, 그러다보니 좀더 읽기기 쉽고 재밌고 잘 팔리는 책을 만들고자 철학과 영화, 철학과 문학, 철학과 미술 등의 다양한 짬뽕식 글쓰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영화관 옆 철학카페> 등의 책들이 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꽃미남과 여전사>는 그림과 그리스 신화, 철학, 미학, 역사 등등의 지식을 가지고 자잘하게 재밌게 풀어내려한 흔적이 엿보인다. 그러나 애초 이 책을 접하려 했을 때 이 책으로부터 내가 취하고자 했던 그것들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일간 신문이나 주간지 등의 잡지에 연재되어 실리면 주목을 끌 수 있는 글이겠지만 하나의 책으로서의 완성도는 많이 떨어진다는 느낌이다. 그저 잡글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하다고나 할까.

  이 책은 그저 '꽃미남과 여전사'라는 카테고리를 가지고 묶어낸 그림과 그에 대한 해석 그 이상의 무엇을 선사해주지는 못한다. 그저 그 뿐이다. 뭔가 시대적 흐름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과 내가 생각지 못했던 다양한 해석을 접하고자 했지만 그건 존재하지 않는다. 기존에 존재하던 하나의 장르와 또하나의 장르를 통합시키고 이로부터 새로운 무엇을 생성하려는 시도는 잘되면 둘 사이에서 정반합을 이루는 탁월한 작품이 탄생하지만, 잘못하면 둘  다 잃어버리기 쉽다. 이 책은 후자에 속한다. 어쩌면 저자는 둘 사이에서 무엇인가를 끌어내려하기보다는 그저 둘을 연결해주는 것으로 만족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이 책은 이도저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시도는 좋았으나 내용은 별로. 
 
  어린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는 나를 아는 주변사람들로부터 여성스럽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인터넷 상에서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순간까지 다수의 사람들은 나를 여성으로 착각한다.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처음에는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하고 나도 신기해 했던 적이 있더랬다. 그리고 난 그들의 말마따나 나의 내면에 여성스러움이 보통의 남성들에 비해 더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것은 나쁘지 않다. 나는 대개의 남성들의 전유물인 스포츠나 레포츠에, PC 게임에, 총이나, 차에, 전자제품류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나의 관심은 좀더 감성적인 곳에 있다. 영화, 철학, 문학, 책, 음악, 악기, 만들기 등등의 것들에. 내가 일상을 통해 향유하는 것들이 후자의 것이 주가 되다보니 나를 기존에 일지 못했던 사람들은 나를 여성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다.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이분법의 잣대를 가지고 있고, "남자답다" "여자답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다.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며, 넌 남자니까 뭐뭐해, 넌 여자니까 이러면 안돼 식의 발언들에 매우 강한 거부감을 지니고 있다. 남자가 해야할 것과 여자가 해야 할 것, 남자가 해서는 안될 일과 여자가 해서는 안될 일은 없다. 그건 후천적으로 우리가 인위적으로 규정지어놓은 문화의 산물일 뿐이다. 아직도 특정 부분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남자는 원래 공간감각능력이 더 뛰어나고 수학을 잘하며 운동을 좋아한다, 여자는 언어능력이 탁월하며 읽고 쓰는 일에 재능이 있다, 등등. 그러나 그것이 사실로서 확인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을 규정지을 순 없다. 다수의 남자들이 이쪽에, 다수의 여자들이 저쪽에 있을 뿐이다. 비록 사실이라 하더라도.

   나는 남자답다는 말보다 차라리 여자답다는 말이 더 좋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커피숍에 앉아 수다떠는 일도 좋고, 맛집을 찾아다니며 음식맛을 보는 것도 좋고, 분위기 좋은 술집과 분위기 좋은 카페를 찾아다니는 것도 좋다. 한때 줄 사람도 없으면서 종이학 1000마리를 매일같이 접던 때도 있었고, 대개 종이학 1000마리는 여자들이 좋아하는 남자친구에게 주는 선물로 인식되던 그때 뭐 이런 짓을 하냐는 핀잔도 받아야 했다. 남자친구들과 어울려 당구를 치고 곤드레만드레 할 때까지 술을 마시고 피씨방에서 스타크래프트를 하며, 또 농구 한 판 뛰며 땀 흘리는 그런 것에 익숙치도 않고 별 관심도 없으니 난 남자들보다 여자들과 더 잘 어울렸고 그래서 주변에 아는 여자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것이 선천성에서 비롯되었는지 아니면 후천적인 관심과 노력의 결과인지 모르지만, 나는 내 마음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삶을 살아왔고, 그것이 자연스럽다 여겼으며, 고로 이 시대의 꽃미남과 여전사의 트랜드는 나에겐 반갑다. 이 책에선 오늘날의 '꽃미남과 여전사'의 트랜드가 단지 시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시간을 차곡차곡 밟아오며 증명하고 있지만 그 기원이 그리스건 어디건 남자가 여성의 면모를 지닌 것도, 여자가 남성의 면모를 지닌 것도 이상할 것은 전혀 없으며, 자연스러운 내면의 흐름에 맡기고 살아가면 그 뿐이라는 생각이다.

  분명 지금의 트랜드가 '꽃미남과 여전사'라고 하지만 아직도 전형적인 남성성의 상징을 가지고 있는 마초같은 남성들도 수두룩하며, 전형적인 전통적인 현모양처의 조신하고 얌전하고 그 자체로서 참한 여성들도 수두룩 한 것이 현실이다. 시대마다 흐름과 유행이라는 것이 있지만 여기에 흔들리지 않고 자연에 맡기고 사는 것이 가장 나 다운 삶이 아닐까 한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적오리 2006-08-13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동감.. 나 답게 사는게 젤 좋다는데 한 표..
전 여자지만 혼자 식당에서 밥도 잘 먹고 전등도 잘 갈아요.. ^^
 
성공의 길은 내 안에 있다 살림지식총서 121
이숙영 지음 / 살림 / 2004년 8월
장바구니담기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돈은 행복한 가정을 지켜줄 수 있다.
모든 독립은 경제적인 독립을 전제로 한다.
-11쪽

오히려 전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더 많은 노력과 더 많은 고민과 더 많은 책을 읽게 되는 이점도 있다. 게다가 어느 틀에 묶여 있지 않기 때문에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다. 덤으로 우리는 그 속에서 스스로 겸손도 배우게 된다. -27쪽

주관적인 성공이란 바로 '자신이 느끼는 만족'이며, 자신의 일 속에서 '자신만의 소명'을 발견하는 경우를 말한다. 내가 하는 일 속에서 만족하지 못하면 객관적으로 커다란 성공을 어루었다 하더라도 반쪽짜리 성공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한 차원 높은 성공을 꿈꿔야 한다. -28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6-08-04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혹시 방송인 이숙영인가요? 아님 동명이인인가요?
방송인 이숙영도 전에 책을 냈었죠. 저와 상당히 비슷한 생각을 많은 곳에서 발견할수 있었어요.
밑줄그어진 내용은 어느정도 나이를 먹은 시점에서 인생을 돌아보게 해주네요.

마늘빵 2006-08-04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대 물리학과 졸업한 전문 자기계발 클리닉 원장이에요.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장바구니담기


그러나 기억이란 시간이 흐를수록 멀어져 가고, 나는 이미 너무나 많은 것들을 잊어버렸다. 이렇게 기억을 더듬으면서 글을 쓰고 있으면, 나는 가끔 몹시 불안한 기분에 휩싸이곤 한다. 어쩌면 내가 기억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상실해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기 때문이다. 내 몸 속에 기억의 외딴 곳이라고나 부를 만한 어두운 부분이 있어서, 소중한 기억들이 모두 거기에 쌓여서는 부드러운 진창으로 변해 버린 건 아닌가 하고. -24쪽

죽음은 삶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49쪽

책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은 후에 가끔씩 눈을 감은 채 책의 향기를 가슴속에 담곤 했다. 책의 향기를 맡으면서 책갈피에 손을 대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한 기분을 맛볼 수가 있었다. -58쪽

"현대 문학을 신용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야. 다만 시간의 세례를 받지 않은 걸 읽느라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것 뿐이지. 인생은 짧아." -59쪽

나는 나오코를 안으면서 그녀에게 설명해 주고 싶었다. 나는 지금 너와 섹스를 하고 있다. 나는 네 몸 속에 들어가 있다. 하지만 이건 아무 것도 아닌 일이다. 아무 문제도 아니다. 다만 육체의 뒤섞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린 서로의 불완전한 육체를 맞댐으로썸나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우린 다만 서로의 불완전함을 나누어 가지고 있는 것이다, 라고. -210쪽

"저, 저, 뭔가 말해 줘"
"무슨 이야기?"
"뭐라도 좋아. 내 기분이 좋아질 만한 것."
"너무 사랑스러워."
"미도리"
"이름을 불러 줘."
"너무 사랑스러워, 미도리."
"너무라니 얼마만큼?"
"산이 무너져 바다가 메워질 만큼 사랑스러워"
"자긴 정말 표현 방법이 아주 독특한 걸"
"네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 흐뭇한데"
"더 멋진 말을 해줘"
"네가 너무 좋아, 미도리"
"얼마만큼 좋아?"
"봄철의 곰만큼"
"봄철의 곰?"
"그게 무슨 말이야, 봄철의 곰이라니?"
"봄철의 들판을 네가 혼자 거닐고 있으면 말이지, 저쪽에서 벨벳같이 털이 부드럽고 눈이 똘망똘망한 새끼곰이 다가오는 거야. 그리고 네게 이러는거야. '안녕하세요, 아가씨. 나와 함께 뒹굴기 안하겠어요?' 하고. 그래서 너와 새끼곰은 부둥켜안고 클로버가 무성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종일 노는 거야. 그거 참 멋지지?"
"정말 멋져"
"그만큼 네가 좋아" -354쪽

"내 헤어 스타일 괜찮아?"
"굉장히 좋아"
"얼마나 좋아?"
"온 세계의 숲에 있는 나무가 다 쓰러질 만큼 멋져"
"정말 그렇게 생각해?"
"정말 그렇게 생각해."-394쪽

나는 아무리 애를 써도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에 나오코의 여러 가지 모습을 생각했다.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속에는 나오코의 추억이 너무나 가득히 채워져 있었고, 그 추억들은 정말 작은 틈새를 억지로 헤집고 잇따라 밖으로 튕겨 나오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분출을 억누르는 것은 아무래도 불가능했다. -410-411쪽

그 장소에서 죽음이란 삶을 결말짓는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었다. 거기서 죽음이란 삶을 구성하는 많은 요인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나오코는 죽음을 안은 채 거거ㅣ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와타나베. 그건 그저 죽음일 뿐이야. 마음 쓰지 말아."하고. -411쪽


댓글(6)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6-08-01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글이 마음속으로 쏙쏙 들어옵니다. 책을 손에서 놓고 잠깐씩 눈을 감고 생각해보았던 장면들입니다.저는 특히 58쪽 문장을 읽으며 공감했어요.

비로그인 2006-08-02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젇 58쪽을 읽으면서 너무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래서 책이 너무 좋아요^^

마늘빵 2006-08-02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연님 / 반갑습니다. 처음인듯... ^^ 이 책 참 생각해 볼 것이 많은 책이었어요. 그래서 몇년 뒤에 다시 봤을 때 또다른 느낌으로 접하고 싶어요.
슈슈님 / 연애는 잘 되어가시나요? ㅋ

이리스 2006-08-08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9 페이지의 글귀는 내 스무살 다이어리에 앞장에 적혀 있던 것. ㅋㅋ
아, 다시 <상실이 시대>라니 10년이 지나서 보니 이것 참 새롭다.

마늘빵 2006-08-09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나도 이거 다시 봤삼. 2년전인가 보고 다시 보니 새롭던데...

이쁜하루 2006-08-17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시 읽고 싶어지네용 ^^
 



  장래 시인이 되고 싶었던 한 청년에게 총 556만원을 훔친 상습절도죄로 징역 17년 형이 내려졌다. 당시 대통령 전두환의 동경 전경환이 새마을 사업 비리로 약 70억 상당의 돈을 횡령하고 징역 7년형이 내려졌으며, 2년 3개월 뒤 풀려놨다. 17년형을 받은 한 청년은 이에 반발하며 1988년 10월 8일 교도소 이감 중 동료 12명과 함께 탈주에 성공하여 서울 한 복판에서 9일간 인질극을 벌이다 죽었다.

  영화 <홀리데이>는 그런 영화다. 1988년 대한민국에서 서울 올림픽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났던 인질극을 그린 영화다. 그 인질극의 주인공 지강헌을 그린 영화다. 지강헌은 가난한 삶을 살았지만 시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고 상습 절도로 17년을 선고받았으며,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이 자신보다 훨씬 많은 70억을 횡령하고도 2년 3개월만에 풀려나자 분노했다. 정당한 분노였다. 분노란 것에 '정당한'이라는 수식어를  쓸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그것은 당연했다.

  대부분의 탈옥수들이 잡혔지만, 지강헌을 비롯한 총 4명은 이후 8일간 강도짓을 하며 버텼고, 서울 북가좌동의 한 가정집에 들어가 인질극을 벌이다 경찰의 포위를 받고, 일부는 자살, 지강헌 역시 할 말을 다 한 채 깨진 유리조각으로 목을 찔러 자살을 시도했으나, 숨이 붙어있는 상태에서 경찰의 총탄 두 발을 맞아 다음날 죽었다.



  지강헌은 경찰의 불심검문에도 단 한번도 걸리지 않았으며, 기회가 있었기에 충분히 도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애초 탈주를 시도한 원인이 되었던 것에 대해 할 말을 다 하고자 인질극을 벌이며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죽어갔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돈이 있으면 죄가 있어도 죄가 아니고, 돈이 없으면 죄가 없어도 죄가 있다. 물론 지강헌은 상습절도죄로 수감되었지만, 그의 불우한 환경이 아니었다면 그는 그의 희망대로 훌륭한 작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환경이 사람을 변화시켰고, 그 책임을 환경탓만으로 돌릴 수는 없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일만한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죽어갔다. 비지스의 홀리데이 대신 스콜피언스의 홀리데이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그는 자신의 원대로 말을 다 한 채 죽어갔다.

  "웃기는 소리하지 마라! 이 사회는 너희처럼 큰소리치는 놈들이 망쳐 놓은 거다! 너희 같은 놈들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고, 돈 없는게 죄다! 나는 돈 없고 빽 없는 놈이라 이렇게 된 거다! 도둑놈? 범죄자는 바로 너희 같은 놈들인데.... 바로 너부터 죽여버리겠다!”

  “대한민국의 비리를 밝히고 죽겠다! 영등포 교도소에서 죽지 못한 게 한이다 ‘有錢無罪, 無錢有罪’ 우리나라 법이 이렇다!”

 “나는 지금 무척 행복하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있고, 내 할말 다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있다.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시를 한편 남기겠다. 내 유언을 한마디로 줄이면 나는 행복한 거지가 되고 싶었던 염세주의자이다!”

  이것이 지강헌이 남긴 말이다. 나는 행복한 거지가 되고 싶었던 염세주의자라는 말. 그는 정말 그랬을 것이다. 행복한 거지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세상에 대한 비관은 세상에 대한 증오로 바뀌었다. 증오는 희망으로 변하지 않았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88년 지강헌이 죽어가며 한 말이지만 2006년 아직도 이 말을 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것은 왜일까. 얼마전 판사들이 변호사로부터 뇌물을 받고 판결을 내려줬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한 두명이 아니라 엄청난 규모의, 꽤나 높은 직책에 있는 이들조차도, 우리가 믿고 우리의 죄를 심판해달라고, 우리의 억울함을 벗겨달라고 요청해야할, 판사들이 뇌물을 받고 판결을 내렸다. 그리고 그 판결은 애초 요구받았던 그대로였다. 돈이 있으면 확실히 죄가 있어도 죄가 아니다. 그리고 돈이 없다면 죄가 없어도 죄이다. 아이에게 고기를 먹이고 싶어서 정육점에서 고기를 훔치고, 동네 구멍가게에서 라면을 훔치다 잡혀간 사람들, 물론 그들은 죄를 지었다. 절도죄를. 하지만 그것은 순수하게 그들의 잘못이라 말 할 수는 없을 터이다. 돈이 없으면 반드시 죄가 되는건 아니지만, 죄를 저지르기 쉽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아직도 유효하다. 약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앞으로 20년이 지난 뒤에 이 말이 입가에 다시 맴돌지 않길 바랄 뿐이다. 그러나. 안다. 그것이 오직 희망사항이란 것을. 정의는 언제나 현실과 멀리있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전호인 2006-07-26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有錢無罪 無錢有罪 라는 말! 요즘이 더 맞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프레이야 2006-07-26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보며 당시 뉴스에서 나오던 장면이 겹쳐지더군요. 저 창살 장면 .. 미화된 부분도 있었지만 괜찮았던 영화에요..

마늘빵 2006-07-27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어린시절이라 이런 사건이 있는줄도 몰랐어요. 나중에야 알았죠.

책방마니아 2006-07-27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 이런 사건 있는지 정말 몰랐단 말이야? 우리 초등학교 3학년 땐가 이 사건이 티비에서 생중계로 방영되었던 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데? 나도 이 영화를 보면서, 1988년 올림픽을 열면서 (당시 정부의 정당성을 국내외적으로 인정 받기 위한 꼼수였다고 볼 수 있지) 이미지 개선을 위해 서울 내 빈민촌 등이 철거되는 과정이 씁쓸하게 느껴지더라. 근데 이 영화 속 가상의 인물을 연기한 최민수 말이야. 목소리 너무 오버하는 거 같더라. 비열한 연기를 하는 것 까진 좋은데, 너무 겉멋 들이는 것 같아 좀 거슬렸음 ~

마늘빵 2006-07-27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민수 연기는 항상 좀 그렇더라구. 느끼하구 오버하는 느낌. 음. 난 이런 사건 있는줄 몰랐는데. 그때 내가 뭐 하고 놀았길래 그렇지. 하긴 그땐 뉴스같은거 거의 안봤어.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