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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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억이란 시간이 흐를수록 멀어져 가고, 나는 이미 너무나 많은 것들을 잊어버렸다. 이렇게 기억을 더듬으면서 글을 쓰고 있으면, 나는 가끔 몹시 불안한 기분에 휩싸이곤 한다. 어쩌면 내가 기억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상실해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기 때문이다. 내 몸 속에 기억의 외딴 곳이라고나 부를 만한 어두운 부분이 있어서, 소중한 기억들이 모두 거기에 쌓여서는 부드러운 진창으로 변해 버린 건 아닌가 하고. -24쪽

죽음은 삶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49쪽

책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은 후에 가끔씩 눈을 감은 채 책의 향기를 가슴속에 담곤 했다. 책의 향기를 맡으면서 책갈피에 손을 대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한 기분을 맛볼 수가 있었다. -58쪽

"현대 문학을 신용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야. 다만 시간의 세례를 받지 않은 걸 읽느라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것 뿐이지. 인생은 짧아." -59쪽

나는 나오코를 안으면서 그녀에게 설명해 주고 싶었다. 나는 지금 너와 섹스를 하고 있다. 나는 네 몸 속에 들어가 있다. 하지만 이건 아무 것도 아닌 일이다. 아무 문제도 아니다. 다만 육체의 뒤섞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우린 서로의 불완전한 육체를 맞댐으로썸나 이야기할 수 있는 것들을 지금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우린 다만 서로의 불완전함을 나누어 가지고 있는 것이다, 라고. -210쪽

"저, 저, 뭔가 말해 줘"
"무슨 이야기?"
"뭐라도 좋아. 내 기분이 좋아질 만한 것."
"너무 사랑스러워."
"미도리"
"이름을 불러 줘."
"너무 사랑스러워, 미도리."
"너무라니 얼마만큼?"
"산이 무너져 바다가 메워질 만큼 사랑스러워"
"자긴 정말 표현 방법이 아주 독특한 걸"
"네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 흐뭇한데"
"더 멋진 말을 해줘"
"네가 너무 좋아, 미도리"
"얼마만큼 좋아?"
"봄철의 곰만큼"
"봄철의 곰?"
"그게 무슨 말이야, 봄철의 곰이라니?"
"봄철의 들판을 네가 혼자 거닐고 있으면 말이지, 저쪽에서 벨벳같이 털이 부드럽고 눈이 똘망똘망한 새끼곰이 다가오는 거야. 그리고 네게 이러는거야. '안녕하세요, 아가씨. 나와 함께 뒹굴기 안하겠어요?' 하고. 그래서 너와 새끼곰은 부둥켜안고 클로버가 무성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종일 노는 거야. 그거 참 멋지지?"
"정말 멋져"
"그만큼 네가 좋아" -354쪽

"내 헤어 스타일 괜찮아?"
"굉장히 좋아"
"얼마나 좋아?"
"온 세계의 숲에 있는 나무가 다 쓰러질 만큼 멋져"
"정말 그렇게 생각해?"
"정말 그렇게 생각해."-394쪽

나는 아무리 애를 써도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에 나오코의 여러 가지 모습을 생각했다.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속에는 나오코의 추억이 너무나 가득히 채워져 있었고, 그 추억들은 정말 작은 틈새를 억지로 헤집고 잇따라 밖으로 튕겨 나오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분출을 억누르는 것은 아무래도 불가능했다. -410-411쪽

그 장소에서 죽음이란 삶을 결말짓는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었다. 거기서 죽음이란 삶을 구성하는 많은 요인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나오코는 죽음을 안은 채 거거ㅣ서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와타나베. 그건 그저 죽음일 뿐이야. 마음 쓰지 말아."하고. -4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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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8-01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글이 마음속으로 쏙쏙 들어옵니다. 책을 손에서 놓고 잠깐씩 눈을 감고 생각해보았던 장면들입니다.저는 특히 58쪽 문장을 읽으며 공감했어요.

비로그인 2006-08-02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젇 58쪽을 읽으면서 너무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래서 책이 너무 좋아요^^

마늘빵 2006-08-02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승연님 / 반갑습니다. 처음인듯... ^^ 이 책 참 생각해 볼 것이 많은 책이었어요. 그래서 몇년 뒤에 다시 봤을 때 또다른 느낌으로 접하고 싶어요.
슈슈님 / 연애는 잘 되어가시나요? ㅋ

이리스 2006-08-08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49 페이지의 글귀는 내 스무살 다이어리에 앞장에 적혀 있던 것. ㅋㅋ
아, 다시 <상실이 시대>라니 10년이 지나서 보니 이것 참 새롭다.

마늘빵 2006-08-09 0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나도 이거 다시 봤삼. 2년전인가 보고 다시 보니 새롭던데...

이쁜하루 2006-08-17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시 읽고 싶어지네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