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경고

  4편째 시리즈물을 시도한다는 건 그만큼 많은 매니아들을 확보하고 있다는 증거다.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터미네이터>, <에이리언>, <매트릭스> 등등은 첫작 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상업적으로 이윤을 획득할 만큼은 좌석을 채웠다. 다른 영화들이 하나의 일관된 제목을 가지고 관객에게 어필하는 반면, 이 시리즈물은 제목이 제각각이다. 또한 영화의 제작순서가 시리즈의 줄거리를 시간순으로 따라오지 않는다. 영화 속 시간에 따르면, 엄연히 이번에 개봉하는 <한니발 라이징>이 가장 우선이 될 것이고, 이어서 <레드드래곤> <양들의 침묵> <한니발>이 따라올테지만, 실제 제작순서는 91년에 <양들의 침묵>이, 01년에 <한니발>이, 02년에 <레드드래곤>이, 그리고 07년에 <한니발 라이징>이 따라간다.



* 이 잘생긴 꽃미남이 잔인한 살인마라니. 한번 나쁜 놈으로 찍히면 영원히 나쁜 놈이 된다. 이런걸 낙인효과라고 한다지.

  영화제 사상 최소 출연(16분)으로 92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안소니 홉킨스는 불행히도 이번 영화엔 등장하지 않는다.  <한니발 라이징>은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안소니 홉킨스의 나이가 이제 우리나이계산으로 70세에 이르렀으니 2차 대전을 겪은 꼬마를 열연하기엔 너무나 나이가 많지 않은가. 안소니 홉킨스의 카리스마를 대신할 청년으로는 가스파르 울리엘이라는 배우가 낙점되었다. 84년생 프랑스 출신의 이 배우는 <인게이지먼트>로 데뷔하여 신인상을 수상하였고,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한니발 역을 따냈다. 전작을 보신 분들은 전작의 안소니 홉킨스 못지 않은 그의 살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2차 대전 당시 가족들이 독일군에 의해 몰살당하고 그때의 충격으로 실어증에 걸린 한니발은 처참에게 살해당한 동생 미샤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억지로 기억을 떠올려 그들을 추적한다. 버려진 옛 집터엔 그들의 인식표가 남아있고, 이를 토대로 한명씩 찾아가 피의 복수를 한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워낙 침착하고 머리가 비상한지라 경찰의 거짓말탐지기에도 반응하지 않으며 프랑스의 의대에도 최연소 합격하였다. 이 모든 것이 복수를 위한 사전작업이다. 하지만 본능에 가깝다. 그의 치밀한 복수장면은 아주 깔끔하지만 처참하다. 머리를 동강내고, 척추를 베고, 볼따꾸를 버섯과 함께 꼬치구이 해먹는다. 그 누구도 한니발을 막을 수 없다.

  그는 왜 잔혹한 피의 복수를 감행하는가. 그것은 사람이 본래부터 선하게 태어난다거나, 악하게 태어난다거나, 이도저도 아니라는 그런 인간의 본성에 관한 설들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바라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그 순진하고 착하기만 하던 어린 녀석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 2차 대전 중에 가족의 죽음을 눈으로 목격한 그는, 사랑하는 여동생의 살점을 씹어먹는 체험까지 해야했다. 영화 속 그루터스의 말처럼 그는 어쩌면 자신이 여동생의 살점을 먹었다는, 고깃국물을 먹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용납할 수 없어, 내 여동생을 죽인 녀석들을 찾아 복수를 하는지도 모른다. 그건 그들에게 가하는 복수라기보다는 나 스스로에게 가하는 복수다. 

  밤마다 그때의 장면을 떠올리며 잠을 설치고 괴로워하는 나에 비해, 나치로 활약한 그때의 이름을 감추고 귀여운 아들, 딸 잘 낳아 번듯한 레스토랑도 하나 차리며 그럭저럭 윤기나는 삶을 살아가는 그들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아무도 그들을 처벌해주지 않는다. 법으로도 안되고, 도덕적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그들이라면, 나만이 응당한 댓가를 치뤄줄 수 밖에 없다. 복수는 여기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들을 죽임으로써 어쩌면 나는 나 자신에게 가해진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지도 모른다.

 

* 나를 화나게 하지 말라. 오직 피만이 그대에게 이야기할 뿐이다.

  양들의 침묵 시리즈라고 해야할까, 한니발 시리즈라고 해야할까. 어떻게 부르건간에 이 작품들은 모두 잔혹하지만 깔끔하고 신사적인 범죄자를 다룬다. 비상한 머리와 고통을 가하는 다양한 살해방법, 게다가 인육을 먹는 설정까지. 이 모든 것들은 영화의 원작을 집필한 소설가의 머리에서 나왔다. 괴물은 한니발이 아니라 토마스 해리스다. 토마스 해리스는 은둔 작가로 알려져있다. 온갖 인터뷰와 대외활동요청을 거부한 채 10년 넘게 은둔 생활을 해온 이 사람은, 마치 <호밀밭의 파수꾼>의 작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를 연상시킨다. 심지어 샐린저의 은둔생활은  영화 <파인딩 포레스트>를 통해서도 다뤄졌다.   

  토마스 해리스는 영화 한니발 시리즈의 모든 원작을 집필한 작가이다. 스릴러 소설로 먼저 완성이 되고, 이후에 이것을 토대로 영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감독 피터 웨버는 이전에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통해 섬세함과 절제된 감성을 선보인 바 있다. 92년부터 시작된 한니발 시리즈는 조나단 드미로, 리들리 스콧(대표작 글레디 에이터), 브렛라트너의 손을 거쳤고, 피터 웨버를 통해 한니발의 성장과정에서의 상처와 치유, 분노를 드러낼 수 있는 섬세한 심리묘사를 완성시켰다. 토마스 해리스는 유일하게 피터웨버에게만 집을 개방했고, 그와 수없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도움을 줬다고 전해진다.

  더이상의 한니발은 이제 없다. 한니발의 어린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작품이 나왔으니 이후 한니발을 만나기는 힘들다. 이번 작품은 안소니 홉킨스의 <양들의 침묵>만큼은 아니지만, 젊은 한니발 가스파르 울리엘을 통해 깔끔한 피의 복수를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보다 많이 잔인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한니발'에게 있어서 '생각보다'임을 말해두고 싶다.

 p.s. 이런 시리즈물은 영화 속 시간순서대로 한번 쭉 훑어줘야 제맛인데 반드시 연결되는 것은 아니므로 따로 즐겨도 무방하겠다. 전작을 전혀 보지 않은 사람들도 스릴러를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재밌을 것이다. 이 영화를 본 뒤 <양들의 침묵>을 보면 어떨까 싶다. 아무래도 안소니 홉킨스를 먼저보고 젊은 한니발을 만나는건 강도가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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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주나무 2007-04-05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 님의 글은 참 편안하네요.
나는 왜 그렇지 못할까???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