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항상 문과/이과의 구분이 지워지지 않는 것 같다. 지금은 그만둔 옛 직장의 선생님 한 분은 말할 때마다 문과가 어떻고 이과가 어떻고 이런 식의 구분을 전제로 깔고 뭐든 이야기를 하시곤 했는데, 나는 그 분의 말을 들을 때마다 항상 불편했다. 이과가 어떻고, 문과가 어떻고, 요런게 어디 있어. 하시는 말씀의 주제는 전혀 문과/이과를 떠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관련지어 말씀하시는게 마음에 거슬렸다. 사실 이공계열 전공자와 인문계열 전공자의 사고구조의 차이는 어느 정도 존재한다. 존재하지만, 그걸 어떤 이야기와 반드시 연관지어 말할 필요는 없을 뿐더러 그 차이는 대략적인 것일 뿐이다. 아주 넓게 보아 그렇다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그렇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 없다.
나의 친한 친구 하나는 학부와 대학원에서 자연계열-공학계열을 공부하고 있는데, 그 친구를 처음 만났을 때 - 지금은 잘 안 그러는거 같은데 -, 자신은 자연계열이라 이렇고, 나는 인문계열이라 이렇고 라고 말하며 단정짓는 경향이 있었다. 가령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자신은 자연계열 전공자 치고는 인문사회과학 책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거나 자연계열 전공자 치고는 인문계열 전공자 식의 사고를 한다는 등의 발언이 대표적이다. 그때마다 나는 그건 아니다. 자연계열이라고 해서 인문계열에 관심이 적다거나 아니면 책을 읽지 않는다거나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위험하다. 그건 자신의 전공 영역에서 벗어난 부분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를 정당화시켜줄 수 있다, 고. 가령 사회 현실의 문제들.
어떤 사람이 걸어온 길, 그가 공부해온 길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사고와 가치관이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이공계열에 오래 머문 사람과 인문계열에 오래 머문 사람은 분명 자신이 공부한 부분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그것이 자기를 형성하는 일부분으로 자리잡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절대적이라고 믿어서는 안 되며, 절대적으로 간주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건 앞서 말했지만 대략적인 분위기와 성향일 뿐이다. 전공은 어디까지나 전공일 뿐, 끊임없는 가로지르기를 할 필요가 있다. 자신이 발언한 내용 안에 스스로를 가둬둘 필요는 없다. 그건 그 사람을 더욱 이공계스럽게(?), 더욱 인문계스럽게(?) 만들 뿐이다. 나는 이공계라서 이래, 이공계라서 이런데는 관심 없어, 나는 인문계라서 이래, 인문계라서 이런데는 관심 없어, 라는 식의 의식은, 자기를 더 좁게 작게 만들 뿐이다.
애초 문과형 인간과 이과형 인간은 따로 없다. 이공계열 인간과 인문계열 인간은 따로 없다. 그건 스스로가 만든 감옥 안에 자기를 집어넣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어질 뿐이다. 심리철학을 공부하면 자연스럽게 심리철학에서 논의되는 뇌에 관한 과학적 지식을 습득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예전에 학부 때 교수님께서 당시 관심갖고 공부하시던 영역에서 과학적 지식이 부족해서 과학책을 뒤적이고 있다고 말씀 하셨는데, 철학자가 왜 과학책을 뒤적여?, 라고 의문부호를 달 것이 아니라,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 이공계열, 자연계열도 역시 마찬가지다. 과학적 진리를 탐구하고, 쓸모있는 뭔가를 만들 궁리만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사회적으로 미칠 영향력, 파장을 고려하고 사유할 필요가 있다. 서로가 서로의 영역을 끊임없이 가로지르기 할 때 성과는 빛을 발할 것이다.
학자가 아닌 사람도 마찬가지. 자기를 자기가 형성한 감옥에 가두지 말고 영혼을 풀어헤쳐야 한다. 적어도 이제 난 이공계라서 이래, 난 인문계라서 이래, 라는 말은 입 속으로 쏙! 일종의 이런 선입견들이 자기를 규정 짓고 남을 규정 짓는다. 사족이지만 하나만 더 말하면, 남자들만이 있는 자리에서 으레 당연하다는 듯이 나오는 여성 비하적 발언이나 동네 뒷골목에 있는 뻘건 집 이야기는, 남자라면 당연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는 전제를 깔고 있다. 개인적으로 얼마전 만난 한 선생님께서 여자들도 없는데 어쩌구 저쩌고 하면서 필리핀이 어쩌고 하는 발언을 해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한동안 내가 만난 사람 중에는 그런 분들이 없었기 때문에. 여자들이 없는 자리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이런 주제와 발언들은 그 자리에 있는 같은 성(性)을 지닌 남자를 성희롱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선입견이 빚어낸 일상적인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