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김윤식-김현의 한국문학사

고종석의 연재칼럼이 마무리되면서 어제 읽어본 수요일자 한국일보는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그런저런 기사들은 인터넷에서도 읽을 수 있기에). 그간에 목요일자 신문은 주로 경향신문을 봐온 터에 주목하지 않았었는데 '우리시대의 명저50'은 목요일에 연재되는 모양이다. 온라인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김윤식-김현의 <한국문학사>가 다루어진 걸 보고 편의점에서 가서 한국일보를 사들고 왔다. 글쓰기는 온라인 공간을 많이 활용하는 편이지만 나는 사실 'e-북'이나 'e-저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그런 경우에도 대개는 프린트해서 읽는다. 물론 서비스되는 거야 편리하고 또 고마운 일이지만) '신문지 세대'이다. 보관상의 난점이 가장 큰 걸림돌이긴 하지만 글/책은 '만질 수 있어야' 제맛이고 제격이다(그러니까 눈으로 본다는 게 전부가 아니다). 

안 그래도 필요 때문에 한국문학사, 특히 현대문학사를 다룬 책들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아쉽게도 '우리시대의 명저' <한국문학사>는 내 경우 박스보관도서이다(거의 징크스가 되고 있는데, 박스에 집어넣은 책이나 주제에 대해서만 강의나 일거리를 맡게 된다. 집안을 둘러싸고 있는 책들 가운데는 '일없이' 놀고 있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렇다고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읽자니 멋쩍고, 다시 구매하자니 부담스럽다. 책보다 비싼 건 책을 꽂아놓을 공간이다. 그나마 이런 류의 기사는 온라인에 보관해놓을 수 있어서 다행이지만.

한국일보(07. 03. 01) [우리 시대의 명저 50] <9> 김윤식·김현 공저 '한국문학사'

모자이크화는 작고도 이질적인 단위의 점으로 구성돼 있다. 감상자의 시야가 넓어질수록 그 화소(畵素)들은 한 편의 그림에 충실히 복무한다. 완전히 다른 생명체로 거듭나는 것이다.

<한국문학사>(민음사)는 견실한 모자이크화다. 김윤식과 김현이라는 빼어난 화가들이 함께 모사해 낸 한국 문학 전도(全圖)다. 그 두 사람이 각각 어느 대목을 서술했는지, 절(節) 단위까지 서문에 명시돼 있긴 하다. 그러나 독자는 읽어가다 보면 한 사람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두 사람이 교직해 가며 한 목소리를 내는 모습은 우리 학술사가 일궈낸 아름다운 풍경이다.

1973년 1판이 선보인 뒤 96년 29쇄로 1판은 마감하고, 다시 그 해에 개정판의 시대로 돌입했다. 여느 개정 작업처럼 내용에 대한 수정이 아니라, 한문 투의 문장을 시대에 맞게 업그레이드하는 작업이었다. ‘초판이 곧 정본’이라는 완벽주의적 신념 혹은 염결성(廉潔性) 덕에 책은 전국 대학의 국문과 120여 곳에서 여전히 교재로 쓰이는 등 그 의미를 확인해 왔다. 임화 -백철 - 박영희 - 조연현 등 선구적 학자들의 맥을 잇되, 여전히 현장 교육에서 애용된다는 점에서 새삼 돋보이는 결과물이다.

책은 대단한 자의식, 또는 자긍심의 소산이다. 우리 역사의 운명 혹은 질곡이었던 주변 문화성을 문학적으로 극복한다는 목적의 소산이었다. 한국 문학사 고유의 개별적 추진력을 모색하는 한편 한국 근대사의 추진력이 무엇이었는가를 철학적 면에서 바라보자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자칫 생각만 웃자랄 수도 있었을 테지만, 수많은 토론과 세미나가 빈 틈을 촘촘히 메워주었다. 두 사람 사이의 굳건한 합치점 덕택이었다. 문학사란 역사와 다르게 예외적 개인에 관심을 쏟지만, 결국 당대 특정 계급의 무의식적 기반을 보여주는 상상적ㆍ풍속적 전거라는 것이다.

책은 서세동점의 위기의식이 그와 짝을 이루던 당시, 의식을 혁파하고자 한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김삿갓의 시를 통해 혁명까지 나아가지 못한 그들의 한계부터 논한다. 권력 구조의 밖에 서 있는 지식인의 쓰디쓴 자기 반성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직접적으로는 19세기말 조선이 서구의 충격에 의해 국가 상실의 위기에 직면할 때, 부자 중심의 가족 관계가 역기능일 따름이었으며, 이후 이광수의 자유연애론과 이상의 가족 콤플렉스 등으로 연결된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적극적 의미가 있다면 시조, 판소리, 가면극 등 민중적 예술 양식이었다. 개화기의 표면적 혹은 포괄적 현상을 풍속 혹은 유행의 차원에서 가장 잘 드러낸 양식, 연극은 그 적자였다.

책의 문제 의식은 철저하다. 난세 혹은 전환기에서 진정한 역량은 어디 있는가에 맞춰져 있다. 한국 문화가 중국 문화권의 말단 주변인가 혹은 중간 문화권인가 하는 논란, 문화 수용에서 나타나는 엘리트와 민중 간의 편차 등 역사의 동인에 대한 철저한 자의식이 문학 작품의 형식을 통해 간단 없이 확인된다.

유길준이 탁월한 언어 감각에도 불구, 국한문 혼용체에 머문 것은 신분 사상과 평등 사상이 공존해 있었던 내적 갈등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또 역사 의식이 결여돼 있던 이광수는 작품상에서 혁신적 개념과 보수적 사고 관례가 무반성적으로 공서(共棲)하는 우를 피하지 못했다. 소월은 창가 리듬에서 벗어나 새 운율을 찾는 노력을 보여주었으나, 절대에의 탐구를 포기했기 때문에 결국 새로운 민요 이상이 되지 못했다.

개인과 사회를 발견한 것은 염상섭 최서해 김동인 현진건에 이르러서 였다. 서울 중류 계급의 어휘량. 중인층의 현실 감각을 섬세하게 용해한 염상섭은 계급 해방 운동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조선적인 것의 탐구(궁극적으로는 해방)가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테러리스트의 묘사는 한국 소설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탁월하며, 특히 <삼대>는 채만식의 <태평천하>와 함께 식민치하 작품 중 최상급에 속한다. 자신은 개량주의적 입장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다같이 흡수하려 했지만, 그러한 태도가 실제 문학화 하지 못한 점은 염상섭의 유일한 한계다. 이와 반대로 김동인은 계급 문학이 있다면 계급 빵, 계급 음료수도 있는 것이냐며 치기 어린 절규를 해보았지만 퇴폐적 정서로 자신의 이상주의를 오염시키고 말았다.

한편 이상은 ‘태도의 희극’이라는 문학적 주제를 극한에 이르기까지 몰고 간 식민지 시대 유일의 작가다. 자신이 속한 사회와 그 사회가 만들어 놓은 금기 체계, 그 금기 체계 내에서 생존하지 않을 수 없는 일상인들을 그는 다같이 부정했다. 그의 주인공들은 결사적인 자기 폐쇄에도 불구하고 사회와 은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아무리 폐쇄적인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는 사회와 은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잔인한 관계를 철저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상은 부정적인 자기 폐쇄를 통해 정당하게 사회와의 통로를 차단당한 인간의 파산을 여실히 보여준다.

격한 직설체, 센티멘털한 열정의 작가 임화는 한국 문학사를 서구 문학이나 일본 문학과의 연관 아래 비교문학적으로 다루려 했으나 방법적으로 실패는 예정돼 있었다. 이상 채만식 박태원 김유정 같은 탁월한 작가들은 현실과의 치열한 투쟁을 작품화했고 이태준 김남천 등은 페이소스, 시니시즘, 유머 등의 수단을 통해 작품을 완성했다.

박태원이, 식민 치하의 가난을 극복할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자유 연애를 은근히 주장하는 것은 서울 서민층의 폐쇄성과 칩거성을 그것으로나마 극복해 보려는 조그만 의지의 소산으로 읽힌다. 단, 콤마의 적절한 사용으로 감각적 탄력성을 획득했다는 점, 지적인 재치와 심리주의로 요약되는 다양한 실험 정신은 높이 살만한 작가다.

한국어 훈련이란 관점에서 주목되는 시인들이 있다. 감정의 절제를 가능한 한도까지 감행해 본 한국 최초의 시인 정지용, 일제 식민 치하 후반기에 민족주의적 시를 당당히 쓴 ‘기적’을 보여준 윤동주, 일본 리듬인 7ㆍ5조로 기울기 일쑤인 정형시를 새 차원으로 격상해 시조를 현대시의 한 장르로 확고히 자리잡게 한 이병기, 시에 회화성을 도입해 끝까지 밀고 간 김광균, 자폐적 리리시즘의 김영랑 등.

해방 공간과 그 이후의 한국 소설은 만주의 대서사시를 쓴 안수길, 낭만주의적 현실 인식의 황순원, 휴머니즘의 기수 김동리, 도회 취미를 띤 과장적 자기 고백의 손창섭, 뿌리 뽑힌 인간을 탐구한 소외 문학의 최인훈 등으로 요약된다.

시로는 진실 탐구로서의 언어와 불교적 인생관을 천착한 서정주, 메시아를 열망한 박두진, 무의미의 미학을 추구한 김춘수, 소시민의 자기 확인과 항의의 김수영. 소멸의 시학을 추구한 고은, 실험의 작가 박목월 등을 주목한다.

조선조 후기에서 1960년대에 이르는 한국 문학을 조감한 책의 말미. 책은 해방 공간의 이데올로기 문제란 결코 간단치 않음을 다시 상기시키고, 대미 관계와 4ㆍ19의 재해석, 작가들의 전기 연구, 나아가 지성사와 병행하는 문학 연구를 갈망하며 화룡점정에 대신한다.(장병욱 기자)

"내가 지금 읽어봐도 명문이네. (지금껏 판을 바꿔 오면서도) 한 자도 안 고쳤네…." 서문을 읽어 가던 김윤식(71ㆍ서울대 명예 교수) 씨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웃음기가 감돈다. 34년 세월을 변함없이 이어 온 초판의 서문은 이른바 인문학의 위기라는 이 시대를 예감하기라도 한 듯, 비장미마저 감돈다. '문학에 대한 경멸과 백수(白手)에 대한 조소가 그 어느 때보다도 깊어져 가고 있어 보이는 지금, 인간 정신의 가장 치열한 작업장인 문학을 지킨다는 것은….'

"당대의 시대적 과제였던 식민사관 극복 작업에서 국사ㆍ국문학자의 자부심은 대단했어요. 독립 운동한다는 심정이었으니까." 당시 김현씨와 밤 새가며 토론했던 문건이 서울대 규장각이 소장하고 있던 양안(量案ㆍ토지 대장)이었다. 사조나 문단의 흐름이 아니라 사회경제사에 토대를 둔 '과학적 문학사'라는, 미증유의 길은 그렇게 트였다.

"이 책은 전적으로 민족주의적이에요. 문학의 독자성에 대한 고찰이 없다는 게 최대의 약점이랄 수 있을 정도로." 일제와 미군정하 국민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그와, 4ㆍ19 세대인 김현에게 근대화라는 화두는 지고의 이슈였다. 시대 정신에 충실했던 책에 대한 수요는 출간 2, 3년 만에 급상승했다.

내용뿐 아니라, 인세도 한 해씩 번갈아 지급 받을 정도로 이 책을 정확히 공동 소유하는 김현씨. 집필 당시 그와 함께 펼쳤던 풍경은 우리 지성사의 아름다운 순간으로 기억된다. "연구실, 술집 가리지 않고 벌어졌던 토론이었죠. 문학은 물론 경제학, 사회학자들까지 참석했던."

그러나 책의 또 다른 자아(alter ego) 김현의 부재는 그의 가슴을 무겁게 한다. "후배지만 배울 게 많았어요. 아주 작은 원고지에다 늘 글을 쓰고 있었죠. 풍부한 인간성에, 섬세하면서 자상했었는데…." 공조자 김현은 그의 의식 속에 현존하는 듯 했다. "지금껏 얘기들은 김현의 말이 빠진, 내 개인의 생각이므로 부분에 불과해요. 사실 나로서도 그의 의견이 매우 궁금합니다."

김윤식

1936년 경남 진영 출생, 서울대 국어과 졸업
1975년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
2001년 명지대 국어국문학과 석좌교수
주요 저작 <한국 근대 문예 비평사 연구>, <한국 근대 문학 사상사>, <황홀경의 사상> 등

김현

1942년 전남 진도 출생, 서울대 불문과 졸업
1986년 서울대 불문학과 교수
1990년 작고
주요 저작 <현대 한국 문학의 이론>, <시인을 찾아서>, <한국 문학의 위상>, <젊은 시인들의 상상 세계> 등

07. 03. 01.

P.S. 마침 오늘이 3.1절이어서 "당대의 시대적 과제였던 식민사관 극복 작업에서 국사ㆍ국문학자의 자부심은 대단했어요. 독립 운동한다는 심정이었으니까."라는 멘트가 인상적이다(오래전 강의실에서 자주 듣던 회고조의 말씀이기도 하다). <한국문학사>의 초판이 나오던 시점에(도서관소장본은 1974년판이다) 두 저자는 30대 중반의 '청년' 국문학자와 불문학자였다. 누군가 현대는 '에피고넨의 시대'라고도 불렀지만 그만한 패기와 열정으로 무장된 '청년들'을 요즘은 찾아보기 어렵다(조숙한 원로들은 차고 넘친다). 인류의 지성은 혹 진화하는지 모르겠지만(적어도 축적되는지 모르겠지만) 패기/열정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그건 좀 부끄러운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짱꿀라 > ‘문학 속의 서울’

# 문학 속에서 본 서울은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 무척 궁금하다. 1960년부터~2000년까지 서울의 모습. 여러 문인들의 작품 속에는 어떻게 그려져 있을까? 시, 소설, 수필과 같은 작품과 가사와 대중문화로 묘사된 서울의 모습을 만나보자. 이 책 에 쓰여 진 한 구절을 보면 더욱 선명해 질 것이다.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일 뿐만 아니라, 지난 600여 년간 한국 사회의 변동을 꼼꼼하게 기록한 역사 텍스트이기도 하다. 역사 텍스트에는 공식적인 기록과 일상적인 이야기가 공존하지만, 서울의 역사는 공식적인 기록물로서만 존재해왔다. 우리가 문학 텍스트에 형상화된 서울을 읽는 이유는, 마법에 걸린 문학을 통해서 공식성에 가려진 서울의 일상, 삭제된 서울의 구체성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프롤로그)


‘문학 속의 서울’


(2007년 2월 23일 세계일보기사)

한국문학 통해 서울의 변천사 들여다보니…


  문학은 신기하고도 재미있는 예술이다. 가짜인데 진짜 같고, 거짓말인데 현실보다 더 적나라하게 진실을 드러내기도 하니 말이다. 허언(虛言)을 통해 진언(眞言)에 다다르려는 특성 때문에 문학은 종종 역사를 이해하는 2차 텍스트로 이용돼 왔다. 다양한 역사책들을 통해 1970년대 서울 빈민들의 삶을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가짜 이야기인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으면서 그것을 들여다볼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문학작품의 내용을 현실과 단순 등치시킬 순 없다. 문학은 역사 연구자들이 추구하는 ‘사실’을 완벽하게 재현하진 않지만, 거기에 당대의 어떤 ‘진실’이 녹아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문학 속의 서울’은 이와 같은 역사와 문학의 접합지점을 부각시켜 한국문학을 통해 1960년대 이후 서울의 변화를 통시적으로 살펴보고자 기획된 책이다.
개화의 과정을 거친 후 한국문학이 본격적으로 꽃피기 시작했던 시기의 문학작품들 중에서 서울을 소재로 다루고 있는 작품들을 선별하여 써내려간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무엇보다도 원재료의 힘에 있다.


이 책의 기본 에피소드들이 돼 준 문학작품들이 담고 있는 감동과 재미와 공감의 힘, 그것은 이 책 한 권을 엮어 나가는 데 필요한 소중하고도 값진 모자이크 조각들이었다. 거기에 살을 덧붙이는 작업은 물론 필자들의 몫이었다. 문학작품이 내뿜고 있는 진실을 훼손하지 않되 그와 관련된 사실들을 가이드해 주는 것은 단순히 원재료에 양념을 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재조직화하여 새로운 의미들을 만들어내는 작업이었다.


한국문학과 서울의 역사, 이 두 마리 토끼 사이에서 둘 다 포기하지 않되 이들 사이의 조합을 만들어내기 위해 필자도, 편집자도, 디자이너도 정신없이 매진하다 보니 어느새 책이 세상에 나와 있다. 모든 편집자들이 그러하겠지만, 책의 출간과 함께 기대도 부풀지만 두려움도 앞선다. 문학이 인간 삶의 밝은 부분보다는 어두운 면을 조명하는 측면이 강하기에 지나치게 무거운 느낌이 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독자들의 눈에 그것이 어떻게 비칠지 모르겠다. 그러나 어쩌면 그 어두움 속에서 느껴지는 ‘서울살이의 짠함’이야말로 이 책을 통해 독자들과 나누고 싶었던 부분이었다. 한국문학 속에, 그리고 서울의 역사 속에 어려 있는 그것이 조금이라도 독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2007년 2월 23일 경향신문기사)

서울 ‘밑바닥서 하늘까지’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은 시대적인 급변을 겪어왔고, 서울은 그 변화의 정중앙에 있던 도시다. 사진 왼쪽부터 거리공연이 펼쳐지고 있는 홍대 앞, 개발되기 전 난곡, 새롭게 단장된 청계천의 모습.

 

▲문학 속의 서울…김재관·장두식


신기하게도, 혹은 아이러니하게도 문학작품은 철저한 허구이면서 한편으로 우리의 현실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문학을 통해 사람들은 가상의 인물, 낯선 세상을 만나지만 그곳은 결국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의 한 단면이다. 문학작품은 ‘문학’ 그 자체인 동시에 훌륭한 ‘역사 텍스트’이다. 서울이라는 도시 역시 한국사에 있어서는 거대한 ‘역사 텍스트’다. 600여년간 수도로서 한국전쟁 이후 인구 1000만의 거대도시가 된 오늘날까지 급속도로 진행된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말해주는 공간이 바로 서울이다. 저자는 문학과 서울이라는 두 거대한 역사 텍스트를 통해 지난 40여년 우리 시대의 생활상을 조명한다.


1960년대. 서울에는 부자들만의 동네인 성북동이 개발되기 시작한다. 콘크리트 옹벽으로 성을 쌓고 다른 이들의 접근을 불허하는 동네가 생기면서 공간은 신분적 차이를 드러내는 상징이 된다. 성북동에서 평창동, 한남동에서 강남으로. 이때부터 공간은 빈부 격차를 가시화하는 기호가 됐다.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는 개발에 의해 삶의 보금자리에서 쫓겨나는 애절한 서민들이다.


1970년대. 오직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영자. “배웠다는 사람들이 더 악마구리떼 같은” 식모생활을 견디다 못해 버스차장이라는 새 직업을 구하지만 만원버스에 매달려가다 그만 한쪽 팔을 잃고 만다. 풍요롭게 변화하는 서울과는 달리 영자의 삶은 밑바닥이다. 영자는 외팔이 창녀로 생활하다 어렵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만, 그와의 행복마저도 이룰 수 없게 되자 불을 지르고 죽음에 이른다. 조선작의 ‘영자의 전성시대’는 당시 서울의 이농민들이 겪었던 최악의 상황을 나타내는 반어적 표현이다.


1980년대. 여동생 융이가 광화문에서 열린 개헌촉진대회에 참가했다 결국 경찰에 연행되고 만다. 어머니는 “서가에서 불온서적부터 치우자”며 나를 재촉한다. 우여곡절끝에 융이가 풀려나자 할아버지는 집안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독립운동가 집안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할아버지는 이중간첩이었고 아버지는 이에 대한 반감으로 철저하게 소시민의 삶을 택했던 것이다. 김만옥의 ‘그리운 거인들’에 등장하는 이 가정은 뒤틀린 현대사의 축소판이요, 당시의 광화문은 민주세력이 집결해야 할 최종 목적지였다.


1990년대. ‘압구정동… 좋게 말하면 이 땅 신흥 자본 상류층의 집단 대명사요, 넘치는 부의 상징이지만 기분대로 부르면 이 땅 끝없는 욕망과 타락의 전시장, 아니 똥통 같이 왜곡된 한국 자본주의가 미덕(?)처럼 내세우는 환락의 별칭적 대명사이다.’ 압구정동 테러리스트는 성도착증 노인, 사치와 향락에 빠진 여대생을 연쇄살인한다. 이순원의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는 욕망과 자본주의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이 밖에도 저자는 다양한 시와 소설, 대중음악의 가사 등을 통해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 이면의 우리 모습을 차분하게 복원해낸다


(2007년 2월 24일 뉴시스기사)

서울 구석구석에 숨어있는 문학

 


<사진>은 영화 ‘아이스케키’의 한 장면이다.

 

‘문학 속의 서울’은 한국문학을 매개로 1960년대 이후 서울의 변화를 꿰뚫어 보는 책이다. 문학으로 살피는 서울의 역사, 그 속에 담긴 인간의 모습이다. 한국문학을 필터로 격변기를 거쳐 간 서울 시민들, 당대의 분위기, 그리고 거기 살았던 사람들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본다.


‘간다/ 울지마라 간다/ 모질고 모진 세상에 살아도/ 분꽃이 잊힐까 밀 냄새가 잊힐까/ 사뭇사뭇 못 잊을 것을/ 꿈꾸다 눈물 젖어 돌아올 것을/ 밤이면 별빛 따라 돌아올 것을’-김지하 ‘서울길’중


가난한 고향을 버리고 상경해 비 맞으며 동대문 거리를 걷는 소년, 달동네 약수터에서 삶의 애환을 나누는 여인들, 혹독한 노동 착취에 고통스러워하며 자신의 몸을 불태우는 노동자, 영동 한복판에서 향락과 퇴폐에 찌든 중년 직장인, 그리고 그것들을 관찰하며 글을 쓰는 작가들이 있다.


‘잠실은 모래로 만들어진 동네이다. 모래 땅에 모래 아파트들이 가득 들어서 있다. 둑을 쌓고 그 위에 아스팔트를 깔아 도로를 내기 전에는 범람한 강물이 여름 잠실을 덮쳐누르곤 했었다. 모래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있다. 잠실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시멘트와 철근이다. 시멘트와 철근을 빼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모래만 남아 흩날리게 될 것이다. 모래는 모래끼리 아무리 뭉치려고 해도 뭉치지 못한다. 슬픈 일이다.’-조세희 ‘민들레는 없다’ 중


60년 이후 ‘문학 속의 서울’은 우울하지만 매우 활기차다. 그 활기는 서울의 양적, 질적 성장 때문이 아니다. 정치적, 경제적 상황의 추상적인 정황보다도, 그 상황 속에서 직접 서울의 땅을 부지런히 걸어 다니며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서울 시민들의 구체적인 삶의 형상 덕이다. 다양한 인물 형상과 구체적인 배경들은 서울의 부분이면서 서울의 전부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갈등을 견디고 헤쳐 가는 인물들의 악전고투는 세상이 어떤 지향을 가지고 발전해야 할 지 암묵적으로 제시해준다.


‘사이렌이 불자 행인들이 걸음을 재촉했고, 완장을 찬 민방위 대원들이 곳곳에서 호루라기를 불었다. 수십 대로 밀려 정차한 버스들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고 주위 행인들이 모두 지하도로 몰려갔으므로 텅 빈 거리로 막 백색의 사이카가 달렸다. 그 뒤로 통제 깃발을 단 군용 지프와 검은 승용차가 따라가고 있었고 민방위 보도 취재반의 방송 이동차가 그 옆으로 천천히 달려갔다.’-강석경 ‘맨발의 황제’중


‘그 거리가 어디에 있는지 안다고 그 거리를 ‘다’ 아는 것은 아니다. 이미 그것은 단순한 동네 이름이 아니다. 이 땅의 ‘압구정동’이나 ‘로데오 거리’ 또한 단순히 그런 지명을 가진 한 동네를 지칭하는 이름이거나 한 거리의 이름 이상의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좋게 말하면 이 땅 신흥 자본 상류층의 집단 대명사요 넘치는 부의 상징이지만, 체면 가릴 것 없이 기분대로 부르면 이 땅 졸부들의 끝없는 욕망과 타락의 전시장, 아니 똥통 같이 왜곡된 한국 자본주의가 미덕(?)처럼 내세우는 환락의 별칭적 대명사이다.’-이순원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중


문학작품은 허구다. 하지만 사회의 전형을 묘파하려 한다는 점에서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서브 텍스트로서 손색이 없다.


(2007년 2월 23일 한겨레기사)

서울아! 아, 서울아!

 

 

  문학작품 속에 그려진 서울의 모습을 다룬 선행 작업으로는 두 권짜리 단행본 <서울을 품은 사람들>(문학의집·서울 펴냄)이 있었다. 수필가 전숙희, 시인 황금찬, 소설가 김용성, 평론가 김우종씨 등 원로 및 중견 문인 156명이 필자로 참여한 이 책은 대체로 일제강점기에서부터 1950, 60년대까지의 서울에 대한 문학적 증언이라 할 법했다. 새롭게 나온 <문학 속의 서울>이 그 책과 자매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 책이 1960년대 이후 서울의 변모와 그에 대한 문학적 대응을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단국대 동양학연구소의 연구교수로 재직 중인 김재관씨와 장두식씨가 공저한 이 책은 서울문화재단이 기획한 ‘서울문화예술총서’의 두 번째 권으로 나왔다.


  인용한 대목에 담긴 취지는 두 가지. 하나는 서울이 대한민국의 축소판이라는 것, 또 하나는 공식 기록이 감추고 있는 구체적 진실을 문학 텍스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60년대 이후의 서울(과 대한민국)의 변모를 관찰하는 눈에 가장 뚜렷하게 다가오는 것은 역시 눈부신 개발과 발전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정치적 부자유와 경제적 불평등을 담보로 한 성취이기도 했다. 지은이들이 서울을 일러 “물적 유토피아이면서 질적 디스토피아”(프롤로그)라 규정하는 까닭이다.


“간다/울지 마라 간다/모질고 모진 세상에 살아도/분꽃이 잊힐까 밀 냄새가 잊힐까/사뭇사뭇 못 잊을 것을/꿈꾸다 눈물 젖어 돌아올 것을/밤이면 별빛 따라 돌아올 것을//간다/울지 마라 간다/하늘도 시름겨운 목마른 고개 넘어/팍팍한 서울 길/몸 팔러 간다”(김지하 <서울 길> 부분)


시인 신동엽의 ‘서울 사랑’


서울의 개발과 발전은 농촌 출신 사람들의 쇄도를 수반했다. 서울이 발전하면서 그들을 끌어들였는가 하면 그들이 서울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서울의 발전이 가속화하기도 했다. 누대에 걸쳐 살아 온 고향과 터전을 버리고 서울로 향하는 이들의 심중에는 설레는 꿈과 함께 앞으로 기다리고 있을 고난과 모욕에 대한 두려움과 체념 또한 엄연히 자리하고 있었음이다. 그렇지만 서울은 고향의 순수와 사랑을 간직하고 있는 이들의 도시이기도 했으니, 시인의 서울에 대한 사랑 고백이 아예 생뚱맞지만은 않은 연유이다.


“그러나 나는 서울을 사랑한다/지금쯤 어디에선가 고향을 잃은/누군가의 누나가 19세기적인 사랑을 생각하면서//그 포도송이 같은 눈동자로 고무신 공장에/다니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신동엽 <서울> 부분)


사당동 산동네를 배경으로 한 정도상의 단편 <서울, 그 어느 쓸쓸한 사랑>에서도 일용직 건설 노동자, 파출부, 봉제공장 노동자, 버스 안내양 등 힘들고 보수 낮은 일에 종사하는 산동네 주민들(이들은 거개가 고향을 등지고 도시로 찾아든 ‘실향민’들이다)은 마을 공동 수도 격인 약수터와 친목계를 매개 삼아 농촌 공동체의 노나메기 정신을 실천에 옮긴다. 그렇지만 대도시 서울의 본질은 역시 아파트라는 주거 형태, 그리고 그것이 상징하는 단절과 비인간화에 있다고 해야 옳으리라. 최인호의 단편 <타인의 방>과 조세희의 <민들레는 없다>는 아파트로 대표되는 인간 관계의 사막화를 음울하게 묘사한다.


“잠실은 모래로 만들어진 동네이다. 모래 땅에 모래 아파트들이 가득 들어서 있다.(…)잠실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시멘트와 철근이다. 시멘트와 철근을 빼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모래만 남아 흩날리게 될 것이다. 모래는 모래끼리 아무리 뭉치려고 해도 뭉치지 못한다. 슬픈 일이다.”(<민들레는 없다> 부분)


박영한·최수철은 ‘층간소음’ 소재로


박영한의 소설 <지상의 방 한 칸>최수철의 <소리에 대한 몽상>은 나란히 아파트 층간 소음을 소재로 삼았지만, 그 접근 방식에서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지상의 방 한 칸>에서 주인공인 소설가는 소음의 방해를 받지 않고 조용히 글쓰기에 집중할 수 있는 방 한 칸을 찾아 서울 변두리와 근교를 샅샅이 훑고 다닌다. 그러나 이런저런 까닭으로 번번이 실패하고, 마지막으로 얻은 김포 어름의 집조차 가구공장이 들어서면서 소음의 공격을 받을 참이다. 결국 그는 소음과 함께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소설이 인간의 소음을 담는 한, 소설가는 인간의 소음을 긍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소리에 대한 몽상>에는 처음부터 층간 소음에 우호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주인공의 위층에 사는 ‘칼귀’ 사내가 그인데, 결국은 그의 감화를 받은 주인공 역시 층간 소음의 긍정적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자신이 고독한 단독자가 아니라 아래위층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는 깨달음이 그것이다.


층간 소음을 고통스러워하거나 거꾸로 그것을 즐기는 서울 시민들은 지하철의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펼쳐 든 스포츠 신문을 곁눈질하거나 민방위 훈련의 사이렌 소리에 쫓겨 걸음을 재촉하거나 한다(강석경 <맨발의 황제>). “허기지고 지친/우리 공돌이 공순이들이/싸구려 상품을 샘나게 찍어두며/300원어치 순대 한 접시로 허기를 달래고/이리 기웃 저리 기웃/구경만 하다가/허탈하게 귀갓길로/발길을 돌”(박노해 <가리봉 시장>)리는 가리봉 시장과 “졸부들의 끝없는 욕망과 타락의 전시장, 아니 똥통 같이 왜곡된 한국 자본주의가 미덕(?)처럼 내세우는 환락의 별칭적 대명사”(이순원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압구정이 사이좋게 공존하는 곳이 또한 서울이다. 이처럼 카멜레온 같고 괴물 같은 서울에 대해 지은이들이 끝내 사랑을 놓지 않는다면 그것은 바로 서울 시민들의 구체적인 삶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1960년 이후의 ‘문학 속의 서울’은 우울하지만 매우 활기차다. 그 활기는 서울의 양적, 질적 성장 때문이 아니다. 정치적, 경제적 상황의 추상적인 정황보다도, 그 상황 속에서 직접 서울의 땅을 부지런히 걸어 다니며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서울 시민들의 구체적인 삶의 형상 때문이다.”(에필로그)

 

‘눈물의 영자’가 ‘바람난 사라’로 - 문학속의 ‘서울사람 변천사’

 



한국 문학사엔 서울 거리를 산책하며 사람들의 삶을 관찰하는 구보씨가 3명 등장한다. 1930년대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처음 등장했던 구보씨는 70년대에 최인훈씨의 동명 작품에서 부활했고, 90년대 주인석씨의 연작소설에 또 나타났다. 이들 3명의 구보씨는 서울이 공룡처럼 커짐과 동시에 여기에 깃든 사람들의 꿈이 날로 작아지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연구교수인 김재관·장두식씨가 펴낸 책 ‘문학 속의 서울’(생각의나무 발행)은 1960년대 이후 서울의 변모를 시를 통해, 소설의 주인공을 통해 생생하게 그려냈다.

 

  문학 속에서 서울의 현실은 대체로 어둡다. 비극적 카타르시스가 희극의 쾌미보다 더 큰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시, 소설이 절실하게 담고 있는 대도시 서민들의 애환은 독자를 우울하게 할 수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안도감을 주는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 속에서 미래의 희망을 껴안아 온 서울 사람의 모습엔 한국인의 꿈이 녹아 있다. 문학작품 속에는 70년대 ‘영자의 전성시대’에서 90년대 ‘즐거운 사라’까지 서울의 시대상을 대표하는 여인들의 눈물과 웃음이 함께 버무려져 있다.

 

  ◆ 1960년대 ‘산업화의 꿈과 그늘’& 70년대의 ‘풍요 속 빈곤’ = 소설과 시에 나타난 60·70년대의 서울은 잘 살기 위한 꿈을 안고 시골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산업화의 상징적 공간이다. 동시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휑하니 바람이 부는, 생존경쟁의 싸움터다.

 

  김승옥씨의 소설 ‘서울, 1964년 겨울’(65년작)이 산업도시로 진입한 서울 시민의 소통부재와 허무감을 담고 있다면, 신동엽의 시 ‘종로 오가’(1967년작)는 고향을 떠나온 소년이 서울에 와서도 소외당하는 상황을 그려냈다. 김광섭의 유명한 시 ‘성북동 비둘기’(68년작)는 요즘도 부촌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는 성북동이 개발되면서 삶의 보금자리를 잃고 <사람들의 애절함을 ‘비둘기’에 비유하고 있다.

 

  70년대의 서울 풍경을 묘파한 수작으로 꼽히는 최인호씨의 소설 ‘타인의 방’(71년작)은 아파트 생활이 주는 편리함과 더불어 익명성으로 인한 이웃과의 단절을 예리하게 파헤치고 있다. 73년에 발표된 조선작씨의 ‘영자의 전성시대’는 시골에서 상경해 식모와 버스 차장을 하다가 왼쪽 팔을 잃어버리고 창녀가 된 영자의 비극적 사랑을 그리고 있다. 조세희씨의 연작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년작)은 도시 하층민들의 삶을 가슴 서늘한 우화로 만들어 이후 200쇄를 찍는 스테디셀러 행진을 하고 있다.

 

◆ 1980년대 ‘시대의 우울’& 90년대의 ‘바람난 도시’ = ‘꽃이라고 하더라도 꽃 같지는 않게/신문 같은 신문 같지는 않게/한국 같은 한국 같지는 않게/시 같은 시 같지는 않게.’

 

  오규원 시인의 작품 ‘서울·1984·봄’은 신군부의 폭압에 바짝 엎드린 서울 시민의 모습을 이같이 표현했다. 오 시인이 이 작품을 90년대에야 발표한 것은 물론 정치상황의 변화를 반영한 것. 86년에 나온 강석경씨의 소설 ‘숲 속의 방’은 반독재 투쟁을 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대학생들의 휴식처가 종로 2가 선술집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양귀자씨의 연작 소설 ‘원미동 사람들’(86년작)은 서울에서 밀려나 교외에서 공동체를 이룬 변두리 사람들의 삶을 생생하게 묘사했으며, 장정일씨는 시‘중앙’과 ‘나’(88년작)를 통해 우리나라 사람들의 중앙, 즉 서울 지향 의식을 통렬히 풍자했다. 

 

  90년대의 서울을 문학 작품은 ‘바람난 도시’로 묘사한다. 91년에 나온 마광수씨의 소설 ‘즐거운 사라’는 여대생의 남성 편력을 통해 신흥 상류 지역으로 부상한 강남권의 기묘한 성 풍속을 드러내고 있다. 이순원씨의 소설‘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92년작)는 압구정동의 세태를 통해 천박한 자본주의의 거품에 빠진 서울의 모습에 경고를 가한다. 97년에 나온 이남희씨의 소설 ‘플라스틱 섹스’는 홍대 앞 라이브클럽을 배경으로 여주인공의 동성애 공표(커밍아웃)과정을 다룸으로써 변화하고 있는 서울의 내부를 들여다봤다.

 

  ◆ 2000년대 ‘희망의 빛을 찾아’ = 김훈씨의 단편소설 ‘배웅’은 2003년도 서울에서 택시운전을 하는 중년 남자 김장수가 주인공이다. 식품회사 대표였던 그는 외환위기 사태 이후 택시를 몰게 됐는데, 사납금 채우기에 언제나 급급해한다. 그에게 서울은 미래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 도시다.  공지영씨의 베스트셀러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2005년작)에서 서울은 성폭력과 빈부갈등이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소돔과 고모라’다. 이 비열한 도시를 누가 구원할 수 있을까. 소설은 평생 감옥에 갇힌 죄인들을 위해 봉사한 모니카 수녀의 헌신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이를 통해 서울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파멸해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의 빛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2007년 2월24일 한국일보기사)

낭만과 우수 그리고 욕망이 버무려진… 문학 속의 서울

 
                             

지금은 이름만 남은 3ㆍ1 고가 도로. 최인훈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한다.
 
한양과 경성, 그리고 서울. 지난 600여 년간 한국 사회의 격동이 가장 정치하게 아로새겨져 있는 텍스트다. 특히 1990년대 이후, 경기도 전체가 수도권으로 편입됐다고 할만큼 저 곳의 놀라운 포식성은 한국 현대사를 상징하기도 한다. 시대적 성감대로서의 문학은 서울의 격변을 어떻게 징후적으로 포착해 왔을까. 문학이 윤리적 모색을 본질로 한다고 할 때, 우리 문학은 격변을 증언하는 최전선에 있다.

 

국문학자 김재관ㆍ장두식 씨는 신동엽의 <종로 오가>와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를 기점으로, 그 풍경과 서정을 기록해 왔다. 먼지만 날리는 고향 땅을 등지고 풀칠이나마 할 요량으로 온 서울 땅에서의 극빈과, 삶의 보금자리를 뺏긴 인간의 모습으로 문학은 서울을 증거했다. 최인호의 <미개인>이 1970년대 중산층의 속물성에 대한 슬픈 자화상이라면, 최인훈은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에서 정체성의 혼돈을 겪는 서울 사람들의 모습을 풍자했다.

 

조선작의 <영자의 전성 시대>에서 서울은 외팔이 창녀에게 비극을 안겨준 범인으로 그려졌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서는 약자들을 잡아 먹는 비열한 포식자로 등장한다. 박완서의 <꽃을 찾아서>는 1980년대 ‘광주’라는 암운 아래서 광풍처럼 막 번지던 강남 개발의 모습을 증언한다. 본문의 친화력은 대중문화 속에 나타난 서울을 논하는 대목에서 두드러진다. 1970년대의 대중음악에 나타난 서울을 논하는 ‘이루어질 수 없는 낭만적 유토피아와 우수’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1970~80년대의 유행가. 양병집의 <서울 하늘>, 패티김의 <서울의 찬가>, 혜은이의 <제3 한강교> 등 당대를 풍미했던 가요가 갖는 의미가 예술사적으로 분석돼 있다.

 

한편 시인들은 권력과 금력에 휘둘리는 서울의 격변을 바라보며 저항의 언어들을 쏘아 올렸다. 김지하의 <오적>이나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은 절망의 서울상을 포착했다. 장정일은 시 <서울에서 보낸 3주일>에서 ‘비에 젖은 서울의 쌍판은 마스카라 번진 창부 같구나’라고 읊었다. 그러나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는 포장된 행복 안에 불행의 씨앗을 간직하고 있음을 문학은 증언했다. 메이드 인 아메리카의 천국인 서울(김주영의 <서울 구경>), 성 정체성의 극심한 혼란(이남희의 <플라스틱 섹스>), 거품처럼 끓어 나는 욕망 공간(이순원의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나이트클럽과 비밀 요정이 지배하는 곳(마광수의 <즐거운 사라>) 등으로 1990년대 이후의 서울은 문학을 통해 변주된다.

 

우리 시대 문학은 현재와 불화할 수밖에 없다. 압구정동에 이르러 책은 이렇게 말한다. “빈부의 양극화가 한국의 주요한 사회 문제가 되었지만, 오늘도 우리는 ‘욕망이 평등한 사회’에서 꿈을 꾼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강박 관념속에서….”

 

수록된 글은 단국대 교지에 실렸던 연재물이다. 군더더기 없는 서술과 대중적 친화력은 언론의 손길을 거쳤다는 점에도 기인한다. 두 저자는 이 대학 동양학연구소의 연구 교수이기도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I. 문학

01. D.H.로렌스 / 아들과 연인 / 1913
02. 루쉰 / 아큐정전 / 1921
03. 엘리엇 / 황무지 / 1922
04. 제임스 조이스 / 율리시스 / 1922
05. 토마스 만 / 마의 산 / 1924
06. 카프카 / 심판 / 1925
07. 프루스트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1927
08. 버지니아 울프 / 등대로 / 1927
09. 헤밍웨이 / 무기여 잘이거라 / 1929
10. 레마르크 / 서부전선 이상없다 / 1929
11. 올더스 헉슬리 / 멋진 신세계 / 1932
12. 앙드레 말로 / 인간의 조건 / 1933
13. 존 스타인벡 / 분노의 포도 / 1939
14. 리처드 라이트 / 토박이 / 1940
15. 브레히트 /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 1941
16. 카뮈 / 이방인 / 1942
17. 조지오웰 / 1984 / 1948
18. 사뮈엘 베게트 / 고도를 기다리며 / 1952
19.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 롤리타 / 1955
20. 유진 오닐 / 밤으로의 긴 여로 / 1956
21. 잭 케루악 / 길 위에서 / 1957
22. 파스테르나크 / 닥터 지바고 / 1957
23. 치누아 아체베 / 무너져내린다 / 1958
24. 귄터 그라스 / 양철북 / 1959
25. 조지프 헬러 / 캐치 22 / 1961
26. 솔제니친 / 수용소 군도 / 1962
27. 가르시아 마르케스 / 백년 동안의 고독 / 1967
28. 움베르토 에코 / 장미의 이름 / 1980
29. 밀란 쿤데라 / 참으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1984
30. 살만 루슈디 / 악마의 시 / 1989


II. 인문

01. 지그문트 프로이트 / 꿈의 해석 / 1900
02. 페르디낭 드 소쉬르 / 일반언어학강의 / 1916
03. 막스 베버 /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 1920
04. 라다크리슈난 / 인도철학사 / 1923~27
05. 지외르지 루카치 / 역사와 계급의식 / 1923
06. 마르틴 하이데거 / 존재와 시간 / 1927
07. 펑유란 / 중국철학사 / 1930
08. 아놀드 토인비 / 역사의 연구 / 1931~64
09. 마오쩌둥 / 모순론 / 1937
10.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 이성과 혁명 / 1941
11. 장 폴 사릍르 / 존재와 무 / 1943
12. 칼 포퍼 / 열린 사회와 그 적들 / 1945
13.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 계몽의 변증법 / 1947
14. 시몬 드 보봐르 / 제2의 성 / 1949
15. 한나 아렌트 / 전체주의의 기원 / 1951
16.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 철학적 탐구 / 1953
17. 미르치아 엘리아데 / 성과 속 / 1957
18. 에드워드 헬렛 카 / 역사란 무엇인가 / 1961
19.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  야생의 사고 / 1962
20. 에릭 홉스봄 /  혁명의 시대 / 1962
21. 에드문트 후설 / 현상학의 이념 / 1964
22. 미셸 푸코 / 말과 사물 / 1966
23. 노엄 촘스키 /  언어와 정신 / 1968
24. 베르터 하이젠베르크 / 부분과 전체 / 1969
25.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  앙티오이디푸스 / 1972
26. 에리히 프롬 / 소유냐 삶이냐 / 1976
27. 에드워드 사이드 / 오리엔탈리즘 / 1978
28. 페르낭 브로델 /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 1979
29. 피에르 부르디외 / 구별짓기 / 1979
30. 위르겐 하버마스 / 소통행위이론 / 1981


III. 사회

01. 브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 무엇을 할 것인가 / 1902
02. 프레드릭 윈슬로 테일러 / 과학적 관리법 / 1911
03. 안토니오 그람시 / 옥중수고 / 1926~37
04. 라인홀트 니버 /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 1932
05. 존 메이너드 케인스 / 고용, 이자, 화폐 일반이론 / 1936
06. 윌리엄 베버리지 / 사회보험과 관련 사업 / 1942
07. 앙리 조르주 르페브르 / 현대세계의 일상성 / 1947
08. 앨프리드 킨지 / 남성의 성행위 / 1948
09. 데이비드 리스먼 / 고독한 군중 / 1950
10. 조지프 슘페터 /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 1950
11. 존 갤브레이스 / 미국의 자본주의/ 1951
12. 대니얼 벨 / 이데올로기의 종언 / 1960
13. 에드워드 톰슨 / 영국노동계급의형성 / 1964
14. 마루야마 마사오 /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 1964
15. 마셜 맥루헌 / 미디어의 이해 / 1964
16. 케이트 밀레트 / 성의 정치학 / 1970
17. 존 롤스 / 정의론 / 1971
18. 이매뉴얼 위러스틴 / 세계체제론 / 1976
19. 앨빈 토플러 / 제3의 물결 / 1980
20. 폴 케네디 / 강대국의 흥망 / 1987

IV. 과학

01. 알버트 아인슈타인 / 상대성원리 / 1918
02. 노버트 비너 / 사이버네틱스 / 1948
03. 조지프 니덤 / 중국의 과학과 문명 / 1954
04. 토머스 쿤 / 과학혁명의 구조 / 1962
05. 제임스 워트슨 / 유전자의 분자생물학 / 1965
06. 제임스 러브록 / 가이아 / 1978
07. 에드워드 윌슨 / 사회생물학 / 1980
08. 칼 세이건 / 코스모스 / 1980
09. 이리야 프리고진 / 혼돈으로부터의 질서
10. 스티븐 호킹 / 시간의 역사 / 1988


V. 예술,기타

01. 헬렌 켈러 / 헬렌 켈러 자서전 / 1903
02. 아돌프 히틀러 / 나의 투쟁 / 1926
03. 마하트마 간디 / 자서전/ 1927~29
04. 에드거 스노우 / 중국의 붉은 별 / 1937
05. 아놀드 하우저 /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1940~50
06. 안네 프랑크 / 안네의 일기 / 1947
07. 에른스트 한스 곰브리치 / 서양미술사 / 1948
08. 말콤 엑스 / 말콤 엑스의 자서전 / 1966
09. 에른스트 슈마허 / 작은 것이 아름답다 / 1975
10. 넬슨 만델라 / 자유를 향한 긴 여정 / 199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에로이카
기인님, 안녕하세요.. ^^ 이진경의 <자본을 넘어선 자본>의 한 부분이 도움이 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책에 이진경이 임노동자 계급과 프롤레타리아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를 다루는 부분이 있어요 (235쪽 이후, 혹시 관심 있거든 보시고, 책이 없다면 제가 밑줄긋기 해놓은 게 있으니 한번 찾아보세요..). 저는 사실 이진경이 "이 시대의 프롤레타리아(소수자 / 비-계급)는 이 시대의 부르주아지(다수자 / 계급)를 뺀 전부다"라는 주장이 별로 말해주는 것도 없고, 이래저래 문제도 많게 들려서 별로 수긍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책 240-1쪽을 보면 발리바르가 맑스가 <자본>에서 어떻게 프롤레타리아와 임노동자계급을 구분해서 썼는가를 설명하는 부분이 나와요. 프롤레타리아트는 기인님께서 아시는 바대로 무산자입니다. 하트와 네그리는 Vogelfrei라고 부르고요...

제 생각에 님께서 혼란스러워 하시는 지점은 "1848년 당시 혁명적 시국에서 정치적 팸플렛이었던 <공산주의 선언>에서 접합되어 동일시되었던 프롤레타리아와 임노동자가 과연 오늘날에도 동일시될 수 있는가?" 하는 지점인 것 같아요.. 맞나요? ^^ "부르주아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임노동자는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다" 라는 것이 이진경의 입장이고, 저는 잘은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당시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서나 가능했던 현실적 접합 (혹은 정치적 구성)을 과연 이 시기에 쓸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입니다. 거기에도 어떤 지혜가 있겠지만, 21세기의 현실을 19세기의 언어로 재단하기에는 무리입니다. 쫌 심하게 말하면, 불행히도 "우리의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 이 시대 좌파들의 관성이고 사대주의입니다.

이건 그냥 제 짧은 생각이니 괘념치 마세요...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 2007-03-01 07:03 삭제
 
기인
옷 에로이카님 안녕하세요. :) 흠 사실 혼란스러워하는 부분이라기 보다는, 무산자=임노동자라고 호명하는 배후에는 정치적 의도성(효과)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임노동자와 무산자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사실 '프롤레타리아'와 '무산자'도 구분할 수 있는데, 이는 혁명적 주체성의 여부로 나뉠 수도 있습니다. 즉 대자적 계급으로서, 정치적 계급으로서의 pt와 즉자적 계급으로서의 무산자로요.
에로이카님 말씀처럼 임노동자=무산자라고 호명했던 당대 정치적, 이론적 배경이 물론 있었고, 지금도 그게 통용될 지는 정말 미지수입니다. ㅋ 그러니까 공부해야 되는 것이겠지요.
요즘은 조합주의에 관심이 많은데. 베네주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전망으로 삼을 수 있을지. 관심만 갖고 있는 수준입니다. 빨리 이 부분을 공부하고 싶어욧!
(현실에 억매인 -_-;;; ) 어쨌든 좋은 지적해주셔서, 페이퍼로 따로 정리하겠습니다. - 2007-03-01 10:46 수정  삭제

 

결국 pt라는 개념에 현대의 맑스주의 이론가들도 '집착'하는 이유는, pt의 혁명적 주체성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pt는 형성되어야 하는 계급이고 '비계급'이라는 것 또한, 이 pt라는 것은 즉자적인 생산수단의 비소유에서 대자적인 혁명적 주체성으로 형성되어야 할 존재라는 데 있다.

맑스가 'pt'라고 하면서 임금노동자를 호명한 것은, 자본주의의 '과학적' 발전 과정에 따라 그들은 모두 pt가 되어가는 것이며, 임금노동자들 중 전위가 바로 pt이기 때문이다. 결국 임금노동자가 자본주의를 뒤업는 pt(대자적 계급)가 되기를 바라는 호명, 그것이 공산주의 선언 아닐까. 왜냐하면 실제 'pt'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맑스는 항상 룸펜 pt와 pt를 구분한다. 맑스에게 룸펜 pt는 사회의 '쓰레기'로까지 언명되는 집단이며, 그들의 속성상 pt보다는 지배계급의 농간에 따라 움직이는 이들을 의미한다. (파리 꼬뮌때 반혁명의 선두에 섰던 룸펜 pt들에 대한 기억...) 사실 이는 단순한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에 따라 그들의 정치성이 결정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다만, '무산자'들이 'pt'로 주체화 되는 것은 '필연적' 수순, 또는 그렇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맑스와 같은 당대 '공산주의자'들의 역할이었던 것.

이 '공산주의자'라는 주체도 애매한데, 공산주의 선언의 2장에서는 그들에 대해 서술되고 있지만, 여러가지 의문만을 던지게 할 뿐이다.

II.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들

문제적 부분. 공산주의자를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에 따라서, 당-국가, 전위의 문제들이 나타난다. (사실 이런 문제는 어찌보면 스콜라적 문제일 수 있다. 맑스가 ‘어떻게’ 말했느냐가 중요하다기 보다는, 실제 실천에서 어떤 것이 더 적합했느냐의 문제. 그러면 그 ‘적합성’은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해보면 아는 것일까?)

‘공산주의자’라는 주체는 어디서 왔는가? pt 전체의 이해 관계로부터 분리된 이해 관계는 갖지 않으며, pt운동을 짜 맞추고자 하는 바의 특수한 원리를 세우지 않으면서, ‘항상 운동 전체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점에서만 다른 pt 정당과 구별’되는 그들. 또는 그 집단.

그들은 ‘이론적으로는 pt 운동의 조건들, 진행 및 일반적 결과들에 대한 통찰을 여타 pt 대중에 앞서서 가진다.’ ‘공산주의자들의 당면 목적은 다른 모든 pt 정당들의 그것과 동일하다. pt의 계급으로의 형성, Bg 지배의 전복, pt에 의한 정치 권력의 장악.’

공산주의자와 pt는 다른가 같은가? 결국 ‘혁명적 주체’라는 정체성은 누구에게 있는가.

또 pt라는 계급은 대상성으로 대상적으로 규정된다. 생산수단의 무소유(비소유?). 이러한 pt를 주체화하는 몫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돌아간다. pt의 계급으로서의 형성. (즉 이때는 주체로서의 형성) 이러한 pt가 주체(정치-주체)로 된 이후에, 정치권력을 쥐고 pt독재가 일어난 후, 이 pt독재의 궁극적 목적은 모든 계급의 철폐, 이고 ‘사물의 관리’로의 이행, 즉 다시 정치의 측면에서 ‘비주체화’, 대상으로 돌아간다. (420~421면)

자기 자신의 폐지를 위한 것. 그 매개로서의 또 ‘당’이 등장해야 하는가? 그렇다고 해도, 그러면 당은 당을 없애기 위한 정치를 해야 하는데, 마치 우로보스의 뱀같이, 두 대가리가 서로 먹어들어가다가 없어지는 것? 결국 ‘사물의 관리’하는 정부로의 점진적(?) 이행은 pt독재 후에 가능한가? 아니면 다시 ‘영구혁명’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보직은 공부라서. 보통 새벽 6시부터 밤 9시까지 공부한다. 그런데 정말 공부량은 적다. 영어 실력이 원서를 술술 읽을만큼도 아니고, 국역본의 짜증을 참아낼 만큼도 아니라서, 이 둘을 대조하면서 읽다보니 정말 시간 잘 간다. 그리고 하루 세끼를 먹고 (대충 해먹지만 그럭저럭 1시간씩 3시간...) 일주일에 3일정도는 밖에 나간다. (근무지 빼고;; ) 하루에 4일정도는 꼬박 책만 읽는 셈. 그래도 '내가 하고 싶은 공부' 또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지는 못한다.

어쨌든 밥벌이로는 논술, 교양 등을 가르치니 관련 책 또는 학생들한테 읽힐 책이 일주일에 3권 정도. 이것도 많다. '교양 논술'로 이번주에 읽은 책들이

풍요로운 가난, 나는 아프리카로 간다,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로마인 이야기 6

그리고 세미나 하는 것으로 읽는 책들이

자본론 1-상, 공산주의 선언, 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

딴은 문학도라고(왜 딴은?) 뒤적이고 있는 문예들

 

그런데. 정말 니가 지금 공부하고 싶은 것은 뭐야? 라고 한다면. 베네주엘라의 조합주의. 남한 20~30년대 조합주의 운동. 조합주의의 가능성. 생디칼리즘과 파시즘. 조합주의가 정말 가능한가. 우리는 그곳으로 갈 수 있는가. 등.

어쨌든. 새삼 소년이로학난성. 이라고 느끼는 것은. 10대때는 가요와 팝이. 20대초에는 힙합과 랩이. 20대 중반에는 음악이 같이 할 시간이 없었다면. 이제 후반인 지금은 가요도 팝도 힙합도 랩도 못 듣겠고. 클래식을 듣다가 눈물이 나고 그런다. 지금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1악장 계속 듣고 있는 중.

시간이 흐르는 것인지, 내 아비투스가 문화자본의 축적과 함께 변화하고 있는 것인지..

아.. 영어 과외하러 가야겠다. -_-;;;;


댓글(5)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인 2007-02-28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여기다 맑스주의 문예이론 세미나를 조직하려고 하니...
아무래도 자본론은 혼자 읽어야 할 듯. 사실 자본론 핵심 내용은 다 기억나니 뭐.. 경제학도랑 읽으면서 새롭게 읽어보려 했는데. 실질적으로 시간이 없으니 패스. 피아노도 못 치고 있다. 운동은 해야 할 것 같아서 탁구만 치고 있는 중. 바쁘다.
그래도 뭐. 나는 고요한게 좋다. 여기에 애인만 남한에 있었으면 ㅎ

기인 2007-02-28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일은 공휴일이니, 근무지 문열고 닫으러 가지도 않을테니. 정말 말그대로 방 밖으로 한 발짝도 안 나가겠구나! 그래도. 목요일 세미나 하는 것 다 읽고 발제하려면 빠듯하다... -_-;;;; 인생.

기인 2007-02-28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근데 만으로 하면 난 아직 20대 중반 ㅋㅋㅋ
뭐. 아직 소년이로 학란성 말할 때는 아니군! :)

비로그인 2007-02-28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몇권이지?... 12권이적다니요! ㅋ 내 전성기(?)때 보다 더 많이 읽으시는 것 같은데 헤헤 ..기인님 나이는 20대라는 건 알겠는데.. 26?..... 27?...... 29? 인가요?

기인 2007-03-01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공부로 읽는 것 적고, 비공부(?)로 읽는게 많습니다 ㅜㅠ
ㅋㅋ 나이는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