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이카
기인님, 안녕하세요.. ^^ 이진경의 <자본을 넘어선 자본>의 한 부분이 도움이 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책에 이진경이 임노동자 계급과 프롤레타리아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를 다루는 부분이 있어요 (235쪽 이후, 혹시 관심 있거든 보시고, 책이 없다면 제가 밑줄긋기 해놓은 게 있으니 한번 찾아보세요..). 저는 사실 이진경이 "이 시대의 프롤레타리아(소수자 / 비-계급)는 이 시대의 부르주아지(다수자 / 계급)를 뺀 전부다"라는 주장이 별로 말해주는 것도 없고, 이래저래 문제도 많게 들려서 별로 수긍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책 240-1쪽을 보면 발리바르가 맑스가 <자본>에서 어떻게 프롤레타리아와 임노동자계급을 구분해서 썼는가를 설명하는 부분이 나와요. 프롤레타리아트는 기인님께서 아시는 바대로 무산자입니다. 하트와 네그리는 Vogelfrei라고 부르고요...

제 생각에 님께서 혼란스러워 하시는 지점은 "1848년 당시 혁명적 시국에서 정치적 팸플렛이었던 <공산주의 선언>에서 접합되어 동일시되었던 프롤레타리아와 임노동자가 과연 오늘날에도 동일시될 수 있는가?" 하는 지점인 것 같아요.. 맞나요? ^^ "부르주아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임노동자는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다" 라는 것이 이진경의 입장이고, 저는 잘은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당시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서나 가능했던 현실적 접합 (혹은 정치적 구성)을 과연 이 시기에 쓸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입니다. 거기에도 어떤 지혜가 있겠지만, 21세기의 현실을 19세기의 언어로 재단하기에는 무리입니다. 쫌 심하게 말하면, 불행히도 "우리의 언어"가 존재하지 않는 이 시대 좌파들의 관성이고 사대주의입니다.

이건 그냥 제 짧은 생각이니 괘념치 마세요...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 2007-03-01 07:03 삭제
 
기인
옷 에로이카님 안녕하세요. :) 흠 사실 혼란스러워하는 부분이라기 보다는, 무산자=임노동자라고 호명하는 배후에는 정치적 의도성(효과)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임노동자와 무산자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사실 '프롤레타리아'와 '무산자'도 구분할 수 있는데, 이는 혁명적 주체성의 여부로 나뉠 수도 있습니다. 즉 대자적 계급으로서, 정치적 계급으로서의 pt와 즉자적 계급으로서의 무산자로요.
에로이카님 말씀처럼 임노동자=무산자라고 호명했던 당대 정치적, 이론적 배경이 물론 있었고, 지금도 그게 통용될 지는 정말 미지수입니다. ㅋ 그러니까 공부해야 되는 것이겠지요.
요즘은 조합주의에 관심이 많은데. 베네주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전망으로 삼을 수 있을지. 관심만 갖고 있는 수준입니다. 빨리 이 부분을 공부하고 싶어욧!
(현실에 억매인 -_-;;; ) 어쨌든 좋은 지적해주셔서, 페이퍼로 따로 정리하겠습니다. - 2007-03-01 10:46 수정  삭제

 

결국 pt라는 개념에 현대의 맑스주의 이론가들도 '집착'하는 이유는, pt의 혁명적 주체성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pt는 형성되어야 하는 계급이고 '비계급'이라는 것 또한, 이 pt라는 것은 즉자적인 생산수단의 비소유에서 대자적인 혁명적 주체성으로 형성되어야 할 존재라는 데 있다.

맑스가 'pt'라고 하면서 임금노동자를 호명한 것은, 자본주의의 '과학적' 발전 과정에 따라 그들은 모두 pt가 되어가는 것이며, 임금노동자들 중 전위가 바로 pt이기 때문이다. 결국 임금노동자가 자본주의를 뒤업는 pt(대자적 계급)가 되기를 바라는 호명, 그것이 공산주의 선언 아닐까. 왜냐하면 실제 'pt'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맑스는 항상 룸펜 pt와 pt를 구분한다. 맑스에게 룸펜 pt는 사회의 '쓰레기'로까지 언명되는 집단이며, 그들의 속성상 pt보다는 지배계급의 농간에 따라 움직이는 이들을 의미한다. (파리 꼬뮌때 반혁명의 선두에 섰던 룸펜 pt들에 대한 기억...) 사실 이는 단순한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에 따라 그들의 정치성이 결정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다만, '무산자'들이 'pt'로 주체화 되는 것은 '필연적' 수순, 또는 그렇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 맑스와 같은 당대 '공산주의자'들의 역할이었던 것.

이 '공산주의자'라는 주체도 애매한데, 공산주의 선언의 2장에서는 그들에 대해 서술되고 있지만, 여러가지 의문만을 던지게 할 뿐이다.

II.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들

문제적 부분. 공산주의자를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에 따라서, 당-국가, 전위의 문제들이 나타난다. (사실 이런 문제는 어찌보면 스콜라적 문제일 수 있다. 맑스가 ‘어떻게’ 말했느냐가 중요하다기 보다는, 실제 실천에서 어떤 것이 더 적합했느냐의 문제. 그러면 그 ‘적합성’은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해보면 아는 것일까?)

‘공산주의자’라는 주체는 어디서 왔는가? pt 전체의 이해 관계로부터 분리된 이해 관계는 갖지 않으며, pt운동을 짜 맞추고자 하는 바의 특수한 원리를 세우지 않으면서, ‘항상 운동 전체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점에서만 다른 pt 정당과 구별’되는 그들. 또는 그 집단.

그들은 ‘이론적으로는 pt 운동의 조건들, 진행 및 일반적 결과들에 대한 통찰을 여타 pt 대중에 앞서서 가진다.’ ‘공산주의자들의 당면 목적은 다른 모든 pt 정당들의 그것과 동일하다. pt의 계급으로의 형성, Bg 지배의 전복, pt에 의한 정치 권력의 장악.’

공산주의자와 pt는 다른가 같은가? 결국 ‘혁명적 주체’라는 정체성은 누구에게 있는가.

또 pt라는 계급은 대상성으로 대상적으로 규정된다. 생산수단의 무소유(비소유?). 이러한 pt를 주체화하는 몫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돌아간다. pt의 계급으로서의 형성. (즉 이때는 주체로서의 형성) 이러한 pt가 주체(정치-주체)로 된 이후에, 정치권력을 쥐고 pt독재가 일어난 후, 이 pt독재의 궁극적 목적은 모든 계급의 철폐, 이고 ‘사물의 관리’로의 이행, 즉 다시 정치의 측면에서 ‘비주체화’, 대상으로 돌아간다. (420~421면)

자기 자신의 폐지를 위한 것. 그 매개로서의 또 ‘당’이 등장해야 하는가? 그렇다고 해도, 그러면 당은 당을 없애기 위한 정치를 해야 하는데, 마치 우로보스의 뱀같이, 두 대가리가 서로 먹어들어가다가 없어지는 것? 결국 ‘사물의 관리’하는 정부로의 점진적(?) 이행은 pt독재 후에 가능한가? 아니면 다시 ‘영구혁명’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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