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독서계에 잔잔한 선풍을 일으키는 철학자가 있다. 지식소설의 국내 소개자이자 철학으로 영화읽기를 실천하는 김용규 씨다. 그는 영화와 철학을 접목시킨 ‘영화관 옆 철학카페’(이론과실천, 2002), ‘데칼로그’(바다출판사, 2002),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이론과실천, 2004)를 펴냈고, 지식소설인 ‘알도와 떠도는 사원(전2권)’(이론과실천, 2001), ‘다니’(지안, 2005)를 동생인 불문학자 김성규 씨와 공동으로 만들어냈고, 청소년 시리즈물인 ‘철학통조림(전4권)’(주니어김영사, 2006)을 쓰기도 했다.
웬만큼 책을 찾아 읽는 독자들에게 김용규는 익숙한 이름이다. 최근엔 문화예술위원회가 운영하는 청소년문학사이트 ‘글틴’에 연재한 글을 묶어낸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웅진지식하우스, 2006)로 대중적 명성까지 얻었다. 그 덕택에 5년 전 잠시 주목을 받았지만 시장진입에는 성공하지 못한 그의 데뷔작 ‘알도와 떠도는 사원’이 웅진지식하우스에서 새로운 옷을 입고 나와 지식판타지소설의 원조 주자로 부각되기도 했다.
베일에 싸인 철학자 김용규와의 좌충우돌 만남
그런 그가 2007년 신년에 한겨레에 칼럼을 쓰며 사진을 공개했다. 엄격해보이는 얼굴 외곽선에 차분한 눈빛과 인상이 담겨있었다. 이것은 나에게 약간은 충격이었다. 워낙 언론과의 인터뷰라든지 원고청탁 같은 걸 거부해왔던 그였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출판저널과 교수신문에 있을 때 접촉을 시도했지만 출판사에서 연결시켜주지 않아 실패했던 기억에 근거한 판단이기도 하지만, 그의 행보가 워낙 두문불출 스타일이기도 했던 탓이다.
첫 책인 ‘알도와 떠도는 사원’에 나오는 저자소개를 보면 독일 프라이부룩 대학과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전공했다고 짧게 나와 있고, 최근의 책을 보면 비교적 자세히 나와 있다는 게 “자그마한 정원이 있는 예쁜 벽돌집에서 피아니스트인 아내와 호기심 많은 딸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 정도다. 그의 책을 전부 다 읽는 애독자로서는 그가 왜 독일에서 대학을 나왔고, 왜 교수가 되지 않았으며, 어떤 사회적인 경력을 쌓았는지 등등이 궁금하게 마련인데 전혀 충족되지 않는다.
이 칼럼을 접한 이후 혹시나 싶어 신문기사 검색을 해보니 ‘다니’가 출간된 2005년 경향신문에 인터뷰기사가 실린 게 보인다. 김용규·성규 형제가 “예쁜 벽돌집”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다. 한겨레 사진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이 사진을 보니, 딱 글 읽고 쓰고 커피 마시고 한 번씩 산보하면서 사는 사람이다. 일순간 부러운 마음부터 든다. 그러나 이 인터뷰도 책을 중심으로 진행돼 개인적 신상정보는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그는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는 친근한 랍비의 이미지를 굳히고 있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여전히 베일에 싸인 신비한 아웃사이더다.
이번 글을 쓰기 위해서 나는 꽤 많은 준비를 했다. 우선 몇 년 전엔가 보다가 잠들어버렸던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희생’을 눈이 벌개져서 완람(完覽)했다.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가 타르코프스키 영화 7편에 대한 해설서이기 때문에 도저히 영화를 안볼 수가 없었는데, 생각보단 재미가 있어 나도 이제 엔간한 텍스트엔 질리지 않는 경지(?)가 됐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친김에 ‘안드레이 루블료프’와 ‘이반의 어린시절’도 봐버렸다. 그리고 나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속도감 있게 읽혔다. 이 책은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론이기도 한 ‘봉인된 시간’이 아주 많이 인용되고 있다. 그 시적인 문장에 실린 철학적 신념의 건강함이란 거의 충격에 가까웠다. 거기에 비하면 김용규가 풀어놓는 글들은 덧글에 불과할 정도다. 김용규는 이 책에서 자신은 조연으로 물러난다. 거의 절반을 영화 줄거리 요약과 ‘봉인된 시간’의 명구들에게 내주면서 독자를 타르코프스키와 만나게 해준다. 이런 태도는 또 하나의 미덕이라는 생각을 했다. 영화와 관계된 철학자들도 언급되는데, 예를 들면 마르쿠제, 하르트만과 키에르케고르, 하이데거와 라캉 등이 아주 쉽고 명쾌하게 해설된다.
‘데칼로그’(십계의 원어)를 읽는 과정에선 밝히기 부끄러울 정도로 아주 쇼를 했다. 책을 덥석 집어 들고 누웠는데 이 책도 영화 ‘십계’에 대한 해설서가 아닌가. 도서관에서 빌려올 땐 미처 몰랐는데 말이다. 다시 벌떡 일어나서 인터넷을 뒤졌다. 영화 ‘왕과 나’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던 대머리 율 브리너가 이집트왕으로 나오고 영화 ‘벤허’의 영웅 찰튼 헤스톤이 모세의 역할을 맡은 장장 2백20분짜리 영화다. 출애굽기를 영상화한 이 영화는 내용도 얼추 알고 고대 이집트가 흥미진진하게 재현되어서 한달음에 다 봐버렸다. 보고 나니 새벽 4시인데 어릴 때 텔레비전에서 본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도 어릴 때 봐서 그런지 또 봐도 재미있다. 나름대로 만족하고 책을 펴들었다. 그런데 다시 벌떡 일어나버렸다. 이 책은 폴란드 영화감독 키에슬로프스키가 텔레비전용으로 만든 10부작 영화인 ‘십계’를 다루고 있지 않은가. 그 십계는 출애굽기의 십계가 아니라, 여호와가 던진 열 개의 잠언을 현대적인 일상 속에서 재해석한 아티스틱한 영화였다. 한마디로 “그 십계가 아닌가벼”이다.
분석과 해석의 차이, 혹은 철학이 영화를 읽는 이유
엉뚱한 2백20분짜리 영화를 본 것도 억울한데, 도합 6백분도 넘는 영화를 또 봐야 한다니 아득해져 왔다. 키에슬로프스키란 이름은 타르코프스키를 능가할 정도로 발음도 쉽지 않고 북유럽의 음습한 분위기인지라 더 엄두가 나질 않았다. 아마 인터넷을 뒤지다가 키에슬로프스키의 십계 연작 중의 하나가 ‘욕망이라는 모호한 대상’이라는 극장용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포기했을 수도 있다. 이 영화는 내가 예전에 봤던 영화다. 아파트 맞은편에 사는 여자를 훔쳐보며 사랑하는 남자와 그 사실을 알게 되는 여자의 이야기다. 남자와 친해진 여자는 어느 날 맞은편 남자의 아파트에 들렀다가 창가에 놓인 망원경을 보게 된다. 눈을 갖다 대니 자신의 아파트 거실이 환히 보인다. 거기서 어느 날 밤 식탁에 앉아 어깨를 들먹거렸던 한 여자가 보인다. 그렇게 여자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남자가 사랑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이 마지막 부분이 전율스러웠다. 데칼로그에 대한 그런 식의 재해석이라고? 용기를 내어 다시 인터넷을 뒤졌다.
이 10부작 연작을 4편을 보고 나서야 나는 김용규라는 사람에게 어느 정도 친근감이 들었다. 이것은 지면에 공개되는 그의 사적 이력을 통해서 갖는 친근감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마치 그 사람의 전생을 엿보는 듯한 내밀한 관음증의 쾌락까지 동반하는 것이었다.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을 잘 아는 사람들은 김용규에게 어떤 동질감 같은 걸 느끼겠지만, 나는 그가 던져놓은 아리아드네의 실을 잡고 철학적 미궁 속으로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여기서 나타나듯 그는 영화를 사랑하는 철학자이고 그가 좋아하는 영화는 예술로서의 영화다. “감독은 일종의 철학자가 되었을 때에만 비로소 예술가인 것이며, 그의 영화는 예술이 될 수 있다”는 타르코프스키의 말을 자주 인용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철학이야말로 최고의 문예이다”라는 플라톤 ‘파이돈’의 한 구절을 즐겨 사용한다. 그의 텍스트를 훓어내리다 보면 그가 ‘분석’과 ‘해석’을 엄중하게 구분하는 장면을 몇 번 마주치게 된다. 분석은 해당 장르의 전문평론가들이 하는, 쇼트의 개수, 카메라의 위치와 주제의 재현방식 등을 전문적으로 파악해내는 작업이다. 그에 비해 해석이란 한단계 더 나아가서 영화의 철학적 주제를 삶의 전망과 만나게 하는 작업이다.
상징적 조작으로서의 영화와 미장센으로서의 영화
그것은 러시아 초현실주의의 위대한 감독 에이젠슈테인에 대한 타르코프스키의 혹평과 그에 대한 김용규의 동의로 나타난다. 에이젠슈테인은 영화 ‘노란 잠수함’ 등등에서 온갖 상징을 배치해놓는다. 거기에 대해 타르코프스키는 “나는 에이젠슈테인의 지적 작업방식, 쇼트 속에 암호식으로 표현하는 작업방식에 원칙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몽타주 수법은 문학이나 철학과는 달리 영화 특유의 수용방법을 근거로 하여 영화가 관객에게 제공할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을 빼앗아가버린다. 그의 생각은 전제주의적이다”라고 비판한다. 나도 이 부분에는 적극 동감한다. 평론가들은 영화의 어떤 장면에 대해 감독이 어떤 용도로 삽입한 의도적 표현이라는 식의 해설을 많이 한다. 그런 걸 자주 접하다보니 영화를 보면 스토리나 장면의 전체적인 분위기보다는, 매우 국부적인 사물이나 행동에 관심을 기울이는 습관이 생겨났다. 남자와 여자가 어떤 호텔방에 들어갔는데, 그 호텔방 번호가 608호면 그 ‘608’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가지고 낑낑대는 습관이다. 메트릭스에 담긴 철학적, 신화적 요소들이 무엇인지를 가지고 떠들썩했던 지난날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만약 그런 것들이 감독의 의도된 액세서리라 할지라도, 영화를 보고 읽는 즐거움과는 사실 따지고 보면 관련이 그리 깊지는 않다. 영화란 결국 하나의 이야기이고 풍경인 것이다. 그런 기본적인 본질을 벌써부터 알았기에 김용규는 “타르코프스키에게 있어서 예술은 예술을 넘어, 정치를 넘어, 종교를 넘어 인류를 위한 구원의 마지막 가능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일상의 문법에 지적인 테러를 가하는 상징행위는 그에 비하면 지적 유희에 불과할 뿐이다.
김용규는 이런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예술관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으며, ‘예술로서의 철학과 철학으로서의 예술’을 일치시키는 경지가 그가 철학을 하는 최종적인 목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해석이라는 방법은 바로 예술을 철학화하는 주요한 수단이다. 이걸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영화 ‘희생’의 마지막 장면이다. 여기 등장하는 주인공 악렉산더는 ‘스스로를 희생'하는 전형적인 인간으로 설정되어 있다. 타르코프스키는 여섯 번째 영화까지 ‘개인적 구원’에 관심을 두었지만, 마지막 영화 ‘희생’에서는 공적인 것을 위한 개인의 희생을 장엄하게 형상화한다. 그것은 다소 판타지적인 환경 설정으로 이어지는데, 바로 전쟁이다.
20세기 초반 인류를 불행의 핵심으로 떠밀었던 전쟁이 아니었던가. 영화 ‘희생’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전쟁의 참화를 경험한 이들이다. 그들은 전쟁이 끝난 폐허 위에 한 그루 희망의 나무를 심으면서, 인간적인 가치와 감수성을 천천히 회복해나가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또 전쟁이 터졌다. 저녁모임을 위해 사람들이 주인공 알렉산더의 집에 모였을 때 텔레비전 긴급뉴스가 방영된다. 때마침 집이 떨리며 비행기가 저공으로 지나간다. 우리의 철학적 주인공 알렉산더는 악몽에 빠져든다. 울면서 신에게 기도한다. “인간이 쌓아놓은 모든 가치와 미덕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이 전쟁을 멈추게 해주신다면 내 모든 걸 버리겠습니다”라고 말이다. 그날 알렉산더는 꿈결에 실려 신비의 여인 마리아를 만나고 돌아온다. 그리고 그 다음날 거짓말처럼 전쟁은 멈췄다. 아니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시간대로 다시 세상이 이동한 것이다.
타르코프스키와 미국식 휴머니즘의 차이
이 엄청난 비밀을 그의 가족들은 전혀 모르고 있다. 그들은 저녁식사모임에서 하던 이야기들, 가령 호주로 이민을 가려고 한다는 등의 얘기를 심각하게 나누고 있다. 알렉산더는 그걸 지켜보며 자신의 기도가 이뤄졌다는 것을, 신이 약속한 바를 이행했다는 것을 점점 깨닫게 된다. 그 다음은 알렉산더가 약속을 이행할 차례다. 그는 가족들이 근처로 산보나간 사이, 집에 불을 붙인다. 벌판 한 복판에 지은 나무로 된 이층집은 바람을 연료삼아 거대하게 타오른다. 장엄한 희생의식이 치러지고, 가족들의 신고로 달려온 정신병원 구급차에 알렉산더는 감금되는 것으로 영화는 종료된다.

이런 자기희생적 태도를 통해 삶의 전망을 회복하는 모티프는 김용규의 저작 전반에 나타난다. 탄자니아에 위치한 동쪽 숲의 벌목으로 서식지를 잃은 침팬지 집단이, 서쪽 숲의 보다 소규모의 침팬지 집단을 전멸시킨다는, 원숭이 제노사이드를 다룬 과학소설 ‘다니’의 주인공이 그렇다. 서쪽 숲의 침팬지들에게 수화를 가르치러 파견된 제니퍼 모건 박사는 원숭이들의 희생 앞에서 침착함과 냉정함을 잃지 않는 제인 구달이 되기보다는, 원숭이 사냥에 적극 맞서다 원주민들에게 얼굴을 난자당해 죽은 선배의 길을 따른다. 광기어린 폭력에 맞선 휴머니즘을 아름답게 그린 이 소설은 생태계의 법칙을 존중하는 과학자의 냉정함에 의문을 던진다. 오늘 우리의 주변을 보라고 김용규는 얘기한다. 온갖 폭력과 욕망이 나부끼는 고통스러운 현실에 맞서는 누군가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없다면 어떻게 세계가 유지되겠느냐는 것이다.
이 소설은 침팬지의 공격성을 통해 인간들의 대량학살을 이해해보자는 시도를 담고 있다. 접근방식은 매우 과학적이다. 이 책 뒷부분의 수많은 과학서적들이 그걸 말해준다. 김용규는 침팬지 혹은 인간이 어떻게 공격성을 띠게 되는 지를 지금까지의 과학적 연구를 통해 소설에 잘 녹여냈다.
그것은 집단학살 본능에 대한 두가지 대립되는 해석이 경쟁하는 과정이다. 하나는 잘 알려진 리처드 도킨스 류의 유전자 결정론이며 다른 하나는 유전자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입장이다. 누가 옳으냐보다는 그 두 흐름을 재고 가늠하는 김용규의 독특한 방식이 눈길을 끈다. 그는 “건전한 지식에는 그와 대립하는 지식이 존재한다. 서로 대립하는 이들 지식쌍은 경쟁하면서 어느 한쪽이 자연도태하지만, 상당수가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새로운 형태로 진화한다. 지식들은 갈등하고 싸우며 승리하거나 패배하고 또 살고 죽는다”라고 말한다. 이 과정을 따라가면서 보여주는 것이 김용규 식의 지식소설인 셈이다.
이것은 김용규가 휴머니스트이지만 과학적 합리주의에도 열려있다는 점을 말해 준다. 그가 철학을 하면서 동시에 신학을 공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지식의 속성이라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이 유달랐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차원에서 내가 김용규에서 발견하게 되는 미덕이 바로 ‘전문성을 활용하는 남다른 방식’이다.
우리 시대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어떤 섹트에 갇혀있다. 서양철학자들 상당수가 플라톤 이래의 이성주의의 전통에 갇혀있으며, 이들은 각각 자기가 전공한 어떤 시대의 철학적 믿음을 신봉하며, 그것을 토대로 해서 그 전후좌우를 통섭하려는 헤겔주의적 지향을 갖고 있다. 그것이 아무리 후대로 뻗어와서 들뢰즈나 요즘 유행하는 알랭 바디유, 가라타니 고진 같은 이들의 유려한 언어로 표현되어도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김용규가 지식의 속성으로 지적한 바 있는 바로 그것인데, 다른 지식을 향해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학설'들이다.
철학자가 철학을 즐겨야 독자도 즐긴다
그런데 김용규를 보자. 그는 아카데미를 벗어나 있다. 어떤 유파나 집단에 속해있지 않고, 특별한 시대나 철학자를 선호하지도 않는다. 에리히 프롬을 유난히 좋아하는 것 같기는 하다. 그리고 중산층의 정서가 유달리 강하다는 느낌도 드는데, 가만히 보면 그가 특정한 계급이나 연령대에 속한 인간보다는, 보편적인 인간과 추상화된 인간에 관심을 두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영화관 옆 철학카페’는 모두 18편의 영화를 희망, 행복, 시간, 사랑, 죽음, 성으로 나눠서 다루고 있다. 남녀노소와 계급고하를 막론하고 갖게 되는 감정들로서, 자칫 철학적으로 다루기 쉽게 모델링화된 인간의 속성들을 다룬다는 오해를 받을 여지도 있다. 그러나 달리 보면 김용규가 그런 주제를 다루는 이유는 그가 쳐다보는 영화들이, 그 현실이 너무나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에 앵글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감수성은 그런 장기지속적인 주제들에 유난히 끌리는 것 같은데, 사실 그건 감수성이라기보다는 세계관의 문제이다.
어떤 철학적 입장이나 태도를 선호하기 이전에, 김용규는 인간의 희망이나 절망 같은 감정을 설명해줄 수 있는 적합한 철학적인 논리가 있으면 끌어와서 사용한다. 이 지점에서 그의 박식함은 그에게나 독자 모두에게 유용하다. 얼마나 많은 전문가들이 박식함을 이리 꼬고 저리 꼬인 자신만의 논리회로 속에 구겨 넣고 있는가. 정말 공부한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겨우 패션을 뽐내거나 멋을 부리려고 비싼 원서를 읽고 유행에 뒤지지 않으려고 서점에 나가는 속물적인 철학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그리고 자신이 살기 위해서 남을 공격하는 편협한 학설 구성주의가 이런 속물적인 지식을 대학 내부에 제도화해온 것이 우리의 역사다.
거기에 비하면 김용규는 아주 홀가분하게 텍스트 사이를 돌아다닌다. 그는 자신이 다루고 있는 이들을 글 속에서 공격하는 일이 거의 없다. 수긍하는 구절들만 텍스트 속에 불러들인다. 이것은 그가 선입견을 가지고 어떤 이론이나 철학을 오독하거나 왜곡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그의 ‘전문성’이 다른 이들의 ‘전문가주의’와 구별되는 첫 번째 대목이다.
그 다음에 생각하게 되는 것은 일종의 ‘자기만족’의 정신이다. 이것은 ‘이타(利他)’와 ‘이기(利己)’의 오래된 이분법을 타파하는 혁신적인 인식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우리 성리학자들은 공부와 수양의 목표를 ‘자신을 온전히 이루는 것’으로 삼아왔다. 그래서 성리학을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 불렀다. 여기엔 자기를 위한 것이 세계를 위한 것이란 관념이 들어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도 다 일맥상통하는 동양적 철학전통의 발상이다. 그렇다면 김용규의 철학 속에서 돋보이는 자기만족의 정신은 과연 성리학의 위기지학과 같은 성격의 것인가. ‘십계’의 금욕선언에 흔쾌히 동의하는 그의 태도에서 보듯, 김용규는 매우 윤리적인 금욕주의자다. 그렇다고 그가 프로테스탄트적인 금욕주의와 닿아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생태주의적 전망과 가깝다. 인간의 욕망을 풀어놓으면 망할 수밖에 없다는 인간의 자기통제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깔고 있다.
‘녹색평론’의 발행자인 김종철 교수는 환경운동을 일컬어 지옥길을 포장하는 행위라고 비판하기도 했는데, 진정한 자기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욕망에 조정당하는 인간들의 문화적 의식을 갱신하지 않으면서, 제도와 외적인 변화를 통해 내적인 문제를 덮어버리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김용규의 시선도 바로 여기에 맞닿아있다. 그는 “미끄러운 경사길에 올라선 것처럼 우리의 삶은 통제력을 잃었다”고 진단한다. 숱한 고뇌 가운데서라도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할 수 있었던 햄릿이나 키에르케고르는 우리보다 오히려 행복했을지 모른다고 그는 계속 말한다. 그 이유는 “지금 우리들에게 주어진 자유는 이 미끄러운 경사길에서 내리느냐 마느냐를 선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열광적 환상을 갖고 파멸하느냐 아니면 비관적 전망을 갖고 소멸하느냐를 결정하는 데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위한 것이 세계를 위한 것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절망적인 국면에서 인간을 구하려는 노력과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게 바로 그가 주목한 영화의 감독들이다. 우리는 왜 김용규가 복잡한 현실을 철학적인 복잡함으로 유려하게 통과하는 들뢰즈적인 길을 버리고 다소 단순해보이는 윤리적인 전언을 반복하는 지를 유념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는 김용규의 저작을 읽어 내려가면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최소한의 기준점들은 에리히 프롬 정도에 오면 이미 다 마련되어있다는 점을 생각하게 됐다. 그것은 ‘안개 속의 풍경’이라는 영화를 해석하며 김용규가 주목한 ‘욕망’과 ‘희망’의 차이에 프롬이 동원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욕망은 대상을 구하는 행위이고, 희망은 구할 수 없는 것을 구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구할 수 없는 걸 구하려고 할 때 인간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명제는 시적으로도 멋있지만, 현실 속에서도 힘을 발휘한다. ‘안개 속의 풍경’을 비롯해 그가 거론한 ‘중앙역’, ‘잠입자’ 같은 영화들은 ‘욕망’이 아니라 ‘희망’에 관한 영화들이다. 욕망과 희망의 차이를 깨달을 때 우리는 좀더 현명해지고, 어떻게 보면 그러한 깨우침들을 통해 ‘위기(爲己)’의 길을 가게 된다는 걸 김용규는 말하려는 듯하다. 이것은 부성애가 무엇이고 모성애가 무엇인지, 시간의 본질과 과거로의 회귀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으로 연속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모두 제각각 잘난 맛에 사는 우리들이 인간이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겪어야 하는 인생의 보편적인 행로를 나름대로 들여다보게 된다.
그 앎의 과정이 김용규가 그동안 철학을 공부하면서 추구했던 것이고, 우리에게 알려주려는 것이다. ‘아는 것이 병’이라는 말은 김용규에게 통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앎이란 서로 다른 앎들이 경쟁하면서 진화하는 것이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는 어두운 영화들을 통해서 삶의 잔혹한 진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