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수가. 오늘 학교 갔다가, 우연히 도서관 홈페이지를 들렸다가, 휴학생도 도서관 이용이 가능해지는 시스템이 올 2007 2월부터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 유레카! 정말.. 이렇게 기쁜 일이...

대학원 다닌 시절, 난 알라딘의 '실버 회원' 당연하다! 하지만 지금은...

최근 3개월간 순수구매금액 : 818,100원 

-_-;;; 이거 정말 죽음이었다.... 그리고 외서는 교보에서 주문한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이제 무조건 도서관 직행! 물론 꼭 사야되는 책은 사야하겠지만. 우하하하하

살맛 난다. 도서관 휴학생도 배려해주다니...

학교에 고마움을 느끼기는 처음!! 쿄쿄 이렇게 수동적인 자세라니!

하지만 어쨌든. 막막하고 답답하던 것이 사라졌다. 도서관, 도서관, 와우 도서관!!! ㅋㅋㅋ

오늘 도서관 가서 빌린 책은

헤겔 역사철학 강의 한국어본과 영역판. 그리고 로마인 이야기 7~9권

훗훗 헤겔 두권은 제본맡겼고, 아래 책은 읽으면 된다. 이렇게 고마울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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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07-03-05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뭇하고, 통쾌하고, 고마워하는 마음이 글속에 묻어 있네요.

마태우스 2007-03-05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막강한 플래티눔이시군요. 으음... 전 50만원 미만인데...

마태우스 2007-03-05 1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 출입 가능한 건 축하드립니다. 근데 진작에 그렇게 되었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으음, 휴학생을 막는 도서관이라..

기인 2007-03-05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호인님/ 네 ㅋㅋ 진짜 흐뭇, 통쾌, 감사 였습니다! 정말 빨리 절판되는 책들 많잖아요..
마태우스님/ 마태우스님 같은 교수님이 많으시다면! '불쌍한' 박사과정 휴학생이라는 단어 자체도 없어질지도! :) 다시 한번 컴백 축하드립니다.

yoonta 2007-03-05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학생이라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근데 서울대도서관은 국가세금으로 운영하는곳인데 일반인에게도 개방 대출가능해야 하지 않나요? 뭔가 대단히 잘못된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Mephistopheles 2007-03-05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컥.! 전 거기서 공 두개를 뺴야 할 듯....거의 전무하다는...^^

기인 2007-03-06 0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타님/ 사실 국립대라는 것이 사립대와 차이가 없다는 게 말이 안되는 것 같아요. 교육의 목적이나 건물 등등이..
메피스토님/ ㅜㅠ 제 앞으로의 목표도 그렇습니다! 책 최대한 안 사기! ㅎ 놓을때도 없는데요 ㅜㅠ
 
 전출처 : 로쟈 > 라클라우-라캉-지젝

인사동에 들렀다가 종각역 지하의 반디앤루니스에 처음 들러보았다. 역시나 익숙한 매장이 아니어서 책들을 둘러보는 일도 좀 어색했는데 인문서 신간 매장에서 우연히 애니 스타브라카키스의 <라캉과 정치>(은행나무, 2006)가 출간된 걸 보았다. 이미 지난번에 숀 호머의 <라캉 읽기>가 출간되었을 때 근간으로 예고된 것이긴 하지만 이렇게 빨리 출간될 줄은 몰랐다. 사실 원서 자체는 지난 1999년에 나온 것이므로 번역/소개 자체가 발빠르게 이루어진 건 아니지만(저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라캉의 정신분석>도 바로 나오는 것일까?).

 

 

 

 

<라캉과 정치>라고 옮겨졌지만, 역자의 해명대로 원제는 '라캉과 정치적인 것(Lacan and the political)'이며, 작년에 나온 폴 패튼의 <들뢰즈와 정치>(태학사, 2005)와 같은 시리즈의 책이다(참고로, 원저는 188쪽 분량이지만 국역본은 459쪽이다. 2배 이상 부풀려진 셈인데 그나마 가격마저 부담스러운 건 아니어서 다행이다). 현재까지는 이 두 권만 소개됐지만, 루틀리지출판사에서 나오고 있는 이 시리즈에는 이미 <푸코와 정치>, <데리다와 정치>, <니체와 정치>, <하이데거와 정치>, <레비나스와 정치> 등 여러 권이 출간 목록에 올라와 있는 상태이다(나도 몇 권을 더 갖고 있다). 시리즈의 공동편집자는 <싹트는 생명>(산해, 2005)의 저자인 워윅대학의 키스 안셀-피어슨과 에섹스대학의 사이먼 크리칠리 교수이다. 각각 니체-들뢰즈, 데리다-레비나스 전문가로서 유명하다.

 

<라캉과 정치>의 저자인 야니 스타브라카키스 또한 에섹스대학 출신으로 급진적 민주주의론으로 유명한 어네스토 라클라우의 제자이다('Essex' 를 국역본의 필자소개에서는 '에식스'라고 표기했는데, 원래 발음이 그러한 것인가, 아니면 '에섹스'의 '어감' 때문인가? 뒷표지에도 '슬보예 지젝'을 '슬보예 지젝"이라고 오기했는데, 이것도 발음 때문일까?). 이름이 좀 희한한 것은 그리스 출신이어서이다(왜 있잖은가, '니코스 카잔차키스' 같은 이름). 

라클라우의 제자란 말은 단순한 사실 이상으로 이 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이 책은 라캉의 기본적인 개념을 명확하고 완벽하게 설명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현재의 사회-정치 현상 연구에 적용하려는 지금까지의 시도 중 가장 혁신적이고 가장 통찰력 있는 시도이다."라는 라클라우의 찬사를 뒷표지에 싣고 있어서만은 아니다. 스타브라카키스는 자신의 스승이자 동료인 라클라우/무페의 급진적 민주주의의 토대를 라캉 정신분석학의 윤리 속에서 발견하고 있으니 라클라우로서는 어찌 대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이 나온 김에 언급하자면, 라클라우와 무페의 공저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Verso, 2001, 2판)은 적어도 이 책 <라캉과 정치>와 같이 읽거나 미리 읽어두어야 하는 책이다. 책은 지난 1985년에 197쪽 분량으로 초판이 나왔었는데, <라캉과 정치>가 출간된 이후인 지난 2001년에 240쪽 분량의 증보된 2판이 출간됐다. 국역본은 <사회변혁과 헤게모니>(터, 1990). 물론 품절됐다. 한때 '포스트-마르크스주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문제적인 저작인데, 나는 민주주의론에 관한 책으로 이보다 더 재미있는 책을 읽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물론 내가 읽은 게 몇 안되지만). 어정쩡한 제목이 아닌 제대로 된 제목을 달고 조만간 복간되었으면 한다.

 

 

 

 

정리하자면, <라캉 읽기>와 <사회변혁과 헤게모니> 두 권 정도는 <라캉과 정치>보다 먼저 읽어두는 게 좋겠다(예비적인 읽기가 전제되지 않으면 책읽기가 더뎌질 수 있다). 그리고 나중에 읽어야 할 책은 지젝의 <이라크>(도서출판b, 2004).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Verso, 1989)을 통해 지젝이 '데뷔'할 때 후견자 역할을 하면서 서문을 써준 이가 라클라우이며 지젝은 당시만 해도 (급진적)민주주의론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견지했었다.

하지만 이후에 지젝은 점차 '민주주의'에 대해 부정적인/비판적인 입장으로 선회하게 되며(최근의 영화 <지젝!>에서 지젝은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에서 내비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 '창피한 것'이었다고 털어놓는다), 당연한 일이지만, 라클라우와의 이론적 동반자 관계가 이론적 긴장관계로 전이된다. 이러한 이론적 긴장을 가장 잘 드러내주고 있는 대목이 (내가 읽은 한도 내에서는) <이라크>의 2장(원서에서는 부록1)에 포함돼 있다. 그걸 읽어봐야 한다는 것이다(샹탈 무페의 <민주주의의 역설>(인간사랑, 2006)과 발리바르의 <민주주의와 독재>(연구사, 1988)를 참고문헌으로 덧붙일 수 있겠다).    

그리고 바로 그런 맥락에서 라클라우-스타브라카키스와 지젝은 이론적 전선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 '전선'은 라캉의 해석을 둘러썬 전선이다. 라클라우와 함께 지젝이 이 책의 (뒷표지에서) '추천사'를 쓰고 있는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라캉과 정치>는 명확하고 체계적이며 이해하기 쉽게 저술되었으며, 라캉의 정신분석학이 정치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즉 라캉의 정신분석학이 급진적 민주주의의 입장을 단호하게 보증해주는 정치적인 것에 관한 이론을 포함하고 있음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스타브라카키스의 책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논쟁에 중요한 기여를 한 것 그 이상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논쟁의 용어들을 재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논쟁'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라클라우와 지젝 간의 '논쟁'으로 다시 이해해보고자 하며, 그래서 제목을 '라클라우-라캉-지젝'이라 붙였다. 여기서는 논쟁의 구도만을 제시할 따름이고 그 내용은 차후에 채워질 수 있을 것이다(당장 <이라크>의 국역본이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보이지 않는군). 사실 이 구도는 역자가 이 책의 의의를 거론하면서 해설에서 잘 짚어주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이미 지젝의 <이라크>를 통해서 이 책과 지젝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마도 논쟁점은 급진적 민주주의 기획과 정치경제학과 계급 적대를 유지하고자 하는 기획 사이의 논쟁일 것이며, 라캉의 윤리학과 급진적 민주주의 간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논쟁일 것이다."(430쪽) 책은 "이들간의 논쟁점을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이해의 발판을 마련해준다."

이것이 내가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며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구도이다. 물론 책은 언제나 돌발적인 '발견', 우연한 마주침들을 내포하고 있으며 책읽기는 정해진 경로만을 따라가는 것은 아니다. 그 '긴장'이 물론 독자의 즐거움인 것이고...

07. 01. 05 - 06.

P.S. 내가 갖고 있는 이 책의 원서는 언젠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손수 복사한 것이다. 이 책에서도 자주 참조되고 있는 라쿠-라바르트와 낭시의 공저 <문자라는 타이틀(The title of the letter)>과 함께 복사해서 (비용절감을 위해) 합본으로 제본했었다. 이 책을 만지고 있자니 어느 해 겨울 도서관의 공기가 느껴진다. 나는 하루에 서너 시간씩 수십 권의 책들을 그렇게 복사하곤 했다(스프링 제본을 해주던 아저씨와 안면이 생길 정도로). 그렇게 다 발품과 손품을 판 책들이라 애착을 가는 것. 어제 복사물 더미에서 책을 찾으니까 '서문' 정도를 읽은 것으로 표시돼 있다.

Cover: Language in Literature

원서를 찾자마자 가장 먼저 들춰본 페이지는 야콥슨의 은유와 환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대목이다. 국역본을 뒤적이다가 "은유와 환유는 그림(야콥슨에 따르면 큐비즘은 환유적인 반면에 사실주의는 은유적이다), 영화, 스토리텔링, 그리고 심리적 과정까지 포함하고 있는 모든 기호학적 체계의 형식 속에서 발견될 수 있었다"(150쪽)라고 한 대목이 아무래도 오역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사실주의가 은유적이라니?). 한데, 찾아보니 원서에서도 "according to Jakobson, cubism is metonymically oriented while  realism is metaphorically oriented"(58쪽)라고 돼 있는 게 아닌가. 

저자가 참조한 책은 야콥슨의 'Essays on Language of Literature"(1998)인데(이건 아테네에서 출간된 책이다! 국역본의 참고문헌에는 'Essay on  Language of Literature'로 탈자가 있다. 한가지 더 꼬집자면 '내어쓰기'를 하지 않은 참고문헌을 어떻게 읽으라는 것인가? 편집자의 기본 혹은 성의가 부족해 보인다), 보다 대중적인 판본은 하버드대출판부에서 나온 'Language in Literature'(1987)이고 우리말로는 <문학 속의 언어학>(문학과지성사, 1989)으로 번역됐었다(완역은 아니다. 이왕 품절된 김에, 완역본이 재출간됐으면 싶다). 보다 구체적으로 거기에 들어 있는 '언어의 두 양상과 실어증의 두 유형'(이 책엔 '언어의 두 가지 측면과 실어증의 두 유형'이라 옮겨진)이란 고명한 논문이 참조 대상이다.

아테네에서 나온 판본에는 뭐라 적혀 있는지 모르겠지만(<문학 속의 언어학> 또한 당장 옆에 있지 않아서 참조할 수 없지만) 인터넷을 뒤져보니 아무래도 저자가 'surrealism'을 'realism'으로 오기한 듯싶다. 이 상식에도 맞지 않는 내용이 루틀리지의 편집자에게 걸러지지 않았고 국역본의 역자나 편집자에게도 간과된 것. 해서 교정된 번역은 "야콥슨에 따르면 큐비즘은 환유적인 반면에 초현실주의는 은유적이다"가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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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 탈아카데미 저자열전: 철학자 김용규

* 담론비평(2007. 3. 3. ) / 탈아카데미 저자열전 ③ 철학자 김용규

 

용기 없이 어떻게 전망이 생기겠는갉한 철학랍비와의 즐거운 만남

 

강성민 학술평론 ksm@dambee.net

 

▲ 김용규의 철학적 멘탈리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이라는 영화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요즘 독서계에 잔잔한 선풍을 일으키는 철학자가 있다. 지식소설의 국내 소개자이자 철학으로 영화읽기를 실천하는 김용규 씨다. 그는 영화와 철학을 접목시킨 ‘영화관 옆 철학카페’(이론과실천, 2002), ‘데칼로그’(바다출판사, 2002),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이론과실천, 2004)를 펴냈고, 지식소설인 ‘알도와 떠도는 사원(전2권)’(이론과실천, 2001), ‘다니’(지안, 2005)를 동생인 불문학자 김성규 씨와 공동으로 만들어냈고, 청소년 시리즈물인 ‘철학통조림(전4권)’(주니어김영사, 2006)을 쓰기도 했다.


웬만큼 책을 찾아 읽는 독자들에게 김용규는 익숙한 이름이다. 최근엔 문화예술위원회가 운영하는 청소년문학사이트 ‘글틴’에 연재한 글을 묶어낸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웅진지식하우스, 2006)로 대중적 명성까지 얻었다. 그 덕택에 5년 전 잠시 주목을 받았지만 시장진입에는 성공하지 못한 그의 데뷔작 ‘알도와 떠도는 사원’이 웅진지식하우스에서 새로운 옷을 입고 나와 지식판타지소설의 원조 주자로 부각되기도 했다.

베일에 싸인 철학자 김용규와의 좌충우돌 만남

그런 그가 2007년 신년에 한겨레에 칼럼을 쓰며 사진을 공개했다. 엄격해보이는 얼굴 외곽선에 차분한 눈빛과 인상이 담겨있었다. 이것은 나에게 약간은 충격이었다. 워낙 언론과의 인터뷰라든지 원고청탁 같은 걸 거부해왔던 그였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출판저널과 교수신문에 있을 때 접촉을 시도했지만 출판사에서 연결시켜주지 않아 실패했던 기억에 근거한 판단이기도 하지만, 그의 행보가 워낙 두문불출 스타일이기도 했던 탓이다.


첫 책인 ‘알도와 떠도는 사원’에 나오는 저자소개를 보면 독일 프라이부룩 대학과 튀빙겐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전공했다고 짧게 나와 있고, 최근의 책을 보면 비교적 자세히 나와 있다는 게 “자그마한 정원이 있는 예쁜 벽돌집에서 피아니스트인 아내와 호기심 많은 딸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 정도다. 그의 책을 전부 다 읽는 애독자로서는 그가 왜 독일에서 대학을 나왔고, 왜 교수가 되지 않았으며, 어떤 사회적인 경력을 쌓았는지 등등이 궁금하게 마련인데 전혀 충족되지 않는다.

이 칼럼을 접한 이후 혹시나 싶어 신문기사 검색을 해보니 ‘다니’가 출간된 2005년 경향신문에 인터뷰기사가 실린 게 보인다. 김용규·성규 형제가 “예쁜 벽돌집”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다. 한겨레 사진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이 사진을 보니, 딱 글 읽고 쓰고 커피 마시고 한 번씩 산보하면서 사는 사람이다. 일순간 부러운 마음부터 든다. 그러나 이 인터뷰도 책을 중심으로 진행돼 개인적 신상정보는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그는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는 친근한 랍비의 이미지를 굳히고 있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여전히 베일에 싸인 신비한 아웃사이더다.


이번 글을 쓰기 위해서 나는 꽤 많은 준비를 했다. 우선 몇 년 전엔가 보다가 잠들어버렸던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희생’을 눈이 벌개져서 완람(完覽)했다. ‘타르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했다’가 타르코프스키 영화 7편에 대한 해설서이기 때문에 도저히 영화를 안볼 수가 없었는데, 생각보단 재미가 있어 나도 이제 엔간한 텍스트엔 질리지 않는 경지(?)가 됐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친김에 ‘안드레이 루블료프’와 ‘이반의 어린시절’도 봐버렸다. 그리고 나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속도감 있게 읽혔다. 이 책은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론이기도 한 ‘봉인된 시간’이 아주 많이 인용되고 있다. 그 시적인 문장에 실린 철학적 신념의 건강함이란 거의 충격에 가까웠다. 거기에 비하면 김용규가 풀어놓는 글들은 덧글에 불과할 정도다. 김용규는 이 책에서 자신은 조연으로 물러난다. 거의 절반을 영화 줄거리 요약과 ‘봉인된 시간’의 명구들에게 내주면서 독자를 타르코프스키와 만나게 해준다. 이런 태도는 또 하나의 미덕이라는 생각을 했다. 영화와 관계된 철학자들도 언급되는데, 예를 들면 마르쿠제, 하르트만과 키에르케고르, 하이데거와 라캉 등이 아주 쉽고 명쾌하게 해설된다.


‘데칼로그’(십계의 원어)를 읽는 과정에선 밝히기 부끄러울 정도로 아주 쇼를 했다. 책을 덥석 집어 들고 누웠는데 이 책도 영화 ‘십계’에 대한 해설서가 아닌가. 도서관에서 빌려올 땐 미처 몰랐는데 말이다. 다시 벌떡 일어나서 인터넷을 뒤졌다. 영화 ‘왕과 나’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던 대머리 율 브리너가 이집트왕으로 나오고 영화 ‘벤허’의 영웅 찰튼 헤스톤이 모세의 역할을 맡은 장장 2백20분짜리 영화다. 출애굽기를 영상화한 이 영화는 내용도 얼추 알고 고대 이집트가 흥미진진하게 재현되어서 한달음에 다 봐버렸다. 보고 나니 새벽 4시인데 어릴 때 텔레비전에서 본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도 어릴 때 봐서 그런지 또 봐도 재미있다. 나름대로 만족하고 책을 펴들었다. 그런데 다시 벌떡 일어나버렸다. 이 책은 폴란드 영화감독 키에슬로프스키가 텔레비전용으로 만든 10부작 영화인 ‘십계’를 다루고 있지 않은가. 그 십계는 출애굽기의 십계가 아니라, 여호와가 던진 열 개의 잠언을 현대적인 일상 속에서 재해석한 아티스틱한 영화였다. 한마디로 “그 십계가 아닌가벼”이다.

분석과 해석의 차이, 혹은 철학이 영화를 읽는 이유

엉뚱한 2백20분짜리 영화를 본 것도 억울한데, 도합 6백분도 넘는 영화를 또 봐야 한다니 아득해져 왔다. 키에슬로프스키란 이름은 타르코프스키를 능가할 정도로 발음도 쉽지 않고 북유럽의 음습한 분위기인지라 더 엄두가 나질 않았다. 아마 인터넷을 뒤지다가 키에슬로프스키의 십계 연작 중의 하나가 ‘욕망이라는 모호한 대상’이라는 극장용 영화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포기했을 수도 있다. 이 영화는 내가 예전에 봤던 영화다. 아파트 맞은편에 사는 여자를 훔쳐보며 사랑하는 남자와 그 사실을 알게 되는 여자의 이야기다. 남자와 친해진 여자는 어느 날 맞은편 남자의 아파트에 들렀다가 창가에 놓인 망원경을 보게 된다. 눈을 갖다 대니 자신의 아파트 거실이 환히 보인다. 거기서 어느 날 밤 식탁에 앉아 어깨를 들먹거렸던 한 여자가 보인다. 그렇게 여자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남자가 사랑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이 마지막 부분이 전율스러웠다. 데칼로그에 대한 그런 식의 재해석이라고? 용기를 내어 다시 인터넷을 뒤졌다.


이 10부작 연작을 4편을 보고 나서야 나는 김용규라는 사람에게 어느 정도 친근감이 들었다. 이것은 지면에 공개되는 그의 사적 이력을 통해서 갖는 친근감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마치 그 사람의 전생을 엿보는 듯한 내밀한 관음증의 쾌락까지 동반하는 것이었다.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을 잘 아는 사람들은 김용규에게 어떤 동질감 같은 걸 느끼겠지만, 나는 그가 던져놓은 아리아드네의 실을 잡고 철학적 미궁 속으로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여기서 나타나듯 그는 영화를 사랑하는 철학자이고 그가 좋아하는 영화는 예술로서의 영화다. “감독은 일종의 철학자가 되었을 때에만 비로소 예술가인 것이며, 그의 영화는 예술이 될 수 있다”는 타르코프스키의 말을 자주 인용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철학이야말로 최고의 문예이다”라는 플라톤 ‘파이돈’의 한 구절을 즐겨 사용한다. 그의 텍스트를 훓어내리다 보면 그가 ‘분석’과 ‘해석’을 엄중하게 구분하는 장면을 몇 번 마주치게 된다. 분석은 해당 장르의 전문평론가들이 하는, 쇼트의 개수, 카메라의 위치와 주제의 재현방식 등을 전문적으로 파악해내는 작업이다. 그에 비해 해석이란 한단계 더 나아가서 영화의 철학적 주제를 삶의 전망과 만나게 하는 작업이다.

상징적 조작으로서의 영화와 미장센으로서의 영화

그것은 러시아 초현실주의의 위대한 감독 에이젠슈테인에 대한 타르코프스키의 혹평과 그에 대한 김용규의 동의로 나타난다. 에이젠슈테인은 영화 ‘노란 잠수함’ 등등에서 온갖 상징을 배치해놓는다. 거기에 대해 타르코프스키는 “나는 에이젠슈테인의 지적 작업방식, 쇼트 속에 암호식으로 표현하는 작업방식에 원칙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몽타주 수법은 문학이나 철학과는 달리 영화 특유의 수용방법을 근거로 하여 영화가 관객에게 제공할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을 빼앗아가버린다. 그의 생각은 전제주의적이다”라고 비판한다. 나도 이 부분에는 적극 동감한다. 평론가들은 영화의 어떤 장면에 대해 감독이 어떤 용도로 삽입한 의도적 표현이라는 식의 해설을 많이 한다. 그런 걸 자주 접하다보니 영화를 보면 스토리나 장면의 전체적인 분위기보다는, 매우 국부적인 사물이나 행동에 관심을 기울이는 습관이 생겨났다. 남자와 여자가 어떤 호텔방에 들어갔는데, 그 호텔방 번호가 608호면 그 ‘608’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가지고 낑낑대는 습관이다. 메트릭스에 담긴 철학적, 신화적 요소들이 무엇인지를 가지고 떠들썩했던 지난날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만약 그런 것들이 감독의 의도된 액세서리라 할지라도, 영화를 보고 읽는 즐거움과는 사실 따지고 보면 관련이 그리 깊지는 않다. 영화란 결국 하나의 이야기이고 풍경인 것이다. 그런 기본적인 본질을 벌써부터 알았기에 김용규는 “타르코프스키에게 있어서 예술은 예술을 넘어, 정치를 넘어, 종교를 넘어 인류를 위한 구원의 마지막 가능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일상의 문법에 지적인 테러를 가하는 상징행위는 그에 비하면 지적 유희에 불과할 뿐이다.


김용규는 이런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예술관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으며,  ‘예술로서의 철학과 철학으로서의 예술’을 일치시키는 경지가 그가 철학을 하는 최종적인 목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해석이라는 방법은 바로 예술을 철학화하는 주요한 수단이다. 이걸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영화 ‘희생’의 마지막 장면이다. 여기 등장하는 주인공 악렉산더는 ‘스스로를 희생'하는 전형적인 인간으로 설정되어 있다. 타르코프스키는 여섯 번째 영화까지 ‘개인적 구원’에 관심을 두었지만, 마지막 영화 ‘희생’에서는 공적인 것을 위한 개인의 희생을 장엄하게 형상화한다. 그것은 다소 판타지적인 환경 설정으로 이어지는데, 바로 전쟁이다.


20세기 초반 인류를 불행의 핵심으로 떠밀었던 전쟁이 아니었던가. 영화 ‘희생’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전쟁의 참화를 경험한 이들이다. 그들은 전쟁이 끝난 폐허 위에 한 그루 희망의 나무를 심으면서, 인간적인 가치와 감수성을 천천히 회복해나가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또 전쟁이 터졌다. 저녁모임을 위해 사람들이 주인공 알렉산더의 집에 모였을 때 텔레비전 긴급뉴스가 방영된다. 때마침 집이 떨리며 비행기가 저공으로 지나간다. 우리의 철학적 주인공 알렉산더는 악몽에 빠져든다. 울면서 신에게 기도한다. “인간이 쌓아놓은 모든 가치와 미덕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이 전쟁을 멈추게 해주신다면 내 모든 걸 버리겠습니다”라고 말이다. 그날 알렉산더는 꿈결에 실려 신비의 여인 마리아를 만나고 돌아온다. 그리고 그 다음날 거짓말처럼 전쟁은 멈췄다. 아니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시간대로 다시 세상이 이동한 것이다.

타르코프스키와 미국식 휴머니즘의 차이

이 엄청난 비밀을 그의 가족들은 전혀 모르고 있다. 그들은 저녁식사모임에서 하던 이야기들, 가령 호주로 이민을 가려고 한다는 등의 얘기를 심각하게 나누고 있다. 알렉산더는 그걸 지켜보며 자신의 기도가 이뤄졌다는 것을, 신이 약속한 바를 이행했다는 것을 점점 깨닫게 된다. 그 다음은 알렉산더가 약속을 이행할 차례다. 그는 가족들이 근처로 산보나간 사이, 집에 불을 붙인다. 벌판 한 복판에 지은 나무로 된 이층집은 바람을 연료삼아 거대하게 타오른다. 장엄한 희생의식이 치러지고, 가족들의 신고로 달려온 정신병원 구급차에 알렉산더는 감금되는 것으로 영화는 종료된다.


이런 자기희생적 태도를 통해 삶의 전망을 회복하는 모티프는 김용규의 저작 전반에 나타난다. 탄자니아에 위치한 동쪽 숲의 벌목으로 서식지를 잃은 침팬지 집단이, 서쪽 숲의 보다 소규모의 침팬지 집단을 전멸시킨다는, 원숭이 제노사이드를 다룬 과학소설 ‘다니’의 주인공이 그렇다. 서쪽 숲의 침팬지들에게 수화를 가르치러 파견된 제니퍼 모건 박사는 원숭이들의 희생 앞에서 침착함과 냉정함을 잃지 않는 제인 구달이 되기보다는, 원숭이 사냥에 적극 맞서다 원주민들에게 얼굴을 난자당해 죽은 선배의 길을 따른다. 광기어린 폭력에 맞선 휴머니즘을 아름답게 그린 이 소설은 생태계의 법칙을 존중하는 과학자의 냉정함에 의문을 던진다. 오늘 우리의 주변을 보라고 김용규는 얘기한다. 온갖 폭력과 욕망이 나부끼는 고통스러운 현실에 맞서는 누군가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없다면 어떻게 세계가 유지되겠느냐는 것이다.


이 소설은 침팬지의 공격성을 통해 인간들의 대량학살을 이해해보자는 시도를 담고 있다. 접근방식은 매우 과학적이다. 이 책 뒷부분의 수많은 과학서적들이 그걸 말해준다. 김용규는 침팬지 혹은 인간이 어떻게 공격성을 띠게 되는 지를 지금까지의 과학적 연구를 통해 소설에 잘 녹여냈다.


그것은 집단학살 본능에 대한 두가지 대립되는 해석이 경쟁하는 과정이다. 하나는 잘 알려진 리처드 도킨스 류의 유전자 결정론이며 다른 하나는 유전자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입장이다. 누가 옳으냐보다는 그 두 흐름을 재고 가늠하는 김용규의 독특한 방식이 눈길을 끈다. 그는 “건전한 지식에는 그와 대립하는 지식이 존재한다. 서로 대립하는 이들 지식쌍은 경쟁하면서 어느 한쪽이 자연도태하지만, 상당수가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새로운 형태로 진화한다. 지식들은 갈등하고 싸우며 승리하거나 패배하고 또 살고 죽는다”라고 말한다. 이 과정을 따라가면서 보여주는 것이 김용규 식의 지식소설인 셈이다.


이것은 김용규가 휴머니스트이지만 과학적 합리주의에도 열려있다는 점을 말해 준다. 그가 철학을 하면서 동시에 신학을 공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지식의 속성이라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이 유달랐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차원에서 내가 김용규에서 발견하게 되는 미덕이 바로 ‘전문성을 활용하는 남다른 방식’이다.


우리 시대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어떤 섹트에 갇혀있다. 서양철학자들 상당수가 플라톤 이래의 이성주의의 전통에 갇혀있으며, 이들은 각각 자기가 전공한 어떤 시대의 철학적 믿음을 신봉하며, 그것을 토대로 해서 그 전후좌우를 통섭하려는 헤겔주의적 지향을 갖고 있다. 그것이 아무리 후대로 뻗어와서 들뢰즈나 요즘 유행하는 알랭 바디유, 가라타니 고진 같은 이들의 유려한 언어로 표현되어도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김용규가 지식의 속성으로 지적한 바 있는 바로 그것인데, 다른 지식을 향해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학설'들이다.

철학자가 철학을 즐겨야 독자도 즐긴다

그런데 김용규를 보자. 그는 아카데미를 벗어나 있다. 어떤 유파나 집단에 속해있지 않고, 특별한 시대나 철학자를 선호하지도 않는다. 에리히 프롬을 유난히 좋아하는 것 같기는 하다. 그리고 중산층의 정서가 유달리 강하다는 느낌도 드는데, 가만히 보면 그가 특정한 계급이나 연령대에 속한 인간보다는, 보편적인 인간과 추상화된 인간에 관심을 두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영화관 옆 철학카페’는 모두 18편의 영화를 희망, 행복, 시간, 사랑, 죽음, 성으로 나눠서 다루고 있다. 남녀노소와 계급고하를 막론하고 갖게 되는 감정들로서, 자칫 철학적으로 다루기 쉽게 모델링화된 인간의 속성들을 다룬다는 오해를 받을 여지도 있다. 그러나 달리 보면 김용규가 그런 주제를 다루는 이유는 그가 쳐다보는 영화들이, 그 현실이 너무나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에 앵글을 비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감수성은 그런 장기지속적인 주제들에 유난히 끌리는 것 같은데, 사실 그건 감수성이라기보다는 세계관의 문제이다. 


어떤 철학적 입장이나 태도를 선호하기 이전에, 김용규는 인간의 희망이나 절망 같은 감정을 설명해줄 수 있는 적합한 철학적인 논리가 있으면 끌어와서 사용한다. 이 지점에서 그의 박식함은 그에게나 독자 모두에게 유용하다. 얼마나 많은 전문가들이 박식함을 이리 꼬고 저리 꼬인 자신만의 논리회로 속에 구겨 넣고 있는가. 정말 공부한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겨우 패션을 뽐내거나 멋을 부리려고 비싼 원서를 읽고 유행에 뒤지지 않으려고 서점에 나가는 속물적인 철학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그리고 자신이 살기 위해서 남을 공격하는 편협한 학설 구성주의가 이런 속물적인 지식을 대학 내부에 제도화해온 것이 우리의 역사다.


거기에 비하면 김용규는 아주 홀가분하게 텍스트 사이를 돌아다닌다. 그는 자신이 다루고 있는 이들을 글 속에서 공격하는 일이 거의 없다. 수긍하는 구절들만 텍스트 속에 불러들인다. 이것은 그가 선입견을 가지고 어떤 이론이나 철학을 오독하거나 왜곡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그의 ‘전문성’이 다른 이들의 ‘전문가주의’와 구별되는 첫 번째 대목이다.


그 다음에 생각하게 되는 것은 일종의 ‘자기만족’의 정신이다. 이것은 ‘이타(利他)’와 ‘이기(利己)’의 오래된 이분법을 타파하는 혁신적인 인식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우리 성리학자들은 공부와 수양의 목표를 ‘자신을 온전히 이루는 것’으로 삼아왔다. 그래서 성리학을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 불렀다. 여기엔 자기를 위한 것이 세계를 위한 것이란 관념이 들어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도 다 일맥상통하는 동양적 철학전통의 발상이다. 그렇다면 김용규의 철학 속에서 돋보이는 자기만족의 정신은 과연 성리학의 위기지학과 같은 성격의 것인가. ‘십계’의 금욕선언에 흔쾌히 동의하는 그의 태도에서 보듯, 김용규는 매우 윤리적인 금욕주의자다. 그렇다고 그가 프로테스탄트적인 금욕주의와 닿아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생태주의적 전망과 가깝다. 인간의 욕망을 풀어놓으면 망할 수밖에 없다는 인간의 자기통제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깔고 있다.


‘녹색평론’의 발행자인 김종철 교수는 환경운동을 일컬어 지옥길을 포장하는 행위라고 비판하기도 했는데, 진정한 자기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욕망에 조정당하는 인간들의 문화적 의식을 갱신하지 않으면서, 제도와 외적인 변화를 통해 내적인 문제를 덮어버리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김용규의 시선도 바로 여기에 맞닿아있다. 그는 “미끄러운 경사길에 올라선 것처럼 우리의 삶은 통제력을 잃었다”고 진단한다. 숱한 고뇌 가운데서라도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할 수 있었던 햄릿이나 키에르케고르는 우리보다 오히려 행복했을지 모른다고 그는 계속 말한다. 그 이유는 “지금 우리들에게 주어진 자유는 이 미끄러운 경사길에서 내리느냐 마느냐를 선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열광적 환상을 갖고 파멸하느냐 아니면 비관적 전망을 갖고 소멸하느냐를 결정하는 데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위한 것이 세계를 위한 것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절망적인 국면에서 인간을 구하려는 노력과 희망을 버리지 않았던 게 바로 그가 주목한 영화의 감독들이다. 우리는 왜 김용규가 복잡한 현실을 철학적인 복잡함으로 유려하게 통과하는 들뢰즈적인 길을 버리고 다소 단순해보이는 윤리적인 전언을 반복하는 지를 유념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나는 김용규의 저작을 읽어 내려가면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최소한의 기준점들은 에리히 프롬 정도에 오면 이미 다 마련되어있다는 점을 생각하게 됐다. 그것은 ‘안개 속의 풍경’이라는 영화를 해석하며 김용규가 주목한 ‘욕망’과 ‘희망’의 차이에 프롬이 동원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욕망은 대상을 구하는 행위이고, 희망은 구할 수 없는 것을 구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구할 수 없는 걸 구하려고 할 때 인간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명제는 시적으로도 멋있지만, 현실 속에서도 힘을 발휘한다. ‘안개 속의 풍경’을 비롯해 그가 거론한 ‘중앙역’, ‘잠입자’ 같은 영화들은 ‘욕망’이 아니라 ‘희망’에 관한 영화들이다. 욕망과 희망의 차이를 깨달을 때 우리는 좀더 현명해지고, 어떻게 보면 그러한 깨우침들을 통해 ‘위기(爲己)’의 길을 가게 된다는 걸 김용규는 말하려는 듯하다. 이것은 부성애가 무엇이고 모성애가 무엇인지, 시간의 본질과 과거로의 회귀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으로 연속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모두 제각각 잘난 맛에 사는 우리들이 인간이기 때문에 보편적으로 겪어야 하는 인생의 보편적인 행로를 나름대로 들여다보게 된다.


그 앎의 과정이 김용규가 그동안 철학을 공부하면서 추구했던 것이고, 우리에게 알려주려는 것이다. ‘아는 것이 병’이라는 말은 김용규에게 통하지 않는다. 그에게는 앎이란 서로 다른 앎들이 경쟁하면서 진화하는 것이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는 어두운 영화들을 통해서 삶의 잔혹한 진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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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ta 2007-03-05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이네요..잘 읽고 퍼갑니다.^^

기인 2007-03-05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 ㅎ
 
 전출처 : Ritournelle > * 강간의 진화심리학적 설명에 대한 비판은 타당한가

* 담론비평(2007. 3. 3) / 진화심리학을 오해하는 페미니즘에 맞서

 

강간의 진화심리학적 설명에 대한 비판은 타당한가

 

리뷰팀 review@dambee.net

 

   
▲ 르네 마그리트, '강간', 1934.
강간 같은 흉폭한 강력범죄에 대한 학문적 연구에서는 그 원인에 대한 설명을 둘러싸고 여러가지 설명의 유파가 존재한다. 피해 여성에게 심각한 고통을 주는 강간은 그 원인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통해 예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강간에 대한 기존의 설명은 주로 페미니스트들의 사회심리학적 분석이 그 주도권을 잡아왔다. 강간을 사회문제화하고 그것에 대한 최소한의 처벌 기준을 제시해온 그들의 공력은 인정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강간에 대한 진화심리학적 해석이 등장하면서 양 측이 해석공방을 벌이고 있다.

최근 '철학' 제89집에 발표된 김성한 서울여대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의 '강간에 대한 진화심리학의 설명 비판은 타당한가?'는 진화심리학적 설명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을 분류하고 그 각각에 대한 반론을 시도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먼저 김 연구원은 강간에 대한 진화심리학의 설명을 요약해서 제시한다.

불필요한 질문처럼 여겨지지만 왜 남성이 강간 가해자가 될 가능성이 높을까부터 보자. 이는 기본적으로 남녀 간의 생물학적 성 특성의 차이 때문으로 "여성이 상대를 가림에 비해 남성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 모습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남성은 단순히 교접만으로도 자손을 탄생시킬 수 있기 때문에 사랑없이, 상대와 비교적 무관하게 성관계를 맺을 수 있을뿐만 아니라, 시각적 자극 등 비교적 단순한 기작을 통해 성적 욕구가 일어난다. 반면 여성은 임신과 출산 등 지난한 과정을 거치며, 상대를 잘못 고를 경우 자칫 자손의 생존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상대 선택에 신중하다. 이 때문에 성관계와 관련한 수요 공급의 불균형이 일어나고 대부분의 남성들이 성적 파트너가 부족하다고 느끼게 된다.

바로 이런 이유가 성매매의 사회적 승인여부와 관계없이, 나이와 사회경제적 지위 또는 정신병의 유무와 관계없이 지극히 정상적인 남성들마저도 강간범이 되는 경우가 발생하는 이유다. 남자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어떤 설문조사에선 잡히지 않으면 강간을 범하겠는가의 질문에 35%가 그렇다고 답했다는 건 이런 주장을 보강해주는 자료다.

강간으로 인한 여성의 고통에 대해 진화심리학자들은 어떻게 설명할까. 왜 강간의 고통이 여타의 폭력 등에 비해 더 심각한 상처를 안겨주나. 강간 희생자인 여성은 육체적 상처를 넘어서, 아이출산 시기와 상황, 그리고 태어날 아이의 아버지가 될 남성을 선택할 기회를 박탈당하며, 이로 인해 번식적 성공의 가능성이 현저히 줄기 때문이라는 게 그 설명이다. 심지어 진화심리학자들은 이런 가정도 해봤다고 한다. 만약 여성들에게 번식적 성공의 가능성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교육을 시키면 어떻게 될까. 물론 터무니 없는 추론이다. "여성은 교육을 받음으로써 강간당하는 경험을 원하게 될만큼 유연한 본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게 결론.

   
▲ 리처드 도킨스
그렇다고 진화심리학이 강간을 옹호하거나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그레이(R. Gray) 같은 학자는 "진화론적 설명은 우리의 행위가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유전자에 프로그램화돼 있으며, 그래서 그 행위가 자연스럽고 고정적이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듯하다"라고 비판적 입장을 보이지만, 진화심리학은 남성이 상대방에게 고통을 야기하면서까지 강제적으로 성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망을 타고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즉, '여러 여성과의 성관계'를 갖고 싶어하는 욕망이 곧 강간에의 욕구는 아니라는 것. 이런 맥락에서 유전자 결정론자로 비난을 받고 있는 도킨스조차 "우리는 유전자에 대항할 힘이 있으며, 이 지상에서 유일하게 인간만이 이기적 자기 복제자들의 전제적 지배에 반역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에드워드 윌슨도 인간의 공격성은 유전적 성향과 사회가 처한 환경, 그리고 그 사회의 역사라는 세가지 요인이 동시에 작용함으로써 발생한다고 말한바 있다. 예를 들어서 말하자면, 진화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결정은, '물에 빠진 자식을 구하지 않을 수 없어서 구했다'라는 의미의 결정이 아니라, '직각적으로 물에 빠진 자식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는 사실이며, 그러한 감정이 우리에게 육박해 들어온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라고 김 교수는 되풀이 설명한다.

그럼에도 진화심리학자들은 학습이나 환경적 요인들이 통제력을 발휘해 행동상의 변화를 가져올 수는 있지만,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일부 성향 자체를 완전히 변화시킬 수는 없음을 분명히 한다. 이는 호랑이의 맹수적 본능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과 유사한 것이다. 이것 때문에 진화심리학자들은 오해를 사기도 하는데, 김 교수는 논문에서 이들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자연적인 것'이라는 등식은 받아들이지만, '자연적인 것=옳은 것'이라는 등식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연적인 경향을 인정하는 게 곧 옳음을 주장하는 게 아니며, 이는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 말티네즈 교수
그렇다면 이제 진화심리학에 대한 기타 사회과학자들의 구체적인 반박을 살펴보자. 먼저 진화심리학의 강간에 대한 설명은 꼭 필요하지 않은 군더더기라는 관점이다. 니네들이 굳이 나서지 않더라도 충분히 설명된다는 것으로 탕-말티네즈(Z. Tang-Martinez) 같은 이는 "강간이 생물학적 토대를 갖는다고 주장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페미니스트 사회심리학 분석을 통해서도 해결될 수 있다"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말하는 페미니스트 사회심리학이란 남성은 어렸을 때부터 사회화를 통해 여성을 통제, 지배하려는 욕구를 습득하게 되고, 이것이 고착 강화되면서 여성에 대한 성폭력으로 나타난다는 해석으로, 강간이 일종의 정치적 행위라는 주장을 표방하는 입장을 지칭한다.

하지만 그런 설명은 설득력이 약하다. 김 교수의 주장처럼 동일한 현상에 대해 근인(proximate cause)적 설명과 궁극인(ultimate cause)적 설명을 모두 추구하는 게 바람직하다. 우리는 동물의 행동을 신경, 호르몬, 인지과정, 유전자, 조건화, 감정 등을 통해 설명할 수 있으며, 이들 중 어떤 한가지만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게다가 강간에서 생물학적인 성 특성을 간과한다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놓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회심리학자들은 강간이 성범죄가 아니라는 걸 주장하기 위해 강간범들의 증언을 활용하기도 한다. 강간범들은 붙잡히고 나서 왜 그랬냐는 질문에 "불만, 분노, 소외감" 등을 대기도 하는데, 이를 근거로 강간을 힘, 지배, 굴욕, 착취, 가학성에 관한 폭력행위로 규정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게 김 교수의 설명. 강간범들이 "더 이상 내가 위험인물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성적 충동을 최소화해서 말하는 것"일 가능성이 사실상 크고, 일부 조사에서 강간범들은 자신의 실제 동기를 말하기보다 연구자들이 원하는 설명을 제시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강간할 때의 폭력사용을 이유로 강간을 폭력으로 이해하려는 경우도 비판하고 있다. 강도가 피해자의 물건을 강탈할 때 강도의 목적이 물건이지 폭력이 아닌 것처럼, 강간도 마찬가지라는 것. 이 문제에 대해서는 손힐(R. Thornhill) 등의 경험적 연구가 있는데, 강간범의 폭력을 도구적 완력과 과도한 완력으로 나눌 때 대부분 전자에 속한다는 연구가 그것이다. 또한 강간희생자가 살해당하는 경우도, 전체 살인사건에 비해 극히 일부분이고, 면식범의 소행일 경우 사건은폐가 더 크게 작용한다는 점도 덧붙이고 있다.

   
▲ 브라운밀러 교수
또한 일부는 전쟁중에 강간이 많이 발생하는 것을 근거로 강간이 성 범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브라운밀러 같은 이는 전쟁 중에 남자들이 떼거지로 다니면서 여자의 나이를 가리지 않고 집단윤간을 행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월성이나 지배욕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데 이것도 생각해보면 성적 욕구의 충족을 목적으로 일어난 강간으로서, 다만 전쟁중에는 처벌받을 가능성이 현저하게 낮아지기 때문에 강간빈도가 높아지고 행위의 수준도 강화된다는 것쯤은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싶다.

아무튼 강간의 원인에 대한 진화심리학적 설명은 기존의 사회심리학적 설명의 부족한 부분을 잘 메워주고 있는 듯하다. 물론 김 교수의 논문은 진화심리학적 입장에서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사회심리학적 설명들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감이 없지 않다. 때문에 이것은 논쟁을 통해 가다듬어 나가야 할 주제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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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3-05 0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이것이 어떻게 예방-방지, 그리고 처벌에까지 논의가 확대되었으면 좋겠네요.
 

맑스주의의 역사 세미나 <공산당 선언> (맑스 엥겔스 선집 1, 박종철출판사)

1882년 러시아어 제2판 서문

<공산주의당 선언>은 불가피하게 닥쳐오고 있는, 현대 부르주아적 소유의 해체를 선포하는 것을 과제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우리는 급속히 번창하는 자본주의로 인한 현기증과 이제 막 발전하고 있는 부르주아적 토지 소유의 맞은편에서 절반 이상의 토지가 농민들의 공동 점유로 이루어져 있음을 발견한다.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긴다: 비록 토지의 원시적 공동 점유의 심하게 붕괴된 형태이기는 하지만 러시아의 오브쉬치나Obschtschina는 공산주의적 공동 점유라는 보다 높은 형태로 직접 이행할 수 있겠는가? 아니면 이와는 반대로 서구의 역사 발전을 이루고 있는 동일한 해체 과정을 먼저 겪어야만 하는가?

오늘날 이에 대한 가능한 유일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러시아의 혁명이 서구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신호가 되어, 그리하여 양자가 서로를 보완한다면, 현재 러시아의 토지 공동 소유는 공산주의적 발전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372

1883년 독일어판 서문

<선언>을 관통하고 있는 기본 사상: 각 역사적 시대들의 경제적 생산과 그로부터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사회 구조가 그 시대들의 정치사 및 지성사의 기초를 이룬다는 것; 그에 따라 (원시적인 토지 공동 점유의 해체 이래로) 역사 전체는 계급 투쟁의, 즉 사회 발전의 다양한 단계에서의 피착취 계급과 착취 계급, 피지배 계급과 지배 계급 사이의 투쟁의 역사였다는 것; 그러나 현재 이 투쟁은,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 계급(프롤레타리아트)이 동시에 사회 전체를 착취, 억압, 계급 투쟁으로부터 영원히 해방시키지 않고서는 자신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계급(부르주아지)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 기본 사상은 오로지 전적으로 맑스에 속한다. 373

1893년 이탈리아어 판 서문

최초의 자본주의 국가는 이탈리아였다. 봉건적 중세의 종말과 현대 자본주의 시대의 시작은 한 위대한 인물에 의해 고지된다: 그는 중세 최후의 시인이자 동시에 현대 최초의 시인인 이탈리아 인 단테이다. 오늘날, 1300년 당시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이탈리아는 이 프롤레타리아의 새 시대의 탄생을 고지할 새로운 단테를 우리에게 보내 줄 것인가? 394

1. 단테를 중세 최후이자 현대 최초로 보는 이유. 종교와 정치 분리 주장. 중세가 성경과 신적 질서의 현현으로서의 자연을 중시했다면, 단테는 신과 인간을 중시. 이탈리아어(지역어)로 신곡 서술(14세기 초서, 보카치오와 함께 최초. 조선 최초는? ‘최초’라고 하면 지리한 논쟁이 되기 쉬운데, 1511 <설공찬전>으로 봄.)

2. 최초의 자본주의 국가는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의미하는 것?)

공산주의당 선언 본문의 문제들.

I.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Bg발전단계의 상응하는 정치권력의 발전(402)에 ‘기계적’으로 대응되는 pt혁명. 즉 pt혁명의 모델로서의 Bg혁명. (파리꼬뮌 이후 인식이 바뀌기는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큰 변화인지 의문)

II.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들

문제적 부분. 공산주의자를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에 따라서, 당-국가, 전위의 문제들이 나타난다. (사실 이런 문제는 어찌보면 스콜라적 문제일 수 있다. 맑스가 ‘어떻게’ 말했느냐가 중요하다기 보다는, 실제 실천에서 어떤 것이 더 적합했느냐의 문제. 그러면 그 ‘적합성’은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해보면 아는 것일까?)

‘공산주의자’라는 주체는 어디서 왔는가? pt 전체의 이해 관계로부터 분리된 이해 관계는 갖지 않으며, pt운동을 짜 맞추고자 하는 바의 특수한 원리를 세우지 않으면서, ‘항상 운동 전체의 이해를 대변한다는 점에서만 다른 pt 정당과 구별’되는 그들. 또는 그 집단.

그들은 ‘이론적으로는 pt 운동의 조건들, 진행 및 일반적 결과들에 대한 통찰을 여타 pt 대중에 앞서서 가진다.’ ‘공산주의자들의 당면 목적은 다른 모든 pt 정당들의 그것과 동일하다. pt의 계급으로의 형성, Bg 지배의 전복, pt에 의한 정치 권력의 장악.’

공산주의자와 pt는 다른가 같은가? 결국 ‘혁명적 주체’라는 정체성은 누구에게 있는가.

또 pt라는 계급은 대상성으로 대상적으로 규정된다. 생산수단의 무소유(비소유?). 이러한 pt를 주체화하는 몫은 공산주의자들에게 돌아간다. pt의 계급으로서의 형성. (즉 이때는 주체로서의 형성) 이러한 pt가 주체(정치-주체)로 된 이후에, 정치권력을 쥐고 pt독재가 일어난 후, 이 pt독재의 궁극적 목적은 모든 계급의 철폐, 이고 ‘사물의 관리’로의 이행, 즉 다시 정치의 측면에서 ‘비주체화’, 대상으로 돌아간다. (420~421면)

자기 자신의 폐지를 위한 것. 그 매개로서의 또 ‘당’이 등장해야 하는가? 그렇다고 해도, 그러면 당은 당을 없애기 위한 정치를 해야 하는데, 마치 우로보스의 뱀같이, 두 대가리가 서로 먹어들어가다가 없어지는 것? 결국 ‘사물의 관리’하는 정부로의 점진적(?) 이행은 pt독재 후에 가능한가? 아니면 다시 ‘영구혁명’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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