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삶이 예술이 되게 하라

모더니티(근대성)에 관한 책들을 다시 모아서 읽어보려고 하는데, 마침 염두에 두고 있는 책들 중 한 권에 대한 상세한 리뷰가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라울 바네겜의 <일상생활의 혁명>(시울, 2006)에 대한 이재원 그린비 편집장의 리뷰이다(지난번에 라쿠-라바르트에 관한 리뷰를 옮겨온 적이 있다). 국역본이 출간되고 나서 이 책의 영역본은 도서관에 주문하여 부분적으로 복사해놓기도 했는데,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다. 앙리 르페브르와 보드리야르, 그리고 리포베츠키의 책들을 모아서 읽는 김에 바네겜과 기 드보르 등 상황주의자들의 책들도 정리해둘 생각인데, 좋은 길잡이가 될 만한 리뷰이다. 일상의 심미화 경향에 대해서는 따로 읽고 있는 책들이 있어서 조만간 정리해둘 예정이다.

컬처뉴스(07. 03. 26) 삶이 예술이 되게 하라

예술과 정치의 관계, 혹은 정치의 예술화(그도 아니면 예술의 정치화)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지만, 흔히 언급되지 않는 인물들이 있다. 국제상황주의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국제상황주의자들은 오늘날 국내에서도 전설이 된 프랑스 68년혁명의 ‘숨은 원동력’으로 평가받지만, 이들 중 국내에 소개된 인물은 기 드보르(1931~1994), 그리고 이번에 소개할 라울 바네겜(1934~  )밖에 없다. 이는 다른 식으로 말하면, 아직 국내에서 국제상황주의자들은 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프랑스 68년혁명이 혁명 개념에 가져온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아직 폭넓게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침 내년은 68년혁명의 40주기가 되는 해이다. 그런데 내년 5월에도 내게 이런 글을 쓸 기회가 생길지 알 수 없기에 미리 몇 자 적을 요량이다. 따라서 이 글은 68년혁명 40주기를 기념하는 때 이른 축사이기도 하다.

국제상황주의자들은 ‘20세기 최후의 아방가르드’이다. 1909년 2월 20일 이탈리아의 시인 필립포 마리네티가 「미래주의 창립선언」을 발표하며 화려하게 막을 연 20세기의 아방가르드운동은 국제상황주의자들이 해산을 발표한 1972년 3월 23일 공식적으로 끝난 것이다. 아방가르드의 주요 특징은 삶과 예술의 통합을 주장했다는 데 있다. 국제상황주의자들의 구호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선배들의 주장을 “삶이 예술작품이 되게 하라!”라는 구호로 되받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구호가 똑같다고 해서 그 함의까지 똑같은 것은 아니다. 오늘날 국제상황주의자들의 주장을 다시 경청해야 하는 이유를 하나만 들라면 바로 이 점, 그 ‘다른 함의’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국제상황주의자들의 구호가 다른 함의를 갖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이 활동하던 시대 자체가 예전과 달랐기 때문이다. 국제상황주의자들은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활동했다. 스펙터클의 사회란 우리가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보이는 것’(une chose vue/a thing seen), 즉 우리가 능동적으로 보는 어떤 실체가 아니라 우리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우리에게 보여지는 어떤 외양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오해를 무릅쓰고 더 간단히 말하면, 인간이 구경꾼이 되는 사회이다.

바네겜에 따르면 스펙터클의 사회에서 인간은 삶을 볼지언정 살지는 않는다. 혹은 완전무결한 그 무엇인양 제시되는 ‘보여지는 것’(예컨대 ‘좋은 삶의 표본’)을 모방하면서 살 뿐이다. 또한 이처럼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이 단순히 따라야 할 그 무엇으로 제시되는 것을 넘어 소비되는 상품(소비재)이 된다는 점에서 스펙터클의 사회는 소비사회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즉, 우리는 우리에게 제시된 삶을 소비하지 우리의 삶을 살지 않는다. 또한 이렇듯 적극성이 제거된 삶은 권태로울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스펙터클의 사회는 ‘권태로움의 사회’이기도 하다. 『일생생활의 혁명』(도서출판 시울, 2006)은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삶을 살아보자고 제안하는 책이다.(이 책의 원제 자체가 “젊은 세대를 위한 삶의 지침서”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인가? 바네겜은 구경꾼이기를 그치고 참여자가 되라고 촉구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시의 예술가’가 되라고 권유한다. 이때 바네겜이 말하는 시(posie)는 어원 그대로의 시이다. 즉, 시작품(pome) 또는 시작품을 쓰는 기술이 아니라 ‘만들다’(poiein)라는 그리스어 동사에서 파생된 ‘만드는 기술[포이에티케]’(poitik)이다. 따라서 시의 예술가가 되라는 바네겜의 말은 ‘만들어내는 사람[포이에테스]’(poits)이 되라는 말과 같다. 자신의 삶을 직접 만드는 예술가.

바네겜이 그냥 예술가가 아니라 시의 예술가가 되라고 말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바네겜에 따르면 스펙터클의 사회에서는 예술조차 소비재로 축소된다. 그래서 “불행히도 예술가는 스스로를 창조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그는 관객들 앞에서 자세를 잡고 볼거리를 제공한다.” 결국 사람들은 예술가들이 볼거리로 만든 예술작품을 관조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이 옛 창조자에게 돌멩이를 던지게 됐다는 것이 바네겜의 진단이다. 그러나 누굴 탓할 것인가? “이 태도는 예술가가 유발한 것이다.”

 

 

 

 

 

 

 

 

 

  

따라서 바네겜은 “이제 더 이상 예술가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제는 모두가 예술가가 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전적 의미에서의 예술작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앞으로는 열정적으로 삶을 구성하는 것 자체가 예술작품이 될 것이며, “사람들이 만드는 현실과 사건 속에”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슬퍼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매우 잘 된 일이다.”

얼핏 보면 이런 바네겜(그리고 국제상황주의자들)의 주장은 삶과 예술의 통합이라는 점에서 그 이전의 역사적 아방가르드들이 제시했던 주장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그 함의는 상당히 다르다. 이 점을 살펴보려면 다시 포이에티케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포이에티케는 미메시스를 전제로 한다. 즉, 흔히 ‘모방’으로 번역되는 미메시스를 통해 무엇인가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을 미메시스할 것인가,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 미메시스란 무엇인가에 있다.

첫 번째로 흔히 우리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실제 예술작품을 미메시스하는 방법이 있다. 낭만주의에서 유미주의에 이르는 전통에 발 딛고 있는 아방가르드, 특히 “사람은 스스로 예술작품이 되든지 예술작품의 성격을 띠어야 한다”라고 말했을 때의 오스카 와일드가 이런 방법을 택했다. 즉,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예술작품처럼 자신을 만드는 것, 막말로 하면 폼 나게 사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비루한 현세의 삶을 초월한 가상의 이상화된 존재를 미메시스하는 방법이 있다. 예컨대 히틀러를 곧 도래할 ‘민족으로서의 존재’(un être-peuple), 풍전등화에 처한 유럽 문명 앞에서 비극적 결단을 내려야만 하는 ‘영웅’, 새로운 장래를 약속하는 ‘지도자’와 동일시해 이 총통을 미메시스한 나치가 이런 방법을 택했다. ‘도래할 인민(민중)’을 말하는 구 사회주의권식 예술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삶의 심미화’라고도 할 수 있는 이 두 가지 방법 역시 그 자체로 정치적이다. 이 두 가지 방법이 심미화하려고 하는 삶의 지향 자체가 기존의 질서(전자의 경우는 부르주아 문화, 후자의 경우는 기존의 강대국에 종속된 후발 산업국가로서의 위치)에서 벗어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바네겜이 제시하는 방법은 이와 다르다. 그가 미메시스하려고 하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초월적 타자가 아니라 현실의 타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신과 다를 바 없이 피와 살을 가진 인간 동료이다. 그는 자신의 인간 동료를 미메시스함으로써 나 아닌 타자와 진정한 소통을 나누고, 그 과정을 통해 자기 안의 타자, 즉 지금과는 다르게 살 수 있는 또 다른 나의 잠재성을 발현하자고 말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자신의 현존을 식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자기 자신의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바네겜의 말은 바로 이를 뜻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네겜이 말하는 미메시스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모방’이 아니라 프랑스의 철학자 필립 라쿠-라바르트가 말하는 미메시스와 비슷하다. 라쿠-라바르트의 미메시스는 이미 주어진 어떤 이상적 주체를 모방하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타자를 모방함으로써 기존에 ‘자기’ 혹은 ‘나’라고 간주되었던 것들을 자기 안에서 제거하는 과정이며, 이를 통해서 자신이 알지 못했던 자기 안의 타자(고유성)를 끄집어내는 기술이다. 즉, 이는 타자에게 자신을 개방함으로써 타자와 자기 자신을 모두 변화시키는 방법이다. 바네겜이 기존 질서를 전복하려는 “급진적 주체성은 재발견된 동일성의 공동전선”이라는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이렇게 보면 68년혁명의 적자로 흔히 여성운동과 동성애운동이 꼽히는 것도 당연하다). 

과연 우리는 바네겜의 말처럼 타인과 진정한 소통을 나눌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각자의 잠재성을 끄집어내고, 기존의 삶을 바꿀 동력을 얻을 수 있을까? 바네겜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권력의 억압에 맞서 기존의 삶을 바꾸는 데 필요한 세 가지 자기실현의 원천, 즉 “창조의 열정, 사랑의 열정 그리고 유희의 열정”은 “자기 양육의 욕구, 자기 보호의 욕구”와 같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 가지 원천은 모든 존재에 내재해 있다. 그도 아니라면 그것 없이 존재는 더 이상 존재이기를 그친다. 따라서 문제는 다시 실천, 아니 바네겜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인-되기’이다. 안타깝게도 이 요구는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일상생활의 혁명』이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것은 바로 이런 각성이다.(이재원 _ 그린비 편집장)

07. 03. 26. 

P.S. 우리에게 예술가가 되기를 강권한다는 점에서 바네겜과 같은 편에 서는 사상가는 '프랑스의 니체주의자' 미셸 푸코이다. 그 또한 우리의 삶 자체를 '예술작품'으로 만들 것을 권유했다. 내가 읽은 바로는 앨런 메길의 <극단의 예언자들>(새물결, 1996)이 유익한 안내서이다. 니체의 삶-예술론에 대해서는 네하마스의 <니체: 문학으로서의 삶>(책세상, 1994)이 유명하다. 오래전 책이지만 아직 절판되지 않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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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중산층과 중산층 아닌 것들

어제 아내와 걷다가 특정인이 중산층인가 아닌가에 대해 이견을 확인했다.

그 사람은 집도 한 채 있고 수입이 많지는 않지만 그럭저럭이고, 공부는 할 만큼 했던데, 아내는 그분이 중산층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받다가 예전에 스크랩했던 걸 꺼내 봤다.  내 기억도 정확하지 않았다.

대충 정리해보면,

 일단 가난한 사람의 기준을 알아 두는 게 필요할 듯하다.

2007년 법정최저임금

시급 3,480원으로 결정됐다. 이 금액은 일급으로 환산할 경우 2만7,840원이고 월액으로 환산하면 주44시간 기준으로 78만6,480원이고 주40시간 기준으로 72만7,320원이다.

 

사실 이 돈은 너무 적다. 하지만 내 주변에도 이 정도 월급을 받으며 생계를 꾸리는 사람이 있다. 부모님한테 얹혀 살고 있으면 이 돈으로 용돈 쓰고 저축도 한다. 반대로 부양가족이 있다면 큰일이다. 혹은 적당히 얹혀 살기도 하지만 만만치 않게 가족들한테 자기 돈이 깨지는 사람들이 있다. 내 주변에는 어떤 사람이 저 돈 받고 일하나? 일단은 미술학원 초짜 강사들과 영세 출판사 편집자들.  아마 이 사람들은 가족들한테 얹혀서 살 만한 사람들일 거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일을 해야 하겠지.

그러니 내 주변의 이런 사람들이 진짜 가난한 사람은 아닐 것 같다.

 어쨌든 이런 통계를 보자.

 

기초생활보장수급자와 최저생계비의 120% 미만 소득을 올리는 차상위계층이 716만명 빈곤층 규모는 전체 인구의 15%

 

이 정도면 무시 못할 숫자다.

 이 사람들의 수입은 얼마일까?

최저생계비는

1인 가구가 40만1천원, 2인가구 66만9천원, 3인가구 90만8천원, 

 4인가구 기준으로 월 113만6천원

 

 

 

그러면 소위 보통 사람들은 얼마나 벌고 살까?

 

 가구 평균소득

 3134만원으로 추산된다. 우리나라 총인구(4882만명)를 총가구수(1553만가구)로 나누면 평균 가구원수는 3.1명이고, 1인당 개인소득은 1011만원이기


하지만 이는 세수통계의 근로자가구 평균소득보다 1100만원 정도 많다. (그렇다면

근로자 가구 평균소득은

 2000만원 가량, 대충 3으로 나누면 700만원이 안 된다.)

 

그럼 대기업 노동자들은?

2005년 상반기 보고서에 따르면 월급으로 남성이 424만6천원, 여성이 262만5천원 (이 기사는 남녀 성비 차를 강조하는 것이었지만-_- 연봉으로 대략 5000과 3200만원 대?)

 

그리고 주택 보급률이야 새삼스러운 건 아니지만,

2005년 현재 주택보급률은 105.9%

자가 비율은 55.6%, 전체 세대의 5%가 주택의 21.2%를 소유, '집 부자' 순으로 상위 10명이 소유한 주택 수는 무려 5508호, 상위 30명이 소유한 주택 수는 9923호에 달해 주택소유 편중

 

 

대충 이런 거 정리하고 나서 중산층의 기준을 찾아봤다.

경제기획원(1985년)은 중산층으로 분류할 수 있는 소득기준으로 최저생계비의 2.5배를 제시 (우리집은 2인 가구니 67만원 *2.5= 160만원 가량 벌면 된다^^, 3인 가구면 91만원*2.5= 225만원 가량이면 중산층이다.)

 

서울대 홍교수는 2002년 서울시정개발연구원 자료를 토대로 가구주의 종사상 지위, 교육수준(2년제 대학졸업 이상), 소득(도시가구 월평균 소득 90% 이상;), 주택(자가 20평 이상)을 중산층으로 분류했다. 그러나 4가지 기준을 모두 충족시키는 가구수는 20.8%에 불과했고 3가지 이상을 충족한 가구는 48.8%였다. 반면 단 한가지도 충족시키지 못하거나 한가지만 충족한 가구는 24.1%로 나타났다.

 

 

 대충 찾아보니까  우리나라 사람들 별로 화려하게 살고 있지 않다. 나는 가끔 사람들과 얘기하다 보면 기본적인 감각이 다르다고 느끼게 된다. 의사소통이 안 될 때가 있다. 똑똑하고 공부 많이 한 진보적인 사람들조차 과연 실감으로 느끼고 있는 게 뭘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하는데 아예 관심없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다. 서로 소통할 마음이 있으면 뭐 별 문제가 아니지만 소통할 의지가 없을 때는 그런 게 참 낭패스럽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학교에 가서 안면이 있는 후배를 만난 기억이 난다. 잠깐 옆에 앉아서 얘기를 하다가 "졸업하고 한 1년 동안은 내가 이제 학생이 아니라 노동자라는 게 잘 실감이 안났다. 그러다가 한 2년 정도 지난 언제가쯤 '나는 정말 노동자구나 확실히 학생이 아니구나' 하는 실감이 확 들더라." 뭐 이런 시답잖은 얘기를 했는데, 그 후배가 갑자기 뭐쓱해 하면서 "노동자라니" 뭐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가는데, 너무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당혹해하는 태도였다.

 

하여간 실감의 문제가 내게는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다. 내가 실감하는 것을 상대방이 실감하게 하기. 혹은 그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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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오리 2007-03-26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숫자만 나오면 갑자기 머리가 마비가 되서리..;;; 제가 어디에 속하는지 모르겠어요.;;;;
엽서는 우체국에 아직 못다녀와서...히~ 늦더라도 귀엽게 봐주세요.^^

기인 2007-03-26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넹 ㅎㅎ 저는 중산층과 최저생계비 사이입니다 ^^;
 

존 스토리(박모 옮김), 󰡔문화연구와 문화이론󰡕, 현실문화연구, 1994.

1. 대중문화란 무엇인가?

문화/이데올로기/대중문화 popular culture

결국 무엇을 ‘popular culture'라 명명하고, 어떠한 전제와 목적 하에서 연구할 것이냐가 문제가 되는 지점이다. 물론 이는 변증법적으로 실제 자료와 연구과정에 따라서 구체화될 성질의 문제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람시의 헤게모니라는 개념은 유용한데, 이 개념자체가 변증법적으로 운동하고 있는 대중문화의 현상과 힘의 역학을 제시하고, 따라서 이를 변증법적으로 분석할 수 있게 한다.

대중문화라는 영역은 지배계급이 헤게모니를 얻고자 하는 시도와 이에 대한 반대의 형태로 짜여 있다. 그러므로 대중문화는 지배이데올로기와 일치하는 강요된 대량문화로 구성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자발적으로 발생하는 대항의 문화들로 구성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는 여러 가지 조합으로 지배적, 피지배적 또는 서로 상응하는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가치와 요소들이 ‘섞인’ 두 문화의 타협장소라고 할 수 있다. (27)

물론 이 개념은 쿤의 ‘패러다임’에 관한 연구처럼, 실제적 ‘문화사적’인 연구를 통해서 뒷받침되어 어떻게 헤게모니 교체가 이루어지는가를 긴 호흡으로 탐구해야 한다. 이 ‘헤게모니 교체’나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용어는 저널리즘에서 너무 일상화되고 상투화되어, 그 혁명성을 사장(체게바라를 문화상품으로 전유하듯, 헤게모니를 정치 집권으로 전유한다)시키고 있다. 이게 3~4년마다 전환되는 것이라면, ‘한나라당’과 ‘열우당’의 권력싸움이 ‘헤게모니 교체’라면, 그게 무슨 헤게모니인가?(아니면 어떠한 다름이 있는가? 정통왕조파와 오를레앙파의 차이? 2002대선에서 반한나라당 노선은 어떠한 계급적 분석과 실천적 판단에서 비롯한 것일까? 참고로 그람시의 ‘진지전’개념을 원용하며 수구에 대한 헤게모니 투쟁이라는 글을 부록?으로 제시한다. 이건 유머의 수준을 초월한지 오래다.) 이러한 정치 권력싸움이 ‘헤게모니 교체’라고 떠드는 것 자체가, ‘한나라-열우당’ 근저에 있는 ‘공통된’ 헤게모니의 지속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며, 이데올로기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혹은 이러한 구분은 내 정치적 입장에 따른 구획이다. 수구와 보수 사이, 친일파-독재 잔재와 합리적 부르주아지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그으려는 노력은 어떤 의미와 효과가 있는가? 이것이 오히려 현정세에서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ex) 반창연대, 유시민의 민노당 ‘사표’ 발언 등.

2. ‘문화와 문명’의 전통

a. 문화 근대화의 세가지 유형? 미국, 서구, 식민지

‘무정부’에 반대하여 문화는 국가를 제시한다. 즉 “우리는 권위를 필요로 하며... 문화는 국가의 이상을 제시한다.” 두 가지 요인이 국가를 필요하게 만드는데, 첫째는 권위의 중심 역할을 하던 귀족층의 쇠퇴이며, 둘째는 민주주의의 출현이다. 이들은 함께 무정부에 적합한 토양을 만들었다. 해결책은 문화와 강제의 혼합으로 이 토양을 제거하는 것이다. 아놀드의 문화화된 국가는 중산층이 이 기능을 충분히 발휘할 만큼 문화화될 때까지 노동계급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욕구를 조절하고 통제하는 기능을 행하는 것이다. 국가는 두 가지 방식으로 작동할 것이다. 첫째로 더 이상 하이드파크에서 데모가 일어나지 않도록 탄압하며, 둘째로 또한 문화의 ‘아름다움과 빛’을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42)

자본주의=네이션=스테이트가 행복하게(?) 결합된 또는 그렇게 움직였던 영국과는 달리, 조선은 어떠했는가? 자본주의=스테이트와 네이션의 분리. 여기에 권위의 중심이었던 ‘소중화’주의와 민족주의는 일제(스테이트)의 지배문화, 지배이데올로기에 대해 저항했고(또는 쉽게 타협할 수 없게했고), 식민지 시기 일제의 통치가 마침내 대동아공영권으로 ‘자본주의=스테이트->네이션’을 결합시키려는 이데올로기로 변질되기까지 저항의 지점을 생성했다. 이러한 ‘소중화’나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호명되지 않은 주체/식민객체들을 점유하려는 양방향의 운동성으로만 식민지 시기 역사를 바라보는 것에 대해서 많은 반성이 이루어지고 있다. 일상 또는 회색공간의 복원. 너무 냉소적이고 성급하게 ‘그런데?’라고 묻기 전에 살펴보면, 이러한 연구들은 ‘대중’이 실제 움직이고 사고했던, 즉 그들의 ‘문화’를 살펴보는 것을 통해 실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다 정치하게 살펴보고, 대중을 이해해보려고 하는 것의 일환으로 제출된 것일까? 또 미국예외주의적 언급(60)에서 서구가 귀족문화 해체 후에야 비로소 부르주아 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미국, 서구, 식민지라는 세 가지 유형의 (근대화) 문화사가 설정될 수 있을까?

B. 엘리트주의와 대중주의, 또는 아비투스와 문화대혁명

문화적 그리고 정치적 문제에 있어 민주주의의 위협은 리비스주의자들에게는 끔찍한 것이었다. 게다가 Q. D. 리비스는 “권력을 쥔 자들은 더 이상 지적 권위와 문화를 대표하지 못한다”고 주장하였다. 아놀드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전통적 권위의 붕괴가 대중민주주의의 발흥과 동시에 일어난 것으로 보았다. 이 두 현상은 문화화된 소수를 압박하고 동시에 ‘무정부’가 설 수 있는 토양을 만들어주었다. (47)

이러한 엘리트주의에 반대하여(스토리의 책에서는 그러한 톤이있다) 극단으로 밀어붙이게 되면, 떠올려지는 것은 중국의 문화대혁명이다. 대중주의, 하방운동, 홍위병들의 난립으로 이루어져서, ‘인민의,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모든 활동, 심지어 의료행위까지도 ‘인민’이 할 수 있다고 믿고, 청소년 홍위병이 외과수술책을 보고 수술을 집도했다고 한다. 이러한 수준높은 ‘과학’과 대비되게 수준높은 ‘문화’라는 것이 과연 엘리트들만 ‘향유’하고 practice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우리가 ‘제대로’ 오페라를 감상하기 위해서, 현대미술에 감탄하기 위해서, 현대음악을 비평하기 위해서는 의대에서 공부를 하는 것처럼, 일정량의 전문지식을, 사실 상당한 량의 지식을 쌓아야 한다. 과학과 유비해서 말하자면, (혹은 문화비평 또한 하나의 ‘과학’이라는 의미에서) ‘아는만큼 보인다’라는 명제는 어떻게 부정될 수 있을까? 혹은 부정되어야 하는가? 이를 부정하고 싶어하는 ‘대중주의’적 ‘이데올로기’는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역사발전‘법칙’에서의 pt의 역할과의 관련성.

3. 문화주의

문화의 가장 일반적인 정의에서조차도 우리는 세 개의 층을 구별해야만 한다. 그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충분히 인식되는 그 시대, 그 공간의 살아있는 문화가 있다. 또 예술로부터 가장 일상적인 내용들까지 갖가지 종류의 내용들이 기록된 한 시대의 문화가 있다. 마지막으로 살아있는 문화와 각 시대의 문화를 연결해주는 요소인 선별적 전통의 문화가 있다고 할수 있다. (84)

윌리엄즈가 나누는 문화의 세 층위 중, ‘실재’라고 할 수 있는 ‘그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충분히 인식되는 그 시대, 그 공간의 살아있는 문화’라는 것은 무엇인가? 윌리엄즈는 ‘19세기의 독자는 후대의 어떤 독자도 완전히 재생시킬 수 없는 그 시대의 소설들이 다룬 삶의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은 바로 현재 우리에게는 선택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한다. 과연 그러할까? 그러한 경험의 ‘보편성’이라는 것은 있는가?

윌리엄즈에게는 문화적 전통의 선별성을 이해하는 것이 핵심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선별성은 항상 (필연적으로) “한때는 살아있는 문화였던 것에서 상당부분이 배제된” 문화기록이나 문화전통을 만든다. (84)

‘완전한 과거’의 ‘보편적 경험’을 공유하는 대중이라는 것은 허구다. 그러한 허구를 전제하는 이유는 윌리엄즈의 문화연구 목적이 ‘실제 문화적 과정’을 드러내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있다고 전제함으로서 인식론적으로 편해지는 ‘물자체’와 같은 통합적 과거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5. 마르크스주의

5.1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문화에 대한 마르크스적 접근은 무엇보다도 문화의 텍스트와 실천행위들을 그것이 산출된 역사적 상황 속에서(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소비와 수용이라는 변화하는 상황들 속에서) 분석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적 방법론이 문화에 대한 여타의 ‘역사적’ 접근과 구별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인식 때문이다. (...) 분석의 핵심은 사회가 자신의 존재방식, 곧 특정한 생산양식(*한 사회가 생필품(식량, 주거 등)을 생산하기 위해 조직된 방식)을 만드는 방식이 궁극적으로 그 사회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형태, 더 나아가 미래의 발전까지도 결정짓는다는 것이다. (144-145)

토대와 상부구조 사이의 관계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한편으로 상부구조는 토대를 표현하는 동시에 정당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토대가 상부구조의 내용과 형식을 ‘조건’짓거나 ‘결정’짓는다. (...) 엥겔스가 주장하는 것은 경제적 토대가 상부구조의 토양을 만들기는 하지만, 여기서 일어나는 활동들이 온통 다 이러한 사실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물론 이것이 명확히 한계를 짓고 영향은 주지만), 이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제도들이나 그 외 요소들 간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화는 결코 역사의 주된 힘은 될 수 없으나, 역사적 변화나 사회안정에 있어서 중요한 도구로서 활발한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145-147)

마르크스적 관점에서 대중문화는 상부구조의 이데올로기적 형태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대중문화분석에 있어서 유물론적 역사관은 어떤 내포의미를 가지는가? 우선 첫째로 어떤 텍스트나 실천행위의 이해나 설명을 위해서는, 이를 이것이 생산된 역사적 시기에 놓고, 이것을 산출한 역사적 상황에 입각해서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위험이 있다. 즉 역사적 상황은 궁극적으로 경제적인 것이기 때문에 문화분석이 경제분석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그렇게 되면 문화적인 요소들은 경제적 요소들의 수동적 반영이 되고 만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경고하듯(...), 행위주체와 구조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한 변증법의 작용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147)

카우츠키 이래 속류 맑시즘의 기계적 결정론을 반박하며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을 강조하고 있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를 상기한다면, 기계적 결정론은 맑시즘에 전적으로 반한다. 행위주체(맑시즘에서는 집단 주체로서의 pt)의 혁명적 주체성이 중요한 것이고, 맑스주의적 입장에서의 문화분석은 단순화시켜 말해본다면, 궁극적으로는 이 집단 주체로서의 pt가 ‘왜 움직이지 않는가’며 ‘어떻게 움직이게 할 것인가’라고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왜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고, 어떻게 하면 일어나게 할 것인가의 문제. 끝끝내 망하지 않은 자본주의에 대한 ‘변명/설명’으로서의 대중문화. 파리꼬뮌 이후 맑스, 68이후 알튀세르.

5.2 프랑크푸르트 학파

이 장은 아도르노, 마르쿠제, 호르크하이머와 벤야민으로 양분된다.

a. 아도르노, 마르쿠제, 호르크하이머

이들은 고급문화와 문화산업을 구분하며, 전자는 현재의 한계를 뛰어넘는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살리고, 대량문화의 감옥에서 나올 수 있게 하지만, 후자는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되도록 만든다고 한다.

문화산업은 ‘규격화, 상투성, 보수성, 허위, 조작된 소비상품’ 등의 특징을 지니고 있는 문화를 생산함으로써 노동계급의 정치성을 희석시키며,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자본주의 사회의 틀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정치, 경제적 목표로만 그들의 지평을 제한한다. (...) 짧게 말하면 문화산업은 ‘군중 the masses'들이 현재의 한계 이상 생각하지 않도록 조장한다. (149-150)

‘정통’ 문화는 종교의 이상적 기능을 이어받아 현재 한계를 뛰어넘는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살리고, 대량문화의 감옥에서 나올 수 있는 열쇠를 갖고 있다. 이는 정통 문화가 교훈적으로 작용한다는 의미가 아니며, 그 ‘내용’으로 명령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형식’으로 설득한다는 것이다. (150)

문화산업은 이익의 추구와 문화적 동질화를 위해 ‘정통’문화로부터 비판적 기능과 부정의 방식, 즉 ‘위대한 거절’의 기능을 박탈한다. 상업화는 또 ‘정통’문화를 또다른 문화적 상품으로 개조하여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어 그 가치를 하락시킨다. (153)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의하면 자본주의하의 노동과 여가는 강제적인 연관성을 갖게 된다. 즉 문화산업의 효과는 노동의 성격에 의해 보장되며 노동과정은 문화산업의 효과를 보장한다. 그러므로 산업화가 노동시간을 조절하는 것처럼 문화산업의 궁극적 기능은 여가시간을 조절하는 것이다. 자본주의하에서의 노동은 감각을 무디게 하며 문화산업은 대신 그 과정을 더욱 존속시킨다. (...) 노동은 대량문화로, 대량문화는 노동으로 돌아가게 한다. 유사한 방식으로 문화산업에 의해 배포되는 예술 또는 정통 문화도 비슷하게 작용한다. 문화산업의 범위 밖에서 작용하는 정통 문화만이 이 순환작용을 깰 수 있는 것이다. (154-155)

현대예술은 ‘상품’으로서의 자신을 거부하려고 노력하면서도, 자본주의체제 하에서의 예술가라는 조건하에서 움직인다. 문화산업의 범위 밖이라고 해도, 자본주의는 엄연히 작동하는 것이다. 도배와 집수리를 하면서 예술을 하는 문화노동자들에 대해서 언론은 이를 바탕으로 문화노동자에 대한 처우개선을 이야기하지만, 이는 다시 문화노동자들을 체제내적으로 받아들이려는 포섭과정에 다름이 아니다. (부록 2참조) 아도르노 등의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적 입장에 대해 스토리는 문화산업이 소비자들을 쉽게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이고 식별력있는 공중에게 산업체가 필사적으로 음반을 팔려고 한다면서, 음반의 80퍼센트가 사실상 돈을 잃는다는 통계적 수치를 제시한다. 따라서 대중문화의 소비가 적극적인 행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말이 되는 소리일까? (각 음반사의 광고 홍보 규모 등은 따져보지 않았는가? 더 광고를 많이한 비누와 그렇지 않은 비누와, ‘대량문화’사이의 얼마만큼의 큰 질적 차이가 있는가?) 최근에 한국 영화산업의 거품이 빠지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대부분의 영화가 수익을 내지 못한다고 한다. 따라서 대중문화가 소비자들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가 적극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취사 선택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괴물의 스크린독점으로 인한 스크림독점규제법을 상기해보자. ‘우리’는 괴물을 선택한 것인가, 아니면 괴물이 우리에게 제공된 것인가? 물론 이것이 일방향적인 것이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만, 문제는 어느지점을 공격해 들어갈 것인가가 아닌가?

b. 벤야민

아우라의 쇠퇴는 문화 텍스트나 생산물을 전통의 권위와 儀式에서 멀어지게 한다. 이는 텍스트나 행위의 다양한 해석을 허용하며 다른 맥락에서나 다른 목적으로도 사용될 수 있게 해준다. 더 이상 그 중요성은 전통의 보호를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의문시되기까지 한다. 즉, 의미는 소비의 문제로, 즉 수동적(아도르노에게는 심리적) 사건이 아닌 능동적(정치적) 사건이 된다. (...) 소비 또한 변화하여 기존 종교적 제의의 위치에서 미학적 제의로 옮겨왔으며, 이제 또다시 정치적 실천으로 기반을 옮기고 있다. 문화는 대량문화가 되었을지언정 소비는 대량소비가 된 것이 아니다. (...) 의미와 소비의 문제들은 수동적 관조에서 능동적 정치투쟁의 문제로 변화한다. ‘기계적 복제’의 긍정적 잠재성을 받아들인 벤야민의 견해는 ‘아우라’의 문화에서 ‘민주적’ 문화로 옮겨 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화는 더 이상 유일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이에 대한 논의가 허용되고, 그것을 사용하고 변화시키는데 얼마든 열려 있는 것을 의미한다. (...) 아도르노가 의미를 생산양식에서 찾으려고(즉 문화텍스트가 어떻게 생산되었는가에 따라 소비와 의미가 결정된다고하는) 했다면, 벤야민은 의미가 소비의 순간에 생산되는, 생산양식과 상관없이 소비과정에 좌우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159-160)

아도르노보다 벤야민이 실천적으로 더 ‘유용’할 수 있는 지점은, 아도르노에 따르면 우리는 대중문화를 버리고 ‘정통문화’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아도르노의 글쓰기 자의식은 대중들이 아도르노를 읽을 수 없게 만드는데도 불구하고, 이런식으로 대중문화는 썩었어라고 고함을 (*그것도 심지어 대중이 못 알아듣게) 지르는 것을 통해서? 반면에 벤야민은 소비행위에 의미를 부여함을 통해서, 언더그라운 문화나 대중문화의 전유양식에 대해 이해와 긍정적 가치부여를 할 수 있게 한다. 대중문화에 ‘빠진’ 것이 아니라 이를 주체적으로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늘씬한 모델의 광고를 보고 청바지를 입는 것이 아니라, 찢어서 입는다고 뭐가 달라지나? 결국 대중의 ‘주체성’은 남아있지만 그런 곳에서 ‘소비’하게 만듦으로서 현상태에 만족하게 하고 만다는 아도르노의 비판은 남아있는 것이 아닌가?

5.3 알튀세르주의

a. 알튀세르

알튀세르는 토대/상부구조의 공식에 따른 기계적 해석 및 사회적 총체성에 대한 헤겔식 관점 양자를 모두 거부한다. 그는 그 대신 사회구성체 social formation개념(‘사회’에 대한 특별한 이론화)을 주장한다. 사회구성체는 세 가지 상이한 실천 즉 경제적,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실천으로 이루어진다. 토대와 상부구조 간의 관계는 어떤 표현적인 것이 아니다. 즉 상부구조는 토대의 표현이라든지 수동적 반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토재의 존재를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이 모델은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을 허용한다. 여전히 결정 determination의 문제는 남아있지만, 그것은 최종심급에서의 결정이다. 이 결정은 알튀세르가 ‘지배내 구조’라 부르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즉 이는, 경제적 요인이 항상 결정의 요인이 되기는 하지만, 어떤 특정한 역사적 정세에서 경제적 요인이 필연적으로 지배적 요인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예를 들어 봉건제에서는 정치적인 것이 지배적 위치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특정 사회구성체내에서 지배적인 실천은 그 사회 특유의 경제생산 형태에 의존할 것이다. 알튀세르가 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본주의에 있어서 경제적 모순은 결코 순수한 형태를 띠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최종십급의 고독한 시간은 결코 오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결정은 다양한 모순들과 결정들의 구조화된 명시화 articulation, 즉 ‘과잉결정 over determination'으로서만 존재한다. 경제적인 것은 최종심급에서 결정요인이 된다. 이는 다른 심급들이 부수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실천이 지배적인지를 경제적 요인이 결정하기 때문이다. (161-162)

이데올로기에 대한 알튀세르의 이론화는 문화연구에 핵심적인 영향을 끼쳤다. (...) 사람들이 이데올로기를 통해 실제 존재상황과의 관계를 지속시킨다는 것이다. (...) 이데올로기, 즉 다양한 재현(이미지, 신화, 생각 또는 개념)의 체계(자체 논리와 엄밀성을 가진)는 이 공식 속에서 결코 단순히 경제적 토대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의 실천행위로서 존재한다. (...) 경제적인 것, 요컨대 특정한 역사적 생산양식이 일정한 생산관계를 그 안에 포함하고 있는 일정한 생산수단을 사용하여 어떤 원재료를 생산물로 변형시키는 것처럼 정치적 실천행위 또한 같은 방식으로 사회적 관계를 변형시키고,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이데올로기적 실천행위가 사회구성체에 대한 개인들의 살아 있는 관계들을 변형시킨다고 주장한다. (162-163)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은 이미 맑스-엥겔스도 언급한 것이고, 알튀세는 이를 부각시키면서 이데올로기 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닫힌 체계이고, 이는 답할 수 있는 문제만을 제기한다. 때문에 비평적 행위는 이러한 닫힌 체계에 내재하는 ‘문제설정 problematic'을 해체하여 징후적symptomatic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문제설정은 텍스트나 실천행위의 조직체인 언술들이 교차 경쟁하며 다양한 조직을 구성하고 만드는 이데올로기적, 또는 이론적 구조이다. 이러한 문제설정은 그 속에 포함된 것 만큼이나 배제된 것으로 인해 역사적 존재의 중요성과 연관되어 있다. 징후적 독해는 이중적 독해로서, 명백한 텍스트를 해석하며 또 여기에서 간과되고 결여된 것을 통해 숨어있는 텍스트를 생산하고 읽는 것이다. 문제설정을 해체하여 그 무의식적 구조를 묻는 방식인 것이다.

b. 마슈레

마슈레의 문학생산이론은 이러한 알튀세의 징후적 독해의 기술을 문화적 텍스트에 적용한 것이다. 그에게 있어 텍스트는 의미를 감추고 있는 수수께끼가 아니라 복합적 의미의 구조이다. 텍스트를 ‘설명’한다는 것은 이를 인지하는 것이다. 모든 문학텍스트는 명백하고 함축적이며 침묵하고 결여된 여러 언술들 사이의 대립으로 이루어진다는 의미에서 탈중심적이다. 그러므로 비평행위의 과제는 텍스트의 통일성이나 총체적 조화, 미학적 통일성들을 측정하고 이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의미들의 갈등을 보여주는 텍스트 내의 균형을 설명하는 것이다. 즉 비평행위는 텍스트의 침묵이나 부재, 불완전한 구조의 이데올로기적 필연성을 설명하는 것, 즉 텍스트가 말할 수 없는 것을 연출하는 것이다.

텍스트는 말하고자 하는 것과 실제로 말하는 것 사이에 하나의 ‘틈’이 있고, 이러한 텍스트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말하려고 하는 것을 말하기 위해 억지로 말한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해야 한다. 바로 여기에서 텍스트의 ‘무의식’이 성립된다.. 그리고 이 텍스트의 무의식을 통해 그 존재의 이데올로기적, 역사적 조건과의 관계가 밝혀지는 것이다. 텍스트의 무의식은 역사적 모순을 반영하기보다 오히려 이 모순들을 환기시키며 연출하고 보여준다. 텍스트는 항상 해결되어야 할 문제를 제시함으로써 시작하고, 이의 해결과정으로서 이야기narrative를 진행시킨다. 그런데 마슈레에 따르면 주어진 문제와 해결책 사이에는 지속성보다 항상 단절이 있고, 이 단절을 연구함으로써 텍스트와 이데올로기, 역사와의 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 이를 도식적으로 보면 텍스트는 세 단계로 나뉜다. 이데올로기적 목적과 실현, 그리고 텍스트의 무의식(징후적 독해행위에 의해 산출된)이며 이는 역사적 ‘진실’이라는, 억압된 것이 다시 회복되는 단계이다. 그러므로 마슈레적 비평행위는 이데올로기에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문학텍스트가 자체와는 모순되는 이데올로기를 보여주는 방식을 설명하는 것이다.

c. 헤게모니로

알튀세르의 두 번째 공식에서도 이데올로기는 존재의 실제 상황과 개인들의 상상적 관계를 재현한다. 다른 점은 이 개념이 이제 이 생산의 관계들이 재생산되는 과정까지 포괄하는 것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이데올로기는 이제 더 이상 사상의 집합체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즉 교육, 조직된 종교, 가족, 조직된 정치, 미디어나 문화산업 등-의 행위와 생산을 통해 재생산된 살아있는 육체적 행위(예를들어 제의, 관습, 행동의 패턴, 실질적 형태를 갖춘 사고방식)로 인식된다. 이 두 번째 정의에 따르면 “모든 이데올로기는 구체적인 개인을 주체로 ‘구성해내는’ 기능이 있으며, 이 기능에 따라 규정된다. (...) 이데올로기는 이렇게 이데올로기의 육체적 행위에 종속되는 주체들을 창조하는 것이다. (...) 이데올로기에 대한 알튀세르의 두 번째 모델과 이것을 문화이론에 적용하는 것의 문제점은 이것이 너무나 잘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항상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요구하는 모든 필요불가결한 이뎅로로기적 습관에 맞게 성공적으로 재생산된다. 거기에는 실패나 갈등, 투쟁 또는 저항의 기미조차 보이는 일이 없다. 대중문화의 관점에서 예를 들어, 광고는 우리를 소비하는 주체로서 호출하는 데 항상 성공하기만 하는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문화연구자들 중 많은 이들이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자인 안토니오 그람시의 연구로 돌아서게 된 것이다.

5.4 헤게모니 이론

기본적으로 이 개념은 발전된 서구민주사회에서 자본주의의 억압과 착취에도 불구하고 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는지를 해명하려는 것이다. 헤게모니란 지배적 계층(들)이 단순히 사회를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지적 리더쉽을 가지고 사회를 이끌어가는 상황을 지칭한다. 이는 사회에 다수의 합의를 바탕으로 한 사회적 안정이 있음을 의미하며, 피지배계층이 현재의 권력구조에 자신들을 묶어두는 가치나 이상, 목적, 문화적 의미들을 능동적으로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헤게모니가 다수의 합의를 전제로 하긴 해도, 갈등없는 사회나 상황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헤게모니가 뜻하는 바는 이러한 갈등들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안전한 곳으로 돌려지고 수용되었다는 것이다. (...) 지배층 집단의 전략의 일부는 동의를 얻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이러한 동의가 얻어지지 않을 때는 항상 억압적인 국가의 기구들-즉 군대나 경찰, 감옥체계 등-의 무력이 사용된다고 주장하였다.

대중문화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헤게모니는 매우 유용한 개념임이 밝혀졌다. 헤게모니 이론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대중문화는 사회의 지배력과 피지배력 사이에 교류가 이루어지는 장소로써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성이나 세대, 인종, 지역과 같은 여러 형태에 따라 분석될 수 있다. 대중문화는 합병과 저항 사이의 알력, 즉 지배층의 이해관계를 보편화시키려는 시도와 피지배층의 저항 사이에서 투쟁이 일어나는, 문화적 교류와 협상(타협적 평형)에 의해 구성된 영역으로 명시화된다. (...) 헤게모니 이론은 대중문화를 어떤 의도들과 반대 의도들 사이에 ‘타협된’ 혼합물로 생각하게끔 해주며, 또한 이것은 ‘위’나 ‘아래’, ‘상업’이나 ‘정통’ 양측 모두에서 비롯된 것이고 저항과 합병의 힘들 사이를 움직이는 저울의 추 같은 것이다.

*마슈레의 문학생산이론에 대한 이해

마슈레의 문학생산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생산’이라는 개념부터 알아봐야 한다. 여기서 생산은 노동자가 원재료를 노동을 통해서 어떠한 제품을 생산하는 것처럼, 작가도 일상적 이데올로기의 원천인 언어를 가지고 무엇인가 말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적 욕구를 통해 작품을 생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의식적으로 ‘창조’와 대비된다.

이러한 작품은 이데올로기를 매개로 하여 그것이 생산되어진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지만, 작품자체는 이데올로기에 환원되어 설명될 수 없다. 오히려 작품은 그 속에 일관되게 관철된 이데올로기적 관점을 통하여 현실을 파편적으로 반영하는 동시에, 이데올로기적 관점이 내포하고 있는 객관적 한계를 명백히 드러낸다. 작품과 이데올로기 간의 모순적 관계가 문학적 효과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즉 현실을 총체적으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매개로 ‘선택적’으로 반영함으로써 반영과 반영의 부재, 즉 ‘침묵’을 작품은 포괄하고 있고, 이러한 ‘침묵’에 대해 탐구함으로서 그 자체로는 본질적으로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할 수 없음을 그 속성으로 하는 이데올로기의 환상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과학’적 비평의 기능이다.

작품은 주어진 의미로 귀속될 수 없는 비환원적 성질을 가지며, 이질적 요소의 불균등한 결합에 의한 불완전한 상태 그 자체가 지니는 자율성을 획득하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서, 마슈레의 생산이론은 알튀세가 말하는 심급마다의 자율성을 계승한다. 그럼에도 ‘과학’으로서의 비평은 이를 ‘현실’과의 대조를 통해서 이데올로기의 허위성을 폭로하는데, 그 ‘과학’은 어떻게 현실을 ‘과학적’으로 인식하는가? 맑스주의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 지점을 여기서 볼 수 있다. 맑스주의라는 언어게임 내에서, 또는 그 ‘문제설정’ 내에서 이는 반박당할 수 없고, 기껏해야 다시 ‘실천적 의미’로 돌아올 뿐이 아닌가? 즉 맑스주의는 어떻게 과학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맑스주의적 대답인 ‘실천’을 통해서 보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마슈레가 루카치, 골드만 등의 헤겔적 총체성에 기반한 비평/문학이론을 비판하면서, 이것이 작품을 하나의 의미로 환원하는 행위일 뿐이라는 지적은 유의미하다. 마슈레는 텍스트를 이데올로기와 현실의 반영으로부터 동시에 구해내지만, 결국 작품은 동시에 이 두 곳에 정박되어 있을 뿐이지 않은가? 루카치를 벗어나고, 마슈레도 벗어나면, 도대체 작품이라는 미궁은 현실이나 이데올로기와 어떻게 관계맺고 있는 것이고(또는 전혀 관계없고, 또는 작품마다 다르고), 우리는 작품을 어떻게 ‘과학적’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일까?

사실 골드만을 방법론으로 주요한의 불노리를 2.8 혁명을 앞둔 동경유학생집단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재단’해 버린 나로서는 뜨끔한 부분이 많은 루카치-골드만 비판이었지만, 정작 마슈레의 작품 읽기는, 텍스트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 않는 것에 주목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결국 현실 반영과 이데올로기에의 ‘환원’은 똑같다. 맑스주의 문예이론은 궁극적으로는 ‘현실’과 ‘문학’이 같이 간다. 마슈레 또한 골드만처럼 ‘진정한 문학’과 아닌 것을 구분하는 듯한데... ‘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 아닌 ‘진정한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대답하려하는 것인지.

(*마슈레에 대해서는 홍성호, 󰡔문학사회학, 골드만과 그 이후󰡕 와 오민석, 󰡔정치적 비평의 미래를 위하여󰡕를 참고했음. 단 의문은 발제자의 것이기 때문에, 전혀 뜬금없고 마슈레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음.)

8. 대중성의 정치학

마지막 부분에서, 결국 스토리의 대중문화에 대한 입장이 논쟁적으로 드러난다. 결국 대중문화연구자의 난처한 입장은, 그들(또는 ‘우리’) 또한 대중문화 속에 있다는 것과 자본주의를 별반 좋아하지 않지만, 자본주의 속에 있다는 것. 두 번째로 대중문화를 생산의 측면에서 볼 지 소비의 측면에서 볼지, 또는 이 둘을 어떻게 연결시킬지 하는 것. 이러한 ‘난처함’은 맑시즘의 역사발전의 주체로서의 pt에 대한 기대와 부르주아 문화에 대한 증오가 굴절되어서 이것도 저것도 아니게 자기변명만을 생산하고 있다.

우선 대중문화(popular culture)을 생산의 입장에서 보면 mass media와 자본에 의해서 자본주의적 작동 방식에 따라 움직이는 상품 생산과 이를 어떻게 소비자 대중을 조작하여(광고) 먹고 살 것인가로 파악할 수 있다. 어이없게도 스토리가 항상 이에 대해 반례를 드는 것이 영화나 음반시장이나 이익보다는 손해보는 일이 잦다는 것. 이는 개별 자본들의 경쟁에 따른 시장 파이의 나누어먹기 싸움에서 실패한 것이고, 전체 자본의 입장에서 대중문화의 시장은 계속 확장 일로에 있는 것인 아닌가?

또 이러한 상품을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로 나누어서, 대중문화는 사용가치에 기반을 두고 소비되는 것이며 소비의 상징적 작업은 단순한 생산관계의 반복이 아니며, 생산자들이 주입시키는대로의 기호학적 확실성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이는 모든 상품이 마찬가지 이다. 대다수의 사람은 이 상품이 만들어진 목적에 따라서 사용하지만, 일부는 그렇지 않더라도 그것이 어떠한 ‘저항성’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특히 문화상품은 상대적으로 이것이 다를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이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이것을 사는 대신 저것을 구입하는 결정은 가격이나 물건의 튼튼함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스타일과 문화적 가치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소비는 쾌락과 정체성, 의미의 생산 등에 관심을 가진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그리고 생산적인 과정이다. 따라서 실제로는 사용의 경제와 교환의 경제라는, 평행선을 달리는 두 개의 경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285)

이것은 너무 나이브한 생각 아닌가? 대중들이 완전히 자본주의의 ‘조작’에 놀아난다고 말하는 것도 현상과 반하는 면이 있지만, 대중의 ‘소비’가 이루어지게 되는 과정에서 자본주의적 조작을 전제하지 않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렇다면 실천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사용의 경제를 분석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스토리는 반자본주의적 생각을 가진 랩이 EMI에서 유통된다고 해서 이들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납품상인’이 아니고 이들을 듣는다고 해서 ‘자본주의 주체로 재생산되어 더 많은 돈을 쓰고 더 많은 이데올로기의 소비를 바라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물론 그렇다. 그런데 왜 스토리는 보다 논쟁적인 예를 들지 않았을까? 맑스의 󰡔자본론󰡕이나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 또한 자본주의 시장에서 출판자본에게 이득이 되는 형태로 판매되고 있다고.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진정 혁명적인, 자본가 계급 전체에 적대적일 수 있는 문화는 자본에 의해 유통되는가? 아니면 자본이 전유할 수 있는 것만 유통되는가? 체게바라는 어떻게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는가? 결국 왜 스토리는 생산-소비가 자본주의적으로만 유통되는 지점만을 분석과 사유대상을 삼는 것인가? 대중문화에 자본주의 밖은 없는가? 또는 자본주의의 밖은 없어도, ‘틈’은 존재하지 않는가? 베네주엘라의 조합주의 운동 등.

스토리는 ‘모두들 상업문화내에 살고 있음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임을 인정한다.’ 드디어 인정한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선택과 거부, 의미생산, 가치부여를 통해 스스로 문화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이들로 볼 필요가 있다’고 한다. ‘쾌락과 정치는 별개의 것이라서, 왜곡에 대해 웃고 즐길 수도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왜곡‘이라고 말하는 정치적 입장을 지지할 수도 있다.’

그렇다 지지할 수도 있다. 2002월드컵 때, 월드컵 경기장이 세워지는 과정에 국가의 폭력적인 수단으로 그 땅이 매입되고 경기장이 세워졌는지를 알면서도 월드컵을 재미있게 볼 수 있다. 민족주의에 대해 불편해 하면서도, 광화문에 나서서 응원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그러하다는 것은 ‘진정’ 그러하지 않다는 것이 아닐까? 정말 아니라면 어떻게 거기서 쾌락을 느낄 수 있는가?

다시 돌아온 곳은, 대중문화라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지점. 엘리트주의적 관점을 아무래도 버리기 힘들다. 대중문화라는 것이 있고, 이는 이데올로기적으로 기능함으로서, 자본주의적 주체로 대중을 호명하는 것이다. 물론 이 호명이 실패할 수 있고, 대중은 대중문화를 자신의 방식대로 소비할 수도 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대부분의 경우 호명은 성공하고, 대부분의 경우 대중문화는 ‘서커스’로 기능하는 것이 문제인 것 아닌가? 이러한 ‘대부분’이 중요한 것이고, ‘대부분’은 그렇지만 ‘일부’는 아니라는 지점에 개입할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닐까? 즉 연구자는 일종의 전위로서, 깃발을 높이 들고 달리는 것이 목표라 할 수 있을까? 이런 인식은 어떻게 계몽주의의 함정을 피해갈 수 있을까?

부록 1

진지전을 통한 헤게모니 쟁탈전/서프라이즈 활용법 조회 (43)

얼마 전 신영복 교수가 그람시의 진지전 개념을 언급했습니다. 사회 전체적으로 진보적 역량이 위축돼가는 현실에 대해 신 교수는 이탈리아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가 이야기했던 '진지전'의 개념을 소개하며 "진보적 역량을 담을 진지(陣地)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진지전'은 발 빠르게 정치권력을 틀어쥐는 '기동전'에 대비되는 개념입니다. 시민들의 '동의에 의한 지배'가 관철되는 시민사회 내에서 지적, 문화적 실천을 통해 진보적 헤게모니를 형성해나가는 것입니다. 이어서 그는 "진지가 작아 보여도 실망할 필요가 없다"며 "특정한 시기에는 작은 진지가 큰 힘을 발휘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인민(people)의 성취로 청와대와 국회(비록 뻘짓 하는 우리당 꼴통들 때문에 제 역할을 못하고 있지만)를 접수한 지금 전면전을 통한 혁명은 불필요해졌지만 헤게모니 쟁탈전에서 언론을 앞세운 수구 세력에게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는 서프라이즈를 진지 삼아 가열찬 투쟁을 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전 세계 어떤 NGO고 부자 나라와 부자들의 첩자에 의해 영향을 받고 있듯이 우리나라 시민 사회도 극우 첩자들에 의해 조종되고 있어서 진지전을 하려는 우리에게는 매우 불리한 환경입니다. 언론, 학교, 종교 등이 수구에게 유리한 이데올로기 주입을 통해 헤게모니를 잡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매우 열세이며 노대통령이 저 고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진지전의 실천방법 하나를 제안합니다. 제가 직접 실천하여서 상당한 성과를 올린 방법입니다. 저는 제 고교 동문회 사이트에서 단계적으로 수구꼴통 선배들의 헤게모니를 뺏어 왔습니다. 물론 선배들은 제가 오프에서 약 4~5년간 동문회에 기여한 바가 있어서 안면 때문에라도 이지메를 하지 못 합니다. 아니 실제는 간혹 이지메를 당하지만 지원자가 나타나서 결국 판세가 바뀔 정도로 되돌아가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평소 오프에서의 자산이 있는 분들이 훨씬 유리하다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치밀하게 다음 대선까지 계획을 세워서 대응한다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자기만의 전문성이 있다면 더 좋습니다. 글재주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서프라이즈의 글들을 최대한 활용하면 됩니다.

인신공격을 하지 말고 최대한 예의를 지켜가면서 참여 정부에 유리한 논제들을 순발력 있게 제시하는 방법으로 규칙적으로 글을 올리면 됩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한다면 평소에 자주 가는 친목회 사이트나 동문회 사이트 어디든지 고르셔서 언론의 모순, 야당의 행패, 올바른 역사관, 경제를 보는 안목, 국제관계와 북한문제 등등 소재를 다양화하면서 언론이 제시하는 어젠더를 깨부수면 됩니다.

정치인을 직접 거론하면 반드시 역풍이 크므로 그런 문제를 피하면서 한다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떻게 생각하면 지난 대선에서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이겼기 때문에 필요 없지 않느냐 하실 수도 있지만 3~4 십대분들이 의외로 많이 흔들리고 있다가 제가 제시하는 관점에 아주 크게 안도하고 자신을 되찾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서프라이즈는 결코 작은 진지가 아닙니다. 우리 분발합시다!!!

부록 2

문화예술인 60% “창작수입 月 100만원 이하”

입력: 2007년 02월 26일 18:19:56

문화예술인 5명 중 3명가량은 창작활동 소득이 월평균 100만원 이하인 것으로 집계됐다.

이에 따라 상당수의 문화예술인들이 생활빈곤 상태에 빠져 도배·집수리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공연 관람객 10명 중 7명은 ‘무료 관객’인 것으로 나타나 대책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26일 한국관광문화정책연구원이 기획예산처 사회서비스향상기획단에 제출한 ‘문화분야 사회서비스 실태조사 제도개선 연구’ 용역 보고서에 따르면 대부분의 문화예술인들은 저소득층(기초생활보호대상자, 차상위계층)에 해당되며 이중 생계 자활활동(도배, 집수리사업)에 참여하는 저소득 예술인도 다수인 것으로 파악됐다.

현재 문화예술가의 60%가량은 창작활동 소득이 월평균 100만원 이하에 그치고 있고, 창작활동에만 전념하는 예술인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보고서는 “지방도시의 경우 문화예술 활동이 증가하고 있으나 대형 문예시설 위주의 운영으로 소규모 시설과 전업 예술인은 경제적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고 밝혔다.

연극·국악·양악·무용 등 1430개 공연단체의 2004년 연간 총수입은 1584억원으로 이중 공공지원 의존수입이 905억원으로 가장 많았고, 자체수입(428억원), 민간부문 의존수입(251억원) 등의 순이었다. 공연단체의 작품당 수입금도 공공지원금이 32.2%로 가장 많고, 자체예산(27.7%), 입장료 수입(24.3%), 민간기부금(13.2%) 등이 뒤를 이었다. 특히 2004년 공연 관람객 1167만명 가운데 유료관객은 32.3%에 그쳤고, 나머지는 무료관객이었다.

국내 공연시장 규모는 매년 꾸준히 커지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미국시장의 50분의 1, 일본시장의 10분의 1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오관철기자 okc@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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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03-26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대학교때 보면서 흡족해했었는데...문화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는 필독서처럼 읽히더군요....대중성의 정치학에 나오는 주제는 참 고민스럽게 하면서도 재미있는 주제라고 생각합니다.언젠가 바람구두님 역시 그 문제에 대해 언급했었던 기억이 납니다.기인님은 결론을 내리신 듯 보이네요.... 연구자로서의 입장에서^^
전 아직 고민중인 문제인데...아마 발터 벤야민의 대중소비자들에 대한 인식 차원에서 아마 기인님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지 모른다는 생각은 듭니다.벤야민이 그랬다더군요."(대중은) 탐구자이다 그러나 방심하는 탐구자이다." ...그 방심에 대한 각성이 계몽주의와 엘리트주의의 혐의를 받을 수 있다는 기인님의 말씀에도 동의합니다.^^
어쨋거나 재미있는 주제에요..전 요즘 소비주의에 대한 관심이 있는데 소비주의문제를 이야기하다보니 결국 대중사회와의 연관성을 뗄 수가 없어지네요.
대학 다닐때 맑스를 알기전에 프랑크푸르트학파를 먼저 배우게 되었지요.(그래봐야 학부수준의 내용에 개인적 관심이 조금 더 해진 차원의 공부였지만..)교수들이 비판커뮤니케이션쪽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조지프 히스와 앤드류 포터의 <혁명을 팝니다>를 요즘 재미있게 보고 있습니다.주장에 전부 동의할 수 없고 비약도 있지만 ...의미있는 질문과 어려운 주제에 대한 대중적 글쓰기가 매력적이란 생각이 들더군요...'평범한 사람의 인문학'이 되려면-그게 인문학을 살리는 길인지는 모르겠으나 세상을 조금 더 좋게하는 길이라고는 보는데- 이런건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해요.
기인님이 공부를 마치시고..저같은 이들을 위한 그런 책 한권 만들어주시면 좋겠군요.^^

기인 2007-03-26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드팀전님 말씀처럼 '의미있는 질문과 어려운 주제에 대한 대중적 글쓰기'가 목표입니다. 세미나 때도 그렇고, '서로계몽'이나 '연대'가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계몽'이라는 단어에 너무 집착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집합의 가능성을 계속 고민해야겠지요. ㅎ
 
 전출처 : 바라 > 소방서 생활 단상

아침에는 알람보다 5분 먼저 울린 출동벨소리를 듣고 깨어났다. 지령 사이로 들리는

지하철 역에 투신... 이란 말에 잠이 확 달아났다. 이런 경우를 종종 보게 되는 건 여기 있는

한 피할 수는 없는 일인데,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그래도 오랜 경력의 직원들이 이런 상황에 무던한 거

보면  나는 아직인가 싶기도 하면서, 나중에 나도 상황 후에도 밥 잘 먹고 잘 자고 하면서 무뎌지는게

아닐까 두렵기도 하다. 어쨌든 촬영을 해야 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꾹 참고 보는 수 밖에. 이럴 때 보면

사람들이 아무리 고상하게 꾸미고 가리고 한다해도 결국은 다 피와 살과 뼈의 조합이다. 평소에는 그런걸

잊고 산다. 가끔 이런 사건을 겪으면, (나 외에도 대개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환상 중 하나인) 지하철

승강장에서 자신이 밀려 떨어지는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르기도 한다. 그럼 무엇이 아까 그 사람을

밀었던 것일까? 실제로 누군가 민 건 아니었지만,  무엇이 그 마음을 그렇게 절박하게 몰아붙였을까?

알 수 없다. 그런데 이렇게 묻는 것은 사람이란 자기보존 본능이 가진다는 것을 전제로 한 이야기일 것이다.

가령 이 사람을 정신이상자 등으로 간주하면 그런게 의미가 있을까? 소방이야 사고들의 원인에 큰 

관심을 쏟지 않는다. 화재든 구조든 구급이든 일단 상황이 발생하면, 사후조치를 취하는 것이 기본이므로.

그래도 사고 개요 보고서는 윗선에 올라가야 하기에 이런 경우는 보통 투신자를 정신이상자 추정.. 이라고

부연한다. 꼭 그런 이유라고만 볼 수는 없을 추레한 행색도 이럴 때는 사후적으로 정신이상을

뒷받침하는 게 된다. 보니까, 특히 경찰은 목격자가 없고 어떻게든 원인을 알 수가 없을 때가 가장

난처해지는 모양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 원인을 알기 어려운 게 자연스러운 게 아닐까?

 

그러고보니 오늘 시내에는 전경들이 쫙 깔려있었다. 이건 뭐 계엄령이라도 내렸나 싶을 정도로 구석

구석이었는데, 생각해보면 지난 7월 12일에도 이랬던 것 같다. (나는 일단 볼 것 많고 아름다운 서울의

미관을 해친다는 생각때문에 경찰들을 보면 얼굴이 반사적으로 찡그려진다.

물론 단순히 싫다는 감정적인 문제로 해결될 것도 아니고 경찰 조직이 해체 또는 전화되어야 할 이유는

단순히 그런 것이 아니지만... 아무튼 3% 퇴출 문제로 소방이 뒤숭숭할 때 경찰은, 압도적으로 많다.

의경과 의방 수도 비교가 안됨;; 말나온 김에 요번 서울시공무원 3% 퇴출제는 소방이 갖는 가외성이라는

특성을 아예 무시하는 듯 하다.  사실 말하자면 불이 하루종일 안 나는 날도 많다.

하지만 사고야 언제어디서 어떤 규모로 날지 모르므로, 애초에 소방조직을 효율성이라는 잣대로

운영할 수가 없는데 말이다. 물론 구급 같은 경우는 지금도 인력이 매우 모자르기도 하다.)

 

여기 들어와서보니까 소방과 경찰은 생각보다 같이 움직일 때가 많다. 불이 나도 경찰도 같이 오고,

보통 집회가 있을 때도 그 사실이 관할경찰서에 신고되고, 그러면 소방서에도 협조공문이 온다.

구급차나 탱크차를 지원해달라는 것인데, 구급차야 사람이 다칠 수 있으니 그 이유야 당연한 것이고

탱크차는 가령 분신이나 국기 소각 등의 우려가 있으니 초기 진화를 위해 보내달라고 한다. 하지만

(수치스런 일이지만) 아마도 탱크차는 전경 물대포의 공급원으로 주로 쓰이고 있는 듯 하다.

 

이렇게 경찰과 소방은 일단 시민의 생명 및 재산보호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사실 두 조직이 공통적이다. 굳이 차이를 들자면 소방은 그 작업에 있어서 무차별성을 어느 정도

지닌다는 것이다. 불이 났다면 그곳이 어디든, 요구조자가 누가 되든간에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경찰이 시민들을 민주시민과 '폭도'로 나누어서 후자에게는 강력한 물리력을 행사하는 것 같은 일은

적어도 없다.  불 속에서 사경을 헤매는 사람이 미등록이주노동자이건 아니건 그런건 소방의 관심이

아니다.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의 무차별성이 이 조직의 목적에 일종의 보편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이러한 무차별성이나 보편성 외에도 소방은 일종의 불가항력적인 대상을 상대한다.

경찰들이 주로 사람들 간의 분쟁 같은 문제를 다룬다면 소방은 그보다는 자연과 사람 간의 관계를

다루게 된다는 것인데, 가령 천재지변의 재난 같은 불가항력적인 경우 말이다. 그런데 마냥 그런 것

같지도 않은 것이, 생활해보니까 같은 구에서 불이 나거나 응급 상황이 나더라도 이른바 잘 사는 동네와

낙후된 동네에서의 빈도나 그 피해 정도는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유명한 부촌인 어떤 동네를 가면

거의 요새화되어 있고, 자체 경비 및 화재경보시스템 등이 잘 갖춰져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고보면 앞에서 불가항력이라 말한 것은 그저 모두에게 똑같은 불가항력은 아닌 모양이다.

어쨌든 이토록 많은 경찰과 그 자체로 요새화된 집들과... 우리는 정말로 엄청난 경찰국가에 살고 있다!

안전하게 살 권리, 생명과 재산이 보호될 수 있는 가능성은 꼭 그것과 비례하지는 않는것 같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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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 맑스주의의 확장과 소수자운동의 의의

* 진보평론 제 1호 / 맑스주의의 확장과 소수자운동의 의의

진보평론  제1호
윤수종(전남대학교 교수/사회학)

1. 머리말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한국 사회과학 및 인문과학계에서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맑스주의 등이 휩쓸고 지나갔다. 서구에서 이 ‘포스트주의’들은 자본주의 상품소비문화를 찬미하는 것에서부터 자본주의적 생산의 혁신적 변화를 찬미하는 것(포스트포드주의)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나아가 기존의 이성중심적인 철학에 대한 문제제기 속에서 탈중심적인 사고를 주장하고, 사회를 인식 주체에 의한 구성물로서 파악하려는 주장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국에서 포스트주의적 사고의 흐름은 주로 자본주의 상품소비문화를 미화하거나 자본주의적 생산방식 상의 새로운 동향을 일방적으로 찬양하는 논조 속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교조적인 ‘변증법적 유물론’(Diamat)의 역편향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맑스주의에 대한 반격의 성격을 띠고 행해졌다. 점차 미셸 푸코와 같은 사람의 비판적 분석도 소개되어 왔으나, 전복적 사고의 흐름 속에서 전개되지는 않았다.

한국에서 독자적 사회과학의 출발점이 되었던 사회구성체논쟁의 논자들도 포스트주의와 접맥되면서 다양하게 분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논자들은 과거(자신들의 주장)와 단절하고 자본주의 발전을 옹호하는 혁신적 변신의 모습을 보였다. 일부에서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으로 정식화되었던 논의도 포스트주의적 사고와 접맥되지 않을 수 없었고, 점차 알튀세르학파의 주장을 원용하면서 전개되어 나갔다. 한국에서 알튀세르에 대한 소개는 맑스주의의 전화라는 전망 위에서 논의가 확장되어 왔지만, 맑스주의의 위기를 내적으로 작동시키면서 돌파해 나가는 데에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이데올로기론을 중심으로 하여 노동자운동과 맑스주의의 융합이라는 문제설정에 집착하면서, 여전히 전통적 맑스주의의 개념틀 속에 갇힌 채 사회의 새로운 변화를 설명해 내는 데에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2. 탈근대사상과 새로운 주체성

이러한 한계를 돌파하려는 노력은 이미 서구에서 다양한 흐름 속에서 전개되어 왔다. 또한 기존의 주류 철학에 대한 문제제기로 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다. 사회현실과 인식에 대한 더욱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면서 그간 당연시해 오던 것들을 되짚어 보려고 시도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시도들 또한 많은 경우 ‘포스트주의’, ‘탈근대’라는 문제설정을 통해 제기되었다.

흔히 ‘탈근대’라는 문제설정은 전근대-근대-탈근대 라는 시기구분식 문제설정에 매여 있다. 물론 ‘탈’근대라는 문제설정을 강조하면서 기존의 이성중심주의를 해체하려는 시도로 이해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문제는 여기서 더 나아가 ‘반’근대라는 문제설정을 요구한다고 생각된다. 단순히 해체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것을 구성해 나가려는 생각에서, 기존의 근대적인 사유양식과 사회구성방식에 대해 대안적인 것을 찾아가려는 문제설정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러한 문제설정에서 근대니 탈근대니 하는 구분방식 보다는 오히려 그 동안의 역사 속에서 나타난 주류흐름의 지배자적 다수자적 사고방식에 대항한 소수자적 흐름을 강조하는 것이 필요하다.

탈근대사상의 비판적 흐름 속에서 ‘홉스-루소-헤겔-(하버마스)’ 라는 다수(majeur)노선에 대(항)해서 ‘마키아벨리-스피노자-맑스-니체-(들뢰즈)’라는 소수적(mineur) 사유를 강조하는 흐름을 제시할 수 있겠다. 두 흐름을 철학적 개념들을 축으로 구분해 본다면, 다수노선의 보편자-동일자-인식론-심연-외재성(목적론)-본질(절대자,신)-저 세계-권력(pouvoir)
-재현-정신-이성-계약-양도(매개,대표)-도덕(moralité)을 강조하는 입장에 대(항)하여, 무한자-차이-존재론-표면-내재성-특이성(singularité = multiplicité)-이 세계-역능(puissance)-표현-신체-욕망-공포(희망)-직접성(대표거 부)-윤리(éthique)를 강조하는 소수노선*주)을 대립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소수자적 사고흐름 속에서 탈근대의 문제제기를 단순히 이성비판과 해체로 나아가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서, 소수적 관점에서 사회를 재구성해 나가려는 문제설정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주) ■■이러한 관점은 네그리, ■야만적 별종■, 푸른숲, 1977에 기초하여 정리한 것이다. 각각 대립시킨 개념들에 대한 설명은 이 책을 참고하시오.■■

이러한 철학적, 사상사적인 두 가지 흐름은 당연히 인간사회의 구성원리와 사회운동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을 지녀 왔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추상적 구호 속에서 추상적 인간들의 개별의지를 일반의지로 위임(양도)했던 근대사회는 다수노선에 근거한 대표제 모델에 기초하여 좋은 대표자를 만들어 내는데 집착하였다. 맑스주의도 이 점에서는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대중의 역능을 강조했던 맑스주의는 대표제모델(민주집중제)과 아나키즘 사이에서 동요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상황에서 소수적 관점에서 맑스주의의 확장이 필요할 것이다.

이 두 가지 사유흐름에 따르면 사회운동에 대해서도 해석을 달리 한다. 기존의 사회운동, 세계사의 전개과정에 대해서 소수노선에 입각한다면 색다른 해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수노선에서는 역사(사회운동)를 부르주아혁명(상징은 1789년 프랑스대혁명)과 러시아혁명(1917)을 구분점으로 하여 파악하는데, 이러한 파악방식은 어느 계급이 국가권력을 장악했는가를 중심으로 설명하는 방식이다. 누가 얼마나 좋은 사람(집단, 계급)이 권력을 장악했는가, 대표자가 되었는가가 준거가 되었다.

이에 대해 소수노선의 관점에서는 공산당선언(1848년)과 1968년혁명(1968년) (그리고 작은 구분으로는 현실사회주의 붕괴, 1989년)을 구분기점으로 하여 역사(사회운동)를 설명한다. 이러한 설명은 공산당선언과 1968년 사이에는 중앙집권당, 즉 전위당 모델에 입각한, 지도와 대중이라는 대당에 입각한 실천운동(노동운동 중심)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흐름이 지배적이었다면, 68년 혁명 이후에는 전위당모델을 비판하면서 분자적(moléculaire) 운동(노동거부에 기초한 자기가치증식운동, 여성운동, 소수자운동 등 ‘아우토노미아운동’*주))을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흐름이 지배적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현실사회주의 붕괴의 의미는 ‘전위당 모델에 입각한 대중운동’의 종결을 의미하며, 따라서 분자적 운동의 족쇄가 한층 풀린 것으로 이해한다.

*주) ■■아우토노미아운동의 사례에 대해서는 윤수종, ‘이탈리아의 아우토노미아운동’ ■이론■, 14호, 1996.■■

이렇게 탈근대사상은 색다른 사유와 사회인식을 가능하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회의 주체문제를 제기하였다. 탈근대사상은 한편으로는 구조주의를 매개로 하면서 구조주의를 넘어서는 것으로 나아간다. 그간 구조주의와 사회과학의 객관성(객관주의)은 주체문제를 없애 버렸다. 학사적인 흐름에서 정리해 보면, 프랑스의 철학 및 사회과학계는 소쉬르를 축으로 한 구조주의의 영향하에서 기존의 데카르트적 주체철학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구조주의적 노력은 근대철학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주체 문제를 상대적으로 제기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국면 속에서 푸코, 들뢰즈, 가타리, 네그리(이탈리아) 등은 데카르트적 주체로 돌아가지는 않으면서도 구조주의적 ‘주체없는 과정’을 넘어서기 위해 새로운 탈근대적 주체성의 탐구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탈근대사상의 실천적 함의는 탈근대적 주체에 대한 탐색의 길을 열어 주었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주체 문제를 놓치고 소비사회의 모사(simulation) 속에서 허무를 달래는 보드리야르 같은 사람도 있지만 말이다.

여기서 소수적 사유방식은 이미 다수적 사유방식에서 가볍게 여기던 항목들을 중시여기고 전혀 다른 주체상과 사회상을 그려 나가려고 하였다. 데카르트에서 시작된 주체철학과 이성의 승리는 곧바로 이성적인 인간상, 구체적으로는 백인-남성-어른-이성애자-본토백이-건강인-지성인-표준어를 쓰는 사람... 라는 표상을 준거로 하여 사회를 위계화해 나갔다. 맑스주의조차 보편계급으로서 노동자계급 상에만 매달려 사실은 새로운 주체에 대한 탐색을 하지 못하였다. 푸코, 들뢰즈, 가타리, 네그리 등은 68년 운동 이후 이러한 모델을, 근대적인 표준적 인간상을 파괴하려고 하며, 그 인간상으로부터 주변적이고 소수자적인 위치로 밀려난 개인들 및 집단들을 복권시키려고 한다.

이러한 사고에서는 이성을 축으로 한 근대적 구성은 광기에 대한 공포에서 생긴다고 본다. 따라서 이성비판에 머무르지 않고 탈근대적 주체를 찾아나선 사람들은 광기연구에 집중하게 된다*주). 이는 사회구성적으로는 주변화된 집단들에 대한 연구로 나아간다. 자본가모델을 비판한 전통 맑스주의는 노동자모델을 자본가의 반대상으로 제시하는 변증법에 머물면서 결국은 근대적 절대모델(The Model)을 만들어 갔다. 이러한 양자(변증법)에 대한 비판이 탈근대적 주체찾기의 출발점일 것이다.

*주) ■■서구, 특히 프랑스에서 68년 이후 광기연구가 성행한 것을 상기해 보자. 죄수, 정신병자, 동성애자, 어린이, 이민자, 여성, 주변자들...■■

3. 맑스주의의 확장

탈근대적 주체 찾기는 현실에 접근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면서 맑스주의를 넘어서 맑스주의를 확장해 나가려는, 즉 맑스주의의 위기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실천방향을 탐색하려는 것과 동시에 이루어진다. 그리고 탈근대사상이라는 커다란 격랑을 헤쳐 나오면서 기존의 맑스주의는 환골탈태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점차 기존의 맑스주의가 객관적 분석과 필연성 논리에 사로잡혀 결국은 산노동(노동자계급)을 억누르는 위치로 전락한 것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지면서, 대표제 모델(레닌식 민주집중제)에 대한 비판과 역능에 기초한 사회구성과 아우토노미아적 조직화의 방향을 모색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기존의 맑스주의를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확장하는 방식은 두 가지로 전개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네그리(Negri)가 전개한 방식(내공법)으로서 맑스주의의 전통적 개념들의 내용을 현실에 맞춰 재해석해내면서 노동자계급(산노동) 속에서 전복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찾고, 나아가 다양한 노동범주들을 탐색해 나가는 것이다. 자본의 정치경제학을 노동의 정치경제학으로 전환시키면서 전복의 정치학을 구성해 내는 방식이다*주). 기존의 정치경제학(비판이란 말을 떼어 낸 채)은 맑스의 ■자본■에 매여서 자본의 동학을 설명하고 자본의 자기잘못을 지적해 주는데 바빴다. 네그리는 ■요강■을 대치시키면서 노동과 자본의 대립구도 속에서 사회구성을 설명해 나갈 것을 요구한다. 또한 그 사회구성의 힘은 바로 산노동에서 나오지 산노동을 착취하는 지휘자였던 자본에게서 나오지는 않는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주) ■■윤수종, ‘안또니오 네그리의 정치경제학 비판’, ■비판■, 창간호, 1997.■■

네그리는 노동자계급 속에서 주변성의 특징들을 파악해 내고 그러한 특징들의 변화 속에서 노동의 질적 변화(비물질적 노동으로의 변화)를 추적한다*주). 보편적 노동자계급이 아니라 구체적인 다양한 노동자계급내부의 층들이 존재한다고 보며, 공장을 넘어선 사회적 공장이라는 인식으로 넘어간다. 이제 노동은 공장에 갇힌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석구석에서 이루어지는 것들로 인식되고, 공장의 ‘생산적 노동자’만이 아니라 집안의 가사노동자에서 단란주점의 매춘부...까지 다양한 노동자층들을 포괄하는 노동자개념(사회적 노동자)으로 넘어간다. 디오니소스노동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제시하는 이러한 노동 내부의 자율성(주변성)에 대한 탐색은 사회구성에서 다양한 사회층들을 포괄하는 논리로 나아가게 된다(우리는 모두 대표다).

*주) ■■A. Negri, M. Lazzarato, A. Corsani, Le Bassin de Travail Immateriel(BTI) dans La Metropole Parisienne, L'Harmattan, 1996.}}

이에 비해 국가는 노동의 구성장치로서 성립된다. 국가는 다양한 사회층의 노동을 구성해 내는 법적 장치를 주요한 도구로 갖는다고 한다. 네그리는 국가와 자본이라는 관계설정에서 노동과 자본의 대립이라는 존재조건을 갖는 국가라는 문제설정으로 넘어간다. 노동의 공격에 대한 자본의 대응 속에 있는 위기국가라는 국가에 대한 문제설정은, 관리자로서, 경영자로서, 거시경제의 조절자로서 국가에 대한 상을 공격한다. 또한 공공지출 등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재생산적 전유라는 관점과 복지국가적 시설을 노동자계급의 공적 영역의 확보과정을 파악하는 지점에 까지 이르게 된다. 이러한 발상들은 기존의 경직화된 공산주의에 대한 상을 새롭게 하고 대중의 역능에 근거하여 아래로부터 이루어지는 구성권력에 대한 전망으로 나아간다*주).

*주) ■■Negri, Le Pouvoir Constituant,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1997.}}

다른 하나는 맑스주의의 전통적 개념을 사용하기 보다는 프로이트주의(라이히)에 상당히 근거하면서 주체 문제를 탐색해 나가려는 가타리의 방식이다(외공법). 68년 혁명 이후 현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정신분석학과 철학을 새롭게 전개해온 사람이 가타리이다. 그는 기존의 정신분석학의 한계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정신요법(제도분석, 그리고 점차 나중에는 분열분석)을 전개하였고, 들뢰즈와 철학적 공동작업을 통해 전통적 사유를 해체하고 욕망에 기초한 유동적(유목민적) 사유양식을 추구하였다. 이는 지금까지 인간의 인식을 억압해(틀지워) 왔던 변증법에 대한 거부이자 대안을 제시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그리스적 변증법에 대항하여 유태적 기호독해를 통해서(들뢰즈) 또는 구조분석에 대항하여 기계를 들고 분열분석으로(가타리).

더욱이 가타리는 라이히(W. Reich)가 제시했던 정신분석과 맑스주의(정치)의 결합을 전진적으로 시도한다. 알튀세르처럼 비운의 짝짓기에 실패하여 우울해 있는 사람과 전혀 달리 가타리는 접합이 아니라 횡단을 통해 나아간다. 가타리는 기존의 (교조적인) 맑스주의자들이 해왔던 구조분석에 매달리지 않고 오히려 기계적 작동을 외치면서 새로운 집단적 주체성의 구성에 관심을 갖는다.

가타리는 기존의 정신분석에 대해 공격해 나갔을 뿐만 아니라 프로이트를 계승한 라캉식의 환원론적인 정신분석에 반대하여 정신분석적 실천을 사회전체와, 정신치료를 둘러싼 사회적 장과 연결시켜 나가면서 사회비판으로까지 확장시켜 나갔다. 또한 정신의학 안에서의 실천 자체를 곧바로 현실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의 실천과 연결시켜 나갔으며, 이렇게 다양한 부문(secteur)들과의 접속을 통해 새로운 집합체를 만들어 나가려고 하였다. 그 과정에서 가타리는 맑스주의가 경시해온 미시적 작동에 주목하고 욕망의 흐름 위에서 전개되는 미시적 작동의 해방적 전개 및 축적 위에서만 거대한 작동의 해방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분자혁명이란 상에 이른다*주). 끊임 없이 제도를 자신의 틀(장치) 속에 포획함으로써 다수 대중의 무한한 욕망을 통제하려는 권력의 시선에 대항하여 욕망의 탈주선을 실험하려는 것이다. 이처럼 가타리는 푸코의 ‘권력의 미시물리학’에 대해서 ‘욕망의 미시정치학’을 작동시킨다(우리는 모두 소수자다).

*주) ■■가타리, ■분자혁명■, 푸른숲, 1998.■■

가타리의 이러한 시도는 기존의 맑스주의운동 내부에서도 새로운 실천방향들을 모색하고 실천할 수 있게 하였다. 인간의 사고와 실천을 틀에 가두는 방식들에 대해서 ‘횡단’을 외치면서 그 폭을 넓히려는 시도는, 국가에 대항하면서도 스스로 내부에 국가조직과 같은 사회상을 만들어 가는 반대운동으로서 전복운동이 아니라, 대중의 무한한 역능(puissance)에 기초한 끊임없는 생성적 움직임을 통해서만 기존의 국가틀을 바꾸고 새로운 사회를 구성해 갈 수 있다는 네그리의 아우토노미아 사상과 통하게 된다.

네그리와 가타리는 체제내화 되지 않는 다양한 사회운동들을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이러한 다양한 흐름들이 결집되어 전체 지배구조(국가)를 변형시켜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한다. 이들은 포스트주의자들이 말하는 현실 및 인식의 변화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그러한 변화들이 어떻게 개인의 전면적인 자유로운 발전을 가져올 수 있는지, 무엇이 그러한 과정을 가로막고 있는지 하는데 관심을 가진다. 네그리는 아우토노미아를, 가타리는 분자혁명을 외치면서. 이는 바로 맑스주의의 확장으로 나아가는 길 아닐까? 이들의 주장은 제도적으로 단순화하자면 현대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두 가지 커다란 제도인 국가와 가족을 비판함으로써 새로운 주체성을 구성해 나가는 것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겠다.

맑스주의를 확장하려는 이러한 두 방향은 한국 현실에서는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노동중심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진보이론으로서는, 노동자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내부의 다양한 지층화와 욕망의 흐름을 구성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론진영과 실천진영의 분리로 특징지워지는 현 상황은 오히려 이론이 산노동(노동자계급) 속의 다양한 흐름들을 간과한 결과는 아닐까? 또한 새롭게 변화하고 있는 노동자(상)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검은 근육질에 눈을 부라린 노동자상이 아니라, 자동기계 옆에서 이런 저런 아이디어를 생각하려고 애쓰면서도 끊임없이 기계에서 분리되어 공장 밖으로 밀려나고 그래서 공장 바깥에 포진하여 새로운 비물질적 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상! 여기서 네그리의 논의가 주는 함의가 있을 것이다.

다른 방향은 노동운동이나 맑스주의이론이 여타 부문(secteur)들과 접속해야 할 것을 제기한다. ‘생산적 노동’으로 좁혀진 노동자상은 결국은 노조운동이나 정당(‘노동자계급의 정치세력화’라는 사기)에 걸려 넘어지고 만다. 가타리가 강조하듯이 횡단을 통해 여성운동, 성적 소수자운동, 환경운동, 다양한 소수자운동, 주변자운동, 대안운동들...과 접속함으로써만 초코드화하는 권력에 대항해서 대중의 역능(욕망)을 구성해 갈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중심을 설정한 접합이 아니라 서로 자율적인 운동 속에서 접속할 것을 제기한다고 볼 수 있겠다.

4. 소수자운동 - 새로운 정체성 찾기와 자유의 공간 만들기

소수자운동은 작은 운동이 아니다. 전지구적 현상이다. 단지 방향이 문제이다. 초코드화하는 운동이 아니라 분자화하는 운동이다. 이와 관련하여 전세계적으로 나타나는 다양한 민족분규는 각 인종집단의 주체성 찾기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민족분쟁-분리운동-자신의 고유한 주체성 찾기라는 식으로 볼 수는 없을까? 미국의 이라크 공격, 유고공습은 미국식 주체성을 강요하는 행위이다. 미국식 생활양식을 모델화하여 강요하는 행위이다. 자! 베트공식 전인민의 주체화를 통해서, 모델화되지 않는 변화무쌍한 주체들의 등장을 통해서, 모델화된 주체성(미국식 주체성)의 강요에서 벗어날 수 있다. 베트콩이 미국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전혀 다른 주체성을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베트콩 이미지는 없다. 누구나 어디서나 베트콩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베트콩을 색출해 내서 제압할 것인가? 몰살의 방식만이 가능하다.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에게 가한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 잔여물(살아남아서 점차 사라져 가는 인디언들, 그래서 동물원의 동물들 처럼 보호받는 사람들)은 있다. 미국은 지상전에서 승자가 될 수 없다. 전세계적 초강력 주체성을 강요하지만 다양한 주체성과 소통하지 못한 채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할 뿐이다. 그래서 스타워즈인가?

그리고 한국과 관련하여, IMF는 87년을 기점으로 80년대에 한국의 노동자계급(넓게는 대중들)이 확장해온 힘을 제압하려는 초국적 자본의 본능적 움직임이다. 음모? 전혀 ‘음모모임’하지 않고 눈빛으로도 가능하다! 깡패들이 조직원을 공채(공모, 모집)하는가? 눈빛으로 교감으로 정동작용(affection)으로 한다. 더욱이 주체성과 관련하여 IMF는 대중들을 기죽이는 것이다(IMF파시즘). 그 현상은 보장된 노동자와 비보장된 노동자의 균열을 가속화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현실상황을 좀더 이론적으로 정리해 보자. 초국적 자본을 축으로 한 세계적인 통합된 자본주의의 전개라는 상황과 그 반대쪽에서는 각 인종들의 다양한 자기분출 및 분리주의운동이라는 분자적 움직임이 상충하고 있다. 초국적 자본을 축으로 한 권력은 분자적 움직임들이 자신들을 쳐다보고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기를 바라고 있다. 마이클 조던에 대한 감동이 나이키 상표에 대한 동조로 바뀌기를 기대하듯이. 물론 아무리 그렇게 초코드화해 나가려고 해도 다양한 분자적 움직임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자신의 일정한 틀 속에 재영토화함으로써 포획장치 속에 집어넣으려고 할 것이다.

이에 대해 분자적 움직임은 다양한 주체되기를 통해서, 더욱 다형도착적인 베트콩 되기를 통해서, 소수자되기를 통해서 포획장치에서 벗어나 다른 기계들을 작동시킨다. 이러한 분자적 움직임은 색다른 주체들을 내세우며 색다른 공간을 창출하려고 한다. 이 색다른 주체들은 소수자운동으로 자기정체성을 찾고 자기 권력(현존 지배권력에 대항한 노동자권력, 여성권력, 게이권력, 레즈비안권력, 어린이권력, 실업자권력, 이민자권력, 매춘부권력, 죄수권력... 소수자권력)을 내세운다. 이러한 자기정체성(주체성) 찾기와 그 고유한 권력(역능)은 기존의 제도와는 다른 공간들을 창출함으로써 현실화될 수 있다. 그러한 양상은 대안운동(흔히 다양한 공동체운동)을 통해 나타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소수자운동과 대안운동은 상호 중복되어서 나타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이 맑스주의자들이 강박당하고 있는 자본주의극복이라는 엄숙한 담론에 대해서 할 말이 없을까? 파괴와 극복 논리를 넘어서 생성과 구성을 지향해야 하지 않을까? 자본주의적인 ‘작동방식’을 문제삼아야지 자본주의를 문제삼아서 무엇을 만들어 갈 것인가? 자본주의의 반대상을? 자본주의적 작동방식 옆에 붙어서 ‘색다른’ 작동방식들을 증식시켜 나가기!

여기서는 다양한 운동들을 지목하고 간단하게 촌평하는 식으로 현재 한국의 소수자운동과 대안운동에 대해 언급하고 평가해 보겠다.

<소수자운동>

노동운동(외국인노동자운동) - 노동자 내부의 주변성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주변성 분석의 중요성). 제도화된 보장된 노동자(노조로 조직된 노동자)의 운동에 집중되어 있는 노동운동에 대한 관심에서 비보장된 노동자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해야 할 것이다. 성노동자, 여성노동자, 이민노동자, 비물질적 노동자(영상물제작팀이나 패션계 등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조직할 수 있겠는가?) 등을 고려하면서 노동자운동의 변신이 필요할 것이다. 즉 새로운 변화된 노동자상에 걸맞는 조직방식 및 형태를 고안해 내야 한다. 소수자의 창조성(노동자 내부의 아우토노미아)이 발휘되면서 전체가 변형되는 과정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여성운동(주부운동) - 여성운동은 정치권력에서 할당된 배분운동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한편으로 있고 그와 맞물려서 내부의 위계화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내부의 위계화를 만들어 내지 않고 기존의 제도를 변형시킬 수 있는 방향모색이 필요하다. 여성주의 잡지 IF에서 처럼 여성의 오르가즘 문제 등에 대한 쟁점화는 엄숙한 페미니즘에서 벗어나야 하는 함의를 던져준다. 엄숙하고 무성적인 페미니즘이 아니라 성적 자유 및 성적 만족을 동반하는 여성주의 운동이 필요하다. 더 나아가 맑스주의 페미니즘에 대해서, 계급해방이 이루어지면 여성해방도 이루어진다고 보았다는 식으로 단죄해 버리고 급진적 페미니즘의 흐름으로 성급히 뛰어간 여성주의 논의변화는 반성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소수자적인 관점에서 맑스주의의 확장을 생각한다면 여성은 즉각 중요한 주체로 떠오른다.

가사노동논쟁은 여성의 노동이 ‘가치생산적’이라는 논점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공장에 매인 노동의 성격을 사회화시키는 주요한 역할을 하였고, 레닌적 민주집중제를 파괴하는 선두주자가 된 다른 나라(이탈리아)의 경험이 있다. 남성에 지배받는 여성이라는 변증법적 대당식 문제설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색다른 형태(자기가치증식)들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오토에로티시즘에 입각한 레즈비아니즘의 등장이 주목된다. 또한 질오르가즘, 크리토리스오르가즘을 넘어서 자궁의 자본주의적 기능에 대한 문제제기, 나아가 기존의 가족모델에서 벗어난 다양한 가족형태 및 성애형태에 대한 탐색 및 실험이 가능할 것이다.

어린이운동 - 그렇게 자유롭던(말 안 듣던?) 어린이가 초등학교에 가서 한 달이면 복종하는 어린이가 되는 것은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서인가? 선생님들은 어린이들을 제압할 때 왜 받아쓰기를 주요 무기로 사용하는가? 왜 어른들은 흔히 ‘애들은 가라’, ‘애들은 몰라도 돼’라는 이상한 굉음을 계속 내고 있는가?(모두가 뱀장사란 말인가?) 어린이들의 욕망은 어떻게 표현되겠는가? 프랑스에서 어떤 라디오방송이 학교를 마치고 나오는 (초등학교) 어린이들을 직접 인터뷰하여 생방송으로 내 보낸 일이 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누구를 좋아하는지. 그 대답을 들은 어른들은 쇼킹, 경악! 그 프로그램은 즉각 폐쇄(명령)되었다. (최근에는 유아신경증까지 발생한다니! 그것도 대량으로). 기존의 교육틀 안에서라도 내부자율성을 확대하는 운동이 요구된다. 의자에도 못 올라서던 어린이가 또래(같은 반) 어린이들과 함께 한 자율적 계획과 실험 하에 이루어진 야외놀이에서 위풍당당하게 행진하고 365계간을 오르내린다. (->공동육아, 대안학교운동)

청년운동(학생운동) - 대한(따이한)민국에서는 전혀 소수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청년들이 운동을 주도해 왔다. 그러나 전체 이념운동(및 실천활동)에서 주도해 온 것이지 청년들 자신의 정체성을 추구해왔는가? 거대 이념에 사로잡혀 몸을 버리고 운동해온 사람들의 결말은? 기철학? 건강학? 그것도 좋다! 정치권으로 진입(탈락자들의 피신처, 이른바 운동권에서는 더 이상 필요치 않은 사람들)? 대학 학생운동은 항상 사회문제 해결과 대학내부 문제 해결이라는 선택지에서 동요하고 있다. 대한민국 학생들은 고등학교까지는 그렇게 세계적으로 우수한데(물론 가장 심하게 시키니까) 대학졸업할 때 되면 왜 중간에도 못 끼는가? 장애물은? 군대? 취직? 학생보다 못한 교수? 10년전과 똑같은 강의노트? 힘들고 배울게 많은 강의를 피해서 적게 배우고 편한 강의 찾아 가기! 고시폐지운동! 학교폐지운동? 대학폐지운동? 제2대학운동! 탈학교운동.

동성애자운동 - 소수자적인 입장을 가장 분명하게 제시해 나간다. 잡지발간, 다양한 동호인 모임, 휴식공간... 컴퓨터를 통한 소통. 버디(Buddy)란 잡지. 인식의 변화는 머리 속에서만 이루어져서는 실천적인 제도적 변화를 별로 가져오지 않는다. 정체성확보에서 공간확보(게이커뮤니티, 레즈비안커뮤니티)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주변적인 폐쇄된 코뮤니티를 구성하는데 머무르는 경향이 비판받는다. 그러나 소수자는 항상 처음에는 주변자로, 이상한 것들로, 파렴치한 사람...으로 현상한다. 68년 혁명당시 히피들처럼!

실업자운동 - 현재는 구호차원에서 주로 논의되고 있다. 지원이나 사회적 안전망 건설은 노동자계급의 공적 영역의 확보(공산주의의 전제조건)라는 의미에서 중요하다. 현재는 쉼터개설 차원. 문제는 다시 업자(직업자)가 되는 방향에 있다기 보다는 새로운 삶의 형태를 만들어 가는 방향에 있다고 생각된다. 새로운 협동적 조직화나 노동자들의 기업인수 등의 전진적인 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일부에서 시도되고 있다(노동자기업인수지원센터).

매춘부운동(성노동자) - 매춘부의 인권, 직업권, 양육권 등의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부부 (내부의) 매춘, 부부 (내부의) 강간이 더욱 문제로 되고 있다. 언론매체는 항상 호기심을 자극하는 식으로만 방송한다. 매춘부의 욕망? 매춘부들에게 돈을 대 주고 매춘부와 고객들 사이에 흐르는 욕망을 연구검토해야 한다. 거기서 얻은 분석을 기초로 좋은 사랑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다! (왜 안돼?) 국가의 다양한 통제에 대한 저항. 매해연(매매춘 해결을 위한 연구회).

부랑자(갱)운동 - 넝마공동체(지금은 옷가지들을 모아 다리 밑에 모아두면 이민노동자들이 가져간다), 폭주족(?), 공인된 폭주족들(자동차경주자들)은 수입을 올린다. 갱조직의 훈련방식은 운동선수들의 훈련방식과 너무나 흡사하다나! 그 내부의 위계화를 깨는 수평화 움직임의 등장 가능성에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죄수운동 - 아직 양심수 문제만이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일반 죄수들의 생활, 징역제도, 죄수의 사상의 자유 문제 등, 죄수의 집필권(그람시와 네그리는 감옥에 있을 때 가장 고귀한 글들을 만들었다!), 죄수의 사랑권. 외부와의 통신권, 노동에 대한 보상권, 흡연권, 일과시간 내용선택권, 죄수의 조직권. 어디까지 죄수의 자유를 억압할 것인가? 거주이전의 자유만 박탈당한 것이지 결사권까지 박탈당한 것은 아니다! 그 개인의 자유를 박탈한 것과 그 개인들의 협동권을 박탈하는 것이 같은가? 자본가는 노동자들에게 개별적으로 계약을 맺지만 노동자들의 ‘협동’(결과물)을 주로 착취한다.

중독자운동(마약, 알콜, 포르노...) - 경찰적 관점을 척결해야 한다. 전문가적 관점을 척결해야 한다. 이른바 대중매체 특히 TV에서 사회문제를 폭로하거나 보여주는 프로그램들 맨 끝에는 전문가들이 나와서(물론 꼭 책꽂이를 배경으로 하면서) 경찰 대역을 한다. 물론 이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내부경찰이다. ‘빨간 마후라’ 사건 이후 학생들의 토론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자율적인) 자체토론을 시켰을 때에, 어떤 모범생이 결론 짓기를 ‘전국에 계신 아버지, 어머님들(이 말은 DJ의 ‘국민여러분’과 너무나 닮았다), 걱정 마십시오, 그런 학생들만 있는 게 아닙니다. 여기 이렇게 건강하고 명랑한 학생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환자운동 - 의사권력의 무시무시함. 흰옷의 환상. 정신병원과 다양한 감금장치들(정신박약아나 .... 등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의사의 직업성(열나는 환자의 진료기록부에는 fever라고 휘갈겨 쓴다. 낙태하러 가는 미혼모와 의사 사이의 엄청난 문턱->자율낙태운동). 정신요양원에서 사드(Sade)는 이른바 환자들과 재미있는 연극을 만들면서 집단적 욕망을 불태웠다. 어떤 관리자도 통솔(?), 주도하지 못한 일이었다.

인권운동 - 지배권력에 저항하는 사람들의 인권이 주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소수자적 인권이 제기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의 (보편적, 추상적) 인권이란 문제제기는 부르주아사회에 균열을 가져오기 힘들다. 인권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입장에서가 아니라 항상 구체적이고 소수적인 입장에서 제기될 때에 현실의 지배적인 사회에 균열을 가할 수 있다. 인권운동사랑방에 다양한 인권(권력)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접속되고 있다(이민자들, 동성애자들, 여성들, 보도 듣도 못한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 사회권으로서 인권?

이상에서 지목한 것 말고도 주체성을 찾아 나서는 다양한 운동이 있을 수 있다. 자기정체성 찾기는 바로 개인들의 차이를 통합하거나 개인들의 공통성을 보편화함으로써 권력을 만들어 가는 방식이 아니라, 개인의 특이성에 고유성에 기초하여 새로운 것을 생성해 내려는 방식으로 나아가 권력을 깨고 개인들의 특이성의 잠재력을 확장하게 된다. 이러한 특이화과정(singularisation)에 기초하여 개인의 전면적 발전은 가능하며 그 원칙은 자기준거화, 자기조직화를 통해서일 것이다. 쉽게 말해서 기죽는 사람이 없어야, 지배장치에 맞춰주는 피지배기계가 없어야 ‘좋은 사회’가 만들어진다. 소수자운동은 바로 이러한 문제설정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대안운동>

90년대 들어 한국사회에도 다양한 대안적인 삶의 형태들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경직된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자 이제는 정말 어떻게 다르게 살아갈 것인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기존의 권력은 여전히 통치하고자 하나, 많은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독특한 삶을 찾으려고 한다.

기존의 운동이 국가를 부정하고 권력을 장악하여 또 다른 권력구성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었다면, 이러한 흐름에서는 권력을 없애는, 즉 통치하지 않는 삶의 형태들을 모색하고자 한다. 사실은 이러한 움직임이야말로 적대권력만을 부정함으로써 스스로 권력의 반대상(거울상)이 되어 버린 운동흐름에 대한 비판을 함의한다.

또한 기존의 운동이 국가와 권력의 상에만 매달려 생활에서 멀어진 사태에 대한 비판을 함의하기도 한다. 국가권력과의 대결 속에서 사생활을 갖지 않는 운동가의 삶은 이데올로기가 벗겨진 오늘날 존립할 수가 없다. 이것은 대중들을 지도하는 전위운동가(지도)라는 상에서 벗어날 것을, 명령과 복종의 틀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통치와 복종이 아닌 서로의 작은 공동체들을 서로 연결시키면서(그렇다고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녹색평론■식의 방향은 절대 아님! 멋진 자동차기계가 지닌 욕망을 그렇게 해서 없앨 수 있을까? 기계와 인간은 하나의 흐름 속에 있는데!) 수평적인 관계망을 확장시키려는 움직임은 대안적인 운동의 주요 요소가 되고 있다. 생활하는 대중들과 함께 하면서 또한 전통적인 생산 중심적인 사고 및 활동을 넘어서서, 다양한 요소들을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형태, 기존의 권력이나 자본이 원하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의 삶의 형태를 모색하게 된다.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는 생활협동조합 움직임, 농촌에서 나타나고 있는 영농조합법인(위탁영농회사)들, 농촌뿐만 아니라 도시에서 나타나는 생산자공동체들, 그리고 제도교육을 비판하는 대안학교 움직임, 공동육아 운동 등 대안적인 형태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물론 나타난 모든 형태들이 얼마나 공동체적이고 대안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가 하는 것은 앞으로의 연구과제일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영농조합법인들 같은 경우는 부실한 경우가 많이 있고 국가의 지원을 받기 위해 만들어져 공동체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볼 수 없는 것이 많다. 그러나 문제는 각 형태가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얼마나 운동으로 성공하느냐 하는 것보다는, 얼마나 다른 방식을 제기해 주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공동육아 - 기존의 가족제도에 대한 대안형태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꼭 하나의 아버지와 하나의 어머니에게서 자라나야 한다는 엄청난 독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고아원에서 자라면 뭔가 잘못된 인간일 수 있다는 전제 또한 무시무시하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은 94년에 시작되어 현재 전국적으로 25개 정도가 운영되고 있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은 자연친화교육, 지역사회 등의 다양한 세계를 경험하는 교육, 폐쇄된 공간에서 한글이나 숫자를 익히게 하고 인지교육과 집단적이고 획일적인 교육에서 탈피하여 어린이들의 자발적 흥미를 유도하고 어린이들이 주체가 되어 진행하는 종합적인 학습으로 프로젝트 중심교육을 실시하여 전인적 발달과 성장을 촉진하려고 한다. 또한, 공동육아 어린이집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인간관계가 열려져 있어 어린이와 교사. 부모사이에 권위적인 상하관계가 없는 평등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려고 노력한다. 실제 공동육아는 협동조합으로 운영되고 교육에 관련된 모든 요인 즉 어린이, 부모, 교사, 지역사회, 문화의 영향을 받는 주체인 교사와 학부모에 의해 운영되는 조직형태를 지향한다.

대안학교 운동 - 대안학교운동은 기존의 제도 학교교육이 무책임하고 비합리적이며 때로는 부적합하다는 비판에서 출발했다. 대안학교들은 9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여 현재 조심스럽게 확산되고 있다. 전원학교, 생활협동체학교 외에도 방과후와 주말, 방학기간 중 자유로운 활동을 포함하는 프로그램 등 다양한 유형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침에 들어가면 저녁(혹은 밤에) 나올 때까지 전혀 드나들 수 없는 교문, 교사와 학생 사이에 중단된 의사소통, 입시경쟁... 병영이 따로 없다. 적응하는 학생들이 기특하다. 그러면 대안교육이 해결책이 될 수 있는가? 대안교육의 스펙트럼은 교육혁명부터 부분적 개혁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빠른 시간 안에 지식을 주입시키고 학생을 선발하고 통제하는 데만 익숙한 기존의 교육제도를 철폐하자는 데에는 공통적이다.
그리고 대안학교가 현실의 공교육의 외곽에서 겉돌고 있는 것은 아닌가? 대안학교가 현실의 제도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 없이 극소수의 학생을 위한 별도의 학교가 된다면 엘리트 교육의 틀을 벗어날 수 없다. 대안학교의 이념이 공교육 기관에 녹아 들어가야 한다. 이를 위해 현장교사, 교육이론가, 학부모 등이 대안교과서나 새로운 교육방식 모형을 적극 개발해야 한다. 제도개혁은 대안들을 만들어 나감으로써 오히려 활발해질 수 있지 않을까?
전교조의 참교육운동은 예를 들면 교사가 ‘참된 내용’을 터득하고 학생에게 그 참된 내용을 가르친다는 문제설정에 입각해 있다. 이런 점에서 대안교육이 오히려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 누구를, 교사가 학생을, 의사가 환자를, 지식인이 무식자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배우도록 도와주는 철저한 조력자 역할이 필요하다). 그러나 예를 들어 ‘발토로프’식 대안학교, ‘프레네’식 대안학교라고 고정되어서는 안될 것이다.(‘나이팅게일’ 어린이집처럼) 그 안에 있는 당사자들의 자율성에 입각한 다양한 관계의 형성이 중요하다.

노동자공동체 - 봉제공장형태로 운영되는 소수인(5~20여명) 결합의 노동자공동체들, 노동자가 기업을 인수하는 형태도 나타난다. 그 형태는 노동자생산협동조합, 노동자소유주식회사, 노동조합생산자주관리기업, 국민운동방식의 기업(예,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 등 다양하게 전개된다. 최근 노동자기업인수단의 활동 또한 주목된다.

농촌공동체 - 생명농업(유기농업, 자연농업, 기타 등등)에서 나타나는 대안적 사회관계들, 영농조합법인들 가운데 전진적인 공동체들을 들 수 있다. 종교를 매개로 약간 폐쇄된 공동체로 흐르는 경향이 있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면서도 색다른 내부 관계(새로운 협동방식)를 만들어 가려고 한다.

생활협동조합운동 - 일본과 이탈리아에서 생협은 진보세력의 요람 구실을 하고 있다. 일본과 이탈리아 생협의 공통점은 값싼 비용으로 물품을 공동구입하는 것 말고 교육, 환경, 여행■스포츠, 문화 등 조합원의 다양한 욕구를 묶어 사업화하고 있다.
우리 나라 생협운동은 아직까지 먹거리에 대한 욕구를 조직화■사업화하는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물론 한국에도 점차 ‘생활’의 공동성, 연줄망을 만들어 가는 모습을 띠는 것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경기도 성남 주민생협의 경우 자녀교육 문제를 풀기 위해 주부들이 ‘어린이 창조학교’를 직접 운영하고 있다. 영리 목적과 치료 위주로 운영되고 있는 기존 병원에 대한 대항의료기관으로 안성의료생협■안산의료생협■인천평화의료원 등이 생겼고, 교수■학생■직원의 복지 향상을 위한 대학생협이 속속 결성되면서 지역에 있는 생협들과 활발한 교류를 갖고 있다.
생활협동조합은 전통적인 생산 중심지적 사고에서 벗어나 생활(특히 소비)을 중심으로 협동화 해 나가자는 방향으로, 여기서도 대안적인 삶의 형식들을 만들어 가는 것이 중요하다. 의료생협, 공제생협, 소비자조합 등 다양한 부문에서 전개가능하다. ‘한살림’의 사업담당자들 처럼 사업적 관심으로 기울어지면(‘(주)풀무원’으로 가라!) 이런 대안적인 성격은 줄어들 것이다. 아예 전문경영인을 내세워서 사업을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여기서 협동적인 성격을 통해 성원들 간에 색다른 관계를 만들어 가는 과정은 경영적인 차원에서 ‘이익’관점에서만 고려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 미국의 농산물 개방압력 하에 개방이 되었는데도 일본인들이 미국의 농산물을 소비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것은 생활협동조합 등을 통해 고유한 네트워크를 마련해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이러한 생활협동조합을 약화시키도록(깨도록) 일본(정부)에 압력을 가했다는 얘기가 있다. 자신들의 곡물메이져에 대해서는 손도 못 대게 하면서!

환경운동 - 환경운동은 환경보존, 오염퇴치, 나아가 지속가능한 발전(지겨워!)에 집중하고 있다. 여기서도 대안적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기존의 생활방식과는 다른 생활방식(네트워크)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중요하다. 서구의 녹색운동도 대중적인 관심사가 되면서 녹색당이라는 형태로 모아가려는 구태의연한 방향이 있다. 당형태로 집중화해나가는 방식이 아니라 문제를 집단적으로 해결해 가는 다양한 집합체들을 건설하는 것이 필요하다. 서구의 녹색운동과 평화(반핵시위 등)운동에서 수십만 명이 집결하는 것은 전통적인 조직선(명령-동원)에 입각해서 동원된 대중이 아니다. 환경과 관련해 문제의식을 가진 작은 서클들과 네트워크들이 아름아름 수평적 연결들을 통해서 결집하는 것이다. 또한 그 작은 서클들과 네트워크들은 나름의 고유한 성원관계(자신들의 고유한 일상생활)를 유지하고 국제적인 연대까지 만들어 가면서 색다른 움직임을 벌여 나간다.
그리고 환경운동에서 나타나는 자연주의(‘자연으로 돌아가자’)적 경향에 대해서는 선택적인 사항이어야지 이념으로서 제기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성적인 무한한 자유를 주어도 금욕하며 산에 가서 도 닦는 사람이나 집단들이 나타나듯이, 무한한 자유는 자율조절이라는 주체들의 자기조직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출발점일 뿐이다. 그래서 어떠한 형태(모델)를 정하고 그것을 운동방향으로 강요하는 것은 또 다른 권력장치를 만들어낼 뿐이다. 또한 과학기술의 진보에 따른 생산력발전을 무시한 채 자연주의니 인간주의니 하면서 테크놀로지를 거부한다는 전략은, 생산력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생산력의 전유방식까지 장악하려는 자본가에게 질 것이 뻔하다. 인간과 기계가 지닌 욕망을 어떻게 결합하여 즐거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 갈 것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전유, 재전유 운동으로). 또한 수돗물의 오염과 냇물의 오염에는 흥분하는 환경운동가가 자신의 집 주위에서 어슬렁거리는 부랑자에 대한 대책(생각, 상)은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환경운동이야말로 다양한 부문들과의 접속을 제기하고 그 속에서 구성되는 주체성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평화운동 - 과학의 대안적 사용방안 등을 제안할 수 있다.
대안적 네트워크운동 - 최근 진보네트워크가 출범하였다. 자본과 권력에 독립적인 정보화를 기치로 내걸고. 그런데 참세상이란 ID는 ‘참교육’ 만큼이나 구태의연하기 짝이 없다. (요즈음은 ID가 성격을 규정짓는다!?). 적극적인 테크놀로지 전유라는 문제설정을 제기할 수 있다. 그리고 해커운동(해커선언문)까지?
새로운 과학운동(■다른 과학■) - 과학적 결과와 과학연구를 대안적인 삶의 형태들과 결합시켜 나가는 방향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독립영화운동 - 이것도 장사가 되니까 다시 틈새시장으로 진출한다. 열풍을 일으키는 영화들과는 다른 무엇이 있는 것인가?
언더그라운드 밴드들 - 음악활동 : ‘개클련’(개방적 클럽연대, 홍익대와 연세대 주변의 록클럽 11곳, 록밴드 50여개 팀이 모임), 음악웹진 ‘웹진공’과 잡지 ‘팬진공’을 냈다. ‘땅밑달리기’행사, 락클럽들(클럽문화)의 활동, 인디레이블(메이저 레코드사의 영향력 안에 묶여 있지 않은 저예산 독립음반사), 이들은 성공하면 돈벌이로 나가는가? 상품화된 대중문화의 공급지 역할? 정말 풀뿌리들과 접속할 수 있을까?
대안적 문화예술 및 상연공간 - Off-Theater(‘빵’ ‘살’):복합문화공간, 음악을 비롯하여 퍼포먼스, 전시, 영화, 무용 등 다양한 장르들이 자유분방하게 관객들과 만나는 공간을 만들려고 하며, 공연자와 관객의 거리 좁히기를 시도한다.

전유, 재전유운동 - 빈아파트점거운동, 공공공간 공동사용운동(주말 공공기관 주차장 사용), 반-도로운동(anti-road struggle), 이탈리아의 사회센터운동, 세종문화회관점거운동(전유->재전유 운동: 자율인하, 관객으로서 입장료깍기->관객으로서 연주자나 배우 선택하기/이미자, 패티 김에서 서태지로->관객과 배우가 하나되는 색다른 공연하기) 등등.
이상 지목한 대안운동들은 다양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려는, 즉 자유의 공간을 확보해 가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겠다. 물론 그 각 공간들이 폐쇄적인 것에 머문다면 절대 자유의 공간으로 전화될 수 없을 것이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나 코뮨주의자들과는 달리 열린 공동체를 지향해 나가는 방향설정이 필요하다고 본다.

저항과 전복은 꼭 지배질서에 대해 정면으로 공격한다고 해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지배질서가 힘 못쓰게 하는 다른 방식이 중요하다. 구소련은 전복(봉기)에 의해서 무너졌는가? 아니다. 공산당(CP) 독재에 진저리난 대중들이 권력으로서 인정하지 않는 순간 무너져 버린 것이다. 물론 대중들이 ‘집강소’를 만들지 않으니 옐친같은 강패가 설치게 된다. 대중의 창의성(역능)은 그 자체가 자신의 준거를, 더욱이 자신의 공간을 만들기 시작하면 권력에 대해 전복적이다.

4. 결론

지금까지 언급한 이러한 운동은 거부와 부정이 아니라 긍정과 구성으로 나아가는 흐름이다. 거부와 부정 속에서 개인들 및 대중들이 지닌 창의성을 막는 방식이 아니라, 개인들 및 대중들의 창조적 역능에 기반하여 경건하고 무거운 삶이 아니라 즐겁고 가벼운 삶을 만들어 가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최근에 나타나고 있는 다양한 흐름들은 그 누가 대단한 이론을 주장하고 그에 복종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 흐름 속에는 선도적으로 일을 꾸려 나가는 사람이 있지만, 더 이상 명령하고 복종하는 방식이 될 수 없다. 자발성과 창의성에 입각하여 수평적 칸막이와 수직적 위계를 깨 나가는 것이다.

자본과 국가가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한, 그리고 자본주의적인 시장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러한 흐름이 당장 대중들의 많은 생활영역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무의식적인 복종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기반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려는 흐름은 우리의 삶의 방향을 제시해 줄 것이다. 권력장악이라는 승리관점에서 운동과 역사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또 다른 권력을 만들어 나가는 방향으로 나아갈 위험이 있다. 색다른 이질적인 흐름을 만듦으로써 기존의 지형을 넓혀 간다는 지리철학적 사고로 진전한다면, 그러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최근 많이 논의되고 있는 신사회운동, 시민운동과의 차별성을 잠시 언급해 두자. 신사회운동(론)에서도 정체성 찾기를 강조한다. 하버마스처럼 구조(체계)의 식민화에 대한 반응으로서, 밟힌 지렁이의 꿈틀거림으로서 신사회운동을 바라보기도 한다. 소수자운동과 대안운동은 오히려 대중의 자생성과 창의성(역능)에 입각하여 새로운 기계들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지 지배적 구조에 대응한 산물이 아니다. 더욱이 소수자운동이 정체성 찾기에서 끝나지 않고 대안적 삶의 형태, 색다른 자유의 공간을 찾아 나서는 점이 주목된다.

시민운동은 정치적 지배에 대해 시민적 자율성의 영역을 확장하여 민주사회를 만들어 간다는 상에 집착한다. 특이성이 무시된 개인들로서 시민에 의거하면서 다수의 공통성을 찾아서 운동화하려고 한다. 그에 비해 소수자운동과 대안운동은 개별자들의 특이성을 공통화하려고 하지 않고 서로 차이를 극대화하면서도 오히려 소통의 폭을 넓힐 수 있는 방식을 추구한다(스피노자적 코뮤니즘).

지금까지 운동을 지배해 왔던 승리적 관점을 약간 비판해 보자. 어느 마을에 농민회 회원이 한 두 명만 생겨도 이장의 활동방식이 변한다. 꼭 농민회원이 이장으로 당선되어야 이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농민회원이 이장이 되면 기존의 제도화된 이장의 흉내를 내기 바쁘다. 농민회원은 이장에게 다른 시선의 존재를 알리고 다른 공간활동을 만들어 가면 오히려 사회를 풍족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색다른 주체성(정체성)의 등장과 색다른 공간의 창출! 그렇다고 생산력발전을 두려워하여 자연주의로 돌아가는 방향설정은 위험할 것이다. 테크놀로지 및 공간에 대한 전유, 재전유 움직임이 중요하다.

그리고 세계적으로는 최근 ‘유럽의 좌파지배’라는 현상은 이미 그 좌파(사민당)는 진보의 꼬리를 쫓아가는 데도 바쁠 뿐인 집단임을 보여준다(승리관점에 있는 사람들은 이것에 현혹되고 선거주의에 물든다). 지금 유럽을 선도하는 흐름은 오히려 ‘녹색’과 ‘평화’ [대안적 네트워크를 지닌 집단들 및 사고]라고 생각된다. 카프카의 말대로 ‘앞서가는 시계가 되라!’

지형도를 다시 그리기. 지도제작(cartographie). 이를 통해 다양한 활동이 증식되도록 만들기. 새로운 정체성의 등장은 이전에 논쟁적이었던 쟁점들을 더 큰 틀 속에서 이해하도록 해 주며, 따라서 그만큼 더 넓은 자유의 공간을 확보할 가능성을 열어 준다. 그러나 자유의 공간을 확보해 나가지 않으면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권력장악이라는 강박에서 벗어나서 대중의 역능을 아래로부터 구성해내는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더욱이 보편적 주체가 아니라 다양한 소수적 주체들의 다양한 자유의 공간을 확보해 나가는 과정을 코뮤니즘의 길로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변화하는 생산적 주체성들, 반체제적 특이성들, 그리고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적 기질들의 발전과 옹호 그리고 표현은, 운동의 제일차적인 내용이자 과제로 되었다(주체성). 두 번째 과제는 생활양식의 생산과 재생산에 상처를 입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집단적 노동력을 의식적으로 조직하는 것이다(집단성). 이것은 새로운 사회적 생산능력들을 드러내는 것이며, 자본주의적 그리고 사회주의적 구조들에 ‘대항해서’ 그것들 ‘외부에서’ 새로운 사회적 생산능력들을 조직하는 것이다(집단적 주체성).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살고, 실험하고, 투쟁하라’*주).

*주) ■■Guattari, Félix & Negri, Toni, 1985, Les Nouveaux Espaces de Liberté, Chapitre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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