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Ritournelle > * 휴대전화, 철학과 통화하다

* 한겨레(2007. 4. 5) / 휴대전화 세계화시대의 자유찾기
뉴미디어가 삶 쥐고흔드는 시대
세계화의 강력한 파트너 구실
“매체는 사용자 따라 의미 달라져”
비판·감시도구 가능성 사유
» ‘휴대전화, 철학과 통화하다’
책·인터뷰 / ‘휴대전화, 철학과 통화하다’ 펴낸 고현범 교수

담배를 많이 피우던 시절에, 지구를 관찰한 외계인이 인간이라는 생물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한다면 인간의 외형적 특징 가운데 하나로 내장기관에서 계속 연기를 내뿜고 있다는 걸 들 것이라는 농담이 있었다. 요즘 지구를 방문하는 외계인에게 그 시절의 ‘연기’처럼 인간의 태생적 신체의 일부로 오해받을 만한 것으로는 단연 휴대전화(핸드폰)일 것이다. 상시휴대가 가능한 자그마한 도구 하나로 언제 어디서든 누구와도, 심지어 지구 반대편의 아득한 곳 사람들과도 실시간 통화한다는 건 불과 얼마전까지만해도 상상 불가능 영역이었다. ‘뉴미디어시대의 총아’로 불리는 이 새로운 매체는 단순한 의사전달 수단, 도구 차원을 넘어 사회와 문화, 나아가 인간 자체를 바꿔 놓고 있다.

<휴대전화, 철학과 통화하다>(책세상)가 등장한 건 그래서 당연했다. 이 중대하고도 심각한 현상을 사유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면 철학이 왜 필요하단 말인가! 근대성과 합리성이란 주제에 천착하면서 헤겔과 벤야민을 공부해온 저자 고현범 교수가 휴대전화에 주목한 동기는 두가지다. 하나는 충북대·군산대 등에서 강의해온 그가 철학에 무관심하거나 어려워하는 학생들을 좀 더 쉽게 끌어들이는 우회로로 활용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마치 자기 몸의 일부처럼 일상화 보편화해, 지각의 조건 또는 의사소통의 조건이 된 휴대전화가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과 삶 자체도 변화시키고 있는”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이었다.

마셜 맥루한은 “미디어는 메시지”라고 했다. 미디어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단순한 통로나 부차적인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내용을 규정하는 메시지라는 것이고 이게 “근본적인 매체철학적 통찰”이라고 고 교수는 설명한다. 글쓰기 도구는 단순히 도구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사고 과정에 가담한다고 한 니체의 얘기도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뉴미디어 시대의 글쓰기에 뉴미디어는 부단히 개입하고 간섭한다. 이런 상황에서 뉴미디어에 관한 비판적 글쓰기란 가능한가. 만일 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이 <휴대전화, 철학과 통화하다>의 바탕에 깔린 기본적인 물음이다. 그것은 또한 “뉴미디어 시대의 자유는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과도 상통한다.

» 고현범 교수
맥루한에 따르면 매체발전은 말에서 문자로, 인쇄, 뉴미디어 순으로 이어졌다. 이런 매체 변화는 인간의 지각과 사유 구조를 바꿨고 행동양태를 변화시켰으며 사회와 문화를 규정했다. 소크라테스는 문자(알파벳)가 기억력을 퇴화시키고, 상호작용을 배제하며, 독자를 선택할 수 없고, 말할 때와 같은 쌍방의 일체감을 느낄 수 없어 진지한 태도를 갖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런 소크라테스의 고민은 알파벳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대의 매체변화가 몰고온 사정을 반영하고 있다.

자크 데리다는 대중과 개인의 경계를 허무는 전화가 전체주의를 파괴하는 해체적 성격을 지닌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화를 철저히 사적인 대화기계로 본 독일 매체철학자 로에슬러는 전화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간의 경계를 허물지 못해 공공적인 가치에 복무할 수 없다며 데리다를 비판했다.

뉴미디어 확산은 현재 우리 사회의 화두인 세계화 물결과도 관련이 있다. 세계화라는 이데올로기는 뉴미디어가 조성하는 지구적 환경을 반영하고 있으며, 뉴미디어는 자본이 주도하는 세계화 이데올로기의 강력한 파트너다. 뉴미디어가 표방하는 지구적 네트워크는 국지적 경험과 기억이라는 구체적인 맥락을 필요로 한다. 양자가 언제나 평화롭게 공존하진 않는다. 경제·문화적 갈등과 충돌이 일어나는 이유다. 한-미 FTA를 둘러싼 갈등이 이를 말해준다.

“매체를 사용하는 맥락에 따라 매체의 의미는 변하기 때문에 뉴미디어가 함축하고 있는 현재의 기술적·사회적 의미 또한 뉴미디어 사용자가 구성하는 맥락에 의존한다”는게 고 교수의 생각이다. 따라서 휴대전화를 비롯한 뉴미디어는 지구적 네트워크를 매개하면서도 동시에 세계화 이데올로기에 비판적인 맥락에서 사용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고 교수는 “뉴미디어 매체철학은 이런 잠재력을 포착하고 서술 할 수 있어야”하며, 휴대전화를 사용함으로써 전세계적 네트워크에 편입된 사용자들은 “네트워크 사회의 이런 기제를 제대로 파악해서 주체가 될지, 아니면 단지 하나의 물리적 구성인자에 머물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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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혁명
V.I.레닌 / 논장 / 1994년 1월
절판


3. 카우츠키와 파네쾨크의 논쟁
중요한 것은 기존의 국가기구(부르조아지와 수천가지의 끈으로 묶여 있고 타성과 습관에 철저히 물들어있는)가 살아 남을 것인가 아니면 파괴되어서 새로운 것으로 대체될 것인가의 문제이다. 혁명은 새로운 계급이 기존의 국가기구의 도움을 받아서 명령하고 통치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계급이 기존의 기구를 타도하고 새로운 기구의 도움으로 명령하고 통치하는 것에 놓여 있는 것이다. -142쪽

사회주의 하에서는 보다 많은 '원시적' 민주주의가 불가피하게 남게 될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문명화된 사회 역사에서 처음으로 대중은 선거와 선출에서 뿐만 아니라, 국가의 일상적인 행정업무에 있어서도 독립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하에서 만인은 통치하게 될 것이고, 그리고 곧이어 그 누구도 통치하지 않는 것에 익숙해질 것이다.-144쪽

기회주의자들이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것을 주장한 것에 대한, 레닌의 분노. 개량주의 vs 혁명주의, 공산주의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가지는 의미, 부르주아적 국가의 폐지로서의 사회주의와 사회주의 국가의 사멸로서의 공산주의.
파리 꼬뮌의 '민주주의'의 혁명성. 민중에 의한, 민중을 위한 '정치'... 엘리트(관리)는 복속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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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혁명
V.I.레닌 / 논장 / 1994년 1월
절판


1. 마르크스가 제기한 문제
어떠한 사실을 기초로 하여 다가올 미래 공산주의로의 발전이라는 문제를 다룰 수 있겠는가?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에 그 근원을 두고 있고, 자본주의로부터 역사적으로 발전해 왔으며, 자본주의가 낳았던 사회적 힘의 작용의 결과라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저작 속에서는 그가 하나의 유토피아를 만들려고 했다든가, 아니면 알 수도 없는 것에 대해 단순히 추측에 몰두한다든가 하는 식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에 관한 문제를 자연과학도가 새로운 생물학적 변화의 발전을 다루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즉 생물학적 변화가 어디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연유했으며 그것은 어떠한 상황 속에서 어떠한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가를 알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공산주의에 관한 문제를 다루었다.-106쪽

2.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
자본주의사회에 있어서 자유는 언제나 고대 그리이스의 공화정이 이루었던 민주주의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즉 노예주를 위한 자유인 것이다. 자본주의적 착취라는 조건때문에 근대의 임금노예들은 너무나도 기아와 빈곤으로 압살당하고 있기 때문에 '생활 속에서 민주주의나 정치를 귀찮게 여기게 된다.' 일상적으로 평화로운 사건들의 전개과정 속에서 대다수 대중은 정치와 공화국에의 참여에서 배제되어 있다. (...) 공산주의로 향한 발전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서 이루어지며, 그외에는 달리 길이 없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착취자들의 반동적인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계급 이외에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것 이외에 달리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109쪽

우리는 몽상가가 아니면, 개별적인 개인(individual persons)의 영역에 대한 지나친 월권의 가능성과 불가피성, 그리고 그 우러권을 금지할 필요성을 조금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첫째로, 이것 때문에 억압을 위한 그 어떤 특수한 기구나 장치가 필요한 것은 결코 아니다. 즉 이것은 근대사회의 문명인이라면 그 누구라도 길에서 벌어지는 난투극을 뜯어 말리거나 여인네가 폭행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처럼, 간닿나고 기꺼이 무장한 인민 자신에 의해서 수행되어질 것이다. 그리고 둘째로, 사회적 교류의 규칙을 위반하면서 일어나는 월권의 사회적인 근본원인이 인민을 착취하는 것이며, 그들의 빈곤과 궁핍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러한 주된 원인의 제거와 더불어서 월권도 불가피하게 '사멸하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빨리 어떠한 방식의 승리가 올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그것들이 사멸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들의 사멸과 더불어서 국가 또한 사멸해 갈 것이다.-113쪽

4. 보다 높은 국면의 공산주의 사회
현재로서는 얼마나 빠른 시일 내에 이러한 발전이 진행될 것인가와, 얼마나 빨리 노동의 분업에서 깨쳐 나오고,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대립을 없애고, 노동을 '삶의 제일 욕구'로 전환시키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하며, 알 수도 없는 것이다. (...) '보다 높은' 국면의 공산주의가 도래하기까지는, 노동정책과 소비정책에 대한 사회와 국가의 최고로 엄격한 통제가 요구된다고 사회주의자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이 통제는 자본가들에 대한 노동자들의 통제의 수립과 함께 자본가들이 지니고 있던 생산수단의 몰수로부터 시작해야 하며 관료로 이뤄진 국가가 아닌 무장한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국가에 의해 실행되어야만 한다.-119쪽

회계(accounting)와 통제(control)-이것은 최초 국면의 공산주의 사회에서 '순탄한 노동'과 적절한 기능을 위하 필요한 주된 것이다. 모든 시민들은 무장된 노동자로 구성된 국가의 고용원(雇庸員)으로 전환된다. 모든 시민들은 전국적인 단일 '신디케이트'의 고용원이나 노동자가 된다.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이란 그들이 동등하게 일해야 하며, 적절한 양의 노동을 분담해야 하고, 동등한 댓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전부다. 이것을 위해 필요한 회계와 통제는 자본주의에 의해서 아주 단순화되며,-글자를 읽을 수 있으면 누구나가 수행할 수 있는-즉 사칙연산만을 알면 관리하고 기록할 수 있는, 또한 그것에 상응하는 적당한 수입을 받는 극단에 가까운 단순작업으로 환원된다.-124-125쪽

국가의 주요한 기능이 노동자들 자신에 의해 수행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회계나 통제작업으로 되면, 국가는 더이상 '정치국가'가 아니게 되며 "(국가의-역자주)공공기능은 정치성을 상실하게 될 것이고, 단순히 행정적인 기능만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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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혁명
V.I.레닌 / 논장 / 1994년 1월
절판


4. 에어푸르트(Erfurt) 강령 초안에 대한 비판
엥겔스는 민주집중제를 부르조아나 쁘띠부르조아 이데올로그들, 그중에서도 무정부주의자들이 사용하는 관료적인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지는 않다. 그의 중앙집권제란 개념은, '코뮌'과 구(區)들로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어 자발적인 방위를 하면서, 모든 관료적인 습성과 상부로부터의 '명령하달식'을 완전히 제거한 광범위한 지방자치제를 전혀 배제하지 않고 있다.-93쪽

6. 민주주의의 극복에 대한 엥겔스의 입장
민주주의는 다수에 대한 소수의 복종과 동일하지 않다. 민주주의는 다수에 대한 소수의 복종을 승인하는 하나의 국가, 다시 말해서 하나의 계급이 다른 계급에 대항하여 강제력을 체계적으로 행사하기 위한, 대중의 한 분류가 여타 다른 부류에 대하여 권력을 체계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하나의 조직체 이상이 결코 아닌 것이다.-104쪽

국가, 즉 인민일반에 대한 모든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폭력이자 모든 폭력의 사용체인 국가의 폐지를 우리는 궁극적인 목적으로 설정했다. 우리는 다수에 대한 소수의 복종이라는 원리가 준수되지 않는 사회체계의 도래를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투쟁에 있어서 우리는 사회주의가 공산주의로 발전할 것이며, 따라서 인민일반에 대한 폭력과 한 사람이 타자에게 그리고 대중의 한 부류가 다른 부류에게 복종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라고-왜냐하면 인민은 폭력과 복종없이도 사회적 살므이 기본적인 조건들을 준수하는 데 곧 익숙해질 것이기 때문에-확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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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almas > '시간강사 제도', 근본적인 기로에 서다 - 김명인

 

 

'시간강사 제도', 근본적인 기로에 서다
  [김명인 칼럼]'겨우 존재하는 사람들'과 대법원 판결
  2007-04-16 오전 10:34:28

  세상에는 겨우 존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주목받지 못하는 주변인들이며 존재하지만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유령과 같은 불안한 존재들이다. 이를 테면 고학력사회 속에 섬처럼 살아가는 고졸자, 혹은 그 이하의 저학력자들이 그렇고, 농촌 노인들이 그렇고 점점 늘어가는 실업자들이 그럴 것이다. 그들 역시 이 사회의 구성원들이고 중요한 노동력이자 생산력 기반이지만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취급되고 있다. 하지만 그들도 이 지상에 살아가고 있으며 그들의 물질적, 정신적인 소외와 고통은 우리 사회가 언젠가는 갚아야 할 잠재적인 빚으로 쌓여가고 있다.

'겨우 존재하는 사람들', 대학 강의의 40%를 책임 지다
  
  여기 또 하나의 겨우 존재하는 인간군이 있다. 그들은 시간강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2005년의 통계에 의하면 한국에는 약 5만 명의 시간강사들이 존재하며 한국 대학의 시간강사 의존율은 40퍼센트라고 되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5만 명의 시간강사들이 현재 한국의 대학교육의 40퍼센트를 감당하는 고등교육의 중추적 주체로 활약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대학에서 출석부를 들고 강의실에 들어가는 사람들 열 명 중의 네 명이 그들인 셈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대학에서 그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학력과 학식, 그리고 인격에 관계없이 그 점에서 시간강사는 누구나 똑 같다. 강의실에서는 엄연히 '교수님'이지만 강의실 바깥에 나서는 순간 그들은 마치 허방을 밟는 것처럼 존재의 불안정 상태에 빠지게 된다.
  
  대학에 따라서는 이들에게 휴게실이나 연구실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겉치레에 그치고 교직원식당을 이용할 수 있게 하기는 하지만 도서관 이용은 제한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약간의 권리라는 것도 학기 중에 한할 뿐 그들이 아무리 한 대학에 오래 출강했다고 하더라도 방학 중에 그들의 대학 내 신분은 제로 상태가 된다. 대학에서 그들의 사회적 존재는 교수-교직원-학생-비정규 일용직(경비, 청소직 등)의 다음 서열로 최하층에 속한다. 그들은 계절적 일용잡급직인 것이다. 학기 중에 주어진 시간만큼 강의를 하고 그에 해당하는 강사료를 받는 것, 오직 그것만이 그들이 대학과 맺는 관계의 전부이고, 그 외의 부분에서 그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강의실을 나서는 순간 대학은 그들을 철저히 타자로 만든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강의가 끝나자마자 보따리를 싸서 이 낯선 공간을 어서 떠나는 일뿐이다.
  
  그들이 대학 안에서만 불안한 것은 아니다. 대학 밖에서도 그들의 불안은 그대로 이어진다. 시간강사라는 직업(?)은 그저 명예직이고 어엿한 본업이 따로 있는 사람들은 예외이지만 강사료를 기본수입으로 하여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는 대부분의 시간강사들의 대학 밖 사회 속에서의 존재 형태는 좋게 말해서 프리랜서고 솔직히 말하면 비정규직의 최악의 형태인 시간제 일용노동자(아르바이트)에 불과하다. 그 불안한 시간강사 직조차 안정적으로 보장되어 있지 못해서 그들은 그 어떤 생활상의 장기계획도 세울 수 없다. 그저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한 학기 두 학기를 근근히 살아 나갈 뿐이다. 간혹 주 20시간 이상, 심지어는 30시간이 넘는 살인적인 강의를 하는 이른바 '강사재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재벌은 커녕 가족의 생계를 전적으로 강의에 의존하는 눈물겨운 슈퍼맨들이며 그런 기회 역시 결코 안정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저 할 수 있을 때, 자리가 있을 때 거의 필사적으로 벌어두자는 것이다. 그런 그들의 삶은 불안에 피폐까지 더한 것이 된다.
  
  '시간강사' 제도, 근본적인 위기에 봉착하다
  
  며칠 전 대법원에서 시간강사들을 근로자로 인정해야 하고 그에 따라 산재보험료를 납부하는 것(대학에서 시간강사들의 산재보험료 일부를 부담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그 재판의 원고는 일부 사립대학들로 그들은 시간강사가 학교당국의 지휘・감독을 받지 않고 고정급여를 받지 않으며 소속이 없기 때문에 근로자로 볼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워 시간강사의 근로자성을 부인하고 그에 따라 대학은 그들을 위한 산재보험료 부담의무가 없다는 논리를 폈다고 한다. 그러나 대법원은 바로 그 논리야말로 그들의 열악한 비정규직적 특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반론을 세워 원고 패소 판결을 이끌어냈다고 한다.
  
  시간강사의 근로자성(노동자적 본질)을 명확히 한 이 판결은 그러나 시간강사 문제의 매듭을 지은 판결이 아니라 시간강사 문제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판결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시간강사 제도는 시간강사는 근로자가 아니라는 허구적 전제 위에서 오래도록 유지되어 온 제도이기 때문에 시간강사도 근로자라는, 그것도 아주 열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리고 있는 비정규직 근로자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확인되고 그 전제 아래 시간강사 문제를 보아야 한다고 하면 그 제도는 근본적인 위기에 봉착하게 되기 때문이다.
  
  시간강사가 조만간 전임교수가 되기 위한 일종의 도제 혹은 연수과정이던 때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지금도 일부 명문대나 지방 국립대 등의 일부 학과의 경우 그런 관행이나 인식이 아직 현실성이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만간 전임교수가 될 예비교수로서의 시간강사는 아무리 근로조건이 열악하고 강사료가 적다고 해도 일종의 통과의례 삼아 시간강사 기간을 감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좋은 시절은 다 지나갔다고 해야 할 것이다.
  
  대학의 수도 늘어나고 대학생 수도 늘어나 대학이 과거의 엘리트 교육기관이 아니라 대중교육기관으로 변신하게 되면서 대학은 늘어나는 교육수요의 처리를 저임금 시간강사들에게 분담시키게 되었고, 이는 점점 하나의 관행이자 제도로 굳어져 버리게 되었다. 그 결과 5만의 시간강사가 전체 대학교육의 40퍼센트를 감당하게 되는 데까지 이르렀다. 수천만 원에 이르는 대학교수 1인의 연봉으로 최소한 서너 명의 시간강사에게 연간 강사료를 지급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는 대학들이 이 좋은 제도를 포기할 이유가 없다. 대학들은 시간강사들에게 '조만간 전임교수가 될 예비교수들로서 당신들을 고용하는 게 아니라 돈을 주어 가면서 오히려 교육훈련을 시켜주는 것'이라는, 결국 '시간강사는 노동자가 아니다'는 이데올로기 아래서 사실은 학문후속세대들의 고급 학술・교육 노동력을 고도로 착취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대학원의 난립과 학위의 남발로 한편으로는 비싼 대학원 등록금을 받으면서 저임금 시간강사 예비군을 넉넉하게 확보하는 정책 또한 지속해 왔다.
  
  그 결과 학문후속세대로서의 시간강사들은 저임금과 불안한 생활에 쫓겨 창의적 연구와 학문선배들에 대한 선의의 학문적 경쟁의 기회를 잃어 가고, 전임교수들은 전임교수들 대로 전임동료들의 항상적 부족으로 교육, 연구, 행정부담의 3중고에 시달려 대학교육의 질은 점점 악화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조건 속에서 세계적인 대학을 만들겠다는 슬로건은 공염불이 될 수밖에 없다. 대학이 지성의 전당이라는 말은 이젠 지나가건 소도 웃을 말이 되어 버리고 지성의 깃발이 펄럭임을 멈춘 곳에서 경쟁적 시장주의가 대신 준동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놈의 경쟁력'을 온전히 갖추기 위해서라도 지금과 같은 시간강사 제도라는 학문후속세대에 대한 노골적 착취제도는 근절되지 않으면 안 된다. 경쟁에는 '생산적 불안'이 필요한 법인데 시간강사라 불리는 수많은 학문후속세대들이 생산적 불안에 사로잡힐 출발선에조차 서지 못하고 '생존적 불안'의 바다 위를 떠도는 상황에서 한국 대학의 세계적 경쟁력 싸움은 처음부터 지는 싸움일 수밖에 없다.
  
  대학 사회의 '비열한 안정' 뒤흔들 투쟁이 다가오고 있다
  
  시간강사는 비정규직 근로자다. 대학과 국가가 이 명백한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이다. 대학과 국가에게는 이 문제에 관한 한, 두 가지 선택밖에 없다. 하나는 시간강사 제도를 폐지, 혹은 최소화하여 현재의 시간강사들의 대다수를 일정한 유예기간과 평가과정을 거쳐 정규직 교육노동자, 즉 전임교수로 광범하게 채용하면서 대학교육체계를 정상화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시간강사 제도를 유지하되 그들에게 전임교수들에게 버금가는 당당한 교육노동자로서의 지위와 대우, 그리고 복지혜택을 제공하여 그들의 불안한 삶을 종식시키는 것이다. 또한 거기에는 당연히 현재의 대학원 교육체계와 학위부여 제도의 획기적 변화도 수반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이번 대법원 판결과 함께 이제 시간강사 문제는 하나의 사회적 이슈로 다시 떠오르게 되었다. 특히 올해 7월부터 비정규직 보호법이 시행되면 2년 뒤 시간강사들 역시 해고냐 정규직화냐 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이 상태로 간다면 지금은 대학사회의 그늘에서 불안 속에 그저 겨우 존재해 왔던 그들은 더 열악한 존재의 불안상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져버릴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될 경우 그들이 이제 더 이상 '겨우 존재하는' 상태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그들의 희생 위에 존재해 온 대학사회의 비열한 안정을 뒤흔드는 투쟁을 통해 자신들의 사회적 존재감을 회복하는 길로 나서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

   
 
  김명인/인하대 교수,<황해문화>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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