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킨 ‘유해 무근’ 해명불구 의혹
[2007.05.01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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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킨도너츠가 최근 자사의 제품제조과정에 위해 요소가 있다며 문제를 제기한 용역업체의 생산직 직원과 합의를 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지난달 30일 던킨도너츠 등에 따르면 자신을 던킨도너츠 서울 구로공장에서 근무한 생산직 직원이라고 밝힌 한 네티즌이 지난달 23일 포털사이트 다음의 토론게시판에 “(던킨도너츠가) 빵에 철가루가 들어있다는 소비자의 항의를 받자 재료에서 자석으로 철가루를 분리해낸 후 그대로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같은 주장은 던킨도너츠 서울 구로공장이 지난달 25일 수입식품을 제대로 신고하지 않아 금천구청으로부터 영업정지 2개월의 행정처분을 받은 상황과 맞물려 던킨도너츠의 도덕성 논란에 불을 지폈다.

이 글을 올린 사람은 실명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5년 넘게 던킨에서 도너츠를 생산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던킨도너츠와 배스킨라빈스31을 운영하는 ㈜비알코리아측은 해당 글을 올린 사람을 협력업체 Y산업의 직원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는 이어 “제품 원재료가 불량해 반품을 건의했지만 본사 관리팀에서 반품처리 없이 사용하라고 지시했다”며 “이와 함께 제품 후렌치크로울러 포장지에는 사용해서는 안되는 합성 항산화제(TBHQ)가 들어 있어 지난해 10월 전량 긴급 회수하기도 했다”고 폭로했다.

이와 관련, 던킨도너츠측은 이 직원이 부상을 당한 뒤 산업재해를 신청하는 과정에 회사가 미온적인 움직임을 보이자 이같은 주장을 게시판에 올린 것으로 파악했다. 따라서 회사측이 산업재해신청서에 긍적적인 의견을 첨부해주고 대신 게시판 글을 삭제하는 선에서 합의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회사측은 “문제가 된 후렌치크로울러는 판매율이 떨어져서 생산을 중단한 것 뿐”이라며 “해당 글을 올린 사람과 이미 악의적인 글을 올리지 않겠다고 합의 했다”고 말했다.

회사 관계자는 “직원의 주장이 사실무근이지만 허위주장이라도 유포될 경우 입게 되는 피해를 우려했다”며 “해당 관청에서 조사했지만 문제가 없어 이미 일부 포털에는 관련 글들의 삭제를 요청한 상태”라고 말했다.

회사측은 철가루 분리 후 사용의 경우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며 합성 항산화제는 미국에서 들여오는 원료에 함유됐을 수는 있지만 워낙 소량이어서 당국의 조사에서도 검출되지 않는다고 해명했다.

회사측과의 합의 이후 문제의 글은 토론게시판에서 삭제했다. 그러나 원문은 구글 DOCS에 저장되어 누리꾼들 사이에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누리꾼들은 폭로 내용이 사실일 경우 엄청난 파장이 예상되는 데다 회사측의 주장대로 사실무근일 경우 회사가 보는 피해가 큰 데도 불구하고 이를 서둘러 봉합하려 한 회사측의 태도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아이디 레이블루를 사용하는 한 네티즌은 “정식으로 사실확인을 해 공지해도 시원찮을 판에 개인 블로그의 글부터 삭제 요청하는 것은 잘못됐다”며 비알코리아를 성토하고 나섰다.

비알코리아는 지난 1985년 샤니와 배스킨라빈스 인터내셜널사와 합작투자 계약 후 93년 또 다시 던킨도너츠에 대한 계약을 체결, 5월 현재 327개의 던킨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한편, 비알코리아측은 서울 구로공장 2개월 영업 정지에 대해 관세사의 실수로 행정이 누락된 만큼 문제가 없다며 서울행정법원에 영업정지처분 취소 소송과 함께 효력정지 신청을 제기해 놓은 상태다.

/shower@fnnews.com 이성재 백인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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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러시아 민주주의의 아버지

지난주에 세상을 떠난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에 관한 기사를 하나 더 옮겨온다(지난주에는 주로 부고기사들이었다). 프레시안의 이 기사에서는 현대 러시아의 '최악의 지도자'였던 옐친의 과오들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하게 적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고르바초프의 사회주의 개혁노선이 쿠데타와 뒤이은 옐친의 급진주의 노선에 의해 좌초당한 사실을 항상 유감스럽게 생각해왔는데, 기사에 따르면 미국의 시사주간지 <네이션>은 지난달 러시아 민주주의의 진정한 아버지는 보리스 옐친이 아니라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정당하게 평가했다고. 사실 그런 대목이 눈에 들어서 스크랩해놓는 기사이다.

프레시안(07. 05. 01) 옐친이 '러시아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옐친은 정녕 러시아 민주주의의 아버지인가? 지난 달 23일 사망한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에 대해 서방 언론, 특히 미국 언론들의 과장된 평가가 줄을 잇고 있다. 언론들은 옐친을 '소련을 붕괴시키고 러시아의 민주주의를 가져온 인물'이라고 치켜세우며 그의 생애를 반추하고 있다. 한국의 언론들의 평가도 미국적 시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경제 개혁은 실패했다' 혹은 '영욕의 삶을 살았다'며 균형을 잡긴 했지만, 그가 1991년 강경 공산주의 군부 쿠데타 당시 탱크에 직접 올라갔던 일에 대해서는 '맨주먹으로 쿠데타를 저지했다'며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지난번 페이퍼에서도 지적했지만, 옐친은 이 이미지 하나로 10년을 집권했다).


  
옐친 전 대통령이 러시아 정치사에서 한 획을 그은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1991년 6월 러시아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1999년 블라디미르 푸틴 현 대통령에게 권력을 이양하기까지, 의회를 포격하고 알짜배기 국유기업들을 마구잡이로 민영화하는 등 9년여 동안 옐친이 보여줬던 소위 '충격 정치'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너무나 멀었다.
  
민주주의에 반하는 옐친의 정치의 1991년 12월 소비에트 연방 해체 결정에서부터 시작됐다. 그는 의회와의 협의는커녕 법적 절차도 제대로 밟지 않은 채 소련 해체를 선언해버렸다. 소련의 해체가 아무리 역사의 대세였다고 할지라도 절차적 정당성을 결여한 독단적 결정은 국민들을 아연케 하는 것이었고 이후 보여준 비민주적인 정치행태의 시발점이 됐다.
  
소련의 해체 과정에 대해 미국의 정치평론가 스티븐 코헨은 지난해 시사잡지 <네이션>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의 사회적 합의 및 헌법 중시 태도로부터 이탈한 것"이라며 '위로부터의 변화'라는 제정 러시아 시대의 짜르식 전제정치와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고 혹평했다. 옐친의 그같은 조치는 또한 그에 앞서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의해 6년간 실시된 글라스노스찌(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 과정에서 이룩한 민주개혁을 뒤흔드는 것으로 대중들의 분노를 샀다.
  
1992년 초부터 시작된 옐친의 이른바 '충격 요법' 정책도 러시아 국민들을 고통스럽게 만든 것이었다. 미국의 경제학자들, 특히 하버드대 경제학자들에 의해 사실상 강요되고 클린턴 미 행정부에 의해 지원을 받은 이 정책은 물가 통제 장치를 없애는 동시에 대규모 국유기업들을 민영화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옐친 주변의 '젊은 개혁가'들에 의해 의욕적으로 추진된 이 정책은 그러나 결과적으로 러시아 경제에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가져왔다. 또 서민들의 화폐 자산의 가치를 추락시켜 러시아 국민들의 절반 가량을 빈곤선 아래로 떨어지게 했다. 그러나 서구의 언론들은 이를 가리켜 '개혁'이라고 선전했다.

1993년 10월 옐친이 의회 건물에 탱크로 발포했던 일은 철권통치를 방불케 했다. 옐친은 자신에게 권력을 부여하고 1991년 쿠데타 당시 자신을 비호했던 의회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반대파를 제거한다는 명목이었다. 이 사건으로 187명이 목숨을 잃었고 50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더 중요한 것은 합법적 선거에 의해 선출돼 행정부로부터 독립적 자세를 견지했던 러시아 의회가 이후 정부의 시녀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공산주의 붕괴 이후 형성된 러시아의 헌법적 질서는 스스로 무너진 것이다.
  
러시아 대통령이 정당하고 독립적인 선거를 통해 수립된 의회에 대포를 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와 대부분의 미국 언론들은 옐친의 '치어리더'로 활약했다. 당시 미국의 한 고위 관리는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 "클린턴 행정부는 옐친이 더 폭력적이더라도 그를 지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1994년부터 시작된 체첸 공격도 마찬가지였다. 공격을 멈췄던 1996년까지 수만명의 민간인이 사망했고 헌법에 보장된 연방주의는 공공연히 조롱당했다. 또 핵무기를 가진 국가에서 일어난 첫 번째 내전이라는 위험천만한 전쟁으로도 기록됐다. 러시아의 전투기와 탱크가 체첸의 수도 그로즈니에 폭격을 퍼부을 때 클린턴 대통령은 옐친을 링컨 대통령과 비교하며 찬사를 쏟아냈다.
  
영국에 망명한 러시아 억만장자 보리스 베레조프스키 등 소수의 올리가르히(과두재벌)에 의해 자금을 조달받고 친(親) 옐친 언론의 도움을 받아 치른 1996년 대통령 선거 운동은 불법과 탈법으로 점철됐다. 옐친은 "배당을 위한 융자"라는 악명높은 합의를 통해 자신에게 선거자금을 대주는 올리가르히들에게 러시아의 중요한 경제적 자산 통제권을 나눠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미국 언론들은 이를 '시장개혁'이라고 불렀으나 러시아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범죄행위'에 다름 아니었다. 그같은 조치는 또 러시아의 올리가르히를 재생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러시아의 한 저널리스트는 이를 두고 옐친은 '러시아 민주주의의 아버지'가 아니라 '올리가르히의 아버지'라고 비난했다.


  
1998년 8월 실시한 루블화 평가 절하와 채무 상환 유예(디폴트), 은행 계좌 동결 조치 등의 정책은 서민들의 저축을 또다시 몰수한 셈이 됐고 1991년 이후 형성된 중산층을 몰락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처럼 옐친 치하의 러시아 정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환멸만을 가져오는 반동적인 정치에 불과했다. 러시아인들의 70% 가까이가 권위주의적인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답했던 지난해 여론조사는 옐친의 유산이 러시아 민주주의에 얼마나 해로운 것이었는지를 반증한다.
  
올리가르히에게 러시아의 재산을 독점토록 한 '경제개혁' 역시 씻을 수 없는 실정이다. 유엔개발계획(UNDP)는 1999년 보고서에서 "구 소련에는 현재 사상 유례 없는 위기가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으나 미국을 위시한 서방 언론들은 이를 깡그리 무시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대다수 국민이 고등교육을 받은 주요 산업국가가 이룩한 수십년간의 경제 개발 결과를 해체하는 현상이 현대 세계사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고 평가했으나 미국의 언론들은 옐친과 그의 '젊은 개혁가들'을 찬양하는 데에만 급급했다. 이에 대해 <로이터> 통신의 한 기자는 "고통이 편집됐다"고 촌평했다.
  
일각에서는 옐친의 충격요법적 경제개혁 외에는 별다른 대안이 없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그러나 옐친이 무모한 정책을 추진하던 당시에도 시장경제를 지지하는 러시아의 경제학자들은 옐친의 정책이 재앙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며 시장경제로의 보다 점진적인 이행을 목표로 하는 '제3의 길'을 주장했다. 시간은 그들의 주장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옐친의 유산을 물려받은 푸틴에 의해 러시아는 더 가난해졌고 양극화는 더 심각해 졌다(*양극화가 심각해진 건 사실이지만 더 가난해졌다?). 푸틴이 권좌에 오르자마자 했던 일은 옐친을 부패 혐의로 기소하지 말라는 포고령을 발표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네이션>은 지난달 27일 "언론의 건망증이 심한 건 알겠지만 1985년 소련의 지도자가 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진정한 러시아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기억하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며 "옐친은 언론 검열 철폐, 시장 개혁, 자유선거를 실시한 고르바초프 개혁의 최대 수혜자였을 뿐이었다"고 말했다.


  
고르바초프에 의해 소련 역사상 최초로 도입된 자유선거에서 옐친이 러시아 대통령으로 당선된 반면, 옐친은 자신의 부패에 따른 징벌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심복인 푸틴을 후계자로 지명한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언론이 옐친을 '러시아 민주주의의 아버지'로 극찬하는 것은 그가 서방의 입맛대로 행동했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한 관측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고르바초프에 대한 인색한 평가, 나아가 푸틴에 대한 적개심은 민주주의보다는 러시아의 이익을 지키려는 이들의 독립적인 태도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옐친의 비민주적인 정치행태를 뻔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클린턴 행정부가 '옐친 개혁'의 후원자가 됐던 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를 대세로 굳히려 했던 미국의 조바심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옐친 사후 나타난 미국 언론, 그리고 우리 언론의 태도는 그같은 서구우월적 시각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고 있다.(황준호 기자) 

07. 05.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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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未知生焉知死 > 세계자본주의에서 코뮤니즘으로(공동토의)(4)

 

가라타니 : 후쿠모토는 생산협동조합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만, 맑스도 생산협동조합이라는 것을 대단히 중시하여 『자본론』속에서도 나오고 있습니다. 맑스는 재밌는 말을 하고 있는데 주식회사란 자본주의 내부에서의 자본제의 양기(揚棄)라고 하고 있다. 결국 자본가 자체가 사라져 가며 주식자본으로 대신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한 마디로 말하면 자본과 경영의 분리입니다. 이것이 자본제 생산 속에서 나온 「부정의 부정」이라는 것이 된다. 그러나 동시에 한편으로는 같은 「부정의 부정」으로서 생산협동조합이 있는 것입니다. 맑스는 코뮤니즘의 가능성을 본 것입니다.


  그러나 생산협동조합은 몰락했습니다. 그것은 주식회사와의 경쟁에서 진 것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영국의 산업자본 자체가 경공업에 근거한 것으로 독일과 같이 국가적인 자본에 근거한 중공업의 단계에서 몰락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 이후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협동조합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맑스는 그것을 사유제를 폐기하고 개체적 소유를 재건하는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예전은 이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사유제의 폐기가 왜 개체적 소유의 확립이 되는가. 사유제라는 것은 절대주의적인 국가에 의해 주어진 권리로 이른바 국유제인 것입니다. 따라서 사유제는 세금을 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사유제를 폐기하여 국유화하는 것이 코뮤니즘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맑스는 그것을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습니다. 사유제가 국유재산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따라서 사유재산의 폐기란 국가의 폐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편, 개체적 소유는 협동적 소유 속에서 가능하게 된다. 이것이 코뮤니즘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점은 엥겔스 이후의 맑스주의에는 완전히 빠져 있습니다.


  내 생각에서는 맑스는 역시 생산중심주의에서 사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소비협동조합보다 생산협동조합을 중시했다. 그러나 맑스도 말했지만 생산협동조합은 기업 속에서 기업에 대해 대항하는 경우는 그 자체가 주식회사로 전화하던가, 기업에 패배하던가 어느 한 쪽입니다. 후쿠모토가 말하고 있는 문제는 구체적으로는 알지 못하지만, 농민조합을 만들고 임업조합을 만들려는 것과 같은 결과가 된다고 생각한다. 결국 자본에 대해서는 진다고 생각한다. 나는 원리적으로는 소비자조합이 선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현재 존재하고 있는 소비자운동이나 소비조합은 아니며, 소비협동조합을 형성하고 그것이 생산자협동조합을 조직해 간다고 하는 과정이 아니라면 자본에는 저항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미국에 갔을 때 들은 얘기입니다만, 뉴욕 등의 슬럼가에서는 흑인은 항상 최하층입니다. 게다가 거리에 있는 상점은 지금도 대략 한국인이 하고 있다. 혹은 동유럽에서 온 사람들이 하고 있다. 그러나 흑인은 그런 상점을 경영한 적이 없다. 따라서 사회복지는 받는다 해도 그들 자신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없다. 어째서 그들은 소비협동조합으로서 상점을 경영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가를 물었다면, 말콤 X가 하려고 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 전에 살해되어 버렸지만 만약 소비협동조합이 가능했다면 상점의 경영은 흑인이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흑인이 생산협동조합을 조직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시민운동의 성과로서 사회복지가 충실하게 되었지만, 그것은 어떤 사태도 개선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잘 될 전망이 없으며 단지 PC를 말하거나 사회복지의 더욱 충실을 목청 높여 외칠 뿐입니다.


  자본의 운동은 잉여가치의 실현에 있는 것이지만 그것은 파는 것에 의해 달성되는 것으로, 잉여가치 실현의 최후의 장소에 서 있는 것이 소비협동조합입니다. 소비협동조합의 편에서 기업을 여러 가지 형태로 규제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소비협동조합의 큰 어소시에이션이 형성된다면 기업 자체를 생산협동조합으로 변하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하나의 관점은 잉여가치는 정보적 차이라는 것에 관계하는 것입니다. 예전의 상인자본은 공간적인 차이에 의해 잉여가치를 얻었다. 이른바 자연적인 차이입니다. 예를 들면 차(茶)가 재배되는지 재배되지 않는지는 지역에 의해 결정된다. 그것을 유럽에 가지고 간다는 것에 의해 그 가치체계의 차이로부터 잉여가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산업자본의 경우는 기본적으로 기술혁신에 의한 차이입니다. 결국 시간적인 차이입니다. 제3세계는 원래 후진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시간적인 차이화 속에서 후진성을 강요받았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다.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비교적 간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기술적인 정보를 모두 공개해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신상품을 개발하기 위한 신기술은 얼마 지나지 않으면 알게 되는 것이지만, 그 짧은 시간적인 차이가 특별 잉여가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공개해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자본은 그런 것을 할 리가 없다. 그러나 소비-생산협동조합은 모든 지식을 공개하는 것을 취지로 한다. 예를 들면 근대과학의 특성은 지식의 공개성에 있는 것입니다. 결국 만인에게 공유된다는 것, 그것이 테크놀로지와 다른 것입니다. 산업자본 간의 경쟁이 기술혁신을 가져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없더라도 공개성이 있다면, 과학이 이미 그런 것처럼, 기술혁신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자본의 이윤율의 문제가 그것을 억제한다. 예를 들면 10년을 사용할 수 있는 전구를 개발하는 것은 용이하지만,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에 어떤 자본도 하지 않는다. 소비-생산협동조합이라면 그것이 가능하다. 근대과학의 원칙에서 말한다면 인류가 획득한 지식은 인류가 공유해야 하며 그것이 코뮤니즘입니다. 최근 인터넷에서 특히 두드러지는데, 기밀로 둔다면 이윤을 낳을 수 있는 정보를 공개해 버리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적 소유권의 문제와 관계가 되지만, 나는 지적 소유권에 반대합니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학회에서 발표하기 전에 우선 특허를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근대과학의 정신에 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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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체코 영화의 거장 이리 멘젤

올 전주국제영화제의 심사위원장은 체코 영화의 거장 이리 멘젤이라고 한다. 이미 전주에 와 있다는 그의 대표작 세 편이 서울에서 곧 개봉할 예정이라고. 모처럼 흥미를 끄는 영화 기사이다. 체코 영화인이라면 밀란 쿤데라와 밀로스 포먼 정도만을 아는 처지인지라(그러니까 상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수준인지라) 그의 방한은 반갑고 그의 영화는 기대된다(시놉시스상으론 내 취향에 딱 맞는 영화들이다). 흠...

한국일보(07. 05. 02) 체코 거장 이리 멘젤감독 대표작 3편 잇따라 개봉

디지털문명의 즉물성에 길들여진 세대에게 ‘고전’ 영화를 소개하는 일은 고통에 가깝다. 잉그마르 베르히만, 페데리코 펠리니, 프랑수와 드뤼포 같은 클래식 아티스트의 작품에 관한 글을 쓸 때면, 그래서 손가락 끝에서 땀이 솟는다. 그러나 체코의 거장 이리 멘젤(69)의 작품은 좀 다르다. 이미 수 십년 전 영화학사전에 이름을 올린 감독이지만, 이 보헤미안의 능청스러운 영화는 오늘 봐도 유쾌하다. 그의 대표작 <가까이서 본 기차>(1966년) <줄위의 종달새>(1968년) <거지의 오페라>(1991년)가 각각 10일, 17일, 24일 서울에서 개봉한다. 그는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의 심사위원장을 맡아 지금 전주에 머무르고 있다.



가까이서 본 기차
그가 스물 여덟 살 되던 해에 만든 장편 데뷔작.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받으며 ‘멘젤’이란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2차세계대전 말기의 보헤미아의 어느 시골역, 여성의 성기를 뜻하는 ‘밀로쉬’라는 망측한 이름의 어린 역무원은 여자친구와 ‘한번 하는’ 꿈만 꾸며 산다. 그에겐 엄혹한 세상사보다 자신이 조루라는 사실이 자살을 시도케 할 만큼 절망스럽다. 우여곡절 끝에 ‘남자’로 다시 태어나는데 성공하지만 밀로쉬를 기다리는 것은 뜻밖의 비극. 우쭐해진 마음에 어줍잖은 레지스탕스 흉내를 내다가 허무하게 죽음을 맞는다. 경쾌한 리듬을 타고 고조되던 행복감이 단번에 전쟁의 용광로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린다. 서른 살도 안 돼 만든 작품이라는 사실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희극과 비극을 교차하는 멘젤의 농밀한 연출력이 돋보인다.



줄 위의 종달새
배경이 된 시대만큼 개봉까지의 사연이 많은 영화다. 멘젤은 1968년 ‘프라하의 봄’을 맞아 폭압적이었던 공산정권의 기억을 필름에 담았지만, 곧 이은 소련의 침공으로 이 영화는 20년 넘는 동면에 들어간다. 영화가 개봉된 것은 90년 베를린영화제 때. 국제평론가상을 수상하며 시대를 뛰어 넘는 영화의 생명력을 과시했다. 철학교수 예술가 정치범 등 ‘사회주의의 적’들이 노동을 통해 정신개조를 받는 50년대 초 체코의 고철 공장. 밥그릇과 십자가를 녹여 군수품을 만드는 이 금속성의 시공간 속에, 멘젤은 인간의 온도를 담아 낸다. “사라지고 있는 것은 ‘추상’이 아니라 진짜 사람”이라는 철학교수의 대사에 멘젤의 목소리가 포개진다.



거지의 오페라
비교적 최근작으로 바츨라프 하벨 전 체코 대통령이 쓴 희곡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벨벳 혁명을 경험한 뒤 만든 작품인 만큼, 정신적 가치보다 물질적 풍요에 집착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비꼬는 풍자를 담았다. 슬랩스틱 코미디를 연상케 하는 리드미컬한 전개와 익살스러운 인물 설정이 사회의 부조리를 비트는 해학과 절묘하게 어울린다.



이리 멘젤 감독
멘젤은 전주에서 가진 관객과의 대화에서 “영화를 지루하지 않게 하려고 코미디를 할 뿐”이라고 했지만, 그의 영화가 코미디의 형식을 띠고 있다는 사실은 무척 역설적이다. 나치 점령에서 2차 세계대전, 프라하의 봄, 소련 침공, 벨벳혁명까지. 그가 겪어 낸 조국의 현대사는 웃음과는 거리가 멀다. 권터 그라스 등 많은 예술가들이 체코를 떠날 때도 그는 사실상 예술적 ‘연금’ 상황을 감내하며 조국을 지켰다. “누군가는 있어야 하지 않냐”는, 누가 물으면 애써 시니컬하게 대답하는 단답형 이유와 함께.

결코 만만치 않은 세월의 굴곡을 멘젤은 오히려 웃음과 풍자로 보듬는 지혜를 가졌다. 그의 영화에는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해학이 번득이다가 이내 인간에 대한 유머러스한 따스함이 번진다. 아무리 아픈 기억이라도, 사랑스러운 추억과 함께 녹아 있다. 그래서 그의 영화를 보면 이질적인 아이템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거대한 콜라주 작품이 연상된다. 인간이란 원래 그렇게 희극과 비극이 뒤섞인 존재가 아닐까.(전주=유상호기자)

07. 05. 02.

P.S. 장편 데뷔작인 <가까이서 본 기차>의 원작은 체코의 국민작가 보후밀 흐라발의 <엄밀히 감시받는 열차>(버티고, 2006)이다. 작년 가을에 새롭게 나온 이 책에 대해선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소개한 바 있다(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CID=2329086&paperId=955833). 그때 영화 스틸사진도 옮겨놓았었는데 감독이 '멘젤'이란 건 알지 못했다. 여건을 만들어서라도 이 달의 영화로 문득 빠져들고 싶은데, 세상 일이란 게 만만하지가 않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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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해부] 서울대 철학과 97학번 31명 인생 궤적 따라가 보니… [조인스]
대한민국 ‘인문학 위기’ 檢證 보고서

■ 8명 국내외에서 학문 계속…사시 합격 2명, CPA 1명, 취업 9명
■ 철학이 직장에서도 먹힌다…인문적 문답수업 직장생활에 큰 힘
■ 영국 케임브리지 고전철학 전공자 10명 중 9명 취업 주목
■ 전문성 잃고 교양 수준의 인문학으로 변화…위기 돌파구일 수도
■ 위기 진단 자체가 비인문적 발상…인문영역 예술로 확대 중


월간중앙1997년도 학번은 대한민국을 벼랑으로 내몰았던 IMF 외환위기세대다. 그들 중 가뜩이나 어렵다던 인문학 전공자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서울대 철학과 97학번의 인생 궤적을 추적한다. 그들의 내성은 얼마나 강하며, 인문학은 얼마나 위기인가?
고래를 잡으러 간 영철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남은 병태는 입영열차를 탔다. 영자와의 뜨거운 입맞춤만 남긴 채-.

요절한 천재 영화감독 하길종의 대표작이자 히트작인 <바보들의 행진>. 1970년대 중반의 시대상을 잘 반영한 이 작품 속 두 주인공 병태와 영철은 철학도였다. 군부독재라는 냉엄한 현실 아래서 철학을 하기에 고뇌해야 했고, 돈이 안 되는 학문이기에 이성으로부터 버림받아야 했던 인간군상들. 딱 32년 전 이야기다.

그리고 만 10년 전. 꿈을 안고 출발한 대학생활도 타성에 젖어갈 무렵, 그들이 딛고 선 이 땅은 사상 초유의 사태를 맞아 비틀거렸다. 외환보유고가 바닥나는 바람에 국가 파산 위기에 처했던 것.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저금통을 털고 장롱 속 금붙이를 들고 나와 위기를 넘기는 일이 벌어졌다.

대학 졸업반 선배들은 취업의 길을 열지 못해 주저앉았다. 그에 놀란 2~3학년 선배들은 군대로 도피하거나 휴학의 길을 택해 시간 벌기에 들어갔다. 아직 물정도 잘 모르면서 그냥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바라보기만 했던 그들. 바로 97학번이었다.

이후 대한민국은 고비를 넘기고 급격한 산업화를 거쳐 지식정보사회로의 빠른 페달을 밟고 있다. 군사정권도 끝난 지 오래다. 이제는 풍성한 민주화의 열매를 따 먹는 시절이 됐다. 하지만 여전히 이 사회에서 인문학은 냉대받는 학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심지어 한 인문학도는 “암울했던 군사독재시절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 빠져 있다”고 외마디 비명을 내지른다.

“돈이 되는 것과 돈이 되지 않는 것.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가 대한민국 사회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그 인문학도는 학문 역시 그러한 차원에서만 존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개탄했다.

이 학생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사회 분위기를 해석하는 많은 학자의 주장도 다르지 않다. 몇몇 학자들은 그 시발점을 1997년 말부터 갑작스럽게 닥친 ‘외환위기’로 보고 있다. 소위 ‘IMF 시절’을 겪으며 사람들은 참 많이 변했다. 수많은 사람이 직장에서 쫓겨나고, 노숙자와 청년실업자가 거리에 넘쳐나는 혹한의 시기를 보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IMF 위기가 초래한 사회 변혁의 틈바구니

그로부터 10년이 지났지만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은 듯하다. 아니 오히려 더 거세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무역기구(WTO)와 자유무역협정(FTA)이 상징하는 신자유주의의 조류 앞에 사람들은 한층 더 돈을 중심으로 한 이분법적 사고에 세뇌당하고 있다.

이런 시대에 인문학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지난해 9월 전국 인문대 학장들이 모여 시국선언을 했다. 유사 이래 최초라는 ‘인문학 위기’ 시국선언. 이후 폭발할 것만 같던 이 이슈는 약 반년이 흐른 지금 벌써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먹고사는 일에 바쁜 일반인들의 관심을 끌 수 없었던 이슈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 인문학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철학 전공자들의 삶은 어떨까? 10년 전 진리에 목말라 철학이라는 학문을 선택했던 이 시대의 영철과 병태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서울대는 한국사회에서 아주 특별한 공간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서울대망국병’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사실 대한민국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이 몰리는 곳이다. 일종의 브레인 집단이기에 서울대가 차지하는 위상은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인문학에서 서울대 인문대는 국내 어느 대학보다 규모가 크고 연구 성과도 높은 것으로 정평나 있다. 이는 상아탑발 인문학의 위기를 논할 때 서울대 인문대를 떼어놓고 이야기하기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

▶한 학생이 철학과가 있는 인문관 6동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런 연유로 서울대 인문대의 한 학과 중 한 학번 학생들을 표본으로 삼아 이들의 진로가 어떻게 됐는지 조사해 보기로 했다. 최종적으로 선정한 집단은 서울대 인문대학 철학과 97학번.

우선 철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철학이 모든 인문사회과학의 출발점이자 가장 기초가 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97학번일까?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사회는 1997년 말부터 시작한 외환위기 사태를 계기로 급속하게 사고의 전환이 이뤄졌다. 사회가 그러한데, 대학과 그 구성원들도 변화가 없을 리 만무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철학을 전공하기 위해 입학한 97학번 동기생들은 학교에 다니며 가장 다이내믹한 인문학의 위기상황을 목격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선배들과 달리 ‘서울대’라는 간판만으로 취업하던 시절도 끝나고, 또 ‘철학도’라는 꼬리표가 더 이상의 자랑이 될 수 없는 마지막 세대가 이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이 사회로 진출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해 보면 이들 97학번 집단이야말로 사회 변혁기에 가장 큰 혼돈 속에서 진학과 취업을 저울질해야만 했던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서울대 인문대학 철학과 97학번으로 입학한 학생은 모두 31명(97학번 편입생 1명 포함). 이들 31명은 정말 다양한 길을 걷고 있었다. 아직 졸업하지 못한 재학생도 3명이나 됐다. 이들 재학생을 제외한 28명 중 3명은 끝까지 행적을 알 수 없었다. 결국 졸업 후 진로가 확연히 드러난 사람은 총 25명.

이들 25명의 졸업 이후 진로 스펙트럼은 각양각색이지만, 크게 범고시파·취업파·진학파로 나눌 수 있었다. 물론 이들 그룹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러 갈래로 다시 나뉠 수 있다.

우선 범고시파의 경우 사법시험 합격자가 2명, 공인회계사시험 합격자가 1명이었다. 사법시험 합격자 중 한 명은 이미 수원지방법원에서 판사로 재직하고 있고, 나머지 한 명은 현재 모 지방법원에서 연수 중이다.

공인회계사시험 합격자는 현재 공군 장교로 복무하고 있다. 그는 6월에 전역하면 국내 4대 회계법인(삼일·삼정·안진·한영) 중 한 곳에 바로 입사할 예정이라고 했다.

삼수생 이상 입학자 중 학구파 많다

특이한 점은 아직 취업하지 못한 미취업자 그룹 역시 범고시파라는 것이다. 확인된 미취업자 3명은 전원이 사법시험을 준비 중이었다.

취업파는 졸업생의 거의 3분의 1 수준인 9명이다. 인문계 학생들이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취업하는 대기업과 금융권 취업자가 각각 3명씩 6명이었다. 대기업 진출자 중에는 사무직이 아닌 정보기술(IT) 개발 쪽으로 취업한 경우도 한 명 있었다. 금융권은 은행 2명, 보험회사 1명이었다. 이외의 취업자들은 공기업·출판사·IT벤처기업에 각 1명씩 진출했다.

의외의 분야는 진학파였다. 진학파는 모두 10명으로 우선 수적으로 타 그룹을 압도했다. 철학 또는 철학과 연계된 전공으로 진학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들 중에는 벌써 박사과정에 진입했거나 해외 유명 대학 대학원에서 유학 중인 경우도 있었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8명의 철학 관련 진학자 중 4명은 본과 대학원, 1명은 협동과정인 고전학 분야로 진학했고, 나머지 3명은 유학을 떠난 상태였다. 유학 중인 사람은 각각 미국의 카네기멜론대·브라운대, 영국의 옥스퍼드대에 재학 중인 것으로 드러났다.

진학파 중 나머지 2명은 전공을 바꿔 진학했다. 한 명은 같은 대학 경제학과 대학원으로, 다른 한 명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예술전문사과정에 진학했다.

이들 진학파를 분석하면서 재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철학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삼수생 이상의 장수파였다. 같은 대학원 철학과로 진학한 4명은 전원이 삼수생이었다. 유학자 중 2명은 아예 고령 입학생으로 70년대 초반 출생자였다.

나머지 한 명의 유학생도 서울대 천문학과를 졸업한 후 철학과 97학번으로 편입한 학생으로 나이가 많은 축이었다. 한 동기생은 이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나이가 좀 들어 입학하는 사람은 스스로 진지한 고민 끝에 결정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물론 그 이유만은 아니겠으나, 나이가 든 이후 입학한 학생들의 진학률이 높은 것은 사실이었다.

97학번은 또 하나의 특징이 있었다. 확인된 것으로만 봐도 지방학생 비율이 과반을 넘었다. 무려 18명(확인자만) 이상이 수도권이 아닌 지방 출신이었다. 요즘 서울대에 서울 강남권 학생이 집중되는 현상과 비교하면 사뭇 다른 느낌이다.

이에 대해 한 97학번 졸업생은 “지방 출신 학생이 줄어들면서 대학원 진학이나 철학 자체에 대한 관심도 현저히 줄어드는 것 같다”고 잘라 말했다. 여학생은 4명뿐이었다. 하지만 97학번을 기점으로 여학생이 점점 늘어나 요즘에는 거의 정원의 반 정도에 이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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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계속하는 사람 점점 줄어…

이렇게 다양한 분야로 진출한 서울대 철학과 97학번들은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이들 중 대면 인터뷰에 응한 사람은 총 6명. 대체로 이들은 ‘인문학의 위기’를 단순한 취업문제가 아닌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교양 수준 부재와 시스템상의 한계로 인식하고 있었다.

먼저 올해부터 서울대 철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유태권(30) 씨.

“요즘 고등학생들을 보면 전교 순위로 이과 1~20등은 의대, 문과 1~20등은 법대, 이런 식 아닙니까?”

유씨는 97학번 동기 중 가장 빨리 진학한 경우다. 유씨의 설명에 따르면 철학과에 입학하는 신입생 역시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제가 입학할 때는 그래도 공부 잘하는 학생들 중에서 지적 호기심이나 관심이 있어 철학과를 지원하는 사람이 여럿 있었어요.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더군요.”

유씨는 “기본적으로 취업이 안 돼서 인문학이 위기라는 말에는 동의하기 어렵다”고 전제한 뒤 “돈이 안 되면 쓸모없는 것(학문)으로 치부하는 사회현실이 위기라면 위기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우려 섞인 목소리로 이어지는 그의 말.

“서울대의 경우 인문2계열(역사·철학계열, 인문1계열은 어문계열)에서 국사학과의 인기가 압도적인데, 그 이유 중 하나가 그나마 취직공부를 하기 편하기 때문인 것 같더군요.”

취업에 불리한 인문대에서 학문 자체에 대한 호기심과 접근보다 그나마 취업에 유리한 쪽으로 선택하는 것이 국사학이라는 말이었다.

인문학 전공자의 강점 사회에서 인정 안 해

유씨의 주장처럼 실제로 인문2계열 전공 진입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학과는 국사학과였다. 2007학년도 전기 학과별 전공 진입 지원자 50명 중 절반인 25명이 국사학과를 지원한 것. 상대적으로 철학과·미학과·종교학과 등은 지원자가 적을 수밖에 없다.

특히 종교학과의 경우에는 지원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결국 입학 전에 전공이 확정된 10명 안팎의 ‘전공예약제’ 학생 덕분에 폐과 위기를 간신히 넘기는 수준이었다.
유태권 씨는 또 다른 ‘인문학의 위기’로 볼 수 있는 현상 하나를 지적했다.

“언론에서도 그렇고 이공계가 위기라고 하지만… 그래도 인문대에 비하면 혜택을 많이 받는 편이죠.”

그가 든 사례는 서울대 홈페이지에 떠 있는 ‘2007 이공계 국가장학생사업’(과학기술부·한국과학재단 주관)이라는 정부의 지원정책이었다.

이 사업은 이공계열 학과(부)에 입학한 우수 신입생을 대상으로 총 2,400명을 선발해 학비 전액을 지원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게다가 다음 학기에 성적이 좋으면(전체평점 A 이상) 50만 원의 교재비까지 지급한다는 세부사항도 붙어 있었다.

유씨는 “이런 정부의 지원정책은 바람직한 방향”이라면서도 “왜 인문학에는 이런 지원이 없느냐”고 반문했다.

유씨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최동호(31·철학과 석사과정 수료) 씨는 인문학 전반보다 철학에 대한 부분을 주로 언급했다.

“철학은 인문학 중에서도 특별한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제시하는 가장 기초가 되는 학문이 철학입니다. 이런 철학이 위기를 맞으면 문제가 심각해지겠죠.”


최씨는 세계적으로 볼 때 한국의 상황은 ‘상대적 위기’로 해석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 ‘상대적 위기’란 어떤 의미인지?
“미국을 예로 들자. 미국에서도 의학·법학과 같은 실용학문의 인기가 높다. 그렇다면 미국에서도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나와야 한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봤을 때 한국보다 철학에 대한 관심, 나아가 인문학적 교양에 대한 관심의 수준이 높은 편이다.”

― 구체적으로 언급할 수 있는 부분이 있나?
“논문만 봐도 그렇다. 양적으로는 물론 질적인 측면에서도 한국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철학이란 학문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지금처럼 진학하는 학생이 줄어들고 해서 실력 없는 사람들이 경쟁하면 질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최씨는 “결국 인문학 자체가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 모두 교양 수준에 그칠 것”이라면서 “취업활동에 바쁜 사람이 칸트니 헤겔이니 하는 것을 들을 수준이 되겠느냐”며 개탄했다.

대면 인터뷰에 응한 나머지 4명은 모두 철학이 아닌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연기자 지망생에서부터 현직 판사까지 철학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방향으로 진로를 선택한 이들을 만나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물어봤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서 예술전문사과정을 밟고 있는 허정도(28) 씨를 만난 것은 지난 4월8일. 허씨는 인터뷰 도중 한 동기생의 진로를 지목하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사회에서 조금만 먹고살 수 있을 정도로 해줬으면 잘했을 친구인데 참 아쉽다.”

허씨가 언급한 A(29)씨는 재학시절 적극적으로 빈민 청소년을 위한 공부방 활동 등을 하다 졸업 후 공익단체에서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경제적 어려움을 견디지 못해 일반 기업에 재취업해 현재는 온라인게임을 개발하는 한 IT벤처기업의 총무팀 직원이 됐다.

허씨는 “졸업하고 진짜 하고 싶었던 분야로 진출했는데 어쩔 수 없이 다른 길로 가야 했던 경우”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인문학 위기 진단, 교수마다 달라

사회 시스템의 한계로 대학에서 고민하고 실천했던 부분을 사회활동으로 연결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는 것 자체가 ‘인문학의 위기’의 한 단면 아니냐는 것이 허씨의 논리였다.

취업이나 고시에 합격한 사람들은 ‘인문학의 위기’ 자체에 대한 생각보다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들의 능력이 뛰어남에도 사회에서 잘 몰라주는 것을 걱정하는 눈치였다.

SK C&C에 근무하는 이현수(30) 씨는 “철학을 공부한 것이 사회에 나와보니 큰 힘이 된다”면서 “수업방식 자체가 10명 내외의 학생과 교수가 끊임없이 묻고 대답하는 식이어서, 내게는 일상적인 것이 직장과 조직사회에서는 강점으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기술적인 부분은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지만, 기초가 되는 부분(인문학적 교양과 의사소통 능력)은 그렇지 않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런 생각은 공인회계사시험에 합격한 뒤 공군 장교로 복무 중인 이용권(28) 씨에게서도 들을 수 있었다.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은 흡수력이 빠르다. 재료만 갖다주고 조금만 기술을 익히면 무엇이든 잘 해내는 사람들이다. 기본적으로 모든 사회현상을 이해하는 수준이 높지 않나?”

이씨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미래상도 이와 결부시켜 답했다.

“조직에서 직급이 높아지고 책임이 늘어나면 관리능력 측면에서도 철학을 공부한 것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수원지방법원 판사로 재직 중인 고상교(30) 씨도 “굳이 인문학을 전공하지 않아도 인문학적 교양이 풍부한 사람이 존경받는다”는 말로 이현수 씨와 같은 견해를 밝혔다.

하지만 이들 철학과 97학번 역시 취업의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은 듯했다. 졸업을 앞두고 철학과 동기 2명(2명 모두 현재 은행에 취업)과 함께 면접 스터디를 한 이현수 씨는 “나는 학부시절부터 IT벤처기업에서 일한 경력이 있어 그나마 나았지만, 다른 철학과 동기나 후배들은 그런 정보에 취약했다”고 한다.

이현수 씨는 현재 서울대 멘토링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학기 단위로 2~3명의 후배에게 사회 선배이자 대학 선배로서 사회생활을 위한 여러 가지를 조언해주는 것이라고 한다.

이씨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이유는 자신이 취업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후배들만큼은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라고 한다.

이씨는 “특히 인문대 후배들을 더 챙기게 마련”이라면서 “취업 정보에 가장 취약한 학생들이 인문대생이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실제로 요즘 서울대 인문대생 사이의 최대 화두는 취업이었다. 서울대 경력개발센터에 문의한 결과도 취업과 관련해서는 역시 인문대가 가장 취약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력개발센터의 유현실 전문위원은 “서울대 역시 인문대 학생들은 취업에 힘든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대기업들이 교내 리크루팅을 와도 일차적으로 선호하는 전공은 상경계열과 이공계열 학생이라는 것.

최근 인문대 학생들 사이에 상경계열이나 법학과 등으로 ‘전과 열풍’이 부는 이유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또 부전공이나 복수전공으로 상경계열을 택하는 학생이 많은 것도 취업문제 때문이라고 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직접 학생을 가르치는 인문학 교수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난해 9월 고려대에서 ‘인문학의 위기’ 시국선언을 주도했던 조광(62·한국사학과) 전 문과대학장은 “전반적으로 사회에서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미약해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정리했다. 다음은 조 전 학장과의 인터뷰.

― ‘인문학 위기’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인문학의 위기란 인문학 정신의 위기를 의미한다. 국가 연구비 지원이 적고, 대학원생 수가 줄어드는 것은 말단의 문제다. 인문학 정신이 부재해 우리 사회가 황폐화하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본다.”

― 학생들은 전공 교수들이 취업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하소연하는데.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취업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이 아니다. 취업문제에 교수가 관심을 가질 수는 있겠지만 일반 응용학문(사회과학 등)이 아닌 이상 한계가 있다.”

인문학 위기 진단 잣대가 비인문학적이다

― 일부 폐과 위기에 있는 학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대표적인 것이 독문학과와 불문학과인데… 물론 이 두 언어가 국제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의 인문정신은 우리 사회를 풍요하게 하는 데 상당부분 기여한다. 그런데 이 분야 전공자가 너무 줄었다. 국가 100년대계에 상당히 불행한 일이다.”

― ‘인문학은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일반의 인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시장원리가 적용되는 부분이 있고 그렇지 않은 분야가 있다. 교육부가 곧잘 그러는데, 그 자체가 비인문학적 발상이다.”

조 전 학장은 “가령 모든 대학에 독문과가 있을 필요는 없다”면서 “몇 개 대학, 꼭 SKY(서울대·연세대·고려대)가 아니더라도 집중할 필요는 있다”는 생각도 피력했다.

서울대 철학과 97학번을 직접 지도했던 박찬국(47·철학과 학과장) 교수는 조 전 학장과는 다른 분석을 내놨다. 박 교수는 “전통적인 인문학의 범주인 문학·역사·철학의 범주 설정이 시대에 맞지 않는 측면이 있다”고 운을 떼었다.

“크게 봐서는 음악·영화 등과 같은 예술도 인문학의 범주에 들어가야 한다. 좀 더 넓은 시각으로 보면 새로운 인문학의 영역이 많이 생기고 있다고 봐야 한다. 인문대 진입 학생 수가 줄고 졸업자들의 취직 자리가 준다고 해서 위기라고 말하는 측면이 있는데, 이는 인문학의 위기라기보다 기초과학 전반의 위기로 봐야 옳다. 예전에는 수학·물리학 등의 분야에 대한민국 수재들이 가지 않았나?”

박 교수는 서울대 내에서도 인문학은 여전히 인기 있는 분야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가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한 해 서울대에서 철학 관련 교양과목을 수강한 학생은 연인원으로 무려 4,000여 명. 이는 1만9,000여 명 서울대 재학생의 거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수치다. 이를 인문대 전체로 확대하면 인문학 교양강의 연 수강인원은 3만여 명이나 됐다.

하지만 박 교수는 이런 인문학 교양과목의 인기를 이야기하면서도 “직장문제가 불안하니까, 서울대 나와도 예전처럼 바로 직장을 잡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니까 취업에 유리한 전공에 학생들이 몰리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인문대학장인 이태진(64·국사학과) 교수는 현재와 같은 상황을 ‘위기’가 아닌 ‘비상’이 걸린 상황이라고 표현했다. 다음은 이 학장과의 일문일답.

― 어떤 부분에서 ‘비상’이라고 봐야 하나?
“내가 공감하는 부분은 연구보다 교육의 위기 쪽이다. 인문대 학생들이 법대나 경제학 강의를 많이 듣기 위해 전공 강의는 최소화해 듣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정상적인 교육이 이뤄지겠나? 하지만 인문학이 할 일이 많아지는 시대다. 표현수단과 도구가 많이 바뀌고 인간의 삶도 바뀌고 있다. 이런 것을 연구하는 것이 인문학 아닌가? 그래서 ‘위기’가 아닌 ‘비상이 걸렸다’고 표현하고 싶다.”

― 그렇다면 교육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기업들이 실용학문 전공자를 선호하는데, 이런 것을 뛰어넘어 인문학 전공자의 장점을 인정해 차별하지 않는다면 쉽게 해결될 부분이라고 본다.”

― 대학에서 노력할 부분도 있을 텐데….
“원래 인문학자(교수)들은 학문 성격상 보수적인 편이다. 그렇다 보니 교육 프로그램도 단조롭다. 하지만 학부생들 모두가 다 진학해서 공부할 사람은 아니다. 학생 입장에서는 취직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기본적으로 학문 후손세대 양성에만 초점을 맞추는 전통적 교육 방식에 변화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지역문화전공과 같은 과정을 만들어 학생 스스로 자신을 확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마 서울대에서 이런 시스템을 채택할 날도 멀지 않았다고 본다.”

인문적 창조력 존중해야 다음 먹을거리 나온다

이 학장은 그러면서도 “기존의 대학원 진학자에게는 확실한 장학제도를 보장해 공부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인문학은 과연 돈이 안 되는 비실용적 학문일까? 인터뷰에 응했던 한 서울대 철학과 97학번 졸업생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영국의 케임브리지대에서 고전철학을 전공하는 학생이 한 학년에 10명인데, 그 중 한 명만 진학하고 나머지는 모두 취업한다. 그 이유는 기본적으로 취직이 너무 잘되기 때문이다. 회사 교육은 단기간의 연수를 통해 금방 가르칠 수 있지만, 기본적인 바탕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고 기업이 판단한 결과다. 한국도 현실에서 검증이 안 돼서 그런 것이지, 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의 동기생 중에는 기업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그 중 한 명인 이현수 씨는 “창조적인 일을 하기 위해서는 단순지식이 아닌 폭넓은 사고가 중요한데, 이런 것을 배울 수 있는 학문이 인문학”이라고 강조했다.

수많은 사람이 한국사회의 다음 먹을거리를 걱정한다. 하지만 그 먹을거리가 인문학에서 나올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한다. 미국·영국 등 선진국에서 검증된 인문학도들의 창조적 성과를 인정하지 않는 한 한국의 발전은 더 이상 없을지도 모른다. ‘위기’는 또 다른 말로 ‘기회’다. 이런 ‘기회’를 살리기 위해서는 인문학도들이 공부할 수 있고 취업할 수 있는 길을 사회가 마련해 줘야 하지 않을까.

인터뷰 | ‘연구공간 수유+너머’ 고병권 대표
“대중의 인문학 목마름은 오히려 높아져…상아탑 인문학의 위기일 뿐”

재야 인문학자들의 공동체인 ‘연구공간 수유+너머’. 남산 자락에 위치한 이곳을 찾은 것은 지난 4월4일. 연구공간 내 카페에서 고병권 대표를 만나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다.

―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인문학의 위기는 굳이 말하자면 제도권(대학·대학원) 인문학의 위기다. 물론 한국사회에서는 큰 부분일 수 있다. 문제는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대학이 지식의 생산과 소비를 독점해 왔다는 점이다. 인문학의 생산과 소비를 대학이 모두 독점하고 있으니 제도권 인문학이 위기에 빠지면서 사회 전체로 확산하는 것이다.”

― 제도권 인문학이 위기에 빠진 원인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달라.
“문제는 최근 대학의 변화에서 찾아야 한다. 요즘 대학에서는 이른바 ‘아카데미 캐피털리즘(Academy Capitalism)’과 ‘기업가 정신’이 첨예한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법인화 움직임이다. 대학이 점점 기업화돼 가고 있다. 또 한국사회가 지식기반사회로 진입하면서 사회는 지식상품의 생산을 강조한다. 그러다 보니 어떤 지식이 이런 부분에서 뒤떨어지는지 찾게 마련이다. 상품 생산에 경쟁력이 없는 학문, 인문학이 바로 거기에 딱 들어맞는다.”

― 지난해 9월 전국 인문대학장들의 ‘인문학 위기’ 시국선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인문대 교수들이 거국적으로 시국선언을 한 경우는 유사 이래 최초라는데… 내가 기억하기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 한국사회의 뜨거운 이슈에 대해 인문학자들이 발언하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러면서 돈 안 들어오고, 제자 안 들어오니 그런 선언을 한다는 것이 난센스라는 말이다.”

― 대학 이외 공간에서의 인문학은 어떻게 보나?
“전반적으로 인문학을 사유하는 방식이 얕아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도 대학이 인문학을 독점하려다 대학이 망한 데서 기인하는 문제다. 사실 일반인들은 사회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재교육 프로그램을 목말라하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이런 인문학의 생산과 소비를 독점했던 대학의 문턱은 너무 높다. 그 문턱 역시 상아탑 스스로 쌓은 것이다.”

― 고 대표가 생각하는 대안은 무엇인가?
“그동안 지역 도서관이나 재야 학술단체처럼 대중이 인문학과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인문학에서도 다른 방식의 새로운 긍정적 가능성이 커졌다. 가령 ‘독서클럽’의 증가가 그런 경우다. 누구든 쉽게 만들 수 있는 것이 그런 것 아닌가. 이런 프로그램을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곳이 지역 도서관 같은 공간이다. 인문학 운동은 충분히 가능하다.”


김상진_월간중앙 기자 (kine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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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5-02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 저랑 학번대도, 전공도 같군요. 재밌습니다. 이거 가져갈게요.

바라 2007-05-02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걱... 그래도 그때는 정원이 30명이었는데 지금은..;; 학부제되고 폐과 위기처한 데도 많을 것 같군요 모르긴 해도...

기인 2007-05-03 0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교육 수요자 입장에서 학부제는 전공 탐색기간이라는 점에서는 유용한데, 이 전공 탐색이라는 것이 무색하게, 사회에서의 '인기'학과가 곧바로 수요자들의 '인기'학과로 직결되니...

승주나무 2007-05-03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 님도 97학번이세요 ㅋㅋ 저도 97학번 철학과^^ 잘 읽었습니다

바라 2007-05-03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육 '수요자'라는 표현이 교육을 상품의 일종으로 간주하고 학생을 교육 시장 내의 소비자로 전락시키는데 기여한다는 생각도 드네요. 어차피 졸업장을 따기 위한 지불로써의 대학교육이라면 나중에 돈 많이 벌고 안정적인 과로 가는게 가장 '최대 효용'을 가져오는 것일테고, 그런 면에서 인문대 내에서 조차 사회에서의 인기학과가 반영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어요. 문제는 교육을 어떻게 시장화와는 다른 것, 사적으로 소유되는 상품이 아닌 공공성을 갖춘 것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일텐데, 지식에 대한 보편적인 권리를 매개한다는 측면에서 말이죠..

기인 2007-05-03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라님/ 넵. 교육은 현재 일종의 서비스입니다. 이 서비스는 계층 재생산에 큰 일조를 하고요. 저는 앎에 대한 보편적 권리를 위한 모임을 학교 '밖'에서 함께 하고 있는데, 물론 학내도 이를 가능하게끔 하는 투쟁이 필요합니다. 이 앎에 대한 보편적 권리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학교 밖, 즉 시장의 수요에 따르지 않는 선택이 가능하게 하는 문제와 직결됨으로, 교육에 관한 투쟁만으로는 획득되기 힘들고 학내 구성원들의 동의도 얻기 힘들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어떻게 의제를 설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바라님의 의견이 궁금하네요 ^^

마늘빵 2007-05-03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승주나무님 저 97 아니어요. 98이어요. -_- '같'은게 아니고 '비슷'

마늘빵 2007-05-03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궁금한건, '서울대' 철학과 97학번들이 아니라, '00대' 철학과 97학번들이에요. '서울대'라는게 붙으면서 변질되는 부분이 많죠. :) 다른 대학 철학과 97학번들은 뭘하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판사, 변호사, 대기업 사원 말고 다른 무엇이 되어있을지.

기인 2007-05-03 2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이 기사 나름대로 왜 '서울대'인지 밝히는 것 같은데, 그 전제가 말이 안되는 것 같아요. 인문대 중, 서울대 인문대가 중요하니까 그걸 조사해본다는 건데.. 쩝.. 결국 인문학도 '엘리트'만 하는 것인데, 이 '엘리트'들도 안 하고 있다는 것이 핵심인지...

바라 2007-05-04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기인님 그런 어려운 질문을...;; 저도 고민은 되는데 딱히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는 부분은 하나도 없는 것 같네요... 기본적으로 요새같이 등록금이 오르는 때에는 특히나 교육의 상품으로서의 측면이 부각되는 것 같은데, 등록금 동결, 더 나아가 등록금 인하 투쟁이 교투에서 주된 이슈가 될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그런 운동이 대학을 학비없이 다닐 수 있도록 만드는 방향으로 갈 수 있지않을까 싶네요.(그럼으로써 재산의 유무와 무관하게 누구도 교육에의 권리에서 배제되지 않을 수 있도록)물론 그러면서도 교육의 방향이나 내용에 있어 국가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대안적인 학교가 가능하다면요.

학내 교투의 경우 최근에는 장애인이나 여성처럼 이제까지 일반적인 교육 수요자로 간주되지 않았던 이들의 수업권을 위한 운동들도 생기고 있다고 들었어요. 여학우를 위한 체육 수업이라든지... 그런 것도 교육권이라는 측면에서 운동의 의제들을 다양하게 만드는 좋은 시도가 아닌가 싶어요. 심지어 성적 상대평가의 강화같은 학사관리 엄정화-_-에 대한 반대도 넓게 보면 수업권을 위한 운동에 포함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그래도 말씀하신 것처럼 현재 교육 체제가 계급재생산의 기제로 기능하기 때문에, 학내의 수업권 확보나 교육상품화, 국립대 법인화 반대의 수준을 넘어서서 현행 입시제도 및 전반적인 중, 고교 교육방침에 대한 반대 문제도 고려해봐야 될 것 같군요. 장기적으로는 교육 내용 전반의 진보적인 전화도요. 별 내용없이 길어졌는데 기인님이 알고 계시거나 예상하는 바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은 실속없는 얘기를 늘어놓은 것 같군요;; 기인님도 새움 같은데서 세미나 간사를 하신다고 하니 평소의 실천 속에서 많은 걸 느끼실 것 같네요. 언젠가 기회가 되면 그런 이야기들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기인 2007-05-04 0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큰 지향 속에서, 구체적인 투쟁이 필요하겠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