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설의 정의
사소설은 대상 지시적, 주제적, 형식적 특성 등과 같은 그 어떤 객관적인 특성에 의해 정의될 수 있는 장르가 아니다. 그 대신 독자가 해당 텍스트의 작중 인물과 화자 그리고 작자의 동일성을 기대하고 믿는 것이 궁극적으로 그 텍스트를 사소설로 만든다. 사소설은 일종의 읽기모드로 정의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그것은 사소설이 단일한 목소리로 작가의 '자기'를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거기에 씌어진 말은 '투명'하다고 상정하는 읽기 모드이다(지금 열거한 특성들은 이제까지 사소설의 '내재적인' 특징으로 간주되어온 것이다). 사소설은 특정한 문학 형식이나 장르라기보다는, 대다수의 문학 작품을 판정하고 기술했던 일종의 문학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패러다임이다. 즉 어떤 텍스트라도 이 모드로 읽힌다면 사소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Tomi Suzuki(한일문학연구회 옮김), Narrating the Self: Fictions of Japanese Modernity(이야기된 자기 -일본 근대성의 형성과 사소설담론), 생각의 나무, 2004, 31면. (이하 면수로만 표기)
 
사소설의 주제와 '자기'의 문제
가사이 젠조와 그 후속 작가들의 소설에는 주제상의 일정한 유사점이 있다. 즉 아내나 다른 여성들 사이에서의 갈등이나 빈곤, 질병, 고독, 창조력 결여의 의식으로 괴로워하면서, 글을 쓰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는 소설가나 예술가의 한심한 나날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이 자각적인 사소설 작가에 대한 전기적 정보를 접하면, 분명히 그들은 모두 '예술'과 '실생활'의 악순환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소설 작가가 일상생활을 충실하게 묘사했다고들 말하지만, 오히려 그 사소설 쪽이 종종 그들 자신의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자화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와 필요에 그들의 행동 자체가 규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사소설 비평 담론의 주요 관심사들 중 하나인 예술과 실생활의 상관 관계가 자각적인 사소설 작가들의 주요 주제가 되어 있었다.

(....)

다이쇼 후기까지 독립된 사회적 윤리적 주체인 개인의 '자기'라는 이념은 광범위하게 인생, 문학, 예술의 기본적인 전제로 간주되었다. 한편, 당시의 많은 지식인은 급격하게 확대된느 산업화 대중 사회에서 계급 대립, 계급 투쟁에 대한 의식을 심화시키고 마르크시즘에 이끌려 들어갔다. 그러나 인도주의적 개인주의의 소박함에 의문을 제기하며, 1920년대 중반 이후 큰 여향력을 떨쳤던 마르크시즘에 그들이 이끌려 들어간 것도, 후쿠모토 가즈오가 '반성'적 개인 주체의 '능동적' 역할을 강조하는 데서 볼 수 있듯, '진정한' '자기'에 대한 깊은 관심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32~33면.)
 
문학과 근대화 -최승만론 참조
새로운 '소설' 개념의 대두는 1880년대와 1890년대 자유 민권 운동의 융성과 쇠퇴 및 정부 권력의 강화와 직접 관계되어 있다. 자유 민권 운동이 한참 진행 중일 때 국가의 도립과 개인의 독립이라는 근대 국민 국가의 상보적 인명르 자각한 야심적인 청년들은 민권가로서 '정치 소설' 집필에 착수한다. 츠보우치 쇼요의 사회적 지적 배경도 이와 비슷한 것이었지만, 작가이기 이전에 우선 정치 활동가였던 정치 소설 작가들과 달리 쇼요는 대학 출신의 엘리트로서 '직업' 소설가가 되려는 전례 없는 길을 선택했다. 이 전대미문의 선택이 젊은 세대에게 준 충격을 우치다 로안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소설에 게사쿠(희작)라는 낮은 지위로부터 한 발 내딛어 문명에 기여하는 중대 요소, 당당한 학자의 삼여으로서도 부끄럽지 않은 훌륭한 사업으로 뛰어올랐다. 지금까지 정치 이외에는 청운의 길이 없는 것처럼 생각했던 천하의 청년들은 이 새롱누 세계를 발견하고 갑자기 깨달은 것처럼 모두들 일제히 문학으로 뛰어갔다.

후타바테이 시메이, 기타무라 도코쿠, 야마지 아이잔, 마사오카 시키, 도쿠토미 로카, 기노시타 나오에, 우치다 로안 등을 비롯해 자유 민권 운동에 의해 정치에 눈을 뜨고, 그 융성과 쇠퇴를 목격한 다수의 청년 학도는 메이지 정부가 급속하게 '공정 내셔널리즘'을 강화한 1880년대 말 내지 1890년대 초부터 '문학', 그중에서도 새롭게 의의를 부여받은 '소설'로 향했다. (65면.)
 
기독교의 의미 -최승만론 참조
1880년대 말에 기독교로 개종했을 때부터, 도코쿠는 스스로를 거듭 '패군의 장수'라 불렀고, 국가와 국민을 구할 '영혼의 검'이나 '진리의 창'으로 싸우는 '위대한 전사'로 시인을 규정했다.
이렇나 메타포들은 도코쿠 세대의 많은 젊은 기독교도들에게는 비유인 동시에 문자 그대로의 의미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정신성'은 스스로의 정치적 야망, 애국적 희구, 그리고 '권력에 대한 의지'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1892년 부터 1893년에 걸쳐 도코쿠는 일본에서는 아직 달성되어 있지 않았다고 하는 '정치적 자유' '정치적 독립'과 구별되는 '정신의 자유'와 '정신의 독립'을 주창했다. 그는 메이지 유신을 "무사와 평민을 하나의 국민으로 취급함"으로써 개인적 정신의 자유를 일반인드에게 분배하려 했던 '혁명'으로 규정한다. 자유 민권 운동이 '개인적 정신'의 발현을 급격히 진전시켰다고 한 후, 사람은 정치적인 속박으로부터 독립된 ㅈ어신의 자유를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도코쿠는 논한다. 왜냐하면 '정신'이나 '내부의 생명'은 우연적인 물질적 조건으로부터는 독립해 존재하기 떄문이다. 즉 이 '내부의 생명'은 '타계의 ㅈ어신'에 조응하며, 신이라고 불리는 '우주의 정신'에 대응되기 떄문이다. 도코쿠는 정신의 자유, 정신의 독립을 정치의 영역으로부터 분리했지만, 그의 자세는 여전히 매우 정치적이며 '애국적'이었다. 그는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상대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보다 '보편적'인 가치 이념의 시스템을 제시함으로써, '세상을 위해 살고 백성을 보살필' 것을 희구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젊은이들에게 기독교는 서양의 문학 및 문화(그것을 아는 것이 메이지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되어진 것)에 그들이 강력히 경도된 사실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젊은 도코쿠가 직접 쓴 정신적 발달에 대한 글 자체가, 당시 신문에 게재되었던 디즈레일리의 소설 '콘테리니 플레밍'으로부터 촉발된 것이고, 도코쿠 자신이 곱개했듯이, 전투나 병사 등의 메타포 또한 언래 패트릭 헨리의 미국 '독립선언'과 같은 서양 텍스트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우에무라 마사히사나 우치무라 간조같은 메이지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일본의 청년들에게 성서뿐만 아니라 서양의 문학도 소개했다. 그리고 새로이 기독교도가 된 젊은이들을 매혹한 바이런, 셰릴, 워즈워드, 카알라일, 에머슨 등 서양 낭만주의의 주요 싱니이나 사상가의 대부분이 애국적인 정치 활동가였으며, 문학 활동과 정치 활동의 대립보다는 연속성을 보고 있었던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양학 교육을 받고 1880년대 말부터 1890년대 초두에 걸쳐 기독교로 개종한 젊은이들에게 기독교는 개인과 국가 쌍방의 자유와 독립이라는 계몽 사상의 자유주의적인 정치 이념 및 서양 낭만주의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었던 것이었다.
도코쿠, 호시노, 시마자키 등 젊은 기독교도들은 기독교적 인도주의의 교양 잡지인 <<여학잡지>>의 기고자들이었다. 그들은 1893년에 문예지 <<문학계>>를 창간했다(이것은 원래 <<여학잡지>>의 문학부문으로 출발했지만, 곧 딕립된 문학 잡지가 되었다). <<문학계>>에서 도코쿠는 그들의 사명이 넓은 의미에서 시인이라고 선언했으며, '시인과 철학자의 위대한 사업'은 볼 수 없는 '내부의 생명'을 '이야기하는 것'(에머슨이 말하는 'say')이며, 신에 의해 창조된 '근본의 생명'에 표현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도코쿠에 의하면, '문예'는 '사상'과 '미술'로 이루어지며, 그 독특한 사명은 "인성, 인정의 다양한 현시를 관하고" '우주의 정신'이나 '절대의 Idea', 즉 '상세계'의 '크고 크고 큰 실재(리얼리티'에 다다름으로써, '극치를 사실(리얼리티)에 입각해서 구체적인 형태로' 표현하고, 불가시의 '내부 생명'을 전하는 데 있다.
이 문학관은 '소설'에 대한 새로운 담론과 궤를 같이하지만, 도코쿠 및 <<문학계>>는 분ㅁ여히 새로운 한 가지 요소를 도입했다. 즉 문학이 파악하고 제시해야 할 '진리'가, 신으로부터 유래하는 보편적인 진리를 수여 받았다고 간주된 개인적 '자기'와 연결되었던 것이다. 도코쿠 이전의 지배적인 비평 담론에서 '진리'는 순수하게 형이상학적인 틀로 논의된 것이 아니었다. 즉 그것은 상상된 실재로서, 즉 그모델이 서양에서는 현존하지만 일본에는 아직 달성되지 않은 현실로서 진화론적 시야 아래 가상되고 있었다. 프로테스탄트적, 에머슨적 관점을 끌어들임으로써 도코쿠나 그의 신봉자들은 이 '진리' 내지 '인성의 진리'를 보편적인 것으로 동화시킬 수 있게 되었고, 그들 모두의 내부에 그것이 내재한다고 설정할 수도 있게 되었다. 도코쿠에 따르면 '내부의 생명'은 인간의 내부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정신'과도 조응하고 있었다. 따라서 "자기의 '아'"를 극복했을 때, 사람들은 이 '우주의 정신'에 도달하 룻 있을 터였다.
그 후 <<문학계>>의 동인 대부분은 기독교를 떠났다. 하지만 기독교는 그들뿐 아니라 보다 큰 문학적, 사상적 영역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이 흔적의 기원은 머지 않아 잊혀진다. 그러나 기독교는 보편적 진리에 대한 신념을 강화함으로써, 문학의 가치와 권위를 높임과 동시에 현실이라는 것에 대한 관점도 형성했다. 특히 내부의 자기와 정신의 자유가 갖는 가치를 강조함으로써 현실의 사회 역사적 제약을 관념적으로 초월하는 것을 간으하게 했던 것이다. 사실 도손 등의 <<문학계>> 동인들이 1890년대 중반까지 기독교를 버린 것은 실로 정신의 자유와 독립을 추구하려는 명분 떄문이었다(도코쿠는 1894년 자살했다). 다야마 가타이, 시가 나오야의 장에서 알 수 있듯이, 도코쿠가 정신의 자유와, 진정한 자기를 실현하기 위한 열쇠로 생각한 '신성한 연애'라는 이념응ㄴ 동시대의 청춘 남녀를 비롯해 그 후의 세대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주목해야 할 것은, 그것이 '연애의 정신성'에 대한 희구와 끊임없는 '육욕'의식 사이의 갈등을 나았다는 점이다. 기독교에 의해 환기된 이 양극성은 그들에게 기독교 자체의 속박을 느끼게 했다. 1890년대 중반 이후, <<문학계>>는 기독교에 등을 돌리고 이교도의 전통, 특히 유럽의 르네상스,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를 상찬하기 싲가했으며(이러한 조류 자체가 서구 낭만주의에서 배운 것이다), 진정한 자기를 실현하는 궁극적 수단으로 연애와 예술에 기대의 시선을 던졌다.
예컨대 도가와 슈코츠는 1894년 <<문학계>>에, '사랑'이야말로 "인생에서 첫 번째의 것"이며, "사랑을 잃는 것은 인ㄱ나의 본소를 잃는 것이다. 인간의 본소를 잃는 것은 인생을 잃는 것이다. 인생을 잃는 것은 우주의 생명과 천지의 신을 잃는 것이다"라고 쓴다. 슈코츠는 그 자신을 포함한 기독교들이 신이라 부르고 있던 것을 '생명'이라느 개념으로 치환하고, 이 생명의 이름 하에 기독교를 부정했다. 청일전쟁 발발을 앞두고, 이제 "많은 생각이 혼돈 속에 뒤섞여 있는 곳에 새로운 생각이 일어나고 생명이 발해 오니, 이 국민으로 하여금 이 국민이게 해야 할 때이다"라고 격앙된 어조로 말하게 된 슈코츠는, 그 전쟁이 메이지 유신의 '혁명'이 아직 달성하지 못한 '국민 대혁명'의 계기라고 시사하면서, "이 혁명은 반드시 종교와 미술의 相海에서 일어나야 한다"고 자랑스럽게 단언하고 있다.
1890년대 중반 이후 기독교의 부진 및 '자기'나 '자아'에 대한 관심 고조는 모두 청일전쟁을 계기로 한 내셔널맂므의 대두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청일전쟁은 일본인에게 국민 의식을 강화함과 함께, 이어서 일어난 삼국 간섭으로써 서양 열강의 제국주의적 힘을 통감케 했다. 젊고 영향력 있었던 평론가 다카야마 초규는 청일전쟁 지구, 근대 국민 국가는 중세의 종교 지배를 극복한 "인류 발달의 필연적인 형식"이고, 이 형식은 "민중 최대의 행복을 기도한다"고 말해, 국가 의식과 국민 의식을 높이 상찬했다. 초규는 국가의 '자주 독립의 정신' '군민일가'를 특색으로 하는 '건국의 정신'과 '국체'를 강조하고 있다. 곧 그는 휘트먼의 '개인주의'를 상찬하기 시작한다.
(...)
진보적 지식인이 서양 문명의 본질이라고 간주한 기독교는 그들에 게 자신들이 놓인 역사적 상황을 국가 안팎에서 초월하기 위한 관념적이고 '보편적인' 입각점을 부여했다. 그러나 이제 기독교는-니체의 기독교 비난을 통해-개인의 진정한 자유를 달성하기 위해 극복되어야 할 제도로 생각되었다.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논문 '미적 생활을 논한다(1901년 8월)에서 쵸규는, "본능이란 무엇이낙. 그것은 인생 본연의 요구이다. 인성 본연의 요구를 ㅁ나족시키는 것, 이를 미적 생활이라고 부른다"고 줒아했다. 그리고 슈코츠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미적 생활' 추구의 특권적 활동으로서 '연애'와 '예술'의 절대적 가치를 강조했다.
세기가 바뀔 무렵, 생과 자기에 대한 찬미는 문학적, 사상적 세계의 추진력이 되었다. 쵸규의 '갱니주의'와 '본능'의 찬미에서 보이는 것처럼, 이 시기에 대두한 '개인' '자아' '자기'라는 중심 개념은 '국민'또는 민족주의적인 '국민 정신' 등의 개념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며 그것들과 확실하게 구별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쵸규는 문학자들에게 "오히려 방해물로도 보일 만한 그들의 갱니주의가 그렇게 일국 문명의 큰 동력이 될 수 있"는 '시인 니체'의 예처럼 "숭고하고 위댛나 천직"에 눈뜨기를 바랐으며, 그러기 위해 문학자는 "구미의 시인, 소설가의 최근 걸작을 완미"해야 한다고 촉구했다.74~80면.
기독교에 끄린 청년들의 동기는 주로 '자기' '자아' 추구에 대한 희구였던 것 (위의 책, 332면.)

<<창조>> 파의 생각을 보완할 수 있는 것.
 
요시노 사쿠조와 사소설의 출현
1920년대 중반 사소설 담론의 출현은 1910년대 말부터 1920년대 초에 걸친,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알려진 자유주의적 사회 운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일본의 공업화는 청일전쟁 후 그 속도를 더 했고, 러일전쟁 후에는 더욱 진전되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현저하게 확대되어 도시 노동자층의 인구를 증가시킴으로써 다이쇼 데모크라시 운동의 사회적 기반을 제공했다. 운동의 직접적인 추진력이 되었던 것은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자 요시노 사쿠조가 주창한 '민본주의' 개념이었다. 요시노는 민중에 대해서는 개인의 인격 발전을, 상류 계급에 대해서는 인도주의적 배려와 반성을 강조했다. 이와 관련된 관점에서 아베 지로는 '인격주의', 즉 모든 사회 개혁의 기반으로서 개아의 성장과 발전을 제창했으며, 시라카바파는 개아 추구의 발전으로서 '인도주의'를 들고 나왔다. 다이쇼 시대 중반 무렵에는 인격주의와 인도주의 모두가 널리 영향력 있는 이상이 됨으로써,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윤리적 기반을 형성했다. (100~101면.)
 
'진정한 사소설' 
1926년 일반인을 상대로 한 라디오 강연에서 사토 하루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정한 사소설'은 작가가 사생활상의 경험을 쇄말적으로 기술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이 하나의 운명을 만나 어떻게 좌절했는가, 어떻게 그 운명과 싸우려고 했는가 하는 그런 기록을, 가능한 정직하게 쓴" 귀중한 글이고, "읽는 쪽에서도 스스로 식은땀을 흘리며 쓴 소설가 자신이 된 듯한 공감을 갖고 읽어주었으면 좋겠다." (106면.)
 
사소설과 문단
대조적으로 20세기 초두 이후 근대 이후의 작가들-자연주의라는 이름 아래 사소설이라고 불리는 자전 문학 형식을 발전시킨 사람들-은 사회를 버리고 협소하게 고립된 '문단 길드' 내부에 살면서, 그 속에서 "내적 자아 속에 있는 원시적인 나쁜 것"을 숨기지도 왜곡하지도 않은 채 꾸준히 추구하고 두려움 없이 표현했다. '가장인' '가면 신사'인 유럽 소설가에 비해, 일본의 사소설 작가는 '돔아자' '도망 노예'이며 현세인으로서 사회적 체면을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토에 따르면 '문단 길드'는 고립된, 어떤 의미에서는 허구적인 폐쇄 세게이며, 소설가는 그 안에서 현실의 사회-외부의 봉건적이고 반동적인 세계-를 버리고 꿈과 같은 세계의 일원이 된다. 거기에서 소설가는 정부가 메이지 말기 이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던 사회적, 정치적 활동이나 책임의 하중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개인이 될 수 있었다. 이토는 문단 길드가 은둔자의 폐쇄적인 세계와 닮았다고 보면서, 문단 길드에서 창조된 사소러의 배후에는 불교나 신도의 은자 전통이 있다고 말해, 사소설 계보의 '기원' 구축을 보강했다.

(....)

근대 일본의 작가들은 사회 전체를 표현하거나 사회에 참가하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순수한 인간 관계만의 추출'은 물론 '자기를....담담하고 냉혹하게 떼어놓고 간결하게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112~113면.)
 
사소설과 도피
사소설은 작가가 작중 인물(소설가 자신)을 사회와의 관계에서 객관화하지 않는 것 (115면.)

채만식은 왜 일제 말기 사소설을 썼을까.
현실은 일제 파시즘 이었음으로. 그는 도피중?
 
사소설과 심경소설
히라노 켄은 '사소설의 이율배반'에서, 앞에서 본 이토의 분류를 발전시켰다. 즉 그는 '심경 소설'을 '조화자'의 문학으로, '사소설'을 '파멸자'의 문학으로 명명함으로써 양자를 대치시켰다.

사소설을 멸망의 문학이라고 한다면, 심경 소설은 구원의 문학이다. 사소설을 어쩔 수 없이 혼돈스러운 위기 자체의 표백이라고 한다면, 심경 소설은 벗어날 수 있었던 위기 극복의 결어이다. 전자가 외계와 자아의 이화감에 근거한다면, 후자는 그것의 조화감에 도달하려 한다. 인간 실존의 어쩔 수 없는 어리석음이나 죄 많음에서 발생하는 생의 위기감과, 그런 위기감을 초극하는 데서 생기는 청명한 운명감의 조화, 전자는 그 구원을 예술 쪽에서 찾으려 하고, 후자는 실생활 쪽에서 찾고자 한다. 이런 징표의 상이가 나타나는 까닭은, 원래 전재가 무이상 무해결의 자연파에서 파생되었고, 후자는 이상주의적인 시라카바파에서 유래되었다는 데 있다. 즉 사소설은 파멸자 현세 포기자의 문학이고, 심경 소설은 조화자 현세 파지자의 문학이다. 치카마츠 슈코에서 가무라 이소타를 거쳐 다자이 오사무에 이르는 계열과 시가 나오야에서 다키이 고사쿠를 거쳐 오자키 가즈오에 이르는 계보가 거기서 자연히 구별되기 떄문이다.

'파멸자의 사소설'과 '조화자의 심경 소설' 이라는 히라노의 분류는 상이한 두 가지 규준에 기초하고 있다. 즉 텍스트의 내적 주제적 측면과 상호 텍스트적 전기적 차원이 그것인데, 이때 양자는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히라노에 따르면, 파멸자의 사소설은 죄 많고 사악하고 부끄러울 만한 행위에 의해 야기된 위기를 묘사하고, 그에 대한 확실한 해결이나 구워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조적으로 조화자의 심경 소설은 위기를 극복한 결과로서 얻은 아양된 심경을 나타낸다. 전자는 인생에 대한 비관적이고 운명론적인 태도를, 후자는 낙천적이고 이상주의적인 태도를 표현한다. 두 가지 유형의 차이점은 작가의 '실생활'과 '예술' 활동의 관계에도 기인하고 있다. 사소설 작가가 자신의 예술을 통해 구워을 찾고 개인적 위기의 해결을 꾀하는 데 비해서, 심경 소설의 작가는 실생활 안에서 개인적 위기의 해결이나 구원을 구한다. 전자는 예술을 창조하기 위해 자신의 사생활을 희생하고 포기하는 사람, 후자는 사생활을 최우선으로 하며 예술 작품 쪽은 개인적 위기를 극복한 결과이자 부산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

나카무라는 1935년에 쓰여진 '사소설에 대하여'에서 고바야시 히데오의 '사소설론'에 호응, 다야마 가타이의 <<이불>> 이래 사소설의 전통은 "실생활에 의해 초래된 그들의 생활 감정을 해석하거나 사회와의 대결을 통해 진정으로 객관화하지도" 못한 채, "사회와 교섭하지 않는 자신의 일상생활을...표현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116~118면.)

채만식의 '사소설'은 물론 이 구도에 정확히 떨어지지는 않지만,
'심경소설' 쪽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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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된 자기 - 일본 근대성의 형성과 사소설담론
스즈키 토미 지음, 한일문학연구회 옮김 / 생각의나무 / 2004년 2월
품절


히라노 켄은 '사소설의 이율배반'에서, 앞에서 본 이토의 분류를 발전시켰다. 즉 그는 '심경 소설'을 '조화자'의 문학으로, '사소설'을 '파멸자'의 문학으로 명명함으로써 양자를 대치시켰다.

사소설을 멸망의 문학이라고 한다면, 심경 소설은 구원의 문학이다. 사소설을 어쩔 수 없이 혼돈스러운 위기 자체의 표백이라고 한다면, 심경 소설은 벗어날 수 있었던 위기 극복의 결어이다. 전자가 외계와 자아의 이화감에 근거한다면, 후자는 그것의 조화감에 도달하려 한다. 인간 실존의 어쩔 수 없는 어리석음이나 죄 많음에서 발생하는 생의 위기감과, 그런 위기감을 초극하는 데서 생기는 청명한 운명감의 조화, 전자는 그 구원을 예술 쪽에서 찾으려 하고, 후자는 실생활 쪽에서 찾고자 한다. 이런 징표의 상이가 나타나는 까닭은, 원래 전재가 무이상 무해결의 자연파에서 파생되었고, 후자는 이상주의적인 시라카바파에서 유래되었다는 데 있다. 즉 사소설은 파멸자 현세 포기자의 문학이고, 심경 소설은 조화자 현세 파지자의 문학이다. 치카마츠 슈코에서 가무라 이소타를 거쳐 다자이 오사무에 이르는 계열과 시가 나오야에서 다키이 고사쿠를 거쳐 오자키 가즈오에 이르는 계보가 거기서 자연히 구별되기 ‹š문이다.-116쪽

'파멸자의 사소설'과 '조화자의 심경 소설' 이라는 히라노의 분류는 상이한 두 가지 규준에 기초하고 있다. 즉 텍스트의 내적 주제적 측면과 상호 텍스트적 전기적 차원이 그것인데, 이때 양자는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히라노에 따르면, 파멸자의 사소설은 죄 많고 사악하고 부끄러울 만한 행위에 의해 야기된 위기를 묘사하고, 그에 대한 확실한 해결이나 구워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조적으로 조화자의 심경 소설은 위기를 극복한 결과로서 얻은 아양된 심경을 나타낸다. 전자는 인생에 대한 비관적이고 운명론적인 태도를, 후자는 낙천적이고 이상주의적인 태도를 표현한다. 두 가지 유형의 차이점은 작가의 '실생활'과 '예술' 활동의 관계에도 기인하고 있다. 사소설 작가가 자신의 예술을 통해 구워을 찾고 개인적 위기의 해결을 꾀하는 데 비해서, 심경 소설의 작가는 실생활 안에서 개인적 위기의 해결이나 구원을 구한다. 전자는 예술을 창조하기 위해 자신의 사생활을 희생하고 포기하는 사람, 후자는 사생활을 최우선으로 하며 예술 작품 쪽은 개인적 위기를 극복한 결과이자 부산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117쪽

나카무라는 1935년에 쓰여진 '사소설에 대하여'에서 고바야시 히데오의 '사소설론'에 호응, 다야마 가타이의 <<이불>> 이래 사소설의 전통은 "실생활에 의해 초래된 그들의 생활 감정을 해석하거나 사회와의 대결을 통해 진정으로 객관화하지도" 못한 채, "사회와 교섭하지 않는 자신의 일상생활을...표현했다"고 비판하고 있다.-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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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 한림신서 일본현대문학대표작선 1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소화 / 1997년 10월
품절


태어나 처음으로 산수 교과서를 손에 쥐었다. 작고 새까만 표지. 아아, 그 속에 나열된 숫자들이 얼마나 아름답게 눈에 들어왔던가. 소년은 잠시 책을 만지작거리다가 마침내 맨 끝 페이지에 해답이 다 적혀 있음을 발견했다. 소년은 눈썹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무례한데."

보름달 저녁. 번쩍이다 무너지고, 넘실대며 부서져, 소용돌이치고 나뒹구는 파도에 묻혀 서로 떨어지지 말자고 붙잡은 손을 괴롭다 못해 내가 일부러 뿌리쳤을 때, 여자는 순식간에 파도에 삼켜지며 소리높이 이름을 불렀다. 내 이름은 아니었다.

나는 산적. 네 놈의 긍지를 훔치련다.

"설마 그런 일이야 없을 테지, 없을 테지만 말야, 내 동상을 세울 때 오른쪽 발을 반걸음 정도 앞으로 내밀고 느긋이 몸을 약간 젖힌 듯이 해서, 왼손은 조끼 속에 오른손은 잘못 쓴 원고를 구겨 쥔 채로, 그리고 목을 달지 말 것. 아니 아니, 아무런 의미도 없어, 참새 똥을 콧등에 맞고 싶지 않을 뿐야. 그리고 받침돌에는 이렇게 새겨 줘. 여기에 남자가 있다. 나서 죽었다. 일생을 쓰다 버린 원고를 찢는 데 썼다."

유치장에서 5, 6일쯤 지낸 어느 날 대낮, 나는 발돋움을해서 유치장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마당은 초겨울 햇살을 가득 받아 창가의 세 그루 배나무가 다 같이 꽃망울을 피웠는데 그 아래에서 순경들이 이삼십여 명, 교련 훈련을 받고 있었다. 젊은 순경부장의 호령에 따라 일제히 허리춤에서 오랏줄을 꺼내기도 하고 호루라기를 불어대거나 하였다. 나는 그 풍경을 바라보며 순경 한 사람 한 사람의 집에 대해 생각했다.-21~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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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04-26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상의 수필과도 연결될 수 있을 듯. 정사(情死)를 꿈꾸었는데, 물에 먼저 빠진 여성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는 이야기.
 
비슷한 것은 가짜다 - 연암 박지원의 예술론과 산문미학
정민 지음 / 태학사 / 2003년 7월
구판절판


대저 육경과 <<논어>> <<맹자>>는 사관이 지나치게 높여 기린 말이 아니면 신하된 자가 지극히 찬미한 말일 뿐이다. 또 그렇지 않으면 우활한 문도들과 멍청한 제자들이 스승의 말씀을 기억해내되 처음은 있으되 끝이 없거나, 뒷부분만 얻고 앞은 빠뜨려 그 본 바에 따라 책에다 써 놓은 것일 뿐이다. 후학들은 이를 잘 알지 못하고 문득 성인의 입에서 나왔다 하여 아예 경전이 된다고 지목하여 결정했던 것이니, 그 누가 이 가운데 태반이 성인의 말이 아닌 줄을 알겠는가? 설령 성인에게서 나왔다하더라도 요컨대는 또한 그때그때마다 일이 있어 나온 말로, 병통을 인하여 약을 주고 때에 따라 처방을 내려 이러한 어리석은 제자들과 우활한 문도들을 구하려 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약으로 거짓 병을 치료하고 처방으로 정해진 아집을 논난한 것이 어찌 갑자기 만세의 지론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탁오의 "동심론" 중에서-130-1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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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가 아즉 박태원일 때 - 박태원 수필집
류보선 엮음 / 깊은샘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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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박태원은 이상의 친구로, 구인회의 맴버이자 모던의 첨단을 달렸던 모던보이로 우스꽝스러운 머리스타일과 함께 기억된다. 그리고 구인회는 카프에 대한 대타항으로 '모던'스러운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던'스러움은 '기교'주의로 폄하되기 쉽다.

 

물론 그의 소설을 읽을때마다, 우리는 그 기교의 현대적 감각과 실험정신에 놀라게 된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나 <천변풍경>에서의 영화적 기법, <방란장 주인>에서 단편소설을 단 한 문장으로 써낸 것 등등.

 

그의 수필도 마찬가지로 ‘기교’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인다. 문장부호, 된소리, 여성적 문체 등에 대한 장인적인 섬세함. 그는 ‘문예감상이란, (늘 하는 말이지만) 구경, 문장의 감상이다. 까닭에, 만약, 어느 작품의 문장으로서, 오즉 그 내용에 잇서 전체적 관념을 표현할 뿐이요 그 음향으로 그 의미 이외의 분위기를 비저내는 것이 못된다면 우리는 결코 그 작품에 흥미를 가질 수는 업다.’라고 까지 이야기한다. 또 당대 이 글이 알게 모르게 겨냥할 수 밖에 없었던 카프 진영을 염두에 둔다면 박태원을 ‘기교주의’로 몰기는 쉽다.

        그러나 카프라는 대타항을 잠시 접어두고 박태원의 수필들을 읽어본다면, 이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의 혹은 지금 우리가 해방전 박태원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이미지만큼의 ‘기교중심’으로 읽기는 힘들 것이다. 그가 ‘문장부호’ ‘된소리’ ‘여성적 문체’ 등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현실의 정확한 재현을 위한 노력이다. 그는 깊은 관찰력으로 주위를 바라보고 세부를 보다 엄밀히 재현하기 위해 힘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창작에 잇서 우리는 자유로웁게 또 솜씨잇게 기교를 구사하여야지 기교의 지배를 우리가 바더서는 안된다.’라고 하면서 끊임없이 ‘기교를 넘어서는 그 무엇’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무엇에 대한 단초는 ‘심경소설’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에서부터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심경소설’을 ‘본격소설’과 구분하며 ‘본격소설’은 ‘넓이’ 심경소설은 ‘깊이’라는 장점을 지닌다고 한다. (본격/대중의 이분법과 다른다) 그리고 한 소설가가 가장 잘 알고 잘 쓸 수 있는 것은 그 자신의 내면이고, 이 내면을 솔직하게 남들 앞에서 고백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 작가의 훌륭함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그리고 타자에 대한 ‘솔직함’을 전제로 한다. 즉 앞의 ‘기교를 넘어서는 그 무엇’은 ‘진정성’이다. 진부한 것 같지만, 소설가로서 박태원의 삶은 이 ‘진정성’이라는 어휘로 설명되어질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심경소설'론은 동시대 카프의 뛰어난 소설가 김남천의 '고백문학'론을 연상케 한다.

       이러한 박태원이었기에, 일제말기 역사소설과 북한으로 건너가서 유수한 역사 대하소설들을 써내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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