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 처음으로 산수 교과서를 손에 쥐었다. 작고 새까만 표지. 아아, 그 속에 나열된 숫자들이 얼마나 아름답게 눈에 들어왔던가. 소년은 잠시 책을 만지작거리다가 마침내 맨 끝 페이지에 해답이 다 적혀 있음을 발견했다. 소년은 눈썹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무례한데."
보름달 저녁. 번쩍이다 무너지고, 넘실대며 부서져, 소용돌이치고 나뒹구는 파도에 묻혀 서로 떨어지지 말자고 붙잡은 손을 괴롭다 못해 내가 일부러 뿌리쳤을 때, 여자는 순식간에 파도에 삼켜지며 소리높이 이름을 불렀다. 내 이름은 아니었다.
나는 산적. 네 놈의 긍지를 훔치련다.
"설마 그런 일이야 없을 테지, 없을 테지만 말야, 내 동상을 세울 때 오른쪽 발을 반걸음 정도 앞으로 내밀고 느긋이 몸을 약간 젖힌 듯이 해서, 왼손은 조끼 속에 오른손은 잘못 쓴 원고를 구겨 쥔 채로, 그리고 목을 달지 말 것. 아니 아니, 아무런 의미도 없어, 참새 똥을 콧등에 맞고 싶지 않을 뿐야. 그리고 받침돌에는 이렇게 새겨 줘. 여기에 남자가 있다. 나서 죽었다. 일생을 쓰다 버린 원고를 찢는 데 썼다."
유치장에서 5, 6일쯤 지낸 어느 날 대낮, 나는 발돋움을해서 유치장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마당은 초겨울 햇살을 가득 받아 창가의 세 그루 배나무가 다 같이 꽃망울을 피웠는데 그 아래에서 순경들이 이삼십여 명, 교련 훈련을 받고 있었다. 젊은 순경부장의 호령에 따라 일제히 허리춤에서 오랏줄을 꺼내기도 하고 호루라기를 불어대거나 하였다. 나는 그 풍경을 바라보며 순경 한 사람 한 사람의 집에 대해 생각했다.-21~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