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법론 시론
시의 '과학'을 추구. 물론 일원론적인 학문관을 보여준다. 기존의 시학이 시란 무엇이냐, 시란 왜 있느냐는 질문에 해명하려고 노력했다면, 자신은 시란 어떻게 있느냐 라는 질문을 한다는 것.
물론, 이는 문제가 있다. 시란 '어떻게' 있느냐 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그 전제에는 '시'라는 것의 외연과 내포, 그 정의가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가정하에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구히 완성된 시학이라는 것을 미리부터 규정할 수는 없다. 오늘의 문명생활이 사람들의 문화적 충동을 더욱더 복잡다기하게 해갈수록 어떤 문화부문의 일반성까지에 새로운 사태가 나타나도록 변천이 심할 수 있으며 그 문화부문을 취급하는 일반적인 과학도 그 사태마저를 포용하고도 남을 수 있게 체계의 확충 갱신을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김기림이 시를, 또는 시학을 바라보는 태도를 볼 수 있다. 자연과학과 다르면서도 같다. "자연에 있어서의 사태란 '나타나는 것'이고 문학에 있어서의 그것은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시의 사태들의 사실적 기술, 이것이 우선 시학의 첫째 임무이고 이를 통해서 시의 일반적 성질을 정리한다. 자연과학과 같다. 기존의 시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사태들이 누적될 때, 새로운 시학이 설정되어야 한다는 것.
그러나 역시 문제. 자연과학에서 '사태'란 연구실에서 통제된 조건 하에 일어나는 일. 혹은 자연에서의 어떤 물리,화학,생물적 사실들을 연구하는 것.
그러나 '시'라는 것은, 어디에 있는것? 무엇? 이의 규정을 회피한다면. 결국. '시'라는 것은 이를 만들어내는 사람들 자신들이 '시'라고 주장하는 것과 독자들이 '시'라고 생각하는 것들의 종합. 그래. 이렇게 뿐에 규정될 수 없다.
그래, 그래도 이 정도 규정으로 만족하고 --그러나 과연 이런 규정이 유의미한지에 대한 의심을 품고-- 그의 이후 글로 넘어가기로 한다.
'조만간 학문은 모조리 과학으로 통일되어야 할 운명에 있다고 본다.' 김기림의 명제. 여기서 과학이란 엄밀한 진리의 입증. 자연과학적 모델에 입각한 것이다.
'과학적 태도는 오늘이 시인의 새 '모랄'이며 뿐만 아니라 과학의 발흥과 함께 자라난 세계의 새 정세가 요구하는 유일한 진정한 인생태도라는 결론이 그것이다.'
가치판단이 아니라 '사실'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
'시가 조직하고 통일할 것은 과학적 세계상에 알맞은 인생태도일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과학적 태도와 근저에 있어서 일치하는 것이리라.'
또 다음 글에서 그는 감상과 비평을 구분짓는다. 최재서가 비평을 감상의 합리화로 규정했던 것과는 다르다.
'그의 취미에 입각해서 다른 사람의 작품을 판단해 버리는 경우'에 대해 김기림은 '유감'이라고 표현한다.
스스로 비평가이자 시인이었던 김기림은 비평가가 시인일 때는 자신의 시론을 초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흥미롭다.
정말 흥미롭게도, 과학적 '시학'을 주창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글을 '시론'이라고 이름붙였다. 김기림은 스스로 '시론'과 '시학'을 엄밀히 구별하고 있다. '비평학'과 '비평론'도 마찬가지이다. 그에 따르면 '시학'은 시에 대한 일반적인 원리를 규명하는 작업이고, '시론'은 시에 대한 구체적 논의로 시인의 시론은 자신의 시를 합리화하고 옹호하려는 경향을 띠기도 한다고 한다.
그런데, 김기림은 자신의 '과학적 시학'에 대한 이야기를 왜 '시론'이라 이름붙였던 것인가.
김기림의 글에서의 문제는, 이데올로기가 전혀 배제된 '사실'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신뢰가 우선 첫번째이다.
어떤 명제를 사실에 비추어 판단하는 작업을 과학이라 불렀던 것. 20세기 초반에 과학기술의 엄청난 발전을 보고 놀라버린 일군의 철학자, 문학자들의 면모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이래, 과학사회학자들과 과학철학자들의 작업에 의해서 이제 '과학=진리'라는 도식은 허위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이는 양쪽에서 아직도 설전을 계속 중이고, 가장 유명한 사건이 바로 <지적 사기>라는 형태의 '사기'로 이루어졌다. 현대 과학자가 유명 과학사회학 잡지에 말도 안되는 논문을 게재한 후, 과학사회학자들의 무식과 허위를 꼬집었던 것. 그럼에도 '과학자' 또한 인간임으로 어떠한 '사회'를 형성하고 이는 사회학의 영역임은 분명하지 않는가? 황우석 사태 이후 한층 더 활발해진 과학사회학, 과학철학자들의 활동을 기대해본다.)








둘째로, 시와 사회와의 관계를 논하기도 하지만, 이는 단어 그대로 언어가 사회적 산물이라는 점에 있어서 시도 사회적 산물임으로 둘은 관계가 있다는 식이다. 사회가 '과학적 사회'로 나아가고 있음으로 시도 '과학적 세계관'을 표출해야 한다는 것. 그렇다면 그런 시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구체적인 지적은 없다.
종종 카프를 대타항으로 설정한 듯한 발언이 눈에 띈다. 카프가 말하는 '과학'이라는 것에 대해서 김기림은 논쟁하고 있지는 않다. 김기림 말처럼 용어를 자기 마음대로 서로 쓰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김기림은 직접적으로 투쟁하지 않는다. 이 용어를 '전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전체적으로, 설득력이 부족하다. 내공의 힘이다.
30년대의 소묘
"임화씨의 신문학사 연구로 현대소설의 어머니로서의 이른바 신소설의 성격이 매우 천명되었는데 그것은 거진 공통하게 '유토피아'적 요소가 중심 게기가 된 것으로서 우리 밖에 있는 '놀라운 새 세계' 즉 문명사회로 향하여 호기와 경이의 눈을 뜨고 있었다. 신구 두 대척되는 정신의 갈등-- 즉 중세와 근대의 투쟁같은 것이 작품의 기축이 된 것은 역시 춘원의 일부의 작품에서 시작된 듯하다."


깔끔한 정리. 그리고 오리엔탈리즘. 1920년대 이후 조선 문인들의 글에서 오리엔탈리즘을 지적해내는 것, 그 이상의 작업을 해야 할 것이다. 이제 이는 바탕이 된 것이고, 여기서부터 연구를 시작해야 할 것.





최재서가 영문학의 에피고넨이라면, 김기림은 서구 근대 과학, 문명의 그것이다. 언제나 '과학'을 강조한다.
"새로운 세계의 구조에 있어서도 과학정신은 의연히 가장 정확한 지표일 것이고 또 과학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조언자일 것이다"
엘리티시즘의 최재서와 달리, 보편 과학을 추종하는 김기림. 천재보다는 민족의 힘을 강조한다.
"새로운 원리의 발견이거나 역사적 결산이거나 그것은 어떠한 개인의 머리에서 번뜩이는 천재적 환상만으로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개인의 창의가 아무리 뛰어났다 할지라도 한 민족의 체험으로써 결정되고 조직된 연후에 비로소 시대의 추진력이 될 수 있게 된 것이 '오늘'이라는 역사적 일순의 특이한 성격인 것같다."
그는 근대는 습득해야할 것이라고 전제한 후에도, 각기 문화는 보존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는 어떻게 해결가능한 모순인가? 근대는 문화 이전의 제도인가. 그가 말하는 문화란 무엇일까.
"한 민족의 문화는 늘 그 자신의 존엄과 독창성과 의욕을 가지는 것이고 따라서 거기로 통하는 길은 오직 사랑과 존경을 거쳐서만 뚫려진다. 한 민족이 세게에 향해서 실로 그 자신이 이해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문화를 버림으로써 얻어질 리는 만무하다. 보다도 전통 및 생리와 보편성과의 충격과 조화와 충격의 끊임없는 운동을 따라 그 자신의 문화를 더 확충하고 심화하고 진전시킴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근대'라는 것은 '보편성'이라는 것. 언제나 '후진'으로 표현하고 있는 조선의 문화는 그 보편성을 우선 획득한 후에, 자신의 존엄과 독창성을 올바로 발휘할 수 있다는 것. 임화와 상통할 수 있는 것.
1908년 동갑내기 비평가. 임화/최재서/김기림. 김기림은 임화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 보인다. 최재서는 김기림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 보인다. 물론 카프를 대타항으로 설정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김기림은 최재서를 의식했을까?
임화를 의식한 듯 보이는 발언 또 한가지. 김기림은 임화를 인정하고 있던 것 같다.
"어느 시기에 특히 문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문학사를 요망하는 기운이 움직인다고 하면 그것은 그 시기의 문학이 자신의 계보를 정돈함으로써 거기 연결한 전통을 찾아서 그 앞길의 방향을 바로 잡으려는 요구를 가지기 시작한 증거일 것이다. 이러한 조건이 어느 사이에 엄정하게 객관적이래야 할 문학사에 시대의 주관적 요구를 침투시킨다."
(1939. 10.)
감상에의 반역
시론에서 '시'에대한 정의를 굳이 피하겠다고 했지만, 그는 나름의 시에 대한 정의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논쟁의 중점이 되면 안 되겠기에 그는 이를 내세우지 않지만, 언뜻언뜻 이것이 나타난다.
"시란 가치의 형성이고 뿐만 아니라 그것은 좁은 개성의 울타리를 넘어서 한 시대의 보편적인 문화에 늘 다리를 걸쳐 놓고 있는 것이다. 한편의 당시나 고시조는 결코 이러한 것으로서는 우리의 감상을 받지 못한다."
따라서 '오늘의 시'에 당시나 고시조는 포함될 수 없다는 것. 김기림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늘의 시'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언제나 새로운 시가 등장할 때면, 구시대의 시론을 가지고는 이를 시가 아니다라고 지적한다고 한다. 열린 생각이다. 그러나 논쟁에서는 교묘하게도 그는 조선의 시가 '과거'의 시라고 규정하고 만다. 당사자는 이것이 '오늘'의 시라고 하면 그만이지 않는가. 그리고 김기림의 논리대로 김기림의 시론은 그 폭이 너무 얕아서 자신의 시를 알지 못한다고 하면 그만...
물론 이를 방지하기 위해, 그는 '보편성'을 담지하고 있는 '근대'의 중심은 영국과 프랑스 시들의 조류를 끌어온다.
"시인은 시를 제작하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시인은 한개의 목적=가치의 창조로 향하여 활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의도된 가치가 시로서 나타나야 할 것이다. 이것은 소박한 표현주의적 방법에 대립하는 전연 별개의 시작상의 방법이다. 사람들은 흔히 그것을 주지적 태도라고 불러왔다."
"시인은 그의 독자의 '카메라 앵글'을 가져야 한다. 시인은 단순한 표현자 묘사자에 그치지 않고 한 창조자가 아니면 아니된다."
"시라고 하는 것은 결국 시인의 마음이 외부적 혹은 내부적 감성에 의하여 충격되었을 때의 그 마음의 비상성의 표현이다. 그것이 독자의 의식면에도 거진 같은 진폭을 가진 파문을 일으키는 것이다."
"시에 나타나는 현실은 단순한 현실의 단편은 아니다. 그것은 의미적인 현실이다. 그리고 그것(현실)이 전문명의 시간적 공간적 관계에서 굳세게 파악되어서 언어를 통하여 조직된 것이 시가 아니면 아니된다. 여기서 의미적 현실이라고 한 것은 현실의 본질적 부분을 가리켜 한 말이다. 그것은 현실의 한 단편이면서도 그것이 상관하는 현실 전부를 대표하는 부분이다."
리얼리즘적이다.

"시(제작이 필한 작품으로서)는 애매성과 감상성을 배제함으로써 명랑성에 도달할 수가 있다. 그것은 시인의 꾸준한 지적 활동에 의하여 얻을 수가 있는 일이다. 통제되고 계획된 질서 이외에 마저 정리되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으면 그 부분이 애매성을 가져온다. 또한 시를 감정에게 맡겨두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감정은 늘 혼돈하려고 하고 비만하려고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 감정의 비만이 다시 말하면 감상이다. 시를 이러한 비대증에서 건져내서 그것에게 '스파르타'인과 같은 건강한 육체를 부여하는 것이 오늘의 시인의 임무다."
명랑하고 지적이고 모랄이 있는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