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월 시집 청목 스테디북스 38
김소월 지음 / 청목(청목사) / 2001년 1월
평점 :
절판


산유화(山有花)

산(山)에는 꽃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山)에
산(山)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山)에서 우는 적은 새요
꽃이 좋아
산(山)에서
사노라네

산(山)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방학이 되고, 최근에 나온 시집들을 읽어두고 있습니다. 최근 시집들을 너무 읽지 않았다는 생각과, 어떠한 의무감에서... 또는 이제 내게 시는 연구의 대상이나 분석의 대상으로 굳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순수한 감상의 대상으로.

콕콕 쑤시는 시들은 여기저기 있었으나, 아, 시로구나, 하는 시는 발견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점점 눅눅해져가면서 온종일 시집들을 읽어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다시 김소월을 보게 되었습니다. 산유화가 마음에 울렸습니다...

산에 꽃이 핀다는 것. 어찌보면 자명한 진실. 시는 뉴스처럼, 자명한 것을 자명하게 말하면 안되는 법. 그러기에 산에 꽃이 핀다는 것은, 시라는 문법 상 무언가 특이한 것. 시가 될 수 없는 것.
그렇다면 화자는 왜 놀랐을까, 혹은 이를 시화하게 되었을까 하는 점. 즉 왜 이 소재가 '시적'인 것인가 하는 것.

산에는 꽃이 핀다는 것.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핀다는 것.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다는 것.
산에 사는 작은 새는 꽃이 좋아서 산에서 산다는 것. 꽃이 진다는 것.

산유화 라는 것...
이것만큼 신비롭고 비일상적이면서도 일상적인 것이 있을까. 생명의 탄생과 소멸. '저만치 혼자' 피고 또 지는 순환. 그리고 '작은 새'와 '꽃'과 '산'이라는 관계의 소통. 온 삶과 죽음과 관계. 이것이말로 일상이면서, 또 일상에서는 신비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이를 시화함으로서 소월은 일종의 충격을 줍니다. 일상이야말로, 꽃이 피고 지고, 새가 찾아오고 가고, 하는 것이야말로 시라는 것. 그것보다 신비하고 아름답고 쓸쓸하면서도 포근한 것은 없다는 것.

시적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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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이학문선 1
안토니오 네그리 & 마이클 하트 지음, 윤수종 옮김 / 이학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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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의 축적은 노동자들 사이의 모든 전지구적 통일을 막기 위해 국제적인 노동 분업의 위계제에 오랫동안 의지해 왔던 자본주의의 전략을 훼손하였다. 이미 유럽의 제국주의가 완전히 꽃피기 전인 19세기에, 엥겔스는 영국 프롤레타리아트가 "노동 귀족"의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슬퍼했다. 왜냐하면 영국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interest는 식민지 노동 계층들과 함께한다기보다는 영국 제국주의의 기획과 함께 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의 쇠퇴기에 강력한 국제 노동 분업은 확실히 남아 있었지만, 모든 일국 노동자 계급의 제국주의적 이점들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종속적인 국가들에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공동 투쟁은 위기를 본국 영역에서 종속 영토들로 옮기는 구제국주의적 전략의 가능성을 제거했다.-349-350쪽

식민지 시대 조선 프롤레타리아트와 일본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연대할 수 없었던 이유.

아마도 전에는 제한된 유용성을 가졌을지도 모를 제3세계주의적 전망들은 이제 완전히 쓸모없게 되었다. 우리는 제3세계주의가 국제적인 자본주의 체제의 주요 모순과 적대는 제1세계의 자본과 제3세계의 노동 사이에 있다는 관념으로 정의된다고 이해한다. 따라서 혁명을 위한 잠재성은 분명하게 그리고 전적으로 제3세계에 있다. 이러한 관점은 함축적으로 그리고 명시적으로 다양한 종속 이론에서, 저발전 이론들에서, 그리고 세계 체계 전망들에서 제기되었다. 제3세계주의적 전망의 제한된 장점은 그것이 혁신과 변화가 항상 유로-아메리카에서 기원했고 오로지 거기에서만 기원할 수 있다는 "제1세계주의" 혹은 유럽 중심적 관점에 직접적으로 대항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잘못된 주장에 반사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잘못된 입장에 이를 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제3세계주의적 전망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그 전망은 제1세계와 제2세계에서의 노동의 혁신들과 적대들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기 우리의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인데, 제3세계주의적 전망은 지배적은 국가들과 종속적인 국가들에 있어서 똑같이 세계를 가로지르는 투쟁들의 실질적인 수렴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350-3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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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론 시론

시의 '과학'을 추구. 물론 일원론적인 학문관을 보여준다. 기존의 시학이 시란 무엇이냐, 시란 왜 있느냐는 질문에 해명하려고 노력했다면, 자신은 시란 어떻게 있느냐 라는 질문을 한다는 것.

물론, 이는 문제가 있다. 시란 '어떻게' 있느냐 라고 강조하고 있지만, 그 전제에는 '시'라는 것의 외연과 내포, 그 정의가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다는 가정하에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구히 완성된 시학이라는 것을 미리부터 규정할 수는 없다. 오늘의 문명생활이 사람들의 문화적 충동을 더욱더 복잡다기하게 해갈수록 어떤 문화부문의 일반성까지에 새로운 사태가 나타나도록 변천이 심할 수 있으며 그 문화부문을 취급하는 일반적인 과학도 그 사태마저를 포용하고도 남을 수 있게 체계의 확충 갱신을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김기림이 시를, 또는 시학을 바라보는 태도를 볼 수 있다. 자연과학과 다르면서도 같다. "자연에 있어서의 사태란 '나타나는 것'이고 문학에 있어서의 그것은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시의 사태들의 사실적 기술, 이것이 우선 시학의 첫째 임무이고 이를 통해서 시의 일반적 성질을 정리한다. 자연과학과 같다. 기존의 시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사태들이 누적될 때, 새로운 시학이 설정되어야 한다는 것.

그러나 역시 문제. 자연과학에서 '사태'란 연구실에서 통제된 조건 하에 일어나는 일. 혹은 자연에서의 어떤 물리,화학,생물적 사실들을 연구하는 것.

그러나 '시'라는 것은, 어디에 있는것? 무엇? 이의 규정을 회피한다면. 결국. '시'라는 것은 이를 만들어내는 사람들 자신들이 '시'라고 주장하는 것과 독자들이 '시'라고 생각하는 것들의 종합. 그래. 이렇게 뿐에 규정될 수 없다.

그래, 그래도 이 정도 규정으로 만족하고 --그러나 과연 이런 규정이 유의미한지에 대한 의심을 품고-- 그의 이후 글로 넘어가기로 한다.
 
 

'조만간 학문은 모조리 과학으로 통일되어야 할 운명에 있다고 본다.' 김기림의 명제. 여기서 과학이란 엄밀한 진리의 입증. 자연과학적 모델에 입각한 것이다.


'과학적 태도는 오늘이 시인의 새 '모랄'이며 뿐만 아니라 과학의 발흥과 함께 자라난 세계의 새 정세가 요구하는 유일한 진정한 인생태도라는 결론이 그것이다.'


가치판단이 아니라 '사실'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

'시가 조직하고 통일할 것은 과학적 세계상에 알맞은 인생태도일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과학적 태도와 근저에 있어서 일치하는 것이리라.'



또 다음 글에서 그는 감상과 비평을 구분짓는다. 최재서가 비평을 감상의 합리화로 규정했던 것과는 다르다.

'그의 취미에 입각해서 다른 사람의 작품을 판단해 버리는 경우'에 대해 김기림은 '유감'이라고 표현한다.


스스로 비평가이자 시인이었던 김기림은 비평가가 시인일 때는 자신의 시론을 초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흥미롭다.



정말 흥미롭게도, 과학적 '시학'을 주창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글을 '시론'이라고 이름붙였다. 김기림은 스스로 '시론'과 '시학'을 엄밀히 구별하고 있다. '비평학'과 '비평론'도 마찬가지이다. 그에 따르면 '시학'은 시에 대한 일반적인 원리를 규명하는 작업이고, '시론'은 시에 대한 구체적 논의로 시인의 시론은 자신의 시를 합리화하고 옹호하려는 경향을 띠기도 한다고 한다.


그런데, 김기림은 자신의 '과학적 시학'에 대한 이야기를 왜 '시론'이라 이름붙였던 것인가.


김기림의 글에서의 문제는, 이데올로기가 전혀 배제된 '사실'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신뢰가 우선 첫번째이다.


어떤 명제를 사실에 비추어 판단하는 작업을 과학이라 불렀던 것. 20세기 초반에 과학기술의 엄청난 발전을 보고 놀라버린 일군의 철학자, 문학자들의 면모를 그대로 지니고 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 이래, 과학사회학자들과 과학철학자들의 작업에 의해서 이제 '과학=진리'라는 도식은 허위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이는 양쪽에서 아직도 설전을 계속 중이고, 가장 유명한 사건이 바로 <지적 사기>라는 형태의 '사기'로 이루어졌다. 현대 과학자가 유명 과학사회학 잡지에 말도 안되는 논문을 게재한 후, 과학사회학자들의 무식과 허위를 꼬집었던 것. 그럼에도 '과학자' 또한 인간임으로 어떠한 '사회'를 형성하고 이는 사회학의 영역임은 분명하지 않는가? 황우석 사태 이후 한층 더 활발해진 과학사회학, 과학철학자들의 활동을 기대해본다.)



둘째로, 시와 사회와의 관계를 논하기도 하지만, 이는 단어 그대로 언어가 사회적 산물이라는 점에 있어서 시도 사회적 산물임으로 둘은 관계가 있다는 식이다. 사회가 '과학적 사회'로 나아가고 있음으로 시도 '과학적 세계관'을 표출해야 한다는 것. 그렇다면 그런 시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구체적인 지적은 없다.


종종 카프를 대타항으로 설정한 듯한 발언이 눈에 띈다. 카프가 말하는 '과학'이라는 것에 대해서 김기림은 논쟁하고 있지는 않다. 김기림 말처럼 용어를 자기 마음대로 서로 쓰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김기림은 직접적으로 투쟁하지 않는다. 이 용어를 '전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전체적으로, 설득력이 부족하다. 내공의 힘이다.

 

30년대의 소묘

"임화씨의 신문학사 연구로 현대소설의 어머니로서의 이른바 신소설의 성격이 매우 천명되었는데 그것은 거진 공통하게 '유토피아'적 요소가 중심 게기가 된 것으로서 우리 밖에 있는 '놀라운 새 세계' 즉 문명사회로 향하여 호기와 경이의 눈을 뜨고 있었다. 신구 두 대척되는 정신의 갈등-- 즉 중세와 근대의 투쟁같은 것이 작품의 기축이 된 것은 역시 춘원의 일부의 작품에서 시작된 듯하다."


 

 

 

 

 

 

깔끔한 정리. 그리고 오리엔탈리즘. 1920년대 이후 조선 문인들의 글에서 오리엔탈리즘을 지적해내는 것, 그 이상의 작업을 해야 할 것이다. 이제 이는 바탕이 된 것이고, 여기서부터 연구를 시작해야 할 것.

최재서가 영문학의 에피고넨이라면, 김기림은 서구 근대 과학, 문명의 그것이다. 언제나 '과학'을 강조한다.

"새로운 세계의 구조에 있어서도 과학정신은 의연히 가장 정확한 지표일 것이고 또 과학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조언자일 것이다"

엘리티시즘의 최재서와 달리, 보편 과학을 추종하는 김기림. 천재보다는 민족의 힘을 강조한다.

"새로운 원리의 발견이거나 역사적 결산이거나 그것은 어떠한 개인의 머리에서 번뜩이는 천재적 환상만으로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개인의 창의가 아무리 뛰어났다 할지라도 한 민족의 체험으로써 결정되고 조직된 연후에 비로소 시대의 추진력이 될 수 있게 된 것이 '오늘'이라는 역사적 일순의 특이한 성격인 것같다."

그는 근대는 습득해야할 것이라고 전제한 후에도, 각기 문화는 보존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는 어떻게 해결가능한 모순인가? 근대는 문화 이전의 제도인가. 그가 말하는 문화란 무엇일까.

"한 민족의 문화는 늘 그 자신의 존엄과 독창성과 의욕을 가지는 것이고 따라서 거기로 통하는 길은 오직 사랑과 존경을 거쳐서만 뚫려진다. 한 민족이 세게에 향해서 실로 그 자신이 이해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문화를 버림으로써 얻어질 리는 만무하다. 보다도 전통 및 생리와 보편성과의 충격과 조화와 충격의 끊임없는 운동을 따라 그 자신의 문화를 더 확충하고 심화하고 진전시킴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근대'라는 것은 '보편성'이라는 것. 언제나 '후진'으로 표현하고 있는 조선의 문화는 그 보편성을 우선 획득한 후에, 자신의 존엄과 독창성을 올바로 발휘할 수 있다는 것. 임화와 상통할 수 있는 것.

1908년 동갑내기 비평가. 임화/최재서/김기림. 김기림은 임화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 보인다. 최재서는 김기림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 보인다. 물론 카프를 대타항으로 설정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김기림은 최재서를 의식했을까?

임화를 의식한 듯 보이는 발언 또 한가지. 김기림은 임화를 인정하고 있던 것 같다.

"어느 시기에 특히 문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문학사를 요망하는 기운이 움직인다고 하면 그것은 그 시기의 문학이 자신의 계보를 정돈함으로써 거기 연결한 전통을 찾아서 그 앞길의 방향을 바로 잡으려는 요구를 가지기 시작한 증거일 것이다. 이러한 조건이 어느 사이에 엄정하게 객관적이래야 할 문학사에 시대의 주관적 요구를 침투시킨다."
(1939. 10.) 

 감상에의 반역
시론에서 '시'에대한 정의를 굳이 피하겠다고 했지만, 그는 나름의 시에 대한 정의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논쟁의 중점이 되면 안 되겠기에 그는 이를 내세우지 않지만, 언뜻언뜻 이것이 나타난다.
"시란 가치의 형성이고 뿐만 아니라 그것은 좁은 개성의 울타리를 넘어서 한 시대의 보편적인 문화에 늘 다리를 걸쳐 놓고 있는 것이다. 한편의 당시나 고시조는 결코 이러한 것으로서는 우리의 감상을 받지 못한다."

따라서 '오늘의 시'에 당시나 고시조는 포함될 수 없다는 것. 김기림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오늘의 시'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언제나 새로운 시가 등장할 때면, 구시대의 시론을 가지고는 이를 시가 아니다라고 지적한다고 한다. 열린 생각이다. 그러나 논쟁에서는 교묘하게도 그는 조선의 시가 '과거'의 시라고 규정하고 만다. 당사자는 이것이 '오늘'의 시라고 하면 그만이지 않는가. 그리고 김기림의 논리대로 김기림의 시론은 그 폭이 너무 얕아서 자신의 시를 알지 못한다고 하면 그만...
물론 이를 방지하기 위해, 그는 '보편성'을 담지하고 있는 '근대'의 중심은 영국과 프랑스 시들의 조류를 끌어온다.

 

"시인은 시를 제작하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시인은 한개의 목적=가치의 창조로 향하여 활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의도된 가치가 시로서 나타나야 할 것이다. 이것은 소박한 표현주의적 방법에 대립하는 전연 별개의 시작상의 방법이다. 사람들은 흔히 그것을 주지적 태도라고 불러왔다."


"시인은 그의 독자의 '카메라 앵글'을 가져야 한다. 시인은 단순한 표현자 묘사자에 그치지 않고 한 창조자가 아니면 아니된다."


"시라고 하는 것은 결국 시인의 마음이 외부적 혹은 내부적 감성에 의하여 충격되었을 때의 그 마음의 비상성의 표현이다. 그것이 독자의 의식면에도 거진 같은 진폭을 가진 파문을 일으키는 것이다."


"시에 나타나는 현실은 단순한 현실의 단편은 아니다. 그것은 의미적인 현실이다. 그리고 그것(현실)이 전문명의 시간적 공간적 관계에서 굳세게 파악되어서 언어를 통하여 조직된 것이 시가 아니면 아니된다. 여기서 의미적 현실이라고 한 것은 현실의 본질적 부분을 가리켜 한 말이다. 그것은 현실의 한 단편이면서도 그것이 상관하는 현실 전부를 대표하는 부분이다."


리얼리즘적이다.


"시(제작이 필한 작품으로서)는 애매성과 감상성을 배제함으로써 명랑성에 도달할 수가 있다. 그것은 시인의 꾸준한 지적 활동에 의하여 얻을 수가 있는 일이다. 통제되고 계획된 질서 이외에 마저 정리되지 않은 부분이 남아 있으면 그 부분이 애매성을 가져온다. 또한 시를 감정에게 맡겨두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감정은 늘 혼돈하려고 하고 비만하려고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 감정의 비만이 다시 말하면 감상이다. 시를 이러한 비대증에서 건져내서 그것에게 '스파르타'인과 같은 건강한 육체를 부여하는 것이 오늘의 시인의 임무다."


명랑하고 지적이고 모랄이 있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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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또노미아 - 다중의 자율을 향한 네그리의 항해 아우또노미아총서 1
조정환 지음 / 갈무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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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전체로 볼 때 잉여노동은 노동하는 계급에게 자신들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노동하도록 강제하는 한편 과학, 예술 등의 생산을 위한 시간으로서의 가처분 시간을 창출한다. 이것은, 노동계급이 자기가치화의 계열을 직접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요컨대 노동 시간을 단축하고 자유시간을 늘릴 수 있는 조건을 조성한다.-85쪽

돌이켜보면, 나는 그런 가처분시간에 기생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가능성'을 현실태로 만드는 힘.

맑스는 분명히 잉여가치의 유통과 시장의 확대 과정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욕구체계의 증식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욕구의 다양성, 혼종성, 복잡성의 생산은 자본의 확대되는 유통과 더 많은 가치축적의 이면이며 자기가치화 계열의 발전이다. 이것이 유통의 확대과정에서 더욱 거대하게 증식하는 잉여가치화 계열의 한 계기로 배치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연과 노동에 새로운 사용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삶을 풍부하게 만드는 과정, 잉여가치화의 계열과는 전혀 이질적인 가치화의 계열임은 분명하다.-88쪽

라깡이 요구/욕구/욕망을 구분한 것을 따르자면, 여기서 맑스-네그리-조정환이 말하고 있는 '욕구'라는 것은 '욕망'에 가깝다. 나는 과연 이러한 욕망의 다양성, 혼종성, 복잡성이 '삶을 풍부하게 만드는 과정'일까 의심스럽다.
자본주의 체제에 있어 욕망의 '생산'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어준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욕망은/이 충족되면, 욕망은 충족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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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화의 놀이들
란다 사브리 지음, 이충민 옮김 / 새물결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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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이론은 문학 작품을 토대로 창작되어 진다는 자명한 사실을, 한국의 문학연구자들은 종종 잊고는 한다. 서구의 이론은 서구의 작품을 토대로,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이다. 쥬네트의 서사학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해명하기 위해 쓰여졌고, 바흐찐은 도스토예프스키를 해명하려 했다.

그럼에도 이러한 이론을 우리는 어느정도는 한국문학에 적용할 수 있다고 믿고, 이를 '보편적 이론'인양(물론 서구이론가들 또한 특수에서 '보편'으로의 지향을 하기는 한다.) 원용하여 한국문학을 난도질 한다. 어찌할 것인가. 이론이 있어야 작품을 읽지. 그리고 이론은 '서구'에서부터 내려져 오는 것.

물론 이는 한국문학 연구자들의 태도를 극단화하고 희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말로 우리에게 조동일 교수와 같은 국내 이론가들이 이제는 대거 등장할 때라고 생각한다. '학문'의 '탈식민화'를 위해 한발씩 나아가야 할 것이다.

서론이 길었지만, 이는 어쩌면 이 책의 주제에 부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 (즉 일종의 '여담'으로서의 서론: 이 서평은 이러한 '여담 정신'을 살려서 괄호 속에 여담을 종종 넣기로 한다. 저자가 '여담'을 해명하며 '여담'을 이론서 속에 적극적으로 넣은 것처럼!) 위 책은 '여담'이라는 18세기 즈음 서구 소설 속에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현상에 대한 해명이다. 이 책은 정말 '재미있다'. 그러나 재미있게 읽기 위해서는, 반드시 로렌스 스턴의 소설 <<트리스트럼 샌디>>와 함께 읽어야 한다. 다행이 이 책은 2001년에 홍경숙에 의해 문학과지성사에서 번역되었다.

사실상 이 책은 <<트리스트럼 샌디>>를 해명하기 위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트리스트럼 샌디>>는 여담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아니, 어떻게 '여담'으로 국역 800쪽에 이르는 장편 소설을 쓸 수 있었을까? 이 책을 집어 들고 읽어보면, 로렌스 스턴의 철저한 여담에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그는 절대로 스토리를 진행시키지 않는다. 소설 중의 화자인 트리스트럼 샌디가 이야기를 진행시키려고만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고, 갑자기 다른 생각이 발생하여 이야기는 '삼천포'로 빠진다. (삼천포 주민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어쨌든 이 '삼천포 문학'을 서구 문학사 위에 올려놓으면서 논의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서두에서 논한바처럼 서구 문학사 초창기에는 작품이 있고 이후에 이론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이것이 역전되면서 수사학자/비평가가 먼저 존재하고 근엄한 권위로서 작품을 압박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에 작가는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하고, 작품 안에서 비평가를 비판하기도 하고 여담을 행하기도 하며 종행무진 '텍스트'를 이용하여 자기 변명도 하고 하소연도 하고 공격도 하고 별 쑈를 다하게 된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 유명한 이어령-김수영의 순수-참여 논쟁 또한 김수영이 작품 외에서 이어령과 대결하는 게 아니었다. 생각해보라, 비평의 영역은 이어령의 영역이니, 김수영이 밀릴 수 밖에 없지 않는가. 김수영은 시 속에서 통렬하게 이어령을 씹었어야 한다! 시인들이여, 비평가와 비평으로 맞서지 말라. 씨름선수가 링 위에 올라서 복서와 글러브를 끼고 맞붙을 필요가 없다.)

그러한 과정을 술술 읽히는 문체로 유머와 여담를 버무려 쓴 저자는 물론 이를 읽기쉬운 한국어로 번역한 역자의 내공도 대단하다. 한국문학사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기묘한 현상인 '여담'. 이 '담화의 놀이들'과 함께 '트리스트럼 샌디'를 읽으면, '소설'이라는 유쾌하고도 기기묘묘한 잡동산이에 새로운 영역에 입장하게 될 것이다.

쫌 된 유행어이지만. 자, "여담의 세계로 빠져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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