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화의 놀이들
란다 사브리 지음, 이충민 옮김 / 새물결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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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이론은 문학 작품을 토대로 창작되어 진다는 자명한 사실을, 한국의 문학연구자들은 종종 잊고는 한다. 서구의 이론은 서구의 작품을 토대로,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쓰여진 것이다. 쥬네트의 서사학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해명하기 위해 쓰여졌고, 바흐찐은 도스토예프스키를 해명하려 했다.

그럼에도 이러한 이론을 우리는 어느정도는 한국문학에 적용할 수 있다고 믿고, 이를 '보편적 이론'인양(물론 서구이론가들 또한 특수에서 '보편'으로의 지향을 하기는 한다.) 원용하여 한국문학을 난도질 한다. 어찌할 것인가. 이론이 있어야 작품을 읽지. 그리고 이론은 '서구'에서부터 내려져 오는 것.

물론 이는 한국문학 연구자들의 태도를 극단화하고 희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말로 우리에게 조동일 교수와 같은 국내 이론가들이 이제는 대거 등장할 때라고 생각한다. '학문'의 '탈식민화'를 위해 한발씩 나아가야 할 것이다.

서론이 길었지만, 이는 어쩌면 이 책의 주제에 부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 (즉 일종의 '여담'으로서의 서론: 이 서평은 이러한 '여담 정신'을 살려서 괄호 속에 여담을 종종 넣기로 한다. 저자가 '여담'을 해명하며 '여담'을 이론서 속에 적극적으로 넣은 것처럼!) 위 책은 '여담'이라는 18세기 즈음 서구 소설 속에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현상에 대한 해명이다. 이 책은 정말 '재미있다'. 그러나 재미있게 읽기 위해서는, 반드시 로렌스 스턴의 소설 <<트리스트럼 샌디>>와 함께 읽어야 한다. 다행이 이 책은 2001년에 홍경숙에 의해 문학과지성사에서 번역되었다.

사실상 이 책은 <<트리스트럼 샌디>>를 해명하기 위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트리스트럼 샌디>>는 여담으로 이루어진 책이다. 아니, 어떻게 '여담'으로 국역 800쪽에 이르는 장편 소설을 쓸 수 있었을까? 이 책을 집어 들고 읽어보면, 로렌스 스턴의 철저한 여담에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그는 절대로 스토리를 진행시키지 않는다. 소설 중의 화자인 트리스트럼 샌디가 이야기를 진행시키려고만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고, 갑자기 다른 생각이 발생하여 이야기는 '삼천포'로 빠진다. (삼천포 주민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어쨌든 이 '삼천포 문학'을 서구 문학사 위에 올려놓으면서 논의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서두에서 논한바처럼 서구 문학사 초창기에는 작품이 있고 이후에 이론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이것이 역전되면서 수사학자/비평가가 먼저 존재하고 근엄한 권위로서 작품을 압박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에 작가는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하고, 작품 안에서 비평가를 비판하기도 하고 여담을 행하기도 하며 종행무진 '텍스트'를 이용하여 자기 변명도 하고 하소연도 하고 공격도 하고 별 쑈를 다하게 된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 유명한 이어령-김수영의 순수-참여 논쟁 또한 김수영이 작품 외에서 이어령과 대결하는 게 아니었다. 생각해보라, 비평의 영역은 이어령의 영역이니, 김수영이 밀릴 수 밖에 없지 않는가. 김수영은 시 속에서 통렬하게 이어령을 씹었어야 한다! 시인들이여, 비평가와 비평으로 맞서지 말라. 씨름선수가 링 위에 올라서 복서와 글러브를 끼고 맞붙을 필요가 없다.)

그러한 과정을 술술 읽히는 문체로 유머와 여담를 버무려 쓴 저자는 물론 이를 읽기쉬운 한국어로 번역한 역자의 내공도 대단하다. 한국문학사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기묘한 현상인 '여담'. 이 '담화의 놀이들'과 함께 '트리스트럼 샌디'를 읽으면, '소설'이라는 유쾌하고도 기기묘묘한 잡동산이에 새로운 영역에 입장하게 될 것이다.

쫌 된 유행어이지만. 자, "여담의 세계로 빠져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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