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예술과 책임

곁다리텍스트(paratext)로 가장 먼저 다룰 텍스트는 바흐친의 <말의 미학>(도서출판 길, 2006)의 서문 역할을 하고 있는 '예술과 책임'이다. 미하일 바흐친(1895-1975)이 1919년, 그러니까 24살 때 발표한 이 두 쪽짜리 텍스트는, 그러나 '최초의 공식 문건'이라는 바흐친 개인사적 의의 이상의 무게감을 갖고 있는 중요한 텍스트이다. 개인적으론 12년 전에 대학원에서 바흐친 강의를 들을 때 가장 먼저 읽은 텍스트이기도 하다(나는 그때 이미 바흐친보다 더 나이를 먹었었다!). 아래 사진은 1920년대의 청년 바흐친.

한데, 역자 해제에서 지적되고 있는 바대로, 책에 실린 대다수 논문들이 그렇기는 하지만, '예술과 책임'은 "출판을 염두에 두고 쓴 완성본(이라기)보다는 이후 출판을 위한 초고적인 성격의 글로서 완전히 전개되지 않은 미완성본 성격의 글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곁다리텍스트로 분류할 수 있지만, '예술과 책임'은 한편으론 바흐친의 이론적 작업 전체의 방향을 시사해주는 마니페스토적인 성격을 갖는다. 

이 텍스트의 그러한 의의는 '미적 활동에서의 작가와 주인공' 등을 발췌한 영역본의 제목이 <예술과 책임(Art and Answerability)>(1990)인 것에서도 간접적으로 시사받을 수 있다. 참고로 영역본의 서문을 쓴 저명한 바흐친 연구자 마이클 홀퀴스트는 바흐친의 이론적 세계를 아예 '책임의 건축학'이라고 규정짓고 있기도 하다. 바흐친의 기념비적인 저작 <도스토예프스키 시학의 제문제>는 이로부터 10년후인 1929년에 출간된다(개정판이 나오는 건 1963년이며 국역본은 이 개정판의 번역이다).  

참고로 이 텍스트는 <바흐찐의 소설미학>(열린책들, 1988)에 이미 한번 번역/소개된 바 있다. 하지만, 번역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한편 당시는 <장편소설과 민중언어>(창작과비평사, 1988), <마르크스주의와 언어철학>(한겨레, 1988) 등이 앞서거니뒤서거니 출간됨으로써 국내에 1차 바흐친 붐이 조성되던 때였다(이젠 바흐친 전집도 기획중이라고 하는데, 바야흐로 새로운 붐이 마련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청년 바흐친이 '예술과 책임'이란 글에서 주장하는 바는 무엇인가? 짧은 분량이므로 내용을 따라가보겠다. 첫 문단이다: "하나의 전체를 이루는 개개 요소들이 공간과 시간 속에서 단지 외적인 연결로만 결합되어 있을 뿐 의미의 내적 통일로 충만되어 있지 않을 경우, 그 전체를 기계적이라고 부른다. 그러한 전체의 부분들은 비록 나란히 놓여 있고, 또 서로 접촉하고 있다 하더라도 본질적으로는 서로 이질적이다."

바흐친이 첫 문단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은 외적인/기계적인 결합이다. 이 경우에 서로간에 접촉은 있다 하더라도 낯설고 이질적인 관계로 남게 된다. 현대사회에서의 이웃관계처럼 필요한 경우에 서로 아는 체는 하지만 서로간에 간섭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인간적인 교제는 대충 생략하는 것. 그게 외적인/기계적인 결합관계이다. 예술과 삶의 관계가 그러한 결합관계가 돼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인간 문화의 세 영역인 학문과 예술과 삶은 그것들을 자신의 통일성으로 결합하는 개성 속에서만 통일성을 얻는다. 그러나 이러한 결합은 기계적이고 외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일은 실제로 대단히 자주 일어난다. 예술가와 인간은 순진하게 또 대개는 기계적으로 하나의 개성 속에서 결합된다... 예술은 너무나 뻔뻔스럽고 자만에 빠져 있으며, 너무나 감상적이고, 당연히 그런 예술을 따라잡을 수 없는 삶에 대해 눈곱만큼도 책임지지 않는다. '그래, 우리에게 예술이 무슨 소용이야?' 하고 삶은 말한다. '그건 예술이란 것이고, 우리에게 있는 건 일상사의 산문이라구.'"

 

 

 

 

인상적인 구절은 "예술은 너무나 뻔뻔스럽고 자만에 빠져 있으며, 너무나 감상적이고, 당연히 그런 예술을 따라잡을 수 없는 삶에 대해 눈곱만큼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구절이다. 근대의 예술, 그러니까 예술의 자율성을 획득/확보한 시대의 예술은 너무나 잘난 예술이어서 더 이상 산문적이고 천박한 삶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한국 근대문학의 경우 '아티스트' 김동인의 문학/예술관이 이를 가장 잘 보여준다). 그것이 모더니즘 예술의 엘리트주의이며 '비인간화'(오르테가 이 가세트)이다. 이 고상한 것들은 삶을, 우리를 책임져주지 않는다. 엘레강스한 언니들처럼(사진은 <욕망의 모호한 대상>, <내겐 너무 이쁜 당신> 등의 영화에 출연한 프랑스의 여배우 겸 샤넬의 모델 캐롤 부케).

물론 근대 예술이 정치권력에의 종속으로부터 탈피해온 과정 자체는 진보적인 것이었지만, 삶의 요구로부터 멀어지면서 예술의 자율화는 자기 소외의 과정이 되어버린 것('랄랄라 하우스'는 그 궁극적 귀결이다. 오락은 삶을 책임지지 않는다). 문학의 자율성을 전제로 한 러시아 형식주의에 대해 바흐친이 비판의 포화를 늦추지 않는 것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이다. 삶과 예술의 분리, 기계적인 결합이 문제였던 것이다('기계로서의 예술'은 초기 형식주의자들의 모델이기도 했다).

그렇게 될 경우, "인간은 예술 속에 있을 때에는 삶 속에 있지 않고, 삶 속에 있을 때에는 예술 속에 있지 않다. 그것들 사이에는 어떤 통일성도 없으며, 개성의 통일성 속에서 내적으로 서로에게 속속들이 스며들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개성을 이루는 요소들의 내적 결합을 보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로지 책임의 통일이다. 내가 예술에서 체험하고 이해한 모든 것이 삶에서 무위로 남게 하지 않으려면 나는 그것들에 대해 나 자신의 삶으로써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책임은 죄과와도 결합되어 있다. 삶과 예술은 서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한 죄과도 떠맡아야 한다... 인격은 전적인 책임성을 가져야 한다. 개성의 모든 요소들은 그저 삶의 시간적 연속 속에서 나란히 배열되는 것을 넘어서, 죄과와 책임의 통일 속에서 서로에게 속속들이 스며들어야 한다." 

여기서 책임은 영역본에서 'responsibility' 대신에 쓰인 'answerability'가 잘 말해주듯이 '응답'하는 것이다. "너 어디에 있느냐?"는 물음과 호소에 알리바이를 대지 않고 응답하는 것, 출석하는 것, 그것이 책임이다. 삶과 예술은 서로 독립적이지만 우리의 인격 속에서 그러한 상호책임의 관계로 통합된다. 그 책임이 서로에 대한 죄과도 떠맡아야 한다는 바흐친의 주장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반향을 읽어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그는 오래지 않아 곧 최고의 도스토예프스키 연구서를 쓰게 될 것이다). 

더불어 레비나스(1906-1995)의 윤리적 주체도 상기시켜준다. 바흐친의 미학은 레비나스의 윤리학과 상통한다. 레비나스가 자기보존적으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는 맥락에서 바흐친은 예술의 자율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미 바흐친과 레비나스를 비교하는 논저들이 여럿 나와 있다). 삶과 예술은, 그리고 나와 타자는 서로에 대한 책임과 죄과를 떠안아야 한다(레비나스의 경우에는 1인칭 '나'가 절대적으로 더 많은 책임/죄과를 떠안아야 한다. 왜? 'first person'이니까).  

"무책임을 정당화하기 위해 '영감'에 의지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삶을 무시하고, 그 자신이 삶에서 무시당하는 영감은 영감이 아니라 사로잡힘이다. 예술과 삶의 상호관계, 순수예술... 등등에 대한 모든 오래된 문제들의 거짓이 아닌 진짜 의미, 그 물음들의 진정한 파토스는 그저 삶과 예술이 서로의 과제를 가볍게 해주고, 서로의 책임을 벗겨주려는 데 있을 뿐이다. 삶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고 창조하는 것이 더 쉽고, 예술을 염두에 두지 않고 사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전통적으로 '예술과 삶의 관계'나 '순수예술'에 관해 말해져온 것들은 모두 그러한 책임으로부터 '면피'하기 위한 간계들일 뿐이다. 분명, 삶을 책임지지 않는 예술이나 예술을 책임지지 않는 삶은 보다 편한 삶이고, 보다 쉬운 예술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안락한 삶'이다. '안락사'로의 여정만을 남겨놓은.

바흐친은 그러한 삶을 좀 불편하게 만들고자 한다. 이성복의 시구를 빌자면, "詩를 쓰고 쓰고 쓰고서도 남는 작부들, 물수건, 속쓰림..."에 대해서 시는, 예술은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책임의 통일성하에서라면 예술의 자기종결성은 가능하지 않다(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의 비종결성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하여, 결론: "예술과 삶은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내 안에서, 나의 책임의 통일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하긴 이러한 대사는 우리의 '어린왕자'도 말한 적이 있다: "… 내 꽃… 나는 꽃에 책임이 있어! 그리고 그 꽃은 너무 약해! 너무 순진해… 이 세계와 맞서 제 몸을 지킬 가시 네 개 뿐이야…" 그러한 책임을 방기할 때 잘난 예술은 기교가 되고 못난 삶은 일상이 된다. 삶은 예술을 경멸하고 예술은 삶을 혐오한다.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대답은 자명하다. 비록 그 대답에 책임을 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06. 04. 29.

P.S. 이 텍스트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 두 가지를 덧붙인다. 첫째는 본문에서 예술과 삶의 결합 방식이 두 가지만 언급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세 가지를 읽어내야 한다는 것. 즉, (1)삶과 예술의 외적/기계적 결합, (2)삶과 예술의 내적 결합(이념에 의한 통일), (3)삶과 예술의 내적 결합(책임에 의한 통일). 이 세가지 입장을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1)형식주의 (2)맑스주의 (3)대화주의가 된다(이 대화주의를 미학적으로만 독해하는 것은 오류이다. 그것은 미학이면서 윤리학이다). 여기서 두번째 결합방식은 소비에트 시기의 공식 이데올로기로서 문학/예술에 가해진 요구였다(그것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귀결된다). 바흐친은 이 두번째 방식/경향에 대해서도 동의하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이지만, 바흐친-도스토예프스키는 내내 소비에트의 '비주류'였다.

그리고 둘째는 인간 문화의 세 영역 가운데, 바흐친이 이 글에서는 다루지 않고 있는 '학문과 삶의 관계'이다. 이 또한 마찬가지이다. 다시 반복하자면, "학문과 삶은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내 안에서, 나의 책임의 통일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건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삶과 학문이 서로에 대한 죄과와 책임을 떠맡지 않는다면 그건 각각 허접한 삶이고 빈곤한 학문이다('직업으로서의 학문'이 전부가 아니다). 비록 얼굴에 기름기 흐르는 삶이고 돈벼락에 허우적거리는 학문이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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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이다. 다소 작위적이고 말이 안되는 부분들이 있다. 솔직히 '나비효과'라면 아이작 아시모프의 단편 중 타임머신 타고 공룡을 사냥하는 이야기가 훨씬 잘 짜야져 있다. 공룡을 한 마리 죽이면, 인류가 태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그런것이 나비효과이다.

 

 

 


스토리를 짜마추다보면 어설픔이 느껴진다. '감독판'이 그래서 있는 것일 터. 여러 암시들이 부합하려면 '감독판'을 보아야만 한다. 그러나 '감독판'에도 해결하지 못한 것, 진정한 '나비효과'까지는 턱없이 못미친다는 것.


그럼에도 이 영화가 충격적인 것은. 나는 '지금-현재'를 살고 있고, 절대로 지금과 다른 '지금-현재'를 살 수 없다는 것.


신림역에서 영화를 보았다. '신림역 사람들'이라는 냄새를 '압구정역 사람'인 나는 갖을 수 없다... 그런 것이 두려웠다. 내가 '너'가 될 수 없다는 것. 또. 나는 내가 쌓아간 하루하루를 통해, 나는 내일의 내가 될 것이라는 것. 지금의 내모습에 나는 책임을 져야 된다는 것.


나는 지금 내가 부끄럽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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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 바둑왕 23 - 완결
홋타 유미 글, 오바타 타케시 그림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3년 10월
평점 :
절판


머나먼 과거와...
머나먼 미래를 잇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서 존재한다! 난!!
우리는...
모두는...

이러한 대사로 "고스트 바둑왕"은 23권으로 끝을 맺는다. 누구나들 일본만화의 '저력'을 이야기한다. 미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갤러리 페이크>>, 고고학과 특수부대와 같이 마니아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는 <<마스터 키튼>>, 철학적인 깊이에 빠져드는 <<공각기동대>>, <<에반게리온>> 등.

바둑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 "고스트 바둑왕" 또한 마찬가지이다. 읽으면서 내내 내 안의 '민족주의적 주체' 때문에 거슬리는 부분은 분명있었다. 바둑하면 한국이 제일 아닌가, 그리고 이창호 9단이야말로 세계제일 아닌가. 라는 생각 때문. 그러나 만화에서는 역시 일본 최강이 세계 최강으로 그려진다. 시리즈의 말미에 가면 조금 다르게 그려지기도 하지만.

언제나 '민족주의'의 폐쇄성과 폭력성에 대해서 비판을 하고 있었던 나지만, 이는 이성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역시 감성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이었다.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어떠한 계기 때마다 나는 호명된다. 이는 국가 대항전 스포츠 등과 같이 '우리' 대 '타자'의 관계맺음 때 발생한다.

사실 나는 바둑에 별반 관심이 없다. 1여년전까지 이창호 9단이 세계최강인 것은 알았지만, 요즘은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만화를 보면서 불편해 했다. 바둑에서 한국이 최강이든, 일본이 최강이든 전혀 나와는 상관이 없지만, 나는 상관이 있는 것으로서 받아들인다. 이는 내가 이 만화를 보면서 민족주의적 주체로 호명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일본 만화의 저력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마지막에 가서이다. 물론 이는 이 '고스트 바둑왕'이 중국, 홍콩, 그리고 한국에서도 인기리에 연재되고 있다는 것을 작가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고 할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국가나 민족 따위는 초월해서 작가는 '우리'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한다. 일본이라는 작은 '우리'이자 다른이들을 배제하고서 얻어지는 정체성이 아니라, '인류'라는 '우리'에 대해서.

머나먼 과거와...
머나먼 미래를 잇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서 존재한다! 난!!
우리는...
모두는...

이러한 추상적인 대사가 감동적일 수 있었던 것은, 이 만화의 초기 설정 때문이다. 처음에 바둑에 관심이 없었던 평범한 초등학생인 히카리가 바둑을 두게 된 것은 1000년 전 최강의 바둑기사의 영혼이 그에게 빙의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빙의'라고 하면 엑소시스트 같은 것이 생각나서 빙의되기 전 인간을 조종하고 그런 것 같지만, 여기서 '빙의'는 그냥 히카리의 눈에 귀신이 보이고 귀신이 히카리를 항상 따라다닌다는 것 정도이다. (이렇게 보면 작가의 최신 인기작인 <<데스노트>>의 설정과 닮은 것이 있다.) 이러한 영혼(sai)의 인도 하에 히카리는 바둑에 점점 흥미를 느끼게 되고, 어느날 sai는 사라지고 만다.

이 sai가 사라진 것은 히카리가 이제 자립할 수 있고, 자신의 바둑을 추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히카리나 다른 바둑기사들은 '신의 한 수'를 먼 과거부터 추구해온 사람들이다. 물론 '신의 한 수'는 절대로 인간이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바둑 기사들은 오늘도 이를 추구한다.

머나먼 과거에서부터, 머나먼 미래의 한 점으로서 끝까지 '완벽'을 향해 나아가는 것, 이를 바둑기사의 나아가 '온 인류'의 삶의 의미라고 하고 있다.  이러한 인생론은 바둑을 매개로 표현된다.

 아니 이는 바둑을 통해 인생을 바라본 결과 나오게 된 결론일지도 모르겠다. 만화 상에서 바둑은 끊임없이 과거의 기보를 연구하고 새롭게 강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이들로 나타난다. 어떻게 하면 '신의 한 수'에 이를 수 있을까, 하고 1000년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먼 미래에까지 바둑 기사들은 고민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소위 '바둑 인생론'이 도출 되는 것이다.  머나먼 과거와 머나먼 미래를 잇기 위해서 존재하는 '나'로서 말이다.

물론 이러한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류의 역사와 한 개인의 유한한 삶에 대해서 하나의 철학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는 나름의 감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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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양식과 담론의 근대성
권영민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1999년 9월
평점 :
품절


권영민 선생님의 저서에 대해서는 아래 좋은 서평이 있음으로, 여기서는 이 책의 말미에 부록으로 실린 <신진사문답기>에 대해서 몇자 적어보려고 한다.

작자 미상인 이 '문답기'는 대화라는 형식으로 '개화'의 가치를 추구하고 이를 통해 계몽을 하고 있다. 물론 이는 이광수의 <<무정>>에도 이어져 내려오는 것.

이 '문답기'는 문답기답게 순전히 대화만으로 이루어져있다. '신진사문답기'라는 제목에서도 나타나듯이 계몽된 신진사에게 계몽되지 않은 사람들이 질문을 하고 그가 대답을 하는 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연히 수평적 대화 관계가 아니라 '계몽하는' 일방향적 대화이다. 대화를 살펴보면 신진사는 질문하는 이를 비난하는 내용도 꽤나 있다.

지금 시점에서 살펴보면 오히려 질문을 하는 이진사의 날카로움이 느껴지고 신진사의 궤변이 못내 꺼름칙하다. 파시즘의 논리는 이 때에도 잠복하고 있던 것. 논설과 소설이 분화되지 않았던 시기, 일본 파시즘의 선전꾼의 모습, 계몽이라는 이름의 폭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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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쌍한 사랑 기계 문학과지성 시인선 199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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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한 아침 속으로 들어서면 언제나 들리는 것 같은 비명. 너무 커서 우리 귀에는 들리지 않는. 어젯밤의 어둠이 내지르는 비명. 오늘 아침 허공중에 느닷없이 희디흰 비명이 아 아 아 아 흩뿌려지다가 거두어졌다. 사람들은 알까? 한밤중 불을 탁 켜면 그 밤의 어둠이 얼마나 아파하는지를. 나는 밤이 와도 불도 못 켜겠네. 첫눈 내린 날, 내시경 찍고 왔다. 그 다음 아무에게나 물어보았다. 너 내장 속에 불켜본 적 있니? 한없이 질량이 나가는 어둠, 이것이 나의 본질이었나? 내 어둠 속에 불이 켜졌을 때, 나는 마치 앞핀에 꽂힌 풍뎅이처럼, 주둥이에 검은 줄을 물고 붕 붕 붕 붕 고개를 내흔들었다. 단숨에 나는 파충류를 거쳐 빛에 맞아 뒤집어진 풍뎅이로 역진화해나갔다. 나의 존엄성은 검은 내부, 바로 이 어둠 속에 숨어 있었나? 불을 탁 켜자 나의 지하 감옥, 그 속의 내 사랑하는 흑인이 벌벌 떨었다. 이 밤, 창밖에서 들어오는 헤드라이트 불빛에 내 방의 상한 벽들이 부르르 떨고, 수만 개의 아픈 빛살이 웅크린 검은 얼굴의 나를 들쑤시네. 첫눈 내린 날, 어디로 가버렸는지 흰 눈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창밖으로 불 밝힌 집들. 밤은 저 빛이 얼마나 아플까. -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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