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라토르 : 비밀의 역사 -상
마크 헤드슬 지음, 정영목 옮김 / 까치 / 1998년 7월
평점 :
절판


예전에 어떤 무신론자에게 한 기독교신자가 했던 말을 들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신이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거야? 넌 정말 기적을 믿어?''주위를 둘러봐. 너를 봐. 이것 모두가 기적이야.'

세상은 신비롭다. 과학이 저 광대한 우주에서 보이지도 않는 소립자의 세계 까지를 탐구한다고 하더라도. 어디에나 그 저변에는 이성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이 놓여져 있다. 다시 말해 신비로운 것들이.

신비주의는 세상을 보는 또 다른 방법이다. 그리고 그 세상은 매우 매력적이다. 겹겹이 쌓여 있는 상징들로 감싸여 진 진리들을 공부와 명상으로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는 잘 모르겠다.) 탐구해 나가는 이야기가 바로 이 책의 내용이다. 이 책은 한 신비주의의 스승이 풀어내는 이야기이다. 매력적인 그림들과 사진들과 그보다 더 기발한 그에 대한 설명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무릎을 칠 만큼 기묘하게 풀어놓은 상징의 의미들에 찬탄을 금할 수 없다. (진부하지 않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진부한 표현을 쓴다는 것은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가. ^^) 물론 나에게는 아직 움베르토 에코가 수비학을 풍자한 내용이 머리 속에 깊이 박혀 있기 때문에 약간은 냉소적으로 그러한 상징들을 볼 때도 있지만. 그러한 상징들을 해독해 내는 그 과정 자체의 깊이와 기발함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일종의 여행이고 일상 파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행은 색다를 수록, 일상 파괴는 일상과 거리가 멀 수록 성공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매우 성공적이다. 기존에 내가 읽어 온 세상과 전혀 다르게 세상을 읽어 온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흥미롭다. 아니 흥미롭다라는 말의 한계를 느낀다. 일종의 다시 태어남과도 같지 않을까. 환생. 나에게 전혀 몰랐던 세상을 제시해 주니. 바로 이것이 바로 간접적인 환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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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06-03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2년도인가 알라딘에 올린 글인데, 그 때와 시스템이 달라져서인지, 퍼오게 되었다. ^^;;
 

오늘은 갑자기 네 생각이 든다. 어제 네 꿈을 꾸웠기 때문이다. 내 꿈 속에서 너는 너 혼자이기 보다는 내가 사랑했던 다른 이와 너가 합해진 듯, 혹은 일순간에는 너였다가 다른 순간에는 그녀이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꿈에서 깨었을 때는 네가 떠올랐다.
너를 보고 너와 이야기를 나눈지도 꽤 되었다. 이제는 사랑이 아니라고 굳게 믿었고 또 그러하였는 데, 하룻밤에 꿈에 또 너에 대해 이런 간절한 마음이 생길 수 있다니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교묘하다.
어제 꿈에서
홀연히 네가 나와서
옛날에 내가 너를 사랑하던 때가
생각나더라.
그래서 편지를 써 볼까
전화를 걸어 볼까 하다가
그저 이렇게 시라는 변명으로
다시 고백해 본다.
어쩌면 내 너를 사랑하는 이라고 여겼던 까닭은
네 밝게 웃는 모습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모든 것이 환했던 봄빛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사실,
우연히 내가 그 벚꽃 떨어지던 날-
네가 미소를 짓고
그 찰나에 벚꽃이 네 인중에 머물다가 한숨처럼 흘러가 버린 그 때에-
네 앞에 내가 있었고
너의 미소에서 내 가슴으로
무언가 아득한 것이 옮아왔던 날 부터
나는 너를,
나의 사랑하는 사람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그 때의 그 벚꽃과 미소의 반짝임은
내 마음을 보금자리로 삼아
이렇게 꿈에서라도
나에게 상기시켜 주어
내 다시 너에게 고백하게 만드는 것인가 보다.
 
 
 
다시 대학교 2학년 때의 글을 꺼내 보다. 그녀가 미소를 짓고, 그 찰나에 벗꽃이 그녀의 인중에 머물다가 한숨처럼 흘러가 버린 그 때, 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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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almas > 황라열씨 보도…언론은 '벌떼'인가

 

황라열씨 보도…언론은 '벌떼'인가

[기고] 정영찬·서울대 인터넷뉴스 스누나우 편집장

2006년 06월 01일 (목) 23:10:55 정영찬·스누나우 편집장

'벌떼 같다.' 창공을 가르는 벌떼를 본 적이 있는가. 벌떼는 꿀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날아가 꿀을 찾아온다. 또한 그들은 동족의 신호를 전혀 '의심'하지 않고 꿀이 있는 장소로 달려든다. 서울대 2006년(49대) 총학생회장 황라열 씨에 대한 기성 언론의 태도는 마치 벌떼와 같아서, 꿀이 있는 곳이라면 사정없이 날아들었다. 게다가 그들은 꿀이 있는지 없는지 의심조차 하지 않은 채 그 꿀(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사정없이 빨아댄다.

총학생회장 당선 때부터 시작된 언론의 집중 보도

   
  ▲ 황라열 서울대 총학생회장 ⓒ노컷뉴스  
 
'먹을 것 앞에서 참기 힘들다'는 생리적인 점까지 곤충과 닮았는지에 대해선 모르겠지만, 총학생회장 당선이 확정된 지난 4월13일 오전부터, 조선일보와 MBC를 비롯한 기성 언론들은 '이색 경력 총학생회장'을 주 기사거리로 보도했다. 문화일보는 4월13일자 기사에서 "황라열 씨의 이력서는 말 그대로 자리가 모자랄 지경"이라며 황 씨의 화려한 경력을 강조했고, 같은 날 경향신문은 "마치 한편의 인생역전 드라마를 연상케 하는 다양한 이력을 가진 늦깎이 대학생이 서울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됐다"며 흐름에 따랐다.

중요 이슈에 집중하는 언론의 태도는 비판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중요 이슈'였는가에 대한 사유가 없었다는 점이 문제다. 또한 '다양한 이력'과 '서울대 총학생회장'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경력 중심의 보도는 '사실 확인'이 뒷받침되지 않은 '선정적 보도'였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가 되고 있다. 최근 황 씨의 경력의 일부가 '허위 또는 조작’이었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사실 확인 미비로 빚어진 '한총련 탈퇴' 보도 소동

벌떼 언론의 행태는 여기서 끊이지 않았다. 황 씨가 한총련 탈퇴 기자회견을 했을 당시, 기자회견장엔 30여명이 넘는 기자로 붐볐다. 의심 없는 벌떼와 같이, '그들'은 황 씨의 말을 받아 적고 그 말을 그대로 보도했다. 마치 '서울대 전체'가 황 씨의 의견에 동조라도 하는 듯 '굿바이 투쟁의 시대(조선일보 5월10일)'라는 자극적 표제를 쓰거나, "사상으로 뭉친 소수의 집단이 이끄는 학생운동은 저물고 있다(국민일보 5월10일)"라는 교수의 말을 통해 '이제 서울대에 운동은 없다'란 주장을 폈다. 하지만 '그 때'는 평택 미군기지 문제로 인해 연행된 50여명의 서울대 학생들이 풀려난 직후였다.

편향된 시각을 통해 거시적 논점이 결여된 채 양산된 당시 기사들은 서울대 총학생회와 한총련의 관계에 대한 과거사적 서술이 없다는, 그 내용적 공통점에서 맥락을 완전히 일탈하고 있다. '용기있는 서울대의 한총련 결별(세계일보 5월11일)'과 "이번 선언은 학생 자치활동 역사에서 구시대의 종언(終焉)과 새 시대의 개막을 동시에 보여 주고 있다(동아일보 5월11일)" 식의 보도는 학생들조차 당황하게 만들었다. 한총련과 서울대 총학생회의 관계가 소원했던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관계없는 단체를 탈퇴했다는 점에서 이는 마치 열린우리당 의원이 한나라당을 탈퇴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이와 같은 문제가 생긴 것은 80년~90년대 초반과 다르게 현재는 한총련(전신 포함)이 학생운동의 주류에서  밀려나있고, 학생운동이 총학생회와 별개로 진행되는 측면이 있다는 '현장 변화'에 대한 취재가 미숙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서울신문은 이에 대해 "한총련과 서울대 총학생회는 1998년 이후 사실상 단절된 사이, 의미 없는 것을 갖고 서울대 총학생회가 언론플레이를 하고 있다(5월12일)"는 한총련 측의 입장을 전했다.

반성없는 기성 언론…허위 경력 파문에도 '맹신' 또는 '외면'

언론의 집중이 벌떼와 같은 무작정 '집착'이었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난 것은 근래의 황 씨의 '허위 경력' 파문을 통해서다. 당선 직후, 황 씨의 화려한 경력을 보도했던 수많은 언론들은 말 그대로 '뒷통수'를 맞은 꼴이 된 것이다. 황 씨의 '고대 입학'과 한겨레21 수습기자 경력이 사실무근으로 밝혀지면서 그들은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됐다. 팩트 중심의 기사'란 가장 기본적 보도 윤리가 무시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기성 언론은 '반성'이 아닌 '맹신'과 '외면'의 한길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황 씨의 경력 조작이 밝혀진 후 일부 언론은 "그는 '고려대 의예과에는 특차로 합격했지만 등록금이 없어 등록을 포기했던 것이 본의와 다르게 입학한 것으로 잘못 알려졌다'고 말했다. 또 '한겨레21의 기고문 요청에 응한 사실이 다른 잡지사 수습기자 경력과 묶여서 표현되는 과정에서 수습기자인 것으로 잘못 전달됐다'고 덧붙였다(경향신문 5월27일)"는 식의 보도를 통해 이러한 발언을 '그대로 믿는' 태도를 보였다.

실수란 성공을 위한 어머니가 아니라, 또 다른 실수를 위한 도약인가. 왜, 황 씨의 해명에 대해선 사실 확인의 노력이 없는가. 또한 스누나우에서 '대마초 판매 경력' 관련 보도를 한 것에 대해 황 씨가 해명하자, 그에 대해서도 "코믹해 보이는 게 우려되지만 나프탈렌, 소위 말하는 좀약을 판 것이라고고 해명했다(세계일보 5월29일)"는 보도를 통해 황 씨를 맹신하는 태도를 보였다. 한총련 탈퇴 선언 당시 선정적 제목을 통해 보도했던 조선일보 등은 이번 경력 조작 사태를 보도하지 않는 '외면'의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황 씨의 말이 '거짓일 수도 있다'라는 반성적 보도 태도는 언제쯤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집중이 집착이 되고 그것이 맹신이 되면 그것은 이미 '기사'가 아니다. 그것은 팬레터일 뿐이다. 기성 언론의 올바른 보도 행태를 촉구한다.


정영찬 / 서울대 인터넷뉴스 '스누나우'(www.snunow.com)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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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는 이렇게 쪄버렸다. 저 턱살.....

현실을 직시해야지. 동기들과 함께 찍은 사진. 봄에 찍은 거니까, 이때보다는 빠졌다고 믿고 싶다;;;;

오늘은 운동을 하다가 어깨가 이상해서, 운동 또 1주일 쉬려고 한다 -_-;;;; 일주일 쉬고 났을 때 몸무게가 어디까지 갈지, 암담하다.

어깨 근육통은 아닌 것 같은데, 힘을 주려고 하면 조금 아프다. 이럴때는, '적극적 휴식'이야말로 해결책. 내일은 하루종일 방에서 <<제국>>이나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야지. ;)

 

그리고 또 다른 의미에서 현실을 직시하자. 비록 민주노동당이 직접 투표에서는 기초의원 2곳 밖에 획득을 못했지만, 또 비례대표도 기다려 봐야 아는 것이지만. 원래 현재의 정치 현실이란 그런 것이었다. 괜히, 투표를 하고 난 이후에 이상한 착각이나 흥분 같은 것을 하고 있었던 셈.

현실을 직시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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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01 2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인 2006-06-01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ㅎㅎ 성을 들으면 다 알겠습니다. 안타깝게도; 모두 저와 잘 아는 사이는 아니네요 ^^; 다만 최PD 형님의 작품은 정말 기대됩니다. 정말 독특한 세계를 지닌 분이라는 것만 기억하고 있고, 풍문에 들었습니다. ㅎㅎ

기인 2006-06-01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리고 오뎅탕에 정종 좋지요 :)
 

정치적 열광과 정치적 무관심
박슬기(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대학신문 snupress@snu.ac.kr

 

며칠 전, 지하철을 기다리며 역내 벤치에 앉아 있었다. 아주머니 두 분께서 한참 대화에 열을 올리고 계셨다. 엿들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지만, 워낙에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누셔서 어쩔 수 없이 내용을 듣게 되었다. 두 분 다 행상이신 듯 물건 판매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서울 시장 선거로 화제를 돌렸다.

“당연히, 오세훈 찍어야지. 마스크도 깨끗하고.”

“뭐, 그렇지. 여자가 시장이 될 수야 있나.”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새삼스러운 경우는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놀라운 일이다. 민주노동당이 국회에 입성한 지도 꽤 되었건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계급적 이해와는 정반대의 정치적 지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은 자신의 계급적 이해는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한나라당 지지율이 민주노동당 지지율보다 높겠는가. 비정규직 문제를 비롯하여, 고용의 불안정성 등 ‘일하는 사람들’이 위협받는 문제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지만,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그것보다 국가나 민족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육아를 사회가 책임지는 문제는 도외시하면서 저출산율 때문에 곧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호들갑을 떠는 것처럼. 혹은 어느 집단에서 파업을 하면 나라 전체 경제의 손해로 이어진다고 여긴다든지.

글을 아는 사람이긴 하지만, 경제학이나 사회학 전공이 아닌 나로서는 그런 걱정에 정말로 근거가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것은 다만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강남에 땅 한 평 없으면서, 나라에서 세금을 부당하게 매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여성이긴 하지만 그래도 ‘시장은 남자가라고 생각하는 그 아주머니들도 분명 그러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에게는 계급적 이해에 선행하는 무엇인가가 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아마도 개인을 넘어서는 숭고한 가치에로의 지향이 아닐까. 나 개인은 비록 비루하지만, 내가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나의 국가나 단체는 위대하다는 신념, 그러므로 나 역시 위대할 수 있다는 오래된 이상이 아직도 그 위세를 떨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울대 앞을 떠나지 않는 황우석 지지자들을 보면서 무엇이 저들을 저토록 헌신하게 하는지 궁금했다. 그들이 좀 극단적이긴 하지만 내가 만난 아주머니들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문제를 완전히 배제하고 선거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의 현실적 문제나 이해를 배제해버리고, 정치나 국가의 문제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정치나 국가의 문제를 추상화시킨다는 점을 의미한다.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의 현실을 직시하고,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뛰어들 용기가 없는지도 모른다. 아니,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만큼의 자유를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나의 텅 빈 내면을 채워줄 이상과 권위를 찾아 복종하지 않으면 불안한.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 열광과 정치적 무관심은 동일한 현상일 것이다.

 

나의 대학원 생활를 풍족하게 해주었던, 혹은 대학원 '생활' 자체를 가능하게 해 준 두명의 선배가 있다. 좌슬기 우민애라고 지칭하는데, 그 중 한 명이 쓴 글. 짧고 포인트 있게 글을 잘 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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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01 0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