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조세희 지음 / 이성과힘 / 2000년 7월
구판절판


폭력이란 무엇인가? 총탄이나 경찰 곤봉이나 주먹만이 폭력이 아니다. 우리의 도시 한 귀퉁이에서 젖먹이 아이들이 굶주리는 것을 내버려두는 것도 폭력이다. /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이 없는 나라는 재난의 나라이다. 누가 감히 폭력에 의해 질서를 세우려는가? / 십칠세기 스웨덴의 수상이었던 악셀 옥센스티르나는 자기 아들에게 말했다. "얘야, 세계가 얼마나 지혜롭지 않게 통치되고 있는지 아느냐?" 사태는 옥센스티르나의 시대 이래 별로 개선되지 않았다. / 지도자가 넉넉한 생활을 하게 되면 인간의 고통을 잊어버리게 된다. 따라서 그들의 희생이라는 말은 전혀 위선으로 변한다. 나는 과거의 착취와 야만이 오히려 정직하였다고 생각한다. / 햄릿을 읽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교육받은) 사람들이 이웃집에서 받고 있는 인간적 절망에 대해 눈물짓는 능력은 마비당하고, 또 상실당한 것은 아닐까? / 세대와 세기가 우리에게는 쓸모도 없이 지나갔다. 세계로부터 고립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세계에 무엇 하나 주지 못했고, 가르치지도 못했다. 우리는 인류의 사상에 아무것도 첨가하지 못했고…… 남의 사상으로부터는 오직 기만적인 겉껍질과 쓸모 없는 가장자리 장식만을 취했을 뿐이다. / 지배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할 일을 준다는 것,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문명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는 일, 그들이 목적 없이 공허하고 황량한 삶의 주위를 방황하지 않게 할 어떤 일을 준다는 것이다.-2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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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전복
페터 비트머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0년 3월
구판절판


"나무"라는 독일어 단어 "Baum"은 불어에서 "arbre"라고 할 때와 영어에서 "tree"라고 할 때 각각 다른 표상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차이는 기표적 질료의 상이함과 그것이 가지는 다른 기표와의 유사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위의 세 경우에서 단어가 지칭하는 대상은 같다. 다만 기표가 불러일으키는 표상이 다를 뿐이다. 기표는 사물 자체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체계에 속한다. 이것을 우리는 여러 의미를 지닌 단어에서 볼 수 있다. 예컨대 독일어에서의 "나무"는 생명나무, 계보, 배의 돛대, 논리학에서의 수형도 등 다양한 의미로 쓰인다. 우리는 그것이 이 중 어느 나무를 의미하는지를 문맥 속에서만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다음과 같은 사실이 또한 덧붙여진다. 즉 모든 말은 겉으로 명백히 표현되어 있지 않더라도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라는 연관성을 내포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화자 및 청자와의 연관성이 대화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며 의미는 또한 상징계 속에 뿌리박고자 노력하는 주체를 끊임없이 암시한다.
-64~65쪽

'의미 부여'를 통해서 (기표와 기의 분리가-기인) 분리는 극복된다. '의미'는 마치 기표와 기의가 원래부터 하나인 듯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거기에는 '의미'를 빗겨가는 잔여(Rest)가 항상 있다. 이러한 불안전한 대응 때문에 기의가 기표 밑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이것은 '의미'가 결코 다할 수 없다는, 즉 결코 완전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낳게 한다. 그렇기 대문에 하나의 말, 하나의 글은 영원히 완성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원초적 결핍을 볼 수 있다. 어떠한 사랑도, 어떠한 현존도 절대로 와녁할 수 없다는 경험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결핍'을 느낀다. 충족되지 못하는 잔여가 항상 남아 있다. 이 잔여가 욕망의 '장소'라고 불리는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상징계가 욕망을 구조짓는다는 것이 입증된다. 그것은 영원히 만족될 수 없다. 어떤 대상도 그에게 완벽히 사응할 수 없다. 결핍은 소유와 존재의 두 가지 차원으로 나타난다. 패러독스하게도 존재의 결핍은 '소유가 너무 적음'을 통해서 나타난다. 주체는 자기가 어떤 완벽한 대상을 가지게 되면 이런 결핍이 사라지리라고 믿는다. 이와 반대로 소유의 결칩은 완벽한 존재를 추구하는 욕망 속에서 나타난다. 주체는 이것에 도달하기만 하면 더 이상 부족한 것이 없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많은 부분을 명확히 해주는 대목. 특히 번역의 '불가능성' 대목이 마음에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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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이매지 > 베니건스의 BEST4 메뉴를 4,000원에 즐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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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06-11 0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규형~ 이거 사됴!!! ㅋㅋㅋ
 
삼류무사 14 - 완결
김석진 지음 / 청어람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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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험이 끝나면, 무협지와 만화책을 싸들고 와서 읽는다. 내 경험에 의하면, 보통 무협지를 10권 읽으면 하루가 간다. 말 그대로 24시간 읽는 것이다. 시험이 끝나고 오후5시나 6시쯤 10권을 빌려서 싸들고 방에 가서 1권부터 읽기 시작해서, 재미가 있으면 그대로 읽는 것이다. 중간중간 밥을 먹을 때도 읽고 화장실에서도 읽고, 정말 거의 손에서 책을 떼지 않고 읽어서 꼬박 그 다음날 오후 5시나 6시가 되면 10권으로 된 시리즈를 다 읽게 된다.

이렇게 읽은 무협지들은 정말 재미있는 무협지들이다. 김용의 영웅문을 비롯하여, 좌백의 작품들. 더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런데 요즘은 핸드폰으로 무협지를 다운로드 해서 읽을 수 있다. 그러면 막간의 시간을 이용해서 읽게 된다. 버스에 탔을 때나, 화장실에서.. 무협지는 조금씩 읽어도 별반 해가 되지 않기 때문.


나는 무협지를 왜 읽는 것일까... 영웅 주인공이 세상에 구애됨이 없이, 여행을 떠나고 악을 소통하고 낭만적인 사랑을 하며 사람들에게 칭송받기 때문? 드라마 속에 나온 신데렐라를 보며 대리충족을 하는 여성들과 마찬가지의 매커니즘이 아닐까. 특히 시험이라는 현실을 통과하면서 받게 되는 스트레스를 이런 식으로 풀어나가는 것.


삼류무사는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다. 그러나, 요즘 대량 생산되고 있는 고등학생 또는 대학생이 마구 갈겨쓴 환무협(환타지와 무협의 넘나들기 짬뽕)처럼 유치하지는 않다. 그렇다고, 흡입력이 강하지도 않고, 주인공에 감정이입이 잘 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럼에도 끝끝내 다 읽어냈다. 중간에 그만둘까, 그만둘까 하다가, 관성에 의해서 다 읽어버리고 마는 그런 책.

 

급작스러운 마무리 또한 실망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또 우울한 어떤 날에 무협지를 10권씩 쌓아놓고 읽고 있을 것이다. (*황지우가 갑자기 생각나는 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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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
성석제 지음, 김경호 그림 / 창비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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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만큼, 우리의 일상 속에 끈질기게 이어져 내려오는 것도 없다. 우리의 ‘의ㆍ식ㆍ주’중 ‘의’와 ‘주’는 이미 서구화-근대화 된지 오래이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오래 이어져 내려오는 것은 우리의 음식이다. 요즘 아이들이 김치를 잘 먹지 않는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보도되기도 하지만, 아직도 ‘살아있는’ 전통과 문화로서, 우리의 일상으로서, 우리의 음식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음과 같은 작가의 말은 이 책 <<소풍>>에서 이러한 음식을 통해 사람살이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려 했음을 밝힌다.


책에 든 글들은 대체로 음식에 관한 것이지만 음식만 이야기하려 한 것은 아니다. 음식을 통해서 새삼 깨닫게 되는 사람과 세상에 관해 썼다. 소풍 가서 나무 그늘에 둘러앉아 도시락을 먹고(食) 샘물을 마시는(飮)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낌(感)이 움직이는(動) 것을 공유하고 싶었다. 음식을 먹는 것이 소풍이라면 음식이야기 역시 소풍이며, 무릇 이야기란 또한 우리 삶의 소풍과 같은 것이다. (...) 음식을 만들고 나누어 먹는 것이 바로 자비이며 삶의 일부를 교환하고 서로 느낌을 공유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6~7면)


이렇게 ‘음식’이라는 것은 우리 삶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예술’로 승화된 복잡미묘한 맛, 색채, 질감, 향 등을 창조한 것이다. 이러한 음식을 먹는 행위는 보통 혼자서 하기보다는 누군가와 같이 먹는 것이며, 어떠한 공간ㆍ시간에서 이루어진다. 프루스트의 유명한 ‘마들렌 과자’ 향기를 떠올려보자. 음식 냄새처럼 우리를 편안하게 하고, 또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것도 없다. 그러니 ‘과거’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이야기’들이 ‘음식’이라는 소재, 또는 주제를 건드리지 않았을 리 없다. 이 글은 ‘계보학’이라고 하기까지는 뭐하지만, 근래에 흥미로운 음식에 관한 이야기들의 계열 속에서 차이를 드러내면서 성석제의 <<소풍>>만의 특징을 드러내보려 한다.


근래 ‘음식’에 관한 이야기들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간단히 말해, 음식을 만드는 이들의 ‘이야기’와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며 먹는 이들의 ‘이야기’이다. 전자로 대표적인 것은 일본 만화들, ‘미스트 초밥왕’과 그와 유사한 여러 만화들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음식과 관련하여 음식을 만드는 마음, 기술, 재료를 구하는 과정등을 흥미진지하게 풀어나간다. 또 후자로 대표적인 것은 ‘맛의 달인’, ‘식객’, 그리고 이 책을 들 수 있다. 후자의 특성은 음식을 찾아다니는 과정, 음식과 재료의 비교적 기술적 소개, 음식 맛과 옛 추억의 결부 등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물론 후자의 계열에 속하는 ‘이야기’들은 음식을 먹는 주체들이 음식을 만드는 주체가 되기도 하여, 간간히 자신의 요리솜씨를 뽐내기도 한다.


간단한 계열을 제시해보았는데, 후자의 만화들과 이 책의 차이점은 바로 매체와 장르의 차이에서 비롯한다. 만화는 그림을 통해서 음식을 묘사하고, 그 와중에 허구적 주인공을 등장시켜서 스토리가 얽혀나가면서 갈등도 있고 반전도 있다. 대부분은 주인공이 음식에 대한 뛰어난 지식과 따뜻한 마음을 요리를 통해 구현시킨다는 이야기이다. 반면에 성석제의 이 글은 수필이니만큼, 별다른 갈등이 없고, 음식에 대한 사진도 한 컷 없다. 그러나, 그래서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성석제의 입담이 빛을 발한다. 아무런 사진도 삽화도(만화가 가끔 끼어들지만, ‘음식’을 묘사하지는 않는다)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성석제의 묘사만을 따라가며 음식을 상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매일 먹는 김치를 묘사한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자.


우선 살짝 신맛이 돈다. 침샘을 슬쩍 건드리면서 양쪽 뺨 안쪽을 시리게 하는 그런 맛. 고추의 매운맛을 내는 성분인 캡싸이신은 김치에 들어가서 자극적이면서 개운한 맛을 낸다. 여기다 아무렇지도 않게 더해지는 맛이 있는데 그게 배추의 질감(質感)이다. 김치가 덜 익었을 때나 너무 익었을 때는 배추의 가장 바깥쪽, 그러니까 푸른 잎사귀 쪽의 맛이 강하다. 그러나 김치가 한창 잘 익었을 때는 배추에서 뿌리에 가까운 쪽, 곧 두툼하고 이가 박히는 느낌이 실한 부분에 꽉차게 맛이 든다. 이 부분을 어금니로 붙들어 아래위로 으드득, 맞창 낼 때의 감촉이며 소리며..... (221)


아무렇지도 않은, ‘우리가 하루 세 끼 상식(常食)하는 김치’를 아무렇지도 않게, 그러나 생생하게 묘사하는 대목. 만화나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서는 절대로 구현할 수 없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성석제의 묘사 때문에 이 책은 ‘음식’ 계열의 이야기들 중에서 허구적 주인공이나 치밀하게 설정된 플롯이 없음에도, 허영만의 ‘식객’이나 ‘맛의 달인’을 독자로 하여금 넋을 녹고 배를 꼬르륵 거리며 읽게 하는 마력이, 한층 더 살아서 숨 쉬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성석제가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음식’을 통해 우리 삶의 이야기들을 더 들어낼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점이다. 원래 잡지에 연재되었던 글의 성격상, 각 이야기들의 길이가 제한이 있고 글의 전개과정도 일정부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사라져가는 삶에 대한 아쉬움을 보이는 대목들(<소년시절의 맛>, <꿩 대신 닭, 그러나 자존심이 고명처럼 살아 있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냉면> 등)이 눈에 띄지만, 서문에서서 말한 ‘음식을 만들고 나누어 먹는 것이 바로 자비이며 삶의 일부를 교환하고 서로 느낌을 공유하는 행위’라는 느낌을 주기에는 부족하다.


이렇게 삶을 공유하고 더 나아가 세상과 삶에 대해 사유케하는 ‘음식’에 관한 이야기 계열로, 우리는 백석의 시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 서구적 근대가 이식되던 시기, 백석은 잊혀져가는 풍물들을, 특히 음식들을 여러 지방을 여행하며 시로 썼다. 마침 근처에 김재용 선생이 펴낸 <<백석 전집>>이 있음으로 펼쳐 보자. 다음 시는 ‘북신(北新) -서행시초(西行詩抄) 2’라는 시이다.


거리에서는 모밀내가 났다

부처를 위하는 정갈한 노친네의 내음새 같은 모밀내가 났다


어쩐지 향산(香山) 부처님이 가까웁다는 거린데

국수집에서는 농짝 같은 도야지를 잡어 걸고 국수에치는 도야지고기는 돗바늘 같은 털이 드문드문 백였다

나는 이 털도 안 뽑은 도야지고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또 털도 안 뽑은 고기를 시커먼 맨모밀 국수에 얹어서 한입에 꿀꺽 삼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가슴에 뜨끈한 것을 느끼며

소수림왕(小獸林王)을 생각한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을 생각한다


시에 무슨 사족을 달 것이 있겠냐만은, 전공자의 노파심(?)으로 몇 마디 적는다. 제목 그대로 북서쪽 여행길이다. 메밀 내음이 나는 거리, 백석은 이를 ‘부처를 위하는 정갈한 노친네의 내음새’로 비유한다. 성석제의 감칠맛나는 묘사와는 다른 차원의, 묘사. 그렇게 ‘부처’를 떠올리며 들어간 국수집에는, 황당하게도 ‘농짝 같은 도야지’를 잡아걸고, 국수를 시키니 털이 박힌 돼지고기가 나온다. 젊은 청년시인 백석은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주위에서 이를 한입에 꿀꺽꿀꺽 삼키는 사람을 보고 갑자기 소수림왕, 광개토대왕이 떠오른다.


북서쪽 고구려의 용맹한 사람들. 음식은 과거와 이어져있다. 그런데 왜 젊은 청년시인 백석은 ‘가슴에 뜨끈한 것’을 느끼는 것일까. 김우창 선생이 언젠가 말한 것처럼, 식민지 시기 문학을 식민지 시기라는 정치적 현실과 떼어놓고 말하는 것은 많은 경우 오독이 된다. 이 시도 마찬가지.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는 ‘촌스러운’ 민족주의라고도 보일 수 있겠지만, 식민지 시기 문약한 청년이 강맹했던 옛 고구려의 영토, 옛 고구려의 사람들, 옛 고구려의 음식을 보며 느끼는 ‘뜨끈한 것’은 그리 쉽게 부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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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6-08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속의 메밀 내음 나는 거리 시가 참 좋습니다.
백석 시는 어디서 어떻게 읽어도 눈에 확 띄어요.^^

기인 2006-06-09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정말 평범한 듯 쓰면서, 울림이 있어서 좋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