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전복
페터 비트머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0년 3월
구판절판


"나무"라는 독일어 단어 "Baum"은 불어에서 "arbre"라고 할 때와 영어에서 "tree"라고 할 때 각각 다른 표상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차이는 기표적 질료의 상이함과 그것이 가지는 다른 기표와의 유사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위의 세 경우에서 단어가 지칭하는 대상은 같다. 다만 기표가 불러일으키는 표상이 다를 뿐이다. 기표는 사물 자체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체계에 속한다. 이것을 우리는 여러 의미를 지닌 단어에서 볼 수 있다. 예컨대 독일어에서의 "나무"는 생명나무, 계보, 배의 돛대, 논리학에서의 수형도 등 다양한 의미로 쓰인다. 우리는 그것이 이 중 어느 나무를 의미하는지를 문맥 속에서만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 다음과 같은 사실이 또한 덧붙여진다. 즉 모든 말은 겉으로 명백히 표현되어 있지 않더라도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라는 연관성을 내포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화자 및 청자와의 연관성이 대화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며 의미는 또한 상징계 속에 뿌리박고자 노력하는 주체를 끊임없이 암시한다.
-64~65쪽

'의미 부여'를 통해서 (기표와 기의 분리가-기인) 분리는 극복된다. '의미'는 마치 기표와 기의가 원래부터 하나인 듯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거기에는 '의미'를 빗겨가는 잔여(Rest)가 항상 있다. 이러한 불안전한 대응 때문에 기의가 기표 밑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이것은 '의미'가 결코 다할 수 없다는, 즉 결코 완전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낳게 한다. 그렇기 대문에 하나의 말, 하나의 글은 영원히 완성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원초적 결핍을 볼 수 있다. 어떠한 사랑도, 어떠한 현존도 절대로 와녁할 수 없다는 경험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결핍'을 느낀다. 충족되지 못하는 잔여가 항상 남아 있다. 이 잔여가 욕망의 '장소'라고 불리는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상징계가 욕망을 구조짓는다는 것이 입증된다. 그것은 영원히 만족될 수 없다. 어떤 대상도 그에게 완벽히 사응할 수 없다. 결핍은 소유와 존재의 두 가지 차원으로 나타난다. 패러독스하게도 존재의 결핍은 '소유가 너무 적음'을 통해서 나타난다. 주체는 자기가 어떤 완벽한 대상을 가지게 되면 이런 결핍이 사라지리라고 믿는다. 이와 반대로 소유의 결칩은 완벽한 존재를 추구하는 욕망 속에서 나타난다. 주체는 이것에 도달하기만 하면 더 이상 부족한 것이 없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많은 부분을 명확히 해주는 대목. 특히 번역의 '불가능성' 대목이 마음에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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