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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풍
성석제 지음, 김경호 그림 / 창비 / 2006년 5월
평점 :
음식만큼, 우리의 일상 속에 끈질기게 이어져 내려오는 것도 없다. 우리의 ‘의ㆍ식ㆍ주’중 ‘의’와 ‘주’는 이미 서구화-근대화 된지 오래이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오래 이어져 내려오는 것은 우리의 음식이다. 요즘 아이들이 김치를 잘 먹지 않는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보도되기도 하지만, 아직도 ‘살아있는’ 전통과 문화로서, 우리의 일상으로서, 우리의 음식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음과 같은 작가의 말은 이 책 <<소풍>>에서 이러한 음식을 통해 사람살이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려 했음을 밝힌다.
이 책에 든 글들은 대체로 음식에 관한 것이지만 음식만 이야기하려 한 것은 아니다. 음식을 통해서 새삼 깨닫게 되는 사람과 세상에 관해 썼다. 소풍 가서 나무 그늘에 둘러앉아 도시락을 먹고(食) 샘물을 마시는(飮)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낌(感)이 움직이는(動) 것을 공유하고 싶었다. 음식을 먹는 것이 소풍이라면 음식이야기 역시 소풍이며, 무릇 이야기란 또한 우리 삶의 소풍과 같은 것이다. (...) 음식을 만들고 나누어 먹는 것이 바로 자비이며 삶의 일부를 교환하고 서로 느낌을 공유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6~7면)
이렇게 ‘음식’이라는 것은 우리 삶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예술’로 승화된 복잡미묘한 맛, 색채, 질감, 향 등을 창조한 것이다. 이러한 음식을 먹는 행위는 보통 혼자서 하기보다는 누군가와 같이 먹는 것이며, 어떠한 공간ㆍ시간에서 이루어진다. 프루스트의 유명한 ‘마들렌 과자’ 향기를 떠올려보자. 음식 냄새처럼 우리를 편안하게 하고, 또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것도 없다. 그러니 ‘과거’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이야기’들이 ‘음식’이라는 소재, 또는 주제를 건드리지 않았을 리 없다. 이 글은 ‘계보학’이라고 하기까지는 뭐하지만, 근래에 흥미로운 음식에 관한 이야기들의 계열 속에서 차이를 드러내면서 성석제의 <<소풍>>만의 특징을 드러내보려 한다.
근래 ‘음식’에 관한 이야기들을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간단히 말해, 음식을 만드는 이들의 ‘이야기’와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며 먹는 이들의 ‘이야기’이다. 전자로 대표적인 것은 일본 만화들, ‘미스트 초밥왕’과 그와 유사한 여러 만화들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음식과 관련하여 음식을 만드는 마음, 기술, 재료를 구하는 과정등을 흥미진지하게 풀어나간다. 또 후자로 대표적인 것은 ‘맛의 달인’, ‘식객’, 그리고 이 책을 들 수 있다. 후자의 특성은 음식을 찾아다니는 과정, 음식과 재료의 비교적 기술적 소개, 음식 맛과 옛 추억의 결부 등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물론 후자의 계열에 속하는 ‘이야기’들은 음식을 먹는 주체들이 음식을 만드는 주체가 되기도 하여, 간간히 자신의 요리솜씨를 뽐내기도 한다.
간단한 계열을 제시해보았는데, 후자의 만화들과 이 책의 차이점은 바로 매체와 장르의 차이에서 비롯한다. 만화는 그림을 통해서 음식을 묘사하고, 그 와중에 허구적 주인공을 등장시켜서 스토리가 얽혀나가면서 갈등도 있고 반전도 있다. 대부분은 주인공이 음식에 대한 뛰어난 지식과 따뜻한 마음을 요리를 통해 구현시킨다는 이야기이다. 반면에 성석제의 이 글은 수필이니만큼, 별다른 갈등이 없고, 음식에 대한 사진도 한 컷 없다. 그러나, 그래서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성석제의 입담이 빛을 발한다. 아무런 사진도 삽화도(만화가 가끔 끼어들지만, ‘음식’을 묘사하지는 않는다)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성석제의 묘사만을 따라가며 음식을 상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매일 먹는 김치를 묘사한 다음과 같은 대목을 보자.
우선 살짝 신맛이 돈다. 침샘을 슬쩍 건드리면서 양쪽 뺨 안쪽을 시리게 하는 그런 맛. 고추의 매운맛을 내는 성분인 캡싸이신은 김치에 들어가서 자극적이면서 개운한 맛을 낸다. 여기다 아무렇지도 않게 더해지는 맛이 있는데 그게 배추의 질감(質感)이다. 김치가 덜 익었을 때나 너무 익었을 때는 배추의 가장 바깥쪽, 그러니까 푸른 잎사귀 쪽의 맛이 강하다. 그러나 김치가 한창 잘 익었을 때는 배추에서 뿌리에 가까운 쪽, 곧 두툼하고 이가 박히는 느낌이 실한 부분에 꽉차게 맛이 든다. 이 부분을 어금니로 붙들어 아래위로 으드득, 맞창 낼 때의 감촉이며 소리며..... (221)
아무렇지도 않은, ‘우리가 하루 세 끼 상식(常食)하는 김치’를 아무렇지도 않게, 그러나 생생하게 묘사하는 대목. 만화나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서는 절대로 구현할 수 없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성석제의 묘사 때문에 이 책은 ‘음식’ 계열의 이야기들 중에서 허구적 주인공이나 치밀하게 설정된 플롯이 없음에도, 허영만의 ‘식객’이나 ‘맛의 달인’을 독자로 하여금 넋을 녹고 배를 꼬르륵 거리며 읽게 하는 마력이, 한층 더 살아서 숨 쉬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성석제가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음식’을 통해 우리 삶의 이야기들을 더 들어낼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점이다. 원래 잡지에 연재되었던 글의 성격상, 각 이야기들의 길이가 제한이 있고 글의 전개과정도 일정부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사라져가는 삶에 대한 아쉬움을 보이는 대목들(<소년시절의 맛>, <꿩 대신 닭, 그러나 자존심이 고명처럼 살아 있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냉면> 등)이 눈에 띄지만, 서문에서서 말한 ‘음식을 만들고 나누어 먹는 것이 바로 자비이며 삶의 일부를 교환하고 서로 느낌을 공유하는 행위’라는 느낌을 주기에는 부족하다.
이렇게 삶을 공유하고 더 나아가 세상과 삶에 대해 사유케하는 ‘음식’에 관한 이야기 계열로, 우리는 백석의 시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 서구적 근대가 이식되던 시기, 백석은 잊혀져가는 풍물들을, 특히 음식들을 여러 지방을 여행하며 시로 썼다. 마침 근처에 김재용 선생이 펴낸 <<백석 전집>>이 있음으로 펼쳐 보자. 다음 시는 ‘북신(北新) -서행시초(西行詩抄) 2’라는 시이다.
거리에서는 모밀내가 났다
부처를 위하는 정갈한 노친네의 내음새 같은 모밀내가 났다
어쩐지 향산(香山) 부처님이 가까웁다는 거린데
국수집에서는 농짝 같은 도야지를 잡어 걸고 국수에치는 도야지고기는 돗바늘 같은 털이 드문드문 백였다
나는 이 털도 안 뽑은 도야지고기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또 털도 안 뽑은 고기를 시커먼 맨모밀 국수에 얹어서 한입에 꿀꺽 삼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가슴에 뜨끈한 것을 느끼며
소수림왕(小獸林王)을 생각한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을 생각한다
시에 무슨 사족을 달 것이 있겠냐만은, 전공자의 노파심(?)으로 몇 마디 적는다. 제목 그대로 북서쪽 여행길이다. 메밀 내음이 나는 거리, 백석은 이를 ‘부처를 위하는 정갈한 노친네의 내음새’로 비유한다. 성석제의 감칠맛나는 묘사와는 다른 차원의, 묘사. 그렇게 ‘부처’를 떠올리며 들어간 국수집에는, 황당하게도 ‘농짝 같은 도야지’를 잡아걸고, 국수를 시키니 털이 박힌 돼지고기가 나온다. 젊은 청년시인 백석은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주위에서 이를 한입에 꿀꺽꿀꺽 삼키는 사람을 보고 갑자기 소수림왕, 광개토대왕이 떠오른다.
북서쪽 고구려의 용맹한 사람들. 음식은 과거와 이어져있다. 그런데 왜 젊은 청년시인 백석은 ‘가슴에 뜨끈한 것’을 느끼는 것일까. 김우창 선생이 언젠가 말한 것처럼, 식민지 시기 문학을 식민지 시기라는 정치적 현실과 떼어놓고 말하는 것은 많은 경우 오독이 된다. 이 시도 마찬가지.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는 ‘촌스러운’ 민족주의라고도 보일 수 있겠지만, 식민지 시기 문약한 청년이 강맹했던 옛 고구려의 영토, 옛 고구려의 사람들, 옛 고구려의 음식을 보며 느끼는 ‘뜨끈한 것’은 그리 쉽게 부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