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강습일이 아니었는데, 애인이 자유수영을 하러가자고 해서, 수영장에 갔다. 별반 수영을 했다기 보다는 물장구를 치다가 왔다. 몸무게를 쟀는데, 어제보다 1kg나 줄어있었다. 이런;;

3시 이후에는 아무것도 안 먹을려고 하고 있었는데, 애인이 먹으라고 해서 -_-; 애인한테는 안 먹는다고 하고는 7시 쫌 지나서 빵을 먹었다. ^^; 내일 몸무게는 어떻게 나올지..

수영을 하면 몸이 꽤 피곤해져서 낮잠을 자게 된다. 그러면 밤에 잠이 잘 안 오게 되서, 그 다음날 또 낮잠을 자게 되는 악순환이다. 이상적인 것은 11시 되기 전에 잠이 들고 6시에 일어나서 수영을 가는 것인데, 3시가 다 되어서야 잠이 들게 되고, 그 다음날 수영을 다녀와서 10시쯤 다시 잠을 자게 된다는 것..

수영에 익숙해지면 이것이 고쳐지겠지, 하고 맘 편히 먹고 있다. 계속 자니까, 하루가 매우 짧다. 아쉬워라.

 

소년이로학란성, 일촌광음불가경. 학부 때는 참, 뭔가 열심히 살려고 했던 것 같다. 서점같은 데 가면, 이렇게 읽어야 되는 책이 많다니 압박감도 느끼고. 이상하게(?) 본격적으로 공부하려고 들어온 대학원에 오니 더 공부를 안 하게 되는 것 같다. 막상 학문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고 학자라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알게 되니 힘이 빠진다고나 할까. 쩝. 물론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석사논문을 마무리 한 다음에는, 내가 계속 꿈꾸었던 작가로의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습작도 많이 해봐야 겠다. 휴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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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2006-07-04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영을 즐기시고 수영에 빠지지 마시길.. ^^

기인 2006-07-04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의미심장한 말씀이신데, 잘 이해는 안됩니다만 그렇게 하도록 할께요 ㅎㅎ;;

마태우스 2006-07-05 0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년이감량중년난기-소년은 살빼기쉽지만 중년은 그게 어렵다
갈수록 체중이 주시네요 부럽습다

기인 2006-07-05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옷. 작가이신 마태우스님 *.* 부럽습니다. 저도 작가가 되보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진지하게 습작을 해 보려고요. ㅎㅎ 저는 그럼 소년인가요? ^^;
 
 전출처 : 비자림 > 알라딘 폐인 연수를 다녀와서

사실 알라딘 폐인 연수가 있다길래 잔뜩 기대가 되면서도 걱정이 되기도 했다. 연수를 잘 이수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밤 12시 30분에 물만두님 서재에 다 모이라고 하는데 나는 1시 정도면 졸릴 시간이라 연수 받으며 졸지나 않을 지 염려스러웠다.

이번 연수에 지명된 사람은 나, 씩씩하니님, 전호인님 다해서 셋이다. 씩씩하니님은 세실님으로부터 사전 정보를 다 입수해 놓은 상태라 나는 씩씩하니님한테 최대한 잘 보여 하나라도 소스를 건지려고 노력하였다. 근데 씩씩하니님은 특유의 씩씩함으로 너무 빨리 달려 오시다가 그만 물만두님 서재로 가지 않고 물만두님 집으로 직행하고 말았다. 만순님과 만돌님이 육포를 뜯고 있다가 깜짝 놀라는 표정에 다시 허위허위 뛰어 왔다는 하니님을 보며 난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곤 물어 보았다. "만두는 안 먹고 있었나요?"

전호인님은 천안에서 오느라고 조금 피곤한 표정을 지었는데 만두님 서재 앞에서 칼을 내려 놓고 들어 오라는 말에 자꾸 머뭇머뭇 거려 우리는 늦을 뻔 했다. 아, 왜 그렇게 칼을 좋아하는지. 쯧쯧.

사회자는 스텔라님이었다. 우선 서재 달인들의 면면과 서재의 특징, 최근 서재의 이벤트 경향과 알라딘 마을의 중요 쟁점 사항에 대해 조목조목 이야기해 주었다. 난 열심히 밑줄 그으며 듣고 있었는데 전호인님이 옆구리를 툭툭 치며 뒤를 돌아 보라고 말하여 뒤를 돌아보다가 그만 깜짝 놀랐다.

세상에, 자명한 산책님이 애인님과 산책을 나오는 길에 물만두님 서재에 들른 것이었다. 오오 선남선녀의 모습이란! 게다가 저기 있는 저 미남 미녀들은 누구인지 낯이 익었다. 악 춤추는 인생님과 푸하님과 야클님,그리고 아프락사스님! 오오 이십대의 젊음이란 저런 것인가? 장난꾸러기 전호인님이 왕년에 자기도 저런 얼굴이었는데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에 몰두하다 보니 팍 삭았다는 말에 졸고 있던 씩씩하니님이 눈을 떴다.

다음은 물만두님의 본격적인 서재 브리핑 시간. 우리는 살살 졸리기 시작했는데 물만두님이 옥상으로 올라오라고 할까봐 긴장되어 다들 허벅지를 꼬집으며 강의를 들었다. 알라딘 폐인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고 한다 리뷰 폐인, 페이퍼 폐인. 물만두님은 나를 넌즈시 보시면서 알라딘의 본질은 리뷰에 있으니 리뷰를 많이 올리도록 애써야 하며 특히 추리소설 리뷰에도 관심을 가지라고 소리 높여 말씀하셨다.

나는 쫌 찔렸지만 안 그런 척 맹숭맹숭한 표정으로 계속 강의를 들었다. 그 때 어린왕자의 별님이 다시 서재에 음악을 올린 듯 알라딘 마을에 달콤한 뉴에이지 음악이 흘러 넘쳤다.

잠시 쉬는시간, 우리를 응원하러 온 배꽃님, 해리포터님, 배혜경님,한샘님, hnine님들이 저기 뒤에서 손짓하는 게 보였다.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가져 왔다고 하는데 난 막 뛰어 가다가 마태우스님을 목격했다. 마태우스님은 야클님과 재밌게 축구 이야기를 나누다가 마님 눈치 보며 밤 마실을 나온 메피스토님과 커피 마시러 가는 중이었다. 마태우스님 팬클럽에 준회원으로 정확히 이름이 올라갔는지 확인하러 잠시 마태우스님에게 달려 갔다 왔는데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발마스님과 로쟈님이 웃고 있었다. 아, 저 지적인 분들의 웃음은 어째 웃음조차도 난해할까? 생각하며 전호인님이 다 먹기 전에 얼른 가서 앉아 나도 맛있게 아이스크림 하나 먹었다. 

다음은 바람구두님의 이벤트 특강이 있었다. 바람구두님은 예의 그윽한 눈빛으로 우리를 돌아보았다. 씩씩하니님과 나는 바람구두님의 구두가 참 독특하게 생겼다는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조선인님이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 왔다.

다음은 마지막 강의. 글샘님의 강의다. 글샘님이 강단에 오르자 모든 사람들이 조용히 님의 얼굴에 주목했다. 님은 글을 쓰는 사람의 철학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였는데 원고와 강의가 정말 근사했다.

이제 알라딘 폐인 연수는 끝났다. 무사히 연수를 마친 우리들에게 선배님들의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상기된 얼굴로 나오는 나에게 달팽이님이 다가왔다. "이제 집에 가서 인디언 음반 들으세요. 마음이 편안해질 거에요."

그렇게 나는 알라딘 폐인이 되었다.

참, 보슬비님의 정성어린 축전이 왔다는 걸 깜빡 했다.

집에 와서 쉬고 있는데 기인님의 축하 메시지가 왔다. 오, 논문을 쓰는 바쁜 와중에.. 감격스러웠다.

 

뱀꼬리: 점심시간에 끄적거렸습니다. 여러 알라딘 동지님들의 이름이 허락없이 거명된 점을 양해해 주시길. 호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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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알라딘도서팀 > [서평단 모집]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에 리뷰를 써주실 분을 모집합니다.

안녕하세요,
알라딘 편집팀 김세진입니다.

얼마 전 출간된 언론인 홍은택씨의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에 리뷰를 써주실 20분을 모집합니다.

이 책은 <나를 부르는 숲>의 역자이기도 한 저자의 깔끔한 문체와 유머감각이 돋보이는 여행기입니다.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6400킬로미터에 달하는 트랜스 아메리카 트레일을 횡단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겪은 에피소드를 맛깔스럽게 엮었습니다.

자전거, 여행, 유머, 감동을 사랑하는 분들의 많은 참여 기다리겠습니다.

*  서평단에 참여하길 원하시는 분은 댓글로 "신청합니다"라고 써주시면 됩니다.
*  신청해주신 분들 가운데 20분께 책을 보내드리겠습니다.
*  신청은 7월 3일 월요일 오후 10시까지 받습니다.
*  서평은 2006년 8월 10일까지 올려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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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07-04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겨레 신문에서 가끔 읽었던 여행기. 아, 여행가고 싶다. ^^
 
 전출처 : balmas > 매의 눈님에게-마르크스주의에서 과학과 이데올로기

매의 눈님이 방명록에 몇 가지 질문을 남겼는데, 질문들이 너무 포괄적이어서 제대로 답변하기가

어렵군요. 그래서 대신 한 10년 전에 제가 그 질문들과 비슷한 주제로 쓴 글을 하나 올립니다.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진 데다가, 여러 모로 생각이 숙성되지 못했을 때 쓴 글이라 좀 부끄럽기도

하지만, 얼마간 참고가 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이 글을 퍼가는 것은 허락하지만, 공적인 논의나 인용은 불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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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에서 과학과 이데올로기: 알튀세르-캉귈렘-스피노자

[고대 대학원 신문] 1997. 5.



1. 잊혀진 물음: 역사유물론은 과학인가?


  80년대 많은 한국의 지식인들에게서 마르크스주의, 또는 역사유물론이 과학인가라는 물음은 무의미한 물음이었다. 그들에게서 역사유물론이 과학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전제였으며, 문제는 ‘부르주아’ 과학들’(또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들’), 특히 인문, 사회과학들에 대한 그것의 우월성은 무엇인가 하는 것, 그리고 이 과학적 무기를 어떻게 ‘실천에 적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교조적인 정식화에 따르자면 과학으로서 역사유물론이 변증법적 유물론의 ‘적용’인 것처럼).반면 이제 마르크스주의는 잊혀진 담론이 되어버렸다. 누구도 마르크스주의 또는 역사유물론을 이론적으로 논박하지는 않았지만, 이제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누구도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역사적 공산주의’의 몰락이라는 역사적 자명성만이 이 사태에 대한 유일한 증거로 제시될 뿐이다.

  이 두 가지 경우에서 우리는 아마도 거의 대칭적일 두 개의 자명성을 목격하게 된다. 다만 하나는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성에 대한 자명성이고, 다른 하나는 마르크스주의의 비과학성 또는 이데올로기적 본성에 대한 자명성일 뿐이다. 이러한 대칭성의 경험은 특히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성을 옹호하고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성가시기는 하지만 끝내 외면해 버릴 수는 없는, 당혹감의 원천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고 있는 마르크스주의의 본질은 위대한 비대칭성의 기획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계급적 독재이지만, 또한 그것은 모든 계급적 착취와 지배를 폐지하는 것을 자신의 유일한 존재이유로 삼고 있으며(특히 발리바르, 「"공산당 선언"의 정정」, {역사유물론 연구} 참조), 마르크스주의 과학으로서 역사유물론은 모든 부르주아 인문, 사회과학들의 이데올로기적 한계를 드러내고 비판하는 (비이데올로기적인) 과학인 것이다.

  이러한 간단한 회고는 결국 우리로 하여금 하나의 잊혀진 물음(또는 ‘억압된 질문’)을 제기하도록 만든다. 마르크스주의 또는 역사유물론이 이데올로기들(소위 ‘속류’ 정치경제학과 ‘과학적’ 정치경제학 모두를 포함하는)의 이데올로기적 본성을 보여주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과학 또는 비대칭적 과학이라면, 하지만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르크스주의가 하나의 이데올로기일 수 있었다면, 이러한 본성과 경험, 원칙과 사실 사이의 괴리는, 그러한 괴리 자체의 설명을 위해서라도, 불가피하게 본성에 대한 물음을 묻게 만들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 또는 역사유물론은 과학, 더욱이 하나의 특권적인 과학인가? 만약 그렇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가?


2. 역사유물론의 특수성: 토픽적 과학


  역사유물론이 하나의 과학인가 하는 물음은 그것이 어떠한 과학인가라는 또다른 물음과 분리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역사유물론의 과학성 여부에 대한 물음은 그것의 과학적 특수성에 대한 물음을 함축한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모든 과학들 전체를 포괄하는 일반적인 과학적 기준으로는 역사유물론에 대해 충분한 평가를 내릴 수 없다는 것을 뜻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유물론의 과학적 특수성에 대한 인식을 통해 과학적 기준 자체에 대한 새로운 정식화를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전자의 경우는 모든 과학들에 공통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수학이나 물리학 또는 생물학이나 언어학 등과 같은 개별과학들의 과학성에 대한 평가와 인식은 필연적으로 그 과학 자체의 내적 기준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엄밀한 의미에서 물리학이 ‘경험적인 것의 수학화’(A. Koyré, Etudes d'histoires de la pensée scientifique 참조)를 통해 성립될 수 있었다고 해서, 다른 과학들에게까지 그러한 기준을 제시할 수는 없으며, 생물학이나 언어학 등과 같은 개별과학들은 물리학과는 구분되는 독자적인 내적 기준에 따라 구성되고 분류되는 것이다(푸코의 인간과학들의 역사에 대한 고고학적 탐구나 그 이전의 캉귈렘의 연구들은 과학적 기준들의 상대성을 보여주는 연구들로 읽힐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유물론의 과학성에 대한 평가와 인식은 그 과학 자체의 내적 기준을 확인하는 것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후자와 같은 경우는 분명 역사유물론에만 고유한 현상인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전자의 경우처럼 보편화될 수 있는 성격인지는 불분명하다. 다시 말해 모든 개별과학들의 성립이 과학철학 또는 인식론(바슐라르나 캉귈렘의 의미에서 이 양자는 동의어이다. 다시 말해 영미 또는 독일적 전통에서 인식론은 인식주체의 심리적(또는 초월론적) 활동의 문제이지만, 프랑스 과학철학의 전통에서 인식론은 개별과학들의 과학적 활동의 문제이다)의 일반적 원칙들을 변화시킨다고 말할 수는 없다. 따라서 역사유물론은 그 자체의 내재적인 과학적 기준을 통해 일반적인 인식론적 원칙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한에서만 하나의 특권적인 지위를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유물론의 특수성을 가장 일관되게 주장한 사람은 알튀세르였다. 알튀세르는 초기에는 세 개의 대륙(수학, 물리학, 역사과학)의 비유를 통해서(예컨대 알튀세르, 「혁명의 무기로서의 철학」, {아미엥에서의 주장} 참조), 그리고 이후에는 역사유물론이 정신분석학과 함께 일종의 토픽적 과학(정확하게 말하자면 “분파적, 갈등적 과학”)을 구성한다는 테제를 제시함으로써 역사유물론의 특수성을 부단하게 주장해 왔다. 알튀세르는 우선 역사유물론(과 정신분석학)이 “갈등적 과학”이자 “분파적 과학”으로서 이들의 역사는 “언제나 재발되는 분열들로 표시”(알튀세르, 「마르크스와 프로이트」, {알튀세르와 라캉}(공감, 1996) 17쪽)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이 두 과학들의 역사에서 특징적인 것은 그 과학들이 처음 탄생했을 때는 기존의 이론들 내지는 이데올로기들에 의해 ‘외부로부터’ 공격이 가해지다가, 이것들이 점차 수용되면서부터는 바로 그 과학들 내부로 침투해서 그 과학들의 과학적 핵심을 ‘수정’하려는 시도들이 이루어지며, 이러한 수정주의적 경향들을 통해 결국은 그 과학들 자체가 갈등적 분파들로 분열된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당연히 왜 이러한 갈등과 분열이 불가피한가, 그리고 그러한 갈등과 분열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우리가 과학들로 평가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알튀세르는 전자의 질문에 대해 그러한 분열과 갈등은 바로 그 과학이 분석하는 대상이며 동시에 그 과학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장소인 현실 자체가 갈등적이라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계급사회와 같은 필연적으로 갈등적인 현실 속에서는 어떤 위치에서든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분명한 확인이 있다. 사람들은 갈등 자체 속에서 일정한 입장 ... 을 취한다는 조건에서, 비로소 이러한 갈등적 현실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다.”(「마르크스와 프로이트」, 20-21쪽.)

  그렇지만 아직도 결정적인 질문이 한 가지 더 남아있는데, 바로 이러한 갈등과 분열의 필연성 때문에 역사유물론은 과학이 될 수 없는 것 아닌가? 따라서 이러한 질문에 대해 역사유물론이 과학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역사유물론이 갈등과 분열에도 불구하고 과학적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말해서는 안되며, 바로 갈등과 분열 때문에, 그리고 그에 대한 인식 때문에 역사유물론은 과학적 객관성을 얻는다고 말해야 한다. 요컨대 “마르크스주의적 이론의 갈등성이 자신의 과학성, 자신의 객관성에 대하여 구성적이라는 사실”(위의 글, 20쪽)을 주장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답변은 우리에게 긍정보다는 당혹을 안겨다 준다. 갈등성이 과학성과 객관성에 ‘구성적’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역사유물론과 정신분석학이 갈등적․분파적 과학이라는 것이 입증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모델 또는 원칙을 다른 과학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이 두 과학들은 그야말로 유별난 과학들(이것의 의미는 ‘사이비과학’에서 ‘메타과학’까지 다양하게 진동한다)인가?

  알튀세르의 이러한 역설적 주장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관계, 또는 과학적 활동에서 이데올로기의 역할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데올로기야말로 이론적 갈등의 원천이며, 따라서 갈등성과 객관성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이데올로기와 과학의 관계에 대한 문제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3. 과학적 이데올로기의 개념


  이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캉귈렘의 역설적인 개념, 즉 과학적 이데올로기라는 개념(Georges Canguilhem, “Qu'est-ce que l'idéologie scientifique?”, in Idéologie et rationalité dans l'histoire des sciences de la vie, Vrin, 1988)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이것이 역설적인 개념인 이유는 흔히 서로 대립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과학과 이데올로기가 여기서는 서로 결합하여 모순적으로 하나의 개념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개념에서 우선 주목할 만한 것은 그것이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관계에 대한 일반적 통념을 변화시킨다는 점이다. 캉귈렘에 따르면 과학과 이데올로기는 서로 외재적인 방식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즉 이데올로기는 과학에 내재적이며, 과학이 갈등적이라면 그것은 과학이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이데올로기와의 대립과 투쟁을 통해서만 발전하기 때문이다.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이데올로기 또는 오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존재한다. 그 하나는 전(前)과학적 이데올로기이며, 다른 하나는 과학적 이데올로기이다(또는 전과학적 오류와 과학적 오류).

  전과학적 이데올로기는 예컨대 코페르니쿠스적인 천문학 이전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천동설과 같은 것으로, 이것은 어떤 과학이 인식론적 절단(coupure)을 통해 형성되면서 폐기되는 이데올로기이다. 이에 비해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어떤 과학의 성립 이후에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면서 또한 다른 과학의 성립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캉귈렘은 이러한 과학적 이데올로기의 대표적인 사례로 19세기의 다양한 진화론을 들고 있는데, 일례로 허버트 스펜서는 태양계와 동물 유기체, 생명종들, 인간, 사회, 언어 등 모든 것이 연속적인 미분화를 통해 단순한 것으로부터 복잡한 것으로 진화하는 경향이 존재한다는 일반화된 진화법칙을 설정한다. 이러한 일반화된 진화법칙의 문제는 한정된 영역에서 설립된 진화의 개념과 그것의 논증과 실험방식을 무시하면서 “자신이 차용해 온 과학성의 규준들을 넘어 탈선”한다는 점에 존재한다(이 점에서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과학 ‘이후에’ 존재한다). 하지만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다른 과학의 규준과 위신을 존중하고 그것들을 모방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종교나 마술, 허위과학, 요컨대 전과학적 이데올로기와는 구분된다. 따라서 한정된 영역에서 타당한 규준들을 일반화하여 총체적 지식으로 직접 진입하려는 무의식적 욕구야말로 과학적 이데올로기의 판별적 특징이 되는 셈이며, 이러한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그에 대한 내재적 비판을 통해 새로운 과학 또는 새로운 과학적 지식을 구성함으로써만 극복될 수 있다(이 점에서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과학 ‘이전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과학적 이데올로기가 발생하는가? 또한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비판되고 극복될 수 있는가? 요컨대 과학적 이데올로기는 어떤 점에서 불가피하며, 그것은 과학적 활동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두 가지 상이한 영역에서의 답변들을 요구한다. 그 하나는 과학사적인 시간성, 또는 과학적 활동에 고유한 역사성에 대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인간학적․사회적 범주로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론적, 실천적 전화의 노력, 즉 고유하게 스피노자적인 의미에서 윤리적 능동화의 운동에 대한 것이다.


4. 상징적 질서의 아포리아들


  첫번째 문제는 철학적 구조주의(알튀세르, 푸코, 라캉)의 고유한 기여로서 구조적 역사성에 대한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주체와 역사를 제거했다는 통속적 비판과는 달리, 실제로는 철학적 구조주의자들이야말로 현대 철학에서 가장 심원한 역사성에 대한 개념을 가공하려고 노력해 왔다. 이들의 노력은 칸트의 초월론 철학(transcendental philosophy)의 역사화에서 출발한다. 칸트는 초월론적 주체의 선험적 활동(통각, 선의지)을 통해 모든 인식과 실천의 가능성이 정초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구조주의자들은 이러한 초월론적 주체의 활동을 역사성을 지닌 초월론적 구조, 이를 테면 상징적 질서(라캉)(또는 담론의 질서, 이데올로기)의 작용으로 전위시킨다. 이 때 상징적 질서는 모든 인식과 의미의 가능성의 조건을 구성한다는 점에서는 초월론적이지만, 또한 그것이 초역사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변화하거나 불연속적이라는 점에서는 역사적 초월론이라고 할 수 있다(푸코는 {지식의 고고학}에서 이를 “역사적 선험”(a priori historique)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렇게 초월론적 구조가 역사화될 경우 진리의 상대화, 지식의 비객관화라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인식의 기준 자체가 역사적으로 변화한다면, 인식의 객관성이나 진리의 관념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푸코의 고고학이나 계보학적 연구들은 초월론적 구조들의 불연속성, 또는 지식체제의 정상화(normalisation) 기능들에 대한 과도한 강조 때문에, 일종의 상대주의적 경향을 드러낸다(발리바르, 「바슐라르에서 알튀세르로-‘인식론적 단절’ 개념」, {이론} 13호 참조).

  다른 한편으로 초월론적 구조의 역사화는 “주체” 개념의 의미 변화를 동반한다. 즉 이제 주체는 모든 인식과 활동의 토대로서 주권적 주체(subjectum) 또는 초월론적 주체가 아니라, 의미의 근거로서 상징적 질서 속에 필연적으로 포섭되어 있는 예속적 주체 또는 ‘분할된 주체’(라캉)가 된다. 하지만 예속적 주체가 상징적 질서 속에 포섭되는 방식은 강제적이거나 물리적 폭력에 의한 것은 아니다. 예속적 주체는 인식과 행동의 자율적 주체로 상징적 질서 속에 포섭된다(특히 알튀세르,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아미엥에서의 주장} 참조). 따라서 철학적 구조주의자들의 상징적 질서의 문제설정은 근대 철학과 더 나아가서는 근대성 일반의 원리로서 자율적 주체의 역설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자율적 주체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상징적 질서 속으로 편입되어야 하지만, 이러한 편입은 동시에 지배구조의 재생산 메커니즘으로의 편입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율적 주체가 모든 해방운동의 근본적인 전제로 간주되기 때문에 더욱 더 치명적인 역설이다.


5. 역사적 초월론을 넘어서: 과학-해방-교통


  이렇게 철학적 구조주의자들의 상징적 질서의 문제설정은 두 개의 심각한 아포리아들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이 두 가지의 아포리아들 각자에서 하나의 핵심적인 계기가 빠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모순의 운동이다. 앞에서 우리는 알튀세르의 토픽적 과학에 대한 테제가 하나의 역설, 또는 하나의 모순 위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는데, 알튀세르에게서 토픽적 과학의 과학적 객관성은 다름 아닌 그것의 내재적 갈등성과 그에 대한 인식에 근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캉귈렘의 과학적 이데올로기 개념 역시 그 자체가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역사적 초월론의 아포리아들을 넘어서기 위해 어떻게 이러한 모순의 운동을 작동시킬 수 있겠는가?

  이를 위해서는 모순의 운동의 역사적 성격을 좀더 분명하게 고찰할 필요가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데올로기가 과학에 내재적이라는 것은 과학과 이데올로기가 대칭적이라는 것, 또는 과학 그 자체가 정상화(normalisation)의 작용일 뿐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과학적 진리/오류의 문제가 권력의 정상화 기능의 하위범주로 포섭된다는 것은 특히 {담론의 질서}에서의 푸코의 테제이다. 이 때문에 푸코의 고고학이나 계보학은 상대주의적인 경향을 보여준다). 이와는 반대로 이데올로기가 과학에 내재적이라는 것은 과학의 객관적인 기준이 존재한다는 것, 즉 이데올로기는 과학적 기준 속에서만 인식되고 판별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절단(coupure)과 단절(rupture) 내지는 개조(refont) 사이의 구분이 중요한데, 절단이 과학 자체의 설립의 사건을 의미한다면, 단절 내지는 개조는 과학 내부의 공간 속에서 발생하는 과학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회귀적 비판(과학적 이데올로기는 최초의 과학적 개념에 내재한 모순의 한 편향이므로 이에 대한 비판은 항상 회귀적이다)과 전화의 작용을 의미한다(이것은 알튀세르의 “인식론적 절단”이라는 개념을 보완하고 정정해 주는 것이다. Balibar, “Coupure et refont” in Lieux et noms de la vérité 참조). 전과학적 이데올로기와의 절단을 통해 어떤 과학이 설립되는 사건은 하나의 진리의 발생사건이며, 이러한 진리는 개념 속에 물질화된다.

  예컨대 마르크스가 잉여가치라는 개념을 발명해 낸 순간, 역사유물론은 다른 어떤 과학들(이를테면 그 이전의 정치경제학들)에 의해서도 평가되거나 침해될 수 없는 자신에 고유한 진리의 공간, 과학적 객관성의 영역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은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장 속에서 그것들을 소재로 하여, 그리고 그것들을 비판하면서 성립된 것이기 때문에, 자체 내에 갈등과 모순의 계기를 내포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 이후의 발전 속에서 각종의 경향들이 발생하게 되며, 이에 따라 최초의 개념 내에 포함되어 있는 모순적 계기들에 대한 끊임없는 회귀적 비판과 개조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조의 운동은 여전히 최초의 절단의 사건이 성립시킨 진리의 공간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며, 따라서 절단이라는 사건, 또는 특정한 과학적 진리의 설립 자체는 역사적으로 불연속적이지만, 이러한 과학의 역사적 구조 내부의 과정은 전진적이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지식의 객관성과 지식의 발전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이데올로기의 내재성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어떤 과학의 초월론적 구조 내에서 이데올로기화와 탈이데올로기화의 대립운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Balibar, “Etre dans le vrai? Science et la vérité dans la philosophie de Georges Canguilhem”, in Lieux et noms de la vérité, Aube, 1994 참조).

  따라서 우리는 단지 역사유물론이나 정신분석학만이 아니라, 모든 과학의 운동 자체가 내재적인 갈등을 자신의 객관성의 조건으로 한다는 테제를 제시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이 역사유물론에 고유한 범주들(모순과 이데올로기)에 근거하기 때문에, 우리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역사유물론이 과학의 본질과 역사성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해 준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토픽적 과학으로서 역사유물론의 ‘특수성’은 단지 과학의 이론적 영역 안에 존재하는 이데올로기만이 아니라, 인간학적이고 사회적인 범주로서 이데올로기의 전화를 자신의 고유한 대상으로 설정한다는 점에 존재한다.

  인간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데올로기 또는 스피노자적 의미에서 상상(imaginatio)은 현실에 대한 왜곡된 인식만이 아니라, 욕구(appetitus)의 필연성으로부터 비롯되는, 복합적인 정서들의 모방(affective imitation)의 메커니즘(정신분석에서 말하는 동일화(identification)와 유비적인)의 문제를 제기한다(이에 대해서는 {윤리학} 3부 전체를 참조하고, 이에 대한 주석으로는 E. Balibar, “Spinoza, l'anti-Orwell―Le crainte des masses”, in Le crainte des masses, Galilée, 1997[「대중들의 공포」, {스피노자와 정치} 이제이북스, 2005] 참조). 즉 이데올로기의 문제는 계급적 조건들에 따른 인식(또는 오히려 의식)의 분할의 문제이면서, 인식과 실천에 수반되는 욕망과 공포, 기쁨과 슬픔, 사랑과 증오 등과 같은 정서적 효과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떤 사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항상 정서적 효과들을 동반하기 때문에 그 사물에 대한 단순한 합리적 인식만으로 그 사물에 대한 사랑과 증오가 자동적으로 제거되지는 않으며, 더 나아가 그것들은 사물에 대한 인식 자체를 방해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서 작용, 정서들의 모방의 문제는 모든 사회운동과 이데올로기들(민족주의, 인종주의 등)의 은폐된 동력일 뿐만 아니라, 과학적 인식의 발전을 가로막는 원초적 장애물의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적인 인식과 실천은 단지 집단적 또는 사회적인 관점만이 아니라 관개체론적인 관점, 즉 개인들에 내재하면서 또한 개인들을 초과하는 관계들의 인식과 전화를 요구할 수밖에 없는데, 스피노자는 이를 삶의 유형들(수동적/능동적)과 결부되어 있는 인식의 유형들(상상/과학적 인식/과학적 인식의 개인적 전유)의 문제로, 그리고 두 가지 유형들의 상호전화의 필요성의 문제로 분석했다(발리바르, 「스피노자, 정치와 교통」, {알튀세르의 현재성}(공감, 1996) 참조). 결국 마르크스주의가 하나의 과학이라면, 그것은 이러한 인식의 조건과 삶의 조건의 동시적인 전화의 과학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데, 이렇게 그 자체의 존재 조건들의 전화를 자신의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 바로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적 특수성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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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가지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 지음, 이용대 옮김 / 한겨레출판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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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왕들이 보통 사제를 겸했다고 말하더라도, 결코 그것만으로 그 직책의 종교적 측면을 완전하게 밝혔다고 할 수는 없다. 그 시대에 왕을 둘러싼 신성(神性)은 공허한 말의 형식이 아니라 엄연한 믿음의 표현이었다. 왕들은 대개 단순히 사람과 신의 중개자인 사제로서만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신으로서 유한한 인간의 능력을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초인간적 존재에게 기도와 제사를 올려야만 얻을 수 있는 축복을 신민들과 숭배자들에게 베풀 능력을 지닌 존재로 숭배를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왕들은 흔히 적절한 계절에 비와 햇빛을 주어 농작물을 자라게 해줄 것이라는 따위의 기대를 받는다.-81쪽

우리에게는 이러한 기대가 이상해 보이지만 고대인의 사고방식에는 꼭 들어맞는 것이다. 미개인은 더 진화한 인류가 보통 생각하는,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의 구별을 거의 인식하지 못한다. 그가 생각하는 세계는 대부분 초자연적인 동인(動因)들, 다시 말해서 자신과 같이 충동과 동기에 따라 행동하며, 자신과 같이 연민과 희망, 공포로 호소하면 감동할 수 있는 인격적 존재들이 움직이는 것이다. 세계를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미개인은 자기 이익을 위해 자연의 운행에 영향을 미치는 자기 능력의 한게를 알지 못한다. 기도나 언약, 협박을 통해야만 신들은 좋은 날씨와 풍성한 수확을 자신에게 보장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때때로 믿듯이, 신이 자신의 인격으로 화신(化神)한다면 자신은 더 높은 존재에게 호소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 미개인은 자기 자신과 동료들의 번영을 촉진하는 데 필요한 모든 권능을 자신 속에 지니게 되는 것이다.-81-82쪽

이것은 인간신의 관념이 형성되는 경로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또다른 경로도 있다. 세계가 정신적인 힘으로 가득 차 있다는 세계관과 나란히 미개인은 그것과 다른, 어쩌면 훨씬 더 오래된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다. 그 세계관 속에서 우리는 근대 자연법 사상, 또는 자연이 인간적인 작용의 개입 없이 불변의 질서 속에서 발생하는 일련의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는 자연관의 맹아를 찾아낼 수 있다. 내가 말하는 그 맹아는 대부분의 미신체계에서 큰 역할을 하는 이른바 공감주술(sympathetic magic)에 내포되어 있다. 고대사회에서 왕은 흔히 사제이면서 동시에 주술사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종종 사술(邪術)이나 법술(法術)에 능란해 보인 덕택에 왕권을 획득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왕권의 발달과정과 미개인이나 야만인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 직책의 신성한 성격을 이해하자면 주술의 원리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반드시 필요하며, 또 고대의 미신체계가 모든 시대 모든 나라에서 인간 정신에 미친 비상한 지배력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아야 한다.-82쪽

단군왕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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