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두 개의 서평에 대하여

커피를 마시면서 재작년 이맘때 모스크바에서 무슨 일을 했던가 잠시 둘러보다가 '두 개의 서평에 대하여'란 페이퍼에 눈길이 머물렀다. 모스크바통신에 올렸다가 지금은 비공개로 돌렸던 것인데, 이미지 버전으로 정리해서 창고에 넣어두도록 한다. 바로 언급이 되지만, 제목의 두 서평은 각각 이언 와트의 <근대 개인주의 신화>와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에 관한 것이다. 그럼 2년전 가을로 되돌아가보도록 하겠다.

 

 

 

 

(얼마전) 인터넷에서 카피해온 두 개의 서평에 대해서 몇 마디 참견하도록 하겠다. 하나는 이언 와트의 <근대 개인주의 신화>(문학동네, 2004)에 대한 쿤데라님의 서평(다음카페 ‘비평고원’)이고, 다른 하나는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2002)에 대한 발마스님의 서평(‘알라딘’)이다.

특별히 두 서평에 대해서 참견하는 것은 이 책들이 현재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들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전자는 최근에 내가 읽고 싶어한 책이며, 후자는 최근에 다시 읽고 있는 책이다). 서평들은 내게 유익했던 만큼 내가 동의할 수 없는 대목들을 포함하고 있었는바, 그에 대해서 몇 마디 하고자 하는 것. ‘-’로 시작하는 문단은 인용이며(인용문의 오타들은 교정했으며, 필요에 따라 야간의 수정을 가했다), ‘*’를 단 건 참견의 말들이다). 먼저, 쿤데라님의 서평을 따라가 본다.

-<소설의 발생>으로 유명한 영문학자인 이언 와트의 책 <근대 개인주의 신화>는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유용한 교양서다. 즉 이 책은 특별한 문학수업을 받지 않은 사람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심지어는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작품들, 말로/괴테의 <파우스트>, 티르소의 <돈 후안>,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읽지 않은 사람도 읽고 이해할 수 있다. 저자가 작품 줄거리까지 제공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저자는 전통적인 아카데미 학자인 것 같다. 그 이 책의 말미에서 대중매체에 의해 저하되고 있는 독서인구에 대한 한탄하고 있다. “ 이 점은 대학교수로서의 나의 경험에 비춰보아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학생들이 매우 유명한 책들 - 이를테면 <돈키호테>나 <로빈슨 크루소> - 을 당연히 읽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누군가 그 책을 읽었다면 다른 강의에서 그 책을 다루었기 때문인 것이다.”(384쪽)

-어떻게 보면 이 책은 바로 이런 세대들을 위한 책인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엔 어떤 순진함, 시대착오적인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다. 그가 아무리 중요성을 설파하더라도, 여전히 그들은 <돈키호테> 따위는 읽지 않을 것이다(*쿤데라님이 걱정할 일은 아니다. 그의 이문열 옹호론에서도 알 수 있는 바이지만, 사람들이 너나없이 <돈키호테>를 읽는 분위기였다면 쿤데라님은 거꾸로 <돈키호테> ‘무용론’을 들고 나왔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런 것이 소위 ‘키호테주의’일 것이다).



 

 

 

-<돈키호테>를 읽지 않더라도 대학원 과정을 마칠 수 있으며, 비평가가 될 수 있으며, 문학박사학위도 받을 수 있다(*쿤데라님이 굳이 억울할 일은 무엇인가?). 그런데도 이언 와트는 근대문학의 대표적 네 유형을 마치 대단한 가치가 있는 유산처럼 다루고 있다. 그의 조급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안쓰러울 뿐이다.(*그럼에도 쿤데라님 또한 “고전을 읽자!”는 모토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조급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좀 안쓰럽다. 거기에 가로놓여 있는 것은 어떤 순진함과 시대착오이다. 거꾸로, 필요한 사람은 다 읽으며 읽기 마련이다. 쿤데라님이 굳이 안쓰러워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이 책의 원제는 'Myths of Modern Individualism'이다. 흔히 하는 식으로 번역하자면, <근대 개인주의의 신화>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역자들은 <근대 개인주의 신화>라고 번역했다. 따라서 ‘근대의 개인주의 신화’로도 읽힐 수 있으며, ‘근대 개인주의의 신화’로도 읽힐 수 있다. 또 ‘근대’ ‘개인주의’ ‘신화’라는 키워드의 나열로도 볼 수 있다. 내 생각에, 전체적인 내용으로 볼 때 어느 쪽으로 읽어도 무방하며, 어느 것을 선택해도 의미 차이는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액센트를 문제 삼는다면, 당연 중심은 ‘개인주의(Individualism)’에 놓여진다.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개인주의’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진 것은 19세기(다시 말해 낭만주의 이후)이다. 물론 단어상의 의미로 볼 때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도 개인주의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근대의’ 개인주의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단어 자체가 근대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근대(Modern)’를 붙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여긴 그냥 넘어가도 될 듯하다.)

-나쓰메 소세키의 글 중에 <나의 개인주의>라는 유명한 강연문이 있다(*최근에 번역/소개된 걸로 안다). 여기서 소세키는 ‘개인주의’란 말을 사용하면서, 이 단어를 이기주의와 같은 것으로 혼동하지 말하고 주의를 주고 있다. 그가 이런 주의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본래 ‘개인주의’가 어떤 ‘경멸적/비하적’ 단어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기록상 ‘개인주의자’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반동적 가톨릭 사상가 조제프 드 메스트르라고 한다. 그는 혁명적 민주주의의 지적 분위기를 깎아 내리기 위해 이 단어를 썼다.

-왕당파였던 발자크도 ‘개인주의’를 경멸의 뜻을 담아서 사용하였으며, 벤야민이 <파사젠베르크>에서 높이 평가한 초기 공산주의자 블랑키 역시 마찬가지다(*<파사젠베르크>는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번역돼 있다). 이와 같은 단어사용에 변화의 조짐이 보인 것은 토크빌에 와서다. 하지만 그 역시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하여>에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했다(*우리말 번역은 <미국의 민주주의> 아닌가? 아마도 쿤데라님은 일역본을 읽은 듯하다). 왜냐면 개인주의라는 단어에 들어있는 반-전통적 입장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감탄한 미국 민주주의가 개인주의와 관련이 있다는 점 역시 (*그는) 인식하고 있었다.

 

 

 



-‘개인주의’와 마찬가지로 ‘신화(myth)’ 역시 낭만주의 이후의 용어라고 한다. 여기서 우린 그리스로마 신화와 같은 특정 신화체계 전반을 가리키는 단어인 ‘mythology’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신화’는 사회를 지탱하는 무의식 체계를 의미한다. ‘신화’는 오늘날 별로 인기가 없다. 이를테면 아도르노(<계몽의 변증법>)나 롤랑 바르트(<신화론>)는 ‘신화’가 자본주의적 상부구조의 허위성을 떠받치고 주고 있다고 비판한다(*바르트의 <신화론>의 원제는 ‘Mythologies’이며 <현대의 신화> 등으로 번역돼 있다. 바르트는 myth와 mythology를 혼동하고 있다!). 그런데 와트나 투르니에는 이와 정반대의 의견을 한다. ‘신화’가 사회에 대한 개인의 저항을 담보하고 있다고 말이다. 둘 다 맞는 말이다. 서로 핀트가 다를 뿐이다. 이언 와트나 미셸 투르니에가 긍정하려는 ‘신화’는 주로 문학적 범위에 국한된다(*문화현상 전반에 대한 기호학적 ‘신화’비평을 가하고 있는 바르트는 그렇다 치고, 아도르노의 경우는?).

-이언 와트가 근대의 대표적인 신화로 드는 것은 파우스트, 돈 후안, 돈 키호테, 그리고 로빈슨 크루소다. 여기서 우린 시대적으로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로빈슨 크루소 대신 햄릿을 넣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투르게네프는 근대적 인물의 두 가지 유형으로 돈 키호테형 인물, 햄릿형 인물로 구분하지 않았던가(*1860년쯤의 한 강연에서였다. 강연문 <햄릿과 돈키호테>는 우리말로 번역돼 있다. 한 ‘세계 에세이선집’에). 하지만, 그(와트)는 햄릿이 유명한 것은 그의 영향력이나 대표성에서보다는 순전히 ‘문학적인 측면’에 의한 것이라고 거부한다(이는 투르니에도 마찬가지다).

-그는 이 네 신화 대부분(로빈슨 크루소만 빼고)이 반종교 개혁 시기에 탄생했다는 것에 주목하고, 그것은 개인성을 발현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 르네상스와 그것의 왜곡인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에서 찾는다. “반종교개혁 사상가들에게 주로 문제가 된 것은 르네상스의 긍정적 이데올로기가 더 이상 합당하지 않다는 현실이 아니었다. 오히려 르네상스의 가치를 계속 추구하려 애쓰는 사람들이 결국에는 환멸감에 빠지거나 혼란상태에 귀착한다는 것이 문제였다.”(189쪽)

-그 증거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개인적 욕망에 의해 모두 ‘벌’을 받는다는 것에서 찾는다.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이언 와트에게 있어 반종교개혁은 종교개혁의 반대라기보다는 종교개혁을 과격화를 의미한다. 참고로 마녀사냥이란 우리의 상식과는 반대로 중세가 아닌 바로 이때(종교개혁 이후) 집중적으로 행해졌다는데, 독일에선 루터파가 이를 주도했다. 파우스트는 실존인물로 악마라기보다는 광대나 사기꾼의 성격이 강했다. 그런데 루터가 그를 악마와 연관시켰고, 그 후 파우스트는 루터적 편견에 따라 구성되어 갔으며 오늘날 가장 원초적인 형태의 파우스트 형상이 완성되었다. 역으로 말하면, 악마와 타협하는 파우스트는 루터가 만들어낸 형상에 다름 아닌 셈이다(*맨마지막 주장은 와트의 것인지 쿤데라님의 것인지 모호하다).

-이와 같이 독일에서 형성된 파우스트(<파우스트 서>)는 영국으로 건너가 크리스토퍼 말로에 의해 <파우스트 박사>라는 희곡으로 재탄생한다(*말로의 원작이 <파우스투스 박사>인 듯하지만, <파우스트 박사>로 통일했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막연히 떠올리는 파우스트 이미지는 괴테의 것이 아니라, 말로의 것이다. 말로에 의해 파우스트는 고뇌하는 개인주의자로서의 모습을 갖춘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이언 와트가 말로의 파우스트가 탄생할 수 있던 것을 당대 ‘교육의 문제’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16세기는 대학들 갑자기 증가한 시기이다. 영국의 예를 들자면 30년 간(1560년-1590년 사이) 입학생의 수가 무려 3배나 증가했다.

-이로 인해 파생되는 사회적 문제(대학생 실업자 문제)는 오늘날에도 능히 짐작 가능하다. 대학이 부여한 기대치와 사회가 제공하는 빈약한 실현 사이의 간극이 사회에 대해 적대감을 품게 되었고(따라서 홉스는 어딘가에서 “반역의 핵심은 대학이다”라고 썼다), 그것이 바로 파우스트에게 반항/고뇌하는 형상(환멸)을 부여했다는 것이다(*그러니까 와트에 의하면, 어떤 ‘사회적 잉여’가 파우스트적 형상을 낳았다는 것이다. 고학력의 ‘파우스트-백수들’! 참고로, 푸슈킨도 <파우스트의 한 장면>이란 아주 짤막한 ‘드라마’를 썼는데,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대화 장면으로만 구성돼 있다. 파우스트와 돈 후안은 푸슈킨의 대표적인 자기-이미지이다).

-이언 와트는 파우스트 분석에 이어 돈키호테를 분석한다. 하지만 그의 돈키호테 분석은 파우스트 분석에 훨씬 못 미친다. 이는 그의 능력부족이라기보다는 <돈키호테>라는 작품이 가지고 있는 완결성(완벽성)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제, 파우스트 신화나 돈 후안 신화는 <파우스트 서>나 티르소의 <돈 후안> 이후에도 새로운 버전으로 읽을 만한(괜찮은) 작품들이 창작되어 나왔으나(말로 <파우스트 박사>, 괴테의 <파우스트>,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 몰리에르 <돈 주앙>, 소리야 <돈 후안 테노리오> 등), <돈키호테>에는 그런 쓸 만한 아류작이 존재하지 않는다. 투르니에는 ‘소설 주인공’은 ‘소설가’보다 유명하지 않으나 ‘신화적 주인공’은 ‘작가’보다 유명하다고 주장하고 이언 와트도 그에 동조하지만, 적어도 <돈키호테>만큼은 그렇지 않다.

-세르반테스는 꼭 돈 키호테만큼 유명하다. 이로 인해 그의 꽤 괜찮은 다른 작품들이 부당한 평가를 받고 있지만 말이다. 이언 와트는 쩔쩔매면서 돈키호테에 대해 이야기한다. 마치 무리한 숙제를 해결하려고 끙끙대는 아이처럼. 사실 나는 이 부분을 읽고 있는 동안만큼은 그가 안쓰러웠다(*쿤데라님이 또다시 안쓰러워하는 대목인데, 그의 <돈키호테론>을 기대해봄 직하다). 그는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한 과도한 추상화를 거부하면서 뭔가 새로운 것을 이야기하려 하지만, 그것이 성공적이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돈키호테>는 완전히 이해 불가능한 경의의 책이다(*‘경의’는 ‘경이’의 오타일 듯하다). 헤르더는 평생 <돈키호테>를 연구했다고 한다. 이점에서 <돈키호테>에 비견될 수 있는 것은 단테의 <신곡> 정도일 것이다.

-참고로, 이언 와트는 세르반테스의 후계자로 19세기 러시아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백치>)를 들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한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심판의 날에 이승에서의 삶을 이해했는지 또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질문을 받는다면, <돈키호테>를 내놓으며 이것이 삶에 대한 나의 결론이라고 말할 생각이다.”(*참고로, 투르게네프가 계속적으로 시도한 것도 돈키호테적 인물을 자신의 소설에서 형상화하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에서의 바자로프도, 적어도 서두에선, 돈키호테적인 인물로 등장한다. 비록 햄릿적인 인물로 죽게 되지만.)

-다음은 돈 후안에 대해서다. 많은 사람들의 편견 중 하나는 돈 후안이 파우스트처럼 민중설화에서 기인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티르소의 돈 후안은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창조해낸 것보다 더 창조적인 인물이다. 즉 티르소라는 개인이 창작해낸 인물이다. 이는 장 루세의 <돈 주앙의 신화>만 읽어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설화와 유사성을 문제삼는 것은 어디까지나 마지막 부분(사자(死者)에 대한 조롱과 사자의 방문)뿐이다. 단적으로 말해 거침없는 난봉꾼으로서의 돈 후안은 티르소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인물이다(*내가 알기에 티르소의 ‘공적’은 ‘돈 후안’과 ‘죽은 자의 조롱/방문’이라는 두 가지 신화소를 ‘결합’시켜놓은 것이다. 즉,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티르소의 ‘돈 후안’은 <돈 후안+석상손님>이다. “거침없는 난봉꾼으로서의 돈 후안은 티르소 없이는 존재하지 않았을 인물이다”는 와트의 견해인지 쿤데라님의 견해인지 모르겠지만, 나로선 동의할 수 없는 견해이다. 돈 후안이 “티르소라는 개인이 창작해낸 인물”이라면 ‘돈 후안’은 ‘신화’가 아니다.)

 

 

 



-이점에서 이언 와트의 티르소의 돈 후안 분석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나는 몰리에르의 <돈 주앙>에서는 어떤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알렌카 주판치치의 말대로 그것은 돈 후안의 가장 세련된 판본일지 몰라도 가장 재미없는 판본이기도 하다. 내가 좋아하는 돈 후안 판본은 티르소의 것과 소리야의 것이다(푸슈킨의 것은 너무 짧아 재미니 내용이니 논할 게 없다). 돈 후안에 대해서는 이언 와트의 이 책과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쿤데라님의 개인적인 취향에 대해서 참견할 생각은 없다. 아마도 조만간 쿤데라님이 스페인어책을 들고 다니는 걸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푸슈킨의 것은 너무 짧아 재미니 내용이니 논할 게 없다”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견해라는 걸 밝혀둔다. 푸슈킨은 이미 ‘고전’이기 때문에, 그의 텍스트 역시 짧아도 텍스트-무한이다. 그리고, ‘간명함’이란 건 거의 푸슈킨의 시학적 원칙이며, <석상손님>은 그래도 ‘소비극’ 중 가장 긴 작품이다. 이 작품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조만간 올리도록 하겠다. 참고로 푸슈킨의 <석상손님>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돈 후안이 ‘시인’이라는 점이다. <석상손님>의 국역은 <보리스 고두노프> 등에 수록돼 있다).

-사실 몇 달 전 돈 후안에 관한 글을 쓰고자 여러 작품들(티르소, 몰리에르, 푸슈킨, 소리야, 버나드 쇼, 막스 프리쉬 등의 작품)과 장 루세의 연구서를 읽다가 포기한 적이 있다(*왜 포기하셨을까 궁금하면서 또한 아쉽다. 재미있는 글이 나왔을 듯한데 말이다. 한편으로 장 루세의 연구서 <돈 주앙 신화>(1978)는 아직 우리말로도 영어로도 번역되지 않은 걸로 아는데, 일역본으로는 나와 있는지?) 하여튼 이언 와트의 설명으로 돌아오면 그의 돈 후안 해석 중 한 가지 주목할 게 있다. 그것은 돈 후안의 방탕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죄의식의 부재에 대한 설명이다. 어떻게 해서 돈 후안은 아무런 죄의식도 느낄 수 없었던 것일까?



-여기서 이언 와트는 말로의 <파우스투스 박사>를 설명할 때와 연관지을 수 있는 설명을 한다. 그것은 돈 후안이 젊은이였기 때문이다. “저는 아직 청년입니다” (티르소, <세비야의 난봉꾼과 석상손님>(번역서 제목: <세빌랴의 난봉꾼 석상에 맞아죽다)>, 김창환 옮김, 울산대학교출판부, 24쪽)(*또 다른 번역본은 <돈 후안 – 세비야의 난봉꾼과 석상의 초대>, 안영옥 옮김, 서쪽나라, 2002이다). 다시 말해 돈 후안이 죽음(그리고 그로 인한 심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과 심판은 믿고 있었지만, 그것이 오래 동안 지연되리라 믿었기 때문에 아무런 죄의식 없이 방탕할 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언 와트는 <돈 후안>이 사기꾼(방탕아)과 ‘유예된 응보’를 두 축으로 삼고 석상을 통해 이 둘을 연결시키고 있다고 보고 있다(*참고로, ‘돈 후안’ 신화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분석으로는 James Mandrell의 'Don Juan and the Point of Honor: Seduction, Patriarchal Society, and Literary Tradition'(The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92)가 자세하다. 나는 티르소의 <돈 후안> 러시아어본을 갖고 있는데, 자잘하지만 한국어본과 다른 대목이 많아서 좀 당혹스럽다).



-그럼 여기서 우린 잠깐 다른 스페인극과 <돈 후안>을 비교해 보자. 황금기 스페인극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사건의 중심이 ‘명예’에 걸려 있으며, 그것은 자주 딸을 보호(여성의 정절을 지켜주기)하는 아버지(가족)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단적인 예로 우린 칼데론의 <살라메아 시장>을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돈 후안 역시 당대의 인물들처럼 ‘명예’를 소중히 여긴다. 사실 그가 석상의 초대를 받아들인 것(그로 인해 그는 결국 지옥에 떨어진다)은 ‘명예’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그의 명예가 공동체(가족)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그는 타인(가족)의 명예를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며 무참히 짓밟기까지 한다), 오직 자신하고만 관계한다는 점이다(*그런 점에서 돈 후안은 ‘청년’이면서 아직 ‘어린애’이다).

-돈 후안은 말로의 파우스트와 마찬가지로 청년의 형상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만 집중하며 기존 사회체제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다. 악마와 결탁하거나 방탕에 몸을 맡기거나 한다. 하지만 아직 젊기 때문에 심판(형벌)이 무한한 지연될 것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도덕이 사회체제를 유지시키는 바탕이라고 한다면, 그들은 도덕적으로 ‘무(無)’가 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언 와트는 파우스트, 세르반테스, 돈 후안을 함께 평가하면서, 이 세 사람 다 편집광적 인물들로 집을 떠난 방랑자(유목민)이며, 이들에게 가정사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며, 그들과 세상을 연결시켜 주는 인물로 하인들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수긍할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결정적인 것을 놓치고 있다. 말로의 파우스트와 티르소의 돈 후안이 청년인데 반해, 돈키호테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또 파우스트와 돈 후안의 마지막 장면(신성모독에 의한 징계)과 돈키호테의 마지막 장면(임종)은 전혀 관계가 없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잠정적인 결론은 설득력이 없다. “이들 세 주인공의 상징적인 최후의 형벌은 반종교개혁 세력이 르네상스 개인주의자들에게 한 수 가르쳐주려 한 재미없는 교훈이 아닌가 싶다. 최소한 티르소, 세르반테스, 말로 모두 고난과 역경을 겪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다. 이들은 모두 외로운 인간이었으며 다양한 종류의 소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자신의 주요 작품에서 결국 실패하고 마는 개인주의의 상징이 되는 영웅을 생산해 냈다.”(201쪽)(*개인주의의 실패는 적어도 ‘돈 후안’에 대한 비평으로서는 유효하다.)

 

 

 



-다음은 <로빈슨 크루소>다. 하지만 나는 이에 대해 그다지 하고 싶은 말이 없다. 애당초 이언 와트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나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는 로빈슨 크루소가 아니라, 작품 년대가 비슷한 <햄릿>을 선택해야 했다. 그래야 좀더 일관성 있는 설명이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로빈슨 크루소>를 분석한 후(<소설의 발생>도 이 소설에 대한 분석이다), 그에 대한 패러디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과 비교한다. 나름대로 의미 있는 분석이지만, 나에게는 좀 따분했다. 대신 괴테(의 <파우스트>)에 대한 견해에 대해선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읽어본 이들은 알겠지만, 괴테의 <파우스트>는 괴물 같은 작품이다. 거기엔 우리가 생각하는 파우스트도 메피스토펠레스도 없다. 축약본이나 공연되는 연극에서는 분량을 이유로 많은 부분을 줄이는데, 그리고 나면 괴테의 파우스트가 아니라 말로의 파우스트가 된다. 해서 이언 와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한번도 괴테 같은 타고난 천재성을 누린 적이 없다. 오히려 괴테에 대해 짐짓 아이러니한 난색을 표하는 츠베탕 토도로프에 동의한다. “괴테를 좋아하기란 쉽지 않다. 이 발언을 좀 덜 일반적이면서 동시에 좀더 정당한 것으로 하기 위해선 어쩌면 ‘오늘날에는’이라든가, ‘게르만 문화에서 성장한 사람이 아니고선’이라든가, 아니 어쩌면 훨씬 더 겸손하게 ‘나로서는’ 같은 말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괴테의 <파우스트>가 근대 개인주의의 가장 중요한 업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 이유는? 물론 그것의 엄청난 인기 때문이다.”(293쪽)

-나는 이언 와트의 솔직한 표현에 공감을 표하고 싶다. 솔직히 파우스트나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인물에 중심점을 두고 읽으면, 괴테의 <파우스트>는 그야말로 따분하기 그지없는 책이다. 그들을 둘러싼 사건들은 전혀 설득력이 없으며, 이는 파우스트의 구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오래 전 루카치가 분석했던 것처럼(그리고 그 관점을 이어받은 모레티의 분석처럼) 이 책을 자본주의의 서사시로 읽는다면 사태를 달려진다. 물론 이언 와트도 이런 점들을 잘 알고 있고 또 그에 대해 언급도 하고 있다(296-297쪽). 하지만 깊게 들어가지는 않는다. 기억하자. 이언 와트의 이 책은 파우스트라는 신화적 존재에 대한 분석임을.



 

 

 

-이제 마무리를 해보기로 한다. 이언 와트의 이 책은 4명의 근대적 인물을 분석하고 있는데, 그가 무게중심은 르네상스의 좌절(그리고 그로 인해 환멸감)에 놓여있다. 그런데 이 환멸감은 그 뒤를 잇는 로빈슨 크루소를 거치고 루소의 <에밀>이나 괴테와 <파우스트>에 이르러 어떤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나는데, 징벌적 결론은 사라지고 로빈슨 크루소의 ‘고독상태’는 도덕적 판단의 객관성을 담보하는 수단이 찬양을 받고(루소), 파우스트는 자본가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사회구조에 적대적이었던 젊음은 사회진보의 원동력으로 평가받는다(덧붙이자면,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루소의 크루소 ‘고독’ 해석이 가진 함의다. 루소는 4대 신화적 인물이 가진 ‘무절제(방탕/광기)’라는 문제를 ‘교육’이란 문제로 바꾸어 놓고 있다).

-이후 현대 작품으로는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와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 언급된다. <파우스트 박사>는 이전 모든 파우스트 판본(특히 최초의 판본인 <파우스트 서>)을 패러디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토마스 만은 기막힌 뒤집기를 시도하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의 역할을 바꾸는 것이다. 냉소주의자는 아드리안이고, 악마야말로 낭만적 낙관론자의 형상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제레누스라는 화자를 내세워 새로운 서사층위를 구축해 내고 있다.

-투르니에 역시 디포의 소설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다. 그 전복의 강도로 말하자면, 정말 놀라울 정도다(들뢰즈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하지만 이언 와트는 일정 정도 유보적인 태도를 보인다. 왜냐면 투르니에가 프라이데이와 크루소의 역할 바꾸기에는 성공했지만, 디포와 마찬가지로 프라이데이의 ‘내면’은 여전히 미지의 것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로빈슨 크루소는 무인도를 떠나길 거부하는데, 이는 프라이데이의 교육적 효과라는 형태를 띠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영원한 청춘’(379쪽)이라는 디포적 명제 밖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서 이언 와트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투르니에의 크루소는 진정한 1960년대식 낙오자 영웅이다”(381쪽)

-<근대 개인주의 신화>는 아카데믹한 영문학 연구자의 냄새가 나는 책이다. 친절하지만 규범적이고, 솔직하지만 그뿐이다(*‘아카데믹하다’는 게 ‘친절하고 솔직하다’는 뜻인가?!). 하지만 근대문학에서 가장 문제적 인물 그것도 네 명을 어떤 연관 속에서 한꺼번에 다루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 책은 실제작품들을 읽기 위한 교양서(개론서)로서 손색이 없다. 하지만 실제작품은 읽고 나면 이 책의 가치는 빛을 잃을 것이다(*“네 명을 어떤 연관 속에서 한꺼번에 다루었다는 점”의 가치는? 구슬이 너 말이라도 꿰어야…). 그러나 실제작품을 읽을 시간이 없거나 굳이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럴듯한 교양을 축적하기에는 최상의 책이다(*쿤데라님의 ‘고전주의자’는 ‘그럴듯한 교양주의자’인 것인지?).



(*)쿤데라님의 긴 서평을 길게 인용한 것은 <근대 개인주의 신화>를 한번쯤 읽어보시라는 뜻에서이다(나는 서울에 돌아가서야 읽게 되겠지만). “그럴듯한 교양을 축적하기는 최상의 책”이라고 하는데, 사실 그런 책은 많지 않다는 점에서 이 책은 한 독일어권 교양서 <교양>만큼 팔려나갈/읽힐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더불어 이언 와트의 출세작 <소설의 발생>도 재출간되었으면 한다. 하긴 거기에서 다뤄지는 책들이 먼저 번역/소개되어야 하겠지만. 나는 아주 오래 전에 책의 서두에 나오는 리처드슨의 <파멜라>을 원서를 조금 읽다가 만 경험이 있다(가끔 그토록 많은 영문학도들이 다 어디에 소용이 되고 있는지 궁금하다). 절판된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 박사>도 굳이 헌책방을 순례하지 않아도 구할 수 있었으면 한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처지는 “실제작품을 읽을 시간이 없거나 굳이 읽을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작품을 읽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가 더 많다. 왜? 없으니까!.. 이어서 발마스님의 서평(이건 길지 않다).

-남한에는 두 종류의 지젝 독자들이 있다(*북한에는 세 종류가? 서두에서 알 수 있는 바이지만, 발마스님의 서평은 지젝에 대한 ‘삐딱하게 보기’이다. 그것도 ‘취향’이긴 하지만, 나로선 그 근거가 불충분하다고 여겨진다). 한 부류의 독자들은 대중문화를 다루는 지젝의 절묘한 솜씨에 매료되어 있다. 사실 정부와 학계, 산업계와 언론계가 한 목소리로(이는 참 보기드문 일이다. 그러나 정말로?) 21세기는 문화산업의 시대이고, 우리의 살 길은 문화산업을 육성하는 데 있다고 소리 높여 합창하는 시기에.

(*)그러니까 발마스님은 ‘문화산업’에 대해서 비판적이며), 지젝은 더할 나위없이 매력적인 문화적 소비대상이자 벤치마킹의 모델일 수밖에 없다(*지젝은 ‘문화산업’과 아주 궁합이 잘 맞는 관계로 좀 의심스럽다, 라는 게 발마스님의 견해인 듯하다. 그러나 정말로? 지젝이 정말로 매력적인 ‘문화적 소비대상’으로 너나없이 읽히고 있는지? 그런 소비대상으로라면 지젝을 뺨치고도 한참 남아도는 ‘알튀세르’나 ‘푸코’ ‘들뢰즈’ 등은?)

-난해한 독일 관념론 철학과 라캉의 이론이 발하는 아우라로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거만하지 않고 자상하게 문화를 향유하는 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학계여 지젝을 본받으라! 그리고 이미 지젝을 흉내내고 해설서까지 쓰는 학자들까지 생겼으니.

(*)내가 알기로 <잉여쾌락의 시대>의 저자 정도를 꼽을 수 있을 텐데, 어떤 ‘학자들’이 더 있는 것인지? 사실 지젝을 흉내내는 이들보다는 무시하거나 폄하하는 이들이 더 많은 게 우리의 ‘학계’가 아닌가? ‘데리다’까지도 그저 쓸데없이 ‘난해한 철학자’ 정도로 치부되는 게 우리의 ‘학계’ 아닌가?), 남한의 문화산업은 전도가 양양하다(*‘지젝 따라하기’ 정도로 “남한의 문화산업”이 전도가 양양하다면, 이건 국가정책적으로 추진할 만한 일이다. 지젝의 책 몇 권이 번역되고, 방한해서 초빙강연 몇 번하고, 일부에서 ‘아, 지젝!”하는 현상과 남한의 문화산업이 어떤 관련성을 갖는다는 건지 나로선 헤아리기 어렵다. 문화계나 문화산업 관련업계 종사자들이 지젝을 읽기라도 한다는 건지?).

-다른 부류의 독자들은 전자와는 정반대로(그러나 정말로?) 지젝에서 급진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다. 지젝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는 달리 주체를 일방적으로 부정하지 않고, ‘무의식의 주체’를 주장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더욱이 알튀세르와 달리, 이데올로기를 "과학과 대립하는 것"으로 사고하지 않고(알튀세르에 관한, 정말로 지긋지긋한 영미식 토포스다! 이거야말로 이데올로기 그 자체다),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 무의식적인 장소(또는 이데올로기의 실재계적 공백)을 발견하여, 이데올로기론을 새로운 정점으로 끌어올렸다고 한다(브라보!). 어떤 부류의 독자들이 진정한 지젝의 독자들일까? 전자일까 후자일까? 그런데 이런 질문이 의미가 있기는 있는 것일까?

(*)발마스님은 알튀세르의 토포스에 대해서는 정말로 지긋지긋해하면서 지젝에 대한 토포스에 대해서는 환호해마지 않는다. “브라보!” 그리하여, 지젝에 대한 ‘삐딱하게 보기’는 이제 지젝의 독자들에 대한 ‘삐딱하게 보기’로 전이되었는데, 나는 그런 식의 ‘무의미한’, 더불어 ‘감정적인’ 문제제기가 왜 필요한 것인지 알기 어렵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나는 왜 역자가 제목을 이렇게 번역했는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 혹시 오역도 바로잡을 겸 재판을 찍을 계획이 있다면, 그 때는 그 이유를 꼭 알려주었으면 고맙겠다)은 지젝의 원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책이다.

(*)<이데올로기가>의 지젝의 ‘데뷔작’이라는 점에서 그의 ‘원형’을 보여준다는 말은 맞다. 그렇다면 그 ‘원형’이란 무엇인가? 이하의 내용에 따라면 (1)(헤겔과 라캉에 통달한) 전문학자로서의 지젝, (2)(이데올로기) 이론가로서의 지젝, (3)(대중문화) 분석가로서의 지젝, 세 가지이다. 그러니까 <이데올로기>는 세 가지 모습의 지젝이 모두 들어가 있다. 그리고 이 셋의 총합이 지젝이다. 비록 ‘전문학자’와 지젝은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그런데, 발마스님에 따르면 이 셋의 만남은 좀 문제가 있는 듯하다. 그건 조금 뒤에 결론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선 헤겔을 비롯한 독일관념론과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통달해 있는 전문 학자로서의 지젝의 면모가 있다. 실제로 그는 헤겔과 정신분석학으로 각각 학위를 하는 보기 드문 지적 인내심을 보여주었다(그런데 왜 자크-알랭 밀레는 지젝의 논문을 자기 총서에 출판해주지 않았을까? 그런데 왜 그는 지젝을 자기 오른팔처럼 생각하는 걸까?).

(*)약간의 착오가 있는데, 지젝은 헤겔이 아니라 하이데거로 철학학위를 했다. 비록 그가 언제나 들먹이는 건 헤겔이지만. 그리고 두 가지 학위를 하는 게 ‘보기 드문 인내심’의 결과인지? 발마스님도 내용을 알 만한데, 지젝은 철학박사 학위를 하고서 ‘백수’로 있다가 슬로베니아로 초빙강연을 온 밀레의 초청을 받아서 파리로 건너간다. 자신의 고백대로, 바로 ‘취직’되었다면 ‘보기 드문 인내심’을 발휘할 필요도 없었다. 밀레와 지젝의 사이가 어떤지 나로선 알지 못하며 크게 궁금하지도 않지만, 밀레의 총서에 지젝의 논문이 출간되지 않는다는 것과 ‘전문학자’ 지젝 사이에는 어떤 관련(혹은 결락)이 있다는 것인지? 밀레가 지젝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인지? 미심쩍은 지젝?)



-그리고 이런 지적 토대에 기초하여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자신의 이론적 과제로 제시하는 이론가 지젝의 모습이 있다. 이 과제는 푸코와 하버마스 사이의 근대성 논쟁의 배후 쟁점으로서 라캉과 알튀세르 사이의 논쟁이라는 문제로 제기된다. 이 문제에 관한 지젝의 테제는 라캉은 욕망의 그래프를 4단계로, 또는 2층으로 제시할 줄 알았던 반면, 알튀세르는 1층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곧 알튀세르는 호명 테제에만 그쳤을 뿐, 어떻게 호명을 넘어서는, 또는 호명을 벗어나는 주체가 존재할 수 있는지는 사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그러나 정말로? 지젝은 때로는 스스로 속는 척한다).(*즉, 지젝이 알튀세르를 비판하지만, 그 비판은 아닌 줄 알면서 하는 비판, 일종의 ‘연기’라는 것. 그러니 역시나 미심쩍은 지젝?)

-그리고 대중문화 분석가, 향유자로서 지젝의 모습이 있다. 그가 유고 영상기록 보관소에 틀어박혀 탐닉했던 미국 영화들은 단순히 이론을 예시하기 위한 소재에 그치지 않고(그랬더라면, 지젝이 그렇게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었을까?), 이론, 또는 진리의 증거 자체가 되어버린다(*이런 비판은 데리다 ‘전문가’로서의 발마스님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다. 이론과 사례를 제대로 구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젝은 인기를 얻었다? 논리와 수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데리다는? 데리다도 그래서 인기를 얻은 것인가? 해서, 이론가는 향유자와 다른 존재이며 각방을 쓰는 존재인 것인지?).

-어떤 이론, 어떤 진리? 물론 라캉의 이론, 라캉의 진리다. 따라서 지젝을 읽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젝 또는 라캉에 동일화되는 과정이며, 대중문화에서 이들의 이미지를 읽어내는 것이다(*지젝을 읽는 게 지젝에 동일화되는 과정이라면, 알튀세르를 읽는 건 알튀세르에 동일화되는 과정이며, 스피노자를 읽는 건 스피노자에 동일화되는 과정인가? 그렇다면, 지젝에 ‘동일화’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발마스님은 아직 지젝을 읽지 않은 것이 아닌가?).

-93년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나는 지젝이 자신의 문제, 곧 라캉과 알튀세르의 논쟁을 좀더 정교하게 전개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내가 지젝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일까? 그는 <부정적인 것과 머물기>, <이데올로기의 유령> 등에서, 자신이 이미 했던 이야기들을 거의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왜 그는 로베르트 팔러의 비판에 답변을 하지 않을까?).

(*)<이데올로기의 유령>은 내가 알기론 책이 아니라 논문이다. 어쨌든 이 대목에서야 지젝에 대한 발마스님의 ‘(악)감정’이 어떤 이유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 있다. 지젝이 “라캉과 알튀세르의 논쟁을 좀더 정교하게 전개”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일단은 지젝이 빌미를 제공한 셈. 발마스님이 지젝의 저작들을 다 탐독하고서 이러한 결론(불만)에 이르렀다면, 둘 중의 하나이겠다. 지젝이 불충분하게 말했거나, 지젝 자신은 충분하게 말했다고 믿지만, 발마스님이 보기엔 전혀 충분하지 않거나. 나는 현재로선 어느 쪽이 실상에 가까운지 판단할 수 없다. 로베르트 팔러도 안 읽었기 때문에.

-지젝이 대중문화에서 벗어나 급진정치 쪽으로 갈 수 있을까? 그가 과연 급진정치를 통해, 스스로 말하듯 라캉의 말씀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을까? 또는 그는 이미 대중문화에 너무 깊이 중독된 게 아닐까? 그런데 이 질문들은 의미가 있는 질문들일까?

(*)일단 대중문화와 급진정치의 ‘엄격한’ 구별이 발마스님의 기본적인 입장인 듯하다. 그리고 급진정치란 ‘라캉의 말씀의 한계’를 벗어나는 지점에서 조우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그리고 ‘대중문화에 대한 중독’으로부터도. 거꾸로 말하면, 지젝이 라캉의 ‘말씀’과 ‘대중문화’에 갇혀 있는 한, 그에게선 급진정치를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라캉과 대중문화를 빼면, 지젝은 없다. 그러니 급진정치여, 지젝없이 진군하도록!..



발마스님의 서평에서 내가 알 수 있었던 건 지젝이나 그의 책이 아니라 발마스님 자신이다(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 서평은 ‘불친절한’ 서평이다). 발마스님의 서재에 곧잘 들르는 내가 언젠가 특이하게 생각하면서 더불어 약간의 소외감(?)을 느낀 것은 ‘만화’ 얘기들이 오고 갈 때였다(나는 영화는 좋아하지만, 만화는 거의 보지 않는다. 학습만화조차도 즐겨보지 않는다). 발마스님은 만화에 문외한이 아니었다. ‘제7의 예술’로서의 만화를 폄하할 생각은 갖고 있지 않지만, 만화와 급진정치의 관계를 상상하는 일은 히치콕 영화와 비판이론의 관계를 상상하는 일보다 나로선 훨씬 더 어렵다. 그리고 요즘은 간혹 영화제 광고들도 서재에서 볼 수 있었는데, 영화에도 ‘급진정치적 영화’와 (쓰레기 같은) ‘대중영화’들이 있는 것인지, 그런 구별을 발마스님이 갖고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한국의 두 젊은 ‘공산주의자’ 감독이 만든 독립영화 <자본당선언: 만국의 자본가여 단결하라!> 같은 게 ‘급진정치’의 사례일까?).

지젝에 대한 발마스님의 취향이나 감정에 대해서까지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다. 나는 다만, <이데올로기>에 대한 서평에서 내가 아는/상상하는 ‘발마스님의 모습’과는 너무 동떨어진 모습을 발견했기에 당혹스러웠을 뿐이다(서평은 너무 ‘정념적’이며 그다지 공정하지도 않다). 어쨌거나, 지젝에게서 라캉과 알튀세르의 논쟁에 대한 정교한 해명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은 발마스님으로서도 크게 유감스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지젝을 넘어선 지점에서 발마스님의 몫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기에(발마스님의 ‘라캉과 알튀세르’론 또한 아직 미완으로 남아있다). 그러니까 내가 기대하는 것은 앞으로 도래할, 발마스님의 ‘이데올로기론’과 ‘급진정치론’이다. 우린 어쩌면, 따로 번역/오역할 필요 없이 우리말로 (지젝을 넘어선) 이론을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04. 10. 30./ 06. 11.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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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2005년의 책과 사건 5



1. 이건희와 비정규직 노동자
첫번째는 “이건희와 비정규직 노동자”로 상징되는 노동과 자본 그리고 국가의 위기이다. 이와 관련해 강준만의 『이건희 시대─우리는 정말 이건희를 알고 있는가?』(인물과사상사, 8월)와 최장집 외 여러 학자들이 참여한 『위기의 노동─한국 민주주의의 취약한 사회경제적 기반』(후마니타스, 3월)을 놓고 고민한 끝에 『위기의 노동』이 현재 우리 사회가 처해 있는 노동의 위기,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 문제에 본질적으로 더 중요한 접근을 보여준다고 생각해 선정했다. IMF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의 저변에 흐르는 감정의 기저는 ‘불안’이다. 나, 가족, 민족, 국가라는 정체성이 과도하게 강조되어온 사회에서 국가부도위기는 ‘나’라는 개인의 존립과 정체성 자체를 위협하는 사건이었기에 철부지 어린이부터 지팡이에 의지해야 하는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금 모으기 운동에 앞 다퉈 나섰다.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맸고, 정리해고도 감내했으나 문제는 위기 극복 이후에도 여전히 고용불안정, 비정규직 문제가 해소되지 못하고 더욱 강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여러 차례 권력포기를 시사했으나 한 차례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권력은 이제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그의 표현대로 지금 현재 대한민국을 좌우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원칙이 아니다. 모두가 신자유주의에 따른 시장논리를 구원의 주문이라도 되는 양 외쳐댄다. 시장의 주문에 걸려든 사회는 과도한 경쟁으로 내몰린다. 전체 임금노동자의 60퍼센트가 비정규직 노동자인 현실에서 과도한 분배가 시장경제를 망치고 있다는 주장은 아사 직전의 환자에게 다이어트를 처방하는 것과 같다. 시장논리의 주문에서 깨어나는 것, 시민의 재정치화만이 위기에 처한 한국의 민주주의를 구원하는 길이라고 저자들은 이야기한다.

2. 광복 60주년과 한일관계
광복 60주년과 패전 6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한국과 일본은 서로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였으나 양국은 도리어 이전보다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고 있다. 물론 문제는 우리에게도 있으나 그보다 근본적인 책임은 일본의 우경화, 일본헌법 제9조의 개정 움직임과 일본의 책임 있는 정치인들(고이즈미 총리를 비롯한)의 연이은 야스쿠니 신사참배에 있다. 이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듯 국내 출판계에서도 일본의 우경화를 우려하는 여러 출판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주목해보게 될 변화는 일본의 양심 있는 학자들의 목소리를 담은 책들이 많이 나왔다는 것인데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반전, 반차별, 반식민주의’를 내걸고 등장한 계간 『전야』(前夜)의 공동대표이자 양심적 지식인인 다카하시 데쓰야의 『결코 피할 수 없는 야스쿠니 문제』(역사비평사, 10월)와 이토 나리히코의 『일본 헌법 제9조를 통해서 본 또 하나의 일본』(행복한책읽기, 5월)이다. 특히 데쓰야 교수는 천황의 신사 야스쿠니의 기능은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유족이 겪는 자연스러운 슬픔을 신(神)이 되었다는 기쁨으로 180도 전환시키는 감정의 전이를 통해 국가주의에 맹목적인 복종을 초래하게 된다고 비판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전범 분류인 A급, B급, C급은 전쟁범죄의 경중에 의한 것이 아닌 국제군사재판소의 헌장 제A항, B항, C항의 위반을 따진 것으로 일부에서 주장하듯 A급 전범의 분사만으론 문제의 본질을 해결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감정적 분노와 비판은 일본의 전통문화를 가장하고 있는 국가주의에 도리어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멀고도 가까운 한일관계, 감정보다는 이성적이고 평화적인 접근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우치게 해준다는 점에서 이 책이 지닌 의미는 소중하다.

3. 국가보안법, 강정구 그리고 맥아더
지난 2004년 연말 우리는 국가보안법 폐지 및 4대 개혁입법의 추진이 무산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 나라의 힘세고 오래가는 수구보수와 개혁보수란 배터리 시스템의 위력을 실감했다. 그리고 그 여파는 광복 60주년이자 동시에 미군 주둔 60주년을 맞이한 올해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 철거 논란과 동국대 강정구 교수의 6.25 민족해방전쟁론이 맞물리면서 해결해야 할 때 해결하지 못한 과제가 어떻게 뒤통수를 치는지 실감하게 해준다. 이와 관련해 박태균의 『한국전쟁─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책과함께, 6월)은 전쟁과 분단이 우리 사회의 심리구조를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가를 실증적인 자료들과 함께 잘 분석하고 있다. 누가 죽은 맥아더를 오늘의 한국 땅에 부활, 재림케 하며, 이토록 극렬한 반응을 불러오게 하는가? 그것은 한국전쟁의 경험이 남북한 지배집단의 국민국가형성과 정당성 창출의 근거가 되었음을 먼저 인식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맥아더는 소박하게는 무속신앙의 장군님으로부터 거대하게는 남한 지배집단의 수호신으로 자리한다. 비록 박태균의 주장은 여러 곳에서 강정구 교수의 주장과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며 그와는 다소 다른 길을 가고 있으나 한국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며 분단 상황이 남북한 지배계급의 지배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한다는 점에서 이들이 적대적 공범자란 사실에 대해 인식을 같이한다. 이외에도 한국전쟁과 관련해 주목해볼 만한 책들은 김경학 외 『전쟁과 기억─마을 공동체의 생애사』(한울, 10월), 류춘도의 『벙어리새─어느 의용군 군의관의 늦은 이야기』(당대, 9월) 등이 있다.

4. 위험사회-성, 가족, 군대, 국가
올해는 지난 2004년 성매매특별법 시행 이후 1년여의 시점에 도달했고, 호주제 폐지 법안이 지난 3월 2일 국회를 통과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진전이 있던 한 해였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마지막 식민지였던 가족의 해체를 염려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게 만들었다. 남성노동자가 중심인 사회(가부장제 사회)에서 가정은 출산을 통해 노동력 재생산과 (남성)노동자에게 평온과 안정, 건강관리 등 많은 부분을 가사노동으로 충당하도록 강제해왔다. 비록 가족 해체의 원인을 단순히 자본의 변화된 생산구조에서만 찾을 수는 없겠으나 현재 우리 사회에서 전통적 가족 해체 징후는 노령화, 출산율 감소문제와 더불어 가장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오랫동안 남성중심적 시선에 의해 은폐되어 왔던 성과 생식의 문제는 이제 사적인 영역에서 공적인 영역의 문제가 된 지 오래되었다. 이런 여성주의의 시선을 통해 평화와 군사주의, 남성성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권인숙의 『대한민국은 군대다』(청년사, 8월)와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교양인, 11월)은 우리 사회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기하고 있다.

5. 생명의 기반을 흔드는 복제기술의 윤리
다섯 번째는 원래 “삶의 기반을 흔드는 먹을거리 산업”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 글을 준비하고 있는 동안 불거져 나온 난자 불법매매와 황우석 교수의 ‘세계줄기세포허브’의 윤리성 문제가 제기되어 “생명의 기반을 흔드는 복제기술의 윤리” 문제가 더 시급한 현안이란 생각이 들었다. 유엔에 의해 제정된 세계인권선언의 제4조는 “어느 누구도 사람을 노예처럼 다루거나 물건처럼 사고 팔 수 없다.”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을 통한 난자의 불법매매는 과정의 불법성은 물론 “어차피 난자는 매달 나오는 거고, 돈이 필요해서 팔았을 뿐 그렇게 해서 태어나는 아이가 내 아이란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는 판매자의 말에서 우리는 생명윤리의식 부재의 심각성을 느낄 수 있다. 문제의 심각성은 판매자의 윤리의식만이 아니라 불법매매에 의한 것인 줄 알면서도 시술해준 이들이 우리 사회의 의료를 책임지는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란 사실이다. 정부 역시 이런 사실을 알고도 묵인해준 혐의가 제기되고 있다. 그런 와중에 황우석 박사와 함께 세계줄기세포허브 프로젝트에 참가해온 미국의 새튼 교수가 난자 취득의 윤리문제를 제기했다. 그 진위 여부는 좀더 시간이 걸려야 해결되겠으나 2004년 줄기세포 연구 발표 후부터 난자 출처에 대한 의구심이 계속돼왔다는 사실은 생명산업의 선도적 지배라는 이익 앞에 우리 사회의 눈이 얼마나 어두워졌는가를 반증한다. 도미니크 르쿠르는 『인간 복제 논쟁─인간 복제 이후의 인간은 어디로 가는가』(지식의풍경, 11월)를 통해 기술과 인간본성의 위기 사이에 서 있는 인간복제문제를 제기한다.


이외에도 한일관계가 해마다 과거 역사 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는 것처럼 한·중이 해마다 먹을거리의 안전성 문제를 놓고 갈등을 빚는 일도 이제는 연중행사가 되었고, 이와 맞물려 쌀협상국회비준반대 투쟁 등이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 산적해 있다. 또한 20여 년을 끌고 온 방폐장 부지 선정 주민투표는 그 과정의 온갖 구설과 후유증 속에서도 여전히 핵발전을 고집하는 우리의 에너지 체계를 되돌아보게 해주었고, 경기도 최전방 GP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 교원평가제 도입 논란 등 2005년 한 해는 해결하지 못한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들을 내년의 과제로 남겨둔 채 저물어가고 있다.


전성원 windshoes@naver.com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 “사람으로 본 20세기 문화예술사─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를 운영하며 위성DMB방송 북채널 < Art Magazine >의 고정패널로 활동중이다

<출처 : 함께 사는 길/ 2005년 12월호/ http://hamgil.kfem.or.kr/bbs/view.php?id=200512&no=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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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이매지 > [퍼온글] 2006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

2006 문화관광부 우수교양도서



【총 류】
책으로 보는 SBS 잘먹고 잘사는 법 1, 2 | SBS 잘먹고 잘사는 법 제작팀 | 2006-03-04 | 가치창조
건강상식 오류사전 | 우도 폴머 외/이혜원 | 2006-02-25 | 경당
철도관련큰사전 | 백남욱, 이상진 | 2006-04-29 | 골든벨
설화의 재발견 | 모봉구 | 2006-02-25 | 눈과 마음
세계 최고의 게임크리에이터 9인의 이야기 | 김정남, 김정현 | 2006-01-25 | 대림
책사냥꾼: 어느 책중독자의 수다 | 존 백스터/서민아 | 2006-07-20 | 동녘
섬기는 부모가 자녀를 큰사람으로 키운다 | 전혜성 | 2006-04-30 | 랜덤하우스코리아
세계를 배우는 어린이 지도 | 김만곤 외 | 2006-05-04 | 랜덤하우스코리아
나는 비빔밥 인간을 만들고 싶다 | 박태견 | 2006-01-05 | 뷰스
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 | 교수신문 | 2006-07-22 | 생각의 나무
놀이로 이해하는 우리 아이, 처음 만나는 놀이치료 | 김광웅, 김화란 | 2006-08-18 | 숙명여자대학교출판국
오리와 부엉이 | 한나 요한젠/임정희 | 2005-12-15 | 예원미디어
세계의 역사기념시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2006-08-25 | 오름
올 댓 와인 | 조정용 | 2006-06-26 | 해냄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 한형조 외 65인 | 2006-07-18 | 휴머니스트
지상의 아름다운 도서관 | 최정태 | 2006-08-15 | 한길사


【철 학】
포월과 소내의 미학 | 김진석 | 2006-07-14 | 문학과지성사
주역 마음 속에 마르지 않는 우물을 파라 | 심의용 | 2006-05-30 | 살림출판사
영화 속의 청소년 | 신민섭 외 | 2006-08-10 | 서울대학교출판부
욕망의 힘 | 빌리 파시니/이옥주 | 2006-03-10 | 에코리브르
평등(21세기를 위한 주제 02) | 알렉스 캘리니코스/선우현 | 2006-06-15 | 울력
고통에게 따지다 | 유호종 | 2006-04-24 | 웅진씽크빅
철학, 역사를 만나다 | 안광복 | 2005-12-15 | 웅진씽크빅
유레카 1,2 | 카를 요제프 두르벤/김희상 | 2006-05-01 | 유토피아
철학적 산문 | 소흥렬 | 2006-01-25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오늘 우리는 왜 니체를 읽는가 | 정동호 외 | 2006-05-30 | 책세상
숲께 드리는 숲의 철학 | 숲과문화연구회 | 2006-08-10 | 철학과현실사
여신 미네르바의 진리파일 | 이수정 | 2006-03-15 | 철학과현실사
철학과 인문학의 대화 | 황수영 | 2005-12-15 | 철학과현실사
오해의 심리학 | 오드리 넬슨 외/김경숙 | 2006-01-10 | 친구미디어
예수, 노자를 만나다 | 이명권 | 2006-05-04 | 코나투스
대담-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 | 도정일 외 | 2005-11-14 | 휴머니스트
공자 속의 붓다, 붓다 속의 공자 | 박민영 | 2005-10-07 | 들녘출판사
루소, 학교에 가다 | 조상식 | 2006-05-01 | 디딤돌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 권창은 외 | 2005-11-15 | 고려대학교출판부
부탁해요, 아인슈타인-아인슈타인의 과학철학 | 장 클로드 카리에르/이세진 | 2006-04-10 | 모티브북


【종 교】
러시아 정교 - 역사·신학·예술 | 석영중 | 2005-10-05 | 고려대학교출판부
선방에서 길을 물었더니 | 서화동 | 2006-04-17 | 고즈윈
마음의 진보 | 카렌 암스트롱/이희재 | 2006-02-17 | 교양인
40년의 벽을 넘어: 보수신학자와 진보운동가의 역사 對話 | 김남식 외 | 2006-04-11 | 대한기독교서회
동양신화 백과사전 | 레이첼 스톰/김숙 | 2006-05-22 | 루비박스
숨겨진 복음서, 영지주의 | 일레인 페이절스/하연희 | 2006-05-15 | 루비박스
선화 - 마음이 단순해지는 | 김홍근 | 2006-06-25 | 마음산책
자연과 사람 사이 절 | 윤제학 | 2006-04-08 | 명상
성書의 역사 | 크리스토퍼 드 하멜/이종인 | 2006-06-20 | 미메시스
라틴아메리카 신화와 전설 | 박종욱 | 2005-09-15 | 바움
우리 곁에서 만나는 동서양 신화 | 이경덕 | 2006-08-25 | 사계절출판사
라인홀드 니버 | 이상원 | 2006-04-06 | 살림출판사
초록의 공명 | 지율 | 2005-11-10 | 삼인
붓다, 나를 흔들다 | 법륜 | 2005-11-15 | 샨티
구약성서, 명화를 만나다 | 키아라 데 카포아/김숙 | 2006-07-15 | 예경
이슬람 문명의 이해 | 공일주 | 2006-08-10 | 예영커뮤니케이션
나의 선어 99 | 홍사중 | 2006-03-28 | 이다미디어
세계 종교의 문을 열다 | 류상태 | 2005-12-28 | 인물과사상
누구를 위한 종교인가-종교와 심리학의 만남 | 권수영 | 2006-03-30 | 책세상
성경 왜곡의 역사 | 바트 어만/민경식 | 2006-05-15 | 청림출판
종교의 시작은? | 실비 지라르데/이효숙 | 2006-07-05 | 초록개구리
한국 교회 처음 이야기 | 이덕주 | 2006-05-26 | 홍성사
불교의 향기, 그 다섯 아름다움 | 정동주 | 2005-11-11 | 다른세상
스페인 종교재판소 | 박종욱 | 2006-02-28 | 부산외국어대학교출판부


【사회과학】
그림으로 이해하는 경제사상 | 홍은주 | 2006-01-17 | 개마고원
그림으로 이해하는 정치사상 | 김만권 | 2005-12-10 | 개마고원
그 순간 대한민국이 바뀌었다 | 김욱 | 2005-10-05 | 개마고원
오리엔탈리즘의 새로운 신화들 | 성일권 | 2006-06-05 | 고즈윈
청개구리 길들이기 | 로버트 J. 매켄지/이순호 | 2006-08-25 | 교양인
시장경제원리로 읽는 경제상식의 허와 실 | 한국경제연구원 | 2006-01-10 | 굿인포메이션
新 국부론 | 좌승희 | 2006-06-30 | 굿인포메이션
주제와 변주 | 인디고 서원 | 2006-04-13 | 궁리출판
상식지존, 뇌를 깨워라 | 송정림 | 2006-04-20 | 글로세움
열정 깨우기 | 용혜원 | 2005-11-10 | 나무생각
한 가지만 알아도 쉽게 풀리는 남녀 대화법 | 이정숙 | 2006-04-10 | 나무생각
녹색의 상상력 | 박병상 | 2006-02-15 | 달팽이출판
끌리는 사람은 1%가 다르다 | 이민규 | 2005-11-11 | 더난출판
일본 문화의 힘 | 윤상인 외 | 2006-07-14 | 동아시아
21세기 한중일 삼국지 | 우수근 | 2006-08-25 | 두리미디어
후지쯔 성과주의 리포트 | 조시게유키(城繁幸)/윤정원 | 2005-10-14 | 들녘출판사
함께 크는 삶의 시작, 공동육아 | 이부미 외 | 2006-05-03 | 또하나의문화
핀란드 들여다보기 | 이병문 | 2006-07-24 | 매경출판
CO2 전쟁 | 조현재 외 | 2006-07-03 | 매경출판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 | 최세진 | 2006-07-01 | 메이데이
간디, 나의 교육철학 | 마하트마 간디/고병헌 | 2006-03-03 | 문예출판사
스토킹의 심리학 | 이규환 | 2005-09-30 | 미토
민족신화와 건국영웅들 | 임재해 | 2006-06-30 | 민속원
중국의 기업 산업 경제 | 이근 외 | 2005-10-10 | 박영사
한국의 부농들 : WTO 시대의 희망 농업 보고서 | 박학용 외 | 2006-06-26 | 부키
암호 이야기 | 박영수 | 2006-05-23 | 북로드
독일문화읽기 | 황성근 | 2006-04-10 | 북코리아
30년만의 휴식 | 이무석 | 2006-05-09 | 비전과리더십
싱글 마케팅 | 이연수 | 2005-11-25 | 비즈니스북스
화해를 위해서: 교과서, 위안부, 야스쿠니, 독도 | 박유하 | 2005-09-30 | 뿌리와이파리
한국산업의 발전비전 2020 | 산업비전2020연구팀 | 2005-12-31 | 산업연구원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조지 레이코프/유나영 | 2006-04-14 | 삼인
미래기업의 인재코드 | 최병권 | 2005-12-31 | 새로운 제안
그래도 자식은 희망입니다 | 박경애 | 2006-04-10 | 시그마프레스
인터넷중독 완전정복 | 이형초, 심경섭 | 2006-07-13 | 시그마프레스
좋은 부모 되기 위한 10계명 | 로렌스 스타인 버그/신민섭 | 2006-03-31 | 시그마프레스
남북의 청소년 | 조정기 외 | 2006-07-25 | 시대정신
교육정책의 나비효과를 꿈꾸며 | 한석수 | 2005-10-10 | 아르케
민주주의 대 민주주의 | 주성수 외 | 2006-03-15 | 아르케
디지털미디어와 예술의 확장 | 피종호 외 | 2006-08-30 | 아카넷
얘들아 산책가자 | 임재택 외 | 2006-04-25 | 양서원
미래의 소비자들 | 마틴 레이먼드/박정숙 | 2006-05-20 | 에코리브르
우리 시대의 지식인을 말한다 | 전상인 | 2006-04-25 | 에코리브르
환경경영 리포트 | 양인목 외 | 2006-02-14 | 에코리브르
협력적 통치 - 원효, 율곡, 함석헌, 김구를 중심으로 | 이문영 | 2006-04-20 | 열린책들
중국 속에 일떠서는 한민족 | 차한필 | 2006-08-28 | 예문서원
열정의 중심에 서라 | 백정군 | 2005-12-12 | 오늘의책
칭기즈칸 리더십 | 신광철 외 | 2006-05-31 | 오늘의책
17살 경제학 | 한진수 | 2006-07-31 | 웅진씽크빅
논리적이면서도 매력적인 글쓰기의 기술 | 강미은 | 2006-04-15 | 원앤원북스
왼쪽으로 가는 나 오른쪽으로 가는 너 | 노주선 | 2005-09-05 | 원앤원북스
직장인을 위한 생존경제학 | 최성환 | 2006-07-28 | 원앤원북스
홍보 리얼리티 | 금석호 | 2006-08-10 | 이서원
슬로 석세스 | 김정하 | 2006-01-13 | 이코북
건축, 우리의 자화상 | 임석재 | 2005-10-21 | 인물과사상사
대중문화의 겉과 속 3 | 강준만 | 2006-01-23 | 인물과사상사
머리를 감기 전에 생각부터 감아라 | 안상헌 | 2005-11-15 | 즐거운상상
슬픔은 흘러야 한다 | 윤정은 | 2005-09-15 | 즐거운상상
꼭 알아야 할 시사 교양 대한민국 트렌드 | 조영경 글 | 2005-10-20 | 지경사
엑소더스 코리아 | 엄경영 외 | 2006-01-20 | 집사재
세계는 평평하다 | 토머스 L. 프리드먼/김상철 외 | 2005-11-30 | 창해
에드워드 사이드 다시 읽기 | 김상률 외 | 2006-06-05 | 책세상
광고, 상품, 쇼핑의 노예들 | 전영우 | 2006-04-30 | 청년사
지혜로운 부모의 멘토링 | 김종환 | 2006-05-18 | 파미르
세계화 이후의 민주주의 | 귄터 그라스 외/이승협 | 2005-11-28 | 평사리
지리 교사들, 남미와 만나다 | 지리교육연구회 지평 | 2005-12-15 | 푸른길
안면도가 우리 학교야 | 김용성 외 | 2005-11-30 | 푸른디딤돌
거짓말하는 사회 | 볼프강 라인하르트/김현정 | 2006-06-26 | 플래닛미디어
서울대 김신일 교수의 교육생각 | 김신일 | 2006-02-20 | 학지사
당신들의 대한민국 2 | 박노자 | 2006-01-23 | 한겨레출판
중국의 13억 경제학 | 한우덕 | 2006-04-05 | 한국경제신문 한경BP
피터 드러커의 위대한 혁신 | 피터 드러커/권영설 외 | 2006-07-10 | 한국경제신문 한경BP
당신은 아들에게 어떤 아버지입니까? | 스테판 B. 폴터/이원기 | 2005-11-30 | 지식의날개
세종시대 ‘家’와 ‘國家’ | 이한수 | 2006-06-30 | 한국학술정보
21세기 아침의 사색 | 리영희 | 2006-08-30 | 한길사
담론의 발견 | 고명섭 | 2006-06-26 | 한길사
미디어로 여는 세상 | 강정훈 외 | 2005-11-15 | 한나래
디자인 혁명 | 조동성 외 | 2006-04-15 | 한스미디어
그래도 농촌이 희망이다 | 박진도 | 2005-12-15 | 한울
보스턴 일기 | 윤진호 | 2005-10-30 | 한울
통계와 함께 배우는 경제학 | 노택선, 김중렬 | 2005-12-20 | 해남
월든 투 | B.F 스키너/이장호 | 2006-06-20 | 현대문화센타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꽃 세밀화 | 이성아 | 2006-02-20 | 현암사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 | 하종강 | 2006-05-01 | 후마니타스
조봉암과 진보당 | 정태영 | 2006-07-31 | 후마니타스
침묵과 열광 - 황우석사태 7년의기록 | 강양구, 김병수, 한재각 | 2006-06-26 | 후마니타스
신화의 추락, 국익의 유령: 황우석, 그리고 한국의 저널리즘 | 원용진 외 | 2006-05-30 | 한나래
대학이 변하고있다 | 이훈구 | 2005-10-10 | 법문사


【순수과학】
그림으로 이해하는 우주과학사 | 혼다 시케치카/조영렬 | 2006-01-21 | 개마고원
산학서로 보는 조선수학 | 장혜원 | 2006-03-02 | 경문사
암호론 | 김기항 | 2005-10-15 | 경문사
새로운 인문주의자는 경계를 넘어라 | 이인식 외 | 2005-10-15 | 고즈윈
소리를 질러봐 | 최준곤 외 | 2006-08-04 | 동아사이언스
숲은 더 큰 학교입니다 | 최소영 | 2006-07-05 | 랜덤하우스중앙
교양으로 읽는 과학의 모든 것 | 강봉균 외 93명 한국과학문화재단 | 2006-04-25 | 미래M&B
혼혈파워 | 앨런 지브/윤재석 | 2006-06-01 | 부글북스
에덴의 용 | 칼 세이건/임지원 | 2006-08-11 | 사이언스북스
세계명작 속에 숨어 있는 과학 1,2 | 최원석 | 2006-02-25 | 살림출판사
놀랍다! 위대한 과학자 | 레슬리 앨런 호비츠 외/박영준 외 | 2006-07-20 | 생각의 나무
시크릿 하우스 | 데이비드 보더니스/김명남 | 2006-08-05 | 생각의 나무
행성 이야기 | 데이바 소벨/김옥진 | 2006-01-12 | 생각의 나무
과학은 예술이다 | 보리스 카스텔 외 /이철우 | 2006-07-25 | 아카넷
한 번은 꼭 읽어야 할 과학의 역사 1,2 | 존 그리빈 외/최주연 | 2005-12-05 | 에코리브르
살아있는 유전자 | 크리스티아네 뉘슬라인폴하르트/김기은 | 2006-07-25 | 이치
스포츠 속에 과학이 쏙쏙!! | 손영운 외 | 2006-01-15 | 이치
한국의 늪 | 강병국, 최종수 | 2006-01-13 | 지성사
지구의 삶과 죽음 | 피터 워드 외/이창희 | 2006-03-20 | 지식의숲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실험 열 가지 | 로버트 P. 크리즈/김명남 | 2006-08-31 | 지호
쉿! 바다의 비밀을 말해줄게 | 권수진 외 | 2006-07-10 | 토토북
옛날 옛적에 아직 우주가 태어나기도 전에…… | 로버트 길모어/이충호 | 2006-02-10 | 한승
줄기 세포 | 크리스토퍼 토머스 스콧/이한음 | 2006-03-25 | 한승
내 DNA를 가지고 대체 뭘 하려는 거지? | 데이비드 E. 던컨/김소정 | 2006-05-05 | 황금부엉이
느끼는 뇌 | Joseph LeDoux/최준식 | 2006-07-29 | 학지사
아름다운 우리 몸 사전 | 최현석 | 2006-05-15 | 지성사
철없는 전자와 파란만장한 미토콘드리아 그리고 인류씨 이야기 | 서형 | 2006-07-14 | 지성사
뭐라고, 이게 다 유전자 때문 이라고? | 리사 사크라이스트치우/김소정 | 2006-08-31 | 한얼미디어


【기술과학】
책으로 보는 KBS 생로병사의 비밀 3 | KBS <생로병사의 비밀> 제작팀 | 2006-02-28 | 가치창조
한국의 산삼 | 김홍대 | 2005-10-07 | 김영사
곰탕이 건강을 말아먹는다 | 황성수 | 2006-08-14 | 동도원
일반인과 최초 반응자를 위한 응급처치 | 박상규 | 2006-06-01 | 라이프사이언스
아름답고 새로운 도로공학원론 | 손원표 | 2006-02-15 | 반석기술
작은세계 기술 나노의 세계 | 노승정 외 | 2006-07-10 | 북스힐
과학사의 유쾌한 반란 | 하인리히 찬클/전동열/이미선 | 2006-08-25 | 아침이슬
멘토, 지식경영시대의 새로운 리더 | 마이클 J. 마쿼트 외/원은주 | 2006-07-25 | 이른아침
영국의 플라워 쇼와 정원문화 | 윤상준 | 2006-04-15 | 조경
우리 과학의 수수께끼 | 신동원 | 2006-05-20 | 한겨레출판
맛있는 우리 음식 | 이정희, 이애자 | 2006-01-20 | 효일
우리 몸은 채식을 원한다 | 이광조 | 2006-07-10 | 현암사


【예 술】
어둠의 방 | 송태효 | 2006-03-20 | 고려대학교출판부
나를 울린 한국전쟁 100장면 | 김원일 외 | 2006-06-25 | 눈빛출판사
영화, 그림 속을 걷고 싶다 | 한창호 | 2005-09-26 | 돌베개
한국의 美를 다시 읽는다 | 권영필 외 | 2005-10-10 | 돌베개
청소년을 위한 한국음악사(양악편) | 민경찬 | 2006-08-25 | 두리미디어
동양의 타이포그래피, 문자도 | 이명구 | 2005-09-26 | 리디아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 | 오드리 설킬드/허진 | 2006-05-20 | 마티
KBS FM 월드뮤직 | 장옥님 외 | 2005-12-19 | 문학사상사
탄츠테아터 | 수잔네 슐리허/박균 | 2006-07-05 | 범우사
에로스와 타나토스 | 조용훈 | 2005-12-25 | 살림출판사
내가 좋아하는 장소에게 | 이민아 | 2006-06-20 | 샘터사
축제, 세상의 빛을 담다 | 김규원 | 2006-06-16 | 시공사
랑데부 아트-디지털 시대의 예술을 만나다 | 이광록, 여경환 | 2006-04-25 | 아트북스
한국연극전사 | 서연호 | 2006-07-08 | 연극과인간
현대일본희곡집 2 | 한일연극교류협의회 | 2005-11-15 | 연극과인간
음악회에 대해 궁금한 몇 가지 | 크리스티아네 테빙켈/함수옥 | 2006-02-10 | 열대림
미의 역사 | 움베르토 에코/이현경 | 2005-10-15 | 열린책들
건축이란 무엇인가 | 승효상 외 | 2005-12-01 | 열화당
트뤼포: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 | 앙투안 드 베크 외/한상준 | 2006-06-26 | 을유문화사
세계명상음악순례 | 김진묵 | 2006-07-12 | 정신세계사
학교 안의 미술 학교 밖의 미술 | 제임스 엘킨스/장호연 | 2006-05-05 | 책세상
바르바와 오딘극단의 연극여정 | 유제니오 바르바/장인숙 | 2005-09-15 | 평민사
희곡창작의 길잡이 | 이강백, 윤조병 | 2006-08-30 | 평민사
왜 공공미술인가 | 박삼철 | 2006-02-25 | 학고재
90년대를 빛낸 명반 50 | 신승렬 외 | 2006-08-01 | 한울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 | 황두진 | 2005-12-10 | 해냄
유명짜한 스타와 예술가는 왜 서로를 탐하는가 | 존 A. 워커/홍옥숙 | 2006-08-07 | 현실문화연구
삼인삼색 미학오디세이 1,2,3 | 현태준 외 | 2006-06-19 | 휴머니스트


【언 어】
아이들은 어떻게 말을 배우나 | 윌리엄 오그레이디/박경자 | 2005-12-15 | 고려대학교출판부
역사가 새겨진 우리말 이야기 | 정주리 외 | 2006-07-05 | 고즈윈
생각이 마음의 밭을 가는 한자놀이 | 팽철호 | 2006-04-20 | 글누림 출판사
글쓰기의 전략 | 정희모, 이재성 | 2005-11-15 | 들녘출판사
우리말에 대한 예의 | 이진원 | 2005-12-15 | 서해문집
다른 듯 같은 듯 | 사이토 아케미 | 2006-07-15 | 소화 출판사
좋은 글, 좋은 말을 위한 우리말 활용사전 | 조항범 | 2005-10-01 | 예담
광고, 커뮤니케이션, 문화 마케팅 | 최용호 외 | 2005-09-27 | 인간사랑
언어 속으로: 장영준의 우리말 산책 | 장영준 | 2005-09-10 | 태학사
바른말 고운말2 | KBS 한국어연구회 | 2006-06-01 | 한국방송출판
재미있는 한국어 이야기 | 김진호 | 2006-03-02 | 박이정출판사
통역·번역 핵심가이드북 | 김난미 외 | 2005-09-25 | 현학사


【문 학】
소설 퇴계 이황 | 김성한 | 2005-09-15 | 가람기획
데르수 우잘라 | 블라디미르 클라우디에비치 아르세니에프/김욱 | 2005-11-25 | 갈라파고스
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 | 정여울 | 2006-06-23 | 강
재주 많은 여섯 쌍둥이 | 박지나 외 | 2006-05-15 | 강원대학교 출판부
가난의 비밀 | 정연희 | 2006-05-18 | 개미
라모의 조카 | 드니 디드로/황현산 | 2006-06-05 | 고려대학교출판부
다빈치 코드와 숨겨진 역사 | 린 피크넷 외 /권인택 | 2006-01-05 | 교문사
괜찮아,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야 | 잽 테르 하르/이미옥 | 2006-06-20 | 궁리출판
옥루몽 1-5 | 남영로/김풍기 | 2006-05-20 | 그린비
꾀주머니 뱃속에 차고 계수나무에 간 달아놓고 | 장재화 | 2006-07-05 | 나라말
핀투여행기 상,하 | 페르낭 멘데스 핀투/이명 | 2005-12-19 | 노마드북스
지붕 위의 시인 로니 | 재클린 우드슨/김율희 | 2005-10-25 | 다른
떠도는 혼 | 허버트 J. 바트/이문희 | 2005-10-31 | 다른우리
학교로 간 터줏대감 | 전다연 | 2006-05-20 | 대교출판
내 동생 싸게 팔아요 | 임정자 | 2006-08-10 | 대한교과서
수목장-에코 다잉의 세계 | 변우혁 | 2006-05-17 | 도솔
거제도 | 손영목 | 2006-06-30 | 동서문화사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 이승우 | 2006-03-10 | 마음산책
아리랑 시원설 연구 | 김연갑 | 2006-06-11 | 명상
살구 씨, 몇만 년 | 신현득 | 2005-11-15 | 문원
아빠는 한 걸음 뒤에 | 이혜영 | 2006-01-30 | 문원
연못에 놀러온 빗방울 | 서향숙 | 2005-10-15 | 문원
도둑게 | 김이정 | 2006-04-10 | 문이당
연리지가 있는 풍경 | 김종성 | 2005-11-24 | 문이당
자두 | 홍양순 | 2005-09-20 | 문이당
꽃과 숨기장난 | 서상영 | 2006-04-28 | 문학과지성사
보이지 않는 손 | 복거일 | 2006-03-24 | 문학과지성사
무덤 속의 그림 | 문영숙 | 2005-11-30 | 문학동네
분홍색 흐느낌 | 신기섭 | 2006-05-22 | 문학동네
빛의 제국 | 김영하 | 2006-08-08 | 문학동네
약혼 | 이응준 | 2006-07-24 | 문학동네
달의 영토 | 박현솔 | 2006-01-10 | 문학사상사
봉지 | 김인숙 | 2006-07-25 | 문학사상사
연적 | 문형렬 | 2006-04-05 | 문학세계사
오늘은 이 산이 고향이다 | 이종만 | 2006-08-25 | 문학세계사
초록 묵시록 | 김여정 | 2006-06-01 | 문학아카데미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어! | 박경진 | 2006-07-15 | 미세기
나비를 태우는 강 | 이화경 | 2006-08-24 | 민음사
인디오 여인 | 곽효환 | 2006-05-26 | 민음사
리언이야기 | 리언 월터 틸리지/배경내 | 2006-04-01 | 바람의 아이들
소녀 안네 프랑크 평전 | 멜리사 뮐러/박정미 | 2005-11-25 | 바움
인생의 동반자들 | 제인 비더/박웅희 | 2006-03-20 | 바움
낫짱이 간다 | 김송이 | 2006-07-25 | 보리
달걀 한 개 | 박선미 | 2006-05-31 | 보리
고슴도치 아이 | 카타지나 코토프스카/최성은 | 2005-12-15 | 보림출판사
핵 폭발 뒤 최후의 아이들 | 구드룬 파우제방/함미라 | 2006-06-20 | 보물창고
스토리텔링 | 조은하 외 | 2006-05-15 | 북스힐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 | 클로드 모르강/조광희 | 2006-01-27 | 북하우스
내 생각은 누가 해줘? | 임사라 | 2006-06-15 | 비룡소
생일 | 장영희 | 2006-04-01 | 비채코리아북스
노근리, 그 해 여름 | 김정희 | 2005-09-02 | 사계절출판사
몽구스 크루 | 신여랑 | 2006-08-04 | 사계절출판사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 | 라헐 판 코에이/박종대 | 2005-11-25 | 사계절출판사
시향-2006 | 미주한국시문학회 | 2005-12-30 | 월인
꿀잠 | 송경동 | 2006-03-30 | 삶이 보이는 창
도깨비가 준 보물 | 서정오 외 | 2005-09-01 | 삼성출판사
가만가만 사랑해야지 이 작은 것들 | 이철수 | 2005-10-10 | 삼인
죽은 시인들의 사회 | 우대식 | 2006-02-10 | 새움
그 산을 넘고 싶다 | 한젬마 | 2006-07-31 | 샘터사
엄마가 사라졌다 | 수 코벳/고정아 | 2005-11-15 | 생각과느낌
얘들아 단오가자 | 이순원 | 2006-05-18 | 생각의 나무
미국 흑인문학과 그 전통 | 천승걸 | 2006-08-25 | 서울대학교출판부
선사시대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다 | 장무령 | 2005-09-30 | 세계사
슬픈 거짓말 | 김남길 외 6명 | 2006-01-25 | 세상모든책
붓끝으로 부사산 바람을 가르다 | 남옥/김보경 | 2006-03-30 | 소명출판
와신상담의 마음으로 일본을 기록하다 | 원중거/박재금 | 2006-03-30 | 소명출판
하얀 마사이 | 코리네호프만/두행숙 | 2006-07-01 | 솔출판사
지역문학과 주변부적 시각 | 구모룡 | 2005-09-25 | 신생
탐독 - 유목적 사유의 탄생 | 이정우 | 2006-02-27 | 아고라
셰익스피어의 여인들1 | 안나 제임슨/서대경 | 2006-07-24 | 아모르문디
비버족의 표식 | 엘리자베스 G. 스피어/김기영 | 2006-04-24 | 아침이슬
자전거도둑 | 신현정 | 2005-09-12 | 애지
나무소녀 | 벤 마이켈슨/홍한별 | 2006-06-07 | 양철북
두 친구 이야기 | 안케 드브리스/박정화 | 2005-11-18 | 양철북
로쿠베, 조금만 기다려 | 하이타니 겐지로/햇살과나무꾼 | 2006-03-10 | 양철북
허수아비의 여름 휴가 | 시게마츠 기요시/오유리 | 2006-08-14 | 양철북
문신공방 하나 | 정과리 | 2005-12-27 | 역락
김정환의 할 말 안할 말 | 김정환 | 2006-01-23 | 열림원
한국 전후 문제시인 연구 01~05 | 김학동 외 | 2005-09-27 | 예림기획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 문승묵 | 2006-08-20 | 예옥
거대한 뿌리 | 김중미 | 2006-08-21 | 우리교육
검둥소 인사동 | 이생진 | 2006-01-01 | 우리글
붉은 리본 | 전경린 | 2006-05-09 | 웅진씽크빅
어둠의 숲에 떨어진 일곱 번째 눈물 | 정지아 | 2005-12-10 | 웅진씽크빅
상계동 11월 은행나무 | 강세환 | 2006-08-08 | 시와 에세이
돌아온 삽사리 곰이와 몽이 | 임인학 | 2005-12-29 | 청어람미디어
생성의 시학 | 이연승 | 2005-10-17 | 월인
차이나 리포트 | 최명철 | 2006-08-31 | 월인
100권의 금서 | 니컬러스 J.캐롤리드스 외/손희승 | 2006-04-25 | 위즈덤하우스
접동새 이야기 | 오정희 | 2006-02-28 | 이가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 최복현 | 2006-08-05 | 이른아침
얼씨구 절씨구 풍년이 왔네 | 원동은 | 2006-01-16 | 재미마주
열정을 기억하라 | 알베르트 슈바이처/심재관 | 2006-08-25 | 좋은생각사람들
옛이야기와 어린이문학 | 이지호 | 2006-04-01 | 집문당
산속 어린 새 | 김명수 | 2005-12-26 | 창비
새는 새는 나무 자고 | 전래동요 | 2006-05-30 | 창비
애벌레를 위하여 | 이상권 | 2005-10-31 | 창비
캄캄한 날개를 위하여 | 전성호 | 2006-05-05 | 창비
나를 격려하는 하루 | 김미라 | 2006-08-03 | 나무생각
일본 하이쿠 선집―책세상문고 세계문학 034 | 마쓰오 바쇼 외/오석윤 | 2006-04-30 | 책세상
밥이나 먹자, 꽃아 | 권현형 | 2006-05-15 | 천년의시작
김수영 시의 수사학 | 장석원 | 2005-09-15 | 청동거울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 | 임동확 | 2005-11-23 | 코나투스
작은 것의 아름다움 | 남공철/안순태 | 2006-04-27 | 태학사
우리시대 현대시조 100인 선 | 이지엽 외 | 2006-07-18 | 태학사
전기-초월과 환상, 서른한 편의 기이한 이야기 | 배형/최진아 | 2006-01-09 | 푸른숲
엄마에게는 괴물 나에게는 선물 | 길지연 | 2005-12-20 | 국민서관
길 위의 책 | 강미 | 2005-12-30 | 푸른책들
밤티 마을 봄이네 집 | 이금이 | 2005-10-31 | 푸른책들
요헨의 선택 | 한스-게오르크 노아크/모명숙 | 2006-07-29 | 풀빛
여우야 여우야 뭐 하니 | 조영아 | 2006-07-18 | 한겨레출판
내 몸 위로 용암이 흘러갔다 | 한명희 | 2005-12-12 | 세계사
디지털 텍스트와 문화 읽기 | 김진량 | 2005-09-21 | 한양대학교출판부
간찰, 선비의 마음을 읽다 | 심경호 | 2006-05-09 | 한얼미디어
세계문학의 거장을 만나다 | 김준태 | 2006-01-09 | 한얼미디어
옛길을 가다 | 김재홍, 송연 | 2005-10-19 | 한얼미디어
악마의 사랑 | 임노월, 방민호 | 2005-10-24 | 향연
산해경(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동양고전) | 미상/장수철 | 2005-12-07 | 현암사
시인박물관 | 손현숙/우찬제 | 2005-12-20 | 현암사
우리 가족입니다 | 이혜란 | 2005-10-15 | 보림출판사
팔방미인 이영미의 참하고 소박한 우리 밥상 이야기 | 이영미 | 2006-05-01 | 황금가지
소멸하는 순간 | 박유하 | 2006-07-10 | 황소자리
검은 마법사와 쿠페 | 모리 에토/박미옥 | 2006-08-25 | 휴먼앤북스
근대문학의 종언 | 가라타니 고진/조영일 | 2006-04-25 | b


【역 사】
도서명 저자/역자/편자 발행일 출판사
조선시대의 음식문화 | 김상보 | 2006-01-16 | 가람기획
역사를 아는 힘 | 한영우 | 2005-11-24 | 경세원
김병모의 고고학여행 1,2 | 김병모 | 2006-05-24 | 고래실
한국사, 나는 이렇게 본다 | 이이화 | 2005-11-20 | 길
가로세로 세계사 1 | 이원복 | 2006-04-24 | 김영사
고구려의 역사 | 이종욱 | 2005-09-05 | 김영사
서동과 처용이 삼국유사를 박차고 나오다 | 전경원 | 2006-08-30 | 꿈이있는세상
21세기 천황제와 일본 | 박진우 | 2006-07-30 | 논형
또 하나의 유산 | 정진해 외 | 2006-06-10 | 눌와
문중양 교수의 우리역사 과학기행 | 문중양 | 2006-04-20 | 동아시아
배움과 가르침의 끝없는 열정 | 국사편찬위원회 | 2005-10-10 | 두산동아
불의 기억1,2,3 |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박병규 | 2005-11-05 | 따님
천재 파티시에, 프랑스 요리의 왕 | 이안 켈리/채은진 | 2005-09-15 | 말글빛냄
마주 보는 한일사 I, II | 전국역사교사모임(한국), 역사교육자협의회(일본) | 2006-08-10 | 사계절출판사
서양- 위대한 창조자들의 역사 | 이바르 리스너/김동수 | 2005-11-05 | 살림출판사
발해고 | 유득공/정진헌 | 2006-01-25 | 서해문집
청소년을 위한 택리지 | 이중환/김흥식 | 2006-04-24 | 서해문집
로마가 만든 영웅들 | 플루타르코스/천병희 | 2006-06-30 | 숲
만해 한용운 평전 | 김삼웅 | 2006-08-15 | 시대의창
혁명과 웃음 | 천정환 외 2인 | 2005-11-10 | 앨피
동아시아 역사교과서는 어떻게 쓰여 있을까? | 나카무라 사토루외 13명/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문화교류센터 | 2006-02-15 | 에디터
중도의 길을 걸은 신민족주의자 | 김인식 | 2006-02-20 | 역사공간
역사용어 바로쓰기 | 역사비평편집위원회 | 2006-08-21 | 역사비평사
위대한 양심 | 지그프리트 피셔 파비안/김수은 | 2006-07-25 | 열대림
의산문답(개혁을 꿈꾼 과학사상가 홍대용의 고뇌) | 홍대용/이숙경 외 | 2006-04-15 | 꿈이있는세상
위대한 패배자 | 볼프 슈나이더/박종대 | 2005-09-20 | 을유문화사
콜럼버스와 그 아들들의 세계 | 주느비에브 포스터/남경태 | 2006-02-20 | 이론과실천
커피견문록 | 스튜어트 리 앨런/이창신 | 2005-10-04 | 이마고
한국과 중국, 오해와 편견을 넘어 | 이종민 외 | 2006-06-05 | 제이앤씨
주은래와 등영초 | 리훙 외 /이양자, 김형열 | 2006-05-25 | 지식산업사
항일노동운동의 선구자 서정희(상.하) | 이성규 | 2006-04-01 | 지식산업사
콜럼버스가 바꾼 세계 | 앨프리드 W. 크로스비/김기윤 | 2006-05-15 | 지식의숲
귀족의 은밀한 사생활 | 이지은 | 2006-03-27 | 지안출판사
차 한잔에 담은 중국의 역사 | 강판권 | 2006-05-17 | 지호출판사
한국 속의 세계(상.하) | 정수일 | 2005-10-25 | 창비
너는 누구냐? -신분 증명의 역사 | 발렌틴 그뢰브너/김희상 | 2005-12-26 | 청년사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 | 조재곤 | 2005-11-25 | 푸른역사
서양의 역사에는 초야권이 없다 | 김응종 | 2005-09-20 | 푸른역사
앙코르와트의 모든 것 | 이우상 | 2006-05-10 | 푸른역사
영남을 알면 한국사가 보인다 | 역사학자 48인 | 2005-12-30 | 푸른역사
중국사의 대가, 수호전을 역사로 읽다 | 미야자키 이치사다/차혜원 | 2006-03-20 | 푸른역사
중세산책 | 만프레트 라이츠/이현정 | 2006-05-22 | 플래닛미디어
그때 그 일본인들 | 다테노 아키라/오정환, 이정환 | 2006-08-14 | 한길사
부와 권력을 찾아서 | 벤저민 슈워츠/최효선 | 2006-06-15 | 한길사
도기 자기 도자기 우리 그릇 이야기 | 이지현 | 2005-09-10 | 청년사
삼국유사 1,2 | 전일봉 | 2005-12-19 | 휴머니스트
조선의 문화공간 (1-4) | 이종묵 | 2006-08-07 | 휴머니스트
정복의 법칙 | 데이비드 데이/이경식 | 2006-01-31 | 휴먼앤북스

출처;리더스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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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닉네임을뭐라하지 > 레닌은 어디서 반복되어야 하는가?

리뷰&칼럼

레닌은 어디서 반복되어야 하는가?
[인문학 서평] 슬라보예 지젝, 『혁명이 다가온다』
2006-10-26 오후 7:55:34         
[박정수 _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 
슬라보예 지젝의 『혁명이 다가온다』
▲ 슬라보예 지젝의 『혁명이 다가온다』

1995년 『삐딱하게 보기』가 처음 번역되어 나왔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지젝의 이름은 자크 라캉이라는 이름 뒤에 붙어 있었다. 여전히 ‘근간 예정’인 라캉의 『에크리』와 『세미나』들이 번역되지 않은 상태에서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알고는 싶은데 도대체 알 수 없는 개념 투성이의 낯선 소문으로만 떠돌았다. 그때 할리우드 영화와 일상문화를 통해 라캉 정신분석학의 주요 개념들을 간명하게 설명해낸 『삐딱하게 보기』는 목마른 논을 적시는 물처럼 시원하고 달콤했다. 그 후 10년이 지난 지금 슬라보예 지젝은 정신분석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뿐 아니라 철학, 정치학, 사회학, 문학, 영화 비평 전공자들의 입에 회자되는 이름이 되었다. 그 사이 그의 이름은 라캉이라는 이름과 분리되어 슬로베니아학파라는 독자적인 학파의 우두머리로 알려져 갔고 매년 한두 권씩 출판되는 번역서마다 성실하게 오역 교정까지 해주는 매니아들을 거쳐 대학담론으로까지 진입해 들어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책꽂이에 읽다가 만 번역서들이 한 두 권 늘어나기 시작했고 그의 책이 번역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서점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길어졌다. 지젝의 주위에 사람들이 많이 몰리면 몰릴수록 자꾸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가 생각났다.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모두가 알지만 주위 사람들은 아무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나뿐만 아니라 지젝의 책을 애독하는 사람들은 신간이라고 펼쳐 보면 이전 책에서 이미 본 듯한 구절들이 반복되고 있다는 느낌을 가졌을 것이다. ‘기시감’이 아니다. 때로는 거의 한 챕터 전체, 때로는 한 단락 그대로, 때로는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때로는 약간의 변형이 가해진 채 자기-표절을 하고 있다.

이 책 『혁명이 다가온다』 역시 새로 쓴 부분보다는 이전 책에서 오려 붙인 부분이 더 많아 보인다. 단적인 예로 13장 ‘삭제의 정치학은 존재하는가’는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의 2판 서문 중 ‘공제의 정치는 존재하는가’와 거의 같다. 『혁명이…』와 『그들이…』의 2판 서문이 같은 해(2002년)에 쓰여진 걸 보면 똑같은 원고를 가지고 두 번 써먹었다는 얘기가 된다. 김병준 교육부총리 선임자의 논문 표절 및 이중 등록 사건에 적용된 학자의 윤리를 지젝의 자기-표절에도 적용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도 다들 모른 척 하는 건지 별 문제 없다는 건지 이 점을 꾸짖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독창성’이라는 케케묵은 근대적 기준으로 포스트 모던 철학자의 ‘혼성모방’ 작업을 평가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그나마 잘 팔리고 있는 철학 상품에 흠집을 내고 싶지 않아서일까? 어느 쪽이든 이 침묵의 카르텔은 옳지 않다.
 
『혁명이…』는 소장할 가치가 없는 책이다. 이 책뿐만 아니라 지젝의 책 전체가 그렇다. 그의 사유를 틀 짓고 있는 헤겔의 『정신현상학』, 마르크스의 『자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라캉의 『에크리』와 그의 책은 분명 ‘급’이 다르다. 이들의 책은 백년이 더 지나도 팔리겠지만 지젝의 책은 그렇지 않다. 지젝과 사유 노선이 다른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나 들뢰즈․가따리의 『안티 외디푸스』가 백년은 몰라도 반세기 후에도 소장될지언정 지젝의 책도 그럴까? 엄밀히 말해서 ‘지젝’의 책은 없다. 그의 이름은 아무런 인식론적 사건도, 사유방식도 지시하지 못한다. 헤겔, 마르크스, 라캉, 데리다, 들뢰즈․가따리는 그 이름만으로 그들의 책에 담긴 지식의 효과를 지시하지만 ‘지젝’이란 이름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지식의 생산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헤겔이 생산한 변증법을, 마르크스가 생산한 유물론을, 프로이트가 생산하고 라캉이 재생산한 정신분석학을 멋지게 재가공해서 가장 적절한 순간에 가장 유용한 물건으로 만들어 판매하는 쇼호스트와 같다. 물론, 오늘날 쇼호스트는 이미 생산된 가치를 이전시키기만 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교환가치를 창출하는 사람이며, 지젝도 그렇다. 유명한 쇼호스트가 자기만의 스타일을 개발하듯이, 지젝은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 라캉의 구조분석을 조합하여 후기 자본주의 대중문화와 정치지형을 분석하는 데 탁월한 효력을 발휘하는 자기만의 분석틀을 개발했다.

그래서 지젝의 책은 철학서라기보다는 평론집에 가깝다. 자신의 분석틀을 개발한 이후 그가 하는 일은 분석 대상을 수집하는 일이다. 매순간 촉각을 곤두세우며 각국의 변기구조나 음담패설 및 농담을 수집하고, 시간 날 때마다 할리우드 TV 프로, 영화나 고급 오페라, 소설, 종교, 철학, 정치적 이슈를 자신의 분석 테이블에 올려놓고 해부해 놓았다가 특정한 기획 하에 묶어 낸다. 『혁명이 다가온다』의 기획은 ‘레닌’이다.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라는 부제를 달았지만 레닌과 소비에트 혁명에 집중된 새로운 연구성과는 없다. 대신 이전의 분석들 중에서 레닌과 혁명, 정치학에 관련된 내용을 골라 약간의 수정과 편집 작업을 가하여 묶어 놓은 것이다.

이런 평론집의 가치는 그 기획의 적절함에 있다. 만약 ‘레닌의 반복’이라는 이 책의 기획이 적절하다면 그 결과는 레닌 전집의 재출간이나 판매 부수 증가로 나타날 것이고, 나아가 레닌이 일으킨 사건, 즉 혁명의 반복을 위한 실천 행위로 이어질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이 책의 효과가 이 책 자체로 그친다면, 라캉과 지젝의 분석적 성과로 그친다면, 지젝은 자신이 줄기차게 비판해온 포스트-맑시스트들의 ‘혁명 없는 혁명’, 후기 자본주의 문화 시장에 흡수되어 버린 ‘혁명의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는 비난을 되돌려 받아야 한다. 심지어 레닌까지 정신분석가의 음울한 분석 소파 위에 올려놓고 두 번째 죽음을 치렀다는 비판과 함께.

그렇다면 ‘레닌’이라는 기획은 적절한가? 여기서 지젝은 자신의 내기를 걸고 있다. 자본주의와 그 이데올로그들과의 단호한 단절, 진화론적 역사주의와 다원론적 민주주의에 물든 사이비 혁명가들, 그 옛날의 사민주의자들과 오늘날의 좌파 자유주의자들과의 중단 없는 이데올로기 투쟁. 지젝의 이 내기를 그저 또 하나의 (정신)분석적 사례로 간주한다면, 그건 오독이거나 자기기만이다. 물론 이런 무의식적 오독에도 분석되어야 할 욕망은 있다. ‘나는 지젝이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비판한다는 걸 잘 알아. 그럼에도 불구하고…(나는 그 혁명의 내기가 실재 현실로 이어져야 한다는 건 믿지 않아.)’라는 물신주의적 부인 속에서 지젝의 평론을 ‘철학’으로 승화시키거나 독창적인 ‘정신분석가’로 재성화(再性化) 시키는 지젝 매니아들이 있다면, 그들의 욕망은 후기 자본주의의 냉소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할 뿐이다.

이 책이 지젝의 정치적 내기를 담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 한국 사회의 정치적 내기 속에서 효과를 발휘해야 한다. 한국 사회는 지금 전체주의적 주변부 자본주의로부터 자유주의적 중심부 자본주의로 진입하고 있다. 최근의 두 광고가 이를 대변한다. 모 카드회사의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 라는 CM송과 국가홍보처의 “아버지, 이것이 당신이 그토록 갈망하던 대한민국입니다”의 멘트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지금까지 한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아버지이다. 항상 때리는 아버지이거나 부재하는 아버지만 있었지 아들에게 향락의 교훈을 전해주고 자랑스런 국민국가의 상징적 대표로 호명된 아버지는 없었다. ‘즐겨라!’라는 자본주의적 초자아의 외설적 명령을 노래하고 ‘자랑스러워라’ 라는 국민적 아버지의 자아-이상을 내면화할 정도로 한국사회는 자본주의적 국민국가를 완성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한국 사회는 해소할 수 없는 계급 적대를 드러내고 있다. 양극화는 (노무현 정부의) 정책의 실패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체제의 성공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직은 불명확한 이 성공은 한미 FTA 체결 이후에는 훨씬 더 가시화될 것이다. 현 정부가 끊임없이 한미 FTA의 4대 선결조건은 우리가 빼앗긴 게 아니라 우리가 원한 것이라고 주장할 때 그것은 아직까지 남아 있는 (신)식민주의 종속성의 망령을 떨쳐버리려는 안쓰러운 노력인데, 그 ‘우리의 욕망’ 속에는 미국의 자본가와 함께 한국의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하고자 하는 한국 자본가 계급의 욕망이 숨어 있다.

‘우리’는 계급적 분열을 은폐하는 주체 호명이다. 이 민족주의적 주체의 분열성은 평택 주한 미군기지 조성에 반대하는 대추리 주민들을 향해 기지이전은 미국(의 전략적 유연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수도에서 미군기지를 없애기)를 위해서라고 호소할 때 확연히 드러난다. 대추리 주민의 삶의 권리를 짓밟는 것이 ‘국익’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주장의 이면에는 돌려주겠다는 전시작통권을 한사코 돌려받지 않으려는 식민주의적 욕망이 숨어 있다.

한미 FTA에 반대하는 조직된 노동자 계급, 신자유주의 경영 효율성을 위해 항시적인 해고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선진 서비스산업에 종사하면서 만성적인 히스테리에 시달리는 감정노동자들, 세계화된 노동 시장에서 좀더 고가의 임금을 위해 들어온 이주노동자들과 혼혈가족들, 자본주의적 개발 욕망에 의해 파괴된 새만금의 갯생명들과 어민들, 그리고 현 시점에서 가장 위험한 집단으로서 국가주의와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논리를 한꺼번에 정지시키며 ‘정신병’적 선택을 감행하고 있는 대추리의 주민들, 이들의 반자본주의, 반국가주의, 반제국주의 운동과 결합되지 않는다면 『혁명이 다가온다』가 기획한 ‘레닌의 반복’이란 도대체 뭐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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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만에 집에와서 몸무게를 달아보니 68kg. 한 선배한테 농담처럼 68혁명을 기리기 위해 몸무게를 68로 유지할 거라고 했는데, 진짜 68이 됬다. 출소 후 많이 먹었지만, 역시 시급 300원의 압박으로 미숫가루로 아침과 점심을 대체한 것이 효과가 있었나 보다.

어쨌든, 진짜 시급 300원으로 먹고 살 수는 없는지라 (집에 얹혀사는 것도 아니고 방값도 내야하기 때문에) 과외를 구하고 나섰다.

말이 와전되서 석사때 받던 봉급과 동일하게 받게 되었지만, 뭐 그래도 시급 300원보다는 괜찮기에, 그리고 진짜 이대로 가다가는 길바닥에 내앉게 생겼기에 (사실 그렇기보다는 강제로 집으로 소환;; 되겠지만.) 아버지 친구분 딸 과외를 하게 되었다. (*사실 아버지 친구분 중에 아직도 고등학생 딸이 있으신 분이 있다니! 하고 놀라기도 했지만) 과외 하나로는 먹고 살 수가 없어서 어쩌다 보니 그 집 어머니 친구 분의 따님과 또 그 이웃사촌의 아들까지 도합 3개의 과외가 하루에 들어와 버렸다. -_-;;; 게다가 원래 과외를 하기로 딸의 남동생과 그 집 이웃사촌의 동생도 봐달라고 해서 곧 5개의 과외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음... 워낙 거절을 못하는 성격인지라......... 기 보다는 통장 잔고가 5만원인 상태의 극심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상태에서, 그냥 있을때 모아 놓자 라는 생각에 (내 뱃살도 그렇게 해서 쌓이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있을 때 먹자는... -_-; ) 왠만하면 다 봐준다고 하고 말았다... 쩝;

어짜피 주중 3시부터 11시는 시급 300원의 복무를 해야되니 과외를 할 수 있는 시간은 주말 밖에 없다. 그런데 오늘은 또 대치동 모 학원에서 논술강사로 오라고 하니, 이거 주중에는 국가를 위해, 주말에는 내 뱃살을 위해 쉴 새 없이 일하게 될 듯.

어쨌든 오랜만에 과외를 하다보니, 또 3 학부모의 걱정과 각각 5 아이의 고민을 들으니 새삼, 모든 사람들은 나름의 고민과 걱정으로 살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 정말 새삼스럽지만. 다 같이 고등학교 학생들이고 그 중 3명은 서울대 미대를 지원하는 학생들이지만 고민이 각기 다르다. 학부모님들이 걱정하는 것도 각기 다르고.

전 세계, 60억이 넘는 사람들. 그 사람들 각자에게 너무도 다른 일상과 세계. 각기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문제가 지상과제일 터이다. 훈련소 가서도 나와는 다른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지금 공익 근무를 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을 만났지만,

나에게 직접적으로 자신의 고충과 고민을 털어놓는 학부모나 학생과의 만남이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 같다.

어찌됬든. 지금까지는 배고팠지만, 주말에 하는일 없이 빈둥거리면서 잠이나 잤는데.

앞으로 주말에 과외5개와 학원강의 1~2개를 할 생각을 하니... 음.

동선을 잘 짜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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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06-10-29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만 들어도 압박이 몰려오는 듯한 느낌.
그러다가 살이 더 빠지시는거 아니예욧?

건우와 연우 2006-10-30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동선을 잘 짜셔야겠군요...^^

기인 2006-10-30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지님/ 쿄쿄 더 빠져도 좋죠. :) 과외 1~2달만 할 예정이라서요 ㅎㅎ
건우와 연우님/ 근데 그게 제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니라서 걱정이랍니다 ㅜㅠ

seeker16 2006-11-02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살도 빠져 좋고, 돈도 벌어 얼굴이 설 테고 아주 잘 됐네. 나도 12월 넘으면 과외 구해야하는데...기인아 힘들면 한 개 넘겨주렴! ㅎㅎ(앞으로 지원하면서 원서값이 쏠쏠히 들텐데, 그것 갚아야 되거든. 근데 언제부터 자취생활을 시작한 게얌?)

기인 2006-11-02 17: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석사때부터 자취했어요~ 이제 1월쯤에 다시 집으로 돌아갈 예정 ㅎㅎ
언어 과외인데 괜찮으세요? 영어 과외 필요하다고 그럼 바로 소개시켜드릴께요 ;)

seeker16 2006-11-02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야 동시간 접속이네. 역시 공익 맞구나^^; 난 시험 이틀 남은 주제에 왜 이 모양인지-ㅗ-; 언어는 내가 어떻게 가르치겠어, 당치 않은 소리. 영어과외 좋은 자리 하나 있음 소개해주라. 자취한지 오래됐었구나. 같은 관악구민을 못 알아보았군. 관악구민 체육관 좋다던데, 그 근처인 거지?

기인 2006-11-02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ㅎㅎ 테니스장 4면 있고 축구장, 농구코트, 족구 코트 있고 축구장 주위로 트랙있고 그런데에요. 컥 누나 무슨 시험이요? 유학 시험인가요? 설마 영문과는 박사과정도 시험을 보는 건;; 아니겠지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