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책벌레는 무엇으로 사는가

아이를 유치원 차에 태워보내고 편의점에 가서 '한겨레'를 사들고 왔다. 금요일자 '18도'를 챙겨두기 위해서인데 몇 안되는 일간지가 편의점에는 딱 한 부씩만 들어와 있기 때문에 오후에 가보면 간혹 없을 때가 있다(물론 이런 수고를 하는 건 오늘 '재택근무'를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출판 칼럼니스트' 표정훈씨 이야기가 '한국의 글쟁이'의 18번째 연재로 실려 있다. 언론매체에 자주 등장하는 이 대표적인 '탐서주의자'에 대해선 굳이 부연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그의 궁리닷컴을 방문한 지가 꽤 오래됐군). 나도 간혹 '책벌레'란 소리를 듣긴 하지만, 이 '국민 책벌레'에 견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우리 시대에 책벌레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그를 통해서 엿보기로 한다. 한겨레의 기사와 함께 지난달 중앙일보에 게재한 표정훈의 칼럼을 같이 옮겨놓는다(아래 작업실 사진을 내 방구석이 지저분하다고 구박하는 아이나 아이엄마가 봐야 하는데!.. 둘러보니 내가 더 나은 것 같지도 않군^^;).

한겨레(07. 02. 08) 출판 칼럼니스트 표정훈

아주 아주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읽고 싶은 책을 사달라 부모를 조르는 게 일이었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참고서보다 교양서를 즐겨 읽었으며, 대학에 들어간 뒤에는 아예 학교 도서관을 구획 나눠 차례대로 정복해 들어가는 사람. 심지어 우리말 책만으로는 성이 안차 궁금한 책이 있으면 원서라도 사서 읽고(물론 자기 전공도 아닌데),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기가 좋아서 독후감을 쓰고 책을 분류하고 읽고 싶은 책의 모습을 그리는 사람. 책 읽는 게 세상에서 가장 좋으니 책만 읽고 살아가고 싶어하는 이런 책벌레는 어떤 직업을 가져야 할까?

표정훈(38)씨는 그 답을 보여주는 책벌레다. 10여년 전만해도 표씨 같은 책벌레들을 위한 똑떨어지는 직업은 없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책벌레들만이 할 수 있는 새로운 직업이 생겼으니, 바로 ‘출판 칼럼니스트’ 또는 ‘출판 평론가’란 직종이다(*내가 궁금한 것 중 하나는 '출판평론가'나 '도서평론가' 등의 직함이 어떻게 구별되는지이다. 같은 지면에 나란히 실린 '이권우의 요즘 읽은 책'에서 가령 이권우씨는 언제나 '도서평론가'라고 자신을 소개하기 때문이다. 범위의 문제인가?).

취미가 직업이 되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먹고 살 수 있다는 점에서 책벌레들에겐 가장 이상적인 직업이다. 물론 책벌레가 아니면서 출판 평론가가 될 수는 없겠지만, 출판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표씨는 알아주는 책벌레다. 또한 이권우, 박천홍, 최성일씨 등 요즘 활발히 글을 쓰는 다른 출판 칼럼니스트들이 대부분 출판관련 저널리스트 출신인데 견줘 표씨는 거의 유일하게 오로지 책벌레로만 지내다가 자연스럽게 출판 글쟁이가 된 이다.

학창시절을 책과 보낸 표씨는 대학 졸업 후 새내기 번역가가 된다. 때마침 불어온 인터넷 바람 속에서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홈페이지를 만들었는데, 다른 데서는 볼 수 없는 생생한 책 이야기로 입소문을 탔다(*그게 궁리닷컴이다 http://www.kungree.com/). 한 일간지에서 가볼만한 사이트로 그 홈페이지를 소개했고, 이어 책관련 칼럼을 써보라는 제안을 해왔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서 표씨는 물만난 고기처럼 책벌레다운 글솜씨를 보여주었다. 그 뒤 여러 매체에서 책과 출판에 대한 글요청이 몰려들면서 표씨는 자연스럽게 이른바 ‘출판칼럼니스트’란 직업을 갖게 되었다.

표씨는 여러 책을 쓰고 번역했지만 저술가라기보다는 말 그대로 글쟁이에 가깝다. 책이란 보편적인 주제를 글로 쓰기 때문에 <한겨레>부터 <조선일보>까지, 매체의 분야에 상관없이 글 부탁을 받는다(*'한국의 글쟁이'로 이미 소개됐던 역사학자 이덕일씨도 그러하다). 쓰는 글은 서평이 주류를 이루지만 책, 그리고 독서문화를 중심으로 다양한 분야를 넘나든다. 또한 우리 출판계에서 책문화 전도사로도 활동해왔다. 책과 출판 관련 전시회를 기획하는 일도 여러차례 맡았다. 삼성출판박물관, 아단문고 전시회를 기획했고, 2005년 우리나라가 주빈국으로 참가한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한국관 기획위원으로 힘을 보탰다. 여기에 꾸준히 번역을 하는 동시에 여러가지 책 기획에 참여해왔다(*해서 들은 바로는 표씨가 언제나 큰 배낭을 메고 다닌다는 것. 출판사들에서 얻은 책들을 잔뜩 담아서).

이 넓은 활동폭이 가능한 것은 모두 그가 ‘책벌레’인 덕분이다. 표씨가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하는 책은 일주일에 3~4권, 3분의 1 정도 읽는 책이 대여섯권이다. 1만여권의 책을 가지고 있고, 월 50만원 정도를 책 구입에 쓴다(*같은 책벌레로서 잠시 견주어보니, 나보다 많이 읽지만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는 아니다. 그가 주로 많이 읽는 역사서들을 나는 그다지 읽지 않는다. 아니 읽을 시간을 내기 어렵다. 그리고, 1만여권의 책을 갖고 있다면 나보다는 약간 많은 수치일 듯하다. 도서구입비 월 50만원은 비슷한 듯하다).

책벌레들의 특징이 ‘박람강기’(博覽强記)라는 점을 감안해도 표씨의 지식은 넓이 면에서 도드라진다. 교수도 아니고 박사도 아닌 그가 이런 지식을 갖게 된 비결은 꼬리를 물며 책을 이어가는 독서습관이다. “책을 읽으면 참고문헌에 있는 책이나 관련있는 책, 거론된 책을 찾아서 읽거나 체크를 해놔요. 저자가 마음에 들면 그 사람 다른 책을 조사해서 알아놓아요. ‘이 짓’을 한 10년 넘게 했어요. 그렇게 하니까 책의 그물이 지어지는 거죠. 외국에 가서 책을 보다가도 참고도서 목록이 충실하면 정작 그 책 내용은 별로라도 사는 경우도 있어요.” 이런 모든 조사과정이 지식으로 쌓이는 셈인데,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고 이런 과정 자체를 즐기기 때문에 하는 일이다(*적어도 대학원생 이상이면 이 정도는 해줘야 한다. 최소한 자기 전공에 대해서는). “책이 전경이라면 그 전경을 둘러싼 배경을 조사하고 알아가는 것, 그게 즐겁기도 하고 그렇게 하면 더 잘 볼 수 있으니까요.”

여기에 그가 가장 자신 있어하는 장기인 인터넷 검색능력이 더해진다. 그런데 이 검색의 노하우에는 특별한 비결이 없다. 어떻게 해야 잘 찾느냐고 묻자 답은 맥빠지게도 “책을 읽어라”였다. 그 다음이 표씨가 ‘열쇳말 그물짓기’라고 부르는 검색과정이다. 역시 대단할 것은 없지만 대신 집요한 추적 의지의 중요성을 엿보게 한다. 니콜라스 루만이란 독일 사회학자를 찾은 과정을 예로 들어보자. 루만은 사회학 석학이지만 동시에 지식과 정보를 잘 관리, 편집해서 많은 책을 쓴 것으로도 유명한 학자다. 표씨가 찾고자 한 것은 이 사람의 지식관리법. 문제는 단순히 루만의 이름만 검색어로 치면 사회학 업적만 건조하게 화면에 뜰 뿐이다(*나의 관심은 보다 고리타분해서 루만의 '지시관리법'보다는 그의 대저 <사회체계들>에 가 있다. 아직까지 번역/소개되지 않는 게 사회학자들의 직무유기가 아닌가, 의혹을 품으면서).

표씨는 흔히 다작하는 저술가들이 활용하는 도구인 ‘인덱스 카드’ 등을 독일어로 추가해 다시 검색한다. 그래도 역시 원하는 지식관리법은 여전히 안나온다. 다음은 영어로 ‘지식’을 뜻하는 ‘knowledge’와 ‘관리’란 뜻의 ‘management’를 검색어로 보탠다. 이런 식으로 계속 검색어를 더해가며 찾아가면 결국은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이 표씨의 지론이다. 이렇게 찾아낸 정보들 가운데 원하는 항목들을 모아가며 계속 연관개념을 찾아낸다. 이런 작업을 오랜 세월 규칙적으로 해오면서 쌓인 지식량, 그리고 노하우가 아니라 정보가 어디에 있을지 알고 유추해내는 ‘노웨어’(know-where)가 표씨 스스로 꼽는 자산이자 강점이다(*그의 책들을 아직 안 읽어봐서 얼만큼의 '강점'인지는 잘 모르겠다. <탐서주의자의 책> 정도는 읽어둘 법한데, 책은 '당신이 없는 사이에' 출간됐었다).

이는 글을 쓰는 원칙에도 적용된다. 최대한 많이 조사하는 것, 그리고 그 자신이 연구자가 아니고 독자의 연장선에서 글을 쓰는 것이니만큼 독자가 앞에 있다고 생각하고 쓰는 것이다. “글 쓰는 것도 일종의 서비스업”이라고 믿는다. 지식이 담겨 있으면서도 어렵지 않은 글이 그의 지향점이자 특징으로 갖춰진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표씨는 2000년대 초반 등장과 동시에 출판계에서 많은 주목을 받아왔다. 인터넷이란 새로운 도구를 가장 잘 활용해서 다양한 정보를 찾아내고 조합하는 능력, 그리고 원서를 직접 읽고 기획할 수 있는 외국어실력과 기획력으로 새로운 시대에 가장 적합한 필자로 꼽혀왔다.

그동안 표씨가 펴낸 책은 크게 두가지.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2003)나 <탐서주의자의 책>(2004) 같은 책과 독서에 대한 지적인 교양 에세이, 그리고 <하룻밤에 읽는 동양사상> 류의 가벼운 실용교양서다. 저술한 책은 그닥 양이 많지는 않다. 주된 분야는 역시 방대한 독서량에서 나오는 지식으로 맛깔스럽게 쓰는 고급스러운 에세이쪽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표씨는 그동안 다양한 여러가지 활동을 해오는 대신 저술의 측면에서는 받아온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책에 대한 에세이 <탐서주의자…>와 <책은 나름의…>가 고급 에세이로 호평을 받았지만, 두 책 모두 짧은 글모음이란 점에서 이제는 표씨가 한 단계 더 뛰어넘는 책을 내주기를 출판계는 기대하고 있다. 여기저기 이것저것 분산되게 쓰고 있는 재능을 이제는 한 분야에 집중할 단계라는 충고도 나온다.

표씨 역시 스스로도 이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지난해 하반기부터 활동 폭을 줄이고 출판평론성 글, 각종 에세이 등 토막글을 고사하면서 단행본을 쓰는 데 집중하기로 승부수를 걸고 있다. “당장은 딜레마죠. 들어오는 정기 수입이 토막글이고, 이런 글들이 시간도 적게 들구요. 하지만 글쟁이로서 제가 생산적 결과를 내놓을 수 있는 기간이 앞으로 길어야 15년 정도일 것을 감안하면 에너지를 집중해서 호흡이 긴 책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출판평론가의 정년은 55세인가?) 

그래서 표씨는 지금부터가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주제를 가리지 않고 실용서도 써보려구요. 독자들과 비슷한 비전공자이지만 교양 분야에 대해 연구가 아니라 공부를 하는 거죠. 그래서 공부한 것을 정리해서 소개하고 흥미를 느끼게 해주는 일을 하려는 겁니다.”(글 구본준 기자)

 

중앙일보(07. 01. 12) 자성의 목소리 없는 출판계

불철주야 책 만들기에 여념 없는 출판인들에게 출판계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지만, 일반 독자들이 바깥에서 보기에는 대체로 심심하다. 각종 사건들로 바람 잘 날 없는 정치권이나 연예계와 비교해보라. 그런데 이 심심한 동네가 '내일은 또 무슨 일이?'라는 걱정을 해야 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정지영씨의 '마시멜로 이야기' 대리 번역 의혹, 한젬마씨 저서 대필 논란, 마광수 교수의 제자 시(詩) 도용 혹은 표절 파문, '인생수업' 표지 사진 표절 혐의, 독서단체를 빙자한 책 사재기 대행 웹사이트 의혹….

책에 표시된 저자 혹은 번역자, 대리번역자와 대필작가, 출판사, 그리고 독자에 대한 다음과 같은 책임론이 사뭇 분분하다. 관행을 방패 삼거나 수단을 가리지 않고 책을 많이 팔려는 출판사의 상략(商略)이 문제다. 번역과 저술에서 실제로 맡은 구실이 미미하거나 사실상 없으면서도 제 이름을 걸어놓은 사람들이 문제다. 대리번역자나 대필작가가 지금 와서 나서는 게 볼썽사납다. 유명인이 쓴 책이나 베스트셀러에만 몰리는 독자들이 문제다.

그런 책임론에 대해 출판계 차원의 솔직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게 아쉽다. 출판인도 아닌 필자가 결례를 무릅쓰고 대신 자성하고 싶다. 첫째, 다매체 환경에서 출판의 위상 문제다. 정지영씨는 방송인으로서의 명성을 발판 삼아 번역자(?)가 되고 한젬마씨는 저자(?)로서의 권위와 유명세에 힘입어 방송인으로 입신했다는 차이는 있지만, 두 사람 모두 영상매체 친화적인 브랜드다. 책이라는 매체 자체의 완결성보다는, 더 인기 있는 다른 매체에 기대려는 출판의 초라해진 자화상을 반성하고 싶다.

둘째, 출판기획의 본말(本末) 문제다. 책도 치밀한 '기획'을 거쳐 시장에 내놓는 '상품'이며 출판업은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활동이다. 그러나 영리 추구 목적의 출판기획에도 본과 말이 있다. 오로지 팔릴 것만을 생각하는 게 그 근본인 것 같지만 책의 존엄에 대한, 어떤 의미에서는 시대착오적인 존중이야말로 진정한 근본이다. 근본을 살피지 못한 점을 반성하고 싶다.

셋째, 베스트셀러의 맹점이다. 베스트셀러 집계의 기술적 공정성과는 별도로 애당초 저자나 번역자 자체가 거짓이거나 교묘한 사재기 상술이 개입할 여지가 있는 한, 베스트셀러 순위는 신뢰하기 힘들다. 고백하건대 필자는 베스트셀러의 요인을 분석하는 글을 쓰곤 했다. 그러나 만일 저자나 번역자 자체가 거짓이거나 사재기로 만들어진 베스트셀러라면 그 요인 분석은 고의가 아니었을지라도 거짓의 공범 구실을 한 셈이니, 이 자리를 빌려 사과드리고 반성하는 바이다.

넷째, 겉으로는 고급 문화인 행세를 하면서 속으로는 진작부터 고쳤어야 할 해묵은 관행을 계속 끌고 가는 이중성을 반성하고 싶다. 출판은 마땅히 지원받아야 할 부문이라며 물적.제도적 지원을 요구할 때는 한껏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정작 출판인과 출판계가 먼저 스스로 개선해야 할 것들을 과감하게 고치는 노력에는 인색하지 않았는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진리를 새삼 떠올릴 때다.

'삼국지'의 한 대목을 떠올려 본다(이하 황석영 '삼국지'(창비)에 바탕을 둠). "이 책은 우리 촉땅에서는 삼척동자도 다 외우고 있는데, 새로 지은 책이라니 무슨 소리요? 이 책은 전국시대에 어느 무명씨가 지은 것이오. 조 승상은 도적질에 능하니 그를 표절해 자신이 지은 것처럼 그대를 속인 것이오." 사신으로 파견된 장송이 조조가 지었다는 '맹덕신서'를 한 번 훑어보고 외운 뒤 조조의 신하 양수에게 한 말이다. 이 일을 전해 들은 조조는 언성을 높여 "옛 사람 생각이 나와 우연히 들어맞았던 게지!"하고 즉시 '맹덕신서'를 찢어 불살라버리라 명했다. 저자이자 발행인인 조조가 보여 준 최소한의 자존심이 차라리 그립다.(표정훈 출판평론가)

07. 02. 09.

P.S. 참고로, '출판평론가'의 자녀교육법이 궁금하신 분들은 '여성동아'(2006년 5월호)의 기사를 참조해보시길(http://www.donga.com/docs/magazine/woman/2006/05/08/200605080500037/200605080500037_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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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를 처음 알게 되었다.  나는 편애가 심한 편인데 마루야마 마사오가 나의 편애 목록에 들어가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숨 가쁘게 그의 저서를 모두 읽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의 저서를 읽고 난 느낌을 짧게 적어보라면 대략 이렇게 한 문장으로 쓸 수 있겠다.

일본 인문학의 수준이 이 정도 였던가 !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 라는 유명한 논문으로 그는 일본을 수십년간 전쟁에 수렁에 빠뜨린 파시즘의 실체가 실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는 것을 밝혀내 일본인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이 논문은 전후 일본의 자기반성의 서곡이 되었다. 익명의 통치가 가능함을 보여준 사람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지만 그 익명의 통치체계가 그 특유의 '무주체'로 인해 '무책임'할 수까지 있다는 것을 마루야마 마사오는 보여준 것이다.

 내가 그에게 놀란 것은 시대를 꽤 뚫어보는 놀라운 통찰력만은 아니다. 그의 저서를 보면 느끼는 것이지만 그는 언어의 탁월한 소질이있다. 그는 고등학교때 이미 서양의 저작들을 원서로 읽었다. 오늘 이 페이퍼를 쓰고 있는 이유는 사실 그의 언어학습법을 배우기 위해서이다. 아래는 그가 대학교에 진학하는 학생들을 위해서 쓴 그의 언어학습법의 노하우이다.

 외국어를 마스터하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외국어의 스타일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뭐니뭐니해도 역시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하지만 많이 읽는다해도 실제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제가 추천하고 싶은 것은 어떤 책이든지 좋으니까 자신의 실력으로 비교적 용이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을(원서) 선택하고 그것을 처음부터 읽어나가는 것입니다. 읽는다는 의미는 문법을 일일이 생각하거나 관계대명사가 어디있는가 이런 것을 일일이 고려하지 않고 원서의 언어 그 자체로 내용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한 번 읽고 잘 알지 못하는 곳이 있어도거기에 구애 받지 않고 한번 더 그 패러그래프의 처음부터 조금 템포를 천천히해서 다시 읽으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요컨데 중요한 것은 결코 일본어의 문법으로 고쳐 읽지 않는 것입니다.  원어의 배열을 무너뜨리지 않고 직접 이해하도록 연습하는 것이 포인트인 것입니다. 이런 읽는 법에 익숙해지면 독서의 속도가 붙습니다. 거기에 어떤 경우에 어떤 문법을 사용하는가 하는 것도 자연스럽게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단어의 뜻을 추상적으로 기억하는 것은 실제 문장과 부딛혔을 경우에 하나 하나를 적용시키지 보지 않는 한 잘 모르는 것입니다. 원서를 이렇게 스타일로 받아들여서 자연스럽게 읽어나가면 어느 경우엔가 뜻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이 것이 말의 스타일에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최근은 중학생이라면 몰라도 고등학생 학생을 보더라도 문법공식같은 것을 암기하고 있는 학생이 보입니다만 그것은 턱없이 어리석은 것으로 그럴 시간이 있으면 논문이던지 소설이든지 1권이라도 원서를 많이 읽는 것이 훨씬 실력이 늘게 되있습니다. 같은 이유로 단어집을 기억하는 것도 별로 감탄하지 않습니다. 단어를 기억하고 싶으면 그 단어가 나오는 문장을 전부암기하는 것이 효과적입니다.

 영어는 물론 독일어 불어를 훌륭하게 구사하는 그이니 한 번 배워 봄 직하다.(한자는 말할 필요도 없다.그는 문헌학의 대가이다.)

 

P.S

그는 진짜 사나이(眞男) 이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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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사회주의 닫힌 사회주의 - 역비의책 29
안토니 라이트 지음 / 역사비평사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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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민족의 문화적 특성은 각 민족의 사회주의를 낙인찍는다"는 바우어의 주장이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바우어가 지적하고자 했던 함의 중의 하나는, 상이한 민족적 전통들에 따라 자신들의 방식으로 고유한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원래 '민족문제'에 대해 맑스주의 내부에서 1914년 이전의 논쟁에 기여하도록 의도됐던 주장은 그 이후에 더욱 긴급한 실천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64쪽

소련에서 나타나는 사회주의는 종종 주장되듯이 바로 그 사회라는 관점에서는 적합하지만, 이러한 점이 소련식 사회주의를 전제적이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주지는 않으며, 민주사회주의자들로부터 더 많은 지지를 받을 어떠한 가치를 제공해주지 않는다. 세계는 여러 종류의 사회주의들로 가득 차 있다. 단일한 전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 관점에서 보면 이론적 해체의 과정을 나타내주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사회주의는 항상 다양성에 의해서 해체되어왔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오랜 동안 이러한 다양성이 공식 공산주의와 공식 사회민주주의라는 두 개의 적대적 블록으로 압축되고, 더구나 냉전에 의해 이러한 압축이 더욱 강화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사실을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이러한 사실은 그것을 지탱해온 여러 전통과 함께 다시 나타나고 있다.-68쪽

계속 떠올리는 것은 1920-40년대까지 조선의 조합주의 운동. 이것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자료와 연구는 얼마만큼 진전되었는가. 역시 나는 문학보다는 역사학이나 문화학 쪽으로 가고 있는듯; ㅋ 뭐 어때!
어쨌든 사회주의의 다양한 전통들은 아직도 살아서 숨쉬고 있다는 것. 그럼에도 '맑스'에 집중하는 이유는, 역시 '소련'에 대해서, 그 실패에서부터 우리는 사유를 시작해야 한다는 믿음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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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에대한 기본을닦고싶은분들 (평점:)
부산미남♡ 2007-02-03 00:28

이교재를 시작한지 25일째가 되던날 이교재를 마무리하게되었습니다 ㅋ

처음이교재를 사게된계기는 수.만.휘 여러분들의 추천으로 사게되었지요

저는 현대시를 워낙 잘하지 못하던터라 교재를 알아보던중에 이교재가

좋다는소식을듣고 구입하게되었어요 처음에는 서점가서 구성을본후에

인터넷서점에서 사면 싸다는소리를듣고 알라딘에서 구매하게되었구요 ㅎ

처음에는 현대시 유형을알아보는 그런파트가있어요 ㅎ

앞부분만 공부하더라도 대충 현대시에 대한 감이 오실거에요 ㅎ

뒷부분에는 실전문제가 있는대요 그것을푸시면서 실전에 적응하시는훈련을하신다면

현대시 부분에서 좋은성적기대하실수있으실것 같아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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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 파트에 자신이없다면 이교재로 처음부터 다시시작! (평점:, 추천:5)
planners 2007-01-09 14:31

언어실력이 괜찮은 학생들에게 언어영역에서 교재를 추천하라면 오감도와 즐겨찾기를 추천하곤 하죠... 저또한 수험기간중 언어 ㅚ수라고 불리기도 했었는데 서슴없이 즐겨찾기를 추천합니다. 저자인 구자송 선생님 때문이지요.

4년전부턴가 즐겨찾기라는 너무나 촌스러운 표지의 문제지가 나왔을때 그 촌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 이유는 수능과 가장 비슷한 형태의 문제들, 그리고 반론을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잘 쓰여진 해설때문이었죠. 특히 고득점학생군에서 엄청난 선호도를 보이고 있지요.

시 같은 경우는 문제가 작가의 주관에 치우치는 경우 정말 시간낭비도 심하고 결국 배운것도 하나도 없게 되는 경우도 많은 데 이교재는 다른 교재들에 비해서 그런 점이 상당히 적은 편입니다. 그리고 해설또한 잘 되어 있어서 시분야의 문제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결해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훈련용으로 아주 좋습니다.

 

 

 

ㅋㅋㅋ 서평 2개 있는데 모두 좋다. 훗. 으쓱.

ㅋ 그렇지만 뭐; 내가 한 것은 없다. 내가 문제 낸 것은 다 빠꾸맞고 거의 울면서 -_-; 고쳐서 마지막

에서야 통과되는 등. 그리고 나는 개정부터 들어간 거라서 내가 쓴 부분을 다 합해봤자 10페이지

조금 넘을 듯.

그래도 기분은 좋은데 뭐. ㅋㅋ

이 책 많이 팔려서, 인세를 받으면 좋겠다 ㅜㅠ  

(ㅋ '현대시'로 검색한 책 중에 판매량 1위다^^ 뭐 알라딘 포인트는 그래봤자 2000대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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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쓰잘 데 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지난달인가 한국일보에서 새로 연재하는 '우리시대의 고전50' 관련기사와 목록을 옮겨온 일이 있다. 선택과 배제의 문제가 개입하긴 하지만 어떻든 이런 캠페인을 통해서라도 동시대의 삶과 인식의 지평을 밝혀주고 넓혀준 책들을 다시금 상기해보는 일은 뜻깊다고 생각한다. 내일자 신문에는 그 여섯번째 연재가 게재되는 듯한데, 도정일 교수의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민음사, 1994)을 다루고 있다. 모처럼 내가 완독한 책이기도 해서 거리낌 없이 스크랩해놓는다. 그게 벌써 12년도 더 전의 일이군.

기사에서 문학평론가로 호명되고 있지만, 이 책은 저자의 유일한 문학평론집이면서 유일한 단행본 저작이기도 하다. 기사의 말미에도 비치고 있지만 12년 전에도 저자는 원고 더미를 정리해서 당장이라도 서너 권 정도의 책은 내놓을 예정이라고 밝힌 바 있다. 세월무상이다. 아직 한권도 안 나왔다. '책읽는 사회문화재단' 일에 너무 헌신하신 탓인 듯한데, 책읽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 일급의 저자 한 사람이 책을 낼 시간을 내지 못한다는 것이 독자로서 안타깝다. 가령, '쓰잘 데 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같은 제목의 책이라면 서가에 꽂아둠 직하지 않은가? 그 안타까움을 나눠드리고 싶다.

한국일보(07. 02. 08) 풀밭에 앉아 詩를 쓰다 여우비에 젖는 꿈을 꾸다

"친구여, 닭을 잡아 먹지 마라 / 그 닭은 그대의 할머니일지도 모르므로.”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가 쓴 <변신>에서의 메타포는 미상불 기괴하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더 바삭바삭하게 튀겨진, 시인의 말을 빌면 할머니를 소스에 찍어 먹는 형국이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것이든 아니든, 오늘날 그 같은 행위는 광범히 유포돼 천연덕스런 일상이 되고 말았다.

문학평론가 도정일(66)씨는 오비디우스의 시구를 끄집어 내고, 지금 우리가 처한 환경이 시인들로부터 아름다움에 대한 마지막 인내력마저 소진시켰음에 틀림없다고 단언한다. 그 같은 확신의 밑바닥에는 이런 명제 하나가 불길하게 흐물대고 있을 거라고 그는 예시한다. ‘자동 판매기가 / 고무 호스로, 밑을 대주는 종이컵들을 윤간하고 있다. / 창녀들은 포주의 뱃속에서 / 밥을 빌어 먹는다.’(최승호의 <무인칭 시대> 중)

운문의 형식을 빌어 그려진 저 지옥도는 우리의 현실이다. 그는 말한다. “1970년대 이후의 한국사는 과거 어느 시기 것과도 다른 욕망 생성의 사회적 환경, 정확히 말하면 ‘천민 자본주의’의 환경 속에서 씌어져 왔다. 21세기, 저 환경은 더욱 정교해져 ‘탐욕’이라는 형태의 지배적 욕망을 사회적으로 생산하고 있다”고.

책 이미지

그가 여기 저기 실린 평론들을 묶어 처음으로 낸 책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는 우리 시대의 시에서 읽어 낸 생명들의 표정이다. 시적 분석의 형태를 취하지만, 곳곳에서 문명 비평의 체취를 짙게 풍긴다. 전례를 찾기 힘든 글쓰기에, 사람들은 ‘경쾌한 듯 한데, 읽으면 읽을수록 어렵다’는 반응을 내놓았다.

예를 들어 ‘인간에게서 배제당한 자연은 역으로 인간을 배제한다. 시인은 눈 내리는 숲으로 가지 못하고 아이들은, 비를 겁내고, 농사꾼은 땅을 믿지 못한다. 비슷한 이유로, 풀잎은 시인을 배제한다. 아이들의 머릿속에는 “비 맞으면 안 돼”라는 어머니의 당부가 깊이 박혀 있다’ 또는 ‘농약 끈적한 풀밭에 앉아 풀잎의 숨소리를 들어야 하는 왜곡과 변태를, 그 비참함을, 그가 무슨 수로 견딜 수 있으랴. 비는 시인을 배제한다’는 진술을 보라.

푸른 강 대신에 그에게는 ‘똥물’이 있고, ‘똥통’이 된 지구가 있다. 시인들마냥, 그 역시 강으로부터 배제됐다. 그럼에도 여전히 강과 함께 사는 듯이 생각하는 환각의 능력이 필요하고 감성 분열의, 평론가적 능력이 필요하다. 책의 말마 따나 산성 눈 내리는 지금, 이 세계의 어느 숲이 아름다울 것이며 누가 그 숲에 취해 발길을 멈추는가? 그 같은 현실 앞에 낭패감을 느끼고, 처리 곤란한 딸꾹질에 내몰리는 자신을 발견한다고 그는 고백한다. “마르쿠제가 강조했던 것처럼 자연이 노예화할 경우, 그 자연의 일부인 인간 자신도 노예화의 운명을 피하지 못하죠. 자연에 발생한 재난은 곧바로 문학의 재난이며, 자연의 수난은 곧장 문학 자체의 수난이에요.”.

문명 비평 같기도 하고, 시민 운동을 위한 굳건한 지지대 같기도 하고, 개성 넘치는 사유에 빚지고 있는 수상록 같기도 한 이 책은 이 강퍅한 시대에 인문학은 어떻게 존재해야 할 지를 예시한다. 창작과비평 등 잡지ㆍ강연 등에 산발적으로 소개된 글들을 어느 눈밝은 편집자가 모아 두었다, <녹색평론>에 썼던 제목을 내세워 단행본으로 묶은 이 책은 1994년 1쇄를 찍은 이래 현재 10쇄까지 찍었다는 기록에 빛난다. 그 와중에 1만부 팔리고 절판된 기록도 갖고 있는, 별난 문학평론집이다. “게으른 나로서는 수정ㆍ보완까지 했죠. 10년이 지났는데도 갖고 와, 사인을 부탁하는 독자에, 저도 놀랄 정도예요.” 아예 재판을 내자는 제의도 심심찮게 듣고 있다.

책은 한국 사회가 아직 그 광풍을 체감하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눈을 치켜 뜨고 있다. 그것은 인문학자에게 주어진 의무이기도 하다고 저자는 믿는다. “동유럽 붕괴, 마르크시즘 퇴조 등에 대한 대안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은 탈구조주의와 해체론 쪽으로 갔어요. 책 속에 일관된 반포스트모더니즘론은 한 시대에 대한 비판적 사유의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바람의 결과였죠.”

비판의 칼날은 보건 사회ㆍ청결 사회에 대한 집착, 웰빙에 대한 광적 증후에 예리하게 번득인다. 원로 인문학자의 의무감이기도 했다. “삶의 부조리, 유한성 앞에서 인간의 유한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곧 인문학이니까요. 행복 이데올로기에 미친 시대에 대한 반동일지도 모릅니다.”

책은 위기에 처한 우리 시대 인문학이 택할 수 있는 방편도 제시했다. 문학인들끼리 통하는 언어만이 아닌, 문학과 대중의 괴리를 좁히고 문학이 대중의 삶에 어떤 영향 미치는가에 대한 실험이라고 서문이 밝힌 대로다. “문학과 삶 간의 관계를 끊임없이 환기시키자는 나의 비평적 모토가 발현된 거죠. 대학에서의 난삽한 비평 논의는 대중에게는 부담스럽고 불필요하니까요.” 그는 한국 문학 평론이 그 부분에서 돌파구를 열지 않으면, 문학 평론이 왜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고 힘 준다.

평론의 형식과 문체에 대한 실험이기도 했다. “에세이나 문학 저널리즘 같은 문체로, 대중의 삶에 접착된 형식말예요. 친근한 용어를 구사, 이론성ㆍ난삽성에 빠지지 않게 하는 인문학적 글쓰기.” 이런 종류의 평론은 처음 접했다며 일반인들은 반겼다. 대학 비평, 문학 이론 가르치며 한국 문학 현장 비평은 삼가왔던 그가 <문예중앙> 주간 정준수의 ‘꼬드김’에 몇 번 연재했던 계간평이 거둔 결과를 보면 자신도 좀 놀랍다. “이미 당시 문학 평론과 대중 간의 괴리는 심화돼 가고 있었죠. 지금은 서로 백리 밖이지만.”

이 반자연적 시대, 그의 책이 노둣돌 삼는 ‘숲’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생태 환경이에요. 좁게는 자연, 넓게는 자연과의 관계죠. 지금 한국은 볼거리 문화로 사람들을 마취시키려는 서커스 정책으로 통합돼 있잖아요?” 364쪽에 달하는 책은 눈ㆍ비 오면 오히려 두려워 하는 이 시대, 즉 자연이 망가진 때 문학이 당해야 하는 곤경을 증거한다. 삶의 모태인 자연을 착취ㆍ파괴하는 현상을 왜 추방해야 하는지, 문학은 철저히, 뼈저리게 느껴야 함이 동시대 우리 문인들의 육필로 증거돼 있다. 사회 혁명, 생산 양식, 소비 양식에 왜 일대 전환이 이뤄져야 하는지도. “생태란 게 어떻게 문학 속으로 용해될 수 있나를 보여주자는 거 였죠.”

그러나 어느 누가 냉장고를, 자동차를 포기할 것인가? “예술 작품이나 교육 같은 일상의 삶 속에서 풀어갈 수 있어야죠.” 그는 일상, 즉 현실에 아직도 문학이 할 일은 남아 있다고 믿는다. “지금은 대중 문화에 쫓겨, 문학 자체가 변두리에 내몰린 때예요. 문학과 예술이 인간의 삶에 왜 필요한지에 대한 인식부터 확산돼야 하는 시기죠.” 그는 이 책이 예술ㆍ문학의 사회적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기를, 나아가 평론가들이 문학과 소비자들 간의 연결 고리를 재정립해 주기를 소망한다.

책 속에 드러난 바, 그의 현실 인식 지형도를 고려한다면 상황은 화급하다 ‘지금의 문학은 오락의 한 형태다. 대중이 쉽게 소비할 수 있는 오락물의 형태로 이동해 가고 있다. 문학과 오락의 화간(和姦) 시대다.’ 그는 “문학이 이제 아예 말초적ㆍ외피적ㆍ감각적 엔터테인먼트로 돼 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게는 오랫동안 품어 온 문학의 속성 혹은 운명론이 있다. 문학이란 기본적으로 반(反)행복론이라는 것이다. “독자의 엔터테인먼트 수준을 높이게 하고, 다양하면서도 근원적인 딜레마 쪽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옮기려 하죠. 삶이 말초적 오락의 수준에 머무르기를 거부하는 예술이 문학이니까요.”

생태 파괴와 간통한 온난화가 성큼성큼 한반도를 잡아 먹으려 오는 때, 그의 말은 이 책의 속편을 암시한다.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지만 그들은 하루하루 눈앞의 삶에 매여 있다. 그들에게는 개발 정책만큼 매력적인 것이란 없다. 한국에서, 환경청이란 영원히 찬밥 신세 아닌가?”

‘책 읽는 사회…’ 5년 활동, 농어촌 57개 도서관 재건

명함이 말하듯, 또 사람들이 생각하듯 그는 글보다 행동으로 더 이름 높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현재 그의 명함이 알려주는 바, 그는 <책 읽는 사회 문화 재단>의 이사장이다. 시인이 숲으로 가지 못하는 시대, 그의 책은 숲속에 안주할 수 없었다. 그가 책의 숲에서 사람의 숲으로 온 것은 1999년 문화연대 출범에 맞춰 시민운동에 적극 관여하기 시작하면서다. 그는 뛰면서 생각하고 발로 썼다. 잡지사, 언론사, 대학 교수(작년 2월 퇴임) 등을 두루 거쳐 지금은 민간 사회 운동의 축이 된 그가 한갓지게 자연을 완상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할지 모른다.

평론이라도 그가 쓴 글은 여느 책상물림의 글과 달랐다. 신문의 칼럼을 써도, 그의 논조는 ‘정치적 변화가 있을 때마다 죽통에 쉬파리 엉기듯 달려들어 세상의 소음을 늘리는 데 공헌하는 3류 학자’(<시인은…> 389쪽)의 글이 아니었다. YS 정권 때는 정부의 문화 정책 자문에, DJ 때는 대통령정책자문위원회에 적극 응했던 그의 관심은 현실 속의 문화 운동 또는 정책이었다.

지난해 2월 경희대 퇴임 직후, 지인들은 “책 없는 퇴임 없다”며 “책 내고 강연회도 갖자”고 성화였다. 그러나 팔 걷어 부치고 뛰어든 <책읽는…> 사업에 열중하느라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2002년 받은 암 수술은 그를 더욱 강하게 했다. “지난 5년 동안은 ‘책 읽는 사회…’ 사업에 송두리째 바쳤지만, 그 동안 잃어 버린 시간들을 앞으로 복구해 낼 것”이라 다짐한다. 대기업의 기부를 받아, 지난해 9월 이후 농어촌 낙도 지역의 도서관 57개를 도시 도서관 뺨치는 수준으로 리모델링한 ‘작은 도서관 사업’은 한국 땅에서 거의 소멸되다시피 한 ‘공공 지식’의 중요성을 새삼 알려낸 쾌거로 기억된다.

그의 컴퓨터에 간직돼 있는 20여권 분량의 원고는 더러 제목만으로도 족히 호기심을 자극한다. <쓰잘 데 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이라니. 상생, 평화, 선린, 공존 등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체온에 대해 이야기해 줄 책이다. 이성복 시인의 어투를 흉내낸다면, 일에 밀려 하드 디스크에서 뒹구는 원고들은 언제 잠을 깰까?(장병욱 기자)

07. 02.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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