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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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출간된 지 벌써 2년 반이나 되었구나..ㅋㅋ 드디어 읽었다. 듣던 대로 유발 하라리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짧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술술 읽히는 책이다.

가장 흥미로웠던 내용은 신석기 혁명에 관한 부분이었다. 인류가 밀을 길들인 것이 아니라 밀이 인류를 길들였다는 내용이 인상깊었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볼 때 농업혁명으로 인해 밀이 전 지구를 뒤덮어 가장 성공한 식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중심적 사고를 탈피한 저자의 통찰은 이 책 곳곳에 드러난다. 가령 흔히 말하는 생태계 파괴를 생태계 변형이라고 불러야 한다거나, 역사에는 선악이 없다는 내용 등이다. 아직까지 이러한 입장에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도 있겠지만, 오히려 모든 인간을 동등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싶다.

저자가 예측하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열어갈 미래 세계의 모습은 지금으로선 굉장히 낯설고 섬뜩한 모습이다. 그러나 뒤에서는 역사가 항상 가능성 높은 방향으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며 한 발 빼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미래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현재의 다양한 변수가 모여 미래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이 책 또한 어떻게든 미래 사회의 모습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이다. 이 책의 모든 독자들 역시 그럴 거다.

124 그것은 누구의 책임이었을까? 왕이나 사제, 상인은 아니었다. 범인은 한 줌의 식물, 밀과 쌀과 감자였다. 이들 식물이 호모 사피엔스를 길들였지, 호모 사피엔스가 이들을 길들인 게 아니었다.

잠시 농업혁명을 밀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1만 년 전 밀은 수많은 잡초 중 하나일 뿐으로서 중동의 일부 지역에만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불과 몇천 년 지나지 않아 세계 모든 곳에서 자라게 되었다. 생존과 번식이라는 진화의 기본적 기준에 따르면 밀은 지구 역사상 가장 성공한 식물이 되었다. 북미의 대초원 지역 같은 곳에는 1만 년 전 밀이 한 포기도 없었지만 지금은 수백 킬로미터를 걷고 또 걸어도 밀 이외의 다른 식물을 볼 수가 없다. 세계적으로 밀이 경작되는 지역은 225만 제곱킬로미터쯤 되는데 이는 브리튼 섬(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포함)의 열 배에 이른다.

어떻게 이 잡초는 그저그런 식물에서 출발해 어디서나 자라는 존재가 되었을까? 밀은 호모 사피엔스를 자신의 이익에 맞게 조작함으로써 그렇게 해낼 수 있었다. 약 1만 년 전까지 이 유인원은 사냥과 채집을 하면서 상당히 편안하게 살고 있었으나, 이후 밀을 재배하는 데 점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2천 년도 채 지나지 않아 전 세계 많은 지역의 인간은 동이 틀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밀을 돌보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되었다.

밀을 키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많은 노동력을 요구하기 떄문이다. 밀은 바위와 자갈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사피엔스는 밭을 고르느라 등골이 휘었다. 밀은 다른 식물과 공간, 물, 영양분을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타는 듯한 태양 아래 온종일 잡초를 뽑는 노동을 했다. 밀은 병이 들기 떄문에, 사피엔스는 해충과 마름병을 조심해야 했다. 밀은 자신을 즐겨 먹는 토끼와 메뚜기 뗴에 대한 방어책이 없었기 때문에, 농부들이 이를 막아야 했다. 밀은 목이 말랐기 떄문에, 인간들은 샘과 개울에서 물을 끌어다 댔다. 밀은 배가 고팠기 때문에, 사피엔스는 밀이 자라는 땅에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동물의 변을 모아야 했다.

사피엔스의 신체는 이런 과업에 맞게 진화하지 않았다. 사과나무에 기어오르고 가젤을 뛰어서 뒤쫓는 데 적응했지, 바위를 제거하고 물이 든 양동이를 운반하는 데 적합한 몸이 아니었다. 인간의 척추와 무릎, 목과 발바닥의 장심이 대가를 치렀다. 고대 유골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농업으로 이행하면서 디스크 탈출증, 관절염, 탈장 등 수많은 병이 생겨났다. 새로운 농업노동은 너무나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사람들은 밀밭 앞에 영구히 정착해야만 했다. 이로써 이들의 삶은 영구히 바뀌었다. 우리가 밀을 길들인 것이 아니다. 밀이 우리를 길들였다. ‘길들이다, 가축화하다’라는 뜻의 단어 ‘domesticate’는 ‘집’이라는 뜻의 라틴어 ‘domus’가 어원이다. 집에서 사는 존재는 누구인가? 밀이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다. - P124

130 호모 사피엔스는 약 7만 년 전 중동에 도착했다. 그후 5만 년 동안 우리 조상들은 농업 없이 번성했다. 그 지역의 자연자원은 인구를 지탱하기에 충분했다. 사람들은 풍요로운 시절에는 아이를 좀 더 많이 낳았고 궁핍한 시절에는 약간 덜 낳았다. 인간은 다른 많은 포유동물과 마찬가지로 번식을 조절하는 호르몬과 유전자 메커니즘을 지니고 있다. 풍족한 시절에 여자아이는 사춘기가 일찍 오고 임신 가능성이 높아진다. 어려운 시절에는 사춘기가 늦게 오고 번식력이 떨어진다.

이런 자연적 인구조절에 문화적 메커니즘이 추가된다. 아기와 어린이는 동작이 굼뜨고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방랑하는 수렵채집인들에게 부담이었다. 사람들은 3~4년 터울로 애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여성들은 24시간 내내, 늦은 나이까지 아이에게 젖을 먹임으로써 터울을 두었다(24시간 수유는 임신 가능성을 크게 낮춘다). 다른 방법으로는 완전하거나 부분적인 금욕(아마도 문화적 터부의 뒷받침을 받는), 낙태, 때로는 유아 살해 등이 있었다. - P130

334 이와 함께,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신조와 생명과학의 최근 발견 사이에 엄청난 간극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이 간극을 그다지 오래 무시하고 있을 순 없을 것이다. 우리의 자유주의적 정치·사법제도는 모든 개인이 신성한 내적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 더 나누거나 바꿀 수 없는 이 본성이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모든 윤리적, 정치적 권위의 근원이 된다는 믿음에 기반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개인의 내면에 자유롭고 영원한 영혼이 거한다는 전통 기독교 신앙의 환생이다. 하지만 지난 2백 년에 걸쳐 생명과학은 이런 믿음을 철저히 약화시켰다. 인간이라는 유기체의 내적 작동방식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거기서 아무런 영혼도 발견하지 못했다. 인간의 행동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호르몬, 유전자, 시냅스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을 펴는 과학자들이 점점 늘고 있다. 침팬지, 늑대, 개미의 행동을 결정하는 바로 그 힘 말이다. 우리의 사법 정치체계는 그런 불편한 발견을 대체로 카펫 밑에 쓸어 넣어 숨겨두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생물학을 법학과 정치학으로부터 구분하는 벽을 과연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 P334

338 사실 그 시대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 다시 말해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야말로 그 시대를 가장 잘 모르는 사람들이다. 사후의 꺠달음에 의해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정작 그 시대에는 전혀 명백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 역사의 철칙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글로벌 경제위기에서 벗어난 것인가, 아니면 최악의 위기가 곧 닥쳐올 예정인가? 중국이 성장을 계속해서 선도적 초강대국이 될까? 미국은 헤게모니를 잃을까? 일신론적 근본주의가 급증하는 것은 미래의 파도일까 아니면 장기적 중요성은 별로 없는 국지적 소용돌이일까? 우리는 환경적 재앙으로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기술적 파라다이스로 향하고 있는가? 어느 쪽이든 이를 뒷받침하는 훌륭한 주장이 존재하지만, 확실히 알 방법은 없다. 그러나 불과 몇십 년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과거를 돌아보면서 이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은 명백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 P338

552 우리가 중세 사람들에게 "당신의 삶 전체에 대해 만족하십니까?"라고 물었다면, 이들은 주관적 행복의 수준이 매우 높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중세 조상들이 행복했던 것은 사후의 삶에 대한 집단적 환상 속에서 의미를 찾았기 때문이라는 말인가? 그렇다. 환상에 구멍을 뚫어 파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행복하지 않을 리가 없다. 우리가 아는 한, 순수한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삶은 절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류는 목적이나 의도 같은 것 없이 진행되는 눈먼 진화과정의 산물이다. 우리의 행동은 뭔가 신성한 우주적 계획의 일부가 아니다. 내일 아침 지구라는 행성이 터져버린다 해도 우주는 아마도 보통 때와 다름없이 운행될 것이다. 그 시점에서 우리가 아는 바로는 인간의 주관성을 그리워하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부여하는 가치는 그것이 무엇이든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 P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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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세계는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소개된 북가이드(번역서만)



1부 세계는 지금 어떤 전환을 맞이했는가
- 마르쿠스 가브리엘,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
- 질베르 시몽동,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식에 대하여

2부 IT혁명은 우리에게 무엇을 약속하는가
- 데이비드 라이언, 감시사회로의 유혹
- 로렌스 레식, 코드 2.0
- 더글러스 호프스테터, 대니얼 데닛, 이런, 이게 바로 나야! 1, 2

3부 바이오테크놀로지는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 라메즈 남, 인간의 미래
- Ingmar Persson, Julian Savulescu, 미래 사회를 위한 준비
- 닐 레비, 신경윤리학이란 무엇인가
- 마이클 가자니가, 뇌는 윤리적인가

4부 자본주의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 앤서니 앳킨슨, 불평등을 넘어
- 존 롤스, 정치적 자유주의
- 폴 메이슨, 포스트 자본주의 새로운 시작
-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자본론
- 토마 피케티, 21세기 자본
- 프랜시스 후쿠야마, 역사의 종말
- 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 상상의-

5부 인류는 종교를 버릴 수 있을까
- 알랭 바디우, 사도 바울
- 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학문
- 안토니오 네그리, 제국
- 조르조 아감벤, 남겨진 시간
- 테리 이글턴, 신을 옹호하다

6부 인류는 환경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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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과학으로 사회성 기르기 - 복잡한 세상 속 너와 나를 이해하는 유쾌한 브레인 사이언스
박솔 지음 / 궁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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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오~ 똑똑한데? 맞아. 측두엽과 두정엽의 역할이 도덕적 판단을 내릴 때 관여하는데, 이 영역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 그리고 과학자들이 특정 뇌 영역에 손상을 입은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본 결과 알아낸 건데, 뇌의 앞쪽 부분인 전두엽도 관련이 있대. 전두엽에는 감정을 조절하거나 보상과 처벌에 대해 생각하는 영역이 분포해 있거든. 이 영역에 손상을 입은 환자들에게 사회적 규범과 관련된 상황극을 보여주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했더니 일반적으로 도덕적이라고 여겨지는 판단을 내리지 못했대. 사회적 규범을 잘 이해한다는 건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내게 보상으로 돌아올지, 또 처벌을 피하려면 어떤 행동을 선택해야 하는지 잘 안다는 거겠지? 그런데 그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면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게 어려워질 거야. 마지막으로 한 군데가 더 있는데, 혐오감을 관장하는 섬이랑이라는 영역도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데 관여한대. - P49

50 뇌 속에서 ‘도덕’을 찾으려면

도덕은 사회적 규범의 하나다. 사회적 규범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 행동이 무엇인지 정확한 정의를 내리기는 매우 어렵고, ‘도덕심’을 측정하는 것 역시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과 같이 어디서든 ‘비도덕적’이라고 여겨지는 상황과 행동이 존재한다. 뇌에서 도덕심을 찾을 때는 이처럼 어디서나 도덕적이라고 여겨지는 상황이 이용된다.

연구자들은 특정 상황을 제시하고 그 상황에서 피실험자가 하는 대답이나 행동과 그 때 일어나는 뇌 활성의 변화를 관찰함으로써 ‘도덕심’을 유발하는 뇌 영역을 알아내기 위해 노력해왔다. 지금까지 이뤄진 뇌 속의 ‘도덕’을 찾기 위한 다양한 연구 결과에서 ‘도덕심’을 관장하는 뇌 영역은 한곳으로 콕 집어 나타나지 않았다. 도덕적 판단은 사회 규칙 등의 학습 내용과 감정적 반응 등 다양한 요소가 조합되어 나타나는 의사결정 과정이기 때문에 여러 뇌 영역의 활성이 복합적으로 관여한다고 알려져 있다.

뇌의 특정 영역에 심각한 손상을 입은 경우 성격이 완전히 변하는 경우는 알려져 있다. 그 중 한 예가 피니어스 게이지라는 사람의 이야기이다.피니어스 게이지는 1848년, 뇌의 전전두피질 아래쪽 부분을 커다란 막대기가 관통하는 부상을 입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기억이나 지각 능력 등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지만, 이 부상 이후 피니어스 게이지의 도덕성, 사회성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가족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이 다른 성격을 가진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정도였따.

피니어스 게이지의 뇌에서 손상을 입었던 바로 그 영역인 전전두피질의 아래쪽 부분은 실제로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된다. 이 영역은 특히 죄책감이나 동정심, 부끄러움 같은 사회적 감정을 느끼는 데 관여한다고 알려져 있다. 연구자들이 전전두피질의 아래쪽 부분에 손상을 입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도덕적 판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을 제시한 뒤 그 대답을 뇌에 손상이 없는 사람들의 대답과 비교해본 결과, 전전두피질의 아래쪽 부분에 손상을 입은 사람들은 감정이 개입되는 도덕적 판단을 잘 내리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브레이크가 망가진 열차가 달려오고 있다. 열차가 달려가는 방향에 다섯 사람이 서 있다. 나는 육교 위에서 그 상황을 보고 있는데, 내 옆에 서 있는 조수를 밀어 떨어뜨리면 열차를 막을 수도 있다. 한 사람을 희생시켜 여러 사람을 구하는 것과 고의로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 중 무엇이 더 도덕적인 선택일까?

이 상황에서 생존할 수 있는 사람의 수를 본다면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옆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 역시 도덕적이라고 볼 수 없는 선택이며, 죄책감이나 책임감을 불러올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전전두피질의 아래쪽 부분에 손상을 입어 죄책감, 희생에 대한 책임 같은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뇌에 손상이 없는 사람에 비해 한 사람을 희생시키겠다는 선택을 내리는 비율이 더 높았다. 또 이들은 선택을 하는 데 있어 망설이는 시간도 훨씬 짧았다.

반면, 이 사람들이 사회 규칙이나 학습한 도덕적 사실을 이해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길에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것과 같이 감정적 판단을 동반하지 않는 상황의 경우 전전두피질의 아래쪽 부분에 손상이 있는 사람도 정상적으로 도덕적 판단을 내렸다.

그렇다면 감정을 동반하는 모든 도덕적 상황에서 전전두피질의 아래쪽 부분이 그 역할을 하는 걸까? 사람의 뇌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최후통첩 게임에서 상대방보다 내가 적은 돈을 배당받는 경우 전전두피질의 아래쪽 부분에 손상을 입은 사람도 대부분 화를 내며 제안을 거절했다.

이 경우는 앞선 경우와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전자의 경우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한 감정적 판단을 내리는 상황이었고 최후통첩 게임의 경우는 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감정적 판단을 내리는 상황이었다. 즉 전전두피질의 아래쪽 부분은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한 직접적인 감정이 아닌, 제삼자가 처한 상황, 타인과 나의 관계에 대한 감정인 ‘사회적 감정’이 개입되는 판단을 내리는 데 관여하는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 P50

125 부끄러움을 느끼는 뇌

부끄러움, 수치심도 감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두 감정은 사회적인 상호 작용을 반드시 동반하는 ‘사회적 감정’으로 앞서 얘기한 기쁨, 슬픔, 분노, 혐오감, 공포와 같은 감정과 조금 다르다.

기쁨이나 슬픔, 분노, 혐오감, 공포심은 다른 사람과의 상호 작용이 없어도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예를 들어 내가 좋아하는 꽃을 보면 기쁘고, 기르던 화분이 시들어 죽으면 슬프고, 화분을 잘 돌보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날 수도 있다. 또 화분에서 징그러운 무늬의 풀이 돋아난 걸 보면 혐오감이나 공포심이 들 수도 있다. 다섯 가지 감정을 느낄 동안 다른 사람의 개입은 전혀 없다.

반면,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은 타인에게 비춰지는 나의 모습에 대한 생각이 반영된 감정이다. 죄책감이나 자부심 같은 것도 마찬가지이다.

수치심은 뇌의 슬전대상회라는 곳과 후대상피질 영역에서 느낀다는 연구가 있다. 후대상피질은 다른 사람들과 상호 작용하면서 나타나는 고차원적인 행동을 조절하는 전두엽 영역과 연결되어 있다. 연구에 따르면 부끄러움을 더 많이 느끼는 사람일수록 뇌의 슬전대상회 영역의 크기가 크고, 후대상피질의 두께가 얇다고 한다. 또 두려운 감정을 느끼는 편도체의 크기도 작았다고 한다. - P125

163 딱 그 말이 맞아. 고장관념이나 편견에 의한 반응이 바로 그래.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편견과 고정관념에 따라 행동하게 되는 거지. 자기도 모르게 하는 행동, 즉 스스로가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판단을 내리고 행동을 한다는 건, 우리가 알아채기도 전에 뇌가 먼저 결정을 내리고 반응한다는 거지. 이게 바로 고정관념과 편견에 의한 반응의 중요한 특징이야. 그리고 편견과 고정관념 모두 자기가 속한 집단, 사회의 영향을 많이 받아.

이렇게 비슷한 구석이 많은 둘의 차이를 굳이 나눠보자면 이래. 고정관념은 어떤 집단에 대해서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다 이럴 거야, 라고 단순하게 일반화해서 생각하는 걸 말해.

편견은 사람들이 직접 겪어보기 전에 미리 예상하고 판단을 내리는 것을 전반적으로 가리키는 말로 쓰인대. 그리고 주로 부정적인 평가들이야. 사회심리학 분야에서 편견은 특히 감정적인 반응,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태도를 가리킨다고 해.

편견은 고정관념보다 좀 더 감정적인 판단이고, 또 전반적인 집단에 대한 평가보다 그 안에 속한 어떤 개인에 대한 평가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아. 음…… 예를 들어서, 네가 공대 남자는 다 말주변이 없을 거야, 라고 생각하는 건 고정관념이지만, 저 사람은 공대 남자라 성격이 별로일 거다. 그래서 싫다고 생각한다면 이건 편견인 거지. - P163

230 마음의 이론을 수행하는 뇌

마음의 이론을 수행하는 데는 측두두정정합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이 영역의 역할만으로 완전한 마음의 이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이론이란 타인과 관계를 맺고 여러 사람이 사회를 꾸려 살아가는 데 필요한 능력인 사회성의 기본 요소라고 볼 수 있다. 타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는 것은 감정적 요소와 인지적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해야 가능하다.

마음의 이론을 수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다른 영역에는 전전두피질의 중앙 부분과 상측두구가 있다. 이 영역들은 의사결정을 내리거나 주변 환경을 고려해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된다.

230 나는 마음의 이론을 수행할 수 있을까? - 샐리 앤 테스트

마음의 이론은 특히 다섯 살 이하 어린이들에게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 능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경우도 물론 있다. 마음의 이론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는 ‘샐리 앤 테스트’라고 불리는 간단한 테스트로 확인해볼 수 있다. 간단한 상황을 그린 만화를 보여주고 그 상황에 대한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하는지 보면 된다.

샐리와 앤이라는 두 명의 아이가 각각 바구니를 가지고 있다. 샐리에게는 구슬이 하나 있다. 앤이 보는 앞에서 샐 리가 이 구슬을 자신의 바구니에 넣는다. 그리고 샐리가 잠시 자리를 비운다.샐 리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앤은 샐리의 바구니에 있던 구슬을 꺼내 자기 바구니에 넣는다. 잠시 후 샐 리가 다시 돌아온다. 샐리는 구슬을 어느 바구니에서 꺼낼까?

이 글을 읽은 독자들은 당연히 자기 바구니를 들여다볼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샐리는 앤이 구슬을 옮겨 놓은 것을 모르니까.

아주 쉽고 간단한 것 같지만 이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샐리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봐야 한다. 그런데 만약 다른 사람은 나와 별개로 자기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대답할까? 샐 리가 앤의 바구니에서 구슬을 꺼낼 거라고 답할 것이다. 샐리는 앤이 구슬을 옮긴 사실을 모르지만,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사람의 입장에서는 구슬이 앤의 바구니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대답을 한다면 앤의 바구니를 들여다보는 게 맞다.

실제로 다섯 살이 안 된 어린아이들이나 자폐 증세가 있는 사람 대부분이 이 같은 대답을 한다. 이들에게서는 마음의 이론을 수행할 수 있는 뇌 영역이 제대로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5세 이하의 어린아이들, 또 자폐 증세가 있는 사람 다수는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는 것,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은 나와 독립적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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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VS 철학 - 동서양 철학의 모든 것, 철학 대 철학
강신주 지음 / 그린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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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도서관에서 빌려온 초판을 B도서관에서 일주일 걸려 읽고 북카트를 지나가는데 2016년 개정판이 꽂혀 있는 걸 발견했다. -.-;; 하필 다 읽은 그 날에.. 아무튼 개정판을 펼쳐보니 추가된 철학자들이 있고 머리말에 따르면 전면적으로 내용이 크게 개정됐다 하니, 조만간 읽어봐야겠다.

 여러 철학적 논점들을 각각 결정론의 입장과 그 반대(의지론이라고 하나?)의 입장을 대조하여 서술하는 형식으로 쓰여졌다. 읽으면서 나는 의지론 쪽에 더 마음이 갔다. 하지만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것은 운명론적 관점이기도 했다. 요새 내 맘대로 안되는 일이 많이 일어나서였을까. 그야말로 ‘이성으로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라는 격언이 떠오르는 하루였다.

 결국ㅡ 미래는 스스로 창조하는 것!


242 결국 하이데거의 근본적 통찰은 마음의 지향성이 어느 경우에나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제한된 경우에만 발생한다는 데 있었다. 익숙하게 사용하던 도구들이 망가질 때처럼 사물들과의 친숙한 관계가 와해되었을 때에만, 다시 말해 친숙한 사물들이 낯선 사물이 되었을 때에만 우리는 그 사물들을 의식적으로 지향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역으로 사물들과 친숙한 관계에 있는 인간, 즉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은 평상시 사물들을 지향하지 않고 배려할 뿐이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지향할 때에는 사물들에 대한 배려가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뿐이다. - P242

257 표현은 매우 난해한데 사실 사르트르의 속내는 그의 주저인 『존재와 무』라는 제목에서 이미 웅변적으로 드러난다. ‘존재’라는 개념은 의자처럼 본질이 미리 정해져 있는 사물들, 따라서 자유가 없는 것들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반면 ‘무’라는 것은 인간에게 미리 주어진 본질이 ‘없다’는 점,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만드는 존재라는 점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이 후자의 측면과 관련해 사르트르는 인간을 ‘존재’가 아니라 ‘실존’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existence’라는 개념이 ‘실존’으로 번역되는 관례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자. 인간을 ‘existence’라고 이야기하면서 사르트르는 인간이 ‘밖으로’ 향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분명히 표명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existence’의 번역어로 ‘실존’보다는 ‘탈존’이라는 용어가 적절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탈존’으로서의 인간은 자신의 현재 모습을 부단히 넘어갈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존재이다. 예를 들어 매사에 소심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자신의 소심한 모습을 반성하여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대담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사르트르가 "탈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라고 강조했던 것도 이런 측면 때문이다. 소심한 인간도 매번 대담한 인간으로 거듭나면서 계속 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심함이란 것은 결코 그 사람의 주어진 본질, 변화될 수 없는 불가피한 본성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사르트르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은 본질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본질을 새롭게 만들 수 있고 또 만들어야만 하는 존재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인간이 현재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고 성찰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반성이 가능하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에 대해서, 즉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말해 준다. 이것이 바로 사르트르가 ‘대자’라는 개념으로 의도했던 것이다. 즉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 있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대자’라는 존재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을 반성하고 나아가 미래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확보하게 된다. 그는 과거나 현재의 자신과는 다른 모습의 자신을 자기 의지에 따라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인간에게만 미래라는 시간의 계기가 존재할 수 있는 법이다. 인간에게 미래가 있다는 것은 그가 앞으로 전개될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즉 기투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달리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 P257

263 청년 시절 알튀세르는 인간이 구조의 지배를 받는다는 구조주의의 입장에 강하게 동감했었다. 이런 그가 새로운 구조의 가능성을 꿈꾸게 된 것이다. 물론 그것은 인간이 기쁨의 코나투스를 가지고 있다는 통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자신이 속한 구조가 슬픔을 준다면, 인간은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라도 구조를 해체하고 새로운 구조를 만드는 방향으로 실천할 것이라는 확신인 셈이다. - P263

282 메를로-퐁티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말하는 사람은 말하기에 앞서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여기서 ‘말하기’란 겉으로 표현되어 타자가 들을 수 있는 말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말을 통해 표현 가능한 생각하기 작용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 매우 중요한 통찰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생각 자체가 언어를 통해 가능하다는 것, 따라서 일종의 말하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이 때문에 메를로-퐁티의 지적처럼 "말하는 동안에 우리는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말하는 사람의 말은 생각 자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흔히 생각을 먼저 하고 나중에 그것을 말로 표현한다고 착각하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믿곤 한다. 친구에게 돈을 빌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나서 그에게 "돈 좀 빌려줄 수 있니?"라고 말하게 된다고 말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메를로-퐁티는 친구에게 돈을 빌려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말을 통해서만 가능했던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런 그에게 있어 "표현 앞에 대자적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이 있다고 우리가 믿는 것"은 하나의 착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기에 앞서 생각이 순수하게 존재한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메를로-퐁티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말을 통해서만 가능했던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이것을 말과는 무관한 순수한 생각이라고 오인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오해는 생각 자체 혹은 타인에게 말하기 등이 모두 동일한 말하기의 사례라는 것을 망각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생각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그 질문 자체가 이미 잘못 제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미 어떠한 종류의 생각이든 이미 말로서 등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위의 질문은 "나의 생각을 타자가 오해하지 않게 표현할 수 있을까?"라고 바뀌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이 대목에서 언어의 문제에 대한 동양철학자의 견해를 함께 읽어 볼 필요가 있다. 동양에서는 언어 혹은 말의 기능을 어떻게 이해했던 것일까?



통발은 물고기를 잡으려는 수단이기 때문에 물고기를 얻었다면 통발은 잊는다. 올무는 토끼를 잡으려는 수단이기 때문에 토끼를 얻었다면 올무는 잊는다. 말은 뜻을 잡는 수단이기 때문에 뜻을 얻었다면 말은 잊는다. 나는 어디서 말을 잊은 사람을 얻어서 그와 말을 나눌 수 있단 말인가? 『장자』, 「외물」



타당한 말이다. 물고기를 잡았다면 통발을 제거해야 하고, 토끼를 잡았다면 올무를 벗겨 내야 한다. 여기서 통발이나 올무는 말을, 그리고 물고기나 토끼는 뜻을 상징한다. 표면적으로 장자의 이야기는 말을 경시하고 뜻을, 다시 말해 생각을 중시해야 한다는 취지로 독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상당수 학자들이 바로 이러한 경향의 해석에 빠져들곤 했다. 하지만 장자가 고민했던 것은 말과 생각 사이의 관계가 결코 아니다. 그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은 타자와의 의사소통이 낳는 난점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대목을 보면 장자가 "나는 어디서 말을 잊은 사람을 얻어서 그와 말을 나눌 수 있을까?"라고 한탄한 것을 살펴볼 수 있다. "말은 뜻을 잡는 수단이기 때문에 뜻을 얻었다면 말은 잊는다"라는 구절은 "내가 건네는 말을 통해서 타자가 내 속내를 알았다면 그는 나의 표현 방법에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라는 의미였던 셈이다.

실연으로 인해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 내가 어떤 사람에게 "하늘이 오늘 유난히 푸르네"라고 말했다고 해보자. 타자가 만약 나의 상황과 나의 의도를 알고 있다면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사람이 곧 나타날 거야"라고 말이다. 그런데 만약 제3자가 우리들 사이의 대화를 들었다면, 그는 매우 황당무계한 선문답이라고 혀를 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든지 이런 타자를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을까? 내가 건네는 말로 내 생각, 다시 말해 내 의중까지를 알아주는 타자를 만나는 것 말이다. 이것은 장자 그리고 우리가 모두 공유하는 소망이라고 할 수 있다. 장자가 "나는 어디서 말을 잊은 사람을 얻어서 그와 말을 나눌 수 있을까?"라고 물었던 것은 바로 이런 소망을 나타낸 것이다. 사실 나만의 말하기라고 할 수 있는 나의 생각을 타자에게 말로 표현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와 달리 타자가 나의 생각과 의도를 제대로 간파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잘 이야기했다고 확신하더라도, 타자는 언제든지 나의 확신을 좌절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의사소통으로부터 야기되는 절망에 노출되기 쉽다. 다시 말해 세게나 인생에 대한 나만의 고뇌를 타자에게 말로 표현할 때, 우리는 좌절할 위험에 쉽게 노출된다는 말이다. 사실 우리가 고독한 유아론에 빠지기 쉬운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윤리적인 문제, 종교적인 문제, 그리고 미적인 문제에 대해서, 즉 자신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 우리는 남을 어렵게 설득하려고 하기보다 오히려 침묵으로 일관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타자와의 의사소통을 완전히 거부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바로 여기서 청년 비트겐슈타인의 고뇌가 시작된다. 그는 타자에게 말할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을 구분하려고 했다.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는 것은 얼마나 소비적인 일인가? 쓸데없는 오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내성적인 청년은 말할 수 있는 것만을 말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또한 얼마나 결벽증적인 태도인가? 타자로부터 받을 오해와 몰이해를 견디지 못할 정도로 이 청년은 소심했던 셈이다. - P282

300 마음은 기대·지각·기억이란 기능을 통하여, 기대한 것으로 지각하고 지각한 것을 기억해 두는 것이다. 사실 미래의 것이 아직 존재하지 않음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미래의 일에 대한 기대를 이미 하고 있다. 또한 과거의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과거의 일에 대한 기억을 아직도 하고 있다. 또한 현재의 시간은 순간적으로 존재하다가 지나가는 것인 까닭에 길이가 없다는 사실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지각하는 기능을 계속 수행하는 까닭에, 미래의 존재는 그것을 통과하여 과거의 존재로 변천해 가는 것이다. 『고백록』

우리는 흔히 시간이란 것을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로 나누곤 한다. 보통 과거라고 하면 이미 지나가 버린 때를, 현재라고 하면 지금 이 순간을, 그리고 미래라고 하면 아직 오지 않은 때를 가리킨다. 이 때문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 현재, 미래를 객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 현재, 미래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우리의 마음이 가진 세 가지 능력들, 즉 기억·지각·기대의 능력이 없다면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근본적인 통찰이었다.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여 보아도 우리는 시간에 대한 그의 지적이 매우 타당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어제 일어난 일을 우리가 기억하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어제라는 과거는 존재할 수도 없을 것이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 보아도 이 점은 분명해진다. 나아가 어제 일어난 사건을 생각(기억)하느라 여념이 없다면, 우리는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는 풍경을 쳐다볼(지각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한편 거칠 눈보라를 맞으며 스키를 타면서 설사면의 상태를 주시(지각)하고 있다면, 우리는 내일 일어날 일들을 미리 기대할 수도 없을 것이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우리가 기억하는 순간, 지각하는 순간, 그리고 기대하는 순간 등은 모두 그 자체로서 현재라는 점이다. 어제 일을 기억할 때 나는 어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있는 것이고, 내일 약속을 기대할 때 나는 내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의 최종적인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겠다. 과거는 현재의 과거이고, 현재는 현재의 현재이며, 마지막으로 미래는 현재의 미래라고 말이다. -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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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자 - 청소년, 괴짜, 무법자들이 자살 대신 할 수 있는 101가지
케이트 본스타인 지음, 송섬별 옮김 / 이매진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우울할 때마다 꺼내보면 좋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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