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세계는 무엇을 생각하는가 - 미래를 결정하는 다섯 가지 질문
오카모토 유이치로 지음, 전경아 옮김 / 한빛비즈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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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최근 철학계 흐름을 간단하게 소개한 책이다. 저자는 먼저 책에서 다루는 ‘철학‘의 개념을 ‘우리 자신이 사는 시대를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그러고 나서 20세기 포스트모더니즘의 확산과 그 이후의 세 가지 현대 철학의 흐름을 소개하고 있다. 자연주의적 전환, 미디어•기술론적 전환, 실재론적 전환이 그것이다. 자연주의적 전환은 마음을 중점으로 두었고, 미디어•기술론적 전환은 매체를, 실재론적 전환은 사고로부터 독립된 존재를 다루는 흐름이라고 한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과거와 달리 현대는 하루하루가 혁명이라고 썼다. 과거엔 농업혁명이 있고 인지혁명이 있고, 그런 큼직큼직한 개별 사건사건이 있었다면, 지금은 시시각각 변화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이런 책은 제법 도움이 된다. 물론 꼭 읽지 않아도 모르진 않을 것이다. 모두가 지금 현재의 세상을 살고 있으니까. 나 역시도 위 세 가지 전환 모두를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있다. 단지 책을 읽으며 개념들을 좀더 명확히 확인할 수 있었을 뿐이나, 이것도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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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 지난 2세기 동안 변화의 속도는 너무나 빨랐고, 그런 나머지 사회질서는 동적이고 가변적이라는 속성을 지니게 되었다. 이제 그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태로 존재한다. 현대의 혁명이라고 하면 우리는 1789년(프랑스 혁명), 1848년(유럽의 연쇄적 민주화 혁명), 혹은 1917년(러시아 혁명)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날은 모든 해가 혁명적이다. 요즘은 심지어 30세밖에 되지 않은 사람도 십대를 향해 “내가 어렸을 때는 세상이 지금과 완전히 달랐어”라고 말할 수 있다. 십대는 그 말을 믿지 않겠지만, 그 말은 사실이다. 예컨대 인터넷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990년 초반에 이르러서였다. 불과 20년밖에 되지 않은 일이다. 오늘날 우리는 인터넷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가 없다.
ㅡ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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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소개한 현대 철학계의 세 가지 흐름을 내 나름의 시선으로 비평해보려고 한다. 우선 뇌가 사고의 원천이라는 자연주의적 전환은 현대 뇌과학의 연구 성과로 볼 때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인간의 가장 핵심적 기능인 줄 알았던 ‘사고’는 점차 흐릿해지고, 범죄 유전자의 발견 등은 더 이상 인간과 동물을 구별할 특성이 무엇인지조차 혼란스럽게 만든다. 다음으로 미디어•기술론적 전환이 일어나고 있음 역시 타당한 주장으로 보인다. 스마트폰 등 통신매체의 발달이 커뮤니케이션 방식과 세상을 엄청나게 바꾸고 있다. 이를테면 페이스북의 댓글 없는 ‘좋아요’는 여론을 형성하고, 카카오톡 메시지를 읽지 않는 행위가 모종의 의미를 담는 경우가 있다. 이처럼 면대면 접촉이 감소하고 실시간 매체소통이 늘어나면서 비언어적 표현이 중요한 경우가 생긴다. 또 메신저의 업데이트로 추가되는 기능 하나하나가 우리의 소통방식에 크나큰 영향을 준다. 스마트폰이 보편화된 지 불과 10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다. 마지막으로 실재론적 전환은 세계에서 인간과 사고의 비중이 떨어지게 되어 나타나는 필연적 국면 전환일 것이다.

마지막 인용문의 내용과 같이, 인간의 시대는 이제 종말을 맞이할 것인가? 뇌과학의 발달과 함께, 자유의지는 역사의 뒤꼍길로 사라져갈지. 섬뜩하지만, 우리가 직면해야 할 미래, 아니 현실일지도 모르겠다.

20 세계는 지금 무엇을 묻고 있는가

그렇다면 여기서는 ‘철학’을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요? 이 책에서 지침으로 삼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가 1982년에 발표한 논문 가운데 일부입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2년 전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계몽이란 무엇인가"를 물얼 때 칸트가 알고자 했던 것은 "지금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가.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려 하는가. 이 세계, 이 시대, 우리가 살아가는 바로 이 순간은 대체 무엇인가"라는 것이었다. (중략) 이 특정한 역사적 순간에, 우리는 누구인가?

여기서 칸트의 의도라고 소개한 문장은 두말할 것도 없이 푸코 자신의 생각이나 다름없습니다. "지금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가.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려 하는가. 이 세계, 이 시대, 우리가 살아가는 바로 이 순간은 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푸코는 칸트의 이름을 빌려서 실은 자신의 문제를 밝힌 셈이죠. 이 표현을 이 책이 나아갈 방향으로 삼으려 합니다.

19세기 초 독일 철학자 헤겔은 철학에 대해 ‘미네르바의 부엉이’라는 비유를 들었습니다. 《법철학》 서문에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라고 했죠. 이 수사를 통해 헤겔이 말하려는 바는 무엇이었을까요? 철학이란 바로 우리 자신이 사는 시대를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일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우리는 누구인가)를 이해하기 위해 철학자는 현재에 이르는 역사를 되묻고 거기에서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전망해야 합니다. 이 책에서는 이 철학적 물음을 구체적 상황에 맞춰 해석하려고 합니다. - P20

35 ‘진리’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20세기 철학을 언어론적 전환으로 이해할 때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197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유행한 포스트모던과의 관계입니다. 원래 건축 분야에서 시작된 포스트모던은 이후 문화 전체의 새로운 운동으로 확장되어 커다란 시대적 흐름이 되었습니다.

‘포스트모던’을 철학적 용어로 공론화한 것은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적 조건》입니다. 그는 포스트모던을 ‘(모던의) 거대 담론에 대한 불신’으로 정의했습니다. 여기서 ‘거대 담론’이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와 규범을 가리킵니다. 이제 현대인은 이 같은 진리와 규범을 믿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대신에 리오타르가 포스트모던으로서 제창한 것이 작은 집단의 다른 ‘언어 게임’이었습니다. 즉 한 집단과 다른 집단을 구분짓는 ‘미시 담론’에 주목해 다양한 방향으로 분열·차별화하는 것이 포스트모던의 특징인 셈이죠.

이렇게 해서 포스트모던사상은 20세기의 언어론적 전환과 연결됩니다. 언어론적 전환은 극단적으로 말해서 ① "세계는 언어로 이루어진다"라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흔히 ‘언어구성주의’라 불리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이 개념을 대표하는 말로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그라마톨로지》)라는 자크 데리다의 표현이 자주 인용되었습니다.

또한 포스트모던은 언어구성주의와 함께 ② "다른 언어 게임은 공약 불가능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현실이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면, 언어가 달라질 때 현실도 달라지는 게 당연합니다. 그래서 일까요? 포스트모던은 다른 입장과의 ‘차이’를 강조하다가 마침내 어떤 주장도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상대주의에 도달합니다.

① 언어구성주의와 ② 상대주의를 제창한 철학자가 미국에서 활약한 포스트모더니스트 로티입니다. 그는 《언어론적 전환》을 편집한 뒤,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과 《실용주의의 결과》를 발표하며 자신의 주장을 뚜렷이 드러냈죠. 나아가 동시대의 프랑스 및 독일 철학자들과 교류하며 앵글로색슨계와 대륙계 철학의 상호 이해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면서 로티는 스스로 포스트모더니스트임을 인정했습니다.

오늘날은 포스트모던이 주장하던 ① 언어구성주의와 ② 상대주의가 철학뿐 아니라 문화 전반까지 침투한 듯 보입니다. 문화상대주의와 역사상대주의가 그 전형이라 할 수 있죠. 문화와 역사가 다르면 진리와 선악에 대한 판단도 달라진다는 이 개념은 현대인의 상식처럼 되었습니다. 또 학문적으로 ‘사회구성주의’라는 이론이 제창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로티와 같은 포스트모던적 구성주의와 상대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뉴욕대학교 교수 폴 보고시안입니다. 그는 대학원에 다닐 때 로티 밑에서 공부했는데, 그로 인해 도리어 로티를 강력하게 비판하게 되었습니다. 보고시안이 쓴 《지식의 공포》를 살펴봅시다. 이 책에서 보고시안은 최근 유행하는 포스트모던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최근 20년 이상, 자연과학은 아니더라도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에서는 인간 지식의 본성에 관한 테제를 둘러싸고 눈에 띄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바로 지식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다는 테제다. 사회적 구성이라는 술어는 비교적 최근에 등장했지만 바탕에 있는 사상은 오랫동안 논의된 마음과 현실의 관계에 관한 문제와 관련이 있다.

확실히 20세기 후반에 언어론적 전환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고, 오래지 않아 포스트모던의 유행과 동시에 사회구성주의와 상대주의가 강력하게 대두되었습니다. 그래서 도덕적 ‘선악’이나 법적 ‘정의’에 관해서도 보편 진리 없이 다양한 의견이 있을 뿐이었죠. 심지어 자연과학적 사안에 관해서조차 다양한 해석이 있을 뿐, 어느 설이 옳은지 결정할 수 없다는 말까지 나오기도 했습니다. - P35

38 포스트모던 이후의 세 가지 흐름


21세기를 맞이할 즈음 포스트모던의 세계적 유행도 끝이 났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언어론적 전환을 대신하는 사상을 찾아야 했죠.

1) 자연주의적 전환
예를 들어 지금도 미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철학자 존 설의 발언에 주목해봅시다. 《언화행위》를 출간한 존 설은 언어론적 전환의 강력한 추종자처럼 보였지만 《마인드》에서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20세기에는 대부분 언어철학이 ‘제1철학’이었다. 철학의 다른 분야는 언어철학에서 파생되었고 그 해결책도 언어철학의 귀결에 의존하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이제 언어에서 마음으로 이동했다. (중략) 이제 마음이 철학의 중심 토픽이다. 다른 문제, 예컨대 언어와 의미의 본성, 사회의 본성, 지식의 본성은 전부 마음의 성질이라고 하는 더 일반적인 문제의 특수한 예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자.

여기서 존 설은 ‘언어’철학에서 ‘마음(심리)’철학으로의 전환이 일어났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확실히 20세기 말부터 심리철학에 관한 문헌이 숱하게 출판되었습니다. 가령 옥스퍼드출판부에서 나온 《심리철학 핸드북》을 보면 활발히 전개되는 이 분야의 최신 상황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심리철학이라면 무엇보다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는지가 관건이겠죠. 아직까지는 정확한 이론이 확립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게 어떤 입장이든 최근의 인지과학, 뇌과학, 정보과학, 생명과학 등의 성과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이런 변화에 주목해 ‘인지과학적 전환’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혹은 이런 연구 경향이 마음을 자연과학적으로 연구한다고 해서 ‘자연과학적 전환’이라고도 부릅니다.

2) 미디어·기술론적 전환
포스트 언어론적 전환은 자연과학과 인지과학에 기반을 둔 심리철학만 제창한 게 아닙니다. 그 밖의 움직임도 확인해둡시다. 그 한 가지 예로 프랑스의 철학자 대니얼 부뉴는 레지스 드브레와 함께 ‘미디올로지’라는 이론을 제창했습니다. 그들은 이 학문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기호론적-언어론적 전환이 일어난 뒤 그것이 수정되며 화용론적 전환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후에는 미디올로지적 전환이 이 둘 사이에서 발화행위의 원인과 의미를 구성하는 조건을 연결하고 보완하는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여기서는 3단계(① 언어론적 전환 ② 화용론적 전환 ③ 미디올로지적 전환)를 가정했습니다. 그리고 큰 흐름상 언어론적 전환에서 미디올로지적 전환으로 나아갔음을 이해할 수 있죠. 미디올로지라는 용어가 생소한 사람도 많을 텐데,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질 때의 물질적·기술적 매체를 다루는 학문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미디어·기술론적 전환이라 부르기로 합시다.

3) 실재론적 전환
자연주의적 변환이나 미디어·기술론적 전환과는 별개로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사변적 실재론과 신실재론이라 불리는 흐름이 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움직임은 영미와 이탈리아까지 끌어들이며 차츰 큰 물결을 이루었죠.

이 같은 흐름에서 2011년에 논문집 《사변적 전환》이 나왔습니다. ‘대륙의 유물론과 실재론’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 서문에서 편집자들은 최근의 경향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다양하고 재미있는 철학적 경향과 지구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그 거점은 지지자들을 획득하고 그 경향을 상징하는 저작이 임계치를 맞기 시작했다. 이런 경향을 전부 망라하는 충분하고도 단일한 이름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심사숙고 끝에 이제 지겨워진 ‘언어론적 전환’을 대체하는 말로서 ‘사변적 전환’이라는 명칭을 제안한다. 부제인 ‘유물론’과 ‘실재론’은 새로운 경향을 한층 명확하게 가리키는 동시에, 물질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을 구별하는 기능을 한다.

1
자연주의적 전환(인지과학적으로‘마음’을 생각한다)
대표적 철학자:폴 처칠랜드,앤디 클라크

2
미디어·기술론적 전환(커뮤니케이션의 토대가 되는 매체·기술을 생각한다)
베르나르 스티글러,시빌르 크레이머

3
실재론적 전환(사고로부터 독립된 존재를 생각한다)
퀑탱 메이야수,마르쿠스 가브리엘

이 같은 사변적 전환이 어디로 향하는지 지금으로서는 그다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유물론과 실재론이라는 명칭이 암시하듯, 구성주의와 달리 ‘사고’에서 독립된 ‘존재’를 문제 삼고 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 까닭에 여기에서는 전체 흐름을 아울러 실재론적 전환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실재론적 전환을 제창한 연구자들 중에는 젊은 사람이 많은데, 그래서인지 큰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포스트모던적인 언어론적 전환에 이어 세 가지 새로운 ‘전환’이 제창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세 가지로 현대 세계의 철학적 경향을 망라할 수는 없지만 최근 들어 눈에 띄는 움직임으로서 주목할 만합니다. - P38

147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근대 감옥제도가 어떻게 성립되었는지 묘사했습니다. 그 핵심은 절대왕정 시대의 잔학한 형태에서 규율 훈련을 토대로 정신을 교정하는 형태로 전환하는 데 있었습니다. 이때 전제가 되는 것은 이성적 판단 능력을 가진 개인이라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푸코 자신도 깨달았듯, 이런 근대적 형벌제도에 오류가 있는 것 아닐까요?

형무소에 수용되었다고 해서 범죄자의 정신이 교정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애당초 개개인에게 이성적 판단 능력이 있다고 전제할 수 있을까요? 책임능력의 유무가 문제가 되는데, 처벌을 통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도대체 범죄자는 왜 그런 짓을 저지르는 걸까요? 어쩌면 그 범죄자는 자유롭게 행동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닐까요?

뇌과학 연구는 근대적 형벌제도의 전제에 질문을 던집니다. 개인이 정말로 이성적 판단 능력을 지니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을까요? 범죄자의 경우, 뇌 속 회로에 원인이 있어서 범죄를 일으킨 게 아닐까요? 흉악범이나 약물중독자의 뇌가 종종 사례로 제시되기도 하는 것처럼요. 아직은 확정적인 증거가 없습니다. 하지만 뇌과학자는 뇌가 원인이 되어 범죄행위가 일어나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범죄의 원인이 그 사람의 뇌에 있다고 말하는 날도 머지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때는 당연히 처벌 형태도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처럼 형무소에 수용해도, 범죄의 원인을 치유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근대적 처벌을 대신하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그것을 구상해야 할 시기가 머지않아 도래하지 않을까요? 어쨌든 근대적 처벌제도는 이제 황혼을 맞이하는 듯합니다. - P147

149 사유의 고고학이 분명히 보여주듯, 인간은 최근에 발견된 형상이다. 그리고 아마 종말이 가까운 발견물일 것이다. 만약 이런 배치가 출현했듯이 사라진다면 어떨까. 18세기의 전환점에서 고전주의적 사유의 밑바탕이 그랬듯 만약 우리가 기껏해야 가능성만 예감할 수 있고, 지금으로서는 어떤 형태일지, 무엇을 약속하는지도 모르는 어떤 사건에 의해 그 배치가 뒤흔들린다면 어떨까. 장담하건대, 인간은 바닷가 모래사장에 그려 놓은 얼굴처럼 사라질지 모른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의 종말은 푸코의 이름과 함께 일약 유명해졌습니다. 인간의 종말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생물로서의 인간 종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푸코는 이런 표현을 통해 무엇을 의도한 것일까요?

이는 《말과 사물》의 부제인 ‘인문과학의 고고학’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푸코에 따르면 "18세기 말 이전까지 인간이란 존재는 실재하지 않았"습니다. 18세기 말에 인간이 탄생하면서 그와 동시에 인문과학도 시작됐습니다. 이때 푸코가 염두에 둔 것이 칸트철학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인간을 출발점으로 보고 거기에서 모든 실존적 영역을 인식하자’는 개념이죠. 푸코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근대성의 문턱을 넘어서는 것은 인간 연구에 객관적인 모든 방법을 적용하기를 바랐을 때가 아니라, 인간이라 불리는 경험적 = 선험적 이중체가 만들어진 날로 정의된다.

여기서 명백히 밝혔듯이 푸코가 말하는 인간이란 근대의 발단에서 칸트가 고안해낸 인간 개념, 즉 ‘경험적 = 선험적 이중체로서의 인간’입니다.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런 인간 개념과 함께 근대가 시작되고 인간의 모든 과학이 형성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푸코에 따르면 이런 인간이 이제 소멸되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징조를 현대의 구조주의적 학문(정신분석학·문화인류학·언어학)에서 찾았습니다. 이 학문들이 인간이라는 개념 없이 완성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을 거치지도 않는, 다시 말해 인간을 소멸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이렇게 해서 18세기 말부터 시작된 인간은 이제 종말을 맞이하고 있다고 푸코는 생각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푸코의 아이디어를 빌려 근대를 ‘인간의 시대’라고 부르려 합니다. 단, 푸코처럼 18세기 말을 근대의 시작이라고 생각할지 말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그래도 근대가 ‘인간의 시대’ 혹은 ‘인간 중심 시대’임은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간의 시대’가 이제 종말을 맞이하려 합니다.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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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관조 씻기기 - 제31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민음의 시 189
황인찬 지음 / 민음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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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은 처음 읽었다.
평소에 스도쿠같이 머리 쓰는 취미를 좋아한다. 그래선지 수수께끼 같은 시들의 의미를 파악해가는 과정이 좋았다. 그야말로 시집 읽기는 나에게 순수한 쾌감을 가져다 주었다. 앞으로도 시집을 종종 읽겠다.

120 하지만 미감의 차원뿐 아니라 윤리성의 차원에서 그의 시적 주체를 ‘무위‘의 상태로 제어하는 또 하나의 힘이 있음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하는 순간에 도달하고 만다.

교탁 위에 리코더가 놓여 있다
불면 소리가 나는 물건이다

그 아이의 리코더를 불지 않았다
아무도 보지 않는데도 그랬다

보고 있었다

섬망도 망상도 없는 교실에서였다
ㅡ<레코더>

이 짧고 담담한 시 한 편은 어째서 쓸쓸하면서도 아린 지경으로 우리의 감정을 붙들어 놓을까. 아무도 없는 교실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리코더. 시각뿐 아니라 청각의 관능성에 민감한 그의 특성상 리코더는 주체에게 너무나도 매력적인 사물이 아닐 수 없다. 대개의 인간이라면 욕망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고, 그래서 갖고 싶고, 만약 리코더를 갖지 못한다면 한 번 불어라도 보고 싶을 것이며, 마지막에는 손을 대어 쓰다듬어라도 볼 터이다. 그게 사물을 대하는 보편의 인간이 펼칠 수 있는 행동으 상상 범주다.
그런데 황인찬의 시적 주체는 다르다. 누구 보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는 섬망도 망상도 없는 지극히 ‘정상적인 정신 상태‘의 주체가 펼쳐 보이는 행동을 보라. 그는 그저 바라본다. 투명하고 담담하게 계속 바라본다! 자신의 손이 닿는 과일마다 썩어 있음을 발견했던 <원정>의 김종삼처럼, 마치 자신이 손을 뻗기만 하면 죄를 짓게 될 것임을 예감하는 사람이라니. 시적 주체는 도저한 죄의식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행동의 모든 것이 죄와 연결되는 프로세스를 지닌 시람에게 차라리 가장 행복한 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이 아닐까.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을까. 있다. 그 사람이 바로 황인찬이다. 대신 이런 식의 ‘무위‘에는 슬픔이 장막처럼 드리워 있다. 죄의식의 차원에서 이미 더럽혀진 자신을 발경하고 꾹꾹 울음을 참는 자의 비감이 서려 있기에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여섯 살 난 하은이의 인형을 빼앗아 놀"다가 결국 너무 무서워서 울음을 타뜨리고 말았다(<의자>)는 시는 기이하면서도 익숙하다. 처음으로 시적 주체가 일종의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것으로 시가 출발하기에 기이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행동을 수행한 순간 내면화된 초자아의 목소리에 추궁을 당하다가 결국 죄를 인정하고 울어 버리는 것은 또 한편 익숙하다. 이전의 인용 시에서 "바다에 있었는데, 겨울이았다 잘못 들은 소리가 달려왔다 당신 아이가 바다에 빠졌습니다 당신 아이가 바다에 빠졌다구요// 빠졌다구요?// 바닷가에는 사람이 없다"(<파수대>)라고 말할 때, 이 자기 반영적 메아리에는 파수대에 서서 죄를 추궁하는 신의 목소리가 배어 있다. 이제 할머니가 가리킨 "언덕 위의 법원"은 우리의 상상 체계 속에서 ‘언덕 위의 교회‘와 겹치고, "하얀색 경찰차"는 ‘신의 처벌과 감시‘(<법원>)를 연상시키는 지경이 된다. 이들 시편들이 기이하게도 인간 본연의 죄의식과 처벌에 대한 공포심을 일깨운다는 점을 수긍하게 되는 것이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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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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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된 지 벌써 2년 반이나 되었구나..ㅋㅋ 드디어 읽었다. 듣던 대로 유발 하라리는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짧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술술 읽히는 책이다.

가장 흥미로웠던 내용은 신석기 혁명에 관한 부분이었다. 인류가 밀을 길들인 것이 아니라 밀이 인류를 길들였다는 내용이 인상깊었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볼 때 농업혁명으로 인해 밀이 전 지구를 뒤덮어 가장 성공한 식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중심적 사고를 탈피한 저자의 통찰은 이 책 곳곳에 드러난다. 가령 흔히 말하는 생태계 파괴를 생태계 변형이라고 불러야 한다거나, 역사에는 선악이 없다는 내용 등이다. 아직까지 이러한 입장에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도 있겠지만, 오히려 모든 인간을 동등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싶다.

저자가 예측하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열어갈 미래 세계의 모습은 지금으로선 굉장히 낯설고 섬뜩한 모습이다. 그러나 뒤에서는 역사가 항상 가능성 높은 방향으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며 한 발 빼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미래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현재의 다양한 변수가 모여 미래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이 책 또한 어떻게든 미래 사회의 모습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이다. 이 책의 모든 독자들 역시 그럴 거다.

124 그것은 누구의 책임이었을까? 왕이나 사제, 상인은 아니었다. 범인은 한 줌의 식물, 밀과 쌀과 감자였다. 이들 식물이 호모 사피엔스를 길들였지, 호모 사피엔스가 이들을 길들인 게 아니었다.

잠시 농업혁명을 밀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1만 년 전 밀은 수많은 잡초 중 하나일 뿐으로서 중동의 일부 지역에만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불과 몇천 년 지나지 않아 세계 모든 곳에서 자라게 되었다. 생존과 번식이라는 진화의 기본적 기준에 따르면 밀은 지구 역사상 가장 성공한 식물이 되었다. 북미의 대초원 지역 같은 곳에는 1만 년 전 밀이 한 포기도 없었지만 지금은 수백 킬로미터를 걷고 또 걸어도 밀 이외의 다른 식물을 볼 수가 없다. 세계적으로 밀이 경작되는 지역은 225만 제곱킬로미터쯤 되는데 이는 브리튼 섬(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포함)의 열 배에 이른다.

어떻게 이 잡초는 그저그런 식물에서 출발해 어디서나 자라는 존재가 되었을까? 밀은 호모 사피엔스를 자신의 이익에 맞게 조작함으로써 그렇게 해낼 수 있었다. 약 1만 년 전까지 이 유인원은 사냥과 채집을 하면서 상당히 편안하게 살고 있었으나, 이후 밀을 재배하는 데 점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2천 년도 채 지나지 않아 전 세계 많은 지역의 인간은 동이 틀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밀을 돌보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게 되었다.

밀을 키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많은 노동력을 요구하기 떄문이다. 밀은 바위와 자갈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사피엔스는 밭을 고르느라 등골이 휘었다. 밀은 다른 식물과 공간, 물, 영양분을 나누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타는 듯한 태양 아래 온종일 잡초를 뽑는 노동을 했다. 밀은 병이 들기 떄문에, 사피엔스는 해충과 마름병을 조심해야 했다. 밀은 자신을 즐겨 먹는 토끼와 메뚜기 뗴에 대한 방어책이 없었기 때문에, 농부들이 이를 막아야 했다. 밀은 목이 말랐기 떄문에, 인간들은 샘과 개울에서 물을 끌어다 댔다. 밀은 배가 고팠기 때문에, 사피엔스는 밀이 자라는 땅에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동물의 변을 모아야 했다.

사피엔스의 신체는 이런 과업에 맞게 진화하지 않았다. 사과나무에 기어오르고 가젤을 뛰어서 뒤쫓는 데 적응했지, 바위를 제거하고 물이 든 양동이를 운반하는 데 적합한 몸이 아니었다. 인간의 척추와 무릎, 목과 발바닥의 장심이 대가를 치렀다. 고대 유골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농업으로 이행하면서 디스크 탈출증, 관절염, 탈장 등 수많은 병이 생겨났다. 새로운 농업노동은 너무나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사람들은 밀밭 앞에 영구히 정착해야만 했다. 이로써 이들의 삶은 영구히 바뀌었다. 우리가 밀을 길들인 것이 아니다. 밀이 우리를 길들였다. ‘길들이다, 가축화하다’라는 뜻의 단어 ‘domesticate’는 ‘집’이라는 뜻의 라틴어 ‘domus’가 어원이다. 집에서 사는 존재는 누구인가? 밀이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다. - P124

130 호모 사피엔스는 약 7만 년 전 중동에 도착했다. 그후 5만 년 동안 우리 조상들은 농업 없이 번성했다. 그 지역의 자연자원은 인구를 지탱하기에 충분했다. 사람들은 풍요로운 시절에는 아이를 좀 더 많이 낳았고 궁핍한 시절에는 약간 덜 낳았다. 인간은 다른 많은 포유동물과 마찬가지로 번식을 조절하는 호르몬과 유전자 메커니즘을 지니고 있다. 풍족한 시절에 여자아이는 사춘기가 일찍 오고 임신 가능성이 높아진다. 어려운 시절에는 사춘기가 늦게 오고 번식력이 떨어진다.

이런 자연적 인구조절에 문화적 메커니즘이 추가된다. 아기와 어린이는 동작이 굼뜨고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방랑하는 수렵채집인들에게 부담이었다. 사람들은 3~4년 터울로 애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여성들은 24시간 내내, 늦은 나이까지 아이에게 젖을 먹임으로써 터울을 두었다(24시간 수유는 임신 가능성을 크게 낮춘다). 다른 방법으로는 완전하거나 부분적인 금욕(아마도 문화적 터부의 뒷받침을 받는), 낙태, 때로는 유아 살해 등이 있었다. - P130

334 이와 함께, 자유주의적 인본주의 신조와 생명과학의 최근 발견 사이에 엄청난 간극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이 간극을 그다지 오래 무시하고 있을 순 없을 것이다. 우리의 자유주의적 정치·사법제도는 모든 개인이 신성한 내적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 더 나누거나 바꿀 수 없는 이 본성이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모든 윤리적, 정치적 권위의 근원이 된다는 믿음에 기반하고 있다. 이것은 모든 개인의 내면에 자유롭고 영원한 영혼이 거한다는 전통 기독교 신앙의 환생이다. 하지만 지난 2백 년에 걸쳐 생명과학은 이런 믿음을 철저히 약화시켰다. 인간이라는 유기체의 내적 작동방식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거기서 아무런 영혼도 발견하지 못했다. 인간의 행동은 자유의지가 아니라 호르몬, 유전자, 시냅스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을 펴는 과학자들이 점점 늘고 있다. 침팬지, 늑대, 개미의 행동을 결정하는 바로 그 힘 말이다. 우리의 사법 정치체계는 그런 불편한 발견을 대체로 카펫 밑에 쓸어 넣어 숨겨두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생물학을 법학과 정치학으로부터 구분하는 벽을 과연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 P334

338 사실 그 시대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 다시 말해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야말로 그 시대를 가장 잘 모르는 사람들이다. 사후의 꺠달음에 의해 필연적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정작 그 시대에는 전혀 명백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 역사의 철칙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글로벌 경제위기에서 벗어난 것인가, 아니면 최악의 위기가 곧 닥쳐올 예정인가? 중국이 성장을 계속해서 선도적 초강대국이 될까? 미국은 헤게모니를 잃을까? 일신론적 근본주의가 급증하는 것은 미래의 파도일까 아니면 장기적 중요성은 별로 없는 국지적 소용돌이일까? 우리는 환경적 재앙으로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기술적 파라다이스로 향하고 있는가? 어느 쪽이든 이를 뒷받침하는 훌륭한 주장이 존재하지만, 확실히 알 방법은 없다. 그러나 불과 몇십 년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과거를 돌아보면서 이 모든 질문에 대한 해답은 명백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 P338

552 우리가 중세 사람들에게 "당신의 삶 전체에 대해 만족하십니까?"라고 물었다면, 이들은 주관적 행복의 수준이 매우 높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중세 조상들이 행복했던 것은 사후의 삶에 대한 집단적 환상 속에서 의미를 찾았기 때문이라는 말인가? 그렇다. 환상에 구멍을 뚫어 파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행복하지 않을 리가 없다. 우리가 아는 한, 순수한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의 삶은 절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류는 목적이나 의도 같은 것 없이 진행되는 눈먼 진화과정의 산물이다. 우리의 행동은 뭔가 신성한 우주적 계획의 일부가 아니다. 내일 아침 지구라는 행성이 터져버린다 해도 우주는 아마도 보통 때와 다름없이 운행될 것이다. 그 시점에서 우리가 아는 바로는 인간의 주관성을 그리워하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부여하는 가치는 그것이 무엇이든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 P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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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세계는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소개된 북가이드(번역서만)



1부 세계는 지금 어떤 전환을 맞이했는가
- 마르쿠스 가브리엘,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
- 질베르 시몽동,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식에 대하여

2부 IT혁명은 우리에게 무엇을 약속하는가
- 데이비드 라이언, 감시사회로의 유혹
- 로렌스 레식, 코드 2.0
- 더글러스 호프스테터, 대니얼 데닛, 이런, 이게 바로 나야! 1, 2

3부 바이오테크놀로지는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 라메즈 남, 인간의 미래
- Ingmar Persson, Julian Savulescu, 미래 사회를 위한 준비
- 닐 레비, 신경윤리학이란 무엇인가
- 마이클 가자니가, 뇌는 윤리적인가

4부 자본주의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 앤서니 앳킨슨, 불평등을 넘어
- 존 롤스, 정치적 자유주의
- 폴 메이슨, 포스트 자본주의 새로운 시작
-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자본론
- 토마 피케티, 21세기 자본
- 프랜시스 후쿠야마, 역사의 종말
- 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 상상의-

5부 인류는 종교를 버릴 수 있을까
- 알랭 바디우, 사도 바울
- 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학문
- 안토니오 네그리, 제국
- 조르조 아감벤, 남겨진 시간
- 테리 이글턴, 신을 옹호하다

6부 인류는 환경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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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과학으로 사회성 기르기 - 복잡한 세상 속 너와 나를 이해하는 유쾌한 브레인 사이언스
박솔 지음 / 궁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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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오~ 똑똑한데? 맞아. 측두엽과 두정엽의 역할이 도덕적 판단을 내릴 때 관여하는데, 이 영역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 그리고 과학자들이 특정 뇌 영역에 손상을 입은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본 결과 알아낸 건데, 뇌의 앞쪽 부분인 전두엽도 관련이 있대. 전두엽에는 감정을 조절하거나 보상과 처벌에 대해 생각하는 영역이 분포해 있거든. 이 영역에 손상을 입은 환자들에게 사회적 규범과 관련된 상황극을 보여주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했더니 일반적으로 도덕적이라고 여겨지는 판단을 내리지 못했대. 사회적 규범을 잘 이해한다는 건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 내게 보상으로 돌아올지, 또 처벌을 피하려면 어떤 행동을 선택해야 하는지 잘 안다는 거겠지? 그런데 그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면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게 어려워질 거야. 마지막으로 한 군데가 더 있는데, 혐오감을 관장하는 섬이랑이라는 영역도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데 관여한대. - P49

50 뇌 속에서 ‘도덕’을 찾으려면

도덕은 사회적 규범의 하나다. 사회적 규범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 행동이 무엇인지 정확한 정의를 내리기는 매우 어렵고, ‘도덕심’을 측정하는 것 역시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과 같이 어디서든 ‘비도덕적’이라고 여겨지는 상황과 행동이 존재한다. 뇌에서 도덕심을 찾을 때는 이처럼 어디서나 도덕적이라고 여겨지는 상황이 이용된다.

연구자들은 특정 상황을 제시하고 그 상황에서 피실험자가 하는 대답이나 행동과 그 때 일어나는 뇌 활성의 변화를 관찰함으로써 ‘도덕심’을 유발하는 뇌 영역을 알아내기 위해 노력해왔다. 지금까지 이뤄진 뇌 속의 ‘도덕’을 찾기 위한 다양한 연구 결과에서 ‘도덕심’을 관장하는 뇌 영역은 한곳으로 콕 집어 나타나지 않았다. 도덕적 판단은 사회 규칙 등의 학습 내용과 감정적 반응 등 다양한 요소가 조합되어 나타나는 의사결정 과정이기 때문에 여러 뇌 영역의 활성이 복합적으로 관여한다고 알려져 있다.

뇌의 특정 영역에 심각한 손상을 입은 경우 성격이 완전히 변하는 경우는 알려져 있다. 그 중 한 예가 피니어스 게이지라는 사람의 이야기이다.피니어스 게이지는 1848년, 뇌의 전전두피질 아래쪽 부분을 커다란 막대기가 관통하는 부상을 입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기억이나 지각 능력 등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지만, 이 부상 이후 피니어스 게이지의 도덕성, 사회성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가족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이 다른 성격을 가진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정도였따.

피니어스 게이지의 뇌에서 손상을 입었던 바로 그 영역인 전전두피질의 아래쪽 부분은 실제로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된다. 이 영역은 특히 죄책감이나 동정심, 부끄러움 같은 사회적 감정을 느끼는 데 관여한다고 알려져 있다. 연구자들이 전전두피질의 아래쪽 부분에 손상을 입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도덕적 판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을 제시한 뒤 그 대답을 뇌에 손상이 없는 사람들의 대답과 비교해본 결과, 전전두피질의 아래쪽 부분에 손상을 입은 사람들은 감정이 개입되는 도덕적 판단을 잘 내리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브레이크가 망가진 열차가 달려오고 있다. 열차가 달려가는 방향에 다섯 사람이 서 있다. 나는 육교 위에서 그 상황을 보고 있는데, 내 옆에 서 있는 조수를 밀어 떨어뜨리면 열차를 막을 수도 있다. 한 사람을 희생시켜 여러 사람을 구하는 것과 고의로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 중 무엇이 더 도덕적인 선택일까?

이 상황에서 생존할 수 있는 사람의 수를 본다면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옆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 역시 도덕적이라고 볼 수 없는 선택이며, 죄책감이나 책임감을 불러올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전전두피질의 아래쪽 부분에 손상을 입어 죄책감, 희생에 대한 책임 같은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뇌에 손상이 없는 사람에 비해 한 사람을 희생시키겠다는 선택을 내리는 비율이 더 높았다. 또 이들은 선택을 하는 데 있어 망설이는 시간도 훨씬 짧았다.

반면, 이 사람들이 사회 규칙이나 학습한 도덕적 사실을 이해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길에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것과 같이 감정적 판단을 동반하지 않는 상황의 경우 전전두피질의 아래쪽 부분에 손상이 있는 사람도 정상적으로 도덕적 판단을 내렸다.

그렇다면 감정을 동반하는 모든 도덕적 상황에서 전전두피질의 아래쪽 부분이 그 역할을 하는 걸까? 사람의 뇌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최후통첩 게임에서 상대방보다 내가 적은 돈을 배당받는 경우 전전두피질의 아래쪽 부분에 손상을 입은 사람도 대부분 화를 내며 제안을 거절했다.

이 경우는 앞선 경우와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전자의 경우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한 감정적 판단을 내리는 상황이었고 최후통첩 게임의 경우는 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감정적 판단을 내리는 상황이었다. 즉 전전두피질의 아래쪽 부분은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한 직접적인 감정이 아닌, 제삼자가 처한 상황, 타인과 나의 관계에 대한 감정인 ‘사회적 감정’이 개입되는 판단을 내리는 데 관여하는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 P50

125 부끄러움을 느끼는 뇌

부끄러움, 수치심도 감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두 감정은 사회적인 상호 작용을 반드시 동반하는 ‘사회적 감정’으로 앞서 얘기한 기쁨, 슬픔, 분노, 혐오감, 공포와 같은 감정과 조금 다르다.

기쁨이나 슬픔, 분노, 혐오감, 공포심은 다른 사람과의 상호 작용이 없어도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예를 들어 내가 좋아하는 꽃을 보면 기쁘고, 기르던 화분이 시들어 죽으면 슬프고, 화분을 잘 돌보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날 수도 있다. 또 화분에서 징그러운 무늬의 풀이 돋아난 걸 보면 혐오감이나 공포심이 들 수도 있다. 다섯 가지 감정을 느낄 동안 다른 사람의 개입은 전혀 없다.

반면,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은 타인에게 비춰지는 나의 모습에 대한 생각이 반영된 감정이다. 죄책감이나 자부심 같은 것도 마찬가지이다.

수치심은 뇌의 슬전대상회라는 곳과 후대상피질 영역에서 느낀다는 연구가 있다. 후대상피질은 다른 사람들과 상호 작용하면서 나타나는 고차원적인 행동을 조절하는 전두엽 영역과 연결되어 있다. 연구에 따르면 부끄러움을 더 많이 느끼는 사람일수록 뇌의 슬전대상회 영역의 크기가 크고, 후대상피질의 두께가 얇다고 한다. 또 두려운 감정을 느끼는 편도체의 크기도 작았다고 한다. - P125

163 딱 그 말이 맞아. 고장관념이나 편견에 의한 반응이 바로 그래.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편견과 고정관념에 따라 행동하게 되는 거지. 자기도 모르게 하는 행동, 즉 스스로가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판단을 내리고 행동을 한다는 건, 우리가 알아채기도 전에 뇌가 먼저 결정을 내리고 반응한다는 거지. 이게 바로 고정관념과 편견에 의한 반응의 중요한 특징이야. 그리고 편견과 고정관념 모두 자기가 속한 집단, 사회의 영향을 많이 받아.

이렇게 비슷한 구석이 많은 둘의 차이를 굳이 나눠보자면 이래. 고정관념은 어떤 집단에 대해서 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다 이럴 거야, 라고 단순하게 일반화해서 생각하는 걸 말해.

편견은 사람들이 직접 겪어보기 전에 미리 예상하고 판단을 내리는 것을 전반적으로 가리키는 말로 쓰인대. 그리고 주로 부정적인 평가들이야. 사회심리학 분야에서 편견은 특히 감정적인 반응,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태도를 가리킨다고 해.

편견은 고정관념보다 좀 더 감정적인 판단이고, 또 전반적인 집단에 대한 평가보다 그 안에 속한 어떤 개인에 대한 평가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아. 음…… 예를 들어서, 네가 공대 남자는 다 말주변이 없을 거야, 라고 생각하는 건 고정관념이지만, 저 사람은 공대 남자라 성격이 별로일 거다. 그래서 싫다고 생각한다면 이건 편견인 거지. - P163

230 마음의 이론을 수행하는 뇌

마음의 이론을 수행하는 데는 측두두정정합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이 영역의 역할만으로 완전한 마음의 이론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의 이론이란 타인과 관계를 맺고 여러 사람이 사회를 꾸려 살아가는 데 필요한 능력인 사회성의 기본 요소라고 볼 수 있다. 타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는 것은 감정적 요소와 인지적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해야 가능하다.

마음의 이론을 수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다른 영역에는 전전두피질의 중앙 부분과 상측두구가 있다. 이 영역들은 의사결정을 내리거나 주변 환경을 고려해 상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된다.

230 나는 마음의 이론을 수행할 수 있을까? - 샐리 앤 테스트

마음의 이론은 특히 다섯 살 이하 어린이들에게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 능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경우도 물론 있다. 마음의 이론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는 ‘샐리 앤 테스트’라고 불리는 간단한 테스트로 확인해볼 수 있다. 간단한 상황을 그린 만화를 보여주고 그 상황에 대한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하는지 보면 된다.

샐리와 앤이라는 두 명의 아이가 각각 바구니를 가지고 있다. 샐리에게는 구슬이 하나 있다. 앤이 보는 앞에서 샐 리가 이 구슬을 자신의 바구니에 넣는다. 그리고 샐리가 잠시 자리를 비운다.샐 리가 자리를 비운 사이 앤은 샐리의 바구니에 있던 구슬을 꺼내 자기 바구니에 넣는다. 잠시 후 샐 리가 다시 돌아온다. 샐리는 구슬을 어느 바구니에서 꺼낼까?

이 글을 읽은 독자들은 당연히 자기 바구니를 들여다볼 것이라고 답할 것이다. 샐리는 앤이 구슬을 옮겨 놓은 것을 모르니까.

아주 쉽고 간단한 것 같지만 이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샐리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봐야 한다. 그런데 만약 다른 사람은 나와 별개로 자기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대답할까? 샐 리가 앤의 바구니에서 구슬을 꺼낼 거라고 답할 것이다. 샐리는 앤이 구슬을 옮긴 사실을 모르지만,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사람의 입장에서는 구슬이 앤의 바구니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대답을 한다면 앤의 바구니를 들여다보는 게 맞다.

실제로 다섯 살이 안 된 어린아이들이나 자폐 증세가 있는 사람 대부분이 이 같은 대답을 한다. 이들에게서는 마음의 이론을 수행할 수 있는 뇌 영역이 제대로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5세 이하의 어린아이들, 또 자폐 증세가 있는 사람 다수는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는 것,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은 나와 독립적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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