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와 사랑은 얄궂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와 사랑은 사실 그 어떤 말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여자는 단 한마디로 그에게 밀회의 장소를 지정해 주었고 다른 모든 것은 말로 하지 않았다. 그럼 대체 무엇으로 말한 것일까? 그래, 눈으로 말했다. 그리고 다소 쉰 목소리에 깃든 모종의 울림으로, 어쩌면 향기인지도 모를 그 무엇으로 말했다. 살결에서 은근히 풍겨 오는 그 부드러운 향기는 여자와 남자가 서로를 원할 때면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그 무엇이었다. 얼마나 섬세한 비밀의 언어인가! 그런데 이 언어를 그렇게 빨리 터득하다니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그는 저녁이 몹시도 기다려졌다. 커다란 체격의 이 금발 여성은 과연 어떤 사람일지 호기심을 누를 길이 없었다. 어떤 눈길과 어조로 말할까. 팔다리를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몸을 놀리며 또 어떻게 입맞춤을 할까. - P149
누구나 그에게 뭔가를 남겨 주었다. 어떤 몸짓이나 입맞춤, 특별한 유희, 몸을 허락하거나 거부할 때의 특징 같은 것을 남겼다. 골드문트는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배부른 줄도 몰랐고, 어린아이처럼 다루기 쉬운 존재였다. 그는 어떠한 유혹에도 마음을 열어 놓고 있었다. 그런데 그럼으로써 그 자신이 유혹적인 존재가 되어 갔다. 그의 외모에서 풍기는 아름다움만으로는 여자들이 그렇게 쉽게 그에게 접근해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어린아이 같은 천진함과 개방적인 태도, 순진한 호기심에서 솟구치는 욕망이 문제였으며, 여자가 그에게 무엇을 원하든 모든 것을 완벽하게 받아들일 태세가 되어 있는 것이 문제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매번 여자들이 그에게 원하고 꿈꾸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여자들에게 다가갔다. 어떤 여자에게는 부드럽게 기다려 주듯이 대하는가 하면 어떤 여자에게는 재빨리 낚아채듯이 대했으며, 어떤 때에는 처음 동정을 바치는 소년처럼 순진한가 하면 어떤 때에는 교묘하고 능숙했다. 언제라도 유희나 싸움, 한숨이나 웃음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부끄러워하는가 하면 부끄러움을 모르기도 했다. 그는 여자가 그에게 원하는 것, 그를 유혹하여 얻어 내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감각이 예민한 여자라면 누구나 그의 성향이 그렇다는 것을 금방 눈치챘으며, 그가 여자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 P156
하지만 그의 배움은 계속되었다. 그가 단기간에 배운 것은 수많은 부류의 사랑과 사랑의 기술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수많은 애인의 경험을 받아들이기만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또한 여자들을 그들의 다양한 성향에 따라 관찰하고 느끼고 접촉하고 냄새 맡게 되었다. 그는 갖가지 부류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섬세한 귀를 갖게 되었으며, 목소리의 울림만 듣고도 여자들이 지닌 사랑의 능력이 어느 정도이며 어떤 성향인가를 어김없이 알아맞힐 수 있게 되었다. 갈수록 새로운 황홀감을 느끼면서 그는 머리를 목덜미에 기대거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릿결을 쓸어 올리거나 또 무릎뼈를 움직일 수 있는 온갖 다양한 방법을 관찰하게 되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섬세하게 감식하는 손가락만으로 어떤 여자의 머리칼이 다른 여자의 머리칼과 어떻게 다르며 또 어떤 여자의 살결과 솜털이 다른 여자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가를 알게 되었다. 그는 바로 여기에 방랑 생활의 의미가 있다는 것, 즉 어쩌면 이처럼 식별과 구분 능력을 갈수록 더 섬세하고 다양하게 그리고 깊이 있게 터득하고 단련하기 위해 한 여자로부터 다른 여자한테로 떠밀려 다닌다는 것을 진작부터 직감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런 방랑이 그의 운명인지도 몰랐다. 마치 상당수의 음악가가 한 가지 악기만 다룰 줄 아는 게 아니라 셋, 넷, 혹은 그 이상의 많은 악기를 다루듯이, 완벽의 경지에 이를 때까지 온갖 방식으로 수없이 다양한 여자들과의 사랑을 경험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이런 경험이 무엇에 도움이 되고 또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어딘가로 가는 길 위에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에게 비록 라틴어나 논리학을 공부할 능력이 있다고는 해도 놀라울 만큼 비범한 재능을 타고나지는 못한 반면, 사랑의 문제 혹은 여자들과의 유희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이 문제는 힘들이지 않고 익혔으며,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았고, 경험들이 저절로 축적되고 정돈되었던 것이다. - P157
두 사람 사이의 느긋한 잡담은 아무것도 엮어 내는 것 같지 않았지만, 그 대화를 잇는 느슨한 가닥 사이사이에는 마치 촘촘하고도 달콤한 그물을 짜듯이 시선이나 억양이나 사소한 몸짓으로 오고 가는 무엇이 있었다. 그 가닥 하나하나에는 의미가 가득 실려 있었고, 따스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 P164
이미 한참 전부터 골드문트는 그녀가 말에서 내리기 전에 그녀에게 했던 말을 후회하고 있었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던가. 사랑에는 말이 필요 없지 않은가. 입을 다물고 있어야만 했는데. - P168
그리고 여러 날 동안 고독과 우울함이 마음을 짓눌렀다. - P199
출산을 구경하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그는 놀라움에 눈을 번쩍 뜨고 산모의 얼굴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새로운 체험을 통해 그의 세계가 갑자기 더 풍요로워진 느낌이었다. 적어도 산모의 얼굴에서 감지한 그 무엇은 대단히 주목할 만한 것이라 여겨졌다. 그가 지대한 호기심을 품고 고통스럽게 누워 산고에 시달리는 부인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는 동안 관솔 등불의 희미한 빛 속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습이 떠올랐다. 신음하고 있는 여인의 찡그린 얼굴에 나타난 여러 갈래의 표정은 그가 사랑의 절정에 도달한 여자들의 얼굴에서 보았던 표정과 거의 구별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얼굴에 나타나는 엄청난 고통의 표현은 엄청난 쾌감의 표현보다 훨씬 더 격렬하고 더 일그러져 있었다. 그렇지만 그 두 가지 표정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히죽 웃는 듯이 몸을 움츠리고 불처럼 타올랐다가 꺼져서 식는 것까지 모두가 똑같았다. 그 까닭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신기했다. 고통과 쾌락이 마치 자매처럼 서로 비슷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놀라웠던 것이다. - P199
"그래, 골드문트, 너는 그렇게 해도 통할지 모르지. 너는 너무나 젊고 잘생긴 데다 정말 순진해 보이니까. 그런 외모는 훌륭한 숙박권이 될 수 있어. 여자들한테는 호감을 주고, 남자들은 이 친구는 정말 순진무구하니까 아무한테도 나쁜 짓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거든. 하지만 보라고. 사람이란 나이를 먹게 마련이고, 해맑은 얼굴에도 언젠가는 수염이 나고 주름이 생기지. 바지에 구멍도 나고.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환영받지 못하는 추한 손님이 되고 말지. 눈에는 젊음과 순진함 대신 허기진 기색만 드러나게 돼. 그렇게 되면 마음이 모질어지고 이 세상에서 뭔가를 배울 수밖에 없게 된단 말이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두엄 더미에 드러누워야 하고, 개들이 오줌을 갈기니까. 그런데 내 생각에 너는 괜히 오래도록 이렇게 떠돌아다니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네 손은 너무 곱고, 네 곱슬머리는 근사하니까. 너는 틀림없이 지금보다 살기 편한 데로 다시 기어들어 가게 될 거야. 멋지고 따뜻한 부부 침대나 기름진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근사한 수도원, 난방이 잘 된 서재 같은 데로 찾아갈 수 있을 거야. 너는 그렇게 말쑥한 옷도 입고 있잖아. 그런 차림새면 사람들이 너를 신사 나리로 볼 수도 있겠어." - P204
이어서 그녀는 어머니처럼 자상하게 마음에서 우러나온 수많은 조언을 덧붙였다. 골드문트는 그 조언들은 금방 잊어버렸지만, 그녀가 베풀어 준 사랑과 그녀의 순박한 얼굴에 피어오른 영악스럽고도 호의적인 웃음은 결코 잊지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려고 애썼다. - P217
달콤하고도 성스러운 그 목각 입상 앞에 서 있던 짧은 순간 이래로 골드문트는 여태껏 갖지 못했던 어떤 목표를 갖게 되었다. 이전에 골드문트는 다른 사람들이 어떤 목표를 세우면 곧잘 비웃거나 부러워하곤 했다. 그런데 이제 그 자신이 목표를 갖게 된 것이다. 어쩌면 그 목표를 이룰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망가진 삶 전체가 숭고한 의미와 가치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 새로운 감정은 골드문트를 온통 희열과 전율에 휩싸이게 했으며, 그의 발걸음은 날개라도 달린 듯 가벼웠다. - P227
서로 편안하게 교양 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몇 년씩이고 함께 생활하면서 작업을 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야. - P232
결국 그가 바라 마지않던 목표를 이루어서 나르치스는 그의 친구가 되었다. 그런데 골드문트가 학자로서는 자질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그의 마음속에 잃어버린 어머니의 모습을 생생히 되살려 낸 사람은 학자인 나르치스 바로 그였다. 그리하여 공부와 수도승 생활과 덕성을 쌓는 일 대신에 그의 본성에서 솟구치는 막강한 원초적 충동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성적 욕망과 여성에 대한 사랑, 독립심, 방랑벽이 그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제 골드문트는 명인이 만든 마리아 상을 보면서 자기 속에 숨어 있던 예술가 기질을 발견하였고, 새로운 길로 접어들어 다시 한곳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그가 들어선 길은 어디로 이어질 것인가? 어디에서 장애물이 생기는 것일까? -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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