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학문이 제가 택해야 할 유일한 분야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한 인간의 운명과 소명은 딱히 본인의 소원보다는 오히려 다른 어떤 것, 그러니까 예정된 섭리 같은 것에 의해 결정될 수도 있으니까요. - P15
하지만 어디서나 그렇듯이 조문으로 기록된 법률보다는 오히려 불문율이 더 위력적이게 마련이다. - P35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거야!’ 그의 의지가 이렇게 다짐했다. 하지만 그의 가슴은 탄식하며 ‘내일 다시 올 거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 P41
그는 골드문트의 본성이 온갖 공상이나 잘못된 교육 그리고 아버지의 말씀과 같이 철판처럼 단단한 껍질에 에워싸여 있다는 것을 알았다. - P50
"수많은 경건한 신부님들도 바로 이런 예행연습이 필요했다는 걸 모르니? 탕자의 생활이야말로 성자의 길로 접어드는 첩경일 수도 있다는 걸 몰라?" - P53
하지만 골드문트는 매일 이런 생각에만 빠져 있지는 않았다. 오래도록 어떤 생각에 골몰한다는 것은 그의 기질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기엔 하루가 너무 길어서 다른 할 일들이 생기곤 했다. - P61
"자네는 내가 기분도 낼 줄 모르는 꽁생원 의사라고 생각하겠지. 그렇지 않아. 우리는 인간일세. 어디 이 멋진 술을 좀 마셔 보자고. 이렇게 한밤중에 몰래 하는 조촐한 술자리보다 신나는 것은 없지. 자, 건배!" 골드문트는 웃으며 잔을 부딪치고는 맛을 보았다. - P86
그는 너무나 소중했던 이 우정의 종말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았다. - P91
그사이에 나르치스한테는 얼마 전부터 모종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수련 과정을 마쳤기 때문인지 아니면 골드문트와의 체험을 겪은 탓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떻든 그는 혼자 틀어박혀서 고행하고 정신적으로 단련할 필요성에 눈뜨기 시작했던 것이다. 금식하면서 오랫동안 기도를 드리고 자주 참회하고 자발적으로 고해를 하고픈 충동이 일기 시작했다. - P92
"아직 거기까지 생각해 보지는 않았지만, 말했듯이 나는 목표가 없어. 나한테 너무 잘해 주었던 그 여자 역시 내 목표는 아니야. 그녀에게 가긴 하지만, 그녀 때문에 가는 것은 아니야. 가야만 하기 때문에,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기 때문에 가는 거야." - P123
말을 하지 않는 세계, 부엉이의 울음소리로 서로를 유혹하는 세계, 말이 아무 의미도 없는 세계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그는 이런 상태가 마음에 들었다. 오늘은 말이나 생각을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오직 리제를 향한 갈망뿐이었다. 눈이 멀어 말없이 더듬고 헤집는 상태, 신음과 함께 녹아들어 가는 그 상태가 그리울 뿐이었다. - P128
적어도 이성과 언어와 그 모든 것을 갖고 있으면서도 사랑받지 못하고 고독하고 슬프게 살아가는 것에 비하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 P141
골드문트의 곱슬머리와 눈매는 금방 그녀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으며, 귀여운 흰 목덜미와 우아하고 매끈한 손, 거침없고 멋진 동작 역시 그녀에게 호감을 주었다. 이 낯선 사람은 당당하고, 품위 있고, 게다가 너무나 젊었던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마음을 끌었던 것은 이 낯선 청년의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는 은근히 노래하는 듯하고 따뜻하게 빛나는, 부드럽게 구애하는 듯한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애무의 감촉처럼 울려 퍼졌다. 이런 목소리라면 얼마든지 더 오래 들어 줄 용의가 있었다.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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