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렵 나는 이런 생각을 자주했다. 나는 대학 교육까지 받았지만, 현실적인 맥락에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수전은 학교에 거의 다니지 않았음에도 훨씬 잘 안다. 나는 책에서 배웠고, 그녀는 삶에서 배웠다. - P-1

요즘, 삶의 반대편 끝에서, 나에게는 어떤 두 사람이 연애를 하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있는 경험법칙이 있다. 그럴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이 들면, 어김없이 그렇다. - P-1

이상해 보일지 몰라도 나는 우리의 나이 차이에 관해서는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이는 돈만큼이나 상관이 없는 것으로 느껴졌다. 수전은 내 부모 세대의 구성원처럼 보인 적이 없었다—‘다 닳아버렸건’ 아니건. 그녀는 한 번도 어떤 식으로든 우위에 서서 나에게 강요한 적이 없고, "아, 너도 좀 나이가 들면 이해하게 돼" 하는 식의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나의 미성숙에 관해 되풀이해 잔소리를 하는 사람은 나의 부모뿐이었다. - P-1

갑자기 엄습한다—뭐가?—공포, 예의, 이타심? 나는 그녀는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하여 그녀에게 말한다.

"있잖아, 나는 전에 사랑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사랑에 관해서는 이해를 못 해. 내가 걱정하는 건 이거야, 수전이 나를 사랑한다면, 수전이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수전이 줄어들겠지."

나는 그 사람들 이름은 말하지 않는다. 내가 말하는 사람은 딸들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심지어 그녀의 남편도.

"그렇게 되는 게 아니야." 그녀는 그것이 그녀 자신도 생각해온 것인 듯, 그리고 이미 해결을 한 것인 듯, 즉시 대답한다. "사랑은 탄성이 있어. 희석되는 게 아니야. 늘어나. 줄지 않아. 따라서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

그래서 하지 않았다. - P-1

하지만 내가 돈에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실제로, 나의 세계관에서, 돈에 상관한다는 것은 의식적으로 삶의 가장 중요한 것을 외면한다는 뜻이었다.

"어른이 되려면," 조운은 말했다, "어른의 일에 관해 생각하기 시작해야 돼. 그 첫 번째가 돈이야." - P-1

"사람들이 너에 관해 뭐라고 하든 상관하지 마." 조운이 나를 뚫어져라 보며 말했다. - P-1

첫사랑은 삶을 영원히 정해버린다. 오랜 세월에 걸쳐 그래도 이 정도는 발견했다. 첫사랑은 그 뒤에 오는 사랑들보다 윗자리에 있지는 않을 수 있지만, 그 존재로 늘 뒤의 사랑들에 영향을 미친다. 모범 노릇을 할 수도 있고, 반면교사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뒤에 오는 사랑들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수도 있다. 반면 더 쉽게, 더 좋게 만들어줄 수도 있다. 물론 가끔은, 첫사랑이 심장을 소작(燒灼)해버려, 그 뒤로는 어떤 탐침을 들이밀어도 흉터 조직만 나올 수도 있지만.

‘우리는 제비*로 선택되었다.’ 나는 운명을 믿지 않는다, 이미 말했는지 모르지만. 하지만 지금은, 두 연인이 만날 때는, 이미 많은 전사가 있기 때문에 오직 어떤 특정한 결과만이 가능하다고 분명하게 믿는다. 연인들 자신은 세상이 재설정되고 있고, 자신들의 가능성이 새로운 동시에 무한한 것이라고 상상하지만. - P-1

사랑을 ‘이해하는 것’은 나중에 오는 것이고, 사랑을 ‘이해하는 것’은 현실성에 근접한 것이고, 사랑을 ‘이해하는 것’은 심장이 식었을 때 오는 것이다. 무아지경에 빠진 애인은 사랑을 ‘이해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경험하고 싶어 하고, 그 강렬함, 사물의 초점이 또렷이 잡히는 느낌, 삶이 가속화하는 느낌, 얼마든지 정당화할 수 있는 이기주의, 욕정에 찬 자만심, 즐거운 호언, 차분한 진지함, 뜨거운 갈망, 확실성, 단순성, 복잡성, 진실, 진실, 사랑의 진실을 느끼고 싶어 한다. - P-1

너는 이야기는 그 정도로 끝내고 설거지를 한다. 너는 애인이지 법률가가 아니다, 너는 자신에게 새긴다. 다만 법률가가 되려고 할 뿐이다, 그녀를 더 잘 보살피려면 견실하고 안정될 필요가 있기 때문에.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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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더 하고 더 괴로워하겠는가, 아니면 사랑을 덜 하고 덜 괴로워하겠는가? 그게 단 하나의 진짜 질문이다, 라고 나는, 결국, 생각한다. - P-1

다만 에릭이 가장 가까운 친구였고, 그런 관계가 오래 지속되었다는 점은 예외다. 그는 우리 가운데 가장 부드럽고, 가장 사려 깊고, 다른 사람들을 가장 믿어주는 친구였다. 그리고—어쩌면 바로 그런 특질들 때문에—여자애들하고, 나중에는 여자들하고 골치 아픈 일이 가장 많이 생겼다. 그의 부드러움, 그리고 그의 용서하는 성향과 마주치면 사람들은 왠지 자극을 받아 어떤 나쁜 행동을 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되었던 것일까? 나도 그 답이 알고 싶다, 특히 내가 그를 몹시 실망시킨 순간 때문에. 그에게 내 도움이 필요했던 때 나는 그를 버렸다. 그를 배신했다고 말해도 좋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다. - P-1

어쨌든 절대 잊지 마세요, 폴 도련님.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만의 사랑 이야기가 있다는 걸. 모든 사람에게. 대실패로 끝났을 수도 있고, 흐지부지되었을 수도 있고, 아예 시작조차 못 했을 수도 있고, 다 마음속에만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진짜에서 멀어지는 건 아니야. 때로는, 그래서 더욱더 진짜가 되지. 때로는 어떤 쌍을 보면 서로 지독하게 따분해하는 것 같아.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을 거라고는, 그들이 아직도 함께 사는 확실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어. 하지만 그들이 함께 사는 건 단지 습관이나 자기만족이나 관습이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야. 한때, 그들에게 사랑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야. 모두에게 있어. 그게 단 하나의 이야기야. - P-1

"아니. 네가 처리할 줄 알았어, 무슨 문제든. 너하고 있으면 늘 안전하다는 느낌이야."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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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평지에, 편편한 면 위에 발을 딛고 산다. 그렇지만, 혹은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열망한다. 땅의 자식인 우리는 때로 신 못지않게 멀리 가 닿을 수 있다. 누군가는 예술로, 누군가는 종교로 날아오른다. 대개의 경우는 사랑으로 날아오른다. 그러나 날아오를 때, 우리는 추락할 수 있다. 푹신한 착륙지는 결코 많지 않다. 우리는 다리를 부러뜨리기에 충분한 힘에 의해 바닥에서 이리저리 튕기다가 외국의 어느 철로를 향해 질질 끌려가게 될지도 모른다. 모든 사랑 이야기는 잠재적으로 비탄의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아니었대도, 결국 그렇게 된다. 누군가는 예외였다 해도, 다른 사람에겐 어김없다. 때로는 둘 모두에게 해당되기도 한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사랑을 갈망하는 것일까. 그것은 사랑이 진실과 마법의 접점이기 때문이다. 사진에서의 진실, 기구 비행에서의 마법처럼. - P-1

젊은 시절, 세상은 노골적이게도 섹스를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으로 나뉜다. 나중에는 사랑을 아는 사람과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나뉜다. 그 후에도 여전히 마찬가지로—적어도 우리가 운이 좋다면(혹은 반대로 운이 나쁘다 해도)—세상은 슬픔을 견뎌낸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으로 나뉜다. 이런 분류는 절대적인 것이다. 이는 우리가 가로지르는 회귀선이다. - P-1

‘중요한 건, 자연은 너무나 정확해서 정확히 그럴 가치가 있을 만큼의 고통을 안겨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면에서 우리는 그 고통을 즐기기도 한다고 나는 생각해요. 그런 점이 지금까지 문제가 안 되었다면,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 P-1

나는 비탄에 빠진 사람들이 그 아픔 때문에 주변 사람들을 어떻게 정리하고 재편성하는지, 어떻게 친구들을 시험하는지, 어떤 친구가 합격하고, 어떤 친구가 낙제하는지를 빨리 깨닫게 되었다. 오랜 우정은 슬픔을 함께 나눔으로써 더 깊어질 수도 있지만, 갑자기 하찮아 보이기도 한다. 젊은 사람들이 중년보다 낫고, 여자가 남자보다 더 낫다. 이런 사실에 놀라선 안 되겠지만 놀라운 건 어쩔 수 없다. 어쨌거나 우리는 나이와 성별과 결혼 여부에서 우리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잘 이해해주기를 기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인가. - P-1

그는 사람은 비탄을 이겨내게 돼 있을 뿐 아니라 더 강한 인간이 되며, 어떤 면에서는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말로 나를 안심시키려 했다. 나에게 그 말은 언어도단에 자화자찬(더불어 지나치게 섣부른 속단)으로 보였다. 아내가 없어진 지금, 내가 무슨 수로 아내와 함께할 때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나중에 나는 그가 다만 니체가 ‘우리를 죽이지 못한 것은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든다’고 한 말을 흉내 낸 것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로선 특히나 허울만 번지르르하다고 생각한 지 꽤 오래된 경구였다. 우리를 죽이지는 못해도 영영 허약하게 만드는 것들은 무수히 많다. 고문 피해자를 돕는 사람들을 찾아가 물어보라. 성폭력 피해자 상담 전문가와 가정폭력 담당자에게 물어보라. 주변을, 다른 것도 아닌 보통의 일상생활에서 정서적인 상해를 입은 사람들을 둘러보라. - P-1

비탄은 어쩌면 모든 패턴을 파괴하는 것을 넘어 훨씬 더 많은 것, 즉 패턴이 존재한다는 믿음마저도 파괴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믿음 없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 패턴을 찾거나 재정립하는 척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작가들은 그들의 언어가 만들어내는 패턴들을 믿으며, 그것이 쌓여 생각으로, 이야기로, 진실로 이어지길 바라고 또 그것에 의지한다. 사별의 고통과 무관한 사람이든, 아니면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이든 상관없이 그들을 구원해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 P-1

한 남자의 성격은 그의 친구나 아내를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여자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남자를 설명하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는 그녀의 성격을 해석해준다. 그들을 관찰하면서 둘 사이에 친근하고 섬세한 연관성을 수도 없이 발견하는 건 매우 흔한 일이다. 나는 가장 큰 행복은 언제나 가장 큰 조화에서 생겨난다고 믿는다. - P-1

말 그대로, 나는 아직까지도 내 인생의 매일, 내 하루의 거의 매 시간 세라를 생각한다. 아내가 좋아했을 법한 것을 보면, 종류를 막론하고 ‘저걸 사서 아내에게 갖다줘야지’라고 혼잣말을 하곤 한다. 그리고 아내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언제나 생각하고 있다. - P-1

작가 새뮤얼 존슨은 비탄이 ‘고통스럽고 괴로운 결핍’임을 깊이 이해했다. 그래서 그는 고립주의와 내면으로의 침잠을 경계하라고 경고했다. ‘중립과 무관심 상태를 유지하며 살려는 태도는 비합리적이고 무익하다. 만약 즐거움을 배제하는 것으로 비탄을 차단할 수 있다면, 그 계획에 진지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가 못하다. 가령 ‘[마음을] 억지로 즐거운 장면들에 끌어다 놓으려는’ 시도나, 그 반대로 ‘더 끔찍하고 더 괴로운 고통의 상태에 이골이 나도록 만들어 무념무상의 상태로 이완시키려는’ 시도 같은 극단적인 조처도 소용이 없다. 존슨은, 오직 노동과 시간만이 비탄을 완화한다고 본다. ‘슬픔’은 영혼에 녹이 슨 것과 같으며, 그것을 벗겨내는 과정에서 온갖 새로운 발상이 동원된다. - P-1

고독의 문제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도 당신이 상상했던 것과는 다르다. (한 번이라도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면 말이다.) 고독은 본질적으로 두 종류로 나뉜다. 사랑할 사람을 찾지 못해서 느끼는 고독과, 한때 사랑했던 사람을 빼앗겨서 느끼는 고독이다. 두 가지 중 첫 번째가 더 고통스럽다. 청년기의 고독에 필적하는 고독은 어디에도 없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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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박차를 가하는 감정이 있고, 한편으로 그것을 더디게 하는 감정이 있다. 그리고 가끔, 시간은 사라져버린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것이 정말로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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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한 여자를 좋아하면 할수록, 또 잘 맞으면 잘 맞을수록 정작 섹스의 기회는 줄어드는 듯하다는 것. - P-1

감정 문제에서 여자들은 전문가였고, 남자들이 거친 초보일 뿐이었다. 따라서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라는 말은 교리나 어머니의 권고보다 훨씬 더 설득력이 있고 반박 불가능했다. - P-1

마거릿은 여자는 두 종류라고 말하곤 했다. 매사에 분명한 여자와 미스터리를 남겨두는 여자. 그리고 이는 남자가 여자를 볼 때 가장 먼저 감지하는 것이자, 가장 먼저 그를 매료시키거나 그렇지 않게 하는 요소였다. 남자들마다 끌리는 유형은 각기 다르다. - P-1

그러나 우리가 지금도 가장 중점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눈이다. 안 그런가? 우리가 처음 만나, 사랑을 나누고,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을 가고, 공동담보를 잡히고, 쇼핑을 하고, 요리를 하고, 휴일을 함께 보내고, 서로를 사랑하며 함께 아이를 낳았을 때의 그 사람이 여전히 지니고 있는 그 눈 말이다. 갈라서게 됐을 때도 여전히 똑같았던. - P-1

배우면 배울수록 두려움은 줄어든다. 학문의 의미가 아니라, 인생을 실질적으로 이해한다는 맥락에서 ‘배우는’ 것이다. - P-1

장담하는데 심리학자들은 어딘가에 연령별 지적수준을 측정한 도표를 꿍쳐놓고 있을 것이다. 분별력, 실용주의, 조직화 기술, 전략적 상식 같은, 시간이 지날수록 제반 사안에 대한 이해력을 떨어뜨리는 것들이 아니라 순수지성의 도표를. 그리고 추측이지만, 그 도표를 보면 우리들 대부분이 십육 세에서 이십오 세 사이에 정점을 찍을 것이다. 에이드리언의 일기 일부를 보고 나는 그 연령대에서 그의 면모를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고 논쟁을 했을 때, 그에겐 사고思考를 정연히 정리하는 것이 마치 태어난 이유인 것처럼, 두뇌를 활용하는 것이 운동선수가 근육을 쓰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여겨졌다. - P-1

"사람들이 왜 널 알코올중독자라고 생각하는 건데?"
"그런 사람 없는데."
"그런데 아까 왜 그런 말을 한 거야?"
"내가 그런 게 아니지. 네가 내 머리숱이 줄었다고 했지. 그리고 술을 아주 많이 마시는 사람들은 술의 특정성분 덕에 머리가 빠지지 않는다는 게 사실이고."
"정말이야?"
"대머리 알코올중독자 본 적 있어?"
"그런 걸 상상할 시간이 있으면 딴 걸 하겠다." - P-1

그러나 시간이란······ 처음에는 멍석을 깔아줬다가 다음 순간 우리의 무릎을 꺾는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책임감 있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다만 비겁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현실주의라 칭한 것은 결국 삶에 맞서기보다는 회피하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 시간이란······ 우리에게 넉넉한 시간이 주어지면, 결국 최대한의 든든한 지원을 받았던 우리의 결정은 갈피를 못 잡게 되고, 확실했던 것들은 종잡을 수 없어지고 만다. - P-1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 P-1

행여 하소연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 편지를 쓴 당시의 나와 현재의 나는 다르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이지, 나의 어떤 성정이 나를 부추겨 그런 편지를 쓰게 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고도의 자기기만인지도 모른다. - P-1

예를 들면 이렇다. 사람은 가장 젊고 민감한 시절에 상처도 가장 많이 받는다. 반면 끓어오르던 피가 서서히 잦아들고, 감정이 전보다 무뎌지면서 더 든든히 무장을 하고 상처를 견딜 줄 알게 되면, 예전보다 더 신중하게 운신하게 된다. - P-1

인성의 깊이와 세월의 흐름은 비례하는 걸까? 소설에선 물론 그렇다. 그렇지 않다면, 스토리라고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 인생에선 어떨지 가끔 궁금해질 때가 있다. 우리의 태도와 견해가 바뀌고, 새로운 습성과 기벽이 생기긴 하지만, 그건 뭔가 다른 것, 이를테면 장식에 가까운 것이다. 어쩌면 인성이란 다소 시간이 지나서, 즉 이십대에서 삼십대 사이에 정점에 이른다는 점만 빼면, 지성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 시기가 지나면 우리는 그때까지 쌓은 소양에 여지없이 고착되고 만다. 우리에겐 우리 자신뿐이다. 그렇다면 그걸 통해 여러 인생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 폼 잡고 말하려는 건 아니지만 - 우리의 비극까지도. - P-1

내 판단이지만, 요절하는 것보다는 늙는 것이 언제나 나은 법이다. 아니, 내 말뜻은 이렇다. 이십대에는 자신의 목표와 목적이 혼란스럽고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해도, 인생 자체와, 또 인생에서의 자신의 실존과 장차 가능한 바를 강하게 의식한다. 그후로······ 그후로 기억은 더 불확실해지고, 더 중복되고, 더 되감기하게 되고, 왜곡이 더 심해진다. 젊을 때는 산 날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온전한 형태로 기억하는 게 가능하다. 노년에 이르면, 기억은 이리저리 찢기고 누덕누덕 기운 것처럼 돼버린다. 충돌사고 현황을 기록하기 위해 비행기에 탑재하는 블랙박스와 비슷한 데가 있다.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테이프는 자체적으로 기록을 지운다. 사고가 생기면 사고가 일어난 원인은 명확히 알 수 있다. 사고가 없으면 인생의 운행일지는 더욱더 불투명해진다.
달리 설명해볼까. 혹자는 역사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시기가 모든 것이 붕괴할 때로, 이는 곧 무언가 새로운 것이 태어남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를 우리 개인의 삶에 적용할 때 과연 타당한 데가 있을까? 무언가 새로운 것이 태어나는 동안 죽는다는 것. 설사 그 새로운 것이 다름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라 해도. 모든 정치적, 역사적 변화가 얼마 안 가 반드시 실망을 안겨주는 것처럼, 성년기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인생의 목적이 흔히 말하듯 인생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님을 얼마의 시간이 걸리건 상관없이 기어코 납득시킨 끝에, 고달파진 우리가 최후의 상실까지 체념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데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할 때가 가끔 있다. - P-1

생을 접기 전에 그보다 좀 더 광범위한 과정을 밟아선 안 될 이유가 있을까? 날 원망하지 말기를, 날 좋게 기억해주기를. 세상 사람들이 날 좋아했다고, 날 사랑했다고, 내가 나쁜 놈이 아니었다고 말해주기를. 이중 해당되는 경우가 단 하나도 없다 한들, 부디.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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