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는 소녀가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 P-1

이제 나흘 후면 그 마을을 다시 찾게 된다. 산티아고는 몹시 흥분되었다. 동시에 불안하기도 했다. 많은 양치기들이 그 가게를 드나들 테니까 소녀는 그를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당연하지. 나 역시 다른 마을에 사는 소녀들을 많이 알고 있는데 뭐."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양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여러 양치기들 중의 한 사람이고 싶지 않았다. 양치기들 또한, 선원이나 행상들처럼, 마음속에 품고 있는 마을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었다. 그에겐 소녀가 사는 그곳이 그랬다. 혼자서 자유롭게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즐거움조차 잊게 만드는 그런 곳. - P-1

자신의 삶에서 일어나는 좋은 일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루하루가 매일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똑같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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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세계는 대단히 강제적이라서 이물질은 조용히 삭제된다. 정통을 따르지 않는 인간은 처리된다.
그런가? 그래서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 고치지 않으면 정상인 사람들에게 삭제된다.
가족이 왜 그렇게 나를 고쳐주려고 하는지, 겨우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P-1

육체노동자는 몸이 망가지면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아무리 성실해도, 분발하여 열심히 노력해도, 몸이 나이를 먹으면 나도 이 편의점에서 쓸모없는 부품이 될지도 모른다. - P-1

나는 사기꾼을 사기꾼인 줄 알면서 집에 들인 듯한 기분으로 시라하 씨를 집에 놓아두기 시작했지만, 뜻밖에도 시라하 씨 말이 맞았다.
집에 시라하 씨가 있으면 편리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동생 다음으로 시라하 씨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미호네 집에 모였을 때였다. 모두 모여 케이크를 먹을 때 나는 집에 시라하 씨가 있다고 지나가는 말처럼 했다.
친구들이 모두 미친 듯이 기뻐 날뛰는 모습은 머리가 이상해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 P-1

18년 동안 그만두는 사람을 몇 명이나 보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그 빈틈은 메워져버린다. 내가 없어진 자리도 눈 깜짝할 사이에 충원되고, 편의점은 내일부터 전과 똑같이 굴러갈 것이다.
상품을 검품하는 스캐너도, 발주하는 기계도, 바닥을 닦는 대걸레도, 손을 소독하는 알코올도, 언제나 허리에 차고 있던 먼지떨이도, 늘 몸 가까이 두고 있었던 도구들을 만질 일도 없어진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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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어머니가 슬퍼하거나 여러 사람에게 사과해야 하는 상황은 나의 본심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집 밖에서는 가능한 한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다른 사람 흉내를 내거나 누군가의 지시에 따르기만 하고, 스스로 움직이는 것은 일절 그만두었다.
필요한 말 이외의 말은 하지 않고 자진해서 행동하지 않게 된 나를 보고 어른들은 안심한 것 같았다.
고학년이 되어도 너무 조용하니까, 그것은 또 그것대로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입을 다물고 잠자코 있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고, 살아가기 위한 가장 합리적인 처세술이었다. 통지표에 "좀 더 친구를 사귀고 밖에서 활기차게 놀아요!"라고 쓰여 있어도, 나는 절대로 필요 이상의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 P-1

나는 아까와 같은 음색으로 큰 소리로 인사하고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그때 나는 비로소 세계의 부품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지금 내가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세계의 정상적인 부품으로서의 내가 바로 이날 확실히 탄생한 것이다. - P-1

내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을 때 부모님은 무척 기뻐해주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그대로 아르바이트를 계속하겠다고 말했을 때도 세상과 거의 접점이 없었던 예전의 나에 비하면 대단한 성장이라고 응원해주었다. - P-1

내가 언제까지나 취직하지 않고, 집요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같은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계속하자 부모님은 점점 불안해진 모양이었지만, 그 무렵에는 이미 때가 늦어 있었다.
왜 편의점이 아니면 안 되는지, 평범한 직장에 취직하면 왜 안 되는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완벽한 매뉴얼이 있어서 ‘점원’이 될 수는 있어도, 매뉴얼 밖에서는 어떻게 하면 보통 인간이 될 수 있는지, 여전히 전혀 모르는 채였다.
부모님은 좀 무른 편이어서 언제까지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나를 그냥 지켜봐주고 있다. 20대 시절엔 죄송한 마음에 일단 취업 활동에 뛰어들어본 적도 있지만, 편의점 아르바이트 경험밖에 없는 나는 서류 심사를 통과한 경우가 별로 없고, 면접 단계까지 가더라도 왜 몇 년 동안이나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지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 P-1

지금의 ‘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거의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다. 3할은 이즈미 씨, 3할은 스가와라 씨, 2할은 점장, 나머지는 반년 전에 그만둔 사사키 씨와 1년 전까지 알바 팀장이었던 오카자키 군처럼 과거의 다른 사람들한테서 흡수한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말투에 관해서 말하자면, 가까운 사람들의 말투가 나에게 전염되어 지금은 이즈미 씨와 스가와라 씨의 말투를 섞은 것이 내 말투가 되어 있다.
대다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전에 스가와라 씨의 밴드 동료들이 가게에 얼굴을 내밀었을 때 그 여자들의 옷차림과 말투는 스가와라 씨와 비슷했고, 사사키 씨도 이즈미 씨가 들어온 뒤로는 "수고하십니다!" 하는 말투가 이즈미 씨와 똑같아졌다. 이즈미 씨가 전에 일했던 가게에서 친하게 지냈다는 주부가 일을 도우러 왔을 때는 옷차림이 이즈미 씨와 너무 비슷해서 착각할 뻔했을 정도다. 내 말투도 누군가에게 전염되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전염하면서 인간임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P-1

두 사람이 풍부한 감정으로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으면 조금 초조한 기분이 든다. 내 몸속에 분노라는 감정은 거의 없다. 일할 사람이 줄어서 곤란하구나 생각할 뿐이다. 나는 스가와라 씨의 표정을 훔쳐보고, 연수받을 때 그랬던 것처럼 같은 부위의 얼굴 근육을 움직이며 말해보았다.
"에이, 또 땡땡이인가요? 안 그래도 일손이 부족한데 믿을 수가 없네요!"
스가와라 씨의 말을 되풀이하는 나를 보고 이즈미 씨가 시계와 반지를 벗으면서 웃었다.
"하하하, 후루쿠라 씨가 몹시 화가 났나 보네! 그래,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같은 일로 화를 내면 모든 점원이 기쁜 표정을 짓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은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직후의 일이었다. 점장이 버럭 화를 내거나 야간조의 아무개가 농땡이를 부리거나 해서 분노가 치밀 때 협조하면, 불가사의한 연대감이 생기고 모두 내 분노를 기뻐해준다.
이즈미 씨와 스가와라 씨의 표정을 보며 아아, 나는 지금 능숙하게 ‘인간’이 되어 있구나 하고 안도한다. 이 안도를 편의점이라는 장소에서 몇 번이나 되풀이했을까. - P-1

일손이 부족한 편의점에서는 ‘좋든 나쁘든, 어쨌든 간에 점원으로서 가게에 존재한다’는 것이 아주 달갑게 여겨지는 경우가 있다. 나는 이즈미 씨나 스가와라 씨에 비하면 우수한 점원은 아니지만, 지각도 결근도 하지 않고 어쨌든 날마다 온다는 것만은 누구한테도 뒤지지 않기 때문에 좋은 부품으로 취급받고 있었다. - P-1

"하지만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면, 나를 이상하지 않게 생각하던 사람이 꼬치꼬치 캐묻잖아? 그런 귀찮은 상황을 피하려면 그럴듯한 변명이 있어야 편리해."
이상한 사람한테는 흙발로 쳐들어와 그 원인을 규명할 권리가 있다고 다들 생각한다. 나한테는 그게 민폐였고, 그 오만한 태도가 성가시게 느껴졌다. 너무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면 초등학교 때처럼 상대를 삽으로 때려서 그러지 못하게 해버리고 싶어질 때가 있다. - P-1

"그 사람 서른다섯 살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여태껏 편의점 알바라니, 이제 슬슬 끝내지 않을까요?"
"인생 종 친 거지. 그 녀석은 안 돼. 사회의 짐이야. 인간은 말야, 일이나 가정을 통해 사회에 소속하는 게 의무야."
크게 고개를 끄덕인 이즈미 씨가 문득 생각난 것처럼 점장을 쿡 찌르며,
"후루쿠라 씨처럼 가정 사정이 있다면 이해하겠지만. 그렇죠?" 하고 말했다.
"아, 그래그래. 후루쿠라 씨는 어쩔 수 없잖아. 게다가 남자와 여자의 차이도 있으니까!"
점장도 서둘러 말했고, 내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화제는 시라하 씨한테로 돌아갔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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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워하지 마세요. 무서워하니까 정말 제가 무서운 사람이 된 것 같잖아요." - P-1

문득 떠오른 한마디의 말. ‘비밀은 사람을 보호합니다.’ 그러나 결국 좁고 어두운 사각에 몰고 가두는 것 역시 비밀이라고 했다. 벗어날 유일한 방법은 밝혀지는 것뿐. - P-1

항상 엄마는 ㅈ에서 눈을 깜빡였다. 이번엔 아니었다. ㄴ에 눈을 깜빡였다. 다음엔 ㅓ 그다음엔 ㅈ 그리고 ㅏ 그다음엔 ㄹ. 유희진은 천천히 글자를 손으로 짚으며 엄마의 말을 조합했다. 말이 완성됐을 때 유희진은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엄마의 말을 대신 말했다.
"너 잘못이 아니야."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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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장선기가 한 말은 논리적으로 틀리지 않았다. 문자 그대로만 따진다면 자신의 주장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도 유희진은 확신했다. 박기정이 유인한 것이다. 내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 이후부터 따라오기 쉽게 운전했고 나중엔 자신에겐 익숙하겠지만 나에겐 사각인 어딘가로 이끌었다. 장선기의 입장에선 이런 주장이 억측으로 느껴지리라는 것을 안다. 그 느낌을 말이 되게 설명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건 설명하기 어려울 뿐 분명한 사실의 영역이다. 유희진은 이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 애를 썼다. - P-1

"죄가 있다면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합니다. 법이 제대로 못 하면 누군가는 해야 해요. 갇혀야 할 사람은 갇혀야 하고 고통을 줬다면 자기도 그만큼의 고통을 받는 건 당연할 뿐 아니라 이치에도 맞습니다. 그런데 안인수 그 자에게는…… 벌이 아닙니다. 자신을 순교자라 생각하고 있거든요. 고문받고 죽음에 이르는 것은 오히려 선물이고 축복이라 믿으니까요. 몸이나 목숨이 아닌 믿음과 신념을 무너뜨려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막혀버렸어요." - P-1

아무튼 작가님은 이해하시리라 믿어요. 사람마다 사정이 있다는 것을요. 때론 해서는 안 될 일을 해야 할 때도 있고,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다는 것을요. - P-1

기정에게는 걱정하지 말라 했고 유 작가에게는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하지만 장선기에게는 그 어떤 확신도 없었다. - P-1

잘못된 답을 정답으로 믿는 경찰과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기사로 쓰고 싶은 기자 앞에서 몇 번이고 고개를 저었다. 마음을 치유해준다는 상담사는 마음을 다치게 했고 정신을 살펴준다는 의사는 오해했다. 그들은 모두 나를 어리석은 아이로 대했다. - P-1

인정한다. 나는 그가 싫지 않았다. 엄마를 괴롭게 한 사람인데, 그래서 결국 죽게 만든 사람인데도 왜 엄마가 그 사람을 좋아했는지 알 것 같았다. - P-1

"어떤 이에게 죽음은 벌이 아닙니다. 고통을 가했다면 고통을 받아야 합니다. 느끼지 못하는 건 의미가 없어요.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이에게는, 고통을 원하는 이에게는, 그러니까 안인수 같은 자에게는 다른 방식의 재판이 필요해요. 그는 고문을 고행으로, 죽음을 순교로, 믿고 있거든요. 그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순 없어요. 그자는 절망하고 후회하고 나중엔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제 능력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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