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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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모모를 만나보고 싶다. 물론 나에게도 모모는 기쁘게 자신의 시간을 써서 이야기를 들어 줄 것이다. 나도 이런 모모와 같이, 남들에게 기쁘게 나의 시간을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기쁨과 슬픔을 서로 나누는 데 시간을 쏟으며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바쁘다는 건 뭘까? 누구를 위해서 나는 이렇게 바쁜 것일까? 왜 나는 바빠야만 하는가? 바쁘면 아름다움을 느낄 수가 없다. 나는 모모에게서 여유로움을 배웠다. 아름다움을 느끼고 사랑할 수 있는 여유가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게 해준 모모에게 감사하다.


199 "운명의 시간이 뭔데요?"
모모가 묻자 호라 박사가 설명했다.
" 음, 이 세상의 운행에는 이따금 특별한 순간이 있단다. 그 순간이 오면, 저 하늘 가장 먼 곳에 있는 별까지 이 세상 모든 사물과 존재들이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서로 영향을 미쳐서, 이제껏 일어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일어날 수 없는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애석하게도 인간들은 대개 그 순간을 이용할 줄 몰라. 그래서 운명의 시간은 아무도 깨닫지 못하고 지나가 버릴 때가 많단다 허나 그 시간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으면 아주 위대한 일이 이 세상에 벌어지지." - P199

208 모모는 계속해서 안경 속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왜 얼굴이 잿빛이에요?"
호라 박사가 대답했다.
"죽은 것으로 목숨을 이어 가기 때문이지. 너도 알다시피 그들은 인간의 일생을 먹고 산단다. 허나 진짜 주인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시간은 말 그대로 죽은 시간이 되는 게야. 모든 사람은 저마다 자신의 시간을 갖고 있거든. 시간은 진짜 주인의 시간일 때만 살아 있지." - P208

217 "그럼 시간 도둑들이 사람들한테서 더 이상 시간을 훔쳐 가지 못하도록 조정하실 수는 없나요?"
"그럴 순 없어. 자신의 시간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는 문제는 전적으로 스스로 결정해야 할 문제니까. 또 자기 시간을 지키는 것도 사람들 몫이지. 나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나누어 줄 뿐이다."
모모는 홀을 빙 둘러보고 물었다.
"그래서 이렇게 많은 시계들을 갖고 계신 거예요? 한 사람마다 한 개씩요. 그렇죠?"
"아니야, 모모. 이 시계들은 그저 취미로 모은 것들이야. 이 시계들은 사람들이 저마다 가슴 속에 갖고 있는 것을 엉성하게 모사한 것에 지나지 않아. 빛을 보기 위해 눈이 있고, 소리를 듣기 위해 귀가 있듯이, 너희들은 시간을 느끼기 위해 가슴을 갖고 있단다. 가슴으로 느끼지 않은 시간은 모두 없어져 버리지. 장님에게 무지개의 고운 빛깔이 보이지 않고, 귀머거리에게 아름다운 새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과 같지. 허나 슬프게도 이 세상에는 쿵쿵 뛰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눈 멀고 귀 먹은 가슴들이 수두룩하단다." - P217

281 기기는 기진맥진해서 손으로 눈을 쓸어내리며 짤막하게 씁쓸한 웃음을 웃었다.
"보다시피 나는 이 꼴이 되었단다. 아무리 원해도 다시 돌아갈 수가 없어. 난 끝장이 났어. ‘기기는 기기인 거야!‘ 모모, 이 말 생각나니? 하지만 기기는 기기로 남아 있지 못했단다. 모모, 얘기 하나 해 줄까?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건 꿈이 이루어지는 거야. 적어도 나처럼 되면 그렇지. 나는 더 이상 꿈꿀 게 없거든. 아마 너희들한테서도 다시는 꿈꾸는 걸 배울 수 없을 거야. 난 이 세상 모든 것에 신물이 났어.
그는 우울한 표정으로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보았다. - P281

283 모모는 진심으로 기기를 도와 주고 싶었고, 그랬기 때문에 정말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기기의 말대로 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기기는 다시 기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모모 자신이 이미 모모가 아니라면 기기를 절대 도울 수 없다는 것을. 모모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모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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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철학과 위진현학 노장총서 12
정세근 지음 / 예문서원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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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진현학시대의 두 주인공을 꼽으라면 왕필(王弼, 226-249)과 곽상(郭象, 252-312)이라 하겠다. 왕필과 곽상은 명교(제도)파다. 왕필은 명교(제도)가 자연(본성)에 바탕을 둔다고 하였고, 곽상은 명교가 곧 자연이라고 보았다. 위진현학에 대해 공부하면서 문득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에서 읽었던 ‘유전자 결정주의’가 떠올랐다. 유전자는 곧 위에서 말한 본성의 의미에 가깝다. 즉 곽상은 자크 모노식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비록 다른 시대 다른 공간이었지만, 동양철학에서도 서양과 유사한 자유의지에 대한 사상이라 할 만한 것이 없었을까? 그렇지 않다. 나는 왕필과 곽상의 각각의 입장이 곧 의지론과 결정론을 대표한다고 본다. 사실상, 동양에는 자유의지라는 ‘용어‘가 존재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그렇기에 이는 외형적으로 ‘제도와 본성의 관계‘에 대한 논의로 전개되었다.

 인간은 사회 제도를 만들고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이를 꿀벌에 비유하자면, 꿀벌이 육각형 벌집을 짓고 그 곳에서 살아가는 것과 인간이 제도를 만드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보는 것이 곽상식의 관점이다. 곽상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곧 본성이라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꿀벌의 육각형 집은 자연물이라고 말하지만, 인간이 만든 각종 도구나 상품들을 우리는 흔히 인공물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말한다면, 딱 맞아 떨어지지는 않지만, ‘제도는 자연에 근본을 둔다‘라고 하는 명교에 대한 왕필의 입장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꿀벌 비유는 자크 모노의 《우연과 필연》에서 빌려 온 것이다).

 한편, 내가 제도와 본성에 관한 논의를 자유의지에 대한 논의로 보는 까닭은 각 입장에서의 인간의 역할 차이와 관련이 있다. 만일 곽상이 제도를 보는 관점에서처럼 ‘제도가 곧 본성‘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주체적 의지가 개입할 여지는 없기 때문이다. 반면 왕필의 주장대로 ‘제도는 (인위이지만) 자연에 근본해야 한다‘라는 당위적 명제를 받아들인다면 이상을 추구하는 인간의 노력을 그의 의지로 볼 수 있게 된다.

 이렇듯 여러 철학사상을 자꾸 접하다 보니, 철학의 거대한 흐름 중 하나는 ‘의지론이냐, 결정론이냐’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내가 접한 철학들은 위 기준에 의해 두 가지로 분류가 가능했던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22 철학의 주제라는 것이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몇천 년이 지나도 사람의 본질이 바뀌지 않듯이 현학의 문제도 이천 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타당하다. 그것이 바로 이를 테면 ‘제도와 본성’에 관한 논의와 같은 것이다. 과연 우리는 본성적으로 제도를 만들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본성은 제도 속에서 희생되지는 않는가 하는 것이다. 제도를 완전히 벗어난 순전한 인간 본성의 발휘와 합리적인 제도의 수립을 위한 본성의 억제는 모순되지 않는가를 우리는 묻는다. 제도는 철저히 전체를 위한 구상이고 본성은 분명히 개인을 위한 설정이다. 전체와 부분, 집단과 개인 사이의 알맞은 장치의 고안은 이와 같은 철학적 토론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고민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 P22

168 그런데 이 모습을 곽상은 "작은놈이 큰 것을 바라니 자기를 잃는다"라고 풀이함으로써 ‘큰놈은 큰 데서, 작은놈은 작은 데서 살아야 함’을 강조한다. 분명 장자의 뜻은 우물보다 큰 바다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곽상은 ‘우물 속에서 뛰노는 즐거움’과 ‘바다의 큰 즐거움’을 같이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투라면 우물 안 개구리의 뜻은 ‘좁은 소견을 지닌 자’가 아니라 ‘분수에 만족하고 행복해하는 자’가 되고 만 169 다. 이른바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되고 마는 것이다. - P168

173 한마디로 대소와 생사를 초월하는 소요야말로 참 소요라는 주장이다. 곽상의 이론구조는 사실상 매우 간단하다.

(가) 전체의 세계가 있다.(一)
(나) 상대성으로는 전체를 볼 수 없다.(待)
(다) 그런 세계는 한쪽에 불과하다.(方)
174 (라) 따라서 전체를 하나로 할 수 있어야 한다.(齊)
(마) 그것이 바로 소요이다.(遊)
(바) 그때서야 자기의 본성이 펼쳐진다.(性)

대략적으로 곽상의 어휘에서 (가)에는 ‘아우름’이, (나)에는 ‘대소’, ‘생사’ 등이, (다)에는 ‘유무’가, (라)에는 ‘크게 통함’이 있고, (마)에는 ‘얻음’이, (바)에는 ‘몫’, ‘능력’ 등이 속한다. 결국 곽상이 바라는 세계는 그의 표현대로 ‘제일성’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러나 곽상의 이러한 해석은 문제가 많다.
첫쨰, 그는 「소요유」를 「제물론」으로 풀고 이다. 장자의 「제물론」은 이와 같은 제일성의 논의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곳이고, 「추수」는 이에 버금간다. 그런데 곽상이 벌이고 있는 「소요유」에 대한 해석에는 ‘소요’는 없고 ‘제물’만 있다.
둘째, 평등으로 자유를 억압한다. 평등한 세상이라고 해서 자유로운 개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곽상은 평등하기 위해서는 자유가 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개성은 제일성 속에서 포기된다. 개체는 전체 속에서 함닉되고 말아, 독자적으로 설 자리가 없다.
셋째, 과연 무엇이 본성이란 말인가? 곽상은 본성에 대한 깊은 반성이 없다. 타고난 것이 모두 본성이라면,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본성대로 한 일이라는 것인가? 임금은 임금의 본성을, 노예는 노예의 본성을 타고났다는 말인가? 성인은 성인의 본성을, 악인은 악인의 본성을 타고났다는 말인가? 이러한 주장에는 함양이나 공부, 나아가 학습이나 교육과 같은 용어가 개입될 여지가 조금도 없다.
175 ‘각자 자기가 타고난 마당(自得地場)에서 본성을 실현하면 된다’는 이러한 곽상의 주장은 도가판 결정론으로 본성이 바뀔 여지가 조금도 없다. 바꾸려고 하다가는 다칠 뿐이다. "본성은 각자의 몫이 있다. 똑똑한 사람은 똑똑함을 지켜 끝을 기다리며,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음을 안고 죽음에 이르니, 어찌 그 성을 도중에 바꿀 수 있겠는가!"
이런 해석에 불만을 갖은 역대의 주석가들은 하나둘이 아니다. 현대 판본 가운데에서 가장 정치한 『장자집석』의 저자조차 곽상의 「소요유」 첫 주부터 "곽상(향수)의 주가 다하지 못했다"라고 밝히고 있을 정도이다. 특히, 위에서 말한 세 번째 논의는 불가에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만일 인간의 본성이 곽상식이라면 수행이고 성불이고 아무것도 필요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곽상이 주장하는 이른바 ‘적성설適性說’의 최대 난점이다. - P173

180 지둔이 곽상에게 만족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만일 붕새와 참새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불가에서의 수행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우리 중생인 참새는 부처인 붕새가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이른바 ‘성불’이라는 목적이 인간들에게 부여되고 있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적성이란 허울로 사람을 잣대질한다면, 부처는 부처의 적성이 있고, 보살은 보살의 적성이, 아라한은 아라한의 적성이 있을 뿐, 아귀와 수마에 빠져 사는 내가 부처가 될 길은 아득하다. 건달, 낭인, 한량 그리고 카사노바와 같은 바람둥이도 자신의 적성에 충실할 뿐이다. 슬프지만 적성설에 지독히 충실하다면, 2004년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도 지둔의 말처럼 적성일 뿐이다. 괜히 중국 고대의 임금과 도둑의 임금을 181 거들먹거릴 필요도 없다. - P180

214 그리고 현학은 절대의 자유와 절대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며, 더욱이 행복의 동산에서 낭만적 정신을 갈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풍우란은 그것을 바로 서구의 낭만적 정신과 빗댈 만한 중국의 ‘풍류風流’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중국철학의 짧은 이야기』에서는 『중국철학의 정신』 215 보다도 더욱 현학의 낭만성을 강조함으로써 현학자들의 ‘추상과 초월’이 부각된다. 심지어 그는 일시적인 충동이나 자극에 따라 살고, 금욕적 요소가 강하긴 하지만 성性(Sex)의 미화된 모습을 현학자들에게서 발견하기도 한다.
물론, 풍우란은 ‘신도가’를 향수나 곽상과 같은 ‘합리주의자’(The Rationalists)와 풍류를 즐기는 혜강이나 완적과 같은 ‘감각주의자’(The Sentimentalists)로 크게 나누고 있긴 하다. 그러나 그는 이성과 감성이라는 두 가지 상반되는 표준으로 위진의 사상가를 나누었다기보다는, 오히려 현학자들의 이성적인 모습을 선대의 명가와의 관련이나 제도에 대한 궁극적인 긍정 태도에서 간신히 발견하는 듯하다.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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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와 장자 - 무위와 소요의 철학 인문정신의 탐구 3
이강수 지음 / 길(도서출판)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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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명사회의 발전은 이성의 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질서와 규범, 제도가 있기에 사회에 대한 예측 가능성이 높아지고, 이로써 인간 사회는 지속적인 발전을 꾀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제도와 도덕이 강조되는 사회에서는 상대적으로 개개인의 자유가 침해될 가능성이 커지게 된다.

 노자는 기존의 귀족 중심 질서가 해체된 혼란스러운 전국 시대에, 제도와 도덕을 중시하는 유묵과는 대조적으로 사람들 개개인이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세상이 바람직하다고 여겼다. 제도와 도덕은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고 변화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많은 전문가들은 현대를 두고 사회 변화가 그 어느때보다도 빠른 시기라고 지적한다. 일관적이며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굳센 마음으로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삶의 자세를 가진 이는 지금의 빠르고 거대한 일련의 변화들을 무사히 헤쳐 나갈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 나는 회의적이다. ‘단단하고 강한 것은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노자의 말이 이 시대에는 더 적합하게 느껴진다.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 수보다 우울증과 그로 인한 자살로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죽어가는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삶의 태도는 무엇일까? 노자의 견해와 같이, 부드러운 자세로 끊임없이 다양한 변화에 응대하며 헤쳐나가는 것은 아닐까? 설령 실패하더라도 유연하게 대처하며, 타격을 입더라도 금세 회복하고 일어나 변화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헤쳐나가는 삶의 태도가 필요한 때라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는 직업을 최소 여섯 번은 바꿔야 하는 시대를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곳곳에서 들린다. 극심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요한 것은 일관된 초심을 유지하는 것보다, 실패 앞에서도 오뚝이처럼 일어나 새롭게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이 아닐까? 요컨대 ‘회복탄력성‘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욱 필요한 특성이라고 생각한다. 노자의 ‘상반상성’ 사상에서 드러나듯이, ‘괴로움이 없다면 행복이 무엇인지조차 모를 것이다.’

(2019. 6. 18. 오후 4:38 수정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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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9월부터 시작한 뚜레쥬르 아르바이트가 9개월차에 접어든다. 처음엔 이렇게 오래 할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다만 그만둘 때는 그만두더라도 최대한, 무조건 오래 버티자고 마음을 먹었다. 손님을 직접 응대하는 식음료 제공 서비스직에서 맡은 바를 잘 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스무살 때 처음 했던 3개월간의 아웃백 아르바이트 경험과 연관이 있다. 당시 사회생활 근력과 신체적 근력 모두가 부족했던 나는, 강도 높은 업무량을 견디지 못하고 금세 일을 그만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껏 아웃백 알바 경험은 나로서는 꼭 극복하고픈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뚜레쥬르에서 일을 하는 것은 여러 장점이 있다. 우선 케이크와 빵을 많이 먹을 수 있다. 시간 지난 빵이나 케이크가 있으면 매니저님들이 나누어 주신다. 둘째로 스케쥴 조정이 자유로운 편이다. 나 말고도 일하는 직원이 많은 매장이기 때문에 급한 사정이 생기면 서로 협의하여 근무시간 조정이 가능하다. 다음으로 또래 알바생들 및 매니저님들, 사장님과 사모님 모두 참 괜찮은 사람들이라, 배울 점이 많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소득은, 근무 시간동안 내가 일 인분의 업무를 원만하게 처리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9개월차인 현재 웬만한 빵 이름은 숙지하게 됐다. 음료는 모두 제조 가능하다. 매장 내에서 벌어지는 각종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도 많이 길렀다. '아웃백 트라우마'가 극복되었음은 물론이다.


 이 곳에서 일을 하면서 나의 일상도 다소 변화되었다. 이제까지는 커피를 한 잔만 마셔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탓에 카페와는 통 인연이 없는 삶을 살아왔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는 친구들과 카페에 가서 곧잘 시간을 보내고, 혼자 밀린 일을 처리하러 노트북을 들고 찾아가기도 한다. 아마 카페라는 공간이 내게 많이 친숙해졌기 때문인 것 같다. 카페에 가서 주방을 관찰하는 버릇도 생겼다. 이 매장은 어떤 원두 기계를 쓰나, 우리 매장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등을 잠깐이나마 생각해보게 되었다. 많이는 아니지만 커피도 더 자주 마시게 되었다. 또한 커피 자체에 대해서 더 공부하고 싶어졌다. 아래와 같은 책들에도 요즘엔 관심이 간다. 예전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책인데...







 


 본래 책과 무관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적을 생각이 없었는데, 9개월간 지속한 뚜레쥬르 알바에 대한 생각을 한번쯤 정리해보고 싶어서 적어보았다! 어... 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ㅅ^(사진은 마감 끝난 어느 날 사장님이 챙겨주신 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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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6-05 17: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르바이트를 9개월동안 지속해서 하기가 쉽지 않은데 베텔게우스님 대단하세요!^^:)

베텔게우스 2019-06-05 21:37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님, 읽어주시고 칭찬까지 남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처음엔 많이 힘들었는데 인간은 역시 적응의 존재인가 봅니다ㅎㅎㅎ 경제적으로 스스로 자립하고 싶어서 시작했는데, 앞으론 소비도 지혜롭게 잘 하게 되었음 좋겠습니다ㅋ :)

서니데이 2019-06-06 2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바로 위의 겨울호랑이님이 하신 말씀과 이하동문입니다.
어떤 일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들이 생각만큼 쉽지는 않은 것 같아요.
특히 일이라면 여러가지 힘든 점도 많을테니까요.
트라우마를 극복하셨다니, 다행입니다.

현충일 휴일은 잘 보내셨나요. 밖에 비가 오고 있어요.
베텔게우스님, 편안한 밤 되세요.^^

베텔게우스 2019-06-07 00:05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알바랑 보강 수업 마치고, 집에서 푹 쉬었습니다.^^
두 분께서 마음 써 주신 덕택에 댓글로 큰 위로를 받았어요. 자신감이 생기네요! 감사드려요.
빗소리가 좋네요. 서니데이님도 편안한 밤 보내세요🙄
 
공자曰,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예문서원 연구총서 37
안재호 지음 / 예문서원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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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님 말씀에 대해서, 적어도 작년 이맘때까지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물론 여태까지 몰랐더라도 어찌어찌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공자에 대해 알고 나니, 그가 유명한 철학자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일관된 목표와 철학을 일찍이 정립하였으며 그것을 위하여 평생을 살아갔다는 사실이 인상깊었고, 그것이 나의 삶을 돌아보게 하였다. 역시 나는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하는 것 같기 때문에...

 공자에겐 일관된 철학 체계를 통해서 이루고자 한 실천적 목표가 있었다. 그것은 곧, 주(周)나라 대의 문물을 그가 살았던 혼란한 춘추전국시대에 다시금 펼쳐 놓는 일이었다. 제자백가가 등장해 저마다의 혼란 극복 방안을 내세웠던 당대에, 공자는 ‘예(禮)를 통한 인(仁)의 실천‘이 세상의 혼란을 잠잠케 하며, 사람들이 잘 살아가도록 하는 데 반드시 큰 기여를 할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예를 통한 인의 실천‘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사람들에게 자신이 그들에게 가진 정성스런 마음을 표현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 마음이 과하거나 혹은 상황에 맞지 않다면 상대방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거나, 심하면 오히려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역효과를 불러올 것이다. 이에 공자는 ‘예‘의 필요성을 내세운다. 예는 형식이나 규범, 절차와 같은 것인데,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로는 전통적으로 ‘관혼상제‘의 네 가지가 있다. 이렇듯, 이미 확립돼 있는 절차는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적절한 정도로 전달하게 하고, 예가 갖추어진 마음을 받는 상대방도 절차의 실행으로부터 정성스러운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인‘을 담지 않고서 오직 ‘예‘만 강조하는 경우다. 이러한 상황은 이제까지 유학이 욕을 먹었던 이유 중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가정에서 아버지가 자식에게,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학생에게, 군대에서는 선임병이 후임병에게 예의 실행만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본인이 훌륭한 인품을 드러냄으로써 존경의 마음을 갖게 하기 보다는, 정작 본질과 의도는 오래 전에 이미 잊혀버린 예를 준수하기를 강요하는 데에만 급급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부모를 봉양하는 일이 개돼지를 먹이는 것과 다른 까닭은 바로 공경하는 마음, 즉 ‘인‘이 담겨 있는가의 여부에서 온다. 즉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이성뿐 아니라 감성도 필요하다‘는 것인데...

 한편, 요즘에는 그 반대의 경우가 문제될 소지도 무척 많다는 생각도 든다. 예는 집어치우고 오직 인만 내세우는 경우가 그것이다. 개인주의의 심화에 따라 점차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예가 있는지 의문스러워진 것이 그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저 사람의 예는 내가 생각하는 예와 크게 다를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해서 상대의 마음은 생각도 않은 채, 무작정 상대에게 들이대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공자에 따르면, 이러한 문제 상황들에 있어서 예의 기준은 바로 ‘의(義)‘가 된다. 의는 정당함, 공정함을 뜻한다고 한다. 이를 명심하지 않으면 위와 같은 상황들이 수도 없이 발생할 것 같다. 형식이나 규범은 시대나 사회마다 다르지만, 의로써 분별한다면 바람직한 예를 알고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 공자의 생각이었다.

 이상으로 내가 이해한 공자님 말씀을 책을 참고해 대략 정리해 보았다. 공자가 살다 간 시대는 지금보다 대략 이천 오백여 년이 앞선 시기이나, 그 가르침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지혜를 제공함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 최근에, 특강 하나를 수강 신청했다. 강의가 진행된다는 사실을 중간에 알아 뒤늦게 신청했기 때문에, 어제가 나에겐 첫 수강날이었다(강의는 이미 네 차례 진행되었다). 강사분께서 하신 말씀 중 인상 깊은 것이 있다. ˝사람은 살아가는 데 이성만 사용할 게 아니라 감성도 써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는데, 5개월 전 즈음에 누군가 내게 했던 말과 내용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수화기 너머로 이 말을 들었을 때부터 줄곧 머릿속에 화두처럼 품고 다녔는데, 비슷한 말을 다시 들으니 약간 신기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 의미가 무엇일까를 다시 곱씹어보게 되었다.
 특강 주제는 주역이고, 매주 수요일 저녁에 열린다. 작년 학교 수강신청 때 주역의 세계를 신청했다가, 신청인원 미달로 폐강되어 강의를 듣지 못한 뼈아픈 기억이 있다. 올해에는 주역과 인연을 맺을 수 있어 정말 반갑다.
 이번 주 강의에 따르면, 합리적•이성적 사고로는 현재 당면한 문제의 해결이 도저히 불가능할 때, 주역은 점이라는 비합리적•감성적 수단을 통해 위기 탈출 프레임을 제공함으로써, 합리적 현실 세계로의 복귀를 돕는다고 한다(알다시피 애당초 현실 문명 세계는 모두 이성적 토대 위에서 돌아간다). 다음 주에는 주역점 치는 방법까지 알려준다고 한다. 그냥 원전 강독 강의인줄로만 알았는데, 뭔가 뜻밖의 기회인 듯. 이번 기회에 잘 익혀둬야겠다.


32 성인: 그의 자유와 공부

‘공부’란 한때 우리가 이소룡의 무술영화 속에서 볼 수 있었던 ‘쿵후’, 일반적으로 학교에서 하는 ‘공부’, 그리고 산속에 들어가 ‘도를 닦는 것’ 등 그 모두를 포함한다. 다시 말해서,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인위적인 노력을 하는 것, 그 모든 것이 전부 ‘공부’에 속한다. 그러나 공구와 같은 자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주로 도덕적 수양을 공부로 한다. 도덕적 수양이란 무엇인가? 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이 이야기를 할 때면, 언제나 내가 먼저 닭살이 일어나게 되는(물론 감동적이어 33 서) 공구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도덕 수양의 대강을 살펴볼 수 있다.

하늘을 원망하지 말고 사람을 탓하지 말며, 아래에서 배워 위에 도달하니 나를 아는 이 하늘이로고!

이 이야기는 사실 공구가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없음을 한탄하며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평소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잘 보여 주는 명언이 아닐 수 없다. 좀 더 의역하면 이렇게 된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원망하지 않고 책임이나 결과를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지 않으며, 구체적 현실 속에서 이치를 터득하여 결국에는 전 우주에 두루 통하는 원리를 깨달으니 인격신과 같은 하늘이 있다면 그가 나를 알아줄 것이다. - P32

37 그런데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터득하는 이치는 결과적으로 도덕적인 것이지만, 결코 인간세계의 도덕적인 정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나아가 우주 운행의 원리와 상통하게 된다. 정말 그런가? 확인할 수 없다. 그것은 일종의 철학적 신념이다. 공구와 그의 후학들, 그리고 거의 모든 유학자는 전부 그런 철학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신념은 공구보다 훨씬 앞선 고대 중국의 지식인들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인간이라는 존재는 우주에서 가장 주요하고 훌륭한 요소들에 의해 구성되었고 그래서 또한 우주의 총체적인 원리가 인간에게 입력되었는데, 그렇게 입력된 원리가 인간의 잠재된 본성(潛在性, 즉 있긴 분명히 있어서 조건만 충족되면 나타나지만 물에 잠겨 있듯 현실적으로는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는 본성)을 이루었으며 그 잠재된 본성을 언제 어디서나 온전히 표현해 내는 이가 바로 요순과 같은 성인이다. 그런데 성인은 우리와 다른 어떤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바로 도덕적 완벽을 이루어 자유로운 사람이다. 결국 인간에게 잠재된 본성의 내용이란 바로 도덕이며, 나아가 인간의 잠재성과 우주의 원리는 도덕을 매개로 하나가 된다.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서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 38 서 공구는 자신이 "전 우주에 두루 통하는 원리를 깨달으니 인격신과 같은 하늘이 있다면 그가 나를 알아줄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 P37

83 이런 문제는 사실 예의 올바른 기준을 묻는 것이다. 공구는 이런 문제를 고려했을까? 당연히 고려했다. 공구는 철학자 아닌가! 철학자는 사상가와 다르다. 사상가는 단지 어떤 특정한 분야에 깊이 있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만, 철학자는 전 우주로부터 구체적인 인생에 이르기까지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사고와 사상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다. 철학자인 공구가 제시한 기준이란 바로 ‘의義’이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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