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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曰,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ㅣ 예문서원 연구총서 37
안재호 지음 / 예문서원 / 2010년 11월
평점 :
공자님 말씀에 대해서, 적어도 작년 이맘때까지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물론 여태까지 몰랐더라도 어찌어찌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공자에 대해 알고 나니, 그가 유명한 철학자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일관된 목표와 철학을 일찍이 정립하였으며 그것을 위하여 평생을 살아갔다는 사실이 인상깊었고, 그것이 나의 삶을 돌아보게 하였다. 역시 나는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하는 것 같기 때문에...
공자에겐 일관된 철학 체계를 통해서 이루고자 한 실천적 목표가 있었다. 그것은 곧, 주(周)나라 대의 문물을 그가 살았던 혼란한 춘추전국시대에 다시금 펼쳐 놓는 일이었다. 제자백가가 등장해 저마다의 혼란 극복 방안을 내세웠던 당대에, 공자는 ‘예(禮)를 통한 인(仁)의 실천‘이 세상의 혼란을 잠잠케 하며, 사람들이 잘 살아가도록 하는 데 반드시 큰 기여를 할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예를 통한 인의 실천‘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사람들에게 자신이 그들에게 가진 정성스런 마음을 표현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그 마음이 과하거나 혹은 상황에 맞지 않다면 상대방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거나, 심하면 오히려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역효과를 불러올 것이다. 이에 공자는 ‘예‘의 필요성을 내세운다. 예는 형식이나 규범, 절차와 같은 것인데,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로는 전통적으로 ‘관혼상제‘의 네 가지가 있다. 이렇듯, 이미 확립돼 있는 절차는 인간이 자신의 마음을 적절한 정도로 전달하게 하고, 예가 갖추어진 마음을 받는 상대방도 절차의 실행으로부터 정성스러운 마음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인‘을 담지 않고서 오직 ‘예‘만 강조하는 경우다. 이러한 상황은 이제까지 유학이 욕을 먹었던 이유 중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가정에서 아버지가 자식에게,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학생에게, 군대에서는 선임병이 후임병에게 예의 실행만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본인이 훌륭한 인품을 드러냄으로써 존경의 마음을 갖게 하기 보다는, 정작 본질과 의도는 오래 전에 이미 잊혀버린 예를 준수하기를 강요하는 데에만 급급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부모를 봉양하는 일이 개돼지를 먹이는 것과 다른 까닭은 바로 공경하는 마음, 즉 ‘인‘이 담겨 있는가의 여부에서 온다. 즉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이성뿐 아니라 감성도 필요하다‘는 것인데...
한편, 요즘에는 그 반대의 경우가 문제될 소지도 무척 많다는 생각도 든다. 예는 집어치우고 오직 인만 내세우는 경우가 그것이다. 개인주의의 심화에 따라 점차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예가 있는지 의문스러워진 것이 그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저 사람의 예는 내가 생각하는 예와 크게 다를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해서 상대의 마음은 생각도 않은 채, 무작정 상대에게 들이대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공자에 따르면, 이러한 문제 상황들에 있어서 예의 기준은 바로 ‘의(義)‘가 된다. 의는 정당함, 공정함을 뜻한다고 한다. 이를 명심하지 않으면 위와 같은 상황들이 수도 없이 발생할 것 같다. 형식이나 규범은 시대나 사회마다 다르지만, 의로써 분별한다면 바람직한 예를 알고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 공자의 생각이었다.
이상으로 내가 이해한 공자님 말씀을 책을 참고해 대략 정리해 보았다. 공자가 살다 간 시대는 지금보다 대략 이천 오백여 년이 앞선 시기이나, 그 가르침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지혜를 제공함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 최근에, 특강 하나를 수강 신청했다. 강의가 진행된다는 사실을 중간에 알아 뒤늦게 신청했기 때문에, 어제가 나에겐 첫 수강날이었다(강의는 이미 네 차례 진행되었다). 강사분께서 하신 말씀 중 인상 깊은 것이 있다. ˝사람은 살아가는 데 이성만 사용할 게 아니라 감성도 써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는데, 5개월 전 즈음에 누군가 내게 했던 말과 내용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수화기 너머로 이 말을 들었을 때부터 줄곧 머릿속에 화두처럼 품고 다녔는데, 비슷한 말을 다시 들으니 약간 신기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 의미가 무엇일까를 다시 곱씹어보게 되었다.
특강 주제는 주역이고, 매주 수요일 저녁에 열린다. 작년 학교 수강신청 때 주역의 세계를 신청했다가, 신청인원 미달로 폐강되어 강의를 듣지 못한 뼈아픈 기억이 있다. 올해에는 주역과 인연을 맺을 수 있어 정말 반갑다.
이번 주 강의에 따르면, 합리적•이성적 사고로는 현재 당면한 문제의 해결이 도저히 불가능할 때, 주역은 점이라는 비합리적•감성적 수단을 통해 위기 탈출 프레임을 제공함으로써, 합리적 현실 세계로의 복귀를 돕는다고 한다(알다시피 애당초 현실 문명 세계는 모두 이성적 토대 위에서 돌아간다). 다음 주에는 주역점 치는 방법까지 알려준다고 한다. 그냥 원전 강독 강의인줄로만 알았는데, 뭔가 뜻밖의 기회인 듯. 이번 기회에 잘 익혀둬야겠다.
32 성인: 그의 자유와 공부
‘공부’란 한때 우리가 이소룡의 무술영화 속에서 볼 수 있었던 ‘쿵후’, 일반적으로 학교에서 하는 ‘공부’, 그리고 산속에 들어가 ‘도를 닦는 것’ 등 그 모두를 포함한다. 다시 말해서,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인위적인 노력을 하는 것, 그 모든 것이 전부 ‘공부’에 속한다. 그러나 공구와 같은 자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주로 도덕적 수양을 공부로 한다. 도덕적 수양이란 무엇인가? 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이 이야기를 할 때면, 언제나 내가 먼저 닭살이 일어나게 되는(물론 감동적이어 33 서) 공구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도덕 수양의 대강을 살펴볼 수 있다.
하늘을 원망하지 말고 사람을 탓하지 말며, 아래에서 배워 위에 도달하니 나를 아는 이 하늘이로고!
이 이야기는 사실 공구가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없음을 한탄하며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평소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잘 보여 주는 명언이 아닐 수 없다. 좀 더 의역하면 이렇게 된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원망하지 않고 책임이나 결과를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지 않으며, 구체적 현실 속에서 이치를 터득하여 결국에는 전 우주에 두루 통하는 원리를 깨달으니 인격신과 같은 하늘이 있다면 그가 나를 알아줄 것이다. - P32
37 그런데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터득하는 이치는 결과적으로 도덕적인 것이지만, 결코 인간세계의 도덕적인 정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나아가 우주 운행의 원리와 상통하게 된다. 정말 그런가? 확인할 수 없다. 그것은 일종의 철학적 신념이다. 공구와 그의 후학들, 그리고 거의 모든 유학자는 전부 그런 철학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신념은 공구보다 훨씬 앞선 고대 중국의 지식인들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인간이라는 존재는 우주에서 가장 주요하고 훌륭한 요소들에 의해 구성되었고 그래서 또한 우주의 총체적인 원리가 인간에게 입력되었는데, 그렇게 입력된 원리가 인간의 잠재된 본성(潛在性, 즉 있긴 분명히 있어서 조건만 충족되면 나타나지만 물에 잠겨 있듯 현실적으로는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는 본성)을 이루었으며 그 잠재된 본성을 언제 어디서나 온전히 표현해 내는 이가 바로 요순과 같은 성인이다. 그런데 성인은 우리와 다른 어떤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바로 도덕적 완벽을 이루어 자유로운 사람이다. 결국 인간에게 잠재된 본성의 내용이란 바로 도덕이며, 나아가 인간의 잠재성과 우주의 원리는 도덕을 매개로 하나가 된다.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서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 38 서 공구는 자신이 "전 우주에 두루 통하는 원리를 깨달으니 인격신과 같은 하늘이 있다면 그가 나를 알아줄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 P37
83 이런 문제는 사실 예의 올바른 기준을 묻는 것이다. 공구는 이런 문제를 고려했을까? 당연히 고려했다. 공구는 철학자 아닌가! 철학자는 사상가와 다르다. 사상가는 단지 어떤 특정한 분야에 깊이 있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만, 철학자는 전 우주로부터 구체적인 인생에 이르기까지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사고와 사상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다. 철학자인 공구가 제시한 기준이란 바로 ‘의義’이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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