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지금 이런 기억이 떠오르는 걸까? 나는 영문 모를 슬픔과 괴로움을 느끼며 자문했다. 어떤 기억은 짐작도 할 수 없는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다가 불시에 일격을 가한다. - P-1

사춘기는 무리의 성격과 다른 것을 배척하는 시기였고, 나의 서울 말투라든가 딱딱한 독일어 억양이 묻어나는 영어 발음 같은 건 쉽게 놀림거리가 됐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맞서 싸우는 대신 눈을 내리까는 쪽을 택했는데 그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해서라기보다는 내가 그곳을 곧 벗어나리란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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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는 말수가 적지만 수줍어하면서도 꼭 필요한 말은 하는 애라는 걸 나는 그때 알았고, 그러자 그런 한수가 갑자기 귀엽게 느껴졌다. - P-1

"엄마, 만약에 사람들이 꼭 한번 다시 만나고픈 사람을 누구든 딱 한 명만 만날 수 있게 된다면 보통은 첫사랑을 가장 보고 싶어할까?" - P-1

"글쎄, 그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면 엄마가 꼭 한번 다시 보고픈 건 첫사랑이 아니라 다른 사람일 것 같은데?" - P-1

"눈…… 눈이 아침부터 쏟아졌다. 지난밤 꿈에 K.H.를 본 탓일까? 오늘은 환자의 몸을 씻기거나 소변통을 비우는 중에도 계속 K.H. 생각이 났다. 꿈속에서 K.H.는 건강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 P-1

1974년 3월 24일의 일기엔 "보드라운 햇빛. 파란 하늘. 어제는 부모님께 송금하고 돌아오는 길에 아네모네 두 송이를 샀다. 오늘은 K.H.에게서 편지가 왔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너무나 그리운 K.H. 편지엔 나의 건강을 걱정하는 말이 들어 있다. 나의 단 하나, 나의 자랑, 나의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사람." - P-1

마리아는 조금 이따가 왔는데 잔뜩 멋을 부렸더라고. 배우처럼 예쁜 얼굴인데 멋까지 부렸으니, 처음엔 콧대 높은 아가씨인 거 아닌가 싶어 경계했지. 한 시간 만에 그런 성격이 전혀 아니란 게 드러났지만. - P-1

가정 형편이 나와 조금 더 비슷한 것 같은 행자 언니는 조용한 성격인지 말숙 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이따금씩 웃기만 했다. 하지만 기차에서 내릴 즈음이 되자 나와 말숙 언니의 손을 덥석 잡더니, "앞으론 무슨 일이 있으면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기로 해요"라고 수줍은 얼굴로 속삭였다. 행자 언니의 순박함 때문인지, 웃을 때 살짝 드러나는 덧니로 인해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 귀여웠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긴장이 풀리면서 안심이 됐다. - P-1

그가 아까부터 나에게 황홀한 눈길을 보내고 있던 걸 난 알았지. 그런 눈길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거든. - P-1

말이 통하지 않았는데도 그 남자가 싫지 않았어. 그가 이끄는 대로 시내를 구경하고 맥주를 사 마셨지. 마리아, 너는 푸른 새벽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워. 둘째 날 만났을 땐 독어를 거의 할 줄 모르던 그 남자가 내가 독일에서 왔다는 걸 알고 연습이라도 해왔는지 엉망진창인 발음으로 그렇게 내게 말했단다. 여행 마지막날엔 관광객들은 모르는 아주 아름다운 해변에 나를 데려갔어. 별이 촘촘히 박힌 밤이었는데, 거기에서 그 남자가 나에게 입을 맞췄어. 숨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고, 그가 조심스럽게 내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번갈아 깨물었지. 가장 짧게 만난 남자지만 가장 낭만적인 남자였단다. - P-1

이십대의 마리아 이모가 클럽에서, 로마에서, 니스의 해변에서 영화와 같은—마리아 이모의 표현이다—연애를 할 수 있었던 데는 마리아 이모가 다른 파독간호사 이모들과 달리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는 사실이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 P-1

"막상 간섭받기 시작하면 넌 지금 한 말을 후회할걸."
레나가 엄마에 대한 불만을 토로할 때마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 레나는 그럴 일은 없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엄마는 내가 지금 임신을 했다고 말해도 내 자유를 존중한다며 신경쓰지 않을 사람이야. 그게 얼마나 외로운 건지 너는 몰라."
하지만 외로움에 대해서라면 나도 일가견이 있었다. - P-1

선자 이모는 한수처럼 낯을 가리는 성격인지 다른 이모들에 비해 다가가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다른 이모들에 비해 내가 쓰려(고 한다고 되어 있)는 소설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응원해준 편이었는데, 그건 어떤 상황에서도 담담하던 선자 이모치고는 꽤 의외의 모습이었다. - P-1

하지만 선자 이모의 일기를 읽어나갈수록 나는 이모가 말을 거는 상대가 첫사랑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나같이 슬픈 연서였으니까. 그리고 그 행간에 잔잔히 흐르던 격정과 애달픔을 느낀 사람이라면 누구든, 선자 이모가 첫사랑의 이름을 듣는다면 동요할 수밖에 없으리라 확신했을 것이다. 숨기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게 사랑일 테니까. 봄볕이 나뭇가지에 하는 일이 그러하듯 거부하려 해도 저절로 꽃망울을 터뜨리게 하는 것이 사랑일 테니까. 무엇이든 움켜쥐고 흔드는 바람처럼 우리의 존재를 송두리째 떨게 하는 것이 사랑일 테니까. - P-1

한수는 내게 테이프를 돌려줄 때면 케이스 안에 짧은 메모를 끼워넣곤 했다. ‘가사는 못 알아듣겠지만, 이 노래가 나는 저번 것보다 더 가슴에 직접 꽂히는 것 같아’ 하는 식의 짤막한 감상이었다. 한수의 메모를 읽고 난 후엔 나 역시 한수가 느꼈던 감정을 맛보고 싶어져 테이프를 워크맨에 집어넣고 이어폰을 낀 채 침대에 누워 노래를 들었다. 이미 가사까지 다 외우는 노래들이었는데, 한수가 들었다고 생각하면 이상하게도 특별하게 느껴졌다. 마치 어둠 속에서 처음 발견한 노래처럼. 그러면 처음으로 울리는 새벽의 종소리 같은 새로운 감각들이 내 안에서 퍼져나갔는데, 동시에 그 한국어 노래들이 환기하는 기억은 너무나도 아득히 멀었다. 그건 참으로 모순적인 기분이었다. - P-1

"게으른 사람들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걸 배우려고 하는 대신 자기가 아는 단 한 가지 색깔로 모르는 것까지 똑같이 칠해버리려 하거든."
"그건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이번엔 내가 물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는 지극한 정성과 수고가 필요하니까." - P-1

"언니, 사람의 마음엔 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결국엔 자꾸자꾸 나아지는 쪽으로 뻗어가?" - P-1

"우린 헤어지는 게 아니야. 우리는 영원히 이어져 있으니까 넌 그곳에서 너의 역할을 하면 돼." - P-1

"엄마는 한국에선 교회를 진짜 열심히 다녔나봐. 한국에 살던 시절 가장 좋았던 추억이 동네 교회 사람들이랑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냈을 때래."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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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는 여느 남자아이들과 여러모로 달랐다. 처음엔 내가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닌가 싶었던 행동들이 사실은 수줍음 많은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한수와 대화를 나누는 몇 시간 사이에 이해하게 됐다. 낯선 사람과 말하는 걸 어려워하는 편인 듯했는데도 한수는 나에게 자신이 원하는 걸 설명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 P-1

무엇보다도 누군가가 작정하고 마음속에 품은 비밀은 아무리 가까운 사이여도 알 수 없다는 걸 나는 언니의 죽음을 통해 알고 있었다. - P-1

나를 바라보는 이모의 눈빛에는 따뜻한 애정이 담겨 있었고, 그 눈빛 앞에서는 아직 언니가 살아 있고 막내가 태어나기 전의 날들처럼 한없이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지곤 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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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밤이 바뀌면 잠이 잘 안 오지. 이모도 독일에 처음 왔을 때 그랬어. 모든 게 낯설어 밤마다 울던 때도 있었단다."
"이모가 독일에 왔을 땐 스물한 살이었다고 엄마가 그랬는데, 어른도 울어요?"
"그럼, 어른도 울지. 겉만 커다랗지 어른도 사실은 아이랑 다를 게 없거든." - P-1

"하지만 기억하렴. 그러다 힘들면 꼭 이모한테 말해야 한다. 혼자 짊어지려고 하면 안 돼. 아무리 네가 의젓하고 씩씩한 아이라도 세상에 혼자 감당해야 하는 슬픔 같은 건 없으니까. 알았지?" - P-1

물론 당시에도 나는 어른들이 내게 아무런 이야기도 해주지 않는 이유가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어른들의 사정을 다 알았지만 어른들은 내가 아무것도 몰라서 오히려 너무 많은 상상을 멈출 수 없고 그래서 괴롭다는 사실을 결코 알지 못했다. 잠을 자면 시도 때도 없이 언니가 커다란 불길 속에서 고통스럽게 타들어가는 모습을 본다는 것을, 자다 깨서 새까만 천장을 보고 있노라면 언니를 다시 만나게 해줄 수 없다면 차라리 언니가 최대한 고통을 느끼지 않고 단숨에 죽었기를 신에게 빌게 되지만 이내 신 따위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숨을 쉴 수 없을 때가 있다는 것을 어른들은 몰랐다. 언니, 나는 시디를 듣고 또 듣다가 오랜만에 언니, 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발음했다. 일주일만 지나면 해가 바뀌고 나는 언니와 동갑이 될 것이었다. 그리고 일 년 후부터는 내가 언니의 언니가 될 것이었다. 언니가 살아보지 못한 나이를 나 혼자 살게 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지만 그 역시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물론 해나에게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그 당시 나에게는 거짓말밖에는 할 것이 없었다.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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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빈이 문을 열고 나가는데 다른 문으로 하녀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레빈은 하인에게 리자베타를 불러오라고 지시한 뒤 의사를 부르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며 그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저희를 용서하소서!"라고 예기치 않게 입에 떠오른 말을 중얼거렸다. - P-1

그러나 그때는 슬픔이었고 지금은 기쁨이었다. 하지만 그 슬픔과 기쁨 모두 평범한 삶의 조건 너머에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그것들은 마치 평범한 생활들 안에서 뚫려져 있는 구멍, 그것을 통해 뭔가 숭고한 것이 흘낏 모습을 드러내는 그런 구멍 같은 것이었다. 그 숭고한 무언가를 관조하면서 우리의 영혼은 전에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높이로까지 한껏 고양되는 것이며 우리의 이성은 그 영혼을 따라갈 수 없어 한참 뒤쳐져 있게 되는 것이다. - P-1

하지만 둘 다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을 뿐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어보였다. 안나는 브론스키의 사랑이 식어간다는 사실 때문에 고통스러워했으며 브론스키는 자신이 그녀의 고통을 덜어주기는커녕 점점 더 힘들게 만들고 있다는 미안함 때문에 괴로웠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 다른 문제로 속을 끓이고 있었기에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한다는 게 불가능했고, 설사 그런 노력을 한다고 해도 둘 사이를 가깝게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더 멀어지게 만들었다.
안나에게 브론스키는 사랑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오로지 그녀만을 향해야 했다. 그녀를 향한 그의 사랑이 줄어든다는 것은 그 사랑의 일부를 다른 사람에게 돌린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 때문에 그녀는 특정한 질투의 대상이 없이 그가 만나는 모든 여자들을 질투했다. 또한 그가 자신을 버리고 결혼하고 싶어할 만한 가상의 여인을 향하여 질투했다.
특히 브론스키가 조심성 없게도 자기 어머니가 자신을 소로키나 공작의 딸과 결혼시키려 한다는 이야기를 한 뒤로는 더욱 심해졌다. - P-1

브론스키에게 쏘아붙이면서 안나는 자신이 애당초 결심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의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제할 수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가 옳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고 그에게 질 수 없었다.
브론스키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난 뭘 자랑하는 사람도 아니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아니요."
"사랑이 있어야 할 자리를 존중으로 채운 거 아닌가요?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면 솔직히 고백해야 하지 않아요?"
"정말 참을 수가 없군!" 브론스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참는 데도 한도가 있는 법이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요?"
안나는 증오로 이글거리는 브론스키의 눈을 바라보며 공포에 질려 외쳤다.
"당신이 도대체 내게서 뭘 원하는지 오히려 내가 묻고 싶소." 브론스키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원하는 건 당신의 사랑이에요! 그런데 이제 그게 사라졌어요. 모든 게 끝났어요."
그녀는 비틀거리며 방에서 나갔다.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며 생각했다.
‘그래, 모든 게 끝난 거야. 하지만 어떻게 끝을 내지?’
그녀는 거울 앞 의자에 앉아 계속 생각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에게 갑자기 출산 직후 죽음을 앞두고 느꼈던 감정이 되살아났다.
‘그래,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 죽는 거야. 죽으면 이 치욕으로부터 벗어나 구원받을 수 있을 거야. 내가 죽으면 그이는 후회하면서 나를 다시 사랑하겠지. 그리고 나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겠지.’
그가 다가오는 발소리에 그녀의 생각이 흩어졌다. 그녀는 반지를 정리하는 척하면서 등을 돌리지 않았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 P-1

그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녀는 그의 잠든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는 잠든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애정의 눈물이 흐르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깨어난다면 그는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며 자신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리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러면 그녀는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기 전에 그가 자신을 얼마나 잘못 대하고 있는지 증명하려 애를 쓰게 되리라. - P-1

"만나뵈서 정말 반가워요." 키티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키티는 안나를 향한 적개심과 그녀에게 잘 대해줘야겠다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안나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얼굴을 보자마자 적개심은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 P-1

내가 그에게 매달리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달라졌겠지.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아. 바로 그 때문에 그가 나를 혐오하고 나는 그를 미워하게 되었지만 어쩔 수 없어. - P-1

그녀는 자신이 한 짓에 공포를 느끼며 생각했다.
‘나는 어디 있는 거지? 내가 뭘 한 거지? 왜?’
그녀는 일어나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거대한 그 무엇이 그녀의 머리를 때렸고 그녀를 끌고 갔다.
‘주여, 저의 모든 것을 용서해주소서!’
그녀는 저항이 불가능함을 느끼며 기도했다.
농부 한 명이 뭔가 중얼거리며 철로 위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 희미한 빛에 그토록 수많은 비참과 사기, 고통과 악으로 가득 찬 책을 읽던 바로 그 불빛이 그 어느 때보다 밝게 타올라, 전에는 어둠에 불과했던 것들을 환히 비추어주었다. 이어서 그 불빛이 서서히 약해지더니 영원히 꺼지고 말았다. - P-1

마침내 석 달째가 되었을 때 그 책에 관한 본격 비평문이 어느 잡지에 실렸다. 하지만 필자는 교묘하게 책의 문장들을 악의적으로 인용하면서 그 책을 아예 읽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책으로 만들어버렸다. 도대체 왜 그런 글을 썼는지 의아해하던 코즈니셰프는 언젠가 그 젊은이를 만났을 때 그의 무식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그의 글에 대해 단어를 고쳐주고 다듬어준 적이 있음을 생각해냈다. 자신은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고 한 일에 대해 모욕감을 느끼고 앙심을 품었던 모양이었다. 코즈니셰프는 그 이후로 이른바 평론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게 되었다. - P-1

"한 남자로서 내가 쓸모가 있다면, 내게 삶이 아무런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적을 물리치건 내가 쓰러지건 적진에 뛰어들 힘이 충분하기도 합니다. 내 목숨을 그 무언가를 위해 바칠 수 있다니 정말 잘 됐습니다. 쓸모없을 뿐 아니라 혐오스럽기만 한 내 목숨을 말입니다."
"당신은 분명 회복될 것입니다. 형제들을 압제에서 구출해 내는 일은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시길."
코즈니셰프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브론스키가 그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저는 무기로서는 아직 쓸모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는 이미 다 끝난 몸입니다." - P-1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왜 여기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면 살아갈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알 도리가 없는 이상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리고 혹시 죽음에 그 답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삶이, 이 세상이, 무의미한 거짓과 악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 악을 피하고 악에 의존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죽음이었다.
아내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남편이며, 행복한 아버지이고, 더없이 건강한 남자인 레빈이 몇 차례 자살의 문턱에서 서성거렸다. 그는 스스로 목을 맬까봐 두려워서 밧줄을 감추었으며 권총으로 자살할 것이 두려워서 총을 지니지 않고 다녔다.
하지만 레빈은 자살하지 않은 채 삶을 지속해나갔다. 형 코즈니셰프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레빈의 그 번민이 절정에 달해 있을 때였다. - P-1

그 사람은 기독교인들을 동정하지도 않아요. 하지만 포카니치 영감(표트르는 플라톤을 그런 식으로 높여 불렀다)은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그 영감이 일꾼들 가죽을 벗겨요? 돈을 빌려주고 그 빚을 탕감해주기도 하는데요."
"아니, 왜 빚을 탕감해주는 거지?"
"나리, 세상에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있어요. 키릴로프처럼 오로지 자신의 배만 불리기 위해 사는 사람이 있지요. 하지만 포카치니 영감은 올바른 분이지요. 그 양반은 영혼을 위해 살아요. 그분은 하느님을 잊지 않고 있지요."
"하느님을 잊지 않는다니! 자신의 영혼을 위해 산다니!"
레빈이 거의 외치다시피 했다.
"그거야 진리에 따르고,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거지요. 사람들은 다 제각각이에요. 아, 나리만 해도 그 누구에게든 좋게 해주려고 하시잖아요."
"그래, 그래, 잘 가게."
레빈은 그 말을 한 뒤 지팡이를 들고 집으로 향했다. 흥분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플라톤이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진리에 따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산다는 표트르의 말을 듣는 순간 뭐라고 정의내릴 수는 없지만 너무 중요한 생각들이 레빈의 영혼 속에 갇혀 있다가 갑자기 터져 나온 것 같았다. 그 생각들은 단 하나의 목적을 향하고 있었으며 그의 정신 속에서 휘몰아쳤고, 그 광휘에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 P-1

레빈은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영혼의 상태에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농부의 말들이 그에게 마치 섬광과도 같은 효과를 냈으며 그동안 한시도 그를 떠나지 않던 단편적이고 흩어져 있던 생각들을 단 하나의 ‘전체’로 묶어주었다.
‘자신을 위해 살지 말고 하느님을 위해 산다? 우리가 정의 내릴 수 없는 하느님을 위해 산다? 도대체 그런 터무니없는 말이 어디 있는가? 얼마나 어리석고 불명확하며 명료하지 않은 말인가? 하지만 나는 그를 이해했고, 그 말의 뜻을 그와 똑같이 이해했다. 나는 내가 살아오면서 이해했던 그 무엇보다 완전히, 확실하게 이해했다. 나는 살아오면서 그것을 의심한 적이 없는 것이며, 또한 의심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이 세상 전부가, 이것 외에는 그 어느 것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이것 외에는 의심 없이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 몇백 년 전에 살았던,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농부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이 문제로 고민한 현자들이 모두 똑같이 이 ‘분명하지 않은 말’을 했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고 무엇이 좋은가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는 것이다. 나는 그들과 함께 굳건한 ‘앎’을 공유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앎’은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 ‘앎’은 이성을 초월하며 거기에는 그 어떤 인과(因果)도 개입될 수 없다. 만약 선(善)에 원인이 있다면 그건 이미 선이 아니다. 선의 결과 그 어떤 보상을 받게 된다면 그 역시 선이 아니다.’
레빈에게 일어난 이 기적은 현자건 바보건, 아이건 노인이건, 농부건 지주건, 무식한 사람이건 지식인이건, 거지건 황제건 그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레빈은 그것을 깨달았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풀밭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귀에 신비스런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런 것이 정녕 신앙일까?’
레빈은 자신에게 이런 행복이 왔음을 믿는 게 두려울 정도였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레빈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삼키며, 눈에 가득한 눈물을 두 손으로 닦으며, 기쁨에 젖어 외쳤다. - P-1

무인도에 갇히게 된다면 가져갈 세 권의 책은 무엇이냐고 묻는 『무인도의 이상적 도서관』이란 책이 있다. 오르한 파무크를 비롯한 최고 작가들이 『안나 카레니나』를 꼽았다. 소설가 김영하가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무인도에 딱 책 한 권을 들고 가게 된다면 어떤 책을 고르겠느냐는 물음에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꼽은 적도 있다. 우선 분량이 만만치 않으니 무인도에서 시간 보내는 데 제격이며 여러 번 반복해서 읽어도 재미가 있고 스토리도 단순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이 책을 꼽은 진짜 이유는 그 섬세한 심리묘사에 있다고 말했다. 아마도 텔레비전 프로에서 『안나 카레니나』라는 작품이 지니고 있는 매력을 길게 설명하기 어려우니 ‘섬세한 심리묘사’라는 압축적인 표현을 사용했을 것이다. 실제로 『안나 카레니나』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심리묘사에 초점을 맞추어 이 책을 읽고 나면 사람들 마음을 읽는 공력이 상당히 높아질 수 있다. 번지르르 겉에 덧대고 있는 위선을 읽어내게 될지도 모르고, 진짜 질투라는 게 저런 것이로구나, 감탄할 수도 있으며 사랑에 빠진 남녀의 심리에 공감하며 대리 연애를 경험할 수도 있다. 게다가 남자인 작가가 여자의 마음을 어떻게 그렇게 잘 읽어낼 수 있었는지! - P-1

살아 있는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한다. 인간도 동물이기에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이 딱 하나 있다.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정작 죽음이 코앞에 닥치면 아주 덤덤하게 그 죽음을 받아들인다. ‘동물의 왕국’ 같은 다큐멘터리 프로를 보면 금세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죽음 앞에 안달을 한다. 아무리 장수(長壽)를 하더라도, 아무리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되더라도 죽음 앞에서 초연한 사람은 아주 드물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해탈했다고도 하고, 삶과 죽음을 초월했다고도 한다. 그렇게 보면 인간과 달리 여타 동물들은 자연스럽게 해탈의 경지에 도달해 있는 셈인지도 모른다. - P-1

그는 무지에서 깨어나 ‘앎’을 획득한 것이다. 그러나 그 ‘앎’은 머리로, 이성으로 획득한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홀연 기적처럼 그의 전 존재가 체득하고 받아들인 것이다. 머리로 획득한 지식은 그 지식을 획득한 사람만의 소유물이다. 하지만 그 기적은 ‘현자건 바보건, 아이건 노인이건, 농부건 지주건, 무식한 사람이건 지식인이건, 거지건 황제건 그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은 이 세상 전부가 받아들이고 있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상이 아무리 변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하지만 ‘분명하지 않은’ 공통의 진리이다. 신비스러운 초월의 경험이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인류 공통의 진리이지만 그걸 체득하는 기적은 순전히 한 개인의 내면에서 일어난다. 그 기적은 남과 공유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그 이야기를 키티에게 하고 싶은 유혹을 물리친다. 그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인 때문이다. - P-1

그리하여 레빈처럼 그 소중한 삶을 지탱해줄 가치가 너무 간단한 단어라고 해서 실망하지 마라. 착할 선(善). 얼마나 순진하고 쉬운 단어인가? 하지만 생각해보라. 가끔 결심하고 착한 행동을 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내 지향점이 된다는 것, 지고지순의 목표가 된다는 것, 아니 내 생각과 삶 전체를 물들이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하긴 이런 게 다 필요 없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그에 푹 빠진 것으로 충분한지도 모른다. 『안나 카레니나』를 삶 자체라고 평한 문학가가 있다. 그러니 삶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한다고 삶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 게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삶을 살아내는 것이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안나 카레니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보다는, 이 작품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아는 것보다는 『안나 카레니나』를 온전히 살아내는 게 중요하니까. -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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