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그가 원래 겁이 많고 주눅이 잘 드는 성격도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우울증과도 비슷한 신경질적이고 긴장된 상태가 되었다. 자신의 내면으로만 침잠하여 모든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었기 때문에 주인아주머니뿐만 아니라 그 누구와도 마주치는 것이 두려웠다. - P11

청년이 그녀를 어딘가 독특한 시선으로 쳐다본 탓인지, 그녀의 눈에도 갑자기 또 아까처럼 수상쩍어하는 기색이 역력해졌다. - P17

라스콜니코프는 원래 사람들과 어울리는 편이 아니었고, 이미 말했듯, 최근 들어서는 특히 더 모임을 다 피했다. 하지만 지금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갑자기 사람이 아쉬워졌다. 내부에서 뭔가 새로운 것이 생겨나면서 사람을 향한 어떤 갈증도 함께 감지되었다. - P24

아까만 해도 어떻게든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순간적으로 들었지만 정작 상대방이 말을 걸어오자마자 갑자기 불쾌하고 짜증스러운 감정을 느꼈는데, 자신의 개인적인 부분을 건드리거나 혹은 그냥 그러려고 하는 낯선 사람에 대해 곧잘 맛보는 감정이었다. - P28

가난은 죄가 아니라는데, 이건 진리입니다. 술타령이 미덕이 아니라는 것도 내 잘 알고 있지만, 이건 더 말할 나위도 없는 진리지요. 하지만 극빈이라면, 형씨, 극빈은 죄랍니다. 그냥 가난한 정도라면 아직은 타고난 감정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지만 극빈한 상태라면 아무도 절대 그럴 수 없지요. 극빈하면 지팡이로 쫓아내는 것도 아니고 숫제 사람들 무리에서 빗자루로 싹 쓸어 내지요, 괜히 더 모욕을 주려고요. 이것도 옳은 일이지요, 극빈한 상태에서는 그 스스로 자신을 모욕할 태세를 갖추니까요. - P29

마르멜라도프는 이 집의 단골손님인 것이 틀림없었다. 또 미사여구를 좋아하는 성향도 분명히 온갖 종류의 낯선 사람들과 수시로 얘기를 나누는 버릇 때문에 생긴 것이리라. 어떤 술꾼들, 특히 집에서 푸대접을 받고 찬밥 신세인 술꾼들이 이런 버릇이 들면 그것은 거의 욕구로 변해 버린다. 그 때문에 그들은 술자리에서 변명을 하지 못해 안달이고 잘하면 남들의 존경까지 얻어 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 P29

실례지만, 젊은 양반, 혹시…… 음…… 아무런 가망도 없이 남에게 돈을 꾸려고 애써 본 적이 있습니까?"
"있긴 있지만…… 가망도 없이, 라는 건 무슨 뜻입니까?"
"무슨 뜻이냐면, 그야말로 가망이 없다, 즉 그래 봤자 땡전 한 푼 안 나올 줄 미리부터 알고 있다는 뜻이지요. 자, 가령 이 사람이, 건전하고 유용하기 그지없는 이 시민이 세상이 두 동강이 나도 형씨한테 돈을 꾸어 줄 리 없다는 사실을 미리부터 확실히 알고 있다고 칩시다. - P30

괜찮다마다요! 저렇게들 손가락질을 한다고 해서 당황할 나도 아니지만, 어차피 알 만한 사람은 이미 다 알고 비밀이라는 것도 없는 세상이잖습니까. 그러니 이런 것을 경멸하지 않고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아무렴 어떻습니까! 아무렴 어때요! - P31

형씨, 형씨,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불쌍히 여겨 줄 곳이 한 군데라도 있어야 한답니다! - P32

아십니까, 형씨, 내가 집사람 양말까지 팔아 술을 퍼마신 놈이라는 걸 아시냐고요? 신발이라면 어느 정도는 있을 법한 일이지만 양말을, 집사람 양말까지 팔아 마셨다니까요! - P33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더욱더 감정에 젖게 됩니다. 술을 마시는 것도 이렇게 마심으로써 연민과 감정을 추구하는 겁니다. 즐거움이 아니라 단 하나, 비애를 추구하노라……. 술을 마시는 건 고통을 두 배로 늘이고 싶기 때문이지요! - P33

그러고서 꼬박 일 년 동안 나는 경건하고 신성하게 내 도리를 다하고 이놈은 손도 대지 않았는데(그는 보드카 병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나도 감정이 있는 놈이니까요. 하지만 그 정도로 마누라가 성이 찰 리가 있나요. 하필 그때 일자리도 잃었는데, 그 역시 내 잘못이 아니라 구조 조정 탓이었고 그때 그만 술에 손을 댔지 뭡니까……! - P35

집 안에서 짐승처럼 뒹굴 때는 욕바가지뿐이었는데! 하지만 이제는 발끝으로 살금살금 걷고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더군요. ‘세묜 자하르이치께서 일하시느라 얼마나 피곤하셨으면 지금 쉬고 계시잖니, 쉿!’ 출근하기 전에는 커피를 대령하고 크림까지 끓여 주더군요! 진짜 크림을 구해다 바치기 시작했단 말입니다, 듣고 계십니까! 게다가 나를 말쑥한 제복으로 단장해 줄 11루블 50코페이카를 어디서 긁어모았는지 내가 모르겠습니까? - P41

이제야 모든 일을 사실대로 알려 주는 것은 이제 만사가 하느님의 뜻대로 느닷없이 호전되었기 때문이고, 또 두냐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애의 마음씨가 얼마나 갸륵한지를 네가 알았으면 싶어서란다. - P63

글쎄, 이 미치광이 같은 양반이 벌써 오래전부터 두냐에게 흑심을 품고 있으면서 속마음을 숨기느라 줄곧 그 애를 거칠게 대하고 멸시하는 척했던 거란다. 하긴 벌써 나이도 지긋이 든 가장으로서 그렇게 경솔한 희망을 품고 있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도 부끄럽고 또 소름 끼쳤던 나머지 저도 모르게 두냐에게 분을 퍼부었는지도 모르지. 괜히 거칠게 굴고 조롱을 일삼음으로써 자신의 속내를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고. 어쨌거나 결국엔 참지 못하고 감히 두냐에게 오만 것을 다 해 주겠다며 뻔뻔스럽고 추잡한 제안을 한 데다가, 그것도 모자라 모든 것을 버리고 그 애와 함께 다른 시골이나 뭣하면 외국에라도 가겠다고 했다지 뭐냐. 그 애가 얼마나 괴로웠을지 상상이 되니! 당장은 그 집을 뛰쳐나올 수도 없었던 것이 빚진 돈도 있거니와 마르파 페트로브나를 생각하니 부인 쪽에서 갑자기 의심을 품을 수도 있고 그리되면 가정불화를 야기하는 셈이잖니. 게다가 두네치카에게도 대단한 스캔들이 될 수 있으니, 아무래도 그래서 될 일은 아니었지. 여기에는 갖가지 이유가 많이 있어서 육 주 전만 해도 두냐는 그 소름 끼치는 집에서 도저히 벗어날 생각을 할 수 없었단다. - P63

물론, 너는 두냐를 잘 알고, 그 애가 얼마나 영리하고 성격은 또 얼마나 강단이 있는지를 알잖니. 두네치카는 웬만한 일은 거뜬히 견뎌 낼 수 있고 속도 넓어서 가장 극단적인 경우에도 강단을 잃지 않을 아이가 아니냐. - P64

꼬박 한 달 동안 우리 소도시 곳곳에 이 사건에 대한 얄궂은 소문이 떠도는 바람에, 그 경멸에 찬 눈초리와 쑥덕대는 소리 때문에 결국 두냐와 나는 교회도 갈 수 없는 지경이 되었는데, 우리가 있는 데서도 버젓이 큰 소리로 말을 주고받기도 하더구나. 알고 지내던 사람들도 모조리 우리를 멀리하고 인사조차 하지 않았을뿐더러, 내 확실히 알아냈다마는, 상점 점원과 관청 직원 몇몇이 우리에게 천박한 모욕을 주려고 우리 집 대문에 타르를 칠하기도 했고 그 일로 집주인은 우리에게 집을 비우라고 요구하게 됐지 뭐냐. - P65

그 일로 나는 병이 났지만 그래도 두네치카는 나보다 강인한 애라서 모든 것을 꾹 참아 내고 열심히 나를 위로하고 달래 주었지, 그 모습을 네가 봤더라면! 그 애는 정말 천사야! - P66

하지만 하느님의 자비 덕분에 우리의 고통은 끝이 났단다. - P66

대체로 다들 갑자기 그 애에게 각별한 존경을 표하기 시작했어. 이 모든 일로 인해 무엇보다도 뜻밖의 사건이 있었고 그 덕분에 지금은 말하자면 우리의 운명이 송두리째 바뀔 것 같구나. - P68

비단 이 일만이 아니고 대체로 누구든 사람을 잘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대할 때 차근차근 신중을 기해야 하고 나중에 가서 바로잡고 씻어 내기가 극히 힘든 과오를 범하거나 편견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 P69

허영심이 제법 강한 편이라 남이 자기 얘기를 들어 주는 것을 몹시 좋아하는 탓이지만, 사실 그런 게 큰 죄는 아니잖니. - P70

지금부터 걱정할 건 전혀 없다고, 앞으로 서로의 태도가 성실하고 올바르기만 하면 웬만한 일은 거뜬히 참아 낼 수 있다고 말이야.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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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신의 지식인 의식, 생활상의 무능, 이원론적, 정신분열적 자기 해석을 극복하지 못한다. - P313

인간이 된다는 먼 가능성은 ‘고통’을 통해서가 아니라 ‘진지함’을 상대화함으로써, 즉 ‘유머’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 P317

자살은 출구이긴 하지만, 좀 낡고 불법적인 비상 출구라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의 손보다는 삶 자체에 의해 굴복당하고 나자빠지는 쪽이 훨씬 더 고상하고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을 모든 자살자가 마음 한 켠에서는 잘 알고 있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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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내가 정직한 대답을 할 수 없는 질문만 퍼부었고, 나는 그때마다 대담한 거짓말로 응수하며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구역질이 나는 걸 참았다. - P112

오오, 아버님 어머님, 오오, 내 젊은 날의 아련하고 신성한 불빛이여, 오오, 그 수많았던 즐거움이여, 내 삶의 작업과 목표여! 이 중에서 내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회한조차 없으며, 그저 남은 것이라곤 구역질과 고통뿐. - P116

점점 가까이, 점점 또렷하게 내가 두려워하는 유령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건 집에 가는 것이었다. 내 작은 다락방으로 돌아가 절망을 가만히 응시하는 것이었다. 몇 시간 더 헤매고 다닌다 해도 그것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 P116

진지함이란 시간의 문제라네. 이것만큼은 자네에게 일러 줘야겠네. 진지함이란 시간을 과대평가하는 데서 생겨나는 거라네. 나도 한때는 시간의 가치를 과대평가한 적이 있었네. 그래서 백 살까지 살고 싶어 했지. 그러나 영원 속에선, 자네도 알다시피, 시간이란 없다네. 영원은 한순간에 불과한 것이라네. 즐거운 일을 하나쯤 할 수 있는 딱 그만한 시간이지. - P135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성인들이 있어. 성 스테파노나 성 프란체스코 같은 성인들. 때때로 난 이들의 그림이나 구세주 예수나 성모 마리아를 그린 그림을 보는데, 모두가 기만적이고 멍청한 날조된 그림들이지. 당신이 괴테의 그림을 보고 느끼는 것과 똑같이 나도 이 그림들을 보면 참을 수가 없어. 난 그렇게 우아하고 멍청한 구세주나 성 프란체스코의 초상을 볼 때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 그림을 아름답고 교훈적이라고 생각하는 걸 볼 때마다, 내게는 그것이 진짜 구세주에 대한 모욕과 같이 느껴져. 그런 멍청한 그림이 사람들에게 만족을 준다면 예수는 왜 살아서 그렇게 엄청난 고통을 겪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어. 그렇다고 해도 나의 구세주 상이나 프란체스코 상 역시 인간의 상에 불과하며, 원래의 모습에 비추어 충분한 것이 못 된다는 것도 알아. 구세주에게는 내 내면의 구세주 상도 터무니없고 불충분하게 보일 거야. 저 우아하게 꾸민 복제물들이 나에게 그렇게 보이듯이 말이야. - P139

그녀는 흐릿한 유리종 같은 나의 무감각 상태를 깨부수고 나에게 손을 내민, 그 선하고 아름답고 따뜻한 손을 내민 살아 있는 인간이었다. - P141

그녀, 이 이상한 여자 친구는 또한 성인들에 대해 이야기했고, 내가 아무리 이상하고 터무니없는 일을 한다 해도 절대 이해받지 못하는 외톨이가 아니며, 병적이고 예외적인 존재도 아니라고 일러 주었다. 내게도 형제가 있으며, 사람들이 나를 이해한다는 걸 보여 준 것이다. - P142

그녀는 관심을 가지면서도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는 어머니 같은 태도로 귀를 기울였는데, 그건 영리한 부인이 남편의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들을 때 보이는 그런 태도였다. - P143

내가 ‘검은 독수리’에서 본 그 아름답고 이상한 소녀를 만나기로 한 날은 화요일 저녁이었다. 그때까지 시간을 보내는 일이 나에게는 무척 힘들었다. - P145

그녀가 약속을 깨거나 잊을 수도 있다는 생각만 떠올려 보아도 분명히 알았다. 그러면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말이다. 세상은 다시 텅 비어 버릴 것이고, 하루하루가 우울하고 가치 없이 지나갈 것이며, 모든 것이 소멸한 무시무시한 정적이 내 주위를 완전히 둘러싸, 면도칼 이외에는 이 적막한 지옥을 탈출할 길이 없을 것이다. - P145

그러나 나에게 필요한 것, 내가 절망적으로 동경한 것은 지혜나 이해가 아니라 체험과 결단, 충격과 도약이었다. - P147

그녀는 느닷없이 깊은 진지함에서 익살스러운 유쾌함으로, 또한 그 반대로도 넘어갈 줄 알았고, 그러면서도 전혀 자신의 본래 모습을 변화시키거나 왜곡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 P150

본래 모든 사람은 서로서로 상대를 위한 거울이어서, 서로 답을 주고받고 서로 조응하는 거지. 그러나 당신 같은 기인들은 괴팍하고 쉽게 마술에 걸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눈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볼 수 없고 읽어 낼 수도 없어. 세상에 어느 것 하나 중요하게 여기지 않지. 그런 기인이 느닷없이 그를 정말로 응시하는 얼굴, 그에게 어떤 대답을 줄 것 같고 어떤 친족성을 풍기는 그런 얼굴을 발견했을 때 기쁨을 느끼는 건 당연해. - P151

하지만 즐기기 전에 우선 다른 사람의 허락부터 받으려 한다면, 당신은 정말 불쌍한 바보야. - P156

그것이 높은 지혜에서 온 것이건, 아주 단순한 천진함에 불과한 것이건, 그렇게 순간을 사는 법을 아는 사람, 그렇게 현재에 살며 상냥하고 주의 깊게 길가의 작은 꽃 하나하나를, 순간의 작은 유희적 가치 하나하나를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에게 인생은 상처를 줄 수 없는 법이다. - P157

그러면 그들이 모두 진실하다는 걸 알게 될 거야.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동물은 없어. 동물들은 당신에게 아양을 떨려고도, 어떤 감동을 주려고도 하지 않아. 연극을 하지 않는다고.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지. 돌이나 꽃처럼, 혹은 하늘에 있는 별처럼 말이야. - P160

내 나라 사람들 셋 중 둘은 그런 종류의 신문을 읽고, 매일 아침, 매일 저녁 그런 논조에 설득당하고, 경고당하고, 선동당한 나머지 불만과 악의에 차 있어. 그 모든 것의 목적과 종착점은 또 전쟁이야. 다가오는 다음 전쟁은 이번 전쟁보다 훨씬 더 끔찍할 거야. 이 모든 것은 분명하고 간단한 이야기야. 누구나 파악할 수 있고, 한 시간만 생각해도 똑같은 결론을 찾아낼 거야. 그러나 아무도 그걸 하려고 하지 않아. 아무도 다음 전쟁을 막으려 하지 않고, 아무도 자신과 자기 아이들에게 일어날, 또다시 수백만 명이 살육당할 운명을 막으려고 하지 않는 거야. 이 이상 더 값싸게 전쟁을 막는 방법이 없는데도 말이야. 한 시간만 성찰해 보고, 잠깐만 자기 자신에 침잠해 들어가, 자기 자신이 이 세상의 무질서와 악행에 얼마나 동참하고 있는지, 얼마나 책임을 나누어져야 하는지 자문해 보는 것, 아무도 그걸 하려고 들지 않는단 말이야! 그러니 상황은 변함없이 계속 그대로이고, 다음 전쟁은 수많은 사람에 의해 하루하루 착실하게 준비되고 있는 거야. - P164

사랑하는 하리, 죽음에 맞서려는 투쟁은 언제나 아름답고, 숭고하고, 놀랍고, 존경할 만한 일이야.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도 마찬가지고.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가망 없는 돈키호테 같은 짓이지. - P165

한 시간 후에 그녀는 갔다. 다음번엔 나아질 거라고 장담하면서. 내 생각은 달랐다. 내가 그토록 둔하고 감각이 없다는 데 무척 실망했던 것이다. 내가 보기엔 이번에 배운 건 아무것도 없었다. 춤을 추기 위해서는 쾌활함, 순수함, 경솔함, 감흥 같은 능력을 갖추어야 하는데 내게는 그것이 결여되어 있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다음에 만났을 땐 정말로 더 나아졌고, 슬슬 재미까지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연습이 끝났을 때 헤르미네는 이제 내가 폭스트롯을 출 수 있다고 단언했다. - P167

소녀에게 접근하는 남자는 누구나 비웃음을 당할 각오를 해야 하는 법이라고. 그러니 하리, 한번 과감히 해 봐. 최악의 경우라 해 봐야 비웃게 내버려 두면 그만이잖아. - P170

"전 지금 상대가 있는데요."라고 말하면서 그녀는 생기 넘치는 커다란 두 눈에 호기심을 가득 담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제 상대는 저쪽 바에서 죽치고 있는 것 같아요. 이리 오세요!"

나는 그녀를 감싸 안고, 그녀가 나를 쫓아 보내지 않은 것에 의아해하며 첫 스텝을 밟았다. - P171

몽상가이자 시인이었고, 내 정신적 수련과 방탕의 더없는 동지였던 헤르만과 닮았던 것이다. - P174

나는 당신이 언젠가 나를 사랑하게 만들 테지만, 서두르지는 않겠어. 우선 우린 동지니까. 우리는 서로를 인정하기 때문에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사이야. 지금 우리는 상대방에게서 배우고 같이 놀고 싶어 해. - P175

당신이 고통과 고독에 절망하여 완전히 망가진 모습으로 나와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되었던 그날 밤을 생각해 봐! 도대체 어떻게 내가 그때 당신을 알아보고 이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

"어떻게 그런 거지, 헤르미네? 얘기해 봐."

"내가 당신과 같기 때문이지. 나도 당신처럼 외톨이였고, 당신처럼 인생과 인간과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없고, 진지하게 대할 수 없기 때문이야. 인생에서 지고의 것을 요구하고, 자신의 어리석음과 조야함에 만족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지." - P175

춤도 잘 추고, 인생의 표면을 이렇게 잘 알고 있는 내가 그래도 행복하지 않다면 당신은 놀라겠지.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심오한 것들, 정신, 예술, 사상에 정통해 있는 당신이 그렇게 삶에 실망하고 있다는 데 난 정말 놀라고 있어!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끌어당긴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남매가 된 거야. 나는 당신에게 춤추고 유희를 즐기고 웃는 걸 가르쳐 줄 거야. 그러나 만족하는 걸 가르쳐 주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당신에게서 사색하고 인식하는 걸 배울 거야. 그러나 만족하는 걸 배우지는 않을 거야. - P176

"예를 들면 당신은 정신적인 능력은 고도로 발달해 있지만, 다른 작은 삶의 기술은 어느 것이건 매우 뒤처져 있어. 사상가 하리는 백 살이지만, 춤꾼 하리는 태어난 지 하루도 채 안 된 거지. 우리는 이제 춤꾼 하리를 더 개발하려는 거야.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작고, 어리석고, 성장 부진인 그의 작은 동생들도 모두." - P177

당신이 사랑을 너무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물론 그래도 되겠지. 당신은 나름의 이상적인 방식으로, 당신이 원하는 만큼 사랑할 수 있어. - P178

내가 신경을 쓰는 건 당신이 인생의 작고 가벼운 기술과 유희들을 더 잘 배워야 한다는 거야. 그 방면엔 내가 당신의 선생님이고, 과거 당신의 이상형 애인보다 더 나은 선생님이 될 거야. 날 믿어! 당신에겐 다시 예쁜 소녀와의 잠자리가 꼭 필요해, 황야의 이리 씨."

"헤르미네." 나는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날 좀 봐. 나는 늙은이라구!"

"당신은 조그만 젊은이야. 그저 때를 놓칠 뻔할 정도까지 춤 배우기를 게을리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 배우기를 게을리한 것뿐이야. 이상적이고 비극적인 사랑, 당신은 그것을 틀림없이 잘할 수 있을 거야. 나는 확신해. 또 그 점을 존경해! 이제 당신은 좀 평범하게 인간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배우는 거야. 벌써 첫발은 내디딘 셈이지. 지금 당장 무도회에 가도 손색이 없으니까. - P178

그리하여 나는 이제 눈앞에 있는 그림을 보듯 지금까지의 나의 개성이라는 것이 하나의 망상에 지나지 않음을 똑똑히 보았다. 나는 우연히 잘할 수 있었던 서너 가지 능력과 활동만을 정당화하면서 하리라고 하는 사내의 상(像)을 그려 내어 본래 문학, 음악, 철학에 지극히 빈틈없는 교양을 갖춘 전문가인 그자의 삶을 살아왔던 것이고, 그러면서 내 개성의 나머지 부분, 즉 그 밖의 모든 능력과 충동과 노력의 카오스를 부담스럽게 느껴 ‘황야의 이리’라고 불러 왔던 것이다. - P179

음악을 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할러 씨.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음악을 한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바로 그겁니다. 내가 바흐와 하이든의 전곡을 외고 있고, 그것에 대해 아주 뛰어난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으로는 아무에게도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트럼펫을 잡고 경쾌한 시미 춤곡을 불어 대면, 이 곡이 훌륭하건 보잘것없건 상관없이 사람들을 즐겁게 해 줍니다. 그것이 사람들의 다리를 움직이게 하고 피를 관류하는 거지요. 중요한 건 바로 이겁니다. - P184

나는 자주 이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한번 현실을 함께 형상화하겠다는 욕망, 언제나 그저 머릿속으로 미학과 공예에 골몰하는 대신 언젠가는 진지하고 책임감 있게 행동하겠다는 강렬한 동경을 느끼는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러나 그건 항상 체념으로, 운명에 대한 복종으로 끝났다. 장군들과 산업 자본가들의 말이 옳았던 것이다. 우리 같은 ‘정신주의자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고, 현실에 적응하지도 못하고 책임감도 없는 불필요한 존재, 머리가 복잡한 한 떼의 수다쟁이들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P189

그러나 또 어떤 이들은(마리아도 여기 속하는데) 사랑에 탁월한 재능이 있고, 사랑을 갈망하는데, 이들은 대개 사랑에서 양성과 모두 관계한다. 그들은 오로지 사랑 때문에 살고, 돈을 지불하는 공식적인 친구들과는 별도로 또 다른 사람과 연애를 한다. - P192

책을 읽지 않고, 독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차이콥스키와 베토벤을 구별할 줄 모르는 여자와 한 시간 이상 사랑한다는 건 전혀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마리아는 교양이 없었지만, 그녀에겐 교양과 같은 에움길이나 대용품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모든 문제는 직접적인 감각에서 나왔으니까. - P198

많은 성인이 처음엔 사악한 죄인이었어. 죄 또한 신성에 이르는 길일 수 있는 거야. 죄와 악덕도 말이야. - P213

이날 밤 무도회에서 내가 겪은 것은, 처녀나 학생이면 누구나 다 해 본 것일 테지만, 나에겐 오십 평생에 처음 겪은 체험이었다. 그건 축제의 체험이었고, 축제에 모인 사람들의 도취였으며, 무리 속에 낀 개체의 몰락의 비밀, 환희의 신비스러운 합일의 비밀이었다. - P234

그녀는 나를 사로잡기 위해 더 이상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녀의 것이었다. - P238

그는 우리에게 아주 다정하게 눈짓을 보냈다. - P240

나는 당신 속에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당신에게 줄 수 없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열어 드릴 수 있는 건 오로지 당신 자신의 영혼의 화랑뿐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드릴 수 있는 건 기회와 자극과 열쇠일 뿐, 그 밖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당신이 당신 자신의 세계를 볼 수 있도록 도와드릴 뿐입니다. - P243

그리고 모든 고급 유머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을 때 시작됩니다. - P246

"구스타프." 나는 행복에 겨워 소리쳤다. "맙소사, 너를 다시 만나게 되다니! 도대체 어떻게 지내 온 거야?"

그는 소년 시절과 똑같이 좀 화난 듯한 묘한 웃음을 지었다.

"이 멍청아, 만나자마자 질문이냐? 나는 신학 교수가 됐어. 이제 알겠지. 그런데 지금은 신학이고 뭐고 더 이상 소용없지. 전쟁이 전부지. 자 이리 와 봐!" - P252

나의 선배 루터는 당시 농민들에 맞서 영주와 부자들을 도왔지만, 우리는 지금 그것을 조금 수정하려고 하는 거야. - P252

당신은 검사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검사가 될 수 있는지 나는 늘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을,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을 고발하고 처벌하는 일을 밥벌이로 삼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렇네. 나는 나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네. 그게 내 직무니까. - P257

어머니가 나를 낳음으로써, 나는 죄를 짊어진 것입니다. 살아야 한다는 선고를 받고, 한 국가의 국민이 되어야 하고, 군인이 되어야 하고, 사람을 죽여야 하고, 군비를 위해 세금을 내야 하는 의무를 짊어진 겁니다. - P258

고차원적 의미에서 보면 광기가 모든 지혜의 출발점이듯이, 정신 분열은 모든 예술, 모든 환상의 출발점이오. - P269

나는 금방 알아챘다. 그녀가 나를 좋아하고, 이 만남은 그녀에게도 나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 P276

별로 재주가 없는 사람도 몇백 년 떠돌아다니다 보면 성숙하는 법이다. - P289

남자도 여자도 아닌, 젊지도 늙지도 않은 우리

우리의 영원한 존재는 싸늘하게 변치 않고

우리의 영원한 웃음은 싸늘하게 별 되어 빛나리. - P293

헤세의 문학도 시대사의 변화에 완전히 초연할 수는 없었고, 나아가 급변하는 시대 상황에 대한 나름의 대응 양식이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 P308

더욱 많은 세계를, 결국은 이 세계 전체를 고통스럽게 확장된 자신의 영혼에 받아들인" ‘불멸의 존재’의 본보기를 좇아 내면의 본원적인 다원성으로 돌파해 들어가거나, - P312

할러는 여러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이 인물들은 카를 구스타프 융의 심리학에서 말하는 억압되어 있는 할러의 집단 무의식의 소인(素因)의 원형들을 대표한다.(헤세는 당시에 『데미안』을 집필하던 때와 마찬가지로 융의 제자인 심리학자 랑 박사에게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었다.) 이들은 할러가 내면적 다원성을 발견하도록 도와준다. 할러는 절망의 정점에서 자살을 목전에 두고 고급 창녀 헤르미네를 만난다. 그녀를 통해 대도시의 또 다른 반쪽 세계, 즉 향락적인 삶과 접하게 된다. - 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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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명예욕이라곤 털끝만치도 없어서, 결코 사람들 사이에서 두드러져 보이거나 다른 사람을 설득하거나 혹은 논쟁하여 이기기를 바라지 않는 인간이었다. - P16

내가 황야의 이리의 삶에 대해 아는 바라곤 보잘것없지만, 여러모로 보아 그가 자애롭지만 매우 엄격하고 신앙심이 깊은 부모와 교사들에게 교육을 받았고, 이 교육의 원칙은 ‘의지의 파괴’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개성의 부정과 의지의 파괴는 이 학생에게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너무나 강인하고 굴하지 않는 성격을 지녔고, 너무나 자긍심이 강하고 정신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부모와 교사들은 그의 개성을 죽이지는 못하고, 다만 자신을 증오하도록 가르치는 데에만 성공한 셈이었다. - P20

그는 평생에 걸쳐 자신의 천재적인 상상력과 강인한 사고력 모두를 이 순수하고 순결한 대상, 즉 자기 자신을 증오하는 데 바쳤던 것이다. 그는 모든 풍자, 비판, 악의, 그리고 가능한 모든 증오를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자기 자신을 향해 겨누었던 것인데, 이 점에서 그는 뭐니뭐니 해도 철두철미한 기독교인이었으며 순교자였다. - P20

그는 항상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사랑했고, 그들에게 공정했으며, 그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진지하게 거의 영웅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 그도 그럴 것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율이 자신에 대한 증오 못지않게 마음속 깊이 주입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그의 생애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본보기였으며, 자기 증오는 지나친 이기심과 똑같아서 종국에는 끔찍한 고립과 절망을 낳을 뿐이라는 사실을 예시해 주는 것이었다. - P20

나의 염탐꾼 짓을 정당화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지적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긴 하나 정말이지 빈둥빈둥하며 규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생활의 그 모든 흔적이 처음엔 혐오감과 불신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다. 나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시민적인 인간으로 일과 정확한 시간 계획에 익숙해져 있을 뿐 아니라 금주가, 금연가이기도 해서 할러의 방에 있는 저 술병들이 저 화가풍(畵家風)의 무질서보다도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 P22

한번은 지나가는 말로, 몇 년 전부터 소화 기능이 정상이 아니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다고 말한 적도 있다. 나는 그것이 무엇보다도 음주 탓이라고 생각했다. - P23

나는 십 분쯤 신문을 읽으며, 무책임한 인간들의 정신이 눈을 통해 나의 내면으로 흘러들어 오는 걸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런 인간들은 다른 사람이 한 말을 입에 가득 넣고 씹다가, 소화도 시키지 못하고 다시 내뱉는다. - P50

사람들은 하리가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그가 특별히 불행했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물론 하리 자신은 그렇게 생각할 테지만 말이다. 누구나 자기에게 닥친 불행이 가장 큰 불행이라고 여기는 법이니까.) 누구에게도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자기 내부에 이리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도 그것 때문에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리고 아무리 불행한 삶도 나름의 행복한 시간이 있는 법이다. 모래와 자갈 사이에서도 작은 행복의 꽃은 핀다. - P62

권력을 가진 자는 권력 때문에 몰락하고, 돈을 가진 자는 돈 때문에, 굴종하는 자는 굴종 때문에, 쾌락을 좇는 자는 쾌락 때문에 몰락하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황야의 이리도 그의 자유 때문에 몰락했다. - P66

모든 강점이 또한 약점이 될 수 있듯이(아니 사실 강점이 곧장 약점이 되는 때도 많다.), - P70

‘나는 한 인간이 어디까지 견뎌 낼 수 있는지 궁금하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한계점에 이르면, 나는 문을 열고 빠져나가기만 하면 된다.’ 많은 자살자가 이런 생각에서 엄청난 힘을 얻는 것이다. - P70

자살은 출구이긴 하지만, 좀 낡고 불법적인 비상 출구라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의 손보다는 삶 자체에 의해 굴복당하고 나자빠지는 쪽이 훨씬 더 고상하고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을 모든 자살자가 마음 한 켠에서는 잘 알고 있다. - P70

‘시민적인 것’은 언제나 존재하는 인간적인 상태로서 균형을 이루려는 시도이고, 인간 행동의 수많은 극단과 대립 쌍 사이에서 중용을 구하려는 노력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대립 쌍 중 하나, 이를테면 성자와 탕아의 대립 쌍을 예로 들어 보면 이 비유가 금방 이해될 것이다. 인간은 정신적인 것이나 신에 접근하려는 노력이나 거룩한 이상에 완전히 자신을 바칠 수 있다. 또한 인간은 거꾸로 본능적인 생활이나 감각의 요구에 온몸을 바쳐 순간적인 쾌락을 얻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일 수도 있다. 한쪽 길은 정신의 순교자인 성자에게로, 신에 대한 헌신으로 통하고, 다른 쪽 길은 본능의 순교자인 탕아에게로, 퇴폐로의 탐닉으로 통한다. 시민은 이 양자의 중간쯤에서 적당히 살아가고자 한다. - P73

자아를 희생해야만 강렬하게 살 수 있다. 그런데 시민은 자아를(물론 발육 부진의 자아에 불과한데도) 최고의 가치로 삼는다. - P74

이런 방향에서 황야의 이리의 정신을 살펴보면, 그는 고도의 개성화 때문에 시민이 될 수 없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개성화가 고도로 진행되면, 개성은 자아에 반역하고 나아가 자아를 파괴하려는 경향을 띠기 때문이다. 그는 성자 쪽으로도 탕아 쪽으로도 나아갈 수 있는 강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나, 어딘가 허약한 구석이 있어서 혹은 게으르기 때문에 자유롭고 거친 세계로 도약할 수 없고 시민 사회라는 무겁고 버거우면서도 포근한 별에 사로잡혀 있다. 이것이 세상 속에 있는 그의 상태이고, 그가 세상과 얽혀 있는 모습이다. 대부분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이런 유형에 속한다. 이 중에서 가장 강인한 자들만이 시민의 땅의 대기를 뚫고 우주에 닿는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체념하거나 타협하고, 시민 사회를 경멸하면서도 거기에 귀속되어서, 결국은 살아남기 위하여 그 사회를 긍정함으로써 시민 사회를 강화하고 찬미하고 만다. - P76

가장 위대한 일을 행하라는 소명을 받았으나 이를 저지당한 비극적인 사람들과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으나 불행한 사람들의 탁월한 발명품인 유머, 오로지(아마도 인간의 가장 독특하고 천재적인 업적일 터인) 유머만이 이 불가능한 일을 실현할 수 있다. - P78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미개한 흑인이나 백치까지도, 그 존재를 두세 개의 핵심 요소로 설명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하리처럼 지극히 복잡한 인간을 인간과 이리로 소박하게 나누어 설명하려는 것은 가망 없는 유치한 시도이다. 하리는 두 개의 존재가 아니라, 수백 수천의 존재로 이루어져 있다. 그의 삶은 (모든 사람의 삶이 그렇듯이) 이를테면 본능과 정신 같은 두 개의 극단 사이에서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수천의, 무수한 쌍의 극단 사이에서 진동하는 것이다. - P81

그러나 실제로 어떤 자아도, 그것이 아무리 소박한 것이라 해도, 하나의 통일체가 아니라 지극히 다양한 세계, 별들이 빛나는 작은 하늘, 형식과 단계와 상태들의 혼돈, 유산과 가능성의 카오스이다. 사람들이 이러한 혼돈을 통일체로 보고, 자아가 마치 확고한 형태와 분명한 윤곽을 지닌 소박한 현상인 양 말하는 것은 기만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만을 누구나 (심지어 최고의 인간까지도) 마치 당연한 것처럼 행한다. 이 망상은 호흡하거나 음식을 먹는 것처럼 삶에 꼭 필요한 요구인 것 같다. - P83

모든 인간은 육체적으로는 하나이지만 정신적으로는 결코 하나가 아니다. - P83

그런데도 이리가 되기를 갈망하는 사람은 ‘아, 아직도 어린아이라면 얼마나 행복할까!’라고 노래한 사내와 똑같이 건망증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다. 행복한 유년을 노래하는, 호감은 가지만 감상적인 그 사내는 자연으로, 순수로, 근본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지만, 아이들도 결코 행복하지 않으며 많은 갈등과 분열과 고민을 겪는다는 것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다. - P89

창조되기 이전의 순수 상태로, 신에게로 이르는 길은 뒤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리나 어린아이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죄 속으로 깊이 빠져드는 것, 즉 점점 더 인간이 되어 가는 것이다. 불쌍한 황야의 이리인 너에게는 자살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인간이 된다’는 멀고도 힘겨운 고난의 길을 가야 할 것이고, 너의 이원성을 다원화하고, 너의 복잡성을 훨씬 더 고도화해야 할 것이다. 언젠가는 마침내 평온함에 이르기 위해서 너의 세상을 좁히고, 너의 영혼을 단순화하는 대신 더욱 많은 세계를, 결국은 이 세계 전체를 너의 고통스럽게 확장된 영혼에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부처를 비롯한 모든 위대한 인간들은 이 길을 걸었다. 어떤 이는 깨닫고서 어떤 이는 깨닫지 못한 채 자기가 갈 수 있는 데까지 걸어갔던 것이다. 탄생이란 모든 것에서 분리되어 신과 새로운 경계를 짓고 격리됨을 의미하고, 고통 속에서 새롭게 생성됨을 의미한다. 모든 것으로 되돌아간다는 것, 고통스러운 개성화를 지양한다는 것, 즉 신이 된다는 것은 그 모든 것을 다시 포용할 수 있을 만큼 정신을 넓히는 것을 의미한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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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골드문트에겐 젊은이다운 단아함과 소년 같은 천진함이 남아 있어서 많은 사람의 호감을 샀다. 하지만 근래 몇 해 사이에 그런 소년티는 점차 사라져 갔다. 그는 아름답고 강건한 사나이가 되었고, 여자들이 무척이나 그를 탐하는 한편 남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인기가 없어졌다. 나르치스가 수도원 시절의 단잠에서 그를 깨워 주고 세상과 방랑 생활이 그를 주물러 놓은 이래로 그의 정서와 내면도 상당히 변했다. 수도원 생도 시절의 그는 귀엽고 부드러웠으며, 모든 이에게 사랑받는 독실하고 봉사심 강한 소년이었다. 그러나 이미 오래전부터 그는 완연히 딴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르치스는 그를 각성시켜 주었고, 여자들은 그에게 앎을 주었으며, 방랑 생활은 그에게서 앳된 티를 없애 주었다. 그에겐 친구가 없었다. 그의 마음은 여자들한테 쏠려 있었다. - P255

여자들은 쉽사리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갈망의 눈빛 하나로 충분했다. 그는 여자의 유혹에 맞서기 힘들었고, 아무리 조용한 유혹에도 응답을 보냈다. 그는 아름다움에 대해 남달리 섬세한 감수성을 지녔고 또 늘 이제 막 청춘의 봄을 맞이한 꽃다운 나이의 처녀를 가장 좋아했지만, 그러면서도 별로 아름답지도 않고 젊지도 않은 여자들의 접촉과 유혹에도 응했다. 춤판 같은 데서 그는 나이가 차고 용기도 없어서 아무도 원하지 않는 그런 처녀한테 매달리기도 했다. 그는 그런 여성에게 일단 동정심을 느끼면서 호감을 가졌지만, 그것은 단지 동정심 때문만은 아니고 영원히 식을 줄 모르는 호기심 때문이기도 했다. 그가 어떤 여자한테 빠져들기 시작하면 ─ 몇 주 동안 좋아하든 단 몇 시간 동안 좋아하든 간에 ─ 그 순간부터 그 여자는 그에게 아름다운 존재가 되었고,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그리고 경험으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여자는 누구나 아름다운 존재이며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능력이 있었다. 또 남자들한테 주목받지 못하고 눈에 띄지 않는 여자도 엄청난 정열을 불사르며 자신을 바칠 수 있고, 꽃다운 시절을 넘긴 여자도 단순히 모성애 이상의 슬프고도 달콤한 애틋함을 보여 줄 수 있었다. 여자는 누구나 나름의 비밀과 매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이 펼쳐지면 상대방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다. 젊음이나 아름다움이 모자라더라도 그 어떤 독특한 몸짓에 의해 상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물론 누구나 골드문트를 오랫동안 붙잡아 두지는 못했다. 그는 아주 젊고 아름다운 여자라고 해서 아름답지 않은 여자를 대할 때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애정을 베푼다거나 더 고마워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결코 절반의 사랑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사흘 또는 열흘 밤 동안 사랑을 나누고서야 제대로 결합하는 여자가 있는가 하면 또 단번에 싫증이 나고 잊히는 여자도 있었다. - P255

골드문트에게 사랑의 쾌락은 진정으로 인생을 따뜻하게 해 주고 가치로 가득 채워 주는 유일한 계기였다. 명예욕을 몰랐기에 그에겐 주교(主敎)나 거지나 아무 차이가 없었다. 장사나 재산이 그의 마음을 끌지도 못했다. 그는 그런 것을 경멸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털끝만치도 돈벌이에 자기 인생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으며, 가끔 풍족하게 버는 돈을 아무 생각 없이 탕진했다. 여자들의 사랑, 이성(異姓) 간의 유희, 그것이 그에겐 가장 소중했다. - P256

그리고 그가 곧잘 슬픔과 권태에 빠져드는 성향이 생긴 것도 그 핵심을 따져 보면 쾌락의 무상함과 덧없음을 경험한 데서 비롯되었다. 사랑의 쾌감은 순식간에 피어올라 황홀경에 빠지게 하고는 짧게 갈망에 불탔다가 금방 꺼지고 말았다. 골드문트는 그러한 과정 속에 모든 체험의 핵심이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골드문트에겐 인생의 모든 환희와 고뇌를 말해 주는 상징이 되었다. 그는 사랑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런 비애와 무상함에서 느끼는 전율에 자신을 내맡길 수 있었다. 그러한 비애도 곧 사랑이요, 쾌감이었던 것이다. 더없이 행복한 절정의 최고조에 다다른 순간에 사랑의 환희가 확실해졌다가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다시 사멸할 수밖에 없듯이, 너무나 내밀한 고독과 슬픔에 잠겨 있는 순간도 다시금 인생의 밝은 측면에 새로이 몰입하고픈 욕구에 의해 느닷없이 삼켜지고 마는 것이다. 죽음과 쾌락은 하나였다. - P257

내일이나 모레쯤이면 다시 세상은 좋아질 것이고, 훌륭해 보일 것이다. - P270

그가 한때 좋아했던 여성들의 몽상 속에 빅토르라는 인간이 아직 남아 있을까? - P271

제가 원하는 것은 생생한 삶을 맛보고 마음대로 떠돌아다니는 것입니다. - P274

적어도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았다! - P288

뭔가를 소유하면서 정착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방랑자를 미워하고 경멸하며 두려워한다. 그런 사람들은 모든 존재가 덧없고 일체의 생명이 끊임없이 시들어 간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싶지 않고, 우리를 둘러싼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가차 없이 냉혹한 죽음을 상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 P292

벌써 세상의 모든 현인과 성인들이 그런 문제 때문에 머리를 싸매고 생각했었지. 오래 지속되는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아. - P317

자신의 영혼이 순진함을 잃어버린 것이 슬펐다. - P324

로베르트가 선량한 녀석이라 해도 이젠 싫증이 났다. 그는 너무 비겁하고 쩨쩨했으며, 운명이 엇갈리고 충격이 줄을 잇는 이 시기에는 도저히 어울리기 힘든 친구였던 것이다. - P326

사랑하는 주님, 어째서 저희 인간을 이렇게 만드셨나이까? - P342

그제야 울음이 복받쳤다. 그는 앉아서 울었다. 손등과 무릎 위로 따스한 눈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그는 세상을 뜬 스승을 생각하며 울었고, 리즈베트의 잃어버린 아름다움을 생각하며 울었다. - P351

이 절망감 또한 언젠가는 그렇게 시들까? 그렇다. 틀림없이 이 고통과 처참한 심경 역시 언젠가는 아득한 옛적의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언젠가는 지쳐서 이런 감정 역시 잊히고 말 것이다. 영원히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고뇌조차도. - P353

이 도시에서 그래도 누군가가 아직 자기를 알아보고 좋아한다는 사실이 기뻤다. - P354

그림 그리기를 통해 그의 마음을 짓누르던 우울함과 정체감 그리고 복잡한 심사가 풀리고 누그러졌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만큼은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잊을 수 있었고, 그의 세계는 제도판과 하얀 종이 그리고 밤중의 촛불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 P358

그렇다! 모든 사람의 삶은 그 두 가지가 서로 뒤섞일 때만, 이 무미건조한 양자택일로 인해 삶이 분열되지 않을 때만 의미가 있을 것이다! 예술을 창작하면서도 인생을 그 대가로 지불하지 않아야 한다! 인생을 즐기면서도 숭고한 창조 정신을 단념하지 않아야 한다. 그게 진정 불가능한 것일까? - P373

아그네스와 간밤의 일을 생각하기도 했다. - P375

비밀 없는 사랑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위험 없는 사랑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 P376

잠이 든 한두 시간 동안 그는 비참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P384

천국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인지, 하느님 아버지와 최후의 심판과 영원한 삶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문제에 관해서는 모든 신념을 잃은 터였다.
영원한 삶이 있든 없든 그것이 그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이 불확실하고도 덧없는 삶뿐이었다. 숨을 쉬고, 살아 있음을 피부로 느끼고, 오직 살아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P385

나는 늘 조물주를 완벽한 존재로 경배하긴 했지만 피조물이 완벽하다고 한 적은 없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을 한 번도 부인한 적은 없어. 진정한 사상가라면 이 세상의 삶이 조화롭고 정의롭다거나 인간이 선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네. 오히려 인간의 마음속에서 꾸며 내고 지어 내는 것이 악하다는 것은 성경 말씀에서도 강조하고 있어. 우리는 그 말씀이 옳다는 것을 날마다 경험하고 있지. - P402

세상이 온통 죽음과 공포로 가득 차 있고, 그래서 쾌락을 도피처로 삼는단 말이로군. 하지만 그런 쾌락은 오래가지 못하는 법일세. - P404

사람들이 벌이는 바보짓과 죽음의 무도 가운데서도 뭔가 오래도록 남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 그게 바로 예술 작품이었어. 예술 작품 역시 언젠가는 사라지겠지. 불타거나 망가지거나 파괴되겠지. 그래도 예술 작품은 인간의 일생보다 훨씬 오래 남고, 덧없는 순간을 넘어 성스러운 형상이 충만한 조용한 왕국을 이룬단 말일세. 그런 작업에 일조하는 것이 나에겐 다행히 위로가 되었던 것 같네. 그것은 덧없이 사라지는 것에 영원의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 P405

그런 걱정조차 오히려 달콤할 정도였다. - P426

나는 그저 의례적으로 예술을 높이 평가하긴 했지만 실은 교만하게도 예술을 얕잡아 보았었네. 그런데 인식에 도달하는 길이 얼마나 다양한지 이제야 알 것 같네. 또 정신의 길이 유일한 길은 아니며 어쩌면 최상의 길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네. - P436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평화란 존재하지 않아. 물론 평화가 있긴 하지만, 우리의 마음속에 늘 깃들어 있는,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 그런 평화란 존재하지 않는 법일세.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평화는 잠시도 마음을 늦추지 않고 끊임없이 싸워서 얻어지는 평화, 나날이 새롭게 쟁취해야만 하는 그런 평화뿐일세. - P438

하지만 그렇게 보이는 모습도 실은 싸움과 희생을 통해 얻어지는 걸세. 인생을 제대로 사는 사람이라면 다 마찬가지겠지. - P438

엄청난 갈등과 고통에 시달렸던 이 예술가는 현재와 미래의 무수한 인간들을 위해 그들이 겪을 고통과 노력의 비유적 형상을 보여 준 것은 아닐까? - P450

어쩌면 골드문트가 이 처녀를 유혹했을지도 모르고, 또 어쩌면 속이고 버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골드문트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남편보다도 더 진실하게 그녀를 자신의 영혼 속에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 P452

어릴 적이나 학생 시절에는 자네처럼 지성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네. 그런데 내 소명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자네가 깨우쳐 주었지. 그러고는 삶의 다른 쪽에, 감각의 세계에 투신하기 시작했네. 여자들 덕분에 관능의 세계에서 쉽게 쾌락을 얻을 수 있었지. 여자들은 호의와 욕망이 넘쳐흘렀지. - P463

그녀는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잡아뗐다네! 나는 그녀와 어울리기에는 너무 늙었던 게지. 그녀에겐 내가 더 이상 매력이 없었고, 나한테 싫증이 나고 아무 기대도 없었던 걸세. - P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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