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골드문트에겐 젊은이다운 단아함과 소년 같은 천진함이 남아 있어서 많은 사람의 호감을 샀다. 하지만 근래 몇 해 사이에 그런 소년티는 점차 사라져 갔다. 그는 아름답고 강건한 사나이가 되었고, 여자들이 무척이나 그를 탐하는 한편 남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인기가 없어졌다. 나르치스가 수도원 시절의 단잠에서 그를 깨워 주고 세상과 방랑 생활이 그를 주물러 놓은 이래로 그의 정서와 내면도 상당히 변했다. 수도원 생도 시절의 그는 귀엽고 부드러웠으며, 모든 이에게 사랑받는 독실하고 봉사심 강한 소년이었다. 그러나 이미 오래전부터 그는 완연히 딴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르치스는 그를 각성시켜 주었고, 여자들은 그에게 앎을 주었으며, 방랑 생활은 그에게서 앳된 티를 없애 주었다. 그에겐 친구가 없었다. 그의 마음은 여자들한테 쏠려 있었다. - P255

여자들은 쉽사리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갈망의 눈빛 하나로 충분했다. 그는 여자의 유혹에 맞서기 힘들었고, 아무리 조용한 유혹에도 응답을 보냈다. 그는 아름다움에 대해 남달리 섬세한 감수성을 지녔고 또 늘 이제 막 청춘의 봄을 맞이한 꽃다운 나이의 처녀를 가장 좋아했지만, 그러면서도 별로 아름답지도 않고 젊지도 않은 여자들의 접촉과 유혹에도 응했다. 춤판 같은 데서 그는 나이가 차고 용기도 없어서 아무도 원하지 않는 그런 처녀한테 매달리기도 했다. 그는 그런 여성에게 일단 동정심을 느끼면서 호감을 가졌지만, 그것은 단지 동정심 때문만은 아니고 영원히 식을 줄 모르는 호기심 때문이기도 했다. 그가 어떤 여자한테 빠져들기 시작하면 ─ 몇 주 동안 좋아하든 단 몇 시간 동안 좋아하든 간에 ─ 그 순간부터 그 여자는 그에게 아름다운 존재가 되었고,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그리고 경험으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여자는 누구나 아름다운 존재이며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능력이 있었다. 또 남자들한테 주목받지 못하고 눈에 띄지 않는 여자도 엄청난 정열을 불사르며 자신을 바칠 수 있고, 꽃다운 시절을 넘긴 여자도 단순히 모성애 이상의 슬프고도 달콤한 애틋함을 보여 줄 수 있었다. 여자는 누구나 나름의 비밀과 매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이 펼쳐지면 상대방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다. 젊음이나 아름다움이 모자라더라도 그 어떤 독특한 몸짓에 의해 상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물론 누구나 골드문트를 오랫동안 붙잡아 두지는 못했다. 그는 아주 젊고 아름다운 여자라고 해서 아름답지 않은 여자를 대할 때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애정을 베푼다거나 더 고마워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결코 절반의 사랑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사흘 또는 열흘 밤 동안 사랑을 나누고서야 제대로 결합하는 여자가 있는가 하면 또 단번에 싫증이 나고 잊히는 여자도 있었다. - P255

골드문트에게 사랑의 쾌락은 진정으로 인생을 따뜻하게 해 주고 가치로 가득 채워 주는 유일한 계기였다. 명예욕을 몰랐기에 그에겐 주교(主敎)나 거지나 아무 차이가 없었다. 장사나 재산이 그의 마음을 끌지도 못했다. 그는 그런 것을 경멸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털끝만치도 돈벌이에 자기 인생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으며, 가끔 풍족하게 버는 돈을 아무 생각 없이 탕진했다. 여자들의 사랑, 이성(異姓) 간의 유희, 그것이 그에겐 가장 소중했다. - P256

그리고 그가 곧잘 슬픔과 권태에 빠져드는 성향이 생긴 것도 그 핵심을 따져 보면 쾌락의 무상함과 덧없음을 경험한 데서 비롯되었다. 사랑의 쾌감은 순식간에 피어올라 황홀경에 빠지게 하고는 짧게 갈망에 불탔다가 금방 꺼지고 말았다. 골드문트는 그러한 과정 속에 모든 체험의 핵심이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골드문트에겐 인생의 모든 환희와 고뇌를 말해 주는 상징이 되었다. 그는 사랑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런 비애와 무상함에서 느끼는 전율에 자신을 내맡길 수 있었다. 그러한 비애도 곧 사랑이요, 쾌감이었던 것이다. 더없이 행복한 절정의 최고조에 다다른 순간에 사랑의 환희가 확실해졌다가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다시 사멸할 수밖에 없듯이, 너무나 내밀한 고독과 슬픔에 잠겨 있는 순간도 다시금 인생의 밝은 측면에 새로이 몰입하고픈 욕구에 의해 느닷없이 삼켜지고 마는 것이다. 죽음과 쾌락은 하나였다. - P257

내일이나 모레쯤이면 다시 세상은 좋아질 것이고, 훌륭해 보일 것이다. - P270

그가 한때 좋아했던 여성들의 몽상 속에 빅토르라는 인간이 아직 남아 있을까? - P271

제가 원하는 것은 생생한 삶을 맛보고 마음대로 떠돌아다니는 것입니다. - P274

적어도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았다! - P288

뭔가를 소유하면서 정착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방랑자를 미워하고 경멸하며 두려워한다. 그런 사람들은 모든 존재가 덧없고 일체의 생명이 끊임없이 시들어 간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싶지 않고, 우리를 둘러싼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가차 없이 냉혹한 죽음을 상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 P292

벌써 세상의 모든 현인과 성인들이 그런 문제 때문에 머리를 싸매고 생각했었지. 오래 지속되는 행복이란 존재하지 않아. - P317

자신의 영혼이 순진함을 잃어버린 것이 슬펐다. - P324

로베르트가 선량한 녀석이라 해도 이젠 싫증이 났다. 그는 너무 비겁하고 쩨쩨했으며, 운명이 엇갈리고 충격이 줄을 잇는 이 시기에는 도저히 어울리기 힘든 친구였던 것이다. - P326

사랑하는 주님, 어째서 저희 인간을 이렇게 만드셨나이까? - P342

그제야 울음이 복받쳤다. 그는 앉아서 울었다. 손등과 무릎 위로 따스한 눈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그는 세상을 뜬 스승을 생각하며 울었고, 리즈베트의 잃어버린 아름다움을 생각하며 울었다. - P351

이 절망감 또한 언젠가는 그렇게 시들까? 그렇다. 틀림없이 이 고통과 처참한 심경 역시 언젠가는 아득한 옛적의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언젠가는 지쳐서 이런 감정 역시 잊히고 말 것이다. 영원히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고뇌조차도. - P353

이 도시에서 그래도 누군가가 아직 자기를 알아보고 좋아한다는 사실이 기뻤다. - P354

그림 그리기를 통해 그의 마음을 짓누르던 우울함과 정체감 그리고 복잡한 심사가 풀리고 누그러졌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만큼은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잊을 수 있었고, 그의 세계는 제도판과 하얀 종이 그리고 밤중의 촛불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 P358

그렇다! 모든 사람의 삶은 그 두 가지가 서로 뒤섞일 때만, 이 무미건조한 양자택일로 인해 삶이 분열되지 않을 때만 의미가 있을 것이다! 예술을 창작하면서도 인생을 그 대가로 지불하지 않아야 한다! 인생을 즐기면서도 숭고한 창조 정신을 단념하지 않아야 한다. 그게 진정 불가능한 것일까? - P373

아그네스와 간밤의 일을 생각하기도 했다. - P375

비밀 없는 사랑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위험 없는 사랑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 P376

잠이 든 한두 시간 동안 그는 비참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P384

천국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인지, 하느님 아버지와 최후의 심판과 영원한 삶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문제에 관해서는 모든 신념을 잃은 터였다.
영원한 삶이 있든 없든 그것이 그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이 불확실하고도 덧없는 삶뿐이었다. 숨을 쉬고, 살아 있음을 피부로 느끼고, 오직 살아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 P385

나는 늘 조물주를 완벽한 존재로 경배하긴 했지만 피조물이 완벽하다고 한 적은 없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을 한 번도 부인한 적은 없어. 진정한 사상가라면 이 세상의 삶이 조화롭고 정의롭다거나 인간이 선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네. 오히려 인간의 마음속에서 꾸며 내고 지어 내는 것이 악하다는 것은 성경 말씀에서도 강조하고 있어. 우리는 그 말씀이 옳다는 것을 날마다 경험하고 있지. - P402

세상이 온통 죽음과 공포로 가득 차 있고, 그래서 쾌락을 도피처로 삼는단 말이로군. 하지만 그런 쾌락은 오래가지 못하는 법일세. - P404

사람들이 벌이는 바보짓과 죽음의 무도 가운데서도 뭔가 오래도록 남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 그게 바로 예술 작품이었어. 예술 작품 역시 언젠가는 사라지겠지. 불타거나 망가지거나 파괴되겠지. 그래도 예술 작품은 인간의 일생보다 훨씬 오래 남고, 덧없는 순간을 넘어 성스러운 형상이 충만한 조용한 왕국을 이룬단 말일세. 그런 작업에 일조하는 것이 나에겐 다행히 위로가 되었던 것 같네. 그것은 덧없이 사라지는 것에 영원의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 P405

그런 걱정조차 오히려 달콤할 정도였다. - P426

나는 그저 의례적으로 예술을 높이 평가하긴 했지만 실은 교만하게도 예술을 얕잡아 보았었네. 그런데 인식에 도달하는 길이 얼마나 다양한지 이제야 알 것 같네. 또 정신의 길이 유일한 길은 아니며 어쩌면 최상의 길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네. - P436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평화란 존재하지 않아. 물론 평화가 있긴 하지만, 우리의 마음속에 늘 깃들어 있는,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 그런 평화란 존재하지 않는 법일세.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평화는 잠시도 마음을 늦추지 않고 끊임없이 싸워서 얻어지는 평화, 나날이 새롭게 쟁취해야만 하는 그런 평화뿐일세. - P438

하지만 그렇게 보이는 모습도 실은 싸움과 희생을 통해 얻어지는 걸세. 인생을 제대로 사는 사람이라면 다 마찬가지겠지. - P438

엄청난 갈등과 고통에 시달렸던 이 예술가는 현재와 미래의 무수한 인간들을 위해 그들이 겪을 고통과 노력의 비유적 형상을 보여 준 것은 아닐까? - P450

어쩌면 골드문트가 이 처녀를 유혹했을지도 모르고, 또 어쩌면 속이고 버렸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골드문트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남편보다도 더 진실하게 그녀를 자신의 영혼 속에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 P452

어릴 적이나 학생 시절에는 자네처럼 지성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네. 그런데 내 소명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자네가 깨우쳐 주었지. 그러고는 삶의 다른 쪽에, 감각의 세계에 투신하기 시작했네. 여자들 덕분에 관능의 세계에서 쉽게 쾌락을 얻을 수 있었지. 여자들은 호의와 욕망이 넘쳐흘렀지. - P463

그녀는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고 잡아뗐다네! 나는 그녀와 어울리기에는 너무 늙었던 게지. 그녀에겐 내가 더 이상 매력이 없었고, 나한테 싫증이 나고 아무 기대도 없었던 걸세. - P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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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와 사랑은 얄궂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와 사랑은 사실 그 어떤 말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여자는 단 한마디로 그에게 밀회의 장소를 지정해 주었고 다른 모든 것은 말로 하지 않았다. 그럼 대체 무엇으로 말한 것일까? 그래, 눈으로 말했다. 그리고 다소 쉰 목소리에 깃든 모종의 울림으로, 어쩌면 향기인지도 모를 그 무엇으로 말했다. 살결에서 은근히 풍겨 오는 그 부드러운 향기는 여자와 남자가 서로를 원할 때면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그 무엇이었다. 얼마나 섬세한 비밀의 언어인가! 그런데 이 언어를 그렇게 빨리 터득하다니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그는 저녁이 몹시도 기다려졌다. 커다란 체격의 이 금발 여성은 과연 어떤 사람일지 호기심을 누를 길이 없었다. 어떤 눈길과 어조로 말할까. 팔다리를 어떻게 움직이고 어떻게 몸을 놀리며 또 어떻게 입맞춤을 할까. - P149

누구나 그에게 뭔가를 남겨 주었다. 어떤 몸짓이나 입맞춤, 특별한 유희, 몸을 허락하거나 거부할 때의 특징 같은 것을 남겼다. 골드문트는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그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배부른 줄도 몰랐고, 어린아이처럼 다루기 쉬운 존재였다. 그는 어떠한 유혹에도 마음을 열어 놓고 있었다. 그런데 그럼으로써 그 자신이 유혹적인 존재가 되어 갔다. 그의 외모에서 풍기는 아름다움만으로는 여자들이 그렇게 쉽게 그에게 접근해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어린아이 같은 천진함과 개방적인 태도, 순진한 호기심에서 솟구치는 욕망이 문제였으며, 여자가 그에게 무엇을 원하든 모든 것을 완벽하게 받아들일 태세가 되어 있는 것이 문제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매번 여자들이 그에게 원하고 꿈꾸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여자들에게 다가갔다. 어떤 여자에게는 부드럽게 기다려 주듯이 대하는가 하면 어떤 여자에게는 재빨리 낚아채듯이 대했으며, 어떤 때에는 처음 동정을 바치는 소년처럼 순진한가 하면 어떤 때에는 교묘하고 능숙했다. 언제라도 유희나 싸움, 한숨이나 웃음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부끄러워하는가 하면 부끄러움을 모르기도 했다. 그는 여자가 그에게 원하는 것, 그를 유혹하여 얻어 내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감각이 예민한 여자라면 누구나 그의 성향이 그렇다는 것을 금방 눈치챘으며, 그가 여자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 P156

하지만 그의 배움은 계속되었다. 그가 단기간에 배운 것은 수많은 부류의 사랑과 사랑의 기술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수많은 애인의 경험을 받아들이기만 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또한 여자들을 그들의 다양한 성향에 따라 관찰하고 느끼고 접촉하고 냄새 맡게 되었다. 그는 갖가지 부류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섬세한 귀를 갖게 되었으며, 목소리의 울림만 듣고도 여자들이 지닌 사랑의 능력이 어느 정도이며 어떤 성향인가를 어김없이 알아맞힐 수 있게 되었다. 갈수록 새로운 황홀감을 느끼면서 그는 머리를 목덜미에 기대거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릿결을 쓸어 올리거나 또 무릎뼈를 움직일 수 있는 온갖 다양한 방법을 관찰하게 되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섬세하게 감식하는 손가락만으로 어떤 여자의 머리칼이 다른 여자의 머리칼과 어떻게 다르며 또 어떤 여자의 살결과 솜털이 다른 여자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가를 알게 되었다. 그는 바로 여기에 방랑 생활의 의미가 있다는 것, 즉 어쩌면 이처럼 식별과 구분 능력을 갈수록 더 섬세하고 다양하게 그리고 깊이 있게 터득하고 단련하기 위해 한 여자로부터 다른 여자한테로 떠밀려 다닌다는 것을 진작부터 직감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런 방랑이 그의 운명인지도 몰랐다. 마치 상당수의 음악가가 한 가지 악기만 다룰 줄 아는 게 아니라 셋, 넷, 혹은 그 이상의 많은 악기를 다루듯이, 완벽의 경지에 이를 때까지 온갖 방식으로 수없이 다양한 여자들과의 사랑을 경험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물론 이런 경험이 무엇에 도움이 되고 또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어딘가로 가는 길 위에 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에게 비록 라틴어나 논리학을 공부할 능력이 있다고는 해도 놀라울 만큼 비범한 재능을 타고나지는 못한 반면, 사랑의 문제 혹은 여자들과의 유희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이 문제는 힘들이지 않고 익혔으며,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았고, 경험들이 저절로 축적되고 정돈되었던 것이다. - P157

두 사람 사이의 느긋한 잡담은 아무것도 엮어 내는 것 같지 않았지만, 그 대화를 잇는 느슨한 가닥 사이사이에는 마치 촘촘하고도 달콤한 그물을 짜듯이 시선이나 억양이나 사소한 몸짓으로 오고 가는 무엇이 있었다. 그 가닥 하나하나에는 의미가 가득 실려 있었고, 따스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 P164

이미 한참 전부터 골드문트는 그녀가 말에서 내리기 전에 그녀에게 했던 말을 후회하고 있었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었던가. 사랑에는 말이 필요 없지 않은가. 입을 다물고 있어야만 했는데. - P168

그리고 여러 날 동안 고독과 우울함이 마음을 짓눌렀다. - P199

출산을 구경하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그는 놀라움에 눈을 번쩍 뜨고 산모의 얼굴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새로운 체험을 통해 그의 세계가 갑자기 더 풍요로워진 느낌이었다. 적어도 산모의 얼굴에서 감지한 그 무엇은 대단히 주목할 만한 것이라 여겨졌다. 그가 지대한 호기심을 품고 고통스럽게 누워 산고에 시달리는 부인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는 동안 관솔 등불의 희미한 빛 속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습이 떠올랐다. 신음하고 있는 여인의 찡그린 얼굴에 나타난 여러 갈래의 표정은 그가 사랑의 절정에 도달한 여자들의 얼굴에서 보았던 표정과 거의 구별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얼굴에 나타나는 엄청난 고통의 표현은 엄청난 쾌감의 표현보다 훨씬 더 격렬하고 더 일그러져 있었다. 그렇지만 그 두 가지 표정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히죽 웃는 듯이 몸을 움츠리고 불처럼 타올랐다가 꺼져서 식는 것까지 모두가 똑같았다. 그 까닭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신기했다. 고통과 쾌락이 마치 자매처럼 서로 비슷할 수 있다는 깨달음이 놀라웠던 것이다. - P199

"그래, 골드문트, 너는 그렇게 해도 통할지 모르지. 너는 너무나 젊고 잘생긴 데다 정말 순진해 보이니까. 그런 외모는 훌륭한 숙박권이 될 수 있어. 여자들한테는 호감을 주고, 남자들은 이 친구는 정말 순진무구하니까 아무한테도 나쁜 짓을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거든. 하지만 보라고. 사람이란 나이를 먹게 마련이고, 해맑은 얼굴에도 언젠가는 수염이 나고 주름이 생기지. 바지에 구멍도 나고. 그러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환영받지 못하는 추한 손님이 되고 말지. 눈에는 젊음과 순진함 대신 허기진 기색만 드러나게 돼. 그렇게 되면 마음이 모질어지고 이 세상에서 뭔가를 배울 수밖에 없게 된단 말이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두엄 더미에 드러누워야 하고, 개들이 오줌을 갈기니까. 그런데 내 생각에 너는 괜히 오래도록 이렇게 떠돌아다니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네 손은 너무 곱고, 네 곱슬머리는 근사하니까. 너는 틀림없이 지금보다 살기 편한 데로 다시 기어들어 가게 될 거야. 멋지고 따뜻한 부부 침대나 기름진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근사한 수도원, 난방이 잘 된 서재 같은 데로 찾아갈 수 있을 거야. 너는 그렇게 말쑥한 옷도 입고 있잖아. 그런 차림새면 사람들이 너를 신사 나리로 볼 수도 있겠어." - P204

이어서 그녀는 어머니처럼 자상하게 마음에서 우러나온 수많은 조언을 덧붙였다. 골드문트는 그 조언들은 금방 잊어버렸지만, 그녀가 베풀어 준 사랑과 그녀의 순박한 얼굴에 피어오른 영악스럽고도 호의적인 웃음은 결코 잊지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려고 애썼다. - P217

달콤하고도 성스러운 그 목각 입상 앞에 서 있던 짧은 순간 이래로 골드문트는 여태껏 갖지 못했던 어떤 목표를 갖게 되었다. 이전에 골드문트는 다른 사람들이 어떤 목표를 세우면 곧잘 비웃거나 부러워하곤 했다. 그런데 이제 그 자신이 목표를 갖게 된 것이다. 어쩌면 그 목표를 이룰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망가진 삶 전체가 숭고한 의미와 가치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 새로운 감정은 골드문트를 온통 희열과 전율에 휩싸이게 했으며, 그의 발걸음은 날개라도 달린 듯 가벼웠다. - P227

서로 편안하게 교양 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몇 년씩이고 함께 생활하면서 작업을 한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야. - P232

결국 그가 바라 마지않던 목표를 이루어서 나르치스는 그의 친구가 되었다. 그런데 골드문트가 학자로서는 자질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그의 마음속에 잃어버린 어머니의 모습을 생생히 되살려 낸 사람은 학자인 나르치스 바로 그였다. 그리하여 공부와 수도승 생활과 덕성을 쌓는 일 대신에 그의 본성에서 솟구치는 막강한 원초적 충동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성적 욕망과 여성에 대한 사랑, 독립심, 방랑벽이 그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제 골드문트는 명인이 만든 마리아 상을 보면서 자기 속에 숨어 있던 예술가 기질을 발견하였고, 새로운 길로 접어들어 다시 한곳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그가 들어선 길은 어디로 이어질 것인가? 어디에서 장애물이 생기는 것일까? - P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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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학문이 제가 택해야 할 유일한 분야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한 인간의 운명과 소명은 딱히 본인의 소원보다는 오히려 다른 어떤 것, 그러니까 예정된 섭리 같은 것에 의해 결정될 수도 있으니까요. - P15

하지만 어디서나 그렇듯이 조문으로 기록된 법률보다는 오히려 불문율이 더 위력적이게 마련이다. - P35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거야!’ 그의 의지가 이렇게 다짐했다. 하지만 그의 가슴은 탄식하며 ‘내일 다시 올 거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 P41

그는 골드문트의 본성이 온갖 공상이나 잘못된 교육 그리고 아버지의 말씀과 같이 철판처럼 단단한 껍질에 에워싸여 있다는 것을 알았다. - P50

"수많은 경건한 신부님들도 바로 이런 예행연습이 필요했다는 걸 모르니? 탕자의 생활이야말로 성자의 길로 접어드는 첩경일 수도 있다는 걸 몰라?" - P53

하지만 골드문트는 매일 이런 생각에만 빠져 있지는 않았다. 오래도록 어떤 생각에 골몰한다는 것은 그의 기질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기엔 하루가 너무 길어서 다른 할 일들이 생기곤 했다. - P61

"자네는 내가 기분도 낼 줄 모르는 꽁생원 의사라고 생각하겠지. 그렇지 않아. 우리는 인간일세. 어디 이 멋진 술을 좀 마셔 보자고. 이렇게 한밤중에 몰래 하는 조촐한 술자리보다 신나는 것은 없지. 자, 건배!"
골드문트는 웃으며 잔을 부딪치고는 맛을 보았다. - P86

그는 너무나 소중했던 이 우정의 종말이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았다. - P91

그사이에 나르치스한테는 얼마 전부터 모종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수련 과정을 마쳤기 때문인지 아니면 골드문트와의 체험을 겪은 탓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떻든 그는 혼자 틀어박혀서 고행하고 정신적으로 단련할 필요성에 눈뜨기 시작했던 것이다. 금식하면서 오랫동안 기도를 드리고 자주 참회하고 자발적으로 고해를 하고픈 충동이 일기 시작했다. - P92

"아직 거기까지 생각해 보지는 않았지만, 말했듯이 나는 목표가 없어. 나한테 너무 잘해 주었던 그 여자 역시 내 목표는 아니야. 그녀에게 가긴 하지만, 그녀 때문에 가는 것은 아니야. 가야만 하기 때문에,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기 때문에 가는 거야." - P123

말을 하지 않는 세계, 부엉이의 울음소리로 서로를 유혹하는 세계, 말이 아무 의미도 없는 세계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그는 이런 상태가 마음에 들었다. 오늘은 말이나 생각을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오직 리제를 향한 갈망뿐이었다. 눈이 멀어 말없이 더듬고 헤집는 상태, 신음과 함께 녹아들어 가는 그 상태가 그리울 뿐이었다. - P128

적어도 이성과 언어와 그 모든 것을 갖고 있으면서도 사랑받지 못하고 고독하고 슬프게 살아가는 것에 비하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 P141

골드문트의 곱슬머리와 눈매는 금방 그녀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으며, 귀여운 흰 목덜미와 우아하고 매끈한 손, 거침없고 멋진 동작 역시 그녀에게 호감을 주었다. 이 낯선 사람은 당당하고, 품위 있고, 게다가 너무나 젊었던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마음을 끌었던 것은 이 낯선 청년의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는 은근히 노래하는 듯하고 따뜻하게 빛나는, 부드럽게 구애하는 듯한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애무의 감촉처럼 울려 퍼졌다. 이런 목소리라면 얼마든지 더 오래 들어 줄 용의가 있었다.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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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이나 한 행위가 전적인 윤회나 전적인 열반인 경우란 결코 없으며, 한 인간이 온통 신성하거나 온통 죄악으로 가득 차 있는 경우란 결코 없네. - P205

‘진리란 오직 일면적일 때에만 말로 나타낼 수 있으며, 말이라는 겉껍질로 덮어씌울 수가 있다.’ 생각으로써 생각될 수 있고 말로써 말해질 수 있는 것, 그런 것은 모두 다 일면적이지. 모두 다 일면적이며, 모두 다 반쪽에 불과하며, 모두 다 전체성이나 완전성, 단일성이 결여되어 있지. - P204

아무도 다른 사람에 대하여 그 사람이 스스로의 인생행로에서 얼마만큼 나아간 경지에 있는가를 감히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는 없네. 도둑과 주사위 노름꾼의 내면에 부처가 깃들어 있고, 바라문의 내면에 도둑이 도사리고 있으니 말이야. - P206

나는 나 자신의 육신의 경험과 나 자신의 영혼의 경험을 통하여 이 세상을 혐오하는 일을 그만두는 법을 배우기 위하여, 이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하여, 이 세상을 이제 더 이상 내가 소망하는 그 어떤 세상, 내가 상상하고 있는 그 어떤 세상,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해 낸 일종의 완벽한 상태와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놔둔 채 그 세상 자체를 사랑하기 위하여 그리고 기꺼이 그 세상의 일원이 되기 위하여, 내가 죄악을 매우 필요로 하였다는 것을, 내가 관능적 쾌락, 재물에 대한 욕심, 허영심을 필요로 하였다는 것을 그리고 가장 수치스러운 절망 상태도 필요로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고빈다, 이것은 나의 마음속에 떠올랐던 생각들 가운데 몇 가지를 이야기한 거야." - P207

우리가 열반이라고 부르는 것,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아. 다만 열반이라는 단어만이 존재할 뿐이지.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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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장을 볼 때까지 고통을 겪지 않아 해결이 안 된 일체의 것은 다시 되돌아오는 법이며, 똑같은 고통들을 언제나 되풀이하여 겪게 되어 있는 법이다. - P190

이보게, 고빈다, 내가 얻은 생각들 중의 하나는 바로, 지혜라는 것은 남에게 전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네. 지혜란 아무리 현인이 전달하더라도 일단 전달되면 언제나 바보 같은 소리로 들리는 법이야."

"자네 농담을 하는 건가?" 고빈다가 물었다.

"농담하고 있는 게 아닐세. 나는 내가 깨달은 사실을 말하고 있는 걸세. 지식은 전달할 수가 있지만, 그러나 지혜는 전달할 수가 없는 법이야. 우리는 지혜를 찾아낼 수 있으며, 지혜를 체험할 수 있으며, 지혜를 지니고 다닐 수도 있으며, 지혜로써 기적을 행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지혜를 말하고 가르칠 수는 없네. 바로 이러한 사실을 이미 젊은 시절부터 나는 이따금씩 예감했으며, 이 때문에 내가 그 스승들 곁을 떠났던 거야. - P204

말이란 신비로운 참뜻을 훼손해 버리는 법일세. 무슨 일이든 일단 말로 표현하게 되면 그 즉시 본래의 참뜻이 언제나 약간 달라져 버리게 되고, 약간 불순물이 섞여 변조되어 버리고, 약간 어리석게 되어 버린다는 이야기야.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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