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한 아침, 당연한 저녁, 당연한 내일이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허망해요. 이게 끝이라니,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신이 있다면 이래선 안 되는 거 아닌가요……."
그는 마침내 눈물을 흘렸다.
"근데 한편으로 신이 없다면 그게 더 허망할 것 같기도 하네요. 고작 이런 식으로 인생이 끝났는데, 아무것도 없고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는 게. 신은 존재하지 않는 건지, 냉담한 존재인지, 불공평한 존재인지…… 답을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까요? 저스티스한테 물어보면 알 수 있을까요?"

평소 같으면 억지로 추임새라도 넣었을 텐데 오늘은 유독 힘들었기에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모가 내 이름을 낮게 불렀을 때, 나는 누운 채로 우재가 나에 대해 했던 말을 곱씹고 있었다. ‘아시죠? 해미는 가까워지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일정 거리 안으로는 들이지 않는 거.’ 우재가 나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상처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은 무거운 추가 되어 나를 가라앉혔다. 하지만 우재의 말엔 틀린 구석이 없었고, 내가 그렇다는 건 나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 P-1

"그 사람은 왜 스스로 삶을 포기했을까? 마당엔 장작이 쌓여 있고 찬장마다 피클이며 잼이 가득 쟁여져 있었어. 아버지가 죽지 않았다면 그 여자는 겨울까지 살아 있었을 테지. 창고 앞에 쌓아둔 장작이 다 없어질 때까지. 나뭇가지마다 다시 열매가 열리고 그 열매들을 따다 만든 잼을 또 다 먹을 때까지. 그 사람은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에 죽은 거였어. 아버지가 죽고 난 후 삶의 의미를 잃었기 때문에. 그 사실이 나를 오래도록 고통스럽게 했단다." - P-1

"그 일을 했던 오 년간 깨달은 건 사람은 누구나 갑자기 죽는다는 거였어. 멀리서 보면 갑작스러워 보이지 않는 죽음조차 가까운 이들에겐 언제나 갑작스럽지. 그리고 또하나는 삶은 누구에게나 한 번뿐이라는 것." - P-1

"이모는 네가 찬란히 살았으면 좋겠어. 삶은 누구에게나 한 번뿐이고 아까운 거니까."
그 순간,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그것에 대해선 알지 못했지만 나는 우리가 어둠 속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 P-1

몇 년 후엔 한수도 우리 가족처럼 다시 웃을 수 있게 될 테지. 하지만 웃는 순간에도 상실의 고통은 사실은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 P-1

이모와 셋이 함께 본 날 이후에도 우리는 드문드문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지만 우재의 답은 늦거나 짧았다. 그날을 기점으로 나는 우리 사이의 무언가가 틀림없이 훼손되었다고 느꼈는데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 P-1

"해미야,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상대를 바라보잖아? 그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고. 하지만 가끔 그 사람이 나 때문에 느낀 모멸감을 되갚아주기 위해 인적이 드문 새벽 일부러 찾아와 똥을 누고 간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그 똥을 떠올리면 그런 생각이 들어. 아무리 인간에게 한계가 있다 해도,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그토록 모멸감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되었던 게 아닌가 하는." - P-1

우재는 잘 있을까? 우재에게서는 며칠째 연락이 없었다. 우리는 이대로 멀어지고 마는 걸까? 내 곁을 스쳐간 지난 인연들처럼. 책상 위에서 진즉 시들어버린 수국을 생각하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슬픔이 번져갔다. 내가 먼저 연락을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 P-1

만약 최장로가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 아니었다면—그녀의 표현이었다. "걱정 마요. 내가 오지랖이 넓은 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유일한 단점이자 장점이니까."—나는 크게 낙담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최장로는 시간이 많았고—이 역시 그녀의 표현이었다. "할일도 없고 심심하던 차에 잘됐지. 어차피 트로트 가수 나오는 방송이나 보고 있었는데 뭘."—흔쾌히 자신의 오빠—그는 교회에 다닌 적이 없다고 했다—에게 바로 연락해 그 후배가 누구인지를 물어봐주겠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모든 게 너무 빠르게 진행되어 조금 얼떨떨했다. 마치 급물살에 휘감겼다가 뭍에 던져진 느낌이었다. 설마 정말 이렇게 K.H.를 찾게 되는 건가? 그런 말도 안 되는 행운이 일어난다고? - P-1

"최장로가 도움이 될 줄 알았지. 최장로에게 하나님이 주신 유일한 단점이자 장점이 오지랖이 넓은 거니까." - P-1

우재는 계속 ‘배려’라고 말했지만 우재가 알지 못하는 건 그해 늦봄 우재를 위한 마음으로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던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럼 그건 무엇이었을까? 어둑해진 천변에서 우재가 덮어준 재킷의 온기를 느끼며 그건 누구의 삶에 깊이 관여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일 뿐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우재는 몰랐겠지만, 그후로 우리의 관계가 그렇게 흐지부지 끝나버린 것은 내가 그날 이후 조금씩 우재의 연락을 피했기 때문이었다. 피했다고? 피한 것이다. 달아난 것이다. 나에게 다가와 마음의 문고리를 잡고 흔드는 우재로부터. 그때 내가 원했던 건 누군가의 삶에 내가 또다시 영향을 미치게 되리라는 그 무시무시한 가능성으로부터 도망치는 것뿐이었으니까.
"미안해. 내가 욕심이 너무 많아져서."
우재의 긴장한 듯한 목소리를 듣자 어둡고 단단하게 얼어붙었던 내 마음에 파문이 일었다. 이대로 도망쳐 또다시 소중한 사람을 잃고 말 거야? - P-1

생각해야 해. 내 안의 누군가가 다시 속삭였다. 생각해야만 해. 너는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지?
더이상 도망치기만 하면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 P-1

"아가씨의 전화를 받고, 옛 시절 생각에 꽤 오래 잠겨 있었어요. 잊고 산 줄 알았던 기억인데, 한번 그 끄트머리를 잡아당기자 거기에 매달려 있던 것들이 꼬리를 물고 따라오더라고요. 교회에 다니던 시절은 저에겐 무척 행복했던 시절입니다.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시절이 시절인 만큼 학생운동에 참여하다가 무신론자가 되어 더이상 교회에 발도 붙이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렸지만, 중고등학교 시절엔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었죠. 신앙심이 깊어서라기보다는 거기에 가야 여자애들과 교류도 하고 문화생활이란 걸 할 수 있었으니까요." - P-1

나이를 먹으면 어떤 기억들은 더없이 생생해지기도 하는데, 임선자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어요. 아마 임선자가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 그럴 겁니다. 임선자는 뭐랄까, ‘평범’이란 단어와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어요. 아, 저렇게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고, 조용히, 모난 데 없이 평생 살겠구나, 싶은 그런 사람들이 있지요? 오해하지 말아요. 그 친구가 보잘것없는 삶을 살 거 같았다, 뭐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평범한 삶은 축복이지요. 내 나이 정도가 되면 다 알아요. - P-1

그리고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편지를 받는다면 답장을 해주거나 내게 전화를 해주면 안 될까? 아래에 내 새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둘게. 너와 연락이 닿지 않아 마음이 너무 불안하니까 짧게라도 소식을 전해주면 좋겠어. 엄마가 세상을 떠난 이후, 나는 누구든 연락이 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없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쉽게 두려워져버리거든. - P-1

당연하게도 우재로부터의 연락은 없었다. 피곤한 탓인지 우재에게 연락을 하고픈 충동이 일었다. 우재는 잘 있을까? 우재와 천변 벤치에 앉아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눴던 밤으로부터 벌써 여러 날이 지났다. 그날 밤 내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상태로는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며, K.H.를 반드시 찾아낸 뒤 내가 먼저 꼭 연락하겠다고 말했을 때 괴로운 듯 오래도록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있던 우재는 이내 말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진 마. 손잡는 데만 십구 년 걸린 거 알지. 그렇게 또 기다리게 하면 우리 환갑이다." - P-1

"아가씨가 찾으려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꼭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긴긴 세월 지나 과거의 사람이 다시 찾아오는 건 틀림없이 근사한 일일 테지요."
카페 앞에서 헤어지면서 이영오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게 악수를 청했다. 그는 내게 꼭 돌려달라고 신신당부를 하며 자신이 오랫동안 간직한 문집들을 빌려주기까지 했다.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낯선 이를 위해 선선히 자신의 시간과 물건을 내어주는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 P-1

"한 해의 끝에서 아쉬움이라는 단어를 생각한다. 하지만 뒤돌아보면 인생의 곳곳에는 들판에 숨어 있는 제비꽃처럼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다. 사랑하며 살기에도 부족하다" - P-1

종착점이라고 생각한 지점에서 새로운 문이 열리고 있었다. - P-1

마침내 해냈다는 안도감과 함께 허탈감이 밀려왔다. K.H.를 만나 선자 이모의 일기장과 편지를 전해주고 나면 속죄가 완성되고 내 삶이 송두리째 바뀔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했지만 그런 일은 물론 일어나지 않았다. 어둠 위로, 일기에서 본 것인지 내가 상상하는 것인지 알 수 없고 확인할 길 역시 더이상 없는 어떤 장면 속에서 선자 이모가 천근호의 모습을 닮은 어린 소녀와 아카시아가 핀 둑길을 걷는 모습이 그려졌다. 옷깃을 빳빳하게 다린 교복을 입고 양갈래 머리를 한 천근호를 황홀하게 바라보는 선자 이모. 이제껏 걸어온 여정의 종착지가 여기였다니. 우리는 한 사람에 대해 얼마나 알 수 있을까? - P-1

게다가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모태 신앙을 갖고 자란 저는 세월이 흐를수록 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어요. 저는 제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동요나 통제할 수 없는 끌림이 건실한 남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살면 한때의 바람처럼 지나갈 거라고 믿고 싶었지요. 선자와의 약속을 저버린 채 가정을 이루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저는 나쁘지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대기업 임원까지 지낸 남편과 미국의 명문대로 유학 간 아이들. 남들은 저의 삶을 부러워했고, 저 역시 커다란 굴곡이나 파고 없이, 미간을 잠깐 찌푸렸다 펴면 될 정도의 근심만 있는 내 삶에 어느 정도 만족하며 산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이번에 선자의 일기를 읽고 내가 살아오는 내내 마음 한편에 선자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 나 자신을 기만하며 사는 듯한 괴로움을 지니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재로 덮어버려 진즉 꺼뜨린 줄 알았던 불씨가 아직도 타고 있다는 사실에 회한이 밀려와 아주 오랜만에 눈물이 났습니다. 평생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감정이었지만요.
선자에 대해 품었던 마음을 태어나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는 글을 쓰는 지금 저는 무척 떨리고 두렵습니다. 하지만 선자의 일기를 읽어나가며, 행간에 숨겨진 진실들을 짜맞춰 나를 찾아왔다는 당신에겐 나와 선자 사이에 존재했던 것을 감추려 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지요.
선자의 일기들과 편지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잘 보관하려 합니다. 그리고 내가 죽을 때 아이들에게 함께 태워달라고 말할 거예요. 선자가 이런 식으로라도 나에게 전했던 마음들을 나는 이제라도 소중히 간직하고 싶거든요. 하지만 생전에 아이들에게 선자와의 관계를 들키고 싶지는 않아요. 아이들은 이해할 수 없을 거고, 상처를 받을지도 모르니까요. 선자가 소중한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제게는 제 아이들이 소중하다는 걸 선자도 이해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 해미씨, 당신에게 연락하는 것도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당신도 더는 나를 절대 찾지 말아주세요. 그렇지만 당신에게 이렇게 메일을 쓰는 것은 다시는 찾지 말아달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긴긴 시간 동안 나를 찾아 헤매주어 고맙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만도 아니에요.
해미씨, 당신은 나에게 선자가 마지막으로 쓴 편지를 전해주었죠? 테이프가 봉해진 상태를 봤을 때 당신은 선자가 쓴 편지를 읽지 않은 것 같아요. 아마도 착하고 마음 여린 아이였던 당신은 거짓말로 편지를 썼다는 죄책감 때문에 미안해서 몰래 편지를 훔쳐 읽을 생각도 하지 않았던 거겠죠. 저는 선자가 쓴 편지를 당신에게도 전해주고 싶어 이 메일을 쓰고 있습니다. 편지를 읽어봤는데, 선자의 마지막 편지는 나에게 쓴 것이지만 동시에 어렸던 당신에게 쓴 것처럼 읽히기도 했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부디 내가 스캔해서 보내는 이 편지를 읽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죄책감을 씻어버리기를 바라요.
다시 한번, 영영 만날 수 없을 줄 알았던 선자를 내게 데려다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앞으로 당신이 살아갈 모든 날들에 축복이 있기를 기원하며. - P-1

물론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가정을 이루지 못했고, 늘 동경했던 시인이 되지도 못했고, 뼈아픈 시행착오를 수도 없이 겪었어. 하지만 내 삶을 돌아보며 더이상 후회하지 않아. 나는 내 마음이 이끄는 길을 따랐으니까. 그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자긍심이 있는 한 내가 겪은 무수한 실패와 좌절마저도 온전한 나의 것이니까. 그렇게 사는 한 우리는 누구나 거룩하고 눈부신 별이라는 걸 나는 이제 알고 있으니까. - P-1

처음엔 한수를 위하는 마음으로 쓰기 시작했는데 쓰는 동안 나 역시 기적을 꿈꾸며 행복했단다.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있으면 사람은 희망을 보지. 그리고 희망이 있는 자리엔 뜻밖의 기적들이 일어나기도 하잖니. 그래서 나는 유리병에 담아 대서양에 띄우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네게 보낸다. 나를 위해 너의 편지를 전해준 아이들의 마음이 나를 며칠 더 살 수 있게 했듯이, 다정한 마음이 몇 번이고 우리를 구원할 테니까. - P-1

이제는 얼굴에 기미가 생긴 동생과 고구마를 구워 호호 불어 먹으면서 밀린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나는, 해나가 나보다 훨씬 어려 언니에 대한 기억도 적을 것이기 때문에 나만큼 슬프지 않으리라 오랫동안 단정해왔다는 걸 인정하게 됐다.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는 걸.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슬픔에서 회복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미안해. 나는 오랫동안 나만 괴로운 줄 알았어."
한참 만에 용기를 내어 사과하자 해나는 웃으면서 "언니, 원래 사람들은 다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거야"라고 말했다. "그중 조금 더 성숙한 사람은 사과를 할 수 있는 거고." - P-1

나는 아주 오랫동안 한수를 구원해주고 싶어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구원하고 싶었던 건 정말 한수였을까? - P-1

이 책이 누구든 필요한 사람에게 잘 가닿아 눈부신 세상 쪽으로 한 걸음 나아갈 힘을 줄 수 있었으면.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화 통화는 자주 했지만 거의 세 달 만에 얼굴을 볼 생각을 하니 기분이 묘했다. 살짝 긴장이 되기까지 했는데 그게 우재를 만나기 때문인지, 아니면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오랜만이기 때문인지는 분간이 가지 않았다. - P-1

"게다가 대학병원에 오는 사람들은 정말 아픈 사람들이거든." 정말 아픈 사람들은 대개 정말 불친절하기 마련이었다. 반말을 하는 건 예삿일이고, 약이 빨리 나오지 않는다고 짜증을 부리거나 심지어는 약국 건물 화장실이 더럽다고 우재에게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거기서 시달렸던 거에 비하면 여기서 있는 일들은 아무것도 아니지. 박카스 뚜껑 왜 안 따주냐고 소리지르는 할아버지 정도는 귀엽잖아."
우재는 정말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말하며 자조적으로 웃곤 했지만 나는 사람이 겪는 무례함이나 부당함은 그것이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물에 녹듯 기억에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 침전할 뿐이라는 걸 알았고, 침전물이 켜켜이 쌓여 있을 그 마음의 풍경을 상상하면 씁쓸해졌다. - P-1

술을 강요하고, 벌칙게임을 하고, 다 같이 구호를 외치게 했던 학과 선배들과 달리 ‘문학’ 동아리 선배들이라면 후배들을 곤란하게 하지 않을 거라고 단단히 착각하고 동아리에 가입했던 나는 실망해서 그날 밤, 남들이 다 자는 사이 집에 가려고 짐을 챙겼다. 가는 길을 모른다는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장소와 그 사람들 틈을 벗어나는 것만이 그 순간 내겐 중요했으니까. 내가 사람들의 흥을 깨버렸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여기에도 내 자리는 없다는 익숙한 감각이 날카로운 칼끝처럼 나를 찔렀다. - P-1

"넌 진짜 늘 혼자 있었는데. 막상 말 시키면 할말 다 하니까 그렇게 수줍음이 많거나 한 것도 아니면서, 말을 먼저 거는 법도 없고, 결정적인 순간에 사람들한테 묘하게 벽을 치고. 선배들은 다 널 좀 어려워했지만, 이상하게 난 처음부터 네가 어렵진 않더라. 어쩌다 한 번씩 네가 속 이야기를 나한테 해주면 그게 그렇게 좋고." - P-1

나는 그를 무신경하고 조금 유치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는 사는 지역에 따라 밥을 사줄 후배들을 대놓고 구분했기 때문이었다. 야, 넌 대치동에 사는데 나한테 밥을 사달라면 어떻게 해. 네 돈 내고 먹어. 넌 고향이 상주랬지? 그럼 따라와. 하지만 우재의 기억 속에서 그 선배는 착실하고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우재와 함께 토요일을 보내고 난 다음날, 나는 숙취로 하루를 느슨하게 흘려보내며 기억이란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했다. 사람에 대한 기억이란 더더욱. - P-1

정신적인 기쁨을 물질적인 기쁨의 우위에 두는 인생을 살 것.

마리아 언니가 내게 보이프렌드의 조건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언니가 사랑에 빠지는 상대는 모두 언니를 웃기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나는 무엇 때문에 사랑에 빠졌던 걸까.
나를 매혹했던 건 너의 낮은 목소리, 총기, 하모니카로 연주해주던 <등대지기> 노래. - P-1

시간이 조금 더 흐른 후에는 내 쪽에서 먼저 선자 이모의 일기를 언급하는 일도 생겼다. 여전히 과거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픈 마음은 조금도 없었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선자 이모의 일기장 내용을 우재와 공유하고 만 건 뒤죽박죽인 내 생각들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면서 정리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P-1

아무것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 - P-1

이곳의 가을은 둔중한 안개 때문에 음습하고 우울한데 오늘은 너무도 드물게 한국의 가을처럼 하늘이 청명해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병원 앞마당을 걷고도 아쉬워 인근의 묘지공원까지 가 산보를 했다. 나무들은 이미 색색의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었고, 가을꽃이 무성한 묘지 위로 태양이 햇빛을 비추어주고 있었다. 너도밤나무 아래서 빵을 먹으며 책을 보는데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 밝고 건강한 몸과 정신…… 세상은 이렇게 아름답구나. 신이 만든 찬란한 빛깔 앞에서 울고 싶어졌다. - P-1

간간이 한두 줄을 끼적여놓았을 뿐인 그 시기의 일기를 읽어보면 당시 선자 이모는 잠을 거의 이루지 못하고 밥을 잘 먹을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운 나날을 보낸 듯했다. - P-1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토록 괴로워했던 걸까? 일기장에서 생략된 날짜들은 짤막한 일기마저 쓸 수 없었을 선자 이모의 마음을 엿볼 수 있게 했다. 나는 일기가 쓰인 날부터 그다음 일기까지의 비어 있는 날들을 헤아려보았고, 그 간격이 유독 길어진 시기엔 깊은 우울에 빠져 있었을 선자 이모를 상상하며 마음이 아팠다.
카페에서 선자 이모의 일기를 읽을 때 나는 대체로 밖이 내다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한번은 "이렇게는 계속 살 수가 없다. 이 괴로움 속에서도 나는 내 삶을 근사하게 살아내야 한다. 고통스럽지만 그것이 나의 임무니까"라는 문장이 적힌 1977년 2월 1일자의 일기를 읽다가 고개를 들고 밖을 보는데 너무나도 빠르게 돌아가는 창밖 풍경이 생경하게 느껴져 현기증이 일었다. - P-1

사람들은 어떤 감정을 영원히 간직할 것처럼 착각하지만 대개 그것들은 서글플 만큼 빨리 옅어진다. 물론 나의 경우에는 그렇게 되기까지 우재의 존재가 도움이 되었을 테지만. 우재는 조심스럽지만 분명한 보폭으로 내 삶에 걸어들어오고 있었는데, 그 사실은 내 마음을 환하게 하면서 동시에 어둡게 했다. - P-1

"독일어로 증상을 잘 설명하지 못해도 나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주니까."
이방인들은 대부분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고, 그들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병이 낫는 경우가 많았다.
"외로움만큼 무서운 병은 없어." - P-1

이모는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는 천변을 따라 거닐면서 어느 날부터인가 선자 이모가 서명에 동참해달라고 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쉬운 소리를 하는 법이 없고, 무엇도 잘 표현하지 않던 선자 이모가 사람들마다 붙잡고 진지한 얼굴로 부탁을 해 대부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며. - P-1

내가 기자가 되었다고 하니까 레나는 "잘 어울린다, 야. 너는 늘 글을 썼잖아"라고 말했고, 그래서 나는 이내 슬퍼졌다.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나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은 나를 원망하는 마음을 레나가 내비칠까봐 불안해졌지만 레나는 아무런 내색도 하질 않았다.
"그때 그런 이유가 뭐냐고 왜 묻질 않니?"
결국엔 내가 조바심을 참지 못하고 레나에게 물었다.
"그랬나? 이젠 기억도 안 나."
나는 레나의 말이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걸 알았다.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째서 지금 이런 기억이 떠오르는 걸까? 나는 영문 모를 슬픔과 괴로움을 느끼며 자문했다. 어떤 기억은 짐작도 할 수 없는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다가 불시에 일격을 가한다. - P-1

사춘기는 무리의 성격과 다른 것을 배척하는 시기였고, 나의 서울 말투라든가 딱딱한 독일어 억양이 묻어나는 영어 발음 같은 건 쉽게 놀림거리가 됐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맞서 싸우는 대신 눈을 내리까는 쪽을 택했는데 그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해서라기보다는 내가 그곳을 곧 벗어나리란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수는 말수가 적지만 수줍어하면서도 꼭 필요한 말은 하는 애라는 걸 나는 그때 알았고, 그러자 그런 한수가 갑자기 귀엽게 느껴졌다. - P-1

"엄마, 만약에 사람들이 꼭 한번 다시 만나고픈 사람을 누구든 딱 한 명만 만날 수 있게 된다면 보통은 첫사랑을 가장 보고 싶어할까?" - P-1

"글쎄, 그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면 엄마가 꼭 한번 다시 보고픈 건 첫사랑이 아니라 다른 사람일 것 같은데?" - P-1

"눈…… 눈이 아침부터 쏟아졌다. 지난밤 꿈에 K.H.를 본 탓일까? 오늘은 환자의 몸을 씻기거나 소변통을 비우는 중에도 계속 K.H. 생각이 났다. 꿈속에서 K.H.는 건강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 P-1

1974년 3월 24일의 일기엔 "보드라운 햇빛. 파란 하늘. 어제는 부모님께 송금하고 돌아오는 길에 아네모네 두 송이를 샀다. 오늘은 K.H.에게서 편지가 왔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너무나 그리운 K.H. 편지엔 나의 건강을 걱정하는 말이 들어 있다. 나의 단 하나, 나의 자랑, 나의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사람." - P-1

마리아는 조금 이따가 왔는데 잔뜩 멋을 부렸더라고. 배우처럼 예쁜 얼굴인데 멋까지 부렸으니, 처음엔 콧대 높은 아가씨인 거 아닌가 싶어 경계했지. 한 시간 만에 그런 성격이 전혀 아니란 게 드러났지만. - P-1

가정 형편이 나와 조금 더 비슷한 것 같은 행자 언니는 조용한 성격인지 말숙 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이따금씩 웃기만 했다. 하지만 기차에서 내릴 즈음이 되자 나와 말숙 언니의 손을 덥석 잡더니, "앞으론 무슨 일이 있으면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기로 해요"라고 수줍은 얼굴로 속삭였다. 행자 언니의 순박함 때문인지, 웃을 때 살짝 드러나는 덧니로 인해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 귀여웠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긴장이 풀리면서 안심이 됐다. - P-1

그가 아까부터 나에게 황홀한 눈길을 보내고 있던 걸 난 알았지. 그런 눈길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거든. - P-1

말이 통하지 않았는데도 그 남자가 싫지 않았어. 그가 이끄는 대로 시내를 구경하고 맥주를 사 마셨지. 마리아, 너는 푸른 새벽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워. 둘째 날 만났을 땐 독어를 거의 할 줄 모르던 그 남자가 내가 독일에서 왔다는 걸 알고 연습이라도 해왔는지 엉망진창인 발음으로 그렇게 내게 말했단다. 여행 마지막날엔 관광객들은 모르는 아주 아름다운 해변에 나를 데려갔어. 별이 촘촘히 박힌 밤이었는데, 거기에서 그 남자가 나에게 입을 맞췄어. 숨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고, 그가 조심스럽게 내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번갈아 깨물었지. 가장 짧게 만난 남자지만 가장 낭만적인 남자였단다. - P-1

이십대의 마리아 이모가 클럽에서, 로마에서, 니스의 해변에서 영화와 같은—마리아 이모의 표현이다—연애를 할 수 있었던 데는 마리아 이모가 다른 파독간호사 이모들과 달리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다는 사실이 크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 P-1

"막상 간섭받기 시작하면 넌 지금 한 말을 후회할걸."
레나가 엄마에 대한 불만을 토로할 때마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 레나는 그럴 일은 없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엄마는 내가 지금 임신을 했다고 말해도 내 자유를 존중한다며 신경쓰지 않을 사람이야. 그게 얼마나 외로운 건지 너는 몰라."
하지만 외로움에 대해서라면 나도 일가견이 있었다. - P-1

선자 이모는 한수처럼 낯을 가리는 성격인지 다른 이모들에 비해 다가가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다른 이모들에 비해 내가 쓰려(고 한다고 되어 있)는 소설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응원해준 편이었는데, 그건 어떤 상황에서도 담담하던 선자 이모치고는 꽤 의외의 모습이었다. - P-1

하지만 선자 이모의 일기를 읽어나갈수록 나는 이모가 말을 거는 상대가 첫사랑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나같이 슬픈 연서였으니까. 그리고 그 행간에 잔잔히 흐르던 격정과 애달픔을 느낀 사람이라면 누구든, 선자 이모가 첫사랑의 이름을 듣는다면 동요할 수밖에 없으리라 확신했을 것이다. 숨기려 해도 감춰지지 않는 게 사랑일 테니까. 봄볕이 나뭇가지에 하는 일이 그러하듯 거부하려 해도 저절로 꽃망울을 터뜨리게 하는 것이 사랑일 테니까. 무엇이든 움켜쥐고 흔드는 바람처럼 우리의 존재를 송두리째 떨게 하는 것이 사랑일 테니까. - P-1

한수는 내게 테이프를 돌려줄 때면 케이스 안에 짧은 메모를 끼워넣곤 했다. ‘가사는 못 알아듣겠지만, 이 노래가 나는 저번 것보다 더 가슴에 직접 꽂히는 것 같아’ 하는 식의 짤막한 감상이었다. 한수의 메모를 읽고 난 후엔 나 역시 한수가 느꼈던 감정을 맛보고 싶어져 테이프를 워크맨에 집어넣고 이어폰을 낀 채 침대에 누워 노래를 들었다. 이미 가사까지 다 외우는 노래들이었는데, 한수가 들었다고 생각하면 이상하게도 특별하게 느껴졌다. 마치 어둠 속에서 처음 발견한 노래처럼. 그러면 처음으로 울리는 새벽의 종소리 같은 새로운 감각들이 내 안에서 퍼져나갔는데, 동시에 그 한국어 노래들이 환기하는 기억은 너무나도 아득히 멀었다. 그건 참으로 모순적인 기분이었다. - P-1

"게으른 사람들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걸 배우려고 하는 대신 자기가 아는 단 한 가지 색깔로 모르는 것까지 똑같이 칠해버리려 하거든."
"그건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이번엔 내가 물었다.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는 지극한 정성과 수고가 필요하니까." - P-1

"언니, 사람의 마음엔 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결국엔 자꾸자꾸 나아지는 쪽으로 뻗어가?" - P-1

"우린 헤어지는 게 아니야. 우리는 영원히 이어져 있으니까 넌 그곳에서 너의 역할을 하면 돼." - P-1

"엄마는 한국에선 교회를 진짜 열심히 다녔나봐. 한국에 살던 시절 가장 좋았던 추억이 동네 교회 사람들이랑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냈을 때래."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