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주기 아깝다는 심리는 남녀 관계에서도 자주 발생한다. 그래서 애정이 식었는데도 관계를 끊지 못한 채 엉거주춤하게 현상을 유지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게 바로 ‘현상 유지 편향‘이다. 물론 전형적인 예는 아니기에, 이제 현상 유지 편향의 다양한 모습을 살펴보기로 하자. - P88

미국 심리학자 해들리 아크스는 1985년 심리 테스트를 통해 개인적인 결정에서 매몰 비용의 영향을 받는 경우가 50퍼센트나 된다고 지적했다. 그 후 심리학계의 연구에선 개인보다는 집단이 매몰 비용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남녀 관계도 그렇지만, 정치적 지지도 감정이 투자되는 일이기 때문에 열성 지지자들은 지지를 철회해야 마땅한 사태가 전개된다고 해도 지지를 철회하기는커녕 더욱 광신적인 지지를 보낼 수 있다. 그간 쏟은 노력과 정열이 아깝고 억울해서다.
그간 투자된 감정은 ‘권력 감정‘일 수 있다. 막스 베버의 정의에 따르면, 권력 감정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의식, 사람들을 지배하는 권력에 참여하고 있다는 의식,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의 신경의 줄 하나를 손에 쥐고 있다는 감정" 이라고 한다. 특정 정치인의 팬클럽 회원들은 자신이 아무런 반대급부를 기대하지 않고 순수하게 이타적으로 지지한다고 말하고 싶겠지만, 지지 대상과의 동일시 효과를 통해 자신도 권력 감정을 대리경험하면서 권력 중독에 빠져들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 자신의 고귀한 감정을 투자한 이성과 결별할 때, 그 감정 투자에 대한 보상 욕구로 화병을 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 일방적인 이별 통보에 격분한 나머지 보복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이별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의 수가 매년 약 1만 명에 이른다. 그런가 하면 그 오랜 세월 자신의 감정을 한껏 고양시켜준 것에 대해 배신을 저지르고 떠나는 연인에게 감사하는 사람도 있다. 감사까지 할 일이야 아니지만, 화병을 앓거나 보복을 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고 과거의 감정에 매달리는 것도 아름다운 일은 아니다. 떠나보낼 땐 보내주어야 한다. "안녕, 내 사랑!" 하면서 말이다. - P99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한 당신의 의견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매우 어렵게 생각한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 문제에 대한 당신 기분은 어떤가?"라고 묻는다면, 훨씬 쉽다고 생각하고 답을 내놓을 것이다. 물론 후자의 문답이 감정 휴리스틱이다. 박재성은 "경제 이슈를 둘러싼 논의는 이제 대중의 이해에 대한 이해를 도울 수 있는 감정 휴리스틱을 환기하고 이로써 대중의 판단과 선택을 이끌어낼 수 있는 노력에 집중해야 한다"고 했는데, 사실 우리 사회의 경제적 논의에서 가장 필요한 게 바로 그런 노력이다. 기존 경제 논의는 자꾸 "그 문제에 대한 당신의 의견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대중을 경제적 논의에서 소외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냉정한 소비자를 바랄 기업은 없을 것이기에, 광고엔 감정 휴리스틱이 철철 흘러넘치기 마련이다. 새로움을 강조하는 ‘뉴‘, 자연적인 느낌을 주는 ‘내추럴‘, 남다른 가치를 지녔다는 느낌을 주는 ‘프리미엄‘이나 ‘골드‘, 의미 있는 행복을 추구하는 느낌을 주는 ‘웰빙‘ 등이 그렇다. 미국의 한 은행은 다른 은행보다 한 시간 빠르게 온라인 서비스를 실시하면서 "당신은 좀더 힘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라는 홍보 슬로건을 내걸었는데, 이 또한 전형적인 감정 휴리스틱으로 볼 수 있다.
감정 휴리스틱은 한국 특유의 정 문화와 연결지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최상진은 정은 사회적 인간관계에서 관여된 사람들 사이에 애착과 친밀감을 만들어주는 사회관계적 원자재라고 정의한다. 서양의 사회관계를 개인주의적이라고 할 때 한국의 그것은 관계주의적이며, 한국인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규정하며, 자신의 가치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이런 문화는 정치적 판단이 감정 휴리스틱에 의해 지배될 가능성을 높여준다. 주변 사람들에게 특정 정치인이나 정치집단을 지지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라. 나름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답을 하려고 애는 쓰겠지만, 핵심은 그냥 "마음에 안 든다"는 감정 휴리스틱이다. 강양구가 잘 지적했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정 정당이나 특정 정치인을 지지할 때 ‘좋고‘ ‘싫고‘의 문제로 접근합니다. 그러고 나서 좋은 이유, 싫은 이유를 덧붙이지요. 이게 진실 아닐까요?"
어떤 이슈에 대한 정치적 지지 여부도 다를 바 없다. 한국인들의 정치적 당파성은 관계 중심주의이기 때문에 자신과 별 관계가 없는 공적 이슈에 대해선 자기 생각을 갖기보다는 자신이 지지하는 특정 정치 세력이나 정치인의 노선과 방침을 그대로 따르는 경향이 농후하게 나타난다. 즉, 정치적 지지의 성격이 연예인 팬클럽의 연예인 지지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국 제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 "정치는 쇼 비즈니스와 같다Politics is just like show business"라고 말한 건 탁견이다. - P109

롤프 도벨리가 "가용성 편향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 전혀 다른 경험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하라"고 했듯이, 가용성 편향은 공적 영역에서 동질적인 사람들끼리 어울리는 현상의 위험을 경고하는 데에 유용하다.
미국의 노동운동 지도자 앤디 스턴은 민주당 정치인들의 전형적 이미지를 "볼보자동차를 몰고 다니고, 비싼 커피를 홀짝이고, 고급 포도주를 마시고, 동북부에 살고, 하버드대학이나 예일대학을 나온 리버럴"로 규정한다. 이들이 입으로는 보통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처럼 말하지만, 그들의 주변 환경이 그들에게 끼치는 영향, 즉 가용성 편향이 문제라는 뜻이다.
사실 민주당은 정치 참여에서부터 정치자금에 이르기까지 부자 유권자들에게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어서 사실상 그들에게 발목이 잡힌 상태이기 때문에 경제정책상 좌클릭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지난 수십 년간 가난한 사람들마저 공화당에 표를 던진 이유에 대해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니컬러스 크리스토프는 2004년 ‘민주당의 여피화‘를 지적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민주당 정치인들은 수사적 진보성을 전투적으로 드러내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실천으로 연결되기는 어려우며, 따라서 정치적 불신과 혐오를 조장할 가능성이 높다.
가용성 편향은 우리말로 "노는 물이 어떻다"는 식의 표현을 원용하자면, ‘물 편향‘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비슷한 사람들이 끼리끼리 어울리는 물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은 비슷하지 않은 사람들의 사정을 헤아리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소득 수준에 따른 거주지의 분리로 비슷한 사람들끼리 몰려 사는 경향이 가속화되면서 사회적 소통 · 통합과 관련된 중요한 개념으로 떠오르고 있다. - P116

정박 효과는 법정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정은주는 「판사를 좌지우지하는 검사: 초깃값에 의존하는 ‘정박 효과‘」라는 글에서 "판사에게 나타나는 휴리스틱으로는 ‘정박 효과‘가 대표적이다. 정박 효과란 사람들이 수치화된 값을 추정할 때 초깃값에 의존하는 현상이다. 집값을 추정할 때 공시지가를 고려하는 식이다. 문제는 얼토당토않은 초깃값도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라며 박광배 충남대학교 교수(심리학)가 2004년 2월 형사재판을 맡은 판사 158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를 소개했다. 이런 내용이다.
우선 판사들을 세 그룹으로 나눠 법정형이 5년 이상인 형법상 강간치상 사건을 동일하게 제시했다. 첫째 그룹에는 검사 구형을 2년으로, 두 번째 그룹에는 검사 구형을 10년으로 하고 세 번째 그룹에는 검사 구형에 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연구 결과, 검사가 10년을 구형하거나 구형하지 않은 경우에는 양형 평균이 57.2개월과 57.5개월로 비슷했다. 하지만 검사 구형 2년 그룹의 평균은 42.5개월로 큰 차이를 보였다. 검사의 2년 구형은 법적으로 불가능할 정도로 낮은데도 판사의 양형 판단에 영향을 끼친 것이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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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라탄이즐라탄탄 2023-08-02 1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롤프 도벨리가 말한 가용성 편향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자신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 전혀 다른 경험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하라는 말이 와닿게 느껴졌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