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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세계는 무엇을 생각하는가 - 미래를 결정하는 다섯 가지 질문
오카모토 유이치로 지음, 전경아 옮김 / 한빛비즈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최근 철학계 흐름을 간단하게 소개한 책이다. 저자는 먼저 책에서 다루는 ‘철학‘의 개념을 ‘우리 자신이 사는 시대를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그러고 나서 20세기 포스트모더니즘의 확산과 그 이후의 세 가지 현대 철학의 흐름을 소개하고 있다. 자연주의적 전환, 미디어•기술론적 전환, 실재론적 전환이 그것이다. 자연주의적 전환은 마음을 중점으로 두었고, 미디어•기술론적 전환은 매체를, 실재론적 전환은 사고로부터 독립된 존재를 다루는 흐름이라고 한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과거와 달리 현대는 하루하루가 혁명이라고 썼다. 과거엔 농업혁명이 있고 인지혁명이 있고, 그런 큼직큼직한 개별 사건사건이 있었다면, 지금은 시시각각 변화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이런 책은 제법 도움이 된다. 물론 꼭 읽지 않아도 모르진 않을 것이다. 모두가 지금 현재의 세상을 살고 있으니까. 나 역시도 위 세 가지 전환 모두를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있다. 단지 책을 읽으며 개념들을 좀더 명확히 확인할 수 있었을 뿐이나, 이것도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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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 지난 2세기 동안 변화의 속도는 너무나 빨랐고, 그런 나머지 사회질서는 동적이고 가변적이라는 속성을 지니게 되었다. 이제 그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태로 존재한다. 현대의 혁명이라고 하면 우리는 1789년(프랑스 혁명), 1848년(유럽의 연쇄적 민주화 혁명), 혹은 1917년(러시아 혁명)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날은 모든 해가 혁명적이다. 요즘은 심지어 30세밖에 되지 않은 사람도 십대를 향해 “내가 어렸을 때는 세상이 지금과 완전히 달랐어”라고 말할 수 있다. 십대는 그 말을 믿지 않겠지만, 그 말은 사실이다. 예컨대 인터넷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990년 초반에 이르러서였다. 불과 20년밖에 되지 않은 일이다. 오늘날 우리는 인터넷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가 없다.
ㅡ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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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소개한 현대 철학계의 세 가지 흐름을 내 나름의 시선으로 비평해보려고 한다. 우선 뇌가 사고의 원천이라는 자연주의적 전환은 현대 뇌과학의 연구 성과로 볼 때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인간의 가장 핵심적 기능인 줄 알았던 ‘사고’는 점차 흐릿해지고, 범죄 유전자의 발견 등은 더 이상 인간과 동물을 구별할 특성이 무엇인지조차 혼란스럽게 만든다. 다음으로 미디어•기술론적 전환이 일어나고 있음 역시 타당한 주장으로 보인다. 스마트폰 등 통신매체의 발달이 커뮤니케이션 방식과 세상을 엄청나게 바꾸고 있다. 이를테면 페이스북의 댓글 없는 ‘좋아요’는 여론을 형성하고, 카카오톡 메시지를 읽지 않는 행위가 모종의 의미를 담는 경우가 있다. 이처럼 면대면 접촉이 감소하고 실시간 매체소통이 늘어나면서 비언어적 표현이 중요한 경우가 생긴다. 또 메신저의 업데이트로 추가되는 기능 하나하나가 우리의 소통방식에 크나큰 영향을 준다. 스마트폰이 보편화된 지 불과 10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다. 마지막으로 실재론적 전환은 세계에서 인간과 사고의 비중이 떨어지게 되어 나타나는 필연적 국면 전환일 것이다.
마지막 인용문의 내용과 같이, 인간의 시대는 이제 종말을 맞이할 것인가? 뇌과학의 발달과 함께, 자유의지는 역사의 뒤꼍길로 사라져갈지. 섬뜩하지만, 우리가 직면해야 할 미래, 아니 현실일지도 모르겠다.
20 세계는 지금 무엇을 묻고 있는가
그렇다면 여기서는 ‘철학’을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요? 이 책에서 지침으로 삼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가 1982년에 발표한 논문 가운데 일부입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2년 전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계몽이란 무엇인가"를 물얼 때 칸트가 알고자 했던 것은 "지금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가.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려 하는가. 이 세계, 이 시대, 우리가 살아가는 바로 이 순간은 대체 무엇인가"라는 것이었다. (중략) 이 특정한 역사적 순간에, 우리는 누구인가?
여기서 칸트의 의도라고 소개한 문장은 두말할 것도 없이 푸코 자신의 생각이나 다름없습니다. "지금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가.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려 하는가. 이 세계, 이 시대, 우리가 살아가는 바로 이 순간은 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푸코는 칸트의 이름을 빌려서 실은 자신의 문제를 밝힌 셈이죠. 이 표현을 이 책이 나아갈 방향으로 삼으려 합니다.
19세기 초 독일 철학자 헤겔은 철학에 대해 ‘미네르바의 부엉이’라는 비유를 들었습니다. 《법철학》 서문에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라고 했죠. 이 수사를 통해 헤겔이 말하려는 바는 무엇이었을까요? 철학이란 바로 우리 자신이 사는 시대를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일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우리는 누구인가)를 이해하기 위해 철학자는 현재에 이르는 역사를 되묻고 거기에서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전망해야 합니다. 이 책에서는 이 철학적 물음을 구체적 상황에 맞춰 해석하려고 합니다. - P20
35 ‘진리’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20세기 철학을 언어론적 전환으로 이해할 때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197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유행한 포스트모던과의 관계입니다. 원래 건축 분야에서 시작된 포스트모던은 이후 문화 전체의 새로운 운동으로 확장되어 커다란 시대적 흐름이 되었습니다.
‘포스트모던’을 철학적 용어로 공론화한 것은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적 조건》입니다. 그는 포스트모던을 ‘(모던의) 거대 담론에 대한 불신’으로 정의했습니다. 여기서 ‘거대 담론’이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와 규범을 가리킵니다. 이제 현대인은 이 같은 진리와 규범을 믿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대신에 리오타르가 포스트모던으로서 제창한 것이 작은 집단의 다른 ‘언어 게임’이었습니다. 즉 한 집단과 다른 집단을 구분짓는 ‘미시 담론’에 주목해 다양한 방향으로 분열·차별화하는 것이 포스트모던의 특징인 셈이죠.
이렇게 해서 포스트모던사상은 20세기의 언어론적 전환과 연결됩니다. 언어론적 전환은 극단적으로 말해서 ① "세계는 언어로 이루어진다"라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흔히 ‘언어구성주의’라 불리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이 개념을 대표하는 말로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그라마톨로지》)라는 자크 데리다의 표현이 자주 인용되었습니다.
또한 포스트모던은 언어구성주의와 함께 ② "다른 언어 게임은 공약 불가능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현실이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면, 언어가 달라질 때 현실도 달라지는 게 당연합니다. 그래서 일까요? 포스트모던은 다른 입장과의 ‘차이’를 강조하다가 마침내 어떤 주장도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상대주의에 도달합니다.
① 언어구성주의와 ② 상대주의를 제창한 철학자가 미국에서 활약한 포스트모더니스트 로티입니다. 그는 《언어론적 전환》을 편집한 뒤,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과 《실용주의의 결과》를 발표하며 자신의 주장을 뚜렷이 드러냈죠. 나아가 동시대의 프랑스 및 독일 철학자들과 교류하며 앵글로색슨계와 대륙계 철학의 상호 이해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면서 로티는 스스로 포스트모더니스트임을 인정했습니다.
오늘날은 포스트모던이 주장하던 ① 언어구성주의와 ② 상대주의가 철학뿐 아니라 문화 전반까지 침투한 듯 보입니다. 문화상대주의와 역사상대주의가 그 전형이라 할 수 있죠. 문화와 역사가 다르면 진리와 선악에 대한 판단도 달라진다는 이 개념은 현대인의 상식처럼 되었습니다. 또 학문적으로 ‘사회구성주의’라는 이론이 제창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로티와 같은 포스트모던적 구성주의와 상대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뉴욕대학교 교수 폴 보고시안입니다. 그는 대학원에 다닐 때 로티 밑에서 공부했는데, 그로 인해 도리어 로티를 강력하게 비판하게 되었습니다. 보고시안이 쓴 《지식의 공포》를 살펴봅시다. 이 책에서 보고시안은 최근 유행하는 포스트모던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최근 20년 이상, 자연과학은 아니더라도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에서는 인간 지식의 본성에 관한 테제를 둘러싸고 눈에 띄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바로 지식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다는 테제다. 사회적 구성이라는 술어는 비교적 최근에 등장했지만 바탕에 있는 사상은 오랫동안 논의된 마음과 현실의 관계에 관한 문제와 관련이 있다.
확실히 20세기 후반에 언어론적 전환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고, 오래지 않아 포스트모던의 유행과 동시에 사회구성주의와 상대주의가 강력하게 대두되었습니다. 그래서 도덕적 ‘선악’이나 법적 ‘정의’에 관해서도 보편 진리 없이 다양한 의견이 있을 뿐이었죠. 심지어 자연과학적 사안에 관해서조차 다양한 해석이 있을 뿐, 어느 설이 옳은지 결정할 수 없다는 말까지 나오기도 했습니다. - P35
38 포스트모던 이후의 세 가지 흐름
21세기를 맞이할 즈음 포스트모던의 세계적 유행도 끝이 났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언어론적 전환을 대신하는 사상을 찾아야 했죠.
1) 자연주의적 전환 예를 들어 지금도 미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철학자 존 설의 발언에 주목해봅시다. 《언화행위》를 출간한 존 설은 언어론적 전환의 강력한 추종자처럼 보였지만 《마인드》에서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20세기에는 대부분 언어철학이 ‘제1철학’이었다. 철학의 다른 분야는 언어철학에서 파생되었고 그 해결책도 언어철학의 귀결에 의존하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이제 언어에서 마음으로 이동했다. (중략) 이제 마음이 철학의 중심 토픽이다. 다른 문제, 예컨대 언어와 의미의 본성, 사회의 본성, 지식의 본성은 전부 마음의 성질이라고 하는 더 일반적인 문제의 특수한 예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자.
여기서 존 설은 ‘언어’철학에서 ‘마음(심리)’철학으로의 전환이 일어났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확실히 20세기 말부터 심리철학에 관한 문헌이 숱하게 출판되었습니다. 가령 옥스퍼드출판부에서 나온 《심리철학 핸드북》을 보면 활발히 전개되는 이 분야의 최신 상황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심리철학이라면 무엇보다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는지가 관건이겠죠. 아직까지는 정확한 이론이 확립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게 어떤 입장이든 최근의 인지과학, 뇌과학, 정보과학, 생명과학 등의 성과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이런 변화에 주목해 ‘인지과학적 전환’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혹은 이런 연구 경향이 마음을 자연과학적으로 연구한다고 해서 ‘자연과학적 전환’이라고도 부릅니다.
2) 미디어·기술론적 전환 포스트 언어론적 전환은 자연과학과 인지과학에 기반을 둔 심리철학만 제창한 게 아닙니다. 그 밖의 움직임도 확인해둡시다. 그 한 가지 예로 프랑스의 철학자 대니얼 부뉴는 레지스 드브레와 함께 ‘미디올로지’라는 이론을 제창했습니다. 그들은 이 학문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기호론적-언어론적 전환이 일어난 뒤 그것이 수정되며 화용론적 전환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후에는 미디올로지적 전환이 이 둘 사이에서 발화행위의 원인과 의미를 구성하는 조건을 연결하고 보완하는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여기서는 3단계(① 언어론적 전환 ② 화용론적 전환 ③ 미디올로지적 전환)를 가정했습니다. 그리고 큰 흐름상 언어론적 전환에서 미디올로지적 전환으로 나아갔음을 이해할 수 있죠. 미디올로지라는 용어가 생소한 사람도 많을 텐데,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질 때의 물질적·기술적 매체를 다루는 학문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미디어·기술론적 전환이라 부르기로 합시다.
3) 실재론적 전환 자연주의적 변환이나 미디어·기술론적 전환과는 별개로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사변적 실재론과 신실재론이라 불리는 흐름이 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움직임은 영미와 이탈리아까지 끌어들이며 차츰 큰 물결을 이루었죠.
이 같은 흐름에서 2011년에 논문집 《사변적 전환》이 나왔습니다. ‘대륙의 유물론과 실재론’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 서문에서 편집자들은 최근의 경향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다양하고 재미있는 철학적 경향과 지구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그 거점은 지지자들을 획득하고 그 경향을 상징하는 저작이 임계치를 맞기 시작했다. 이런 경향을 전부 망라하는 충분하고도 단일한 이름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심사숙고 끝에 이제 지겨워진 ‘언어론적 전환’을 대체하는 말로서 ‘사변적 전환’이라는 명칭을 제안한다. 부제인 ‘유물론’과 ‘실재론’은 새로운 경향을 한층 명확하게 가리키는 동시에, 물질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을 구별하는 기능을 한다. 1 자연주의적 전환(인지과학적으로‘마음’을 생각한다) 대표적 철학자:폴 처칠랜드,앤디 클라크
2 미디어·기술론적 전환(커뮤니케이션의 토대가 되는 매체·기술을 생각한다) 베르나르 스티글러,시빌르 크레이머
3 실재론적 전환(사고로부터 독립된 존재를 생각한다) 퀑탱 메이야수,마르쿠스 가브리엘
이 같은 사변적 전환이 어디로 향하는지 지금으로서는 그다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유물론과 실재론이라는 명칭이 암시하듯, 구성주의와 달리 ‘사고’에서 독립된 ‘존재’를 문제 삼고 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 까닭에 여기에서는 전체 흐름을 아울러 실재론적 전환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실재론적 전환을 제창한 연구자들 중에는 젊은 사람이 많은데, 그래서인지 큰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포스트모던적인 언어론적 전환에 이어 세 가지 새로운 ‘전환’이 제창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세 가지로 현대 세계의 철학적 경향을 망라할 수는 없지만 최근 들어 눈에 띄는 움직임으로서 주목할 만합니다. - P38
147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근대 감옥제도가 어떻게 성립되었는지 묘사했습니다. 그 핵심은 절대왕정 시대의 잔학한 형태에서 규율 훈련을 토대로 정신을 교정하는 형태로 전환하는 데 있었습니다. 이때 전제가 되는 것은 이성적 판단 능력을 가진 개인이라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푸코 자신도 깨달았듯, 이런 근대적 형벌제도에 오류가 있는 것 아닐까요?
형무소에 수용되었다고 해서 범죄자의 정신이 교정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애당초 개개인에게 이성적 판단 능력이 있다고 전제할 수 있을까요? 책임능력의 유무가 문제가 되는데, 처벌을 통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도대체 범죄자는 왜 그런 짓을 저지르는 걸까요? 어쩌면 그 범죄자는 자유롭게 행동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닐까요?
뇌과학 연구는 근대적 형벌제도의 전제에 질문을 던집니다. 개인이 정말로 이성적 판단 능력을 지니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을까요? 범죄자의 경우, 뇌 속 회로에 원인이 있어서 범죄를 일으킨 게 아닐까요? 흉악범이나 약물중독자의 뇌가 종종 사례로 제시되기도 하는 것처럼요. 아직은 확정적인 증거가 없습니다. 하지만 뇌과학자는 뇌가 원인이 되어 범죄행위가 일어나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범죄의 원인이 그 사람의 뇌에 있다고 말하는 날도 머지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때는 당연히 처벌 형태도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처럼 형무소에 수용해도, 범죄의 원인을 치유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근대적 처벌을 대신하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그것을 구상해야 할 시기가 머지않아 도래하지 않을까요? 어쨌든 근대적 처벌제도는 이제 황혼을 맞이하는 듯합니다. - P147
149 사유의 고고학이 분명히 보여주듯, 인간은 최근에 발견된 형상이다. 그리고 아마 종말이 가까운 발견물일 것이다. 만약 이런 배치가 출현했듯이 사라진다면 어떨까. 18세기의 전환점에서 고전주의적 사유의 밑바탕이 그랬듯 만약 우리가 기껏해야 가능성만 예감할 수 있고, 지금으로서는 어떤 형태일지, 무엇을 약속하는지도 모르는 어떤 사건에 의해 그 배치가 뒤흔들린다면 어떨까. 장담하건대, 인간은 바닷가 모래사장에 그려 놓은 얼굴처럼 사라질지 모른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의 종말은 푸코의 이름과 함께 일약 유명해졌습니다. 인간의 종말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생물로서의 인간 종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푸코는 이런 표현을 통해 무엇을 의도한 것일까요?
이는 《말과 사물》의 부제인 ‘인문과학의 고고학’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푸코에 따르면 "18세기 말 이전까지 인간이란 존재는 실재하지 않았"습니다. 18세기 말에 인간이 탄생하면서 그와 동시에 인문과학도 시작됐습니다. 이때 푸코가 염두에 둔 것이 칸트철학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인간을 출발점으로 보고 거기에서 모든 실존적 영역을 인식하자’는 개념이죠. 푸코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근대성의 문턱을 넘어서는 것은 인간 연구에 객관적인 모든 방법을 적용하기를 바랐을 때가 아니라, 인간이라 불리는 경험적 = 선험적 이중체가 만들어진 날로 정의된다.
여기서 명백히 밝혔듯이 푸코가 말하는 인간이란 근대의 발단에서 칸트가 고안해낸 인간 개념, 즉 ‘경험적 = 선험적 이중체로서의 인간’입니다.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런 인간 개념과 함께 근대가 시작되고 인간의 모든 과학이 형성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푸코에 따르면 이런 인간이 이제 소멸되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징조를 현대의 구조주의적 학문(정신분석학·문화인류학·언어학)에서 찾았습니다. 이 학문들이 인간이라는 개념 없이 완성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을 거치지도 않는, 다시 말해 인간을 소멸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이렇게 해서 18세기 말부터 시작된 인간은 이제 종말을 맞이하고 있다고 푸코는 생각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푸코의 아이디어를 빌려 근대를 ‘인간의 시대’라고 부르려 합니다. 단, 푸코처럼 18세기 말을 근대의 시작이라고 생각할지 말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그래도 근대가 ‘인간의 시대’ 혹은 ‘인간 중심 시대’임은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간의 시대’가 이제 종말을 맞이하려 합니다.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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