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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4
나쓰메 소세키 지음, 오유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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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집사람이 날 오해한 게 있어서. 그건 오해라고 설명해도 곧이듣질 않잖나. 결국 화를 내고 말았네.”
“어떻게 오해하셨는데요?” 선생님은 나의 이 질문에 대답을 피하셨다.
“내가 집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그런 사람이라면 이렇게 괴롭지는 않을 걸세.”
선생님이 얼마나 괴로워하고 계신지조차 내겐 도통 가늠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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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선생님‘의 처는 ‘선생님‘을 ‘이제 이 세상에서 자기가 기댈‘ 하나뿐인 사람이라고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후반부 ‘선생님과 유서‘편을 보면 자세히 나온다. 선생님은 그런 아내를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선생님‘이 늘 내면의 ‘그와 같은 전쟁‘을 겪었듯, 처라고 자신의 인생에 그런 것이 없었을까? 처는 자신만의 깊은 고민을 드러내지 않은 채 담담하게 선생님 곁에서 살아갔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선생님‘은 자신의 내면에 지나치게 빠져 타인을 이해하려는 마음을 가질 여유조차 없이 살았는지도 모른다. 상처는 어느 정도는 주관적인 성격을 띤다. 어디선가 모든 인생은 한 편의 소설로 쓸 정도가 된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가슴 속에 상처 하나 없는 사람 누가 있을까. 혹시 인간은 타인 혹은 자기 자신 둘 중 하나는 믿지 못할 때에야 비로소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극복되지 못한 과거가 결국 ‘선생님‘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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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나는 과거에 다른 사람에게 기만당한 적이 있네. 그것도 피가 섞인 내 친척한테 말이야. 나는 절대 그 일을 잊을 수 없네. 내 아버지 앞에서는 그렇게 선량한 사람처럼 굴던 그들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그렇게 파렴치하게 변해버린 거야. 어렸을 때 그들에게 당한 모욕과 기만을 난 이 나이가 될 때까지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네. 아마 죽을 때까지 그 한을 품고 갈 거야. 하지만 난 그들에게 복수하지 않았네. 아니, 생각해보면 나는 한 개인에 대한 복수 이상의 일을 지금 하고 있다고 봐야지. 나는 그들을 증오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들로 대변되는 인간이란 존재를 증오하는 법을 익혔네. 나는 이게 내 식대로의 복수라고 생각하네.”

100 “나는 과거의 한 사건을 계기로 사람을 믿지 않게 되었네. 자네도 예외가 아니었지. 하지만 더 이상 자네만큼은 의심하고 싶지 않네. 자넨 거짓을 말하기에는 너무 단순한 사람이거든. 나는 죽기 전까지 이 세상에 단 한 명이라도 좋으니 마음 놓고 흉금을 터놓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 자네가 그 단 한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되어줄 수 있겠는가? 자네는 스스로 양심에 한 점 거리낄 것 없는 진실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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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그들‘에 대한 증오를 인간에 대한 증오로 돌렸다. 그래서 누구도 믿지 않는다. 그런데 이는 상처를 흘려보내지 못한 고통받는 인간의 모습일 뿐이다. 사람은 사람을 용서하여야 한다. 사람의 불완전함을 인식하고 선량함을 신뢰해야 한다. 그래야만 홀가분해질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선생님은 ‘나’까지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면서 ‘나’는 믿겠다고 말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약한 모습이다. 이는 외로운 인간, 결국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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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 하지만 사모님에 대한 모순 정도라면 그렇게 큰 고통을 느끼지 않고 지나칠 수 있었네. 나의 번민은 사모님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계획적으로 나에게 접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시작된 거야. 모녀가 내 뒤에서 서로 입을 맞춰 지금까지 모든 일을 진행해왔다고 생각하니 나는 갑자기 숨이 막혀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됐지. 불쾌한 정도가 아니라 이젠 더 이상 발을 내딛을 곳이 없는 벼랑 끝에 몰린 기분이었네. 하지만 나는 마음 한구석에선 그녀를 굳게 믿었네. 그렇기 때문에 믿음과 의혹 중간에서 올바르게 행동할 수가 없었지. 나에겐 어느 쪽이나 진실이고, 또 양쪽 모두 허상이었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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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그러나 본래 인간의 마음은 지배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의 마음이 멀리 떠나 봤자 언어의 어항 속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니, 아스라이 떠나 버리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자(이렇게 위안하는 것이 좀 비참하긴 하다). 그저 ‘인간’의 마음일 뿐이다. 무시무시한 인공지능도 점점 다가온다는데,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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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 물론 그는 자기가 가고 싶다고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지만 내가 가자고 부추기면 어딜 가든 거칠 것이 없는 자유로운 입장이기도 했네. 나는 왜 선뜻 나서지 않냐고 물었지. 그는 별다른 이유는 없다고 대답했네. 그냥 집에서 책이나 읽는 게 자기는 더 편하다면서 말이야. 내가 좀 시원한 데 가서 공부를 하는 것이 몸에 더 이롭다고 하니까 그렇게 가고 싶으면 나 혼자 가면 되지 않냐고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나는 K를 혼자 그 집에 두고 나만 갈 수는 없었네. 나는 그때도 이미 K와 집 식구들이 점점 더 친밀해져가는 것을 보는 게 썩 편치 않았단 말일세. 그들이 서로 사이 좋게 지내는 게 처음에 목적한 바가 아니었냐고 묻는다면 달리 변명할 말이 없네. 그래, 내가 어리석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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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함께 지내면 필연적으로 어떤 문제가 생기는 것 같다. 물론 인간이 떨어져 지내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스마트폰은 거리를 무색케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떨어져 있어도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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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 나는 문득문득 옆에 조용히 있는 그 사람이 K가 아니라 그 집 딸이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했네. 헌데 내 생각이 그 정도 바람에서만 그치면 괜찮았을 텐데 때론 K도 지금 이 자리에 앉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의심이 가기 시작한 거야.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난 침착하게 책을 펴놓고 있을 수가 없었네. 벌떡 일어났지. 그리고 성난 사자가 포효하듯 마구 소리를 질러댔네. 잘 짜여진 시나 노래 가사를 한가하게 읊조릴 만큼 마음이 여유롭지 못했거든.

302 세계란 무엇인가? 황인찬
사실 세계는 없다.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모두 망상이고 착각이다. 세계는 ‘세계‘라는 총체로 수렴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는 존재한다. 망상이자 착각으로서 존재한다. 망상과 착각이 시인의 개성이며 태도가 되는 것이다. 시인은 자기 멋대로 왜곡하고 망가트린 세계를 통과하여 시를 제출한다. 다시 말하면 세계란 인식의 결과가 아니라 소망의 산출이다.
ㅡ황인찬 외, 《나는 매번 시쓰기가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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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저마다 세상은 이럴 것이라는 망상을 가지고 산다. 누군가는 점잖게 이를 세계관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솔직한 어느 시인은 망상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의심도 하나의 망상이요 세계관이다. 인간은 자기의 세계를 확장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즉, 의심을 현실로 만들지 않곤 배기지 못하는 것이다. 소설의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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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 두 사람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서 꼼짝하지 않았네. K는 오전과 마찬가지로 조용했지. 나도 생각에 잠겼네. 나는 내 마음을 K에게 털어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네. 하지만 그러기엔 이제 때가 너무 늦었다는 생각도 들었지. 왜 조금 전에 K의 말을 가로막고 내 마음을 밝히지 못했을까? 그것이 큰 실수였다는 생각이 든 거야. 억지로라도 그 자리에서 K의 고백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생각을 말해버렸더라면 그래도 이만큼 괴롭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됐네. 하지만 K가 자신의 마음을 신중하게 고백한 이 마당에 나도 너와 같은 마음이라고 밝히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우습지 않겠나. 나는 이 일을 어찌하면 좋을지 판단할 수 없었네. 내 머리는 후회와 안타까움으로 뒤범벅이 되어버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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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소설의 사건들이 이제는 종종 결정론적 관점에서 읽히기도 한다. 그러면 인물들의 감정이 조금은 우습고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저 어느 생명체의 소통방식 중 하나로서의 언어. 그러고 보면 내가 인간이란 존재를 과대평가해온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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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나는 식탁 앞에 앉자마자 일이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사모님의 표정을 살피면서 추측하고 있었네. 하지만 사모님이 K에게 그녀가 왜 쑥쓰러워하는지 설명하기 위해 내 앞에서 그날 있었던 일을 전부 꺼내는 건 도저히 듣고 있을 수 없었지. 사모님은 K의 속마음을 모르는 상태였고 또 어차피 알려질 일을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는 초조해서 식은땀이 다 났네. 다행히도 K는 다시 침묵으로 돌아갔지. 평소 때보다 더 기분이 좋았던 사모님도 내가 걱정하는 부분까지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네. 나는 휴, 하고 한숨을 내쉬고 방으로 돌아왔지. 그러나 내가 그때부터 K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해야만 했네. 나는 여러 가지로 내 마음을 변호할 말을 생각해보았네. 하지만 어떤 말로도 K 앞에서 나의 이런 행동을 정당화할 수 없었지. 비겁한 나는 급기야 나 자신을 변명해야 한다는 게 싫어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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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K와의 관계를 제쳐두고 사모님께 딸과 결혼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사회적 관계보다 개인적 욕망이 우선하였고 이것이 비극의 원인이 되었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20세기 당시는 공동체주의적 사회가 주류였던 반면 요즘은 점차 파편화되는 개인주의 시대다. 그래서 남 눈치보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말이 인기를 끈다. 그러나 그런 욕망의 대상조차 인간이라면 그 관계 또한 사회적이고, 그러한 관계 또한 또다른 욕망에 의해 무너질 위태위태한 상황에 항상 놓여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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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 뭐냐고 묻는 사모님에게 나는 턱으로 옆방을 가리키며 먼저 “놀라지 마십시오” 하고 경고했네. 사모님은 얼굴이 창백해졌지. “사모님, K가 자살했습니다” 하고 내가 말하자 사모님은 그 자리에 대리석처럼 뻣뻣이 굳어 아무 말도 못 했네. 그때 난 갑자기 사모님 앞에 손을 내밀고 고개를 조아렸네. “죄송합니다. 제 잘못이에요. 사모님께도 따님께도 죄송한 일을 저질렀습니다” 하고 사죄했네. 사모님과 마주서기 전까지 그런 말을 입에 올릴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말일세. 그런데 사모님의 얼굴을 보자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불쑥 튀어나온 거야. K에게 사죄할 수 없었던 나는 이렇게라도 사모님과 딸에게 잘못을 빌 수밖에 없었던 거라 생각해주게. 그때 나의 자연이 평소의 나를 물리치고 되살아나 참회의 입을 열게 한 거야. 사모님이 그런 깊은 의미로 나의 그 사죄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내게 있어 다행스런 일이었네.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도 “예상치 못한 일이니 어쩔 수 없잖아요” 하며 오히려 날 위로해주었네. 하지만 그 얼굴은 이미 공포와 경악으로 뻣뻣이 굳어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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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사람이 되기는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우리가 다른 사람이 어떤 행동을 취할 것까지 모두 예상할 만한 능력이 결코 있을 수 없는데 말이다. 비극적인 인간 존재.. ‘나도 모르게‘라는 말이 그야말로 진심인 것이다. 만약 이것이 자유 의지와는 무관한 본성이라면? 그럼 이 본성은 인간적인가, 비인간적인가.

23 하지만 선생님의 나에 대한 태도는 처음 인사한 날이나 친숙해진 이후나 별 차이가 없었다. 선생님은 언제나 조용했다. 어느 때는 너무 조용해서 나 혼자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나는 처음 선생님을 뵈었을 때부터 왠지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묘한 분위기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가까워져야겠다는 의지가 내 가슴속 어디선가 강하게 발동했다. 선생님을 상대로 이런 느낌을 갖은 사람은 어쩌면 나 혼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직감이 나중에 사실로 입증됐기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들이 유치하다고 하더라도, 바보 같다고 비웃더라도 그것을 미리 예견한 나의 직감에 대해서는 아무튼 믿음직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사랑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사람, 그러면서도 자신의 품안으로 들어오려는 것을 두 팔 벌려 껴안을 수 없는 사람 ㅡ 그것이 선생님이었다. - P23

27 "나는 외로운 사람입니다" 하고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그래서 당신이 나를 찾아와주는 게 기쁩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자주 오느냐고 물은 겁니다." - P27

114 그리고 나이 드신 두 분만 시골에 계시게 하는 건 어째 맘이 놓이질 않는다는 둥 자식된 도리로 너무 마음이 아프다는 둥 꽤나 감상적인 말까지 동원했다. 사실 그건 다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하지만 편지를 다 쓰고 나서 다시 읽어보니 쓸 때의 기분과는 좀 달랐다.

나는 기차를 타고 가면서 이런 인간의 심리에 대해 생각했다. 곰곰이 따져보니 내가 생각해도 내 자신이 생각을 이랬다 저랬다 바꾸는 가벼운 존재로 여겨졌다. 기분이 영 언짢았다. 나는 또 선생님 내외 분을 떠올렸다. 특히 이삼 일 전 저녁식사에 초대 받았을 때 나누었던 대화가 내 귓속에 다시 울렸다.

"어느 쪽이 먼저 저 세상에 갈까?"

나는 그날 저녁 선생님과 사모님 사이에 불거졌던 의문을 혼자서 되뇌어보았다.

그리고 그 의문은 누구도 자신 있게 답할 수 없는 것이라 결론내렸다. 만약 어느 쪽이 먼저 세상을 뜰 거라고 확실히 알고 있다면 선생님은 과연 어떠실까? 사모님은 또 어떻게 행동하실까? 두 분의 행동은 지금과 다름없을 것이다(죽음에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지고 있는 아버지를 고향에 두고 내가 아무 도움도 되어드리지 못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나는 인간이란 존재가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인간은 거스를 수 없이 타고난 가변적인 존재임을 절감했다. - P114

329 작은아버지에게 배신당했을 때 사람은 믿을 게 못 된다는 점을 절실히 느낀 건 사실이지만, 그건 타인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이지, 내 자신에게만큼은 그때까지만 해도 확실한 믿음이 있었네.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나 자신은 멋진 인간이라는 신념이 마음속 어딘가에 있었단 말이지. 그 믿음이 K로 인해 무참히 깨져버리고 나 자신도 작은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내 마음은 심하게 흔들리게 됐네. 인간들에게 등을 돌린 나는 결국 나 자신도 저버리고 닫힌 공간에 날 가두게 된 것이지. - P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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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번 시 쓰기가 재미있다 - 젊은 시인 12인이 털어놓는 창작의 비밀
김승일 외 지음 / 서랍의날씨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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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 세계란 무엇인가? ㅡ황인찬의 답ㅡ
우리는 시인에게 평가를 내리곤 한다. 이 시인은 세계가 없다거나, 이 시인은 세계가 특별하다거나. 그 세계라는 것은 아무래도 우리 모두가 살아서 숨쉬고 움직이는 세계를 가리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소위 세계 내 존재 어쩌고 할 때의 세계는 최소한 아닌 것 같다. 그러면 대체 무슨 세계가 있다는 것일까?
사실 세계는 없다.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은 모두 망상이고 착각이다. 세계는 ‘세계‘라는 총체로 수렴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는 존재한다. 망상이자 착각으로서 존재한다. 망상과 착각이 시인의 개성이며 태도가 되는 것이다. 시인은 자기 멋대로 왜곡하고 망가트린 세계를 통과하여 시를 제출한다. 다시 말하면 세계란 인식의 결과가 아니라 소망의 산출이다. 시인이 표현하는 세계란 시인 자신이 인지하고 감각하는 세계를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다. 인지하고 감각한 것을 서술하는 것은 과학의 소임이다. 시인은 ‘자신‘이 인지하고 감각한 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욕망을 다시 거기에 투사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시인은 세계와 대결한다. 시인 자신의 소망은 자신이 발붙인 현실에 투사될 수 없음을 알기에, 그것이 망상이며 착각임을 알기에(혹은 모르기에), 시인은 자신의 세계를 정교화하며 극단화한다. 그러한 싸움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상대하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시인의 세계다. 자신이 쌓아 올린 헛된 망상과 착각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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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세계는 무엇을 생각하는가 - 미래를 결정하는 다섯 가지 질문
오카모토 유이치로 지음, 전경아 옮김 / 한빛비즈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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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최근 철학계 흐름을 간단하게 소개한 책이다. 저자는 먼저 책에서 다루는 ‘철학‘의 개념을 ‘우리 자신이 사는 시대를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일‘이라고 정의한다. 그러고 나서 20세기 포스트모더니즘의 확산과 그 이후의 세 가지 현대 철학의 흐름을 소개하고 있다. 자연주의적 전환, 미디어•기술론적 전환, 실재론적 전환이 그것이다. 자연주의적 전환은 마음을 중점으로 두었고, 미디어•기술론적 전환은 매체를, 실재론적 전환은 사고로부터 독립된 존재를 다루는 흐름이라고 한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과거와 달리 현대는 하루하루가 혁명이라고 썼다. 과거엔 농업혁명이 있고 인지혁명이 있고, 그런 큼직큼직한 개별 사건사건이 있었다면, 지금은 시시각각 변화가 일어난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이런 책은 제법 도움이 된다. 물론 꼭 읽지 않아도 모르진 않을 것이다. 모두가 지금 현재의 세상을 살고 있으니까. 나 역시도 위 세 가지 전환 모두를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있다. 단지 책을 읽으며 개념들을 좀더 명확히 확인할 수 있었을 뿐이나, 이것도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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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 지난 2세기 동안 변화의 속도는 너무나 빨랐고, 그런 나머지 사회질서는 동적이고 가변적이라는 속성을 지니게 되었다. 이제 그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태로 존재한다. 현대의 혁명이라고 하면 우리는 1789년(프랑스 혁명), 1848년(유럽의 연쇄적 민주화 혁명), 혹은 1917년(러시아 혁명)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날은 모든 해가 혁명적이다. 요즘은 심지어 30세밖에 되지 않은 사람도 십대를 향해 “내가 어렸을 때는 세상이 지금과 완전히 달랐어”라고 말할 수 있다. 십대는 그 말을 믿지 않겠지만, 그 말은 사실이다. 예컨대 인터넷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은 1990년 초반에 이르러서였다. 불과 20년밖에 되지 않은 일이다. 오늘날 우리는 인터넷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가 없다.
ㅡ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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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소개한 현대 철학계의 세 가지 흐름을 내 나름의 시선으로 비평해보려고 한다. 우선 뇌가 사고의 원천이라는 자연주의적 전환은 현대 뇌과학의 연구 성과로 볼 때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인간의 가장 핵심적 기능인 줄 알았던 ‘사고’는 점차 흐릿해지고, 범죄 유전자의 발견 등은 더 이상 인간과 동물을 구별할 특성이 무엇인지조차 혼란스럽게 만든다. 다음으로 미디어•기술론적 전환이 일어나고 있음 역시 타당한 주장으로 보인다. 스마트폰 등 통신매체의 발달이 커뮤니케이션 방식과 세상을 엄청나게 바꾸고 있다. 이를테면 페이스북의 댓글 없는 ‘좋아요’는 여론을 형성하고, 카카오톡 메시지를 읽지 않는 행위가 모종의 의미를 담는 경우가 있다. 이처럼 면대면 접촉이 감소하고 실시간 매체소통이 늘어나면서 비언어적 표현이 중요한 경우가 생긴다. 또 메신저의 업데이트로 추가되는 기능 하나하나가 우리의 소통방식에 크나큰 영향을 준다. 스마트폰이 보편화된 지 불과 10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다. 마지막으로 실재론적 전환은 세계에서 인간과 사고의 비중이 떨어지게 되어 나타나는 필연적 국면 전환일 것이다.

마지막 인용문의 내용과 같이, 인간의 시대는 이제 종말을 맞이할 것인가? 뇌과학의 발달과 함께, 자유의지는 역사의 뒤꼍길로 사라져갈지. 섬뜩하지만, 우리가 직면해야 할 미래, 아니 현실일지도 모르겠다.

20 세계는 지금 무엇을 묻고 있는가

그렇다면 여기서는 ‘철학’을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요? 이 책에서 지침으로 삼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가 1982년에 발표한 논문 가운데 일부입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2년 전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계몽이란 무엇인가"를 물얼 때 칸트가 알고자 했던 것은 "지금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가.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려 하는가. 이 세계, 이 시대, 우리가 살아가는 바로 이 순간은 대체 무엇인가"라는 것이었다. (중략) 이 특정한 역사적 순간에, 우리는 누구인가?

여기서 칸트의 의도라고 소개한 문장은 두말할 것도 없이 푸코 자신의 생각이나 다름없습니다. "지금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가.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려 하는가. 이 세계, 이 시대, 우리가 살아가는 바로 이 순간은 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푸코는 칸트의 이름을 빌려서 실은 자신의 문제를 밝힌 셈이죠. 이 표현을 이 책이 나아갈 방향으로 삼으려 합니다.

19세기 초 독일 철학자 헤겔은 철학에 대해 ‘미네르바의 부엉이’라는 비유를 들었습니다. 《법철학》 서문에서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비로소 날기 시작한다"라고 했죠. 이 수사를 통해 헤겔이 말하려는 바는 무엇이었을까요? 철학이란 바로 우리 자신이 사는 시대를 개념적으로 파악하는 일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우리는 누구인가)를 이해하기 위해 철학자는 현재에 이르는 역사를 되묻고 거기에서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전망해야 합니다. 이 책에서는 이 철학적 물음을 구체적 상황에 맞춰 해석하려고 합니다. - P20

35 ‘진리’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20세기 철학을 언어론적 전환으로 이해할 때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197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유행한 포스트모던과의 관계입니다. 원래 건축 분야에서 시작된 포스트모던은 이후 문화 전체의 새로운 운동으로 확장되어 커다란 시대적 흐름이 되었습니다.

‘포스트모던’을 철학적 용어로 공론화한 것은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적 조건》입니다. 그는 포스트모던을 ‘(모던의) 거대 담론에 대한 불신’으로 정의했습니다. 여기서 ‘거대 담론’이란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와 규범을 가리킵니다. 이제 현대인은 이 같은 진리와 규범을 믿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대신에 리오타르가 포스트모던으로서 제창한 것이 작은 집단의 다른 ‘언어 게임’이었습니다. 즉 한 집단과 다른 집단을 구분짓는 ‘미시 담론’에 주목해 다양한 방향으로 분열·차별화하는 것이 포스트모던의 특징인 셈이죠.

이렇게 해서 포스트모던사상은 20세기의 언어론적 전환과 연결됩니다. 언어론적 전환은 극단적으로 말해서 ① "세계는 언어로 이루어진다"라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흔히 ‘언어구성주의’라 불리는 입장입니다. 그리고 이 개념을 대표하는 말로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그라마톨로지》)라는 자크 데리다의 표현이 자주 인용되었습니다.

또한 포스트모던은 언어구성주의와 함께 ② "다른 언어 게임은 공약 불가능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현실이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면, 언어가 달라질 때 현실도 달라지는 게 당연합니다. 그래서 일까요? 포스트모던은 다른 입장과의 ‘차이’를 강조하다가 마침내 어떤 주장도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상대주의에 도달합니다.

① 언어구성주의와 ② 상대주의를 제창한 철학자가 미국에서 활약한 포스트모더니스트 로티입니다. 그는 《언어론적 전환》을 편집한 뒤,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과 《실용주의의 결과》를 발표하며 자신의 주장을 뚜렷이 드러냈죠. 나아가 동시대의 프랑스 및 독일 철학자들과 교류하며 앵글로색슨계와 대륙계 철학의 상호 이해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면서 로티는 스스로 포스트모더니스트임을 인정했습니다.

오늘날은 포스트모던이 주장하던 ① 언어구성주의와 ② 상대주의가 철학뿐 아니라 문화 전반까지 침투한 듯 보입니다. 문화상대주의와 역사상대주의가 그 전형이라 할 수 있죠. 문화와 역사가 다르면 진리와 선악에 대한 판단도 달라진다는 이 개념은 현대인의 상식처럼 되었습니다. 또 학문적으로 ‘사회구성주의’라는 이론이 제창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로티와 같은 포스트모던적 구성주의와 상대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뉴욕대학교 교수 폴 보고시안입니다. 그는 대학원에 다닐 때 로티 밑에서 공부했는데, 그로 인해 도리어 로티를 강력하게 비판하게 되었습니다. 보고시안이 쓴 《지식의 공포》를 살펴봅시다. 이 책에서 보고시안은 최근 유행하는 포스트모던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최근 20년 이상, 자연과학은 아니더라도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에서는 인간 지식의 본성에 관한 테제를 둘러싸고 눈에 띄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바로 지식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다는 테제다. 사회적 구성이라는 술어는 비교적 최근에 등장했지만 바탕에 있는 사상은 오랫동안 논의된 마음과 현실의 관계에 관한 문제와 관련이 있다.

확실히 20세기 후반에 언어론적 전환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고, 오래지 않아 포스트모던의 유행과 동시에 사회구성주의와 상대주의가 강력하게 대두되었습니다. 그래서 도덕적 ‘선악’이나 법적 ‘정의’에 관해서도 보편 진리 없이 다양한 의견이 있을 뿐이었죠. 심지어 자연과학적 사안에 관해서조차 다양한 해석이 있을 뿐, 어느 설이 옳은지 결정할 수 없다는 말까지 나오기도 했습니다. - P35

38 포스트모던 이후의 세 가지 흐름


21세기를 맞이할 즈음 포스트모던의 세계적 유행도 끝이 났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언어론적 전환을 대신하는 사상을 찾아야 했죠.

1) 자연주의적 전환
예를 들어 지금도 미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철학자 존 설의 발언에 주목해봅시다. 《언화행위》를 출간한 존 설은 언어론적 전환의 강력한 추종자처럼 보였지만 《마인드》에서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20세기에는 대부분 언어철학이 ‘제1철학’이었다. 철학의 다른 분야는 언어철학에서 파생되었고 그 해결책도 언어철학의 귀결에 의존하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이제 언어에서 마음으로 이동했다. (중략) 이제 마음이 철학의 중심 토픽이다. 다른 문제, 예컨대 언어와 의미의 본성, 사회의 본성, 지식의 본성은 전부 마음의 성질이라고 하는 더 일반적인 문제의 특수한 예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자.

여기서 존 설은 ‘언어’철학에서 ‘마음(심리)’철학으로의 전환이 일어났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확실히 20세기 말부터 심리철학에 관한 문헌이 숱하게 출판되었습니다. 가령 옥스퍼드출판부에서 나온 《심리철학 핸드북》을 보면 활발히 전개되는 이 분야의 최신 상황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심리철학이라면 무엇보다 마음을 어떻게 이해하는지가 관건이겠죠. 아직까지는 정확한 이론이 확립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게 어떤 입장이든 최근의 인지과학, 뇌과학, 정보과학, 생명과학 등의 성과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이런 변화에 주목해 ‘인지과학적 전환’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혹은 이런 연구 경향이 마음을 자연과학적으로 연구한다고 해서 ‘자연과학적 전환’이라고도 부릅니다.

2) 미디어·기술론적 전환
포스트 언어론적 전환은 자연과학과 인지과학에 기반을 둔 심리철학만 제창한 게 아닙니다. 그 밖의 움직임도 확인해둡시다. 그 한 가지 예로 프랑스의 철학자 대니얼 부뉴는 레지스 드브레와 함께 ‘미디올로지’라는 이론을 제창했습니다. 그들은 이 학문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기호론적-언어론적 전환이 일어난 뒤 그것이 수정되며 화용론적 전환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후에는 미디올로지적 전환이 이 둘 사이에서 발화행위의 원인과 의미를 구성하는 조건을 연결하고 보완하는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여기서는 3단계(① 언어론적 전환 ② 화용론적 전환 ③ 미디올로지적 전환)를 가정했습니다. 그리고 큰 흐름상 언어론적 전환에서 미디올로지적 전환으로 나아갔음을 이해할 수 있죠. 미디올로지라는 용어가 생소한 사람도 많을 텐데,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질 때의 물질적·기술적 매체를 다루는 학문을 가리킵니다. 이것을 미디어·기술론적 전환이라 부르기로 합시다.

3) 실재론적 전환
자연주의적 변환이나 미디어·기술론적 전환과는 별개로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사변적 실재론과 신실재론이라 불리는 흐름이 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움직임은 영미와 이탈리아까지 끌어들이며 차츰 큰 물결을 이루었죠.

이 같은 흐름에서 2011년에 논문집 《사변적 전환》이 나왔습니다. ‘대륙의 유물론과 실재론’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 서문에서 편집자들은 최근의 경향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다양하고 재미있는 철학적 경향과 지구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그 거점은 지지자들을 획득하고 그 경향을 상징하는 저작이 임계치를 맞기 시작했다. 이런 경향을 전부 망라하는 충분하고도 단일한 이름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심사숙고 끝에 이제 지겨워진 ‘언어론적 전환’을 대체하는 말로서 ‘사변적 전환’이라는 명칭을 제안한다. 부제인 ‘유물론’과 ‘실재론’은 새로운 경향을 한층 명확하게 가리키는 동시에, 물질적인 것과 실재적인 것을 구별하는 기능을 한다.

1
자연주의적 전환(인지과학적으로‘마음’을 생각한다)
대표적 철학자:폴 처칠랜드,앤디 클라크

2
미디어·기술론적 전환(커뮤니케이션의 토대가 되는 매체·기술을 생각한다)
베르나르 스티글러,시빌르 크레이머

3
실재론적 전환(사고로부터 독립된 존재를 생각한다)
퀑탱 메이야수,마르쿠스 가브리엘

이 같은 사변적 전환이 어디로 향하는지 지금으로서는 그다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유물론과 실재론이라는 명칭이 암시하듯, 구성주의와 달리 ‘사고’에서 독립된 ‘존재’를 문제 삼고 있음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 까닭에 여기에서는 전체 흐름을 아울러 실재론적 전환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실재론적 전환을 제창한 연구자들 중에는 젊은 사람이 많은데, 그래서인지 큰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포스트모던적인 언어론적 전환에 이어 세 가지 새로운 ‘전환’이 제창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세 가지로 현대 세계의 철학적 경향을 망라할 수는 없지만 최근 들어 눈에 띄는 움직임으로서 주목할 만합니다. - P38

147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근대 감옥제도가 어떻게 성립되었는지 묘사했습니다. 그 핵심은 절대왕정 시대의 잔학한 형태에서 규율 훈련을 토대로 정신을 교정하는 형태로 전환하는 데 있었습니다. 이때 전제가 되는 것은 이성적 판단 능력을 가진 개인이라는 개념입니다. 그런데 푸코 자신도 깨달았듯, 이런 근대적 형벌제도에 오류가 있는 것 아닐까요?

형무소에 수용되었다고 해서 범죄자의 정신이 교정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애당초 개개인에게 이성적 판단 능력이 있다고 전제할 수 있을까요? 책임능력의 유무가 문제가 되는데, 처벌을 통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도대체 범죄자는 왜 그런 짓을 저지르는 걸까요? 어쩌면 그 범죄자는 자유롭게 행동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닐까요?

뇌과학 연구는 근대적 형벌제도의 전제에 질문을 던집니다. 개인이 정말로 이성적 판단 능력을 지니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을까요? 범죄자의 경우, 뇌 속 회로에 원인이 있어서 범죄를 일으킨 게 아닐까요? 흉악범이나 약물중독자의 뇌가 종종 사례로 제시되기도 하는 것처럼요. 아직은 확정적인 증거가 없습니다. 하지만 뇌과학자는 뇌가 원인이 되어 범죄행위가 일어나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범죄의 원인이 그 사람의 뇌에 있다고 말하는 날도 머지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때는 당연히 처벌 형태도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처럼 형무소에 수용해도, 범죄의 원인을 치유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근대적 처벌을 대신하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그것을 구상해야 할 시기가 머지않아 도래하지 않을까요? 어쨌든 근대적 처벌제도는 이제 황혼을 맞이하는 듯합니다. - P147

149 사유의 고고학이 분명히 보여주듯, 인간은 최근에 발견된 형상이다. 그리고 아마 종말이 가까운 발견물일 것이다. 만약 이런 배치가 출현했듯이 사라진다면 어떨까. 18세기의 전환점에서 고전주의적 사유의 밑바탕이 그랬듯 만약 우리가 기껏해야 가능성만 예감할 수 있고, 지금으로서는 어떤 형태일지, 무엇을 약속하는지도 모르는 어떤 사건에 의해 그 배치가 뒤흔들린다면 어떨까. 장담하건대, 인간은 바닷가 모래사장에 그려 놓은 얼굴처럼 사라질지 모른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의 종말은 푸코의 이름과 함께 일약 유명해졌습니다. 인간의 종말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생물로서의 인간 종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푸코는 이런 표현을 통해 무엇을 의도한 것일까요?

이는 《말과 사물》의 부제인 ‘인문과학의 고고학’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푸코에 따르면 "18세기 말 이전까지 인간이란 존재는 실재하지 않았"습니다. 18세기 말에 인간이 탄생하면서 그와 동시에 인문과학도 시작됐습니다. 이때 푸코가 염두에 둔 것이 칸트철학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인간을 출발점으로 보고 거기에서 모든 실존적 영역을 인식하자’는 개념이죠. 푸코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우리가 근대성의 문턱을 넘어서는 것은 인간 연구에 객관적인 모든 방법을 적용하기를 바랐을 때가 아니라, 인간이라 불리는 경험적 = 선험적 이중체가 만들어진 날로 정의된다.

여기서 명백히 밝혔듯이 푸코가 말하는 인간이란 근대의 발단에서 칸트가 고안해낸 인간 개념, 즉 ‘경험적 = 선험적 이중체로서의 인간’입니다.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런 인간 개념과 함께 근대가 시작되고 인간의 모든 과학이 형성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푸코에 따르면 이런 인간이 이제 소멸되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징조를 현대의 구조주의적 학문(정신분석학·문화인류학·언어학)에서 찾았습니다. 이 학문들이 인간이라는 개념 없이 완성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을 거치지도 않는, 다시 말해 인간을 소멸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이렇게 해서 18세기 말부터 시작된 인간은 이제 종말을 맞이하고 있다고 푸코는 생각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푸코의 아이디어를 빌려 근대를 ‘인간의 시대’라고 부르려 합니다. 단, 푸코처럼 18세기 말을 근대의 시작이라고 생각할지 말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그래도 근대가 ‘인간의 시대’ 혹은 ‘인간 중심 시대’임은 누구나 인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간의 시대’가 이제 종말을 맞이하려 합니다. - P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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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관조 씻기기 - 제31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민음의 시 189
황인찬 지음 / 민음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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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은 처음 읽었다.
평소에 스도쿠같이 머리 쓰는 취미를 좋아한다. 그래선지 수수께끼 같은 시들의 의미를 파악해가는 과정이 좋았다. 그야말로 시집 읽기는 나에게 순수한 쾌감을 가져다 주었다. 앞으로도 시집을 종종 읽겠다.

120 하지만 미감의 차원뿐 아니라 윤리성의 차원에서 그의 시적 주체를 ‘무위‘의 상태로 제어하는 또 하나의 힘이 있음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하는 순간에 도달하고 만다.

교탁 위에 리코더가 놓여 있다
불면 소리가 나는 물건이다

그 아이의 리코더를 불지 않았다
아무도 보지 않는데도 그랬다

보고 있었다

섬망도 망상도 없는 교실에서였다
ㅡ<레코더>

이 짧고 담담한 시 한 편은 어째서 쓸쓸하면서도 아린 지경으로 우리의 감정을 붙들어 놓을까. 아무도 없는 교실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리코더. 시각뿐 아니라 청각의 관능성에 민감한 그의 특성상 리코더는 주체에게 너무나도 매력적인 사물이 아닐 수 없다. 대개의 인간이라면 욕망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고, 그래서 갖고 싶고, 만약 리코더를 갖지 못한다면 한 번 불어라도 보고 싶을 것이며, 마지막에는 손을 대어 쓰다듬어라도 볼 터이다. 그게 사물을 대하는 보편의 인간이 펼칠 수 있는 행동으 상상 범주다.
그런데 황인찬의 시적 주체는 다르다. 누구 보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는 섬망도 망상도 없는 지극히 ‘정상적인 정신 상태‘의 주체가 펼쳐 보이는 행동을 보라. 그는 그저 바라본다. 투명하고 담담하게 계속 바라본다! 자신의 손이 닿는 과일마다 썩어 있음을 발견했던 <원정>의 김종삼처럼, 마치 자신이 손을 뻗기만 하면 죄를 짓게 될 것임을 예감하는 사람이라니. 시적 주체는 도저한 죄의식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행동의 모든 것이 죄와 연결되는 프로세스를 지닌 시람에게 차라리 가장 행복한 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이 아닐까.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을까. 있다. 그 사람이 바로 황인찬이다. 대신 이런 식의 ‘무위‘에는 슬픔이 장막처럼 드리워 있다. 죄의식의 차원에서 이미 더럽혀진 자신을 발경하고 꾹꾹 울음을 참는 자의 비감이 서려 있기에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여섯 살 난 하은이의 인형을 빼앗아 놀"다가 결국 너무 무서워서 울음을 타뜨리고 말았다(<의자>)는 시는 기이하면서도 익숙하다. 처음으로 시적 주체가 일종의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것으로 시가 출발하기에 기이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행동을 수행한 순간 내면화된 초자아의 목소리에 추궁을 당하다가 결국 죄를 인정하고 울어 버리는 것은 또 한편 익숙하다. 이전의 인용 시에서 "바다에 있었는데, 겨울이았다 잘못 들은 소리가 달려왔다 당신 아이가 바다에 빠졌습니다 당신 아이가 바다에 빠졌다구요// 빠졌다구요?// 바닷가에는 사람이 없다"(<파수대>)라고 말할 때, 이 자기 반영적 메아리에는 파수대에 서서 죄를 추궁하는 신의 목소리가 배어 있다. 이제 할머니가 가리킨 "언덕 위의 법원"은 우리의 상상 체계 속에서 ‘언덕 위의 교회‘와 겹치고, "하얀색 경찰차"는 ‘신의 처벌과 감시‘(<법원>)를 연상시키는 지경이 된다. 이들 시편들이 기이하게도 인간 본연의 죄의식과 처벌에 대한 공포심을 일깨운다는 점을 수긍하게 되는 것이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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