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8 오스만 노예 세대의 일반적인 성격은, 어느 미국인 학자의 훌륭한 연구에서 인용한 다음의 구절이 잘 전해준다.

"이 오스만의 통치 제도 안에는 술탄(왕)과 그의 세대, 제국 왕실의 여러 관리, 정부 행정 관리, 기병과 보병으로 이루어지는 상비군, 군인·궁내관·정부 관리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고 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람들이 칼과 펜과 왕호를 휘둘렀던 것이다. 그들은 종교법의 관할에 속하는 사법권과 비 이슬람 교도인 피지배자, 외국인 집단의 손에 위임된 몇몇 제한된 직무를 제외한 모든 나라 정치를 집행했다. 이 제도에서 가장 중요하고 특색 있는 점은, 우선 첫쨰로 그 주도적 집행 요원이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모두 그리스도교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사람이거나 또는 그러한 사람의 자식으로 성립되었던 일이고, 둘째로는 이 제도의 거의 모든 인원은 술탄의 노예로서 이 제도에 개입되어 어떠한 높은 재력과 권력, 위대함의 수준에 도달한다 해도 평생 술탄의 노예 신분으로 그쳤던 일이다. ······
왕족도······노예 세대 안에 넣어 무방하다. (왜냐하면) 술탄의 자녀를 낳은 여자들이 노예였고, 술탄 자신도 노예의 자식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술레이만 시대 훨씬 이전부터 술탄은, 왕족 신분의 신부를 맞아들이는 것이라든가 또한 자기 자식의 어머니에게 황후 칭호를 내리는 것도 중지하고 있었다. ······오스만 제도는 계획적으로 노예를 데려다가 대신을 삼았다. 양을 몰거나 농지를 경작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는 소년을 데려다가 신하나 왕녀의 남편으로 삼았다. 여러 세기 동안 그리스도교도의 이름을 이어받은 집안의 젊은이를 데려다가 이슬람 국가의 최고 통치자로 삼았으며, 또한 십자가를 꺾고 초승달이 그려진 깃발을 높이 쳐드는 것을 최대의 목적으로 사믄 무적 군대의 병사와 장군으로 만들었다. ······‘인간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는 기본적 관습의 조직과, 생활 그 자체와 거의 같은 정도로 뿌리 깊은 것으로 여겨지는 종교적·사회적 선입견을 당당하게 무시하고, 오스만 제도는 부모에게서 자식을 영구히 빼앗아, 그들이 한창 일할 수 있는 기간 동안 처자식을 생각하지 못하게 했으며, 재산을 보유하는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성공과 희생에 대해 나라에서 베푸는 혜택과 그들의 자녀에게도 주어진다는 명확한 약속을 해주지 않았고, 가문이나 이전의 공적과는 전혀 관계없이 지위를 높여주거나 낮추었으며, 색다른 법률과 윤리와 종교를 가르쳤고, 머리 위에 칼이 드리워져 있어서 언제 어느 때 이제까지의 순조롭기 비할 데 없었던 영달의 빛나는 경력이 일격에 사라질지 모른다는 것을 늘 그들에게 의식하게 했다." - P227

229-30 이 제도가 건재한 동안은 필요한 인원이 여러 이교도의 공급원에서, 이를테면 국외로부터 온 전쟁 포로 또는 노예 시장에서 사들여 오거나 지원한 자를 받아들여 보충되었고, 또한 국내에서는 정기적으로 행한 강제 징발에 의하여 젊은이들을 모아 보충되었다. 그리고 새로이 징집된 요원은 정성들인 교육을 받았다. 단계가 준엄했고 처벌은 극도로 냉혹했지만 한편으로 끊임없이 계획적으로 야심을 북돋아 주었다. 오스만 파디샤의 노예 세대에 편입된 모든 소년들은 그들 앞에 재상이 되는 길이 열려 있었으며, 그들의 장래가 훈련 기간 동안에 얼마나 용감성을 나타내느냐에 걸려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다.
이 교육 제도의 전성기에 대한 기록은, 플랑드르 태생의 학자이며 외교관으로서 장려왕 술레이만에게 파견된 합스부르크 궁정(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낭트 1세)의 사절이었던 오기에르 기셀린 데 부스베크가 직접 관찰하여 생생하고 상세한 기술을 남기고 있다. 그의 결론은 오스만왕국을 격찬하고 반대로 당시의 서유럽 그리스도교 세계의 교육 방법을 비판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투르크 인이 이 같은 제도를 갖고 있는 것을 보고 부럽게 여겼다. 비범한 재능이 있는 인간을 손에 넣으면 마치 아주 값진 진주를 발견한 것처럼 기뻐하고 정신 차릴 줄 모르는 것이 투르크 인의 상례이다. 그리고 그 인간 속에 잠겨 있는 타고난 능력을 여지없이 발휘시키기 위하여 온갖 노력과 배려를 기울인다. 군사적 재능이 엿보일 때에는 특히 그렇다. 우리 서유럽의 방식은 얼마나 다른가? 서유럽에서 우리는 좋은 개나 매나 말을 입수하면 매우 기뻐하여 그 짐승을 그 종류가 달할 수 있는 최고도의 완전함에 도달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의 경우에는 우연히 뛰어난 천분을 가진 인간이 발견되었더라도 우리는 그러한 노력은 전혀 하지 않고 그 인간의 교육을 특히 우리의 일로는 생각지 않는다. 그래서 서유럽인은 잘 훈련된 말이나 개나 매에게서 갖가지 새로운 즐거움과 봉사를 얻지만, 투르크 인은 교육에 의하여 품성이 함양된 인간이 다른 어느 동물보다도 훨씬 뛰어나고 탁월하다는 것에 의하여 주어지는 훨씬 커다란 보수를 얻는다.
결국 이 제도도 멸망했지만, 그것은 모든 인간이 그 특권을 부여받으려고 물밀듯이 쇄도하였기 때문이다. 16세기 끝 무렵에는, 흑인을 제외한 모든 이슬람 교도 자유민에게 예니체리 군단의 문호가 개방되었다. 그 결과 민원은 늘어났고, 규율과 능률은 저하되어갔다. 17세기 중간 무렵 이들 인간 번견(番犬)들은 ‘자연으로 돌아가‘ 파수꾼으로서 파디샤의 인간 가축을 지키고 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대신 그것을 괴롭히는 늑대로 되돌아가 버렸다. - P229

232-5 스파르타의 제도에 있어서도 오스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매우 유능한 제도인 동시에 치명적으로 지나친 경직성 때문에 결국 와해되고 말았는데, 그 현저한 특징은 인간성을 완전히 무시했다는 점에 있었다. 스파르타 인의 ‘아고게(교육 제도)‘는 오스만의 노예 세대만큼 극단적으로 태생과 문벌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스파르타의 자유시민 지주는 오스만 제국의 이슬람 교도민 지주 귀족과는 정반대 입장에 있었다. 속령 메세니아에 대한 스파르타의 지배권을 유지하는 임무의 거의 전부를 그들에게 부과했다.
그와 동시에 스파르타의 시민 단체 그 자체 내부에서는 평등의 원칙이 엄중히 실시되었다. 스파르타 인은 모두 국가로부터 같은 크기나 또는 같은 생산력을 지닌 토지를 할당받았다. 그리고 이와 같이 할당받은 땅은 각각 메세니아 인 농노(헬로트)가 위임받아 경작했는데, 그럼으로써 소유자인 스파르타 인과 그 세대를 부양하기에 충분한 식량을 공급해 주었으며, 동시에 스파르타 인은 그 남는 정력의 전부를 전쟁 기술에다 바칠 수가 있었다. 스파르타의 자녀는 허약하다는 이유로 병역을 유예 받고 버림받아 죽임을 당하는 자를 빼놓고는 누구나가 7살 이후부터 스파르타식 군사 교육을 받아야만 했다. 예외는 있을 수 없어 여자아이도 남자아이도 똑같이 체육 훈련을 받았다.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남자들이 보는 앞에서 벌거벗은 채 경기를 했다. 스파르타 인은 그런 점에 있어서는 현대의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성적 자제, 또는 무관심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던 것 같다.
스파르타에서는 우생학적 입장에 입각하여 철저하게 산아 통제를 실시했고 만일 남편이 허약하면 자기보다 튼튼한 남자를 데려다 그 집의 아이를 낳게 하는 종마 역할을 장려했다. 플루타르크에 의하면 스파르타 인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스파르타 인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암캐와 암말에게는 타인에게서 빌려 오거나 또는 돈을 주고 사오거나 하여 될 수 있는 대로 우수한 수컷을 붙여 주도록 애쓰면서도, 자기 여자는 집안에 가두어 두고 끊임없이 감시하며 설령 남편이 저능하거나 늙었거나 병신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남편의 신성한 권리이기나 한 듯 남편 이외의 인간의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하는 성적 관슴을 속악하고도 쓸모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스파르타의 제도의 주요한 특색은 오스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감독·도태·전문화·경쟁심 등이었다. 그리고 어느 경우에도 이런 특색은 단순히 교육의 단계만으로 한정되어 있지 않았다. 스파르타 인은 53년 동안 군무에 복종했다. 어떤 점에서는 스파르타 인에게 부과되는 요구가 예니체리 병사에게 부과되는 요구보다 가혹했다.
예니체리 병사는 결혼을 시키지 않는 방침이었지만, 그래도 결혼하면 부부 숙사에서 살도록 허용되어 있었다. 그런데 스파르타 인은 결혼을 강요당하면서 가정 생활을 영위하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었다. 결혼 후에도 여전히 병영에서 식사를 하고 자야만 했다. 그 결과 거의 믿기 어려울 정도로, 그리고 확실히 압도적인 공공 정신이 양성되었다.
그것은 영국인으로서는 비록 전쟁 중이라 할지라도 군율에 복종한다는 것은 곤란한 일이며 지극히 싫은 일인데, 하물며 평상시 같으면 절대로 참을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것이어서, 그 후 지금까지 이와 같이 개인을 완전히 희생하며 공적인 일에 봉사하는 극단적인 애국심을 ‘스파르타 정신‘이라고 이름 붙여놓게 됐을 정도이다. 이 정신의 일면이 「테르모필라이의 3백 명의 용사」이야기나 「소년과 여우」이야기에 나타나 있다.
그 반면, 스파르타 소년 교육의 마지막 2년간이 통례적으로 ‘비밀 과업‘에 소요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공인된 살인단으로, 그들은 밤에 지방을 순회하다가 어떤 농노든 반항의 징조가 보일 때는 물론이거니와 어떤 형태이든 간에 조금이라도 무례한 일을 저지르거나 주도권을 잡고 있는 듯한 징조가 보이면 죽이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스파르타의 ‘단선적‘ 성격은 오늘날의 스파르타 박물관을 찾아가 보면 곧 눈에 띈다. 스파르타 박물관은 다른 박물관의 예술 소장품과 전혀 양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 수집 유물에 있어서 구경꾼의 눈은 대체로 기원전 5세기에서 4세기에 해당되는 고전 시대의 걸작을 찾게 되고, 또 그것을 발견하면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버리고 만다. 그러나 스파르타 박물관에는 고전 시대의 미술품이 전혀 없다는 점이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이다. 고전 시대 이전의 진열품을 보면 그 이후 장래성이 드러나 보이는데 그 뒤에 계속되는 것은 찾으려 해도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연속성에 완전히 틈새가 생겨 있으며, 그 뒤에 오는 것은 소위 헬라스 시대와 로마 시대의 표준화되고 아름다운 광택을 잃은 작품들 뿐이다.
초기 스파르타 예술이 중단되는 시기는 대체적으로 킬론이 장관직을 맡고 있었던 시기와 일치한다. 그 때문에 가끔 이 정치가가 스파르타 제도의 창시자의 한 사람이었다고 추측되는 것이다. 퇴폐기로 접어든 뒤 중단된 때와 거의 같은 시기에 갑자기 예술 제작이 다시 시작되는데, 그것은 스파르타 제도가 외래의 정복자에 의해 강제적으로 폐지된 기원전 189~188년 이후의 일이었다.
이 제도가 그 ‘존재 이유‘가 소멸된 뒤에도, 즉 메세니아가 영원히 없어지고 난 뒤에도 2세기 동안에 걸쳐 존속했다는 사실은, 이 제도가 얼마나 견고했는가를 나타내는 기묘한 증거이다. 이 연대에 앞서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일반적 명제 형식으로 스파르타의 묘비명을 썼다.

"국민은 복종시켜야 할 까닭이 없는 이웃 ‘즉 그리스 인이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태생이 천한 무법자‘들이 아닌 그리스 인‘을 복종시킬 것을 목적으로 전쟁 기술 훈련을 해서는 안 된다. ······어떠한 사회 조직이건 군사 제도도 다른 모든 제도와 마찬가지로 군인이 반드시 임무를 수행하지 않아도 되는 평상시의 상태를 목표로 구성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해야 한다." - P232

236 이와 같이 에스키모·유목민·오스만 및 스파르타 인은 인간성의 무한한 다양성을 될 수 있는 대로 버리고 그 대신 융통성이 없는 동물성을 취하여 그들의 사업을 성취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들은 퇴보의 길에 발을 들여놓았다. 생물학이 가르치는 바에 의하면, 지극히 특수한 환경에 지나치게 잘 적응한 동물의 종은 진화의 과정에서 막다른 곳에 이르렀으며 장래성이 없다고 했는데, 발육 정지 문명의 운명이 바로 그것이다.
그와 비슷한 운명의 하나는 유토피아의 이름으로 불리는 공상적 인간 사회가 보여주며, 또 하나는 사회적 곤충에 의하여 조작되는 현실 사회가 보여준다. 비교해 보면 플라톤의 「국가」나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개미탑이나 벌집에서도 우리가 모든 발육 정지 문명에 있어서 본 바와 같은 현저한 특징 즉 카스트와 전문화라는 특징을 발견한다. - P236

236-7 사회적 곤충이 현재의 사회적 발전의 단계에 도달하여 그 단계에서 영원히 정지하게 된 것은 ‘호모 사피엔스‘ 인종이 보통 일반의 척추동물 속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되는 몇백만 년 이전의 일이었다. 유토피아의 경우는 애당초 가설에서부터 형이상학적으로 정지되어 있다. 유토피아의 경우는 애당초의 가설에서부터 형이상학적으로 정지되어 있다. 이들 작품은 예외 없이 행동 공상 사회의 묘사라는 형태를 빌어 위장한 행동 강령이며, 인간에게 환기시키려는 행동은 거의 늘 이미 쇠퇴기에 들어가 있는 시대의 탈출구로서 하향 운동을 인위적으로 막지 않는다면 결국 멸망해 버릴 현실 사회를 어느 일정한 수준으로 끌어올려 고정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사회에 있어서도 유토피아가 쓰여지는 것은 대개 그 사회의 성원들이 그 이상의 진보의 기대를 상실한 뒤의 일이므로, 하향 운동을 저지하는 것이 대다수의 유토피아가 염원하는 최대한의 것이다. 따라서 이런 문학의 장르 전체를 부르는 기원이 된 영국의 천재의 주목할 만한 작품(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유토피아가 뜻하는 절대 부동의 이상적 안정 평형 상태라는 것은 다른 일체의 사회적 목적이 이르지 못할 이상적 상태로서 언제나 상위에 있어, 필요하다면 모든 현실적 사회적 목적은 희생될 수도 있는 것이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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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3-01-01 0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베텔게우스님, 새해인사 왔습니다.
2023년 계묘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올해도 건강하고 행복한 한 해 되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베텔게우스 2023-01-01 00:33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인사 드렸습니다! 서니데이님도 늘 건강하시고 2023년 검은 토끼 해, 하시는 일 모두 다 이루시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