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시트
황선미 지음 / 비룡소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4 장미가 인정하지 못하거나 잘 모르는 게 있었다. 장미가 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누군가에게는 장미도 시선을 끄는 데가 있는 애라는 사실. 장미가 혼자 남지 않으려고 노력해서 그나마 친구들과 어울렸다고 믿는 것과 달리 제법 괜찮은 애라는 인상을 주곤 했던 것이다. - P94

140 포만감이 날 선 감정을 다스릴 수 있다는 건 장미가 처음 경험하는 일이었고 청소부에 대한 인식마저 바꿔 버렸다. - P140

199 "당분간만이야."
청소부가 딱 잘라 말하고 나갔다. 나가면서 중얼거렸다.
"내가 미쳤지."
장미는 군소리 없이 청소부를 따라갔다.
김순영. 그녀가 병원비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묻지 않았고 당분간이 얼마 동안을 의미하는지도 묻지 않았다. 통원 치료가 끝날 때까지 그녀가 곁에 있기로 했고 머물 곳이 그룹홈은 아니라는 걸 짐작한 게 다였다.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따르면서도 장미는 경계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청소부는 고모보다 먼 사람이었다. 내가 미쳤지, 라는 말처럼 언제든지 정신 차리고 타인이 될 수 있는 사람. 그녀가 언제 돌아서든 상관없으려면 경계심을 가져야만 했다. 그게 언제든 덜 힘들게 괜찮을 수 있게. - P199

231 한밤중에 진주로부터 문자가 왔다.
-ok?
괜찮은지 묻는 듯했다. 붙잡히지 않고 무사히 왔는지.
-ㅇㅇ
-잘살아기지배야
-너두
-나이제너몰라안녕
안녕. 그 글자를 장미는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숨 막히게 붙어 있는 글자들. 진주가 떠났다는 게 느껴졌다. 어디서 이걸 보냈을까. 이렇게 적으며 진주는 웃었을까. - P231

232 장미는 꾸역꾸역 밥그릇을 비웠다. 청소부는 장미가 짐작만으로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른이다. 고모도 꺼린 자기를 챙겨 주고 편이 돼 주고 옷을 사 주고 집에 들이고 택시비를 내준 사람이다. 장미에게 유일한 어른, 유일한 의지. 그렇다고 장미가 안심한 건 아니었다. 설명을 다 이해하지도 못했다. 청소부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만 믿었다. 아니, 그러기를 바랐다. 간절히.
청소부가 식탁 귀퉁이에 놓였던 쪽지를 집어 들었다. 밤에 하티 분유를 타던 중에 장미가 적어 놓은 거였다. 제가 너무 나쁜 애라서 정말 죄송해요. 청소부가 마음을 풀고 용서해 주기를, 모든 걸 눈감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적은 거였다. 경찰에 연락할 줄 알았으면 남기지 않았을.
청소부가 장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넌 나쁜 게 아니라, 아픈 거야."
그 소리가 장미의 심장에 쿡 박혀 버렸다. 감당할 수 없게 몸이 떨려서 장미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말이 되지 못한 뜨거운 덩어리가 가슴에서 목구멍으로 기어올랐다. 몸이 뜨거워졌고 울음이 터져 나왔다. 입을 틀어막고 화장실로 도망치는 장미를 청소부가 붙들었다. 그리고 숨도 못 쉬게 끌어안았다. 청소부의 앞자락에는 조금 전에 만든 음식 냄새가 배어 있었다. 장미처럼 뜨겁고 장미처럼 떨고 있는 가슴이었다. 그 모든 것으로 장미는 믿었다. 괜찮을 거야. 나쁜 일 아냐. - P23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