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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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홧김에 김지영 씨는 늦게 출근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똑같이 출근하고 똑같이 일할 거라고. 1분도 날로 먹을 생각 없다고. 그리고 미어터지는 지옥철을 견디기 힘들어 한 시간씩 일찍 출근하며 내내 섣불리 뱉어 버린 말을 후회했다. 어쩌면 자신이 여자 후배들의 권리를 빼앗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주어진 권리와 혜택을 잘 챙기면 날로 먹는 사람이 되고, 날로 먹지 않으려 악착같이 일하면 비슷한 처지에 놓인 동료들을 힘들게 만드는 딜레마. - P139

149 의사는 모니터에 뜬 김지영 씨의 이전 치료 기록들을 훑어본 후, 모유 수유를 해도 괜찮은 약들로 처방하겠다고 말하며 마우스를 몇 번 클릭했다. 예전에는 일일이 환자 서류 찾아서 손으로 기록하고 처방전 쓰고 그랬는데, 요즘 의사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예전에는 종이 보고서 들고 상사 찾아다니면서 결재 받고 그랬는데, 요즘 회사원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예전에는 손으로 모심고 낫으로 벼 베고 그랬는데, 요즘 농부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라고 누구도 쉽게 말하지 않는다. 어떤 분야든 기술은 발전하고 필요로 하는 물리적 노동력은 줄어들게 마련인데 유독 가사 노동에 대해서는 그걸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전업주부가 된 후, 김지영 씨는 ‘살림‘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이중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때로는 ‘집에서 논다‘고 난이도를 후려 깎고, 때로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라고 떠받들면서 좀처럼 비용으로 환산하려 하지 않는다. 값이 매겨지는 순간, 누군가는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겠지. - P149

151 김지영 씨가 결혼하던 해에 자연주의 출산 관련 다큐멘터리가 TV에서 방영되고, 이후로 관련한 책들이 출간되면서 자연주의 출산 붐이 있었다. 의료진의 개입을 최대한 줄이고, 아이와 엄마가 주체가 되어 자연스럽게 아기를 낳자는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목숨이 걸린 일이다. 김지영 씨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출산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해 병원을 선택했고, 출산 방법은 부모의 가치관과 사정에 따른 판단일 뿐 어느 것이 더 낫고 말고 할 것은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언론에서 병원의 처치와 약물들이 아이에게 미칠 수 있는 인과관계도 불분명한 악영향을 언급하며 죄책감과 불안감을 안겨 주었다. 머리만 좀 지끈거려도 쉽게 진통제를 삼키는 사람들이, 점 하나 뺄 때도 꼭 마취 연고를 바르는 사람들이, 아이를 낳는 엄마들에게는 기꺼이 다 아프고, 다 힘들고, 죽을 것 같은 공포도 다 이겨 내라고 한다. 그게 모성애인 것처럼 말한다. 세상에는 혹시 모성애라는 종교가 있는 게 아닐까. 모성애를 믿으십쇼. 천국이 가까이 있습니다! - P151

180(작품 해설) 다양성과 개성이라는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기에 여성에 대한 대표성을 지니는 캐릭터가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다양성과 개성의 시대에는 ‘나답게‘ 사는 것, 그래서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개인의 과제가 되었다. 아니,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좀처럼 ‘나‘를 찾기가 쉽지 않다.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를 통해 내가 구성되는데, ‘나‘를 구성할 만한 차이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다양하기 때문에 어떤 정체성에 보다 많은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개인의 경험은 다를 수 있다. 그렇지만 다양한 정체성들 중에서도 자기 정체성의 핵심은 ‘성‘이다. ‘여성‘이라는 정체성에 주목하면 한국인의 절반은 상당히 유사한 경험을 하고 있다. 성에 기반한 "젠더는 사랑, 결혼, 가족 구성, 출산, 양육, 노령화를 포함한 사적인 영역부터 경제, 종교, 정치, 미디어, 학교 등 모든 공적 영역에 작동하는 강력한 ‘체제‘"이기 때문이다.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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