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가는 제 이름을 부르지 마십시오
이별은 그냥 이별인게 좋습니다

남은 정 때문에 주저앉지 않고
갈 길을 가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움도 너무 깊으면 병이 되듯이
너무 많은 눈물은 다른 이에게
방해가 됩니다

차고 맑은 호수처럼
미련없이 잎을 버린 깨끗한
겨울 나무처럼
그렇게 이별하는 연습이
우리에겐 필요합니다.

- 이해인, 『서로 사랑하면 언제라도 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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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체력 - 마흔, 여자가 체력을 키워야 할 때
이영미 지음 / 남해의봄날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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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미생> 4권에서 프로 기사가 된 장그래를 앞에 두고, 사범은 바둑만 잘 두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바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체력‘이라고 말한다.
"네가 이루고 싶은 게 있거든 체력을 먼저 길러라. 평생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되거든 체력을 먼저 길러라. 게으름, 나태, 권태, 짜증, 우울, 분노, 모두 체력이 버티지 못해서, 정신이 몸의 지배를 받아 나타나는 증상이야."
정신력을 뒷받침하는 것은 체력이다. 날이 선 정신노동자로 길게 살려면 무엇보다 체력부터 키워야 한다. 체력이야말로 죽는 그 순간까지 키우고 유지해야 할 일생일대의 프로젝트다. 이제 좀 설득이 되는가? - P221

225 숙소에다 차를 세워 놓고, 내가 좋아하는 고창 선운사와 고인돌 공원 등을 누비고 다녔다. 걸어서 구경하기 힘든 한적한 관광지는 자전거로 돌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다음 행선지인 해남으로 가는 여정에도, 경치 좋은 곳을 만날 때마다 차를 세우고 자전거를 꺼내 신나게 타고 다녔다. - P225

242 둘째, 나는 남에게 거의 화를 내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남편에게만은 별일 아닌데도 불처럼 분노의 감정이 솟구칠 때가 있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에 대해, 현명한 알랭 드 보통은 역시나 속 시원하게 분석을 해 놨다. "우리가 불만 목록을 노출할 수 있는 사람, 인생의 불의와 결함에 대해 누적된 모든 분노를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뿐"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 P242

249 뇌과학자 정재승은 한 칼럼을 통해서, 중년으로 접어든 뇌가 가장 ‘절정의 뇌‘라는 연구 결과를 보여 주었다.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고 반응 속도가 현저히 느려진다. 눈이 침침해지고, 심지어 치매 초기 증상과 비슷한 경험을 반복한다. 따라서 그 나이에 리더가 된 사람들은 급격히 자신감을 잃고 나이듦을 억울해 한다.
하지만 연구에 따르면 뇌의 가장 중요한 여섯 가지 인지 능력인 어휘, 언어 기억, 계산, 공간 지각, 반응 속도, 귀납적 추리 중에서 무려 네 가지가 초절정의 성과를 내는 나이대는 45세에서 53세 사이의 중년이라는 결과가 있다. 나빠진 기억력 때문에 고민이 많은 내게도 희망찬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우리에겐 몸과 마음, 뇌에 이르기까지 아직 많은 가능성과 시간이 남아 있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내 몸밖에 없다. 특히 내 자유 의지로 운동을 하면서 서서히 변해 가는 몸을 지켜보는 건 근사한 경험이다.
운동이 단순히 근육을 단단하게 만들고 심장 기능을 강화하는 데만 효과적인 것은 아니다. 노력하는 ‘나‘라는 존재에 대한 자부심을 갖게 만든다. 나이듦이라는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넋 놓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분발하며 더 나은 인간으로 성장하겠다는 자신감을 보여준다. 그런 자부심과 자신감을 발산하는데, 어찌 내가 예전에 알던 평범한 사람으로 보이겠는가. - P249

261 나이 들수록, 노년이 될수록 운동을 꾸준히 하면서 체력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는 결국 ‘잘 죽기‘ 위해서다. 나는 미국의 위대한 사상가인 스콧 니어링의 삶을 흠모한다. 죽는 순간까지 부인 헬렌과 함께 조화롭고 충만한 삶을 실천해 온 그의 <스콧 니어링 자서전>은 늘 가까이 꽂아 두고 인생 공부로 뒤적이는 책이다.
"우리는 경쟁적이고 공업화된 사회양식에 필연적으로 따라다니는 네 가지 해악에서 벗어나는 데 꽤 성공한 편이었다. 그 네 가지 해악이란 (돈과 가재도구를 비롯한) 물질에 대한 탐욕에 물든 인간들을 괴롭히는 권력, 다른 사람보다 출세하고 싶은 충동과 관련된 조급함과 시끄러움, 부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에 반드시 수반되는 근심과 두려움, 많은 사람이 좁은 지역으로 몰려드는 데서 생기는 복잡함과 혼란을 말한다."
그가 일생 동안 일관되게 지켜 온 생각과 행동에는 발가락만큼도 따라갈 수 없지만, 마지막 죽음에 이르는 순간만큼은 꼭 본받고 싶다. 100세가 된 스콧 니어링은 지상에서의 임무를 마감하고 스스로 곡기를 끊어, 아내 헬렌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극히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했다. 어느 정도의 절제력과 맑은 정신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일까. 지금으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강한 체력이 있으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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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2018-09-22 0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미생의 바둑사범님 말씀이 특히 감동적(?)입니다. 머리가 자주 아프고 몸이 힘드니까 별 거 아닌 일에도 짜증나고 분노하고 우울해지고...저대신(?) 좋은 부분을 정리해주셔 감사합니다.^^

베텔게우스 2018-09-22 01:32   좋아요 0 | URL
ㅎㅎ 별말씀을요^^ 저한테도 특히 와닿았던 구절이에요. 실제 운동을 꾸준히 했을 때 덜 지치고 감정소모도 줄어든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아, 저도 편두통을 달고 삽니다 ㅜㅜ 동병상련이네요. 모쪼록 잘 견뎌내시길...

루이스 2018-09-22 02: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걸 공유(?)하고 있군요. 베텔게우스님도 잘 버티시길...-_-;;
 

<범망경> 읽음.

59
5. 『계온품』 각 경들에 대한 간략한 소개

(1) 「범망경」(梵網經)
인간은 견해의 동물이다. 인간은 매순간 대상과 조우하면서 수많은 인식을 하게 되고 그런 인식은 항상 견해로 자리잡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이 가지는 견해는 너무도 다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견해는 항상 무엇이 바른 견해인가라는 질문을 수반한다. 견해란 무엇인가? 아니 바른 견해란 도대체 무엇인가? 바른 견해란 도대체 가능한 것일까? 인간은 견해 없이 살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고 계실까?
견해의 문제에 대한 고뇌를 누구보다 많이 하신 분이 바로 부처님이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디가 니까야』의 첫 번째가 되는 「범망경」에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견해를 과거에 관한 것 18가지와 미래에 관한 것 44가지로 나누어서 모두 62가지로 분류해서 심도 있게 설명하고 계신다. 이를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다.

(가) 18가지 과거를 모색하는 자들
I-1. 영속론자들 - 4가지
I-2. 일부영속 일부비영속론자들 - 4가지
I-3. 유한함과 무한함을 설하는 자들 - 4가지
I-4. 애매모호한 자들 - 4가지
I-5. 우연발생론자들 - 2가지

(나) 44가지 미래를 모색하는 자들
II-1. 사후에 자아가 인식과 함께 존재한다고 설하는 자들 - 16가지
II-2. 사후에 자아가 인식 없이 존재한다고 설하는 자들 - 8가지
II-3. 사후에 자아가 인식을 가지는 것도 아니고 인식을 가지지 않은 것도 아닌 것으로 존재한다고 설하는 자들 - 8가지
II-4. 단멸론자들 - 7가지
II-5. 지금여기에서 열반을 실현한다고 주장하는 자들 - 5가지

그러나 「범망경」이 중요한 것은 단순히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견해를 모두 62가지로 정리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범망경」은 오히려 왜 이렇게 다양한 견해가 생길 수밖에 없느냐하는 구조적인 문제를 연기(緣起)의 관점으로 명쾌하게 설명해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견해란 조건이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본경에서 견해는 ‘느껴진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것을 복주서는 "체험되고 경험된 것"으로 설명한다.
중요한 것은 이 경험된 것은 대상과 감각기능과 알음알이의 세 가지가 서로 조우할 때 일어나는 감각접촉[觸]에 조건 지워진 조건발생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조건 발생을 불교에서는 연기(緣起)라고 말한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견해를 감각기능·감각대상·알음알이[根·境·識]의 삼사화합(三事和合)에서 기인한 감각접촉의 산물이라고 불교의 연기 구조로 명쾌하게 정의하신다. 이렇게 하여 견해의 문제는 마침내 괴로움의 발생 구조[流轉門]와 소멸 구조[還滅門]를 적나라하게 밝힌 연기의 가르침으로 회통이 되고, 이것은 괴로움[苦]과 괴로움의 원인[集]과 괴로움의 소멸[滅]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道]로 정리된 불교 만대의 진리인 사성제(四聖諦)의 가르침으로 귀결이 될 수밖에 없다.
한편 이런 연기의 가르침이야말로 무아의 가르침이요 무아의 가르침은 바로 존재론적인 실체인 자아를 해체하는 가르침이다. 이처럼 연기-무아로 존재론적인 실체인 자아가 있다는 견해를 떨쳐버릴 때 그것이 바로 견해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것이라고 부처님께서는 설하신다. 그러므로 62견은 연기-무아를 철견할 때 극복된다는 것이 본경의 결론이라 할 수 있겠다. 이처럼 본경은 팔정도의 첫 번째인 바른 견해[正見]와 바른 견해의 내용인 연기의 가르침을 천명한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4부 니까야의 첫 번째인 『디가 니까야』를 대표하는 첫 번째 경으로 결집이 되었을 것이다. - P59

106 ‘마음의 삼매를 얻는다.‘의 주석(72번째 주석)
옛날에는 이처럼 마음의 삼매로 표현되는 정신적인 능력이 과거를 보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삼매의 힘은 주관적인 것이라서 객관성이 없는 것이 흠이지만 수행자들의 권위가 뒷받침되어 그들의 주장은 통용되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주관적인 권위는 객관성이 결여되었고 그래서 그들의 권위를 지탱시키기 위해서 힘, 즉 폭력을 수반해온 것이 인류역사다. 세속의 정치적 힘을 능가한 서양 종교의 권위와 힘은 교황을 만들어 내었고 천년 넘게 서양을 지배해 왔다. 이런 주관적 권위를 극복하고자 서양 지성인들은 많은 노력을 하였고 그래서 과학(science)이라는 방법론을 개발하였다. 과학은 무어라 해도 객관적인 자료가 중요하다. 이런 객관적 자료를 토대로 한 합리적인 사고를 통해서 그들은 과거 즉 세상의 기원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하여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 P106

131
2.24. "비구들이여, 여기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은 ‘이것은 유익함[善]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이것은 해로움[不善]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이것은 유익함이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이것은 해로움이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만일 내가 이것은 유익함이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고 이것은 해로움이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면서도 이것은 유익함이라고 설명하거나, 이것은 해로움이라고 설명한다면,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곤혹스러운 것이고, 곤혹스러운 것은 나에게 장애가 된다.‘라고.
이처럼 그는 거짓말을 두려워하고 거짓말을 혐오하여, ‘이것은 유익함이다.‘라고도 설명하지 않고, ‘이것은 해로움이다.‘라고도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저런 것에 대해서 질문을 받으면 얼버무리거나 애매모호하게 늘어놓아서, ‘나는 이러하다고도 하지 않으며, 그러하다고도 하지 않으며, 다르다고도 하지 않으며, 아니라고도 하지 않으며, 아니지 않다고도 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첫 번째 경우이니, 이것을 근거로 하고 이것에 의거해서 어떤 사문·바라문 존자들은 애매모호한 자가 되어 이런저런 것에 대해서 질문을 받으면, 얼버무리거나 애매모호하게 늘어놓는다." - P131

166
62견은 단지 느낀 것이요 동요된 것일 뿐이다

3.32. "비구들이여, 여기서 영속론자인 그 사문·바라문들이 네 가지 경우로 영속하는 자아와 세상을 천명하는 것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갈애에 빠져 있는 그 사문·바라문 존자들이 단지 느낀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 느낌이 [견해와 갈애에] 의해 동요된 것일 뿐이다."(160번째 주석)

주석 160) 「범망경」 전체에서 이 문단이 가장 극적이면서도 중요한 구절이라고 역자는 파악한다. 아무리 과거와 미래에 대한 굉장한 견해를 늘어놓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지금여기에서의 체험이나 경험의 문제로 귀결되고 만다는 의미이다. 과거와 미래에 대한 견해의 토대로 부처님 당시에는 삼매체험이 중시되었다. 삼매에 들어서 먼 과거를 보고 과거에 대해서 단언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지금여기에서 삼매에 들어서 그렇게 봤기 때문이다. 미래는 예측의 문제인데 이것도 역시 지금 그가 그렇게 예측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거와 미래에 관한 모든 견해는 자기 자신이 바로 지금여기에서 경험하고 체득하고 느낀 것을 넘어서지 못한다.
시대가 바뀌어 지금은 과학적 방법론으로 과거와 미래를 파악한다. 과학적 방법론이 지향하는 것은 객관화이다. 객관화의 방법은 바로 자료이다. 정확한 자료에 근거할 때 우리는 그것을 정설로, 객관적인 것으로 인정한다. 그래서 과학은 신빙성 있는 자료의 확보에 심혈을 기울인다. 이처럼 과학이 가설이나 학설(견해)을 주장하는 근거는 자료이다. 그러므로 지금여기에서 실험이나 관측 등을 통한 자료가 없으면 과거와 미래에 대한 견해는 있을 수 없다.
관측이나 실험에 의한 자료를 통해서 보면 우주는 팽창한다고 한다. 다른 관측과 실험을 통해서 요즘은 우주는 팽창한 뒤에 다시 수축하고 그래서 팽창·수축을 거듭한다고도 주장한다. 이것은 부처님 당시의 수행자들이 삼매에 들어서 판단하던 것이 자료에 의한 견해로 바뀌었을 뿐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모두 현재 바로 지금여기에서 어떤 자료를 어떻게 판독하고 어떤 실험을 어떻게 하고 어떤 관측을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로 되돌아온다. 이 문제를 부각시켜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vedayita(느껴진 것, 체험한 것)이다. 지금여기에서 그들이 느끼고 체험한 것을 넘어서서는 아무런 견해도 가질 수 없다는 부처님의 명쾌하신 지적이다.
초기불전을 통해서 우리가 반드시 통달해야 하는 가장 큰 인식의 전환이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과거를 되새기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 마라.
과거는 제거되었고 미래는 닥치지 않았다.
현재에 [일어나는] 법(dhamma)을 바로 여기서 통찰하라."
(Bhaddekaratta Sutta, M131/iii.187)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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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9-21 21: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베텔게우스님, 추석인사 드립니다.
오늘부터 추석연휴입니다.
즐거운 추석명절, 기분 좋은 연휴 보내세요.^^

베텔게우스 2018-09-21 22:12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도 풍성하고 여유로운 추석 연휴 보내세요.:)
 
마녀체력 - 마흔, 여자가 체력을 키워야 할 때
이영미 지음 / 남해의봄날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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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고 유익하다!!! 🙄

책의 본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운동의 방법과 효과뿐 아니라, 작가의 인생 이야기와 중간중간에 좋은 책 구절을 인용하는 부분도 인상깊었다. 그리고 위 모든 내용을 맛깔나는 글솜씨로 버무린 것이 무엇보다 큰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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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사상의 이해
동국대학교불교문화대학불교교재 / 불교시대사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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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전반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살펴보기에 적합한 책이다. ‘양질의 불교 사상 입문서‘ 라고 이 책을 부른다면 적절할 것 같다. 우리나라 최고의 불교 교육•연구기관이라 할 수 있는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에서 냈으며, 십여 명의 불교 각 분야 연구자들이 집필에 참여함으로써 적당한 깊이도 갖춘 책이다.

불교는 ‘괴로움[苦]‘을 핵심 문제로 삼고, 깨달음을 얻어 이를 제거하고 열반에 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이다. 기본적으로 자아와 존재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으며(제법무아(諸法無我)),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본다(제행무상(諸行無常)). 이는 모든 존재요소가 서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어떠한 것도 스스로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불교의 핵심 사상인 연기법(緣起法)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큰 틀 안에 정토사상•선사상•윤회사상•화엄사상•중관사상•유식사상 등 여러 가지가 자리하고 있다.

《불교사상의 이해》를 읽고 위와 같이 불교 전반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어 좋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종교를 학문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나의 태도에 회의감이 들었다. 학문이란, 세상에서 일어나는 현상들 중 일부를 특정한 기준으로 묶어 이들을 비교•분석하는 일이지 않은가? 이렇게 여러 종교를 싸잡아서 ‘종교학‘이라고 묶어 비슷한 현상이라는 것을 전제한 채 바라본다면, 신앙인과는 동떨어진 인식으로 종교를 볼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신앙인은 자신의 종교와 그 가르침을 ‘진리‘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학문의 영역에서의 특정 종교는 비슷한 현상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따라서 진정한 학자라면 종교에서 순수한 진리성을 얻기 어려울 것이다. 종교는 믿음의 문제라고 하지만, 그 믿음 역시 학자적 천성을 가진 자라면 마음대로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학자는 아니지만 그러한 성향을 갖고 태어났다는 자기 인식을 갖고 있다. 때때로 종교와 인연이 있었으나 믿음을 깊게 하지는 못했다. 마찬가지로 세상엔 남보다 더 영성적인 인간도 있다. 원인은 무엇일까? 한 가지로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최근에는 붓다가 말했던 연기법이 머릿속을 자꾸 맴돈다. 나는 이를 환경결정론적 세계관으로 이해한다. 즉 연기법은 모든 존재는 주어진 환경과 상황 속에서 인식을 얻고, 생각을 하며, 행동하는 것을 두고 ‘어떤 것도 자기 스스로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주장을 편 것이 아닐까, 라고.

141 예컨대 출가와 재가의 둘이 아님[不二]을 주장하며, 세속에서의 깨달음을 강조하고 있는 「유마경」에서는 자신에게 달라붙은 꽃을 세속적 장식이라 하여 떼어 버리려고 하는 사리뿌뜨라(붓다의 10대 제자 중의 한 명으로 지혜 제일)에 대해 꾸짖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꽃 자체는 세속적인 것이 아님에도 그가 그렇게 분별하였기 때문이다. 세속적이라고 하는 것은 사리뿌뜨라 자신의 분별이고 집착일 뿐 분별과 집착을 떠난 대상 자체는 애당초 청정하다. 마찬가지로 탐욕을 탐욕으로밖에 볼 수 없는 사람은 탐욕을 떠나는 것, 즉 열반에도 집착하며, 열반도 그것에 집착하면 이기적인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유마경」에서는 바로 이같은 출가자의 이기적 욕망과 집착을 꾸짖고 있는 것이다. - P141

268 현대의 과학문명과 기계화된 산업사회의 구조 속에서 인간성이 말살되고, 신(神) 중심의 종교관과 인간관의 전통 속에서 살아온 서구인들에겐 신에 의한 피조물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인 마음인 선을 통하여 자아의 참된 인간관과 각자 스스로 창조적인 인간으로서의 삶의 가치관을 되찾을 수 있는 선의 정신과 선불교의 문화가 완전히 새롭고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선의 풍토와 환경 속에 살고 있는 동양에서 선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고조된 소위 선 붐의 현상은 이처럼, 서구에서 새로운 각광을 받고 널리 주목된 선에 대한 관심이 서구의 과학문명과 함께 동양으로 다시 전래되면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임을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진리가 너무 가까이 이씩에 볼 수 없는 것처럼, 우리들이 선의 정신 속에 살면서 매일 매일 사용하고 있기에 더욱더 그 가치를 바로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_선사상 - P268

308 행위에 대하여 선악의 판단을 하는 경우, 윤리적 주체로서의 ‘아뜨만’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무아(無我)를 근본으로 하는 불교에서 과연 윤리적 행위가 성립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의 무아설은 결코 윤리적 행위의 주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체적 혹은 기능적인 ‘아뜨만(我)’을 인정하는 사고를 부정하여 ‘아(我)’에의 집착을 철저히 물리치고자 하는 데 있으며, 윤리적 주체로서의 ‘자기(自己)’는 오히려 이를 적극적으로 승인하고 있다.

「법구경」에도 ‘아뜨만’의 장이 있어, "자기 자신이 행한 악은 자기에서 돋아나며, 자기로부터 발생한 것이다.[161]", "사람은 자기 자신이 악을 행하여 자신이 스스로 염오(染汚)된다. 자신이 악을 행하지 않아 스스로 청정하게 된다.[165]"라고 하면서 자기가 선악 행위의 주체임을 명확히 하였다. 그리고 "만약 자기가 귀중함을 안다면 이[自己]를 잘 지켜야 한다.[157]", "자기야말로 자기의 주인이다. 대체 다른 누가 주인일 것인가. 실로 자기가 잘 조어됨으로 해서 사람은 얻기 힘든 주인을 얻는다.[160]"라고 하면서 자기를 애호하고, 자기를 잘 다스릴 것을 강조하고 있다.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라는 것은 자신이 의지할 본래의 자기를 추구한다는 선언의 다름 아니다.

이러한 선언은 급기야 유명한 가르침이 되어 나타나게 된다. 석존 최후의 설법의 하나로 행해진, 이른바 ‘자등명 법등명’의 교설이 그것이다.

자기를 ‘디빠(dipa, 등불 또는 섬)’로 삼으며, 자기를 귀의처로 삼되 남을 귀의처로 삼는 일 없으며, 법(法)을 ‘디빠’로 삼으며, 법을 귀의처로 삼되 남을 귀의처로 삼는 일 없이 (너희는) 주(住)하라.

여기서 가리키는 ‘자기’는 형이상학적 원리로서 상정된 것이 아니라 실천적·주체적으로 파악되는 자기이다. 그것은 자기가 의지할 본래의 자기, 진실의 자기를 가리키는 것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에 있어서는 윤리적 주체로서의 자기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나아가 이상으로서 실현되어야 할 자기를 추구하되 그것이 ‘법’에 기초함을 설하고 있다.

여기서 법(法)은 ‘다르마(dharma)’로서 ⓵법칙, 정의, 규범 ⓶가르침 ⓷진리, 영원한 최고의 진리, 최고의 존재 ⓸경험적 사물 등 4가지 의미로 나누어지는데, 위의 법등명의 ‘법’은 ⓵⓶⓷의 어느 것을 취하여도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법칙 규범으로서의 법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으로서의 법, 혹은 영원한 진리로서의 법에 수순하는 자기야말로 본래의 자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_불교의 윤리 - P308

361 중성 미자 뉴트리노나 전자와 같은 입자는 일종의 내부 회전, 즉 스핀을 갖고 있는데(물론 모든 소립자들은 스핀을 갖고 있다.) 실험자가 입자의 스핀 방향을 알기 위해서 실험장치를 만들고 그 좌표가 될 특정 방향을 취하였을 경우(이 때 기준이 되는 방향은 전장 또는 자장에 의하여 정의될 수 있다.) 놀라운 사실은 그 스핀이 장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즉, 입자의 스핀은 실험자가 선정한 기준 방향을 향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입자는 실험자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언제나 실험자가 자유롭게 선정한 기준 방향으로 스핀의 회전 방향이 바뀌어 마치 실험자의 마음을 읽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미시적인 소립자의 세계는 이처럼 기묘한 주관적 요소가 개입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사람이 무언중에 다른 사람과 직관적으로 공감을 느끼는 순간을 불교에서는 ‘염화미소’니 ‘이심전심’이니 하는데, 그 경우와 일맥상통한다. 단지 양자역학의 특징은 전자와 같은 물질입자가 마치 정신이 있는 양 인간의 정신과 교감이 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점이다. 물론 왜 그런지는 알 수 없다._불교와 과학 - P361

395
3) 상대주의
타종교를 ‘동등하게’ 인정하지 않는 포괄주의와 달리 상대주의는 모든 종교의 동등성을 솔직하고 분명하게 인정한다. 독일의 신학자 에른스트 트릴취는 하느님이 서양을 구원하기 위해서 기독교라는 종교를 주었고, 동양을 구원하기 위해서 불교를 주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이 두 종교는 시간이 아무리 지나더라도 포괄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로 수렴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즉, 상대주의는 참종교가 동시에 여러 개 있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상대주의는 서로의 신앙을 철저히 인정한다. 그러므로 상대주의는 단연코 개종주의를 배격한다. 타종교인을 교화시키고자 하는 선교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비종교인을 종교인으로 교화시킬 필요는 인정한다. 이는 종교적으로 철두철미한 상호 존중과 평화 공존의 입장을 취한다. 이 상대주의는 매우 지성적이고 양심적이며 자기 개방에 적극적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어찌 보면 상대주의 역시 철저한 자기 폐쇄성에 갇혀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이미 지적했지만 자기 신앙에 대해서 철저히 성실하면서 동시에 다른 종교도 참된 종교라고 인정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자신의 신앙과 타인의 신앙이 동일한 내용임을 확인하기도 전에 서로의 참과 옳음을 인정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자기 기만이거나 피상적인 타협주의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의미에서 상대주의는 진리 추구에 대한 불성실 혹은 방기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신앙을 상대적인 참 정도로만 인정하면서도 그것에 절대적인 헌신을 바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도 생긴다. 상대주의는 자기 자신의 신앙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을 불가능하게 하리라는 것이다. 자신의 신앙을 상대적인 저옫의 참으로만 여긴다면 그 가르침에 전적으로 헌신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결국 상대주의는 서로를 동등하게 인정코자 함으로써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의 태도를 갖게 될 것이다. 상대주의는 나는 내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살아갈 터이니 너는 네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살아가면 그뿐이라는 태도가 된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의 상대주의적 태도는 불행한 타자에 대한 방관일 수밖에 없다. 상대주의는 나는 나대로 행복하니 너는 너대로 알아서 행복하라는 태도이다. 즉, 상대주의는 타종교의 신자들에 대한 적극적 애정을 갖지 않는다. 배타주의나 포괄주의가 개종주의 때문에 문제가 된다면 상대주의는 자기 만족에 안주하여 개종의 의지가 전혀 없다는 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상대주의 역시 자기 폐쇄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_불교와 다종교 사회


396
4) 다원주의
다원주의는 다종교 상황을 철저하게 인정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상대주의와 비슷하다. 다원주의는 존 힉(John Hick), 폴 니터(Paul Knitter),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 레오나드 스위들러(Leonard Swidler), 라이문도 파니카(Raimundo Panikkar) 등이 대표하지만, 이들의 입장이 다양하여 그 성격을 한마디로 적확하게 규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배타주의와 포괄주의는 참종교나 완전한 종교를 하나만 인정한다.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는 다수의 종교를 참으로 인정한다. 특히 다원주의는 적극적으로 다수의 참종교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자신의 이름을 얻었다. 그렇다면 상대주의와 다원주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상대주의가 진리 추구의 방기와 불행한 타자에 대한 방관일 수밖에 없다면, 다원주의는 결코 이러한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첫째, 다원주의는 진리를 향해 진지하고 정직한 자기 개방을 추구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다원주의는 자기 완전성의 주장에 폐쇄적으로 갇혀 있기를 거부한다. 다원주의는 자기 완전성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자기 완전성에 갇혀 있지도 않는다. 다만 자기 완전성을 잠정적으로만 주장함으로써 자기 쇄신과 자기 발전의 가능성으로 열려 있고자 하는 것이다. 흔히 말해 다원주의는 열린 종교이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둘째, 다원주의는 타종교의 신자들에 대한 진지한 이해도 포기하지 않는다. 즉, 불행한 타자에 대한 방관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진지한 공감과 이해를 도모하는 것이다. 다원주의는 자신의 신앙에 절대적으로 헌신하면서도 타종교를 향해 어떻게 진지하게 열려 있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개인의 체험에 기초하며 본질적으로 배타적 속성을 갖는 타자의 신앙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인가? 다원주의자들이 이러한 목적을 위해 동원하는 방법이 다름 아닌 대화이다. 다원주의자들은 대화라는 방법이 그러한 목적을 성취시켜 줄 것이라고 믿는다. 배타주의, 포괄주의, 상대주의는 대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원주의만이 진리 추구와 타종교의 이해를 위해 대화를 추구한다. 다원주의는 진리에 대한 정직하고 개방적인 태도를 바탕으로 타종교와의 대화를 통해서 자신에 대한 이해와 쇄신을 도모한다. 다원주의는 대화를 통해서 타자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도모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즉, 다원주의는 대화를 통한 상호 변혁과 쇄신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 상호 변혁과 쇄신의 과정에서 서로가 다같이 공유할 수 있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_불교와 다종교 사회 - P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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