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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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로사회는 2010년 가을 독일에서 처음 출간되었다나오자마자 현지에서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고(5p), 이어 2012년 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본이 나왔다한국에서 역시 이 책은 상당한 반향을 얻었다국내 유력 일간지에서는 여러 편의 소개 기사가 실렸고많은 이들이 이 책 내용을 인용했다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는 피로사회가 출간된 그해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성과 경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우리나라 현실상 책의 주제가 많은 사람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책은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11p)는 이제는 유명해진 문장으로 시작한다그의 견해에 따르면항생제 발명 이전의 시대는 박테리아(세균)와 바이러스의 시대였다이들은 외부성과 부정성을 대표하는 것들로생물체의 내부에서 면역 반응을 일으키는 타자성을 지닌 존재다저자는 이를 사회를 해석하는 틀로 확장한다개인적 혹은 사회적 차원에서면역의 근본 특징은 부정성을 부정하여 자아를 관철하는 것이다따라서 나와 대비되는 이 확실한 존재로 드러난다냉전 시대의 진영 대립과 같이 명확한 동지와 적이 존재했다는 것이다반면 이질성이 실종된 현대에는 면역학적 패러다임이 더는 세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왜냐하면 이는 세계화 과정과 양립하기 어렵기 때문이다경계와 문턱이 사라져가는 21세기에는 세계가 점점 같아지고모두가 성과만을 추구한다인터넷과 실물 세계의 난교와도 같은 활발한 교류가 부정성이 설 자리를 잃게 한다이렇듯 이질성의 실종은 우리가 부정성이 많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 21세기의 신경성 질환들 역시 그 나름의 변증법을 따르고 있지만그것은 부정성의 변증법이 아니라 긍정성의 변증법이다그러한 질환은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된 병리적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7p) 부정성이 없으니 적도 없다적이 없으니 배척도 없기에 자신의 성격 또한 존재하지 않게 된다. ‘자아는 타자와 대립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정립’(88p)하기 때문이다개인은 그저 세계화의 과정에서 환경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주입되는 것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이는 환경결정론 속 종속된 개체와도 같다. ‘긍정성의 폭력은 적대성을 전제하지 않는다그것은 오히려 관용적이고 평화로운 사회에서 확산되며 그 때문에 바이러스성 폭력보다도 눈에 덜 띈다긍정성의 폭력이 깃드는 곳은 부정이 없는 동질적인 것의 공간적과 동지내부와 외부자아와 타자의 양극화가 일어나지 않는 공간이다.’(21p)

 

 한병철은 21세기 현재의 만연한 신경성 질환들이를테면 우울증소진증후군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경계성성격장애와 같은 신경성 질환들의 원인이 바로 이러한 부정성의 결여와 긍정성의 과잉이라고 지적한다즉 이로써 면역학적 시대를 지나 신경증적 시대가 도래하였다는 것이다과거에는 타자는 타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면역 반응의 대상이 되었는데현재에는 위험하지 않은 타자가 수용되는 세상다시 말해 부정성이 실종되고 긍정성만 남은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규율사회였던 근대와 구분하여 이러한 현대 사회를 성과사회라고 지칭한다앞서 언급한 신경증적 질환들은 성과사회적 질병이라고 부를 만한데이는 주로 부정성의 결여로 인해 나르시시즘적 인간이 된 개인의 심리적 요인에 기인하기 때문이다그리고 그것은 근본적으로는 시스템적인 긍정성의 폭력이 일으키는 성과사회의 폭력인데이로써 사회의 원자화와 파편화가 일어나 인간적 유대의 결핍을 가져온다는 것이다.(26p)

 

 성과 사회에서는 규율 사회의 복종적 주체가 성과주체로 변모한다이들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 경쟁이 유독 심한 편인 한국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우리는 이런 표현에 꽤 익숙하다. 대부분 거쳐 가는 고등학생 시절의 입시경쟁이 본격적인 경쟁의 출발점이다. 바로 이때부터 ‘죽을 힘으로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식의, 자기착취를 독려하는 메시지가 만연하다노력하지 않는 모습은 수치스러운 것으로 인식된다부모님이나 선생님책과 대중매체 할 것 없이 누구 좋으라고 공부하니너 좋으라고 공부하지!”, “10분만 더 공부하면 배우자 얼굴이 바뀐다” 같은 이른바 동기부여 메시지를 적나라하게 쏟아낸다유능한 사람멋진 사람이 되자는 것이 당대의 목표였다. 2000년대에는 자기계발서 열풍이 불었자기계발서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그래야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게 요지다.

 이러한 성과 사회가 열린 이유로 저자는 사회의 생산성 최대화 열망을 꼽는다규율은 생산성을 최대화하는 데 한계가 있지만현대에 새로운 규율로 작용하는 성과의 패러다임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이다.(25p) 그리고 이러한 성과의 패러다임이 사회의 원자화와 파편화를 만들고이것이 인간적 유대의 결핍을 초래하여 우울증을 초래하는 요인이 된다. ‘타자에게서 오는 폭력이 사라지는 대신 스스로 만들어낸 폭력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104p) 오늘날 전쟁으로 죽는 사람의 수보다 우울증과 그에 따른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의 수가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은 이러한 논의와 연관 지어 주목할 만하다.

 

 

 한편우울사회라는 또 다른 에세이가 책 안에 두 번째 저작으로 실려 있다. ‘이 글은 저자의 제안에 따라 피로사회에 개진된 생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강연 원고 우울사회를 번역한 것이다.’라는 우울사회 표지에 적혀 있는 문장이 나타내듯이앞부분과 유사하게 후기근대적 성과주체의 심리적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그에 앞서 한병철은 근대 규율적 주체의 심리를 살펴본다그는 규율적 주체는 명령과 금지로 이루어진 억압적 강제 장치라고 인간을 바라보는 프로이트의 심리적 기구를 틀로써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무의식이 필연적으로 부인과 심적 억압의 부정성과 결부된 개념이라고 할 때무의식이 없는 포스트프로이트적 자아그는 무의식을 두고 금지와 억압의 부정성이 지배하는 규율사회의 산물로서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그런 사회를 떠난 것이다.’(84p)라는 파격적인 견해를 피력한다더 이상 프로이트적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프로이트적 자아가 해내는 일이란 무엇보다도 의무의 이행’(84p)인데그와는 달리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의무적인 일에 매달리지 않’(86p)아서다. ‘복종의무 이행이 아니라 자유쾌락선호가 그의 원칙이다그가 노동에서 기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쾌락의 획득이다.’(86p) 그러나 타자로부터의 자유가 나르시시즘적 자기 관계로 전도되며이것이 오늘날 성과주체가 겪는 많은 심리적 장애의 원인이 된다고 보았다즉 타자로부터 자유를 얻었으나 역설적으로 그것이 발생시키는 나르시시즘적 자기 관계로 인해 새로운 문제인 심리적 장애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현대인의 필수적 조건이라고 여겨지는 멀티태스킹은, 진보라기보다는 퇴화라고 할 수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 멀티태스킹은 수렵자유구역의 동물들 사이에서도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습성’(30p)이라서다이를테면 식사하는 중에도 새끼들을 감시하고짝짓기 상대를 주시해야 하는 야생동물들은 주의를 다양한 활동에 분배하지 않을 수 없다인간도 멀티태스킹을 함으로써 인생의 다양한 부분에서 목표한 성과를 창출하기 위해 사색과 같은 몰입이 요구되는 활동에 관심을 배분할 수 없는 것이다.

 

 한병철은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삶이란 성공적인 공동의 삶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이지만,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은 날이 갈수록 생존 자체에 대한 관심에 밀려나고 있다.’(31-2p)고 우려한다이어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고 역설한다그러면서 인류의 문화는 성과 추구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며그 예로 춤을 든다. ‘춤은 성과의 원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사치’(33p)라는 것이는 철학자 조르주 바타유가 저주의 몫에서 말하는 소모적인 행위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인간의 실존은 어떤 면에서 보면 유용한 구체적 사물들로부터 인간의 성장(또는 생활)에 도움이 되는꼭 필요한 부분을 구분해낸다그러다가 절대적 필요성이 사라지면 인간은 더 이상 유용한 사물을 소망하지 않는데그때부터 인간의 실존은 포착할 수 없는 것자기 자신과 재화의 무익한 사용그리고 놀이를 찾는다."

_조르주 바타유조현경 옮김저주의 몫(문학동네, 2000), 116p.

 

 "번갈아 나타나는 엄격한 축적과 넉넉한 낭비는 에너지 사용에서 볼 수 있는 일상적 리듬이다낭비를 엄격하게 경계할 때에만 인간과 사회는 힘의 체계를 성장시킬 수 있다그러나 어느 시기에 이르면 성장은 한계에 부딪히며더 이상 축적이 불가능한 잉여의 부분은 소비되어야 한다."

_조르주 바타유조현경 옮김저주의 몫(문학동네, 2000), 223p.

 

 인용문 중 앞에 있는 것은 성과 추구 중에는 유용성과 관계가 없는 소모가 시작되지 못함을 말하며 한병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뒤의 글은 성장이 한계에 부딪힐 때 축적 불가능한 잉여가 소비됨을 말한다. 현대 사회는 유사 이래 물질적으로 가장 풍족하다. 그러나 바타유의 말대로 축적 불가능한 잉여의 소비가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과의 패러다임’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많은 성과를 위해 스스로를 착취한다따라서 이러한 사회에서는 놀이와 소비가 없다.

 

 ‘인간 전체가 하나의 성과기계가 되어 원활한 작동으로 최대의 성과를 산출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적 발전 경향에 제동을 걸 수 있는’(66p) 더 나은 미래 사회의 모습으로 저자는 피로사회를 제시한다.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67p)인데 비하여 피로사회의 피로는 ‘무위의 피로라는 것이다. ‘탈진의 피로는 긍정적 힘의 피로다그것은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간다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즉 무위의 피로다.’(71p) 한병철은 부정성에서 사색, 나아가 무위의 피로로 논의를 확장하며 규율 사회와 성과사회에 이어 피로사회가 도래하는 미래를 바라본다. 피로사회는 소속이나 친족관계에 의존하지 않는 공동체의 가능성’(70p)이 존재하는 열린 사회다.

 

 

 한편 피로사회가 출간된 지 8한국어판 출간으로부터 6년의 세월이 흘렀다과연 그동안 우리 사회는 어떻게 바뀌었을까최근 주목할 만한 사회적 흐름으로, YOLO워라밸소확행과 같은 삶을 즐기는 문화가 인기다이는 지금까지 오로지 성과를 추구하기 위하여 달려왔던 사회 속에서 한 발 떨어져 여유를 갖고 평온함을 되찾자는 움직임으로 보인다. 바타유식으로 말하면 '엄격한 축적'이 끝나고 나타나는 '넉넉한 낭비'다. 정책적으로는 지난달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되었다이는 지나친 성과주의의 패러다임이 가지는 한계를 인정하고 구성원들에게 충분한 여가를 보장하자는데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것으로 해석된다그간 우울증과 자살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고직장에 얽매여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쏟아져 왔다.

 한편출판계 흐름도 이를 반영한다. 자기 자신을 존중하고있는 그대로를 인정하자는 메시지를 전하는 책이 많아졌다는 점이 주목된다가령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하완, 2018), 『곰돌이 푸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곰돌이 푸 원작, 2018),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김수현, 2016), 『자존감 수업(윤홍균, 2016), 『어차피 다닐 거면 나부터 챙깁시다(불개미상회, 2018), 『지금 이대로 괜찮은 사람(박진영, 2018) 같은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성과에 앞서 개개인의 인간다운 삶을 먼저 찾자는 메시지에 독자들이 공감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말에 한 일간지에는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 한 달을 맞은 직장인들이 퇴근 후 무엇을 하는지를 취재한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그에 따르면 많은 이들이 퇴근 후 문화생활에 시간을 쏟는다고 한다.

 

 "퇴근 시간이 앞당겨지면 외국어·자격증 학원만 북적일 것이란 예상은 빗나갔다자기 계발보다는 취미 생활에 관심 갖는 직장인이 늘면서 '1인 1취미시대가 열렸다꾸준히 투자해야 하는 취미 생활을 할 만한 여건이 갖춰졌기 때문이다입사 과정에서 치열한 경쟁을 경험한 직장인들이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선호하는 것도 영향을 미쳤다."

 

_변희원백수진이해인저녁7… 김대리는 화가이과장은 피아니스트가 된다조선일보, 2018년 7월 28.

 

 다만 한병철이 타자성이 어느 수준까지 요구되는지를 언급한 점이 없다는 것에 다소 논란의 소지가 있다. ‘이질성은 아무런 면역 반응도 일으키지 않는 차이로 대체’(13p)되고, ‘차이에는 말하자면 격렬한 면역 반응을 촉발하는 가시가 빠져 있다타자성 역시 날카로움을 잃고 상투적인 소비주의로 전락’(13p)하였다고 그는 말하며 타자성과 이질성의 부재한 현실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를 타자성을 절대화하자는 주장이라는 식의 지나친 해석은 경계함이 옳다. 저자가 '피로사회'적 공동체, 즉 인간답게 공존하는 삶이 가능한 사회를 대안으로 제시할 뿐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극단적인 이질성이 전쟁을 촉발하고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따라서 허용 가능한 타자성은 평화와 양립할 수 있는 수준에 그쳐야 할 것이다.

 한병철은 또한 분노의 순기능적 측면을 들어 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그에 따르면,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오늘날은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간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무분별한 분노의 폭력적인 측면 또한 경시해서는 안 된다. 책을 읽는 내내 나의 주요한 관심사 중 하나는 한병철이 주장하는 부정성이 과연 평화적으로 추구될 수 있는지였다과한 주장으로 번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성장과 성과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인류가 지속 가능한 정도의 성과 추구는 무위와 사색에 필수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아마 그의 견해는 과도한 성과 추구를 경계하고 사색적 삶과의 균형을 촉구하는 의미 정도로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일종의 워라밸’ 강조다.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서 6년이란 세월은 길다. 이제까지 살펴본 위와 같은 변화가, 사회가 점차 성과사회적 모습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 또한 긍정성 과잉의 시대에 부정성을 역설함으로써, 한병철의 철학은 세계가 인간다운 삶이 가능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곳이 되는 데 크게 일조했고 생각한다그는 날카로운 철학으로 세계를 진단하여 사회의 긍정화 흐름에 제동을 걸고 부정성과 사색적 삶의 부활을 역설했다. 그의 철학을 이어 인간적인 삶사색적인 삶을 향한 여정도 지속하여야 할 것이다.


2018. 8. 9. (목) 00:17 최종 수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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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마음 - 문예 세계문학선 014 문예 세계문학선 14
나쓰메 소세키 지음, 오유리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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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마음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또 있을까? 굳이 ‘열 길 물속은 알아도…’로 시작하는 오래된 속담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타인과 함께 살아가면서, 혹은 뉴스를 보면서, 심지어는 스스로 마음을 들여다볼 때도 사람의 마음은 참 알 수 없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그토록 여전히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진 것이 마음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이름부터가 ‘마음’이란다. 어떤 이야기를 전개해서 마음에 관한 문제를 풀어갈지 무척 궁금해서, 제목만 들었을 때부터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그야말로 나에겐 ‘마음’에 쏙 든 이름이었다. 작가 나쓰메 소세키는 소설을 크게 세 편으로 나누고 1‧2편과 3편에 각각 다른 서술자를 내세워, 이들 두 주인공의 만남과 ‘선생님’의 과거, 그리고 그에 따른 인물들의 내면에 특히 큰 비중을 두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제목이 시사하듯이 작중 인물의 심리 묘사는 상당히 구체적이고 정밀하다.

 '선생님’은 도쿄 제국 대학 출신의, 이른바 엘리트 지식인인 중년의 남성이다. 그렇지만 세상에 나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세상과 담을 쌓고 집에 칩거한 채 아내와 단둘이 살아간다. 그는 젊은 시절 작은아버지의 배신과 친구의 자살로 큰 충격을 겪고 고독하게 살아간다. 방학을 맞아 한 해안 마을에서 여름을 보내던 ‘나’는 우연히 ‘선생님’을 만나고 그와 가까워지게 된다. ‘나’는 '선생님'의 삶과 사상에 매료되어 그와 더욱 가까워지고 싶어 하지만, ‘선생님’은 항상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나’를 대한다. ‘나’는 그 이유는 몰랐지만, 여전히 관계를 지속해간다. 그러던 중에, 대학을 졸업한 ‘나’는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고향에 내려가게 된다. 이때 ‘나’는 편지로 보내진 ‘선생님’의 유서를 받는다. 그리하여 3편은 '선생님'이 ‘나’로 등장하여 유서에서 자신의 과거를 밝히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선생님’은 염세주의적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고독한 인간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염세주의자는 대개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 쉽사리 마음을 열지 못한다. 처음에는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세상에 다가서지만, 도리어 연약한 마음에 여러 상처를 입는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내면에 깊이 침잠하게 되는 것이다. ‘선생님’의 이러한 태도는 그의 유서에 나오는 다음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작은아버지에게 배신당했을 때 사람은 믿을 게 못 된다는 점을 절실히 느낀 건 사실이지만, 그건 타인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이지, 내 자신에게만큼은 그때까지만 해도 확실한 믿음이 있었네.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나 자신은 멋진 인간이라는 신념이 마음속 어딘가에 있었단 말이지. 그 믿음이 K로 인해 무참히 깨져버리고 나 자신도 작은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내 마음은 심하게 흔들리게 됐네. 인간들에게 등을 돌린 나는 결국 나 자신도 저버리고 닫힌 공간에 날 가두게 된 것이지.”(329p)

 ‘선생님’은 세상에 대한 환멸을 넘어 자기 자신조차 증오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내가 앞서 제시한 염세주의자의 모습보다 더 정도가 심하다. 즉 인간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고 믿을 것은 자기 자신뿐이라고 생각했던 ‘선생님’은, 어떤 계기로 인해서 최후의 피난처인 자기 자신조차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결국 그는 인간으로서의 모든 자유를 잃어버린 채 ‘닫힌 공간’에 자신을 가두었다.

 그런데도 작품을 읽어나가며 ‘선생님’에게 공감하게 된 것은, 나 역시 '선생님'과 비슷한 태도를 가질 때가 종종 있어서다. 나 자신을 믿지 못하는 태도, 스스로에 대한 비난, 인간에 대한 환멸…….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뒤표지를 보니, 본 작품을 두고 "한 인간의 ‘아집'을 절제된 투명한 문체로 써나간 수작’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나는 작중 인물인 ‘선생님’에게 감정을 이입하며 읽었는데, 이러한 그의 태도를 두고 아집이라고 평한 의견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아집이 가진 부정적인 이미지로 인해 자신을 변호해보고 싶다는 오기가 생겼다. 저런 삶의 태도를 아집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그래서 작품을 다 읽은 뒤 ‘선생님’의 태도, 더불어 나 자신의 관점을 한번 돌아보게 되었다.

 사전에는 ‘아집(我執)’을 ‘자기중심의 좁은 생각에 집착하여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입장을 고려하지 아니하고 자기만을 내세우는 것(출처: 표준국어대사전)’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정의를 알고 나자 ‘선생님’의 태도를 아집에 사로잡힌 것이라고 충분히 평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선생님’은 당대의 지식인이라 할 만한 인물이었고, 자기 생각과 행동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는 절친한 친구 'K'를 자신이 사는 하숙집에 들이고자 한 이유를 보면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서적들로 성벽을 쌓고 그 안에 틀어박혀 있던 K의 마음이 점차 열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내게 있어 무엇보다 기쁜 일이었네. 난 처음부터 그 목적으로 일을 진행했으니까 말이야.’(248p) 그는 ''K'를 설득할 때 그가 고집하는 것은 맹신에 불과하다는 걸 반드시 깨우쳐주고 싶었네.’(244p) 라며 유서에서 그때를 회고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마저도 친구인 ‘K’ 못지않은 아집에 빠져 있다는 것을 ‘선생님’은 알지 못했던 것 같다. 그것은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자신의 의도대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아집이다. 그는 ‘K’의 비관적인 태도와 처지를, 그를 자신의 하숙집에 들임으로써 바꿀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처음에는 강한 믿음에 기반한 선의로 시작하였으나, ‘선생님’은 그로써 생겨난 사건으로 큰 죄책감에 빠져 평생을 지내다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선의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확신은 무섭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인간이 가진 직관과 정보에 의한 판단으로 어떤 결과가 나올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래서 이 작품은 비극적이다.

 “아무튼 날 너무 믿지 말게. 곧 후회할 테니까. 그리고 자신이 기만당했다는 것에 대한 보복으로 끔찍한 복수를 하게 될 테니까.”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훗날 그런 모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지금의 존경을 물리고 싶네. 나는 지금보다 더 지독한 외로움을 참기보다 차라리 외로운 지금의 상태로 버텨가고 싶네. 자유, 독립 그리고 나 자신으로 가득 찬 현대에 태어난 우리는 그 대가로 모두가 이 외로움을 맛봐야겠지.”
 나는 이 생각을 신앙처럼 품고 계신 선생님에게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몰랐다.(49p)

 ‘선생님’은 자신이 느끼는 외로움을 자신에게 주어진 대가로 받아들이는 생각을 일관되게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로서는 ‘선생님’의 이러한 태도가 단순한 ‘아집’이라고만은 생각되지 않는다. 그는 순수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끝까지 뜻대로 일관되게 유지하고자 했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댐으로써 일관된 삶을 이루고자 했다. 그렇게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큰 죄를 지은 사람으로서 합당한 모습이라고 확신했다. ‘작은아버지’로 대표되는 그토록 싫어하던 인간의 모습, 제 잘못을 의식조차 못 하는 그들과 결코 같은 길을 걸어가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그는 끝까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오로지 ‘선생님’만을 믿고 살아왔던, 홀로 남겨질 ‘사모님’에게 털어놓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선생님의 결정은 다른 결과에 대한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차단되는 극단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유서에서 자신의 처지에서 다른 선택지는 고려할 수조차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과거를 속 시원히 아내에게 털어놓으려 했던 적도 몇 번 있었네. 허나 그럴 때면 반드시 그다음 순간에 나 이외의 어떤 힘이 나타나 고백하고자 하는 날 억누르는 거야.’(328p)

 ‘내가 이 감옥 안에 더 이상 틀어박혀 있을 수 없게 됐을 때, 그리고 어찌해도 그 감옥을 깨부술 수 없을 때 내가 취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은 단 하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지. 자네는 어째서 그것만이 길이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언제나 내 마음을 옥죄어오던 그 불가사의한 힘은 모든 면에서 나의 활동을 차단하면서도 죽음으로 가는 길만큼은 갈 수 있도록 날 놓아주었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겠나?’(336-7p)

 이 작품을 이해할 때 ‘인간은 이기적 존재’라고 가정하는 ‘합리주의적 인간관’을 적용한다면, 그의 죽음은 쉽게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분명 그는 모든 사실을 홀로 간직한 채, 모른 척 아내와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모님이 돌아가시고는 그의 과거를 아는 사람도 더는 세상에 없다. 그런데도 그가 자살로써 생을 마감한 것은 일견 이해할 수 없는 행동처럼 보인다. 그가 말하는 ‘언제나 내 마음을 옥죄어오던 그 불가사의한 힘’이란 대체 무엇일까?

 우리가 위의 유서 내용에서 가장 쉽게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아마 ‘양심’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잘못된 행동을 하였을 때 흔히 ‘양심이 찔린다’고 표현하는 마음속의 어떤 것 말이다. 윤리적인 차원에서 남들보다 더 결벽성을 가진 사람을 우리는 종종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에게 매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보통 이상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가령 누군가는 특정한 사건을 계기로 인생관을 완전히 뒤집고, 다른 무언가에 몰두하며 새로운 인생의 의미를 발견해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이 그와 같은 선택을 했던 것은 그의 타고난 성향,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자신 안에 확립된 가치관이 매우 확고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한편으로는, 그리스 비극을 참조하여 그의 선택을 분석해볼 수 있다. 그의 유서에는 ‘불가사의한 힘,’ ‘운명’과 같은 말이 꾸준히 언급되는데, 이에 따르면 다른 어떤 선택도 그로서는 불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마음』은 일종의 운명극(주인공의 모든 행위를 운명이나 숙명으로 돌려 파멸과 몰락으로 이끌어가는 희곡 작품. 출처: 표준국어대사전)적 성격을 가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분석은 다분히 문학적이어서, 논리적 원인을 규명하기에는 거의 효용이 없다고 하겠다. 더구나 현대에는 고대 그리스와 같이 지배적인 신조차 없다. 그렇게 보면 인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로운 존재로서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때때로 문학 작품 밖의 실제 삶 속에서 누군가에게 말 못할 '운명'과도 같은 해석하기 어려운 일들을 경험하곤 한다. 물론 어떤 현상에 대한 해석은 어느 정도는 믿음의 문제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해석이 다양하다는 것은 결국 과학의 시대라고 하는 현대에조차도 인간이 갖가지 현상의 '정확한' 원인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지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마음’ 역시 여전히 그 실체와 작용 방식이 완전하게 규명되지 않고 있다. 다만 현대 뇌과학, 심리학 등의 학문 영역에서는 뇌를 연구 대상으로 하여 인간 마음의 작동 기제를 규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런 추세로 보면 여러 문학 작품이 뇌과학적 관점에서 새롭게 읽힐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마음의 작동 기제가 어떻든 소세키의 『마음』이 백여 년이 지나도록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죄책감의 문제’와 ‘복잡한 인간의 내면 심리’를 세밀하고 고백적인 문체로 다루었기 때문이 아닐까.

2018. 8. 7. (화) 23:44 최종 수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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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
김숨 지음 / 현대문학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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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강점기는 일본의 국가주의에 힘없는 조선 땅과 조선 국민이 무참히 짓밟혔던 시기이다. 36년 동안 무수히 많은 수탈과 폭력·인권 유린이 자행되었고 조선인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다. 일제는 오로지 국가의 전승(戰勝)을 위해 개인을 철저히 도구화하였다. 여러 가지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가 인간으로서 도저히 참고 넘어갈 수 없는 일이 ‘위안부 강제 동원’일 것이다. 나는 인간으로서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한다. 더 이상 이런 국가적 폭력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작품 속 ‘그녀(윤금실)’는 열세 살 어린 나이에 만주 위안소로 끌려갔다. 이유는 몰랐다. 동의 여부도 묻지 않았다. 그렇게 일본군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끌려간 어린 여성은 무려 20만 명에 달했다. 그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사랑하는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열세 살에서 많아야 열여섯 살. 오늘날 태어났더라면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다니고 있을 나이다. 몸과 마음이 채 다 자라지 않아 영양과 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한 때다. 그런 나이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은 그들의 심정이 어땠을지 감히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월경을 시작조차 않은 어린 여성도 있었으나 그런 것은 동원에 고려되지도 않았다. ‘소녀들의 몸에는 보통 하루에 15명 정도가 다녀갔다. 일요일에는 50명도 넘게 다녀갔다(87p).’ 누군가는 ‘불두덩에 대고 성냥을 그어댔다(44p).' 그렇게 십여 년을 보낸 뒤, 살아남은 이들은 광복을 맞아 조선 땅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잊혀졌다. 아니면 몸을 버리고 왔다며 손가락질 당하거나, 큰오빠가 죽었는데 울지도 않는다며 비난받아야 했다. 감정이 소진되어 눈물조차 나지 않는 것을 모른 채 말이다. 무슨 일이 있었다고 누구에게 털어 놓을 분위기는 절대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끌려가서 어떻게 살다 왔는지 밝힐 수조차 없었고, 홀로 엄청난 상처를 숨기고 살아야 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항상 전전긍긍하면서 외롭게 살아야 했다. ‘그녀’ 역시 믿고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이, 심지어 자식도 하나 없이 외롭게 한 많은 삶을 아흔 셋까지 살아왔다.

 그런 한 많은 그녀지만,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경험할 때 신을 느낀다. ‘심지어 그녀는 신이 두렵기까지 하다(56p).’ 항상 움츠리고 살아온 그녀가 역설적으로 신을 가장 두려워한다. 정작 악한 이들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존재임에도 말이다. 또 그녀는 ‘신에게 얼굴이 있다면 늙지 않을 것 같다. 신의 얼굴이라서 늙지 않는 게 아니라, 더는 늙을 수 없을 만큼 늙은 얼굴이라서(24p)' 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아마 사람으로서 상상하지 못할 ‘인간의 끝’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같은 인간으로서, 짐승 같았던 이들의 행동이 초래할지 모를 신의 처벌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겨우 열세 살이던 자신을 하루아침에 만주에 데려다 놓은 것도 인간이었다(204p).' 물론 잔인한 일본 국가주의의 폭정 속에서도 사람답다고 말할 수 있는 이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분선의 고향집으로 전보를 부쳐 주고 고향에서 온 전보를 가져다 준 야전 우체국 국장, 전투를 앞두고 울던 일본 군인……. 심지어 향숙은 일본 군인들을 동정하기도 한다.

 “일본 군인들도 우리처럼 부모형제하고 생이별하고, 목숨을 버리러 만주까지 왔대. 어제는 내가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우니까 그러더라. 죽지 말라고…… 어떻게든 살아서 엄마가 있는 조선에 돌아가라고…….”(174p)

 작품 말미에서 한 생존자 할머니가 TV에 소개된다. 그녀는 지금까지 소설 ‘부활’ 만 여섯 번을 읽었다고 했다. 그녀는 책을 펼쳐 몇 페이지를 방송사 여자에게 읽어준다.

 “몇십만의 인간이 한곳에 모여 자그마한 땅을 불모지로 만드려고 갖은 애를 썼어도, 그 땅에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게 온통 돌을 깔아 버렸어도, 그곳에서 싹트는 풀을 모두 뽑아 없앴어도, 검은 석탄과 석유로 그슬어놓았어도, 나무를 베어 쓰러뜨리고 동물과 새들을 모두 쫓아냈어도, 봄은 역시…… 찾아들었다. 따스한 태양의 입김은 뿌리째 뽑힌 곳이 아니라면 어디에서고 만물을 소생시켜…… 틈새에서도 푸른 봄빛의 싹이 돋고……”(191p)

 ‘누굴까? 누가 새끼 고양이를 양파망에서 꺼내 놓아주었을까?(205p)' 나는 고양이를 꺼내준 이가 누구인지 모른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가 인간이라는 것이다. 생명을 해치는 이가 있으면, 구하는 이도 있다. 망치는 인간이 있으면, 회복시키는 인간도 있다.

 일본 제국은 식민지 국가들에 극악무도한 행위를 저질렀다. 물론 한 나라에 역사적 과오가 아예 없기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피해자가 있고, 기록이 남았다. 일본 제국을 계승한 현재의 일본이 ‘망치는 나라’를 벗어나 ‘회복시키는 나라’가 되고 싶다면, 대한민국과 위안부(성노예) 피해자분들께 진심으로 사과해야 한다. 국가적 폭력 안에서, 국가보다 존엄한 한 명 한 명의 인간이 무참히 착취당하지 않았던가. 피해자 할머니들이 살아 계시는 지금이 일본이 인간의 얼굴을 한 나라로 역사에 기록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그 기회는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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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
김숨 지음 / 현대문학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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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그녀는 신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 찡그린 표정일까, 화가 난 표정일까, 체념한 표정일까, 안쓰러움이 담긴 표정일까.
그런데 신에게도 얼굴이 있을까?
그렇다면 신의 얼굴도 인간의 얼굴처럼 늙을까?
그녀는 신에게 얼굴이 있다면 늙지 않을 것 같다. 신의 얼굴이라서 늙지 않는 게 아니라, 더는 늙을 수 없을 만큼 늙은 얼굴이라서. - P24

24 장롱에서 요를 내려 거울 아래에 편다.
문지방를 등지고 앉아 요를 손으로 쓸고, 또 쓴다.
서쪽으로 앉은 마루 깊숙이 오후 볕이 든다. 그녀의 그림자가 요 위로 오줌 자국처럼 번진다.
그녀는 요 위로 올라가 천장을 바라보고 눕는다.
눈을 감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그녀는 잠들려 애쓰지 않는다. 인간이 잠을 안 자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지난 70년 동안 그녀는 온전히 잠들었던 적이 없다. 몸뚱이가 잠든 동안에는 영혼이, 영혼이 잠든 동안에는 몸뚱이가 깨어 있었다.

그녀는 감았던 눈을 도로 뜨고 옆으로 천천히 돌아눕는다. 누군가 자신의 옆으로 와서 눕기를 기다리듯 손으로 요를 쓰다듬는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의 옆으로 와서 눕지 않는다. - P24

41 그녀는 한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 게 타고난 사주팔자인지, 기질인지, 신의 의지인지 모르겠다. 그 모든 것이 합심해서 한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으면서, 그녀는 신을 느낄 때가 있다. 간유리에 새벽빛이 번질 때, 풀숲에서 참새들이 떼 지어 날아오를 때, 다디단 복숭아를 베어 물 때……. 신을 느낄 때를 헤아려보던 그녀는 자신이 신을 느낄 때가 많다는 걸 깨닫고 놀란다. 생전 처음 도라지꽃을 보았을 때도 그녀는 신을 느꼈다.
심지어 그녀는 신이 두렵기까지 하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으면서, 혹여나 신이 볼까봐 남의 집 마당에 떨어진 모과 한 알 몰래 줍지 않는다. 신이 들을까봐 속말로라도 다른 이에게 저주를 퍼붓지 않는다.
신이 있다고 말하는 이들보다 자신이 어쩌면 더 신을 두려워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 P41

90 이제 여기서 죽는가 보다 하면서도, 이런 데 있다가 집에 가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한탄하면서도. 고향집에 돌아가면 뭐라고 말해야 하나 막막할 때가 있었다. 실공장에 있었다고 해야 하나? 비단공장에 있었다고? 아니면 그냥 좋은 공장에. - P90

128 분선은 자신에게 자주 오던 야전 우체국 국장에게 부탁해 고향으로 전보를 부쳤다. 그는 일본 동경이 고향으로 와세다 대학교를 나왔다고 했다. 군대를 제대하고 우체국에 취직을 했는데 야전 우체국으로 발령이 나서 만주까지 왔다. 그는 분선의 고향집으로 전보를 부쳐주었다.
분선은 글자를 쓸 줄 몰라 금복 언니가 대신 써주었다.

저는 비단공장에 와 있어요. 돈 벌어 돌아갈 때까지 몸 건강히 계세요. 답장은 하지 마세요.

얼마 뒤 분선은 고향에서 부쳐온 두 통의 전보를 받았다. 우체국 국장이 그 전보들을 챙겨서 가져다주었다. 두 통의 전보는 한 달 정도 시간차를 두고서 도착했다.

어머니가 아파 죽어간다.

어머니가 죽었다. - P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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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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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월 첫 완독
2018년 7월 두번째 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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