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상의 이해
동국대학교불교문화대학불교교재 / 불교시대사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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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전반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살펴보기에 적합한 책이다. ‘양질의 불교 사상 입문서‘ 라고 이 책을 부른다면 적절할 것 같다. 우리나라 최고의 불교 교육•연구기관이라 할 수 있는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에서 냈으며, 십여 명의 불교 각 분야 연구자들이 집필에 참여함으로써 적당한 깊이도 갖춘 책이다.

불교는 ‘괴로움[苦]‘을 핵심 문제로 삼고, 깨달음을 얻어 이를 제거하고 열반에 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이다. 기본적으로 자아와 존재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으며(제법무아(諸法無我)),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본다(제행무상(諸行無常)). 이는 모든 존재요소가 서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어떠한 것도 스스로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불교의 핵심 사상인 연기법(緣起法)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큰 틀 안에 정토사상•선사상•윤회사상•화엄사상•중관사상•유식사상 등 여러 가지가 자리하고 있다.

《불교사상의 이해》를 읽고 위와 같이 불교 전반에 대한 이해를 넓힐 수 있어 좋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종교를 학문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나의 태도에 회의감이 들었다. 학문이란, 세상에서 일어나는 현상들 중 일부를 특정한 기준으로 묶어 이들을 비교•분석하는 일이지 않은가? 이렇게 여러 종교를 싸잡아서 ‘종교학‘이라고 묶어 비슷한 현상이라는 것을 전제한 채 바라본다면, 신앙인과는 동떨어진 인식으로 종교를 볼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신앙인은 자신의 종교와 그 가르침을 ‘진리‘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학문의 영역에서의 특정 종교는 비슷한 현상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따라서 진정한 학자라면 종교에서 순수한 진리성을 얻기 어려울 것이다. 종교는 믿음의 문제라고 하지만, 그 믿음 역시 학자적 천성을 가진 자라면 마음대로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학자는 아니지만 그러한 성향을 갖고 태어났다는 자기 인식을 갖고 있다. 때때로 종교와 인연이 있었으나 믿음을 깊게 하지는 못했다. 마찬가지로 세상엔 남보다 더 영성적인 인간도 있다. 원인은 무엇일까? 한 가지로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최근에는 붓다가 말했던 연기법이 머릿속을 자꾸 맴돈다. 나는 이를 환경결정론적 세계관으로 이해한다. 즉 연기법은 모든 존재는 주어진 환경과 상황 속에서 인식을 얻고, 생각을 하며, 행동하는 것을 두고 ‘어떤 것도 자기 스스로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주장을 편 것이 아닐까, 라고.

141 예컨대 출가와 재가의 둘이 아님[不二]을 주장하며, 세속에서의 깨달음을 강조하고 있는 「유마경」에서는 자신에게 달라붙은 꽃을 세속적 장식이라 하여 떼어 버리려고 하는 사리뿌뜨라(붓다의 10대 제자 중의 한 명으로 지혜 제일)에 대해 꾸짖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꽃 자체는 세속적인 것이 아님에도 그가 그렇게 분별하였기 때문이다. 세속적이라고 하는 것은 사리뿌뜨라 자신의 분별이고 집착일 뿐 분별과 집착을 떠난 대상 자체는 애당초 청정하다. 마찬가지로 탐욕을 탐욕으로밖에 볼 수 없는 사람은 탐욕을 떠나는 것, 즉 열반에도 집착하며, 열반도 그것에 집착하면 이기적인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유마경」에서는 바로 이같은 출가자의 이기적 욕망과 집착을 꾸짖고 있는 것이다. - P141

268 현대의 과학문명과 기계화된 산업사회의 구조 속에서 인간성이 말살되고, 신(神) 중심의 종교관과 인간관의 전통 속에서 살아온 서구인들에겐 신에 의한 피조물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이러한 인간의 근원적인 마음인 선을 통하여 자아의 참된 인간관과 각자 스스로 창조적인 인간으로서의 삶의 가치관을 되찾을 수 있는 선의 정신과 선불교의 문화가 완전히 새롭고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선의 풍토와 환경 속에 살고 있는 동양에서 선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고조된 소위 선 붐의 현상은 이처럼, 서구에서 새로운 각광을 받고 널리 주목된 선에 대한 관심이 서구의 과학문명과 함께 동양으로 다시 전래되면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임을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진리가 너무 가까이 이씩에 볼 수 없는 것처럼, 우리들이 선의 정신 속에 살면서 매일 매일 사용하고 있기에 더욱더 그 가치를 바로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_선사상 - P268

308 행위에 대하여 선악의 판단을 하는 경우, 윤리적 주체로서의 ‘아뜨만’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무아(無我)를 근본으로 하는 불교에서 과연 윤리적 행위가 성립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의 무아설은 결코 윤리적 행위의 주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체적 혹은 기능적인 ‘아뜨만(我)’을 인정하는 사고를 부정하여 ‘아(我)’에의 집착을 철저히 물리치고자 하는 데 있으며, 윤리적 주체로서의 ‘자기(自己)’는 오히려 이를 적극적으로 승인하고 있다.

「법구경」에도 ‘아뜨만’의 장이 있어, "자기 자신이 행한 악은 자기에서 돋아나며, 자기로부터 발생한 것이다.[161]", "사람은 자기 자신이 악을 행하여 자신이 스스로 염오(染汚)된다. 자신이 악을 행하지 않아 스스로 청정하게 된다.[165]"라고 하면서 자기가 선악 행위의 주체임을 명확히 하였다. 그리고 "만약 자기가 귀중함을 안다면 이[自己]를 잘 지켜야 한다.[157]", "자기야말로 자기의 주인이다. 대체 다른 누가 주인일 것인가. 실로 자기가 잘 조어됨으로 해서 사람은 얻기 힘든 주인을 얻는다.[160]"라고 하면서 자기를 애호하고, 자기를 잘 다스릴 것을 강조하고 있다.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라는 것은 자신이 의지할 본래의 자기를 추구한다는 선언의 다름 아니다.

이러한 선언은 급기야 유명한 가르침이 되어 나타나게 된다. 석존 최후의 설법의 하나로 행해진, 이른바 ‘자등명 법등명’의 교설이 그것이다.

자기를 ‘디빠(dipa, 등불 또는 섬)’로 삼으며, 자기를 귀의처로 삼되 남을 귀의처로 삼는 일 없으며, 법(法)을 ‘디빠’로 삼으며, 법을 귀의처로 삼되 남을 귀의처로 삼는 일 없이 (너희는) 주(住)하라.

여기서 가리키는 ‘자기’는 형이상학적 원리로서 상정된 것이 아니라 실천적·주체적으로 파악되는 자기이다. 그것은 자기가 의지할 본래의 자기, 진실의 자기를 가리키는 것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에 있어서는 윤리적 주체로서의 자기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나아가 이상으로서 실현되어야 할 자기를 추구하되 그것이 ‘법’에 기초함을 설하고 있다.

여기서 법(法)은 ‘다르마(dharma)’로서 ⓵법칙, 정의, 규범 ⓶가르침 ⓷진리, 영원한 최고의 진리, 최고의 존재 ⓸경험적 사물 등 4가지 의미로 나누어지는데, 위의 법등명의 ‘법’은 ⓵⓶⓷의 어느 것을 취하여도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법칙 규범으로서의 법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으로서의 법, 혹은 영원한 진리로서의 법에 수순하는 자기야말로 본래의 자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_불교의 윤리 - P308

361 중성 미자 뉴트리노나 전자와 같은 입자는 일종의 내부 회전, 즉 스핀을 갖고 있는데(물론 모든 소립자들은 스핀을 갖고 있다.) 실험자가 입자의 스핀 방향을 알기 위해서 실험장치를 만들고 그 좌표가 될 특정 방향을 취하였을 경우(이 때 기준이 되는 방향은 전장 또는 자장에 의하여 정의될 수 있다.) 놀라운 사실은 그 스핀이 장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즉, 입자의 스핀은 실험자가 선정한 기준 방향을 향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입자는 실험자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언제나 실험자가 자유롭게 선정한 기준 방향으로 스핀의 회전 방향이 바뀌어 마치 실험자의 마음을 읽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미시적인 소립자의 세계는 이처럼 기묘한 주관적 요소가 개입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사람이 무언중에 다른 사람과 직관적으로 공감을 느끼는 순간을 불교에서는 ‘염화미소’니 ‘이심전심’이니 하는데, 그 경우와 일맥상통한다. 단지 양자역학의 특징은 전자와 같은 물질입자가 마치 정신이 있는 양 인간의 정신과 교감이 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점이다. 물론 왜 그런지는 알 수 없다._불교와 과학 - P361

395
3) 상대주의
타종교를 ‘동등하게’ 인정하지 않는 포괄주의와 달리 상대주의는 모든 종교의 동등성을 솔직하고 분명하게 인정한다. 독일의 신학자 에른스트 트릴취는 하느님이 서양을 구원하기 위해서 기독교라는 종교를 주었고, 동양을 구원하기 위해서 불교를 주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이 두 종교는 시간이 아무리 지나더라도 포괄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로 수렴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즉, 상대주의는 참종교가 동시에 여러 개 있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상대주의는 서로의 신앙을 철저히 인정한다. 그러므로 상대주의는 단연코 개종주의를 배격한다. 타종교인을 교화시키고자 하는 선교의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비종교인을 종교인으로 교화시킬 필요는 인정한다. 이는 종교적으로 철두철미한 상호 존중과 평화 공존의 입장을 취한다. 이 상대주의는 매우 지성적이고 양심적이며 자기 개방에 적극적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어찌 보면 상대주의 역시 철저한 자기 폐쇄성에 갇혀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이미 지적했지만 자기 신앙에 대해서 철저히 성실하면서 동시에 다른 종교도 참된 종교라고 인정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자신의 신앙과 타인의 신앙이 동일한 내용임을 확인하기도 전에 서로의 참과 옳음을 인정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자기 기만이거나 피상적인 타협주의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의미에서 상대주의는 진리 추구에 대한 불성실 혹은 방기라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신앙을 상대적인 참 정도로만 인정하면서도 그것에 절대적인 헌신을 바칠 수 있을까 하는 문제도 생긴다. 상대주의는 자기 자신의 신앙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을 불가능하게 하리라는 것이다. 자신의 신앙을 상대적인 저옫의 참으로만 여긴다면 그 가르침에 전적으로 헌신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결국 상대주의는 서로를 동등하게 인정코자 함으로써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의 태도를 갖게 될 것이다. 상대주의는 나는 내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살아갈 터이니 너는 네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살아가면 그뿐이라는 태도가 된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의 상대주의적 태도는 불행한 타자에 대한 방관일 수밖에 없다. 상대주의는 나는 나대로 행복하니 너는 너대로 알아서 행복하라는 태도이다. 즉, 상대주의는 타종교의 신자들에 대한 적극적 애정을 갖지 않는다. 배타주의나 포괄주의가 개종주의 때문에 문제가 된다면 상대주의는 자기 만족에 안주하여 개종의 의지가 전혀 없다는 점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상대주의 역시 자기 폐쇄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_불교와 다종교 사회


396
4) 다원주의
다원주의는 다종교 상황을 철저하게 인정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상대주의와 비슷하다. 다원주의는 존 힉(John Hick), 폴 니터(Paul Knitter), 윌프레드 캔트웰 스미스(Wilfred Cantwell Smith), 레오나드 스위들러(Leonard Swidler), 라이문도 파니카(Raimundo Panikkar) 등이 대표하지만, 이들의 입장이 다양하여 그 성격을 한마디로 적확하게 규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배타주의와 포괄주의는 참종교나 완전한 종교를 하나만 인정한다.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는 다수의 종교를 참으로 인정한다. 특히 다원주의는 적극적으로 다수의 참종교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자신의 이름을 얻었다. 그렇다면 상대주의와 다원주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상대주의가 진리 추구의 방기와 불행한 타자에 대한 방관일 수밖에 없다면, 다원주의는 결코 이러한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첫째, 다원주의는 진리를 향해 진지하고 정직한 자기 개방을 추구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다원주의는 자기 완전성의 주장에 폐쇄적으로 갇혀 있기를 거부한다. 다원주의는 자기 완전성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자기 완전성에 갇혀 있지도 않는다. 다만 자기 완전성을 잠정적으로만 주장함으로써 자기 쇄신과 자기 발전의 가능성으로 열려 있고자 하는 것이다. 흔히 말해 다원주의는 열린 종교이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둘째, 다원주의는 타종교의 신자들에 대한 진지한 이해도 포기하지 않는다. 즉, 불행한 타자에 대한 방관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진지한 공감과 이해를 도모하는 것이다. 다원주의는 자신의 신앙에 절대적으로 헌신하면서도 타종교를 향해 어떻게 진지하게 열려 있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개인의 체험에 기초하며 본질적으로 배타적 속성을 갖는 타자의 신앙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인가? 다원주의자들이 이러한 목적을 위해 동원하는 방법이 다름 아닌 대화이다. 다원주의자들은 대화라는 방법이 그러한 목적을 성취시켜 줄 것이라고 믿는다. 배타주의, 포괄주의, 상대주의는 대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원주의만이 진리 추구와 타종교의 이해를 위해 대화를 추구한다. 다원주의는 진리에 대한 정직하고 개방적인 태도를 바탕으로 타종교와의 대화를 통해서 자신에 대한 이해와 쇄신을 도모한다. 다원주의는 대화를 통해서 타자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도모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즉, 다원주의는 대화를 통한 상호 변혁과 쇄신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 상호 변혁과 쇄신의 과정에서 서로가 다같이 공유할 수 있는 진리를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_불교와 다종교 사회 - P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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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 완결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강승영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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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예측 불가하다. 어떤 때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자신과 세상이 싫어지기도 하고, 어떤 때엔 평온함이 찾아오고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기도 한다. 지나간 때를 회상하며 부끄러움에 젖기도 하지만, 시간이 더 지나면 그런대로 괜찮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처럼 이상스러운 것이 바로 삶이라고 생각한다. 고통을 이겨낼수록 지혜로워진다고들 하지만, 그 말은 삶이 계속해서 고난을 줄 것이라는 암시이기도 하다.


 그런 삶의 풍랑 속에 잠시나마 희망을 품게 하고 평온함을 느끼게 해 주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제법 유익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나아가 세상에 그 이로움이 미칠 수도 있겠다. 불만과 욕망, 자기 연민은 모든 파괴적 행위의 밑바닥에 자리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내게 월든은 그런 책이었다. 평온하고 침착하고 담담하게 자신을,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게 한다. 이런 마음의 지속이 단지 며칠뿐이라도 괜찮다. 월든의 구절들은 삶의 길목에서 머릿속에 떠오를 것이며, 내 책장에 영원히 꽂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틈날 때마다 책을 펼쳐 위안과 평온을 얻을 것이다.


 18장으로 구성된 월든은 미국의 저술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Henry David Thoreau, 1817~1862)2년여간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 마을 근처에 있는 월든 호숫가의 숲 속에 집 한 채를 지어 홀로(15p)’ 살던 때의 생활 내력, 호숫가의 자연 묘사, 그리고 그 생활에서 저자가 느낀 생각들을 한데 담아낸 수필집이다. 책의 핵심 주제는 날 것 그대로의 삶에 직면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나는 생을 깊게 살기를, 인생의 모든 골수를 빼먹기를 원했으며, 강인하고 엄격하게 살아, 삶이 아닌 것은 모두 때려 엎기를 원했다. 수풀을 폭 넓게 잘라내고 잡초들을 베어내어 인생을 구석으로 몰고간 다음에, 그것을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압축시켜서 그 결과 인생이 비천한 것으로 드러나면 그 비천성의 적나라한 전부를 확인하여 있는 그대로 세상에 알리며, 만약 인생이 숭고한 것이라면 그 숭고성을 스스로 체험하여 다음번의 여행 때 그에 대한 참다운 보고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139p)


 이런 마음가짐을 갖고 월든 호숫가로 들어간 소로우는, 먼저 삶의 기본적인 요소를 성찰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우리가 사는 이 온대성 기후에서는 인간 생활의 필수품은 식량, 주거 공간, 의복, 연료의 항목으로 정확하게 나눌 수 있겠다. 이것들을 확보하고 난 다음에야 우리는 자유와 성공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인생의 진정한 문제들을 다룰 준비가 되는 것이다.(29p) ……(중략)…… 나 자신의 경험에 의하면 현재 이 나라에서 의식주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몇 가지 도구, 즉 칼, 도끼, , 손수레 따위이며, 학구적 취향을 가진 사람이면 램프, 문방구 그리고 몇 권의 책인데, 이런 것들은 모두 사소한 비용으로 마련할 수 있다.(31p)”


 삶의 기본적인 요소들을 파악했으면 다음 단계는 그것들을 어떻게 얻느냐 하는 것이다. 소로우는 아무것도 없는 월든 호숫가에 왔기 때문에 우선 집을 짓는다. 옷은 있던 것을 그대로 입는다. 먹을 것은 농사로써 스스로 얻는다. 처음에 말한 소박한 삶의 원칙대로 소로우는 이 모든 것을 최소한의 비용으로 적절하게 해결한다.


 소로우가 월든 호숫가에 정착하고 생활하는 과정을 따라 읽으며, 소박하고 독립적인 삶에 크게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할 것 같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 첫째는 삶의 핵심 기술을 숙달하는 것이고, 둘째는 세상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먼저, 삶의 핵심 기술은 소로우와 같은 소박하고 독립적인 삶을 영위하는 데 근본적으로 필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젊은이들이 당장에 인생을 실험해보는 것보다 사는 법을 더 잘 배울 수 있는 방법이 또 있겠는가? 그렇게 하면 수학 공부만큼이나 그들의 정신을 단련시키게 될 것이다.(82-3p) ……(중략)…… 다음 두 학생 중 한 달이 지난 다음에 어느 쪽이 더 발전해 있을까? 즉 한 학생은 관련 서적을 두루 읽으면서 자신이 직접 쇠붙이를 캐고 녹여 주머니칼을 만들었고, 다른 학생은 대학에 나가 야금학 강의를 들으면서 아버지로부터 로저스 표주머니칼을 선물받았다면 말이다. 둘 중에 누가 더 손을 잘 베이겠는가?(83p) ……(중략)…… 가난한 학생들까지도 정치경제학만 공부하고 강의받고 있을 뿐, 철학과 동의어 관계에 있는 생활의 경제학은 대학에서 진지하게 가르치지 않고 있다. 그 결과, 애덤 스미스와 리카도와 세의 경제학 서적을 읽고 있는 동안 그 학생은 자기 아버지를 헤어날 수 없는 빚 구덩이에 몰아넣고 마는 것이다.(83-4p)“


 나는 돈을 어떻게 버는지에만 흥미를 기울였지, 정작 그 목적이 되는 필요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화폐는 필요한 물건을 얻기 위한 주요한 수단이지만, 인간이 삶에 응당 가져야 할 관심을 빼앗아간다. 스스로를 화폐 그 자체와 외부의 도움에 의존하도록 만든다. 그런 삶은 무기력함을 주고 자기 주도감을 앗아간다.


 사치품에 재산을 소모하지 않는 것은 소박하고 독립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한 기본적인 방편 중 하나이겠지만, 나는 삶의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들, 즉 의주에 관련된 웬만큼의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이 한 인간이 성숙해지는 데 상당히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이를테면 목공건축요리농사에 필요한 기술 말이다. 꼭 써먹지 않더라도 자신감을 줄 것 같다. 이는 성공적인 개인주의적 삶과도 연결될 것이다. 생활의 독립성은 삶을 자신의 원칙대로 주도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근본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세상에 대한 열린 마음이다. 소로우의 이런 면모는 대상에 대한 집중력과 관찰력, 그리고 거기로부터 나오는 환경과 자연에 대한 관심과 사랑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를테면, 그가 얼음을 흥미롭게 관찰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가장 흥미 있는 대상은 역시 얼음 그 자체이다. ……(중략)…… 얼음이 아직 비교적 단단하고 거무스레한 동안에는 얼음을 통해서 물이 보인다. 이들 공기 방울은 지름이 1인치의 80분의 1부터 8분의 1까지의 여러 크기이고, 매우 맑고 아름다우며, 얼음을 통해서 들여다보는 사람의 얼굴이 비친다.(368p)”


 보통 사람들이라면 그냥 지나칠법한 얼음을, 소로우는 흥미롭게 관찰한다. 이런 세심한 집중력과 관찰력에서 자연에 대한 애정이 솟아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 아닐까? 어떤 한 대상을 유심히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누구라도 그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것에 대한 보다 완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이런 점에서 소로우가 월든 호수 및 호수 주변 자연환경과의 조화로운 삶을 지향하는 태도는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다. 자연을 개발하는 대상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불필요한 욕망을 가지지 않는 절제하는 삶을 살았고, 그렇기 때문에 마음의 평안함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평안함을 깨는 것은 보통 과도한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만의 관점에서 자연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 만물에 대해 마음을 연다. 호숫가에서 경험하는 자연이 모두 그의 친구와도 같았다. 다람쥐, 되강오리, 개미, 집에 사는 거미들을 포함해 숲을 지나다 우연히 찾아오는 손님들조차 그는 꺼려하지 않았다. 그는 여기에서 나아가 인간을 도구화시키는 흑인 노예제도에도 역시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당연히 무분별한 자연 개발에도 반대하는데, 자연 개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19세기에, 미국인이었던 소로우가 보여준 이러한 태도는 환경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는 현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소로우는 확고한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22개월을 이와 같은 생활을 했다. 이에 반해 나는 스스로 있는 그대로의 삶에 직면하려 하기보다는, 이미 주어진 세상의 권위에 삶에 대한 해석을 내맡기려던 경향이 컸던 것 같다. 이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알 수 있는 기회를 내던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말로 누구인가는 고민하지 않고 중요한 것들을 방치해왔다. 물론 스스로의 삶에 정면으로 맞부딪히며 살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삶을 원하는 대로 살기 위해서는 용기와 치밀한 계획, 그리고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아래의 구절에서 느껴진 소로우의 담담한 태도에 큰 감동을 얻었다.


 “당신의 인생이 아무리 비천하더라도 그것을 똑바로 맞이해서 살아나가라. 그것을 피한다든가 욕하지는 마라. 그것은 당신 자신만큼 나쁘지는 않다. 당신이 가장 부유할 때 당신의 삶은 가장 빈곤하게 보인다. 흠을 잡는 사람은 천국에서도 흠을 잡을 것이다. 당신의 인생이 빈곤하더라도 그것을 사랑하라.(484-5p)”


 한편, 월든에서와 같은 소박한 삶을 사는 게 평범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소로우는 모두가 월든 호숫가의 자신처럼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도 평생을 월든 호숫가에 살았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일관되게 소박한 태도를 갖기에는 인간의 욕망이 끝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도 명확히 알고 있다. 더 맛있는 음식, 더 좋은 집과 옷……. 단순히 의식주만 해결하기에는 인간은 바라는 것이 너무나도 많다. 또 소박한 삶을 방해하는 불가피한 사회적 관계도 많다. 이를테면 소로우는 가정이 없는 독신자였다. 만일 그에게 책임져야 할 가정이 있었다면, 그는 대범하게 월든 호숫가로 홀로, 혹은 가족과 함께 들어갈 수 있었을까?


 우리가 시장경제가 고도로 발전한 현대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도 독립적인 삶을 영위할 가능성에 회의를 느끼게 한다. 과연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 얼마나 다양할 수 있을까? 요새 귀농하는 인구가 늘어난다고는 하지만, 도시에서 수많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우리 중 누구에게도 쉬운 선택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월든을 읽으면서 삶의 핵심적인 부분이 무엇인가를 고민할 기회를 가졌다. 그러고 나자 내가 생각하는 중요한 가치에 좀 더 집중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었다. 시장경제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더라도, 불필요한 요소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소박한 삶, 그러한 삶에서 오는 평온, 마지막으로 스스로의 삶에 연민 없이 직면하는 용기를 가지기를 꿈꾼다. 삶과 인간, 나아가 자연을 더욱 소중히 하겠다는 마음 역시 샘솟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좋았던 점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월든 호숫가에서 소로우의 이야기를 듣는 이 며칠이 내겐 너무나 즐거운 시간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글을 완성하고 노트북을 닫으면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는 게 무척이나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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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8-12 2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월든도 먼지가 쌓였네요....축하드립니다 <월든>완독을!

베텔게우스 2018-08-12 22:48   좋아요 1 | URL
카알벨루치님 감사합니다~~! 인생책 목록에 한 권이 추가됐네요 ㅎㅎ

겨울호랑이 2018-08-15 18: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반인들이 소박한 삶을 사는 것이 어렵다는 현실이 참 아이러니라 생각되네요.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것이 더 어려움을 베텔게우스님의 글을 통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베텔게우스 2018-08-15 22:54   좋아요 1 | URL
ㅎㅎ 소로우에게 공을 돌립니다!! 정말 필요해서 소유하게 된 것인지, 아니면 과도한 욕심은 아니었는지 때론 자신의 삶을 돌아볼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겨울호랑이님, 편안한 밤 되세요^^

서니데이 2018-09-11 1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름이 계속될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에 지나간 것 같은 요즘입니다.
오늘은 구름 많은 날이지만, 요즘 날씨가 좋은 시기 같아요.
베텔게우스님, 기분 좋은 저녁시간 보내세요.^^

베텔게우스 2018-09-11 20:33   좋아요 1 | URL
네.. 서니데이님 말씀처럼 정말 지나고 보니 순간이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그땐 그렇게 더웠는데 말이죠?!? 날씨가 좋아서 기분이 너무 좋아요! 행복한 가을 보내세요~!!

한스푼의시간 2018-09-11 2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월든>을 이전에 한 번 읽고는 좋다는 생각만 했는데 리뷰를 보니 책장에 꽂혀 있는 이 책을 다시 한번 꺼내 찬찬히 느껴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네요^^ 잘 보고 갑니다~~~

베텔게우스 2018-09-11 22:31   좋아요 0 | URL
제 글을 읽고 책을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되셨다니 저로서도 정말 뿌듯합니다 감사합니다^^

2018-09-11 2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11 2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12 0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18-09-16 2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김석희 번역본이 있는 것 같은데, 나중에 다시 읽어보아야겠어요.
잘 읽었습니다. 베텔게우스님, 편안한 일요일 밤 되세요.^^

베텔게우스 2018-09-16 21:48   좋아요 1 | URL
네, 말씀하신 번역본도 나쁘지 않다고 들었어요~ 《월든》은 살짝 지루하긴 하지만 무지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족한 글 좋게 봐주셔서 감사드려요.^^
 
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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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로사회는 2010년 가을 독일에서 처음 출간되었다나오자마자 현지에서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고(5p), 이어 2012년 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본이 나왔다한국에서 역시 이 책은 상당한 반향을 얻었다국내 유력 일간지에서는 여러 편의 소개 기사가 실렸고많은 이들이 이 책 내용을 인용했다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는 피로사회가 출간된 그해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성과 경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우리나라 현실상 책의 주제가 많은 사람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책은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11p)는 이제는 유명해진 문장으로 시작한다그의 견해에 따르면항생제 발명 이전의 시대는 박테리아(세균)와 바이러스의 시대였다이들은 외부성과 부정성을 대표하는 것들로생물체의 내부에서 면역 반응을 일으키는 타자성을 지닌 존재다저자는 이를 사회를 해석하는 틀로 확장한다개인적 혹은 사회적 차원에서면역의 근본 특징은 부정성을 부정하여 자아를 관철하는 것이다따라서 나와 대비되는 이 확실한 존재로 드러난다냉전 시대의 진영 대립과 같이 명확한 동지와 적이 존재했다는 것이다반면 이질성이 실종된 현대에는 면역학적 패러다임이 더는 세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왜냐하면 이는 세계화 과정과 양립하기 어렵기 때문이다경계와 문턱이 사라져가는 21세기에는 세계가 점점 같아지고모두가 성과만을 추구한다인터넷과 실물 세계의 난교와도 같은 활발한 교류가 부정성이 설 자리를 잃게 한다이렇듯 이질성의 실종은 우리가 부정성이 많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 21세기의 신경성 질환들 역시 그 나름의 변증법을 따르고 있지만그것은 부정성의 변증법이 아니라 긍정성의 변증법이다그러한 질환은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된 병리적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7p) 부정성이 없으니 적도 없다적이 없으니 배척도 없기에 자신의 성격 또한 존재하지 않게 된다. ‘자아는 타자와 대립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정립’(88p)하기 때문이다개인은 그저 세계화의 과정에서 환경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주입되는 것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이는 환경결정론 속 종속된 개체와도 같다. ‘긍정성의 폭력은 적대성을 전제하지 않는다그것은 오히려 관용적이고 평화로운 사회에서 확산되며 그 때문에 바이러스성 폭력보다도 눈에 덜 띈다긍정성의 폭력이 깃드는 곳은 부정이 없는 동질적인 것의 공간적과 동지내부와 외부자아와 타자의 양극화가 일어나지 않는 공간이다.’(21p)

 

 한병철은 21세기 현재의 만연한 신경성 질환들이를테면 우울증소진증후군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경계성성격장애와 같은 신경성 질환들의 원인이 바로 이러한 부정성의 결여와 긍정성의 과잉이라고 지적한다즉 이로써 면역학적 시대를 지나 신경증적 시대가 도래하였다는 것이다과거에는 타자는 타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면역 반응의 대상이 되었는데현재에는 위험하지 않은 타자가 수용되는 세상다시 말해 부정성이 실종되고 긍정성만 남은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규율사회였던 근대와 구분하여 이러한 현대 사회를 성과사회라고 지칭한다앞서 언급한 신경증적 질환들은 성과사회적 질병이라고 부를 만한데이는 주로 부정성의 결여로 인해 나르시시즘적 인간이 된 개인의 심리적 요인에 기인하기 때문이다그리고 그것은 근본적으로는 시스템적인 긍정성의 폭력이 일으키는 성과사회의 폭력인데이로써 사회의 원자화와 파편화가 일어나 인간적 유대의 결핍을 가져온다는 것이다.(26p)

 

 성과 사회에서는 규율 사회의 복종적 주체가 성과주체로 변모한다이들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 경쟁이 유독 심한 편인 한국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우리는 이런 표현에 꽤 익숙하다. 대부분 거쳐 가는 고등학생 시절의 입시경쟁이 본격적인 경쟁의 출발점이다. 바로 이때부터 ‘죽을 힘으로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식의, 자기착취를 독려하는 메시지가 만연하다노력하지 않는 모습은 수치스러운 것으로 인식된다부모님이나 선생님책과 대중매체 할 것 없이 누구 좋으라고 공부하니너 좋으라고 공부하지!”, “10분만 더 공부하면 배우자 얼굴이 바뀐다” 같은 이른바 동기부여 메시지를 적나라하게 쏟아낸다유능한 사람멋진 사람이 되자는 것이 당대의 목표였다. 2000년대에는 자기계발서 열풍이 불었자기계발서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그래야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게 요지다.

 이러한 성과 사회가 열린 이유로 저자는 사회의 생산성 최대화 열망을 꼽는다규율은 생산성을 최대화하는 데 한계가 있지만현대에 새로운 규율로 작용하는 성과의 패러다임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이다.(25p) 그리고 이러한 성과의 패러다임이 사회의 원자화와 파편화를 만들고이것이 인간적 유대의 결핍을 초래하여 우울증을 초래하는 요인이 된다. ‘타자에게서 오는 폭력이 사라지는 대신 스스로 만들어낸 폭력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104p) 오늘날 전쟁으로 죽는 사람의 수보다 우울증과 그에 따른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의 수가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은 이러한 논의와 연관 지어 주목할 만하다.

 

 

 한편우울사회라는 또 다른 에세이가 책 안에 두 번째 저작으로 실려 있다. ‘이 글은 저자의 제안에 따라 피로사회에 개진된 생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강연 원고 우울사회를 번역한 것이다.’라는 우울사회 표지에 적혀 있는 문장이 나타내듯이앞부분과 유사하게 후기근대적 성과주체의 심리적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그에 앞서 한병철은 근대 규율적 주체의 심리를 살펴본다그는 규율적 주체는 명령과 금지로 이루어진 억압적 강제 장치라고 인간을 바라보는 프로이트의 심리적 기구를 틀로써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무의식이 필연적으로 부인과 심적 억압의 부정성과 결부된 개념이라고 할 때무의식이 없는 포스트프로이트적 자아그는 무의식을 두고 금지와 억압의 부정성이 지배하는 규율사회의 산물로서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그런 사회를 떠난 것이다.’(84p)라는 파격적인 견해를 피력한다더 이상 프로이트적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프로이트적 자아가 해내는 일이란 무엇보다도 의무의 이행’(84p)인데그와는 달리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의무적인 일에 매달리지 않’(86p)아서다. ‘복종의무 이행이 아니라 자유쾌락선호가 그의 원칙이다그가 노동에서 기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쾌락의 획득이다.’(86p) 그러나 타자로부터의 자유가 나르시시즘적 자기 관계로 전도되며이것이 오늘날 성과주체가 겪는 많은 심리적 장애의 원인이 된다고 보았다즉 타자로부터 자유를 얻었으나 역설적으로 그것이 발생시키는 나르시시즘적 자기 관계로 인해 새로운 문제인 심리적 장애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현대인의 필수적 조건이라고 여겨지는 멀티태스킹은, 진보라기보다는 퇴화라고 할 수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 멀티태스킹은 수렵자유구역의 동물들 사이에서도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습성’(30p)이라서다이를테면 식사하는 중에도 새끼들을 감시하고짝짓기 상대를 주시해야 하는 야생동물들은 주의를 다양한 활동에 분배하지 않을 수 없다인간도 멀티태스킹을 함으로써 인생의 다양한 부분에서 목표한 성과를 창출하기 위해 사색과 같은 몰입이 요구되는 활동에 관심을 배분할 수 없는 것이다.

 

 한병철은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삶이란 성공적인 공동의 삶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이지만,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은 날이 갈수록 생존 자체에 대한 관심에 밀려나고 있다.’(31-2p)고 우려한다이어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고 역설한다그러면서 인류의 문화는 성과 추구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며그 예로 춤을 든다. ‘춤은 성과의 원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사치’(33p)라는 것이는 철학자 조르주 바타유가 저주의 몫에서 말하는 소모적인 행위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인간의 실존은 어떤 면에서 보면 유용한 구체적 사물들로부터 인간의 성장(또는 생활)에 도움이 되는꼭 필요한 부분을 구분해낸다그러다가 절대적 필요성이 사라지면 인간은 더 이상 유용한 사물을 소망하지 않는데그때부터 인간의 실존은 포착할 수 없는 것자기 자신과 재화의 무익한 사용그리고 놀이를 찾는다."

_조르주 바타유조현경 옮김저주의 몫(문학동네, 2000), 116p.

 

 "번갈아 나타나는 엄격한 축적과 넉넉한 낭비는 에너지 사용에서 볼 수 있는 일상적 리듬이다낭비를 엄격하게 경계할 때에만 인간과 사회는 힘의 체계를 성장시킬 수 있다그러나 어느 시기에 이르면 성장은 한계에 부딪히며더 이상 축적이 불가능한 잉여의 부분은 소비되어야 한다."

_조르주 바타유조현경 옮김저주의 몫(문학동네, 2000), 223p.

 

 인용문 중 앞에 있는 것은 성과 추구 중에는 유용성과 관계가 없는 소모가 시작되지 못함을 말하며 한병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뒤의 글은 성장이 한계에 부딪힐 때 축적 불가능한 잉여가 소비됨을 말한다. 현대 사회는 유사 이래 물질적으로 가장 풍족하다. 그러나 바타유의 말대로 축적 불가능한 잉여의 소비가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과의 패러다임’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많은 성과를 위해 스스로를 착취한다따라서 이러한 사회에서는 놀이와 소비가 없다.

 

 ‘인간 전체가 하나의 성과기계가 되어 원활한 작동으로 최대의 성과를 산출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적 발전 경향에 제동을 걸 수 있는’(66p) 더 나은 미래 사회의 모습으로 저자는 피로사회를 제시한다.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67p)인데 비하여 피로사회의 피로는 ‘무위의 피로라는 것이다. ‘탈진의 피로는 긍정적 힘의 피로다그것은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간다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즉 무위의 피로다.’(71p) 한병철은 부정성에서 사색, 나아가 무위의 피로로 논의를 확장하며 규율 사회와 성과사회에 이어 피로사회가 도래하는 미래를 바라본다. 피로사회는 소속이나 친족관계에 의존하지 않는 공동체의 가능성’(70p)이 존재하는 열린 사회다.

 

 

 한편 피로사회가 출간된 지 8한국어판 출간으로부터 6년의 세월이 흘렀다과연 그동안 우리 사회는 어떻게 바뀌었을까최근 주목할 만한 사회적 흐름으로, YOLO워라밸소확행과 같은 삶을 즐기는 문화가 인기다이는 지금까지 오로지 성과를 추구하기 위하여 달려왔던 사회 속에서 한 발 떨어져 여유를 갖고 평온함을 되찾자는 움직임으로 보인다. 바타유식으로 말하면 '엄격한 축적'이 끝나고 나타나는 '넉넉한 낭비'다. 정책적으로는 지난달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되었다이는 지나친 성과주의의 패러다임이 가지는 한계를 인정하고 구성원들에게 충분한 여가를 보장하자는데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것으로 해석된다그간 우울증과 자살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고직장에 얽매여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쏟아져 왔다.

 한편출판계 흐름도 이를 반영한다. 자기 자신을 존중하고있는 그대로를 인정하자는 메시지를 전하는 책이 많아졌다는 점이 주목된다가령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하완, 2018), 『곰돌이 푸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곰돌이 푸 원작, 2018),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김수현, 2016), 『자존감 수업(윤홍균, 2016), 『어차피 다닐 거면 나부터 챙깁시다(불개미상회, 2018), 『지금 이대로 괜찮은 사람(박진영, 2018) 같은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성과에 앞서 개개인의 인간다운 삶을 먼저 찾자는 메시지에 독자들이 공감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말에 한 일간지에는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 한 달을 맞은 직장인들이 퇴근 후 무엇을 하는지를 취재한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그에 따르면 많은 이들이 퇴근 후 문화생활에 시간을 쏟는다고 한다.

 

 "퇴근 시간이 앞당겨지면 외국어·자격증 학원만 북적일 것이란 예상은 빗나갔다자기 계발보다는 취미 생활에 관심 갖는 직장인이 늘면서 '1인 1취미시대가 열렸다꾸준히 투자해야 하는 취미 생활을 할 만한 여건이 갖춰졌기 때문이다입사 과정에서 치열한 경쟁을 경험한 직장인들이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선호하는 것도 영향을 미쳤다."

 

_변희원백수진이해인저녁7… 김대리는 화가이과장은 피아니스트가 된다조선일보, 2018년 7월 28.

 

 다만 한병철이 타자성이 어느 수준까지 요구되는지를 언급한 점이 없다는 것에 다소 논란의 소지가 있다. ‘이질성은 아무런 면역 반응도 일으키지 않는 차이로 대체’(13p)되고, ‘차이에는 말하자면 격렬한 면역 반응을 촉발하는 가시가 빠져 있다타자성 역시 날카로움을 잃고 상투적인 소비주의로 전락’(13p)하였다고 그는 말하며 타자성과 이질성의 부재한 현실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를 타자성을 절대화하자는 주장이라는 식의 지나친 해석은 경계함이 옳다. 저자가 '피로사회'적 공동체, 즉 인간답게 공존하는 삶이 가능한 사회를 대안으로 제시할 뿐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극단적인 이질성이 전쟁을 촉발하고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따라서 허용 가능한 타자성은 평화와 양립할 수 있는 수준에 그쳐야 할 것이다.

 한병철은 또한 분노의 순기능적 측면을 들어 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그에 따르면,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오늘날은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간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무분별한 분노의 폭력적인 측면 또한 경시해서는 안 된다. 책을 읽는 내내 나의 주요한 관심사 중 하나는 한병철이 주장하는 부정성이 과연 평화적으로 추구될 수 있는지였다과한 주장으로 번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성장과 성과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인류가 지속 가능한 정도의 성과 추구는 무위와 사색에 필수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아마 그의 견해는 과도한 성과 추구를 경계하고 사색적 삶과의 균형을 촉구하는 의미 정도로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일종의 워라밸’ 강조다.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서 6년이란 세월은 길다. 이제까지 살펴본 위와 같은 변화가, 사회가 점차 성과사회적 모습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 또한 긍정성 과잉의 시대에 부정성을 역설함으로써, 한병철의 철학은 세계가 인간다운 삶이 가능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곳이 되는 데 크게 일조했고 생각한다그는 날카로운 철학으로 세계를 진단하여 사회의 긍정화 흐름에 제동을 걸고 부정성과 사색적 삶의 부활을 역설했다. 그의 철학을 이어 인간적인 삶사색적인 삶을 향한 여정도 지속하여야 할 것이다.


2018. 8. 9. (목) 00:17 최종 수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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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마음 - 문예 세계문학선 014 문예 세계문학선 14
나쓰메 소세키 지음, 오유리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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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마음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또 있을까? 굳이 ‘열 길 물속은 알아도…’로 시작하는 오래된 속담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타인과 함께 살아가면서, 혹은 뉴스를 보면서, 심지어는 스스로 마음을 들여다볼 때도 사람의 마음은 참 알 수 없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된다. 그토록 여전히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진 것이 마음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이름부터가 ‘마음’이란다. 어떤 이야기를 전개해서 마음에 관한 문제를 풀어갈지 무척 궁금해서, 제목만 들었을 때부터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그야말로 나에겐 ‘마음’에 쏙 든 이름이었다. 작가 나쓰메 소세키는 소설을 크게 세 편으로 나누고 1‧2편과 3편에 각각 다른 서술자를 내세워, 이들 두 주인공의 만남과 ‘선생님’의 과거, 그리고 그에 따른 인물들의 내면에 특히 큰 비중을 두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제목이 시사하듯이 작중 인물의 심리 묘사는 상당히 구체적이고 정밀하다.

 '선생님’은 도쿄 제국 대학 출신의, 이른바 엘리트 지식인인 중년의 남성이다. 그렇지만 세상에 나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세상과 담을 쌓고 집에 칩거한 채 아내와 단둘이 살아간다. 그는 젊은 시절 작은아버지의 배신과 친구의 자살로 큰 충격을 겪고 고독하게 살아간다. 방학을 맞아 한 해안 마을에서 여름을 보내던 ‘나’는 우연히 ‘선생님’을 만나고 그와 가까워지게 된다. ‘나’는 '선생님'의 삶과 사상에 매료되어 그와 더욱 가까워지고 싶어 하지만, ‘선생님’은 항상 일정한 거리를 두고 ‘나’를 대한다. ‘나’는 그 이유는 몰랐지만, 여전히 관계를 지속해간다. 그러던 중에, 대학을 졸업한 ‘나’는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고향에 내려가게 된다. 이때 ‘나’는 편지로 보내진 ‘선생님’의 유서를 받는다. 그리하여 3편은 '선생님'이 ‘나’로 등장하여 유서에서 자신의 과거를 밝히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선생님’은 염세주의적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고독한 인간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염세주의자는 대개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품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 쉽사리 마음을 열지 못한다. 처음에는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세상에 다가서지만, 도리어 연약한 마음에 여러 상처를 입는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내면에 깊이 침잠하게 되는 것이다. ‘선생님’의 이러한 태도는 그의 유서에 나오는 다음의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다.

 “작은아버지에게 배신당했을 때 사람은 믿을 게 못 된다는 점을 절실히 느낀 건 사실이지만, 그건 타인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이지, 내 자신에게만큼은 그때까지만 해도 확실한 믿음이 있었네.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나 자신은 멋진 인간이라는 신념이 마음속 어딘가에 있었단 말이지. 그 믿음이 K로 인해 무참히 깨져버리고 나 자신도 작은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내 마음은 심하게 흔들리게 됐네. 인간들에게 등을 돌린 나는 결국 나 자신도 저버리고 닫힌 공간에 날 가두게 된 것이지.”(329p)

 ‘선생님’은 세상에 대한 환멸을 넘어 자기 자신조차 증오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내가 앞서 제시한 염세주의자의 모습보다 더 정도가 심하다. 즉 인간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고 믿을 것은 자기 자신뿐이라고 생각했던 ‘선생님’은, 어떤 계기로 인해서 최후의 피난처인 자기 자신조차도 믿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결국 그는 인간으로서의 모든 자유를 잃어버린 채 ‘닫힌 공간’에 자신을 가두었다.

 그런데도 작품을 읽어나가며 ‘선생님’에게 공감하게 된 것은, 나 역시 '선생님'과 비슷한 태도를 가질 때가 종종 있어서다. 나 자신을 믿지 못하는 태도, 스스로에 대한 비난, 인간에 대한 환멸…….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뒤표지를 보니, 본 작품을 두고 "한 인간의 ‘아집'을 절제된 투명한 문체로 써나간 수작’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나는 작중 인물인 ‘선생님’에게 감정을 이입하며 읽었는데, 이러한 그의 태도를 두고 아집이라고 평한 의견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아집이 가진 부정적인 이미지로 인해 자신을 변호해보고 싶다는 오기가 생겼다. 저런 삶의 태도를 아집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그래서 작품을 다 읽은 뒤 ‘선생님’의 태도, 더불어 나 자신의 관점을 한번 돌아보게 되었다.

 사전에는 ‘아집(我執)’을 ‘자기중심의 좁은 생각에 집착하여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입장을 고려하지 아니하고 자기만을 내세우는 것(출처: 표준국어대사전)’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정의를 알고 나자 ‘선생님’의 태도를 아집에 사로잡힌 것이라고 충분히 평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선생님’은 당대의 지식인이라 할 만한 인물이었고, 자기 생각과 행동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는 절친한 친구 'K'를 자신이 사는 하숙집에 들이고자 한 이유를 보면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수많은 서적들로 성벽을 쌓고 그 안에 틀어박혀 있던 K의 마음이 점차 열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내게 있어 무엇보다 기쁜 일이었네. 난 처음부터 그 목적으로 일을 진행했으니까 말이야.’(248p) 그는 ''K'를 설득할 때 그가 고집하는 것은 맹신에 불과하다는 걸 반드시 깨우쳐주고 싶었네.’(244p) 라며 유서에서 그때를 회고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마저도 친구인 ‘K’ 못지않은 아집에 빠져 있다는 것을 ‘선생님’은 알지 못했던 것 같다. 그것은 타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자신의 의도대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아집이다. 그는 ‘K’의 비관적인 태도와 처지를, 그를 자신의 하숙집에 들임으로써 바꿀 수 있으리라고 여겼다. 처음에는 강한 믿음에 기반한 선의로 시작하였으나, ‘선생님’은 그로써 생겨난 사건으로 큰 죄책감에 빠져 평생을 지내다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선의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확신은 무섭다. 한 치 앞도 모르는 인간이 가진 직관과 정보에 의한 판단으로 어떤 결과가 나올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래서 이 작품은 비극적이다.

 “아무튼 날 너무 믿지 말게. 곧 후회할 테니까. 그리고 자신이 기만당했다는 것에 대한 보복으로 끔찍한 복수를 하게 될 테니까.”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훗날 그런 모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지금의 존경을 물리고 싶네. 나는 지금보다 더 지독한 외로움을 참기보다 차라리 외로운 지금의 상태로 버텨가고 싶네. 자유, 독립 그리고 나 자신으로 가득 찬 현대에 태어난 우리는 그 대가로 모두가 이 외로움을 맛봐야겠지.”
 나는 이 생각을 신앙처럼 품고 계신 선생님에게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몰랐다.(49p)

 ‘선생님’은 자신이 느끼는 외로움을 자신에게 주어진 대가로 받아들이는 생각을 일관되게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로서는 ‘선생님’의 이러한 태도가 단순한 ‘아집’이라고만은 생각되지 않는다. 그는 순수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끝까지 뜻대로 일관되게 유지하고자 했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댐으로써 일관된 삶을 이루고자 했다. 그렇게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큰 죄를 지은 사람으로서 합당한 모습이라고 확신했다. ‘작은아버지’로 대표되는 그토록 싫어하던 인간의 모습, 제 잘못을 의식조차 못 하는 그들과 결코 같은 길을 걸어가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그는 끝까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오로지 ‘선생님’만을 믿고 살아왔던, 홀로 남겨질 ‘사모님’에게 털어놓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선생님의 결정은 다른 결과에 대한 가능성이 원천적으로 차단되는 극단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유서에서 자신의 처지에서 다른 선택지는 고려할 수조차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과거를 속 시원히 아내에게 털어놓으려 했던 적도 몇 번 있었네. 허나 그럴 때면 반드시 그다음 순간에 나 이외의 어떤 힘이 나타나 고백하고자 하는 날 억누르는 거야.’(328p)

 ‘내가 이 감옥 안에 더 이상 틀어박혀 있을 수 없게 됐을 때, 그리고 어찌해도 그 감옥을 깨부술 수 없을 때 내가 취할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은 단 하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지. 자네는 어째서 그것만이 길이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언제나 내 마음을 옥죄어오던 그 불가사의한 힘은 모든 면에서 나의 활동을 차단하면서도 죽음으로 가는 길만큼은 갈 수 있도록 날 놓아주었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겠나?’(336-7p)

 이 작품을 이해할 때 ‘인간은 이기적 존재’라고 가정하는 ‘합리주의적 인간관’을 적용한다면, 그의 죽음은 쉽게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분명 그는 모든 사실을 홀로 간직한 채, 모른 척 아내와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모님이 돌아가시고는 그의 과거를 아는 사람도 더는 세상에 없다. 그런데도 그가 자살로써 생을 마감한 것은 일견 이해할 수 없는 행동처럼 보인다. 그가 말하는 ‘언제나 내 마음을 옥죄어오던 그 불가사의한 힘’이란 대체 무엇일까?

 우리가 위의 유서 내용에서 가장 쉽게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아마 ‘양심’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잘못된 행동을 하였을 때 흔히 ‘양심이 찔린다’고 표현하는 마음속의 어떤 것 말이다. 윤리적인 차원에서 남들보다 더 결벽성을 가진 사람을 우리는 종종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에게 매우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보통 이상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가령 누군가는 특정한 사건을 계기로 인생관을 완전히 뒤집고, 다른 무언가에 몰두하며 새로운 인생의 의미를 발견해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이 그와 같은 선택을 했던 것은 그의 타고난 성향, 그리고 거기에 더해서 자신 안에 확립된 가치관이 매우 확고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한편으로는, 그리스 비극을 참조하여 그의 선택을 분석해볼 수 있다. 그의 유서에는 ‘불가사의한 힘,’ ‘운명’과 같은 말이 꾸준히 언급되는데, 이에 따르면 다른 어떤 선택도 그로서는 불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마음』은 일종의 운명극(주인공의 모든 행위를 운명이나 숙명으로 돌려 파멸과 몰락으로 이끌어가는 희곡 작품. 출처: 표준국어대사전)적 성격을 가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분석은 다분히 문학적이어서, 논리적 원인을 규명하기에는 거의 효용이 없다고 하겠다. 더구나 현대에는 고대 그리스와 같이 지배적인 신조차 없다. 그렇게 보면 인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로운 존재로서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때때로 문학 작품 밖의 실제 삶 속에서 누군가에게 말 못할 '운명'과도 같은 해석하기 어려운 일들을 경험하곤 한다. 물론 어떤 현상에 대한 해석은 어느 정도는 믿음의 문제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해석이 다양하다는 것은 결국 과학의 시대라고 하는 현대에조차도 인간이 갖가지 현상의 '정확한' 원인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지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마음’ 역시 여전히 그 실체와 작용 방식이 완전하게 규명되지 않고 있다. 다만 현대 뇌과학, 심리학 등의 학문 영역에서는 뇌를 연구 대상으로 하여 인간 마음의 작동 기제를 규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런 추세로 보면 여러 문학 작품이 뇌과학적 관점에서 새롭게 읽힐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마음의 작동 기제가 어떻든 소세키의 『마음』이 백여 년이 지나도록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죄책감의 문제’와 ‘복잡한 인간의 내면 심리’를 세밀하고 고백적인 문체로 다루었기 때문이 아닐까.

2018. 8. 7. (화) 23:44 최종 수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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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
김숨 지음 / 현대문학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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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강점기는 일본의 국가주의에 힘없는 조선 땅과 조선 국민이 무참히 짓밟혔던 시기이다. 36년 동안 무수히 많은 수탈과 폭력·인권 유린이 자행되었고 조선인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다. 일제는 오로지 국가의 전승(戰勝)을 위해 개인을 철저히 도구화하였다. 여러 가지 끔찍한 일들이 벌어졌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가 인간으로서 도저히 참고 넘어갈 수 없는 일이 ‘위안부 강제 동원’일 것이다. 나는 인간으로서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한다. 더 이상 이런 국가적 폭력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작품 속 ‘그녀(윤금실)’는 열세 살 어린 나이에 만주 위안소로 끌려갔다. 이유는 몰랐다. 동의 여부도 묻지 않았다. 그렇게 일본군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끌려간 어린 여성은 무려 20만 명에 달했다. 그들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사랑하는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 했다.

 열세 살에서 많아야 열여섯 살. 오늘날 태어났더라면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다니고 있을 나이다. 몸과 마음이 채 다 자라지 않아 영양과 건강이 무엇보다 중요한 때다. 그런 나이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은 그들의 심정이 어땠을지 감히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월경을 시작조차 않은 어린 여성도 있었으나 그런 것은 동원에 고려되지도 않았다. ‘소녀들의 몸에는 보통 하루에 15명 정도가 다녀갔다. 일요일에는 50명도 넘게 다녀갔다(87p).’ 누군가는 ‘불두덩에 대고 성냥을 그어댔다(44p).' 그렇게 십여 년을 보낸 뒤, 살아남은 이들은 광복을 맞아 조선 땅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잊혀졌다. 아니면 몸을 버리고 왔다며 손가락질 당하거나, 큰오빠가 죽었는데 울지도 않는다며 비난받아야 했다. 감정이 소진되어 눈물조차 나지 않는 것을 모른 채 말이다. 무슨 일이 있었다고 누구에게 털어 놓을 분위기는 절대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끌려가서 어떻게 살다 왔는지 밝힐 수조차 없었고, 홀로 엄청난 상처를 숨기고 살아야 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항상 전전긍긍하면서 외롭게 살아야 했다. ‘그녀’ 역시 믿고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이, 심지어 자식도 하나 없이 외롭게 한 많은 삶을 아흔 셋까지 살아왔다.

 그런 한 많은 그녀지만,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경험할 때 신을 느낀다. ‘심지어 그녀는 신이 두렵기까지 하다(56p).’ 항상 움츠리고 살아온 그녀가 역설적으로 신을 가장 두려워한다. 정작 악한 이들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존재임에도 말이다. 또 그녀는 ‘신에게 얼굴이 있다면 늙지 않을 것 같다. 신의 얼굴이라서 늙지 않는 게 아니라, 더는 늙을 수 없을 만큼 늙은 얼굴이라서(24p)' 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아마 사람으로서 상상하지 못할 ‘인간의 끝’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같은 인간으로서, 짐승 같았던 이들의 행동이 초래할지 모를 신의 처벌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겨우 열세 살이던 자신을 하루아침에 만주에 데려다 놓은 것도 인간이었다(204p).' 물론 잔인한 일본 국가주의의 폭정 속에서도 사람답다고 말할 수 있는 이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분선의 고향집으로 전보를 부쳐 주고 고향에서 온 전보를 가져다 준 야전 우체국 국장, 전투를 앞두고 울던 일본 군인……. 심지어 향숙은 일본 군인들을 동정하기도 한다.

 “일본 군인들도 우리처럼 부모형제하고 생이별하고, 목숨을 버리러 만주까지 왔대. 어제는 내가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우니까 그러더라. 죽지 말라고…… 어떻게든 살아서 엄마가 있는 조선에 돌아가라고…….”(174p)

 작품 말미에서 한 생존자 할머니가 TV에 소개된다. 그녀는 지금까지 소설 ‘부활’ 만 여섯 번을 읽었다고 했다. 그녀는 책을 펼쳐 몇 페이지를 방송사 여자에게 읽어준다.

 “몇십만의 인간이 한곳에 모여 자그마한 땅을 불모지로 만드려고 갖은 애를 썼어도, 그 땅에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게 온통 돌을 깔아 버렸어도, 그곳에서 싹트는 풀을 모두 뽑아 없앴어도, 검은 석탄과 석유로 그슬어놓았어도, 나무를 베어 쓰러뜨리고 동물과 새들을 모두 쫓아냈어도, 봄은 역시…… 찾아들었다. 따스한 태양의 입김은 뿌리째 뽑힌 곳이 아니라면 어디에서고 만물을 소생시켜…… 틈새에서도 푸른 봄빛의 싹이 돋고……”(191p)

 ‘누굴까? 누가 새끼 고양이를 양파망에서 꺼내 놓아주었을까?(205p)' 나는 고양이를 꺼내준 이가 누구인지 모른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가 인간이라는 것이다. 생명을 해치는 이가 있으면, 구하는 이도 있다. 망치는 인간이 있으면, 회복시키는 인간도 있다.

 일본 제국은 식민지 국가들에 극악무도한 행위를 저질렀다. 물론 한 나라에 역사적 과오가 아예 없기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피해자가 있고, 기록이 남았다. 일본 제국을 계승한 현재의 일본이 ‘망치는 나라’를 벗어나 ‘회복시키는 나라’가 되고 싶다면, 대한민국과 위안부(성노예) 피해자분들께 진심으로 사과해야 한다. 국가적 폭력 안에서, 국가보다 존엄한 한 명 한 명의 인간이 무참히 착취당하지 않았던가. 피해자 할머니들이 살아 계시는 지금이 일본이 인간의 얼굴을 한 나라로 역사에 기록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그 기회는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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