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평점 :
『피로사회』는 2010년 가을 독일에서 처음 출간되었다. 나오자마자 현지에서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고(5p), 이어 2012년 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본이 나왔다. 한국에서 역시 이 책은 상당한 반향을 얻었다. 국내 유력 일간지에서는 여러 편의 소개 기사가 실렸고, 많은 이들이 이 책 내용을 인용했다. 인터넷서점 ‘알라딘’에서는 『피로사회』가 출간된 그해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성과 경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우리나라 현실상 책의 주제가 많은 사람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책은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11p)는 이제는 유명해진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항생제 발명 이전의 시대는 박테리아(세균)와 바이러스의 시대였다. 이들은 ‘외부성’과 ‘부정성’을 대표하는 것들로, 생물체의 내부에서 면역 반응을 일으키는 ‘타자성’을 지닌 존재다. 저자는 이를 사회를 해석하는 틀로 확장한다. 개인적 혹은 사회적 차원에서, 면역의 근본 특징은 부정성을 부정하여 자아를 관철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와 대비되는 ‘적’이 확실한 존재로 드러난다. 냉전 시대의 진영 대립과 같이 명확한 동지와 적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반면 이질성이 실종된 현대에는 면역학적 패러다임이 더는 세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는 세계화 과정과 양립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경계와 문턱이 사라져가는 21세기에는 세계가 점점 같아지고, 모두가 성과만을 추구한다. 인터넷과 실물 세계의 ‘난교’와도 같은 활발한 교류가 부정성이 설 자리를 잃게 한다. 이렇듯 ‘이질성의 실종은 우리가 부정성이 많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 21세기의 신경성 질환들 역시 그 나름의 변증법을 따르고 있지만, 그것은 부정성의 변증법이 아니라 긍정성의 변증법이다. 그러한 질환은 긍정성의 과잉에서 비롯된 병리적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7p) 부정성이 없으니 적도 없다. 적이 없으니 배척도 없기에 자신의 성격 또한 존재하지 않게 된다. ‘자아는 타자와 대립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정립’(88p)하기 때문이다. 개인은 그저 세계화의 과정에서 환경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주입되는 것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환경결정론 속 종속된 개체와도 같다. ‘긍정성의 폭력은 적대성을 전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관용적이고 평화로운 사회에서 확산되며 그 때문에 바이러스성 폭력보다도 눈에 덜 띈다. 긍정성의 폭력이 깃드는 곳은 부정이 없는 동질적인 것의 공간, 적과 동지, 내부와 외부, 자아와 타자의 양극화가 일어나지 않는 공간이다.’(21p)
한병철은 21세기 현재의 만연한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소진증후군,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경계성성격장애와 같은 신경성 질환들의 원인이 바로 이러한 부정성의 결여와 긍정성의 과잉이라고 지적한다. 즉 이로써 면역학적 시대를 지나 신경증적 시대가 도래하였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타자는 타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면역 반응의 대상이 되었는데, 현재에는 위험하지 않은 타자가 수용되는 세상, 다시 말해 부정성이 실종되고 긍정성만 남은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규율사회였던 근대와 구분하여 이러한 현대 사회를 ‘성과사회’라고 지칭한다. 앞서 언급한 신경증적 질환들은 성과사회적 질병이라고 부를 만한데, 이는 주로 부정성의 결여로 인해 나르시시즘적 인간이 된 개인의 심리적 요인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근본적으로는 시스템적인 긍정성의 폭력이 일으키는 성과사회의 폭력인데, 이로써 사회의 원자화와 파편화가 일어나 인간적 유대의 결핍을 가져온다는 것이다.(26p)
성과 사회에서는 규율 사회의 복종적 주체가 성과주체로 변모한다. 이들은 ‘자기 자신을 경영하는 기업가’다. 경쟁이 유독 심한 편인 한국에서 자라고 교육받은 우리는 이런 표현에 꽤 익숙하다. 대부분 거쳐 가는 고등학생 시절의 입시경쟁이 본격적인 경쟁의 출발점이다. 바로 이때부터 ‘죽을 힘으로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식의, 자기착취를 독려하는 메시지가 만연하다. 노력하지 않는 모습은 수치스러운 것으로 인식된다. 부모님이나 선생님, 책과 대중매체 할 것 없이 “누구 좋으라고 공부하니? 너 좋으라고 공부하지!”, “10분만 더 공부하면 배우자 얼굴이 바뀐다” 같은 이른바 동기부여 메시지를 적나라하게 쏟아낸다. 유능한 사람, 멋진 사람이 되자는 것이 당대의 목표였다. 2000년대에는 자기계발서 열풍이 불었다. 자기계발서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게 요지다.
이러한 성과 사회가 열린 이유로 저자는 사회의 생산성 최대화 열망을 꼽는다. 규율은 생산성을 최대화하는 데 한계가 있지만, 현대에 새로운 규율로 작용하는 성과의 패러다임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이다.(25p) 그리고 이러한 ‘성과의 패러다임’이 ‘사회의 원자화와 파편화’를 만들고, 이것이 인간적 유대의 결핍을 초래하여 ‘우울증을 초래하는 요인’이 된다. ‘타자에게서 오는 폭력이 사라지는 대신 스스로 만들어낸 폭력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104p) 오늘날 전쟁으로 죽는 사람의 수보다 우울증과 그에 따른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의 수가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은 이러한 논의와 연관 지어 주목할 만하다.
한편, 우울사회라는 또 다른 에세이가 책 안에 두 번째 저작으로 실려 있다. ‘이 글은 저자의 제안에 따라 『피로사회』에 개진된 생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강연 원고 「우울사회」를 번역한 것이다.’라는 우울사회 표지에 적혀 있는 문장이 나타내듯이, 앞부분과 유사하게 후기근대적 성과주체의 심리적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그에 앞서 한병철은 근대 규율적 주체의 심리를 살펴본다. 그는 규율적 주체는 ‘명령과 금지로 이루어진 억압적 강제 장치’라고 인간을 바라보는 ‘프로이트의 심리적 기구’를 틀로써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무의식이 필연적으로 부인과 심적 억압의 부정성과 결부’된 개념이라고 할 때, 무의식이 없는 ‘포스트프로이트적 자아’다. 그는 무의식을 두고 ‘금지와 억압의 부정성이 지배하는 규율사회의 산물로서,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그런 사회를 떠난 것이다.’(84p)라는 파격적인 견해를 피력한다. 더 이상 프로이트적 사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프로이트적 자아가 해내는 일이란 무엇보다도 의무의 이행’(84p)인데, 그와는 달리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의무적인 일에 매달리지 않’(86p)아서다. ‘복종, 법, 의무 이행이 아니라 자유, 쾌락, 선호가 그의 원칙이다. 그가 노동에서 기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쾌락의 획득이다.’(86p) 그러나 ‘타자로부터의 자유’가 나르시시즘적 자기 관계로 전도되며, 이것이 ‘오늘날 성과주체가 겪는 많은 심리적 장애의 원인’이 된다고 보았다. 즉 타자로부터 자유를 얻었으나 역설적으로 그것이 발생시키는 나르시시즘적 자기 관계로 인해 새로운 문제인 심리적 장애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현대인의 필수적 조건이라고 여겨지는 멀티태스킹은, 진보라기보다는 퇴화라고 할 수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 ‘멀티태스킹은 수렵자유구역의 동물들 사이에서도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습성’(30p)이라서다. 이를테면 식사하는 중에도 새끼들을 감시하고, 짝짓기 상대를 주시해야 하는 야생동물들은 주의를 다양한 활동에 분배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도 멀티태스킹을 함으로써 인생의 다양한 부분에서 목표한 성과를 창출하기 위해 사색과 같은 몰입이 요구되는 활동에 관심을 배분할 수 없는 것이다.
한병철은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삶이란 ‘성공적인 공동의 삶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이지만,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은 날이 갈수록 생존 자체에 대한 관심에 밀려나고 있다.’(31-2p)고 우려한다. 이어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면서 인류의 문화는 성과 추구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그 예로 춤을 든다. ‘춤은 성과의 원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사치’(33p)라는 것. 이는 철학자 조르주 바타유가 『저주의 몫』에서 말하는 ‘소모적인 행위’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인간의 실존은 어떤 면에서 보면 유용한 구체적 사물들로부터 인간의 성장(또는 생활)에 도움이 되는, 꼭 필요한 부분을 구분해낸다. 그러다가 절대적 필요성이 사라지면 인간은 더 이상 ’유용한 사물‘을 소망하지 않는데, 그때부터 인간의 실존은 포착할 수 없는 것, 자기 자신과 재화의 무익한 사용, 그리고 놀이를 찾는다."
_조르주 바타유, 조현경 옮김, 『저주의 몫』(문학동네, 2000), 116p.
"번갈아 나타나는 엄격한 축적과 넉넉한 낭비는 에너지 사용에서 볼 수 있는 일상적 리듬이다. 낭비를 엄격하게 경계할 때에만 인간과 사회는 힘의 체계를 성장시킬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시기에 이르면 성장은 한계에 부딪히며, 더 이상 축적이 불가능한 잉여의 부분은 소비되어야 한다."
_조르주 바타유, 조현경 옮김, 『저주의 몫』(문학동네, 2000), 223p.
인용문 중 앞에 있는 것은 성과 추구 중에는 유용성과 관계가 없는 소모가 시작되지 못함을 말하며 한병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뒤의 글은 성장이 한계에 부딪힐 때 축적 불가능한 잉여가 소비됨을 말한다. 현대 사회는 유사 이래 물질적으로 가장 풍족하다. 그러나 바타유의 말대로 축적 불가능한 잉여의 소비가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과의 패러다임’에는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많은 성과를 위해 스스로를 착취한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에서는 놀이와 소비가 없다.
‘인간 전체가 하나의 성과기계가 되어 원활한 작동으로 최대의 성과를 산출할 것을 요구하는 사회적 발전 경향에 제동을 걸 수 있는’(66p) 더 나은 미래 사회의 모습으로 저자는 ‘피로사회’를 제시한다.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67p)인데 비하여 피로사회의 피로는 ‘무위의 피로’라는 것이다. ‘탈진의 피로는 긍정적 힘의 피로다. 그것은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간다.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71p) 한병철은 부정성에서 사색, 나아가 무위의 피로로 논의를 확장하며 규율 사회와 성과사회에 이어 ‘피로사회’가 도래하는 미래를 바라본다. 피로사회는 ‘소속이나 친족관계에 의존하지 않는 공동체의 가능성’(70p)이 존재하는 열린 사회다.
한편 피로사회가 출간된 지 8년, 한국어판 출간으로부터 6년의 세월이 흘렀다. 과연 그동안 우리 사회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최근 주목할 만한 사회적 흐름으로, YOLO‧워라밸‧소확행과 같은 삶을 즐기는 문화가 인기다. 이는 지금까지 오로지 성과를 추구하기 위하여 달려왔던 사회 속에서 한 발 떨어져 여유를 갖고 평온함을 되찾자는 움직임으로 보인다. 바타유식으로 말하면 '엄격한 축적'이 끝나고 나타나는 '넉넉한 낭비'다. 정책적으로는 지난달 주 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되었다. 이는 지나친 성과주의의 패러다임이 가지는 한계를 인정하고 구성원들에게 충분한 여가를 보장하자는데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것으로 해석된다. 그간 우울증과 자살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고, 직장에 얽매여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쏟아져 왔다.
한편, 출판계 흐름도 이를 반영한다. 자기 자신을 존중하고,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자는 메시지를 전하는 책이 많아졌다는 점이 주목된다. 가령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하완, 2018), 『곰돌이 푸,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아』(곰돌이 푸 원작, 2018),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김수현, 2016), 『자존감 수업』(윤홍균, 2016), 『어차피 다닐 거면 나부터 챙깁시다』(불개미상회, 2018), 『나, 지금 이대로 괜찮은 사람』(박진영, 2018) 같은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성과에 앞서 개개인의 인간다운 삶을 먼저 찾자는 메시지에 독자들이 공감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말에 한 일간지에는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 한 달을 맞은 직장인들이 퇴근 후 무엇을 하는지를 취재한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많은 이들이 퇴근 후 문화생활에 시간을 쏟는다고 한다.
"퇴근 시간이 앞당겨지면 외국어·자격증 학원만 북적일 것이란 예상은 빗나갔다. 자기 계발보다는 취미 생활에 관심 갖는 직장인이 늘면서 '1인 1취미' 시대가 열렸다. 꾸준히 투자해야 하는 취미 생활을 할 만한 여건이 갖춰졌기 때문이다. 입사 과정에서 치열한 경쟁을 경험한 직장인들이 '소확행'(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선호하는 것도 영향을 미쳤다."
_변희원, 백수진, 이해인, 「저녁7시… 김대리는 화가, 이과장은 피아니스트가 된다」, 『조선일보』, 2018년 7월 28일.
다만 한병철이 타자성이 어느 수준까지 요구되는지를 언급한 점이 없다는 것에 다소 논란의 소지가 있다. ‘이질성은 아무런 면역 반응도 일으키지 않는 차이로 대체’(13p)되고, ‘차이에는 말하자면 격렬한 면역 반응을 촉발하는 가시가 빠져 있다. 타자성 역시 날카로움을 잃고 상투적인 소비주의로 전락’(13p)하였다고 그는 말하며 타자성과 이질성의 부재한 현실을 지적한다. 그러나 이를 타자성을 절대화하자는 주장이라는 식의 지나친 해석은 경계함이 옳다. 저자가 '피로사회'적 공동체, 즉 인간답게 공존하는 삶이 가능한 사회를 대안으로 제시할 뿐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극단적인 이질성이 전쟁을 촉발하고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허용 가능한 타자성은 평화와 양립할 수 있는 수준에 그쳐야 할 것이다.
한병철은 또한 분노의 순기능적 측면을 들어 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그에 따르면, ‘분노는 어떤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오늘날은 분노 대신 어떤 심대한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짜증과 신경질만이 점점 더 확산되어간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무분별한 분노의 폭력적인 측면 또한 경시해서는 안 된다. 책을 읽는 내내 나의 주요한 관심사 중 하나는 한병철이 주장하는 부정성이 과연 평화적으로 추구될 수 있는지였다. 과한 주장으로 번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성장과 성과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인류가 지속 가능한 정도의 성과 추구는 무위와 사색에 필수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아마 그의 견해는 과도한 성과 추구를 경계하고 사색적 삶과의 균형을 촉구하는 의미 정도로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일종의 ‘워라밸’ 강조다.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서 6년이란 세월은 길다. 이제까지 살펴본 위와 같은 변화가, 사회가 점차 성과사회적 모습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 또한 긍정성 과잉의 시대에 ‘부정성’을 역설함으로써, 한병철의 철학은 세계가 인간다운 삶이 가능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곳이 되는 데 크게 일조했고 생각한다. 그는 날카로운 철학으로 세계를 진단하여 사회의 긍정화 흐름에 제동을 걸고 부정성과 사색적 삶의 부활을 역설했다. 그의 철학을 이어 인간적인 삶, 사색적인 삶을 향한 여정도 지속하여야 할 것이다.
2018. 8. 9. (목) 00:17 최종 수정함.